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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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의 모습. 총 31명이 서울에 침투했으나 그중 김신조 단 한사람만이 생포돼 살아남았을뿐 도주한 2명을 제외한 나머지 28명은 모조리 죽음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1968년 1월21일자 동아일보)
출처: 뉴스뱅크이미지
내래 청와대 까부수고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소.

이 말은 기자회견에서 나온건데 이 때의 모습과 체포 당시의 얼굴이 약간 다르다. 기자회견 때 모습이 좀 살이 붙었는데 방첩대원에게 두들겨 맞아서(...) 얼굴이 부었다는 얘기가 있다고. 혹은 며칠간 코렁탕을 허겁지겁 먹었거나 MBN의 프로그램인 황금알에서의 증언에 따르면 기자회견에 대한 언질조차 주지 않은채 수갑채우고 의자에 앉혀 기자회견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1 개요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1] 정찰국 소속 공작원(124부대)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하여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하였던 사건.

총 침투한 31명중 사살 29명[2], 미확인 1명, 투항 1명(김신조 소위)의 전과를 올렸다.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이 사건을 일명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김신조는 이튿날의 기자회견에서 침투 목적을 묻는 기자에게 "내래 박정희 멱 따러 왔소!"라고 밝혀 온 국민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원래 북한에서 최초로 세운 작전은 세자리 숫자의 병력을 침투시켜서 본대는 청와대를 기습해서 박정희 대통령 암살하고 나머지는 각 조별로 미 대사관 공격 및 요인 암살, 국방부 공격 및 요인암살, 교도소 공격후 죄수 석방 등 서울 시내에 총체적인 대혼란을 유도하고 석방시킨 죄수와 공격조가 동반 월북 후에 삐라를 뿌려서 남한내 반정부 세력의 의거로 꾸민다는 대규모 계획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한국판 테트 대공세를 노린다는 것이다.[3] 그러나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작전을 축소해서 30여명을 침투시켜서 청와대를 습격하는 것으로 최종결정이 난것이다. 참고로 김신조는 원래 교도소 공격조였다고 한다.

2 김신조 루트


1월 13일 북한군 정찰국장에게서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124 부대원 31명은 1월 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의 제6기지를 차량으로 출발한다. 18일 휴전선을 돌파했다. 19일 꽁꽁 얼어붙어 있던 임진강을 걸어서 횡단, 경기도 고양시 삼봉산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그 후 20일 앵무봉을 통과하여 비봉-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21일 밤에는 세검정파출소 관할 자하문초소까지 이른다.

이때 북한의 암호지령이 내려왔으나 해독하지 못하였다. 당시 침투한 병력 중 암호를 전담하는 인원이 없었다고 한다.그야말로 병맛의 진수

미 육군 2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던 서부 철책선 근무는 허점이 너무나 많았으며, 특히 미군과 한국군의 담당지역의 경계선을 따라 침투하여 더욱 손쉽게 돌파 가능했다고 한다.

124 부대원들은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초리골의 야산에서 우연히 나무꾼 우씨 삼형제와 마주쳤는데, 눈 덮인 산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 번거롭다[4]는 것과 무산계급인데 설마 신고 하겠느냐는 이유로 투표를 통해 그들을 살려주기로 하고 "신고하면 가족들을 모두 몰살시키겠다"라 덧붙이며 풀어주었다. 그리고 나무꾼 형제는 곧바로 인근 파출소로 달려가 신고...[5] 일설에 따르면 김신조 일당은 우씨 삼형제를 "동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걸 들은 나무꾼 형제들은 저것들 공비구만 하면서 기겁했다고.

이런 치명적인 실책을 범해서 나무꾼들이 경찰에 신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자하문 초소에 도달하기 전까지 아무 검문도 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방첩대 마크 때문이였다. 이들이 군복의 방첩대 마크를 내보이면서 마법의 단어 방첩대만 언급하면 경찰이고 군부대고 달려나와서 무조건 열어줬다고 한다.

3 자하문 초소 전투

자하문초소에 당도한 124 부대원 31명은 드디어 이곳에서 검문을 받게 된다.[6] 부대원들은 이전처럼 "우리는 CIC 소속 대원이다. 특수훈련을 마치고 복귀 중인데 방해하지 말고 비키라"고 다그쳤지만, 대량의 병력 이동을 보고받지 못했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지휘하는 경찰 병력이 그들의 진군을 막아섰다. 하지만 때마침 버스 2대가 길을 따라 올라오는 것을 보자 지원 병력으로 오인한 124 부대원들은 경찰 병력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버스에 수류탄을 던진 뒤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김신조의 회고에 의하면 버스에 국군 병력이 대거 타고 있다고 오인한 것인데 사실은 그냥 시내버스였다.(...)

종로서장 최규식 총경과 정종규 경장이 현장에서 전사하고 기타 많은 경찰이 부상 당했으며, 버스에 던진 수류탄 때문에 민간인 사상자까지 발생한다.

그 뒤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29명 사살, 1명 투항(김신조 소위), 미확인 1명이 생포되었다. 우리측의 피해도 상당했는데 최규식 서장을 비롯하여 제1보병사단 15연대장 이익수 대령[7]이 교전 중 피격당해 전사했고, 특히 도주과정에서 무차별 사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여러건 발생하기도 했다.(결혼 예정이던 아가씨나 중학교의 수위 등 일반인...) 심지어는 참관겸 작전 지도차 