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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31일 (화) 15:52 기준 최신판
서기 550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당시 강역. | 서기 867년, 미하일 3세 당시 강역. | 서기 1025년, 바실리우스 2세 당시 강역. |
서기 1081년 경, 알렉시오스 1세 당시 강역. | 서기 1180년, 마누엘 1세 당시 강역. | 서기 1215년, 쎄오도로스 1세 당시 강역. |
서기 1263년, 미하일 8세 당시 강역. | 서기 1400년경, 마누일 2세 당시 강역. | 서기 1450년, 콘스탄티노스 11세 당시 강역. |
1 성립과 발전
1.1 정치와 군사 체제
고대 로마 제국 말기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305년) 시대를 거치면서 이미 황제에게 권력이 집중되었고, 이는 고스란히 제국에도 계승되었다. 제국의 황제는 당시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면 엄청난 권력을 누렸으며 때문에 권력 다툼도 심각했다. 그러나 제국은 점차 봉건화 되었으며, 11세기 이후 동로마에는 서유럽의 장원제도와 유사한 모양의 봉건제가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동로마는 철저한 전제군주제와 그에 수반되는 방대하고 효율적인 중앙집권적 관료제 형태로 구성되었다. 제국은 5세기경, 슬라브와 북방 기마민족들이 떼거리로 남하해오고, 동방에서 처음에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 후에는 이슬람 왕조들에 맞서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했다. 헤라클리우스(이라클리오스) 황제(재위 610~641년)의 시대, 사산 왕조와의 치열한 전쟁을 벌이면서 동로마 제국은 군사력의 보강을 위해 테마 제도를 운영하게 된다. 이미 그 전부터 유사한 체제가 일부 지역에 있었고 공식적으론 콘스탄스 2세가 제정하였으며, 일종의 둔전제(屯田制)이자 군관구제인 테마 제도는 11세기 말 동로마의 군사력이 붕괴되기 전까지 동로마의 가장 중요한 방위체제였다.
위에서 말한 노바 로마, 즉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건립 이후의 로마 제국의 역사는 거의 흑역사 취급되었다. 330년부터 중흥기로 접어든 9세기까지의 역사는 무려 500년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500년이면 조선 시대 전체와 맞먹는다) 오랜 세월 동안 역사학계에서는 무시당했다. 물론 원수정기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에 비교하면 여전히 크게 못미치긴 하지만, 제국은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후에도 착실하게 레반트와 이집트, 소아시아, 발칸 남부를 지배하면서 로마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착실히 유지해 나갔다. 강성해서 3세기 로마도 간혹 곤경에 빠뜨리던 사산조 페르시아도 역사 내내 군사력으로나 국력으로나 단 한번도 동로마 제국을 넘어선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동로마 제국이 얼마나 엄청난 강대국이었는가를 능히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제국은 이슬람 제국에게 최악으로 코너로 몰릴 때마저도 샤를마뉴의 제국과 인구나 경제력이 거의 비슷했다. 전성기 규모에서 절반이 되었어도 그것 가지고 여전히 지중해 세계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강대국이었고, 거기서 또 절반이 되었어도 샤를마뉴의 프랑크 제국과 엇비슷했다. 그만큼 그 전 시대의 로마 제국이 무지막지하게 강대했으며, 8세기의 서유럽이 참담한 지경이었다는 얘기가 되겠다.
또한 제국이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번영 그리고 합리적 통치의 혜택을 본 것은 이미 3세기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부터였다. 제국 동방 지역에서는 군사적 능력은 좀 모자랐어도 통치 혹은 경제 운용에서 모자란 황제는 거의 없었던 행운을 맞았으며, 4세기부터는 일종의 숙군 사업을 통해 충성심 없는 야만족을 군대 바깥으로 쫓아내는 작업도 성공시키고 있었다. 이런 기조는 5세기 말의 대혼란 시대에까지 이어졌으며, 제국은 이렇게 차근차근 유지되고 축적된 국력을 토대로 해서 6세기가 되면 서방의 게르만계 국가들에 대해 전면 반격으로 돌아섰다. 이것이 유명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이탈리아 반도 및 북아프리카 수복 전쟁으로 꽃을 피우게 된다.
1.2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등장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주요 업적은 1.고토(故土) 수복, 2.『로마법 대전』의 편찬, 3.성 소피아 대성당(현재의 하기아(아야) 소피아 박물관)의 건축 등이 예로 들어진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즉위 후 민중 반란을 진압한 뒤 고대 로마의 형법과 민법을 참고로 해서 로마법전을 편찬하도록 법학자들에게 지시했으며, 실제로 일은 그들이 다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그냥 지시만 했을 뿐이지만 이 법전이 르네상스 이후 서유럽에 전파되어 나폴레옹 법전을 비롯한 근대 유럽 헌법의 골간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업적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수복 전쟁의 경우 일시적인 승리만 안긴 채 국력만 낭비하고 원거주민들에게는 극심한 약탈과 혼란, 높은 세금만을 안겨준 결과를 낳았다. 최근 연구결과에서는 재정복 이후 다시 해당 지역을 날려먹기까지 해당 지역이 동로마 제국의 재정에 기여한 공로가 컸지만, 적어도 재정복 당시에는 흑사병의 영향으로 인해 제국 재정에도 큰 부담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해당 지역 주민에게나, 제국 정부에게나 초반에는 다 손해였고, 그나마 제국 정부에 한해서 중기 이후에는 이득이었다는 것 정도로 정리가 가능하다. 또한, 지금까지의 유스티니아누스의 낭비벽에 대한 부당한 비판은 재고되어야 한다.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 아프리카를 손에 넣은 시점에서도 유스티니아누스가 운용했던 예산은 3세기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가 운용했던 예산보다도 적었다.
1.3 성 소피아 대성당 건축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이어 원래 있던 성 소피아 대성당이 니카의 반란 으로 불타 파괴되자 복구를 명령해 과거보다 더 거대하고 웅장하게 재건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헌당식에서 대성당을 보고 감격해 "솔로몬이여, 짐은 그대를 능가했노라!"라고 외친 말은 유명하다. 이 말은 미카일 프실로스의 《건축에 대하여》가 출처인데, 이 작자가 다른 곳에는 영 이상한 소리를 써 놓긴 했지만 하기아 소피아 건축을 자세히 다루어 놓았다.
그러나 성 소피아 대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지은 6세기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이후 지진과 화재로 몇 차례 파괴되었기 때문에 수 차례 개축, 보수 되었고, 최종 개보수는 9세기(혹은 10세기)에 있었다. 이후 국력이 급속도로 쇠퇴하면서 더 이상의 보수나 개축은 없어졌지만 화려한 모자이크와 실내장식은 동방 정교의 총대주교가 기거하는 곳으로 알맞았다.
그러나 1204년 최초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때 제4차 십자군 기사들에게 대량으로 털려 많은 문화유산, 보물, 성유물들이 베네치아를 위시한 유럽으로 빠져나갔다. 심지어 라틴인들은 하기아 소피아를 가톨릭 성당으로 마개조하고 십자군들을 선동하고 콘스탄티노플의 약탈을 주도한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 엔리코 단돌로의 무덤을 대성당 2층에 마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1] 설상가상으로 15세기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동로마를 멸망시킨 뒤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면서 모자이크에 회반죽을 칠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사실 오스만 제국은 성당을 개조할 때 모자이크를 없애 버리려 했다. 그러나 자신들도 그 모자이크가 아까웠는지 언젠가 뗄 수 있게 회반죽을 칠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첨탑(미나레트)이 개축되면서 아예 소피아 대성당은 이슬람 모스크로 거듭났는데, 1923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성 소피아 대성당은 박물관으로 개축되었으며 내부의 회반죽이 제거되면서 화려한 모자이크가 다시 드러났다. 복구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4 고토 회복 전쟁
마지막으로 고토 회복 전쟁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가장 골몰한 사업 중 하나였다. 최초의 전쟁은 534년에 있었는데, 제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칭송받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지휘한 동로마 군대는 압도적인 수의 반달족 군대를 가볍게 분쇄하고 반달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로서 북아프리카는 동로마의 판도에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유럽 최대의 제국이 된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이에 고무되어 이탈리아 수복 전쟁을 시작했지만, 이탈리아 원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535년 유스티니아누스는 불과 7500명(!)의 병력을 벨리사리우스에게 쥐어주고 시칠리아를 거쳐 이탈리아를 점령하도록 했다. 적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시칠리아, 나폴리에 이어 고도 로마까지 탈환한 벨리사리우스는 엄청난 병력으로 로마를 포위한 고트족에 의해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혈전 끝에 로마를 지켜 내었고 이윽고 후퇴하는 고트족을 역으로 격파하여 중부 이탈리아를 손에 넣는다. 이 때부터 유스티니아누스의 고질적인 의심병이 벨리사리우스의 발목을 잡았지만 벨리사리우스는 540년 라벤나에 입성하는 데 성공하고야 만다.
이제 유스티니아누스는 더 이상 벨리사리우스를 그가 정복한 이탈리아에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소환되었고 그의 빈 자리는 여러 명의 장군들에게 맡겨졌으나 새롭게 왕위에 오른 젊은 고트 족의 청년 토틸라에 의해, 시칠리아, 사르데냐와 남이탈리아 일부 도시를 제외한 이탈리아가 다시 한 번 고트족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한 번 파견되었지만, 황제의 지원 없이 그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위기의 이탈리아를 구한 것은 70대의 늙은 환관 나르세스였다. 그는 황제를 잘 설득하여 여러 부족의 용병이 포함된 3만5천의 군세를 이끌게 되었다. 552년 나르세스는 라벤나에 도착하여 다시 한 번 고트족과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타기나에 전투에서 게르만족 최강의 기병을 자랑하던 고트족은 분쇄되고 토틸라는 사망한다. 이제 동고트 왕국은 멸망한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나르세스는 이 틈을 타 이탈리아를 노리던 프랑크 왕국을 쫓아낼 필요가 있었다. 결국 554년 카실리눔 전투에서 게르만족 보병의 강자였던 프랑크 왕국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이제야말로 이탈리아는 제국의 패권 하에 놓이게 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르세스는 이때 이미 나이가 70대 중반이었으며, 장수를 누리긴 했지만 결국 이탈리아를 13여년간 통치하는 선에 그쳤다. 그가 죽자마자 북방에서 밀고내려온 랑고바르드족에 의해 이탈리아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고, 8세기 라벤나 총독부를 상실하면서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에 대한 제국의 헤게모니는 종말을 고한다. 이탈리아 동북부의 라벤나에 위치한 라벤나 총독부에 속해있던 베네치아가 황제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시작하기도 했다. 다만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의 경우 이슬람 세력과 치열한 밀고당기기를 하면서 1071년 노르만 인들에게 최후의 거점 바리(Bari)가 함락될 때까지는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바리가 함락된 이후에도 마누일 1세가 남이탈리아를 일시 회복하고 이탈리아 중부의 상업 도시인 앙코나(Ankona)를 돈으로 매수하는 등 1180년 마누엘 1세 콤니노스 황제가 죽기 전까지 남이탈리아를 수복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1.5 악재의 연속
유스티니아누스의 치세 말기부터 감소한 정치력과 역병 크리로 동로마는 오랜 전쟁으로 인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원래 유스티니아누스는 한탕 크게 정복해놓으면 거기서 나오는 세금으로 금방 재정손실이 복구될 줄 알았고, 실제로도 계산된 확장이었다. 하지만 가장 나쁜 타이밍에 역병 크리가 터지면서 망했어요. 중세 흑사병 못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 역병이 일어난 때를 제 1차 페스트 혹은 선 페스트 시기라고도 할 정도다. 얼마나 전염성이 지독했는지 유스티니아누스 본인마저도 감염되어서 골골 앓아누웠고 이후 사실상 폐인이 된다. 덕분에 마우리키우스 황제[2] 때까지 국고주의를 비롯한 온갖 재정부양책으로 모아놓은 제국의 국고가 모자라게 된다. 한동안 유스티니아누스가 만들어놓은 제국 영토 이곳 저곳에 구멍이 송송 뚫린 상태로 그 영토가 유지되었지만 제국 전체를 강타한 전염병으로 인한 막중한 손실에. 북방 민족의 침입, 사산 왕조와의 끝없는 전쟁, 제위를 둘러싼 국내 분열이 겹쳐 급속히 국력이 쇠약해져 갔으며, 서로마 권역의 영토는 지속적으로 날아가는 판이었고 이탈리아도 구멍이 송송 뚫린 상태로 라벤나 총독부가 유지되고 있는 판이었다.[3]
1.6 사산 왕조와의 충돌
7세기는 그 절정이였다.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장기간 긴축 정책으로 군대와 시민 모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와중에 황제는 야만족과 싸우던 군대에게 도나우 강 너머에서 겨울동안 머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군대는 반발하며 그들의 백인대장 중 한명인 포카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다. 황제를 싫어하던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도 합세하였고 결국 마우리키우스는 소아시아로 도망갔다가 잡혀 처형되었다. 그러나 쿠데타로 집권한 포카스는 공포 정치를 펼친다(...) 죄가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의심만 있으면 모두 죽인 것인데, 잔인한 고문은 덤.
한편 전임 마우리키우스의 도움으로 내전에서 승리하고 왕중왕이 된 호스로 2세는 포카스에게 등을 돌린 나르세스[4]와 함께 제국령 소아시아를 침공했다. 포카스는 싸우고 있던 아바르족과 강화를 맺고 동쪽에 집중했으나 성공한 기록이 없다(...) 608년, 소아시아 대부분이 넘어가고 페르시아군은 보스프러스 해협까지 도착했다. 하지만 포카스는 짧은 치세동안 계속 해왔던 잔인한 고문과 숙청을 계속 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카르타고 총독령의 헤라클리우스는 아들 헤라클리우스(아버지와 이름이 같다.주니어)와 군대를 콘스탄티노플로 진격시킨다. 610년 헤라클리우스는 포카스를 폐위하고 황제가 된다.[5]
하지만 전임 황제 포카스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숙청하면서 제국의 방위 체계를 모조리 망가뜨려 놓았던지라, 사산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가 진격했을 때는 제대로 방어가 가능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611년에 시리아, 아나톨리아를 정복당하고, 613년 막기 위해 군사를 보내지만 안티오크에서 이마저도 격파당하며 다마스쿠스도 점령당하고, 614년에는 예루살렘마저 빼앗겨 제국의 최고 성유물인 참십자가마저 빼앗긴다. 뒤이어 호스로 2세는 616년에는 이집트도 정복하고 617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보스포루스 해협 바로 건너 편의 칼케돈마저 정복한다. 619년에는 전염병까지 도는데다가 거기다가 622년에는 로도스 섬마저 함락당하는 초유의 위기 상황이 되었다.
헤라클리우스에게는 남은 야전군을 끌어모아 회전에서 도박적인 승부를 벌이는 방법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헤라클리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고, 시간을 벌어가면서 후퇴하는 대신 잔여 병력을 철저하게 훈련시켜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622년,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영토를 절반 넘게 잃은 상황에서도 동방 방면 야전군 편제와 병력을 상당 부분 온존하여 병력을 2/3 넘게 건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제국 서쪽에서 슬라브와 아바르에게 페르시아군에게 입은 것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을 입어 일리리쿰군은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훗날 아랍인들과의 전투에서도 야전군 전체가 통째로 날아가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돌이켜 볼 때, 이 참사가 헤라클리우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안겨주었을 지는 상상이 어렵지 않다. 망했어요
이래도 저래도 방법이 없겠다 싶은 헤라클리우스는 카르타고로 수도를 옮길 생각까지 하지만, 카르타고로 가려는 배가 악천후로 침몰한 데다가 총대주교의 만류로 그는 다시 생각을 고쳐 먹는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황제가 이끄는 군대는 페르시아군을 대파하였고, 그 휘하의 장군들도 차례차례 페르시아를 격퇴하기 시작하였다. 622년부터 아나톨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격렬한 전투가 매년 벌어졌다. 이라클리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어를 믿고 페르시아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사산 왕조와 동맹군인 아바르족은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압박해 들어왔지만 동로마 해군이 제해권을 잡은 상황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두 나라의 전쟁은 이후 6년간 계속됐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연전연승한 헤라클리우스는 정면 돌파를 회피하고 돌아서 사산 왕조의 중심부로 진격, 627년 처절한 전투 끝에 니네베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완전히 제압했다. 그리고 이듬해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빼앗긴 성물을 되찾았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2년 후 샤르바라흐즈가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페르시아 왕으로 인정해 주는 대가로 반환했다. 한때 동로마의 황제를 경멸하던 페르시아의 왕 중 왕(Shahanshah)들은 자신들을 황제의 노예라고 칭하기까지 하는데까지 굴러떨어졌다. 그러나.....
1.7 이슬람 제국의 발흥
로마 제국은 사산 왕조와의 긴 전쟁에서 이겼지만 같은 시기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무함마드에 의해 이슬람교가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결국 서로의 전쟁에 지쳐버린 두 나라는 7세기 중반 이후 시작된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를 앞세운 이슬람 군대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었고, 결국 잇따라 패배하게 된다. 게다가 제국의 경우, 황제의 노환과 교리 논쟁으로 인해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분열되어 나가는 등 온갖 추가적 악재와 사산조와의 결전+이전의 역병크리가 파이널 퓨젼(...)한 상태에서 이슬람 침공을 받은 결과,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영구히 상실했고[6], 가까이 있는데다가 패전크리에 왕위계승분쟁까지 겹쳐있던 사산 왕조는 아예 멸망해버리고 왕족들은 중국으로 망명한다.
7세기 내내 이슬람 세력의 대공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결국 696년 카르타고가 함락되어 파괴되고 이집트나 시리아 탈환도 무산되자 국력이 약화된 제국을 노리고 북방에서 슬라브계 민족들이 침공해 들어왔다. 이들의 공세로 제국은 발칸의 대부분을 잃고 그리스와 트라키아의 일부만 간신히 보전했으며[7] 이슬람 해군의 공세로 크레타, 키프로스, 시칠리아 같은 중요한 섬들도 잃고 크게 위세가 줄어들었다. 이 때는 제국이 그 때까지의 역사상 맞은 최대의 위기였다.
이 당시 얼마나 위기상황이었는가 하면, 이 시기를 전후해서 역사서도 부실해지다 못해 사라지고[8], 관공서 기록도 부실해지며, 그나마 있는 기록도 글을 아는 자가 없어서 관리임명에 곤란을 겪는다는 내용이 수록될 정도였다. 한마디로 말해 교육기능이 완전히 붕괴되어버린 셈이다. 가문과 가계에 대한 기록도 부실해졌으며, 지방에 대토지를 가진 귀족들이 해당 영지를 상실하면서 쇠퇴하여 다른 가문으로 교체되었는데, 그들조차도 언제 정확히 자신들이 집권했는지 잘 모르는 막장상황에 돌입하고 말았다. 물론 시장의 상인들과 직공들도 자신들이 언제 이 일을 했는지 감도 못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덤으로 식량과 물자부족도 심해져서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도 간신히 주변의 영토에서 식량을 끌어모아 연명하는 처지였다. 수도가 이 지경이니 중소 도시들은 쇠퇴해서 사라지거나, 살아남은 곳도 줄어든 인구와 방위문제로 인해 구시가지를 버리고 방어에 용이한 좁은 지역에 요새를 쌓고 그 쪽으로 이동한다던지, 구시가지의 잔해를 사용해서 임시요새를 건축하고 그 안에 틀어박히는 축소과정을 거쳐야 했다. 당연하게도 제국의 재정도 가난하기 짝이 없고[9] 경제도 과거로 되돌아가서 수도를 떠나기만 해도 물물교환이 대세였으며, 세금을 내기 위한 화폐 자체를 구하기 어려워서 농민들이 고생했다는 기록까지 나올 정도였다. 한마디로 말해 누구나 제국이 망해가고 있음을 절감할 정도의 대위기였다.
1.8 유럽의 방파제
717년, 이슬람 제국은 동로마를 아예 끝장내기 위해 수천 척의 전함과 10만이 넘는 대병력을 동원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10] 이 전투는 치열하게 이어져 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였으나, 뛰어난 명장인 황제 레온 3세(Λέων Γ´ 재위 717~741년)의 지휘와 혹독한 겨울 날씨, 불가리아의 지원과 그리스의 불로 알려진 액체화약의 위력으로 이슬람 군대를 격퇴할 수 있었다. 이 전쟁에는 732년 프랑크 왕국이 이슬람군의 침공을 격퇴한 투르-푸아티에 전투보다 더 중요한 의의가 있는데, 정작 많은 이들이 이를 모르고 아예 흑역사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저 안습하다.
동로마가 이때 무너졌다면 그대로 유럽 세계는 이슬람 세력에 잠식됐을 가능성까지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로 동로마는 서구를 지켜냈다. 우리와는 달리 이 전투의 의미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프랑크 왕국을 비롯한 여러 서구 기독교 국가들도 사절을 파견하여 축하한 것은 아주 의미가 크다. 심지어는 당시 동로마와 혈전을 벌이던 불가르족마저도, 동로마보다 더 강력한 이슬람 제국이 발칸에 모습을 드러낼 경우 자신들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돌연 동로마 측에 섰었다.
이후로 732년 프랑크 원정도 실패한 뒤 국력을 너무 소모한 나머지 힘이 빠진 우마이야 왕조(661~750년)는 결국 750년 반란으로 멸망하고 대외 확장에 적극적이지 않은 아바스 왕조(750~1258년)가 등장해 간신히 이슬람과의 전쟁은 소강 상태가 된다. 하지만 여기서 엄청난 참사가 터지고 만다. 아이고 이게 끝이 아니야?! 한숨 돌리게 되자 레오 3세는 국내 문제에 집중해 동방 교회의 '성상 공경'을 문제시, '성상 파괴령(726)'을 내렸다.
1.9 성상 논쟁
구약성서의 다니엘서에 보면 신바빌로니아 제국 이후 세 제국이 차례로 들어선 후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당시의 그리스도교도들은 페르시아, 헬레니즘, 로마 제국이 이 세 제국에 해당한다고 여겼고, 마땅히 로마 제국은 세상의 마지막 제국이라고 생각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의 수호자가 된 이후로는 로마 제국은 제국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의 유일한 제국이었다. 그런데 성상 파괴 운동의 결과, 서쪽에 새로운 로마 제국이 탄생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은 돌이킬 수 없는 파괴를 겪었다.[11]
다만 성상 공경 문제가 로마의 주교인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성상 옹호파와 황제 레온 3세를 중심으로 하는 성상 파괴파의 대립이란 건 상당히 서방 교회(가톨릭)에 치우친 관점이다. 서방 교회가 보기에는 어느날 갑자기 동로마에서 듣도보도 못한 성상파괴주의라는 이단이 떡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 동방 교회의 관점에서 성상파괴주의는 동서 교회간의 대립이라기보다는 황제에 의해 유도되어 동방 교회 내부에서 발생한 이단 투쟁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에서도 오히려 성상 옹호파가 전반적으로는 우세일 때가 많았고, 서방 교회도 성상 문제 자체는 황제가 갑자기 성상 공경을 이탈리아에서도 하면 안 된다고 생떼를 쓰기 전엔 이 문제에 큰 관심은 없었다. 동로마 제국의 성상 논쟁에서 서방 교회는 처음부터 동방 교회 내의 정통파(성상옹호파)를 지지하는 보조적인 입장에 있었다. 정치적 차원에서 이 논쟁의 본질은 고갈되어가는 재정을 교회 재산을 털어서 보충하고 싶은데 핑계가 필요했던, 동로마의 재정상 문제에 있었다. 물론 황제 개인의 성상 공경에 대한 생각도 일부 작용했지만, 진짜 문제라고 보기엔 너무 단순한 분석이다.
이 문제는 이슬람측과 보다 많이 상호작용하게 된 탓에 성상 공경의 반대적 개념에 익숙해진 아나톨리아 지방과 그렇지 않은 유럽쪽 지역의 견해 대립도 크게 작용했고, 그 생명력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서기 843년의 유능한 섭정 황태후 테오도라에 의해 성상파괴주의가 최종적으로 종말을 고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성상 파괴주의는 제국을 내란 상태에 빠뜨리긴 했으나, 황제들이 그동안 많은 재산을 축적한 교회들을 털어 국가 재정을 보충하고, 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강제 결혼시켜 변방 속주에 배치하는 핑계를 만들어내는 효과도 있었다.[12]
서방 교회와 실질적으로 분열되었다고 보기엔 때문에 설명이 대단히 부족하다. 랑고바르드족이 마구잡이로 밀고 내려오면서 라벤나 총독부가 망가진 건 성상 파괴 탓이 아니라, 유스티니아누스 이래로 계속해서 급여를 못대줘 이탈리아 야전군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던 탓이지, 성상파괴 논쟁 탓이 아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 전체가 일관적으로 성상 파괴주의적이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교회 재산과 인력을 정기적으로 털어대는 막장 황제들에 대항해 로마 교황과 연대하는 입장이었던 지라 서방 교회와의 골 운운은 설득력 없는 주장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3세가 샤를마뉴에게 붙은 명분은 당대 제국에 '황제'[13]가 없다는 논리 때문이었지 성상 운운은 전혀 관계 없었다.
1.10 서유럽 사회의 성장
8~9세기 내내 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 서유럽에서는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이 제국으로 거듭났고 로마 교황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이슬람 아바스 왕조는 751년 중국 당나라와 전쟁을 벌일 정도로 강력해졌으며 해상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문화를 꽃피웠다.
반면 주변국들의 성장에 비해 8세기에서 9세기 중반까지 제국의 역사는 암울했다. 거듭된 북방 민족의 침입과 이슬람 세력의 위세, 서방 교회 및 서방 국가들과의 갈등, 제위 다툼이 이어졌다. 그래도 8세기의 혼란과 암울에 비하면 9세기, 정확히 성상 공경이 재건된 843년부터 국력을 회복하고 다음세기 중흥기를 마련하기 위한 토대를 착실히 구축할 수 있었다. 9세기에 들어서 강력했던 압바스 조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동로마 제국은 니키포로스 1세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불가리아 개척으로 서서히 인구가 증가했다. 특히 그의 세제 개혁으로 확실한 세수의 증대를 가져왔다. 비록 니키포로스 1세가 불가리아의 칸 크룸과 벌인 전쟁에서 전사하고 내분까지 겹쳤지만 크룸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다 삼중성벽에 막혀 실패했고, 내분도 점차 수습되어갔다. 830~40년대에 테오필루스 황제가 이슬람 세계에 공세를 가했고, 그전까진 정면 대결 야전을 벌이는 건 엄두도 못냈으나 바로 그때부터 제국이 야전을 이슬람측과 대등한 입장에서 주고 받게 되었다. 9세기 후반에는 유명한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 주교 형제가 슬라브 족에 대한 지속적인 선교 활동을 벌이고 강력한 불가리아 국가가 정교회로 개종하면서 프랑크족을 끌어들인 로마 교황에 맞서 제국은 슬라브족을 배경으로 얻을 수 있었다.
2 중흥기
제국의 역습
위축되었던 제국은 과거 로마 제국의 알짜 영토였던 이집트, 시리아, 북아프리카를 잃고도 8세기부터 꾸준히 국력을 축적해, 마케도니아 왕조 때부터 시작해 다시 한번 지중해의 패권을 누르는 당대 초강대국의 위치에 오른다. 하지만 인구와 영토가 그전 제국의 절반에 불과하다보니 전대만큼은 못했다.[14]
2.1 정복 군주의 시대
제국의 확장은 마케도니아 왕조를 전후하여, 863년 Marj al-Usquf 전투에서 멜리테네 토후국을 격파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10세기 경에는 내분으로 급속도로 위축된 이슬람 세계에 대한 완연한 공세로 돌아선다. 이때부터 제국의 전쟁은 이교도들에 대한 성전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대두되었고, 니키포로스 2세는 모든 전사자를 순교자로 시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10세기 초에는 니키포로스 포카스, 요안니스 쿠르쿠아스라는 장군들과 그 후손인 황제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 요안니스 1세 쿠르쿠아스(치미스키스는 별명) 등 위대한 정복자들이 연달아 등장했다. 다만 아시아 쪽에서는 공세로 돌아섰지만 여전히 유럽-아시아 이중 전선은 제국의 골칫거리였다. 10세기 초에는 불가리아 제1제국의 공세에 고전했으며, 울며 겨자먹기로 불가리아 왕 시메온 1세를 불가리아의 황제로 인정하였고, 유럽에는 동로마, 프랑크, 불가리아의 세 제국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후 시메온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육박해 들어왔지만 곧 제국의 뒷공작에 말려 고배를 마셨다.
2.2 니키포로스 2세
10세기 중반에는 함단조의 사이프 앗 다울라가 제국의 확장을 저지했고 일시적으로 동로마와의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으나 950년 전투에서 사이프가 이끈 3만 명의 군대가 제국군의 협공을 받아 궤멸되었고, 958년과 960년의 공세도 잇달아 실패로 돌아갔다. 이 와중에 제국은 크레타를 점령했고, 오히려 962년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의 군대가 역습을 가해 함단조의 수도인 알레포를 함락시켰으며 이는 동로마의 황금시대를 알리게 되었다. 유명한 클리바노로포스도 이 시기에 운영되기 시작하는데, 이 용도는 동로마 군대와 유사했던 함단조의 보병대열을 분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마찬가지로 함단조도 얼마 안되어 클리바노로포스를 도입했다). 유럽에 있어서 니키포로스 2세는 내부 분열로 휘청거리던 불가리아 제1제국을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침략하도록 사주하였으나, 불가리아를 접수한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프가 곧바로 제국의 영토로 밀고 들어와 전면전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2.3 요안니스 1세 황제
니키포로스 2세를 암살하고 그 뒤를 이은 요안니스 1세 쿠르쿠아스는 루스(러시아)의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브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불가리아 제국을 해체시켰다. 요안니스 1세는 예루살렘과 바그다드 근방까지 육박해 들어갔다. 이처럼 동방 원정의 주역들은 바로 소아시아의 군벌 귀족들이었고, 그 귀족들의 전형적 대표자가 바로 니키포로스 2세와 요안니스 1세였다. 니키포로스 2세와 요안니스 1세는 바실리오스 2세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정통 황제의 양부라는 지위로 공동황제가 되는 바람에 허수아비 신세였던 바실리오스 2세가 친정을 시작했을 때, 황제를 얕본 소아시아의 귀족들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제국의 아시아 영토를 기반으로 한때 콘스탄티노플마저 함락시킬 기세였으나, 바실리우스 2세는 왕조에 충성스러운 유럽 지방군과 포르피로예니타를 시집 보내는 대가로 받은 키예프 대공의 도움을 통해 가까스로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2.4 바실리오스 2세 황제
귀족들을 굴복시킨 바실리오스 2세는 동방 원정을 중지하였다. 재위 초반의 내전으로 인해 군벌 귀족들을 달갑게 여길 리가 없었던 바실리오스 2세는 동방 원정을 통해 귀족들의 세력을 불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대신 전통적인 공격적 방어 정책을 재확인했다. 이는 즉, 적극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지는 않으나 주변 적국들에게 제국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임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불가리아의 예가 가장 전형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바실리오스 2세는 제국에 전면으로 반기를 내건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사무엘을 완전히 패배시켰다. 한 때 바실레브스(황제) 칭호까지 허락받으며 수도 오흐리드에 총대주교구까지 설치했던 불가리아 제1제국은 완전히 해체되고 제국의 속방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이 시기에 지중해권에서 제국과 대적할만한 국가는 이집트의 파티마조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 파티마 조 역시 안티오키아를 공략하다 바실리오스 2세에게 호되게 당한 후 본격적으로 공세를 취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국가 내적으로 바실리오스 2세는 니키포로스와 요안니스 시절을 거치며 세력을 더한 귀족가문들과의 대결에서 이들을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이 시기와 12세기에 제국은 문화, 문명 면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하지만, 바실리오스 2세의 정복사업은 시칠리아 정복을 눈앞에 두고 미완으로 끝났으며,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궁극적으로 완성시킨 제국의 체제는 단 한 세대만에 그치게 되었다. 그의 사후 제국은 수도에 자리잡은 명문 관료귀족들이 득세하며 그에 따른 지방 군사귀족의 약화로 국방력이 감소하였다. 이는 반란 빈도가 줄어든다는 점에선 큰 이점이었으나, 반란 전문(...) 아나톨리아의 토호들은 제국의 핵심적인 군사력 제공처였고, 이들의 세력의 약화는 곧 제국의 군사력의 약화를 뜻했다.
3 12세기의 동로마 제국과 십자군 전쟁
3.1 쇠퇴의 원인
하지만 점차 동로마 제국도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지방의 군사 귀족 세력과 중앙의 문관 관료 세력의 대립이 점차 치열해졌다. 사실 문관 관료 세력이라고는 하지만 중앙 세력도 본질적으로는 소아시아의 군사 귀족이었긴 했다. 문제는 이들이 수도로 거점을 이동한지 오래라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과거 소아시아 내륙부의 황무지를 적극적으로 방위하던 때와는 달리 그럴 필요가 사라졌기 때문에 방위력 증강에 별 신경을 쓰지 않은 셈이다. 이들은 허약한 황제들을 조종해가며 중앙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고, 경쟁자들을 꺾기 위해 다른 군사 귀족들을 공공연하게 억눌렀다. 황제들은 이들의 대립을 조종하지 못한데다 귀족가문의 세력확장으로 자영농이 몰락하기 시작했으며, 무모한 건축과 늘어나는 튀르크와 페체네그족의 압력으로 국고의 소비가 커졌다. 특히 자영농 계층의 몰락은 제국의 테마 제도를 근본적으로 약화시켰다. 물론 제국이 공세로 돌아서면서 테마 제도 자체가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용병 비중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지역 방어 전술에 적합한 테마 제도의 몰락으로 병력 동원에도 제한이 오기 시작했다.
1071년, 제국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의 알프 아르슬란에게 대패했다. 군사적 피해는 크진 않았으나 황제 로마노스 4세가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후 암살되면서 제국의 고질병인 심각한 내분이 벌어졌으며 장군들은 요충지와 요새를 넘기고 튀르크인의 지원을 받았다. 결국 이 와중에 튀르크인들은 제국의 중요한 인력, 식량 공급지인 소아시아(현재 터키) 내륙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해안에 다다르자 거기서 함대를 건설해 에개해 군도들을 공략하는 등 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으나, 십자군의 도움과 셀주크의 분열 덕택에 어부지리로 소아시아의 해안선을 재탈환할 수 있었다.
3.2 소아시아의 상실
이때 제국이 영구적으로 잃어버린 지역은 소아시아 내륙지방이었던 데 반해 인구와 부의 집중지대는 아나톨리아와 그리스의 해안 지대였기 때문에 소아시아 내륙의 상실이 바로 제국의 몰락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최근 연구자들은 소아시아 내륙을 잃어버린 12세기 콤니노스 왕조 치하가 동로마 경제력의 절정으로 평가하고 있을 정도. 인구와 경제력은 유지되었으나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소아시아 내륙은 예로부터 군사 귀족의 근거지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황제권에 대드는 귀찮은 존재들이었지만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 맞서 제국을 지키던 이들이었다. 거기에 유목민족인 튀르크족들은 점령한 곳들을 초토화시켰다.[15] 잘 정비된 도로와 요새들은 대부분 흔적도 남지 않았고, 결국 단 몇십년 만에 소아시아 내륙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단기적으로는 물론 장기적으로도 소아시아 내륙의 상실은 제국에게 군사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가져왔다. 당장 군사적인 면만 보더라도 내륙부의 상실로 인해 과거에는 내륙부의 험준한 지형과 짧은 방어선의 도움을 받아 경제적으로 방어가 가능했지만 이제는 제국은 부유한 소아시아 해안부를 방어하려면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로 많은 군대를 보유해야 하는데, 그게 불가능하므로 이 때부터 소아시아는 점점 심해지는 약탈로 인해 제국의 중심부의 위치에서 서서히 밀려나게 된다.
제국 또한 소아시아를 다시 획득하는 데에 크게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서유럽에서 출발한 십자군은 소아시아 남부 해안선을 따라 성지로 가는 육로를 확보하였는데, 콤니노스 가문의 황제들은 귀족들의 세력 기반인 소아시아를 재탈환하기보다는 총대주교좌 도시이자 성지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진 안티오키아를 획득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었다. 결국 동로마는 소아시아에 정착한 튀르크인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홀'했고, 그들이 세력을 키우는 동안 몇 차례의 작은 원정 이외에는 별다른 활동을 벌이지 않았다. 콤니노스 가문의 마누일 1세 대제(Μανουήλ Α΄ ο Μέγας)는 헝가리인을 격파하고 제국의 서방을 안정시켰지만, 1176년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튀르크인의 매복에 걸려 패배했다. 이 패배 자체는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지 않았으며, 이듬해에 튀르크인들 또한 그 못지 않게 제국에게 참패를 겪은 후 해안 지대로의 진출은 잠깐 동안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전투가, 튀르크인들이 소아시아 내륙지방에 완전히 정착하여 방어하기 취약한 소아시아 해안지방을 공격할 준비를 완전히 끝냈다는 시금석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콤니노스조가 아나톨리아를 전적으로 방치한 건 아니었다. 당시 제국의 여력이 아나톨리아에 전력할 만큼 풍부하지도 않았고, 이미 아나톨리아는 완전히 튀르크인의 손에 넘어간 뒤였기에 수복했다 하더라도 모든 행정체계를 재건하고 유목민인 튀르크멘의 습격으로부터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선 요새화가 필수적인 정책이었는데 그게 워낙 돈과 인력이 많이 드는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사실상의 1대 황제인 알렉시오스 1세를 살펴 보자면 그는 즉위하자마자 노르만 족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고, 그 다음엔 페체네그 족과 싸웠으며, 그와 거의 동시에 키프로스의 반란자와 스미르니의 튀르크인 토후 차카와도 전쟁을 벌여야 했다. 결국 그가 아나톨리아에 제대로 신경을 쓸 수 있었던 시기는 페체네그 전쟁이 끝난 1091년 이후뿐이었는데 그 마저도 차카와 키프로스의 반란자와의 전쟁에 대부분의 시간과 자원을 빼앗겨버렸다. 애초에 알렉시오스 1세가 디라히온 전투에서 남아있던 대부분의 야전군을 상실한 이후에는 제대로 된 병력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시오스 1세는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니케아와 비티니아를 수복하기 위해 심복 타티키오스와 그나마 남아있는 병력을 동원해 미시아와 비티니아에서 어느 정도 세력을 재건했으며, 십자군 전쟁 이후에는 십자군과 제국 함대를 이용해 서부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수복하는 성과를 올렸다.[16] 십자군 전쟁 이후에도 아나톨리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건 이전과 마찬가지였지만 니케아, 아드라미티온, 니코미디아 등의 아나톨리아 해안가를 요새화하여 튀르크인의 대규모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으며 드디어 아나톨리아에 집중할 수 있게 된 1116년에는 수 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아나톨리아 내륙으로 진군하여 필로멜리온에서 룸 술탄국의 주력군을 박살내고 부근의 그리스인들을 구출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콤니노스 가문의 황제들이 '부유한 아나톨리아 해안지역과 역사적 상징성이 큰 대도시 안티오키아의 탈환에만 집중하고, (군사적 요충지이지만 황제권에 도전하는 귀족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던) 아나톨리아 내륙은 상대적으로 도외시한 건 맞다. 일단, 콤네누스 왕조의 실질적 치세는 국정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어린 황제였던 알렉시오스 2세와 노련하고 정력적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안드로니코스 1세의 치세, 그리고 그런 황제가 있었다는 것도 잊기 쉬운 이사키오스 1세의 치세를 제외하면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한 1081년에서 마누엘 1세가 사망한 1180년의 딱 100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가 바로 흔히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중흥기' 라고 불리는 콤네누스 3현제의 치세이다.
이 100년은 비잔티움 제국의 입장에서 그리 편한 시기가 아니었으나, 그 점은 근본적인 전략적 실수에서 보면 커버해주기 어려워진다. 애초에 알렉시오스 1세의 치세 자체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의 대패 이후, 아나톨리아 반도 전체의 상실과 이로 인한 군사력의 총체적 붕괴, 그리고 화폐 가치가 1/10 이하로 떨어질 정도로 극심한 재정난과 함께 시작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서유럽, 페체네그족을 비롯한 북방 유목민, 동방의 이슬람 제국이라는 3면 전선을 유지해야 했다지만, 이 점은 초유의 위기에 시달리던 7세기 제국도 더욱 더 크게 겪었던 어려운 점이었다. 당대의 비잔티움 제국이 군사력에서 여유 있는 시기는 아니었으나, 아나톨리아에 반독립적인 군사 귀족들을 재건하지 못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다.
애초에 단독으로 이슬람 세력을 밀어낼 군사적 역량이 있었다면 서유럽측에 십자군을 요청할 필요도 없지 않았겠냐고 하지만, 일단 이들을 불러들인 이상엔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야 했다. 그러나 제국은 국내 안정이란 점만 강조한 나머지 이들에 대한 활용을 상당히 등한시했고, 때문에 일단 아나톨리아 내륙 수복은 뒷순위로 접어두었던 것이다. 서구에서 온 십자군 입장에서는 성지 예루살렘이나 부유한 대도시이자 총대주교좌가 있는 안티오키아에 비해 내륙이 딱히 매력적인 목표라고 할 수 없었다지만, 이 점은 그 전에 존재했던 비잔티움 토착 군사 호족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십자군을 대하는 비잔티움 제국의 입장이 지나치게 권모술수적이었다는 건 십자군에게 토지는 주지 않고 돈만 주면 돌아가라는 입장 때문이었지, 줄 땅을 결정하고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 지출(특히 전비 지출)을 감당하기 위한 세수 확보에 필수적인 아나톨리아 해안지역의 탈환을 우선시 한 것 자체는 옳은 선택이었으나, 황가의 힘과 입장만을 우선시한 아나톨리아 내륙 탈환 의지는 애초부터 매우 실현되기 어려웠다. 콤니노스 황제들이 아나톨리아 수복 자체는 끊임없이 시도했으나 그것이 실패했던 건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산악 지역부터 수복했어야 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콤니노스 황조가 아나톨리아 내륙의 탈환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지만, 변명은 되지 못한다. 제국은 1차 십자군이 아나톨리아 내륙을 행군하면서 수복하고 반환한 이코니온, 티아나, 케사리아, 이라클리아 등의 도시를 유지할 여력조차 없었다지만, 발칸 반도에 일단 피신해 있던 옛 군사 귀족들의 거점을 회복하는 걸 알렉시우스 1세가 극력 꺼렸기에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스티븐 런치만 경의 'The History of Crusades' 에 물론 다음과 같은 참조할 내용은 있다. 침탈지의 기존 그리스계 기독교인 주민들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주어졌다고 한다. 첫째, 아직 제국령인 지역이나 튀르크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오지로의 피난. 둘째,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튀르크의 힘에 복종해 재산과 목숨을 보호하는 것. 셋째, 튀르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정체성을 유지하고 지역에 남는 것. 첫 번째 선택지와 두 번째 선택지를 택한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이는 아직 튀르크의 손에 있던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제국의 영향력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지만, 이러한 과정은 한 번에 완료된 게 아니라 백 년 넘게 진행되었던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상술한 대로 콤니노스조의 황제들 또한 놀고 있지 않고 꾸준히 자력으로 투르크인들의 세력을 축소하거나 굴복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기본적인 군사적 전제가 잘못되어 있었던 이상, 내륙 지역을 탈환한다고 해도 이슬람화, 튀르크화되어서 점점 튀르크에 동화되어가는 그 지역 주민들의 동요를 잠재우긴 대단히 어려웠다. 그 지역을 튀르크 유목민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내며, 수십년 만에 그 지역에 행정 조직을 온전하게 재건하려면 결국 답은 예전처럼 제국에게 충성하는 반독립적인 군사 귀족들을 재건하거나, 그 자리에 십자군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으나 국내 안정을 우선시한 콤니노스조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안이었다.
물론 콤니노스조의 황제들이 무능하고 무관심하진 않았으며, 알렉시우스 1세의 아주 잘못된 외교 정책을 근본부터 반성한 마누일은 상당한 성과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제국의 역량을 보면 마누일 1세 뒤에 제대로 된 후계자들이 있었어도 아나톨리아 수복이 끝내 불가능했을 거란 가정은 무리하며, 콤니노스조의 통치가 결국 제국의 투르크에 대한 약세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던 필연이란 주장은 많이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콤니노스조의 황제들이 취한 군사 전략에 애초부터 적지 않은 무리가 있었던 건 사실이며, 이것이 아나톨리아 수복에 무시하지 못할 장애물이 된 건 부인할 수 없다.
3.3 제4차 십자군과 수도 상실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들은 십자군 세력들을 믿지 않고 그저 여러 야만인들 중 하나로 취급하는 잘못된 외교 정책을 고수했으며[17], 십자군도 이에 대한 대응으로 동로마 제국을 음험한 권모술수가들이라 생각하였다.[18] 이런 상호 불신으로 인해 12세기 동방과 서방의 관계는 최악으로 냉각되었던 데다, 2차 십자군 이후 분열되어 있던 이슬람 세력이 통합되어 움직이기 시작하자 십자군 전쟁 또한 희망적인 예상과는 달리 완전히 엇나가기 시작하였다. [19]
제4차 십자군(1202~1204)이 자금의 부족으로 곤경에 처하자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이 십자군을 활용하여, 베네치아의 라이벌격인 도시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사태가 매우 나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20]
당시 제국은 콤니노스 왕조의 몰락 이후 앙길로스 왕조의 권력 다툼과 무능으로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었으며, 위기에 몰린 전 황제의 아들 알렉시오스 4세(재위 1203~1204년)가 십자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십자군에게 보수로 많은 지원을 약속했다. 십자군은 이 제안에 솔깃했고, 알렉시오스 4세의 제위를 되찾아주었다. 하지만 동로마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외세를 끌여들여 황제를 교체한 까닭에 민심도 좋지 못하여 반십자군 선동이 확산되자 제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에서는 민심을 잃은 알렉시오스 4세가 쫓겨나고 알렉시오스 5세(재위 1204년)로 교체되었지만, 금각만 지역의 성벽에 생긴 틈으로 십자군이 침입하였다. 원래 육상부의 3중성벽에 비하면 해안의 성벽은 좀 낮았으며, 베네치아인들이 그 곳을 집중공략했다.[21] 게다가 정예병들은 모두 반대편으로 도망간 상황이었다. 난장판은 이것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금각만 지역의 성벽에서도 내통자로 인해 성문이 열린 것이다! 결국 위엄돋는 3중 성벽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이로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어처구니 없단 말로도 모자랄 만큼 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오스만 제국도 2달 걸려 뚫은 콘스탄티노플이 하루아침에 뚫리는 위엄. 야, 신난다! 제국은 공중분해 되어버렸고, 제4차 십자군은 그 자리에 라틴 제국(1204~1261)을 건설하였다. 한편, 제국인들은 아시아와 그리스 각지역으로 도주하여 니케아 제국과 트레비존드 제국 등의 국가를 세웠다.
4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과 제국의 재건
4.1 니케아 제국과 수도 수복
결론부터 말하자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다시 되찾은 것은 소아시아 서부에 자리잡은 니케아 제국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중앙정부가 와해되어버린 이후, 귀족들은 옛날처럼 내전을 벌인 게 아니라 아예 자신들의 근거지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서유럽식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라틴 제국의 영토와는 달리, 자신의 세력의 확실한 근거지에 자리잡은 각 망명국가들은 역설적이게도 각 지방을 더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니케아 제국의 라스카리스 가문 또한 소아시아 서부의 군벌로, 니케아를 주변으로 한 영토는 그들의 홈그라운드였다.
처음에는 라틴 제국의 군대 앞에 각 지방의 분열된 제국들은 멸망의 위기에 처하였으나, 불가리아에게 라틴 제국이 패배한 틈을 타 재빨리 세력을 확장하였다. 라스카리스 황제들은 아나톨리아를 튼튼한 경제 기반으로 삼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없는 제국을 건실한 국가로 재건하였다. 소농민들을 보호하는 정책 덕분에 도시의 성장과 상업적 농업의 발달이 이어졌다. 거기에 소아시아에서는 몽골의 침략기에는 투르크가 몸빵을 해주면서 비참하게 와해된 덕분에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투르크 이외의 경쟁국들인 라틴 제국, 트레비존드 제국, 에피로스 전제군주국, 테살로니키 왕국, 불가리아 제국, 세르비아 왕국 등도 모두 외우내환으로 휘청거렸기 때문에 어부지리도 챙길 수 있었다. 단, 거듭되는 성공과는 별개로 니케아 제국은 옛 동로마 제국과는 제도의 근본부터가 달랐다. 니케아 제국은 명망높은 가문들의 집단지도제체에 가까웠는데, 엄격한 중앙집권체제인 옛 제도와는 달리 콘스탄티노플 수복 이후 귀족들의 세력이 강해지고 지방분권이 가속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에 니케아 제국의 군주들은 국방력을 획득하기 위하여 서유럽의 봉건제도와 유사한 프로니아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는 후에 동로마 제국의 행정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당시의 서유럽이 봉건제도를 벗어나 중앙집권 관료제로 나아가는 방향과 완전히 다른 발전방향이었다.
1254년에 즉위한 테오도로스 2세는 선임 황제들과는 다르게 이전까지 국가의 중역을 맡고 있었던 명망높은 대귀족들을 대놓고 적시하였다. 5년이라는 짧은 통치 동안 그는 과민하고 병적인 수준으로 명사들을 탄압했으며, 특히 장군들을 불신했다. 이에 니케아 제국의 결속은 단기간에 와해될 위기에 처하였다. 결국 1258년 황제가 급사한 이후 명망높은 장군이었던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창시자 미카엘 8세가 제위에 올랐다. 명목상으로는 일곱 살짜리 아들 요안니스 4세의 공동황제였으나, 3년 뒤 요안니스 4세는 실명된 후 유폐되었다. 니케아 제국의 혼란을 틈타 세르비아, 에피로스 전제군주국, 양 시칠리아 왕국이 삼자동맹을 맺어 전면전에 들어갔으나, 미카엘 8세는 이들을 모두 격파하고 뒤이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했다. 이에는 운이 따라주었는데, 콘스탄티노플에 주둔해 있던 라틴 제국 군대가 베네치아의 원정에 차출되어 잠시 떠나있던 참에 이를 포착한 정찰대가 수도를 점령했다.
4.2 약화된 군사력, 무너진 재정
하지만 제국을 재건한 이후가 문제였다.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1204년 이전의 강국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상징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재건된 동로마 제국은 본질적으로 중소 국가였다. 그러나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예전의 강대국의 역할을 다시 떠맡으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전통적인 유럽-아시아 이중 전선도 큰 어려움을 초래했다. 제국은 예전처럼 이중 전선을 유지할 여력이 없었다. 미하일 8세와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라틴 제국 제위를 주장하는 앙주 가문을 비롯한 서유럽 각국들의 공세를 막아내야 했다. 그들에게는 유럽 문제가 가장 시급해 보였기 때문에 재건된 제국은 유럽 문제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그리스의 경쟁국들이 내부 투쟁으로 약해져 있었고, 슬라브 국가들인 불가리아와 세르비아가 무력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제국의 무게중심은 유럽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이 정책들은 결국 재정 파탄으로 이어졌다. 미카일 8세 치하에서는 수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제국을 지키고 있었으나, 뒤를 이은 안드로니코스 2세 치하의 제국은 이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군대를 대폭 축소했는데, 기록만 살펴봐도 1/5 이상으로 줄어들었으며, 해군은 아예 해체되고 제노바에 위임하였다. 덤으로 소아시아 지방의 상비군을 해체했다. 나중에 안드로니코스 2세는 약해진 군사력을 복구하기 위한 노력을 했고 안드로니코스 3세 무렵엔 중무장한 보병과 기병을 볼 수는 있었지만 계속되는 내전과 흑사병으로 제국의 힘이 약해지면서 군사력은 줄어들고 만다. 이런 짓은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는데, 라스카리스 왕조가 피땀으로 일궈놓은 소아시아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 속주가 다시금 중요해지면서 황제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소아시아 해안지대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소아시아 해안지대는 가장 방어하기 취약한 곳이었고, 옛 콤니노스 왕조 시기와 비슷하게도 룸 술탄국의 잔해 위에서 튀르크 부족들이 대거 침입하여 튀르크 소국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국방력이 와해된 제국으로서는 소아시아의 상실을 막을 수가 없었다.
5 오스만 제국의 등장
니케아 제국의 세력 기반이었던 소아시아 지역에 새로이 자리잡은 소국가들은 주로 튀르크인들이 세운 나라들이었는데, 이중에 오스만이라는 장군이 세운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곧 이어 튀르크 세력을 규합하며 전 동로마의 소아시아를 침공, 점령하기 시작했고, 소아시아를 영구 상실한 동로마 제국은 여기저기 용병을 쓰면서 국방을 땜빵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아라곤의 내분에 휩싸여 본국에서 뛰쳐나온 카탈루냐인 용병부대를 고용했는데, 확실히 이들은 실력이 있어서, 아니 희대의 개깡패들 수준으로 경보병 주제에 프랑스 기사고 튀르크고 다 쳐바르고 다니면서 위용을 떨쳤다.[22] 그러나 이 당시의 제국은 이런 강력한 용병을 제어할 힘도 돈도 없었고, 당연히 휘둘리고 다녔다 (...) 고용은 했는데 돈이 없었으니. 그래서 제국은 1년 예산을 짜는데 다른 나라에서 돈을 빌리거나 부유층에 돈을 구걸해야 했다. 러시아 대공이 보낸 성 소피아 대성당 수리금은 튀르크인 용병들을 고용하는데 쓰였다. 남은 발칸반도에서도 불가리아 제국과 새롭게 등장한 세르비아 전제국이 세력을 확장하여 제국이 발뻗을 곳은 없어졌다.
5.1 내전과 흑사병
이 와중에 삼대에 걸쳐 한 세기 가까이 내전이 계속된다.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이름을 따서 '팔레올로고스 내전'(Palaiologan civil wars)라고 칭하는 이 일련의 내전들은 제국의 국력을 지속적으로 갉아먹었다. 첫 번째 내전은 1321년부터 1328년까지 이어졌으며, 안드로니코스 2세와 그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 사이에 일어났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동로마계 정권인 에피로스 공국을 합병하였으나, 소아시아에서는 오스만에 패해 아나톨리아에 남아있던 영토를 잃고 말았다. 안드로니코스 3세가 사망한 후 요안니스 5세가 즉위했으나 무려 세 차례에 걸친 내전과 복위를 겪었으며 오스만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이 강성해지면서 제국을 압박했다.
설상가상으로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까지 일어남으로써 제국의 힘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누스 시대에 콘스탄티노플에 발병한 흑사병은 당시 수도 인구의 1/3을 죽게 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혔다.이제 동로마는 무(無)로의 소멸을 시작하고
5.2 술탄의 가신이 되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은 나날히 강성해져 미카일 8세의 후계자 안드로니코스 2세 시절인 1326년경 오스만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오르한 1세가 즉위하고 나서 곧바로 동로마 제국의 지방도시 부르사[23]를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고 1346년에는 동로마 황제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누스와의 동맹을 계기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넘어 발칸 반도의 트라키아에 진출, 유럽에서의 영토 확장을 개시했다. 이후 오르한 1세의 아들 무라트 1세가 즉위하자마자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도나우 강 유역을 잇는 중요 거점인 아드리아노폴리스(오늘날의 에디르네)를 점령하여 1365년에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삼은 시점에 이르면 동로마는 오스만의 속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가 된다.
1400년대에 이르면 오스만 제국은 티무르 제국에 공격받아 잠시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종래는 소아시아 지역을 장악하고 발칸반도의 슬라브 국가들과 동로마 제국도 거의 종속시켰다. 티무르 제국의 침공 직전 제국은 이미 그리스 영토도 펠로폰네소스 반도(모레아) 등지를 제외하고는 전부 오스만 제국에게 빼앗기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근방 지역만 남아, 사실상 도시국가수준으로 전락했다. 그나마 오스만이 티무르한테 쳐맞은 이후 오스만과 동로마가 평화조약 맺으면서 영토를 좀 돌려받긴 했는데 그래봤자 제국 영토는 테살로니키+모레아+콘스탄티노플 주변의 흑해 연안 도시 몇 개(바르나, 메셈브리아 등등) 정도.제국의 황제는 오스만 제국 술탄의 봉신이었으며, 제위 계승도 술탄의 마음대로였다. 심지어 술탄의 유럽원정에 따라가기도 했다. 바예지트 1세의 사후 오스만에서 벌어진 왕위 계승권 분쟁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속국 신세는 면했지만 이미 제국은 멸망을 눈앞에 둔 상태였다.
5.3 서유럽에 지원을 구하다
당시의 황제인 마누엘 2세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서유럽 곳곳을 방문하며 지원을 요청하고, 동유럽 국가들 나름대로 오스만 제국에 위협을 느끼고 십자군을 조직하여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십자군 공격은 패배로 끝났다. 대표적인 것이 1398년의 니코폴리스 십자군이다. 여기서 서유럽 군대와 헝가리 군대가 각개격파당했다. 게다가 이런 도움을 받은 것 자체가 별로 없다. 황제는 유럽의 왕들에게서 지원을 약속만 받았을 뿐, 그 약속을 지키게 하지는 못했다. 한동안 오스만 제국은 동로마 제국을 복속시킨 채로 두려고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3중성벽은 아직까지는 무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5.4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짧은 중흥
갈수록 몰락해가는 중앙정부와 달리, 이제는 모레아로 불리우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성공을 거듭했다. 모레아의 총독들은 십자군 국가들의 잔해와 옛 경쟁 그리스 국가들을 차례로 격파했고, 마누일 2세는 코린토스 지협에 헥사밀리온 티호스 (Εξαμίλιον τείχος - 6마일짜리 장벽)이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성벽을 지었다. 마누일 2세의 아들이며 후에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되는 데스포테스 콘스탄디노스는 20년간 현지를 지배하면서 1443년 남부 그리스 전역을 세력권에 넣었다. 당시 번영하던 모레아와 쇠락해 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상당한 대조를 이루었다. 당시 모레아의 수도 미스트라 궁정에서 기거하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플레톤은 모레아를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비교해서 삶의 기쁨이 넘치는 곳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모레아를 오스만 제국이 경계하게 되면서 무라트 2세가 대원정을 시작했다. 전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세력권에 넣은지 3년만인 1446년, 튀르크의 대군 아래 모레아가 자랑하던 헥사밀리온이 대파되었다. 사실 헥사밀리온은 소형대포의 위력을 감당해낼 정도로 탄탄하지도 못했다. 곧이어 반도 전체가 황폐화되었으며, 수십만명의 포로가 노예로 끌려갔다. 그리고 1449년, 폐허만 남은 모레아에서 데스포테스 콘스탄티노스는 동로마의 제위로 끌려가듯 즉위했다.
6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과 제국의 멸망
결국 요안니스 8세 치하에서 제국은 서구 십자군을 끌어들이기 위해 1439년 이루어진 피렌체 공의회를 통해 교회 통일령을 내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파격적인 개종은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여력을 교회 통합파와 반대파로 나누어져 반목하게 만들었고, 슬라브 국가들의 지지마저 잃어버렸다. 이전까지는 한결같이 제국에 지원을 아끼지 않던 러시아마저도 이에 격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제국 제 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는 이미 1431년에 함락되었으며[24] 제국에게 남은건 이제 모레아와 콘스탄티노플 뿐이었다.
6.1 콘스탄티노폴리스 최후의 날
이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요안니스 8세가 사망했고, 1449년에 동생인 콘스탄티노스 11세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자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반드시 정복해야 한다고 결정짓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2개월간의 전투에서 (아이러니하게도)베네치아와 제노바 등 서유럽 출신의 선원과 상인들[25][26], 일부 기사들과 용병[27],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초라한 나머지 병사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까지 최후까지 성을 지켰다.
그래도 난공불락의 요새가 허명은 아니었는지 제법 잘 버텨갔지만 어이없게도 오스만군의 마지막 총공세 때, 성 안팎을 오고가며 유격전을 펼치던 동로마군이 피곤에 지쳐 문을 걸어 잠그지 못한 것이다. 당시 오스만군은 15만인데 반해, 동로마군은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남자의 수가 7천(…). 결국 오스만군이 인민 웨이브를 펼치자 휴식시간 없이 서너 시간을 연속으로 싸워야 했고, 결국 컨트롤미스가 나온 것이다(…). 물론 쪽문 이야기는 거짓이라는 주장도 있다. 방위군 대장을 맡고 있던 제노바 출신의 용병대장인 주스티니아니가 부상으로 갑작스럽게 전열을 이탈한 것도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28] 게다가 결국은 인해전술로 정면을 뚫었다. 이 공세가 마지막이었다고 하니 진짜 안습. #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난전중에 전사했으며[29]. 이후 사흘간의 약탈로 동로마 제국이 쌓아올렸던 많은 문화재가 훼손되었다.[30]
그리고 이로써 2200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6.2 제국의 마지막 잔재가 사라지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뒤, 그리스 남부 지역에서 제국의 유일한 속령으로 남아있던 모레아 전제군주국은 1460년 메흐메트 2세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다. 당시 모레아는 콘스탄디노스 11세의 동생들인 토마스와 디미트리오스가 공동 통치를 하고 있었지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31], 디미트리오스가 오스만 제국의 힘을 빌려 토마스를 제거하려 했던 것. 그리고 메흐메트는 이것을 명분으로 모레아 정복에 나섰고, 결국 토마스는 로마로 망명하고 디미트리오스는 에디르네의 왕궁에 갇혀 그곳에서 죽었다[32].
전 그리스를 세력권에 넣은 후 메흐메트 2세는 옛 콤네노스 황조가 건설하고 트레비존드 제국이 성립될 당시 스스로를 '메가스 콤네노스(대 콤네노스)로 지칭한 트레비존드 제국으로 시선을 돌렸다. 트레비존드 황실은 조지아 왕과 다른 튀르크 부족들에게 구원을 청하고 저항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수백 년을 이어온 대 콤네노스 가문은 1461년 항복한 후 저항에 대한 대가로 일부는 처형당하고 일부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오스만 제국의 일개 백성이 되었으며, 또한 조지아 등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흔적을 남긴 사람은 없어, 황조로서의 역사는 이것으로 끝났다.
러시아는 이 때부터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 조이가 이반 3세와 결혼한 것을 근거로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칭했으며, 차르를 자칭하였다[33].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이탈리아의 몬페라토 후작령을 지배하고 있던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분가[34]는 살아남아 약 백년을 더 이어갔다. 1530년 몬페라토 후작 보니파시오 4세가 만 13세로 요절한 이후 부계 혈통은 단절되었지만, 마지막 후계자 마르게리타 팔레올로가(1510~1566)가 만토바 공작 페데리코 2세와의 결혼에서 자손을 남기는데 성공했다. 이 쪽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단절된 본가와는 달리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그 족보를 정확히 추적할 수가 있는데, 그녀의 증손녀인 마르게리타 곤차가(동명이인)가 로렌 가문과의 결혼을 통해 그 유명한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조상[35]이 되었다. 그러므로 좀 뜬금없지만 현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의 약 800년 전 조상은 동로마 제국의 안드로니코스 2세가 되고, 또 20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알렉시오스 1세가 있다.- ↑ 다만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하기아 소피아를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무덤을 밀어서 사라졌다. 현재 알려진 무덤은 19세기 이탈리에서 무덤이 있던 자리에 돌판을 새겨 표시한 것이다.
- ↑ 전임 티베리우스 2세의 사위다. 티베리우스 2세가 아들이 없어 그가 황제를 이어받았다. 국고가 부족했기에 강력한 긴축 정책을 펼쳤으나 이때문에 민심을 잃게된다.
- ↑ 서로마 권역에도 영토가 깔끔하게(?) 날아가기 보다는 동로마를 싫어하는 서유럽인들의 반란으로 구멍이 송송 뚫려갔다. 제국이 얼마나 비틀거리고 있었는지를 제대로 보여줌과 함께 그동안 쌓아온 힘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던게 확실히 보이는 부분.
- ↑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절의 나르세스와 동명이인. 포카스는 지위를 보장해준다고 하고는 수도에 그가 오자 그대로 처형했다(...)
- ↑ 포카스를 붙잡았을때 헤라클리우스는 그대가 바로 제국을 이 꼴로 만든 자인가?"라고 물었는데, 이에 포카스는 "그대가 나보다 더 잘 통치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 헤라클리우스가 이 어처구니 없는 소리에 잠깐 당황한 사이, 분개한 주변 군사들이 그의 목을 베고 몸을 마구 난도질했다. 죽은 포카스의 시체는 여러 조각으로 잘려 사냥개들에게 던져졌다고 한다.
- ↑ 특히 이집트의 경우 콥트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자진해서 이슬람에 항복해버렸다(...)
- ↑ 불가르족이 몰려오는 등,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온갖 폭탄 덩어리를 떠앉게 되고, 이집트/아프리카 총독부 상실 이후 제국 역사에서 두고두고 위협이 되었으며,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서 지금의 화약고 발칸이 되었으니 제국이 입은 타격이 얼마나 막대했는지 뻔히 보일것이다. (...)
- ↑ 제국 전체에서 글을 아는 사람이 '많게 잡아' 3천 명(...) 역병크리와 페르시아 침공으로 제국이 멸망하나 싶던 시기에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 ↑ 6세기 전성기 때 제국 세수가 금화 500만~1000만 닢이었는데 8세기 말에는 세수가 160만 닢, 즉 많게 잡아도 200여 년 전의 3분의 1로 줄었을 정도였다.
- ↑ 이는 당시 이슬람 제국이 총력전으로 나가서 동원한 병력이었다. 반대로 보자면 이슬람 제국이 동로마를 잠재적인 위협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 ↑ 다만 제국을 칭하는 것은 서방에선 오로지 로마 뿐이라는 개념은 그 유명한 나폴레옹이 황제를 자칭하면서 깨지게 된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혁명제국이다. 다만 영국은 끝까지 유럽에선 제국을 칭하지 않았다. 무굴 제국의 제위를 가져가긴 하지만.
- ↑ 젊은 수녀와 신부들을 경기장에 강제로 끌어내서 옷을 죄다 벗긴 다음, 남녀 한 쌍이 손 잡고 경기장을 달리게 만드는 이벤트도 벌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손 잡은 남녀는 강제 결혼-합방한 후, 변방에 배치. 기독교 탄압에 광분했던 이전의 이교도 시절 로마 황제들도 이런 식의 AV스런 이벤트로 교회를 감히 모독하진 못했었다
- ↑ 당시의 여황제 이리니는 사실 제국 내에서도 그 행태에 의문을 품은 반대파가 많았다
- ↑ 그전의 제국 인구는 2600만이었는데 이때 인구가 1000~1300만으로 절반이거나 그 이하밖에 안된다.
- ↑ 몽골이 초창기 세력을 확장할 때 점령지를 어떻게 했는가를 생각해보면 된다.
- ↑ 십자군이 니케아, 도릴레온, 이코니온 등의 주요 도시를 탈환해 제국에 반환한 것은 맞지만 스미르니, 에페소스 등의 이오니아 해안도시와 코마, 트랄리스와 같은 메안드로스 강 유역 수복은 오직 제국군만이 전담했다.
- ↑ 십자군이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병크와 만행을 생각하면 이게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 할 순 없지만, 실리를 따져볼 때 이런 정책은 동로마 제국에게도 별로 득 될 게 없었다.
- ↑ 동로마 제국에 대한 십자군의 이러한 인식은 어휘 차원에서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Byzantine'이라는 영어 단어에는 '권모술수를 쓴; 복잡한, 미로처럼 뒤얽힌, 헝클어진'이라는 형용사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속이 복잡하게 배배 꼬여 있는, 음험한 능구렁이 같은 놈들(…)이라고 본 것.
- ↑ 그때도 성상 파괴주의로 대표되는 로마 교회 씹기 (...)와 롱고바르드족 침입의 사실상의 방치, 라벤나 총독부 개발살등, 서방과의 관계 악화와 외부의 군사적 위협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그때는 아나톨리아가 있기라도 했지, 이 시기의 제국은 군사 요충지인 아나톨리아가 증발해있는 상황이었다.
- ↑ 십자군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렉시오스 1세 항목에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 ↑ 애초에 밥 먹듯이 들락날락하는 콘스탄티노플 항이니 모르는게 더 이상하다.
- ↑ 이들은 투창을 주무기로 사용했는데, 실제로 투창은 갑옷에 대해 매우 효율적인 무기이며 동시에 기병돌격에도 상당한 저지력을 보여주는 무기다. 고대 로마군이 페르시아의 기병 돌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된 원인이 지나치게 비싼 필룸 가격 때문에 이를 폐지하기 시작한데서 비롯되었다는 견해도 있을 정도.
- ↑ 아시아 쪽 다르다넬스 해협 근처에 있다.
- ↑ 동로마 제국은 테살로니키가 오스만의 공격을 받고 포위되자 베네치아에게 도시를 양도했으나 베네치아도 테살로니키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 이 때문에 베네치아는 동로마에게 사기 당했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 ↑ 콘스탄티노플은 사실상 서유럽 국가들의 자유항 상태가 되어 있었으며, 대표적인 상업국가였던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선원이나 상인들은 물론 그들의 가족까지도 거주할 정도로 '제 2의 고향'에 가까웠다. 참고로, 황제의 요청을 받고 성벽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기까지 게양했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공방전에 임했던 베네치아 거류국과는 달리 갈라타의 제노바 거류구는 끝까지 공식적으론 중립을 표명했다.
- ↑ 이 때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베네치아인들은 투르크 복장을 하고 오스만의 포위를 뚫고 정찰갔던 베네치아인들이 구원 함대는 오지 않는다는 것이 확정되었을 때 '그곳이 생지든 사지든, 그곳에 그리스인이 있던 투르크인이 있던 우리는 돌아갈 것이다.' 라고 다수결을 통해 결정하고 회항했을 정도로 도시와 함께 뼈를 묻을 각오를 했다고 한다.
- ↑ 여기에는 로마 교황청이 파견한 용병대도 포함된다. 로마 가톨릭과의 통합 조건이 서유럽의 지원이었던 만큼, 통합의 주체였던 로마 교황청은 나름대로 지원을 보냈다.
- ↑ 주스티니아니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후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 ↑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 제국측 사료나 후대에 서유럽 역사가들이 쓴 사료를 보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는 순간 목을 맸다거나 겁을 먹고 도망치려다가 끔살당했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도 보인다. 이에 영국의 도널드 니콜(Donald Nicol, 1923~2003)은 대체 어느 것이 진상인지 알아내려 했으나 도저히 분간해낼 수 없었고, 다만 동로마인 역사가들은 그가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했다고 묘사하는 반면 오스만 투르크측과 서유럽의 사료에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만 확인했다고.이는 종교 문제 등으로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의 관계가 오랫동안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동로마를 까는 김에 황제까지 까자!' 라는 심보였다는 것
- ↑ 그러나 소피아 성당 같은 유명 건축물의 상당수는 메흐메트 2세의 명령에 의해 보존되었고, 서적류 문화재는 고위 공직자들이 베네치아 공화국 등 서유럽으로 망명하면서 가져갔기에 일부는 보존되었다.
- ↑ 토마스는 친서유럽에 반오스만적이었고, 디미트리오스는 서유럽 세력에 반감을 가진 한편 오스만에 호의적이었다.
- ↑ 데메트리오스는 메흐메트의 봉신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망명하지 않았는데, 메흐메트는 정복이 끝난 모레아를 그에게 돌려주지 않고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선포했다. 당시 신하들 가운데 한 사람이 메흐메트에게 왜 디미트리오스를 공작에 앉히지 않느냐고 묻자, '그 정도의 재능으로는 어떤 나라를 주더라도 과분하다' 라고 답했다고.
- ↑ 다만 명칭만 조금씩 달랐을 뿐이지, '제 3의 로마' 를 칭한 나라는 이전에도 많았다. 먼저 세르비아 왕 슈테판 우로시 4세(슈테판 두샨, 1331~1355)는 1346년에 황제를 칭하면서 '모든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황제' 를 자칭하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려 했고, 불가리아의 황제 이반 알렉산더르(1331~1371)도 불가리아의 수도 투르노보를 '제 2의 콘스탄티노플' 이라 불렀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메흐메트 2세도, '카이세르 룸'. 즉 '로마 황제' 를 칭했다.
- ↑ 이 쪽은 안드로니코스 2세의 4남인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로부터 시작된다.
- ↑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 단절되는 합스부르크 본가와는 구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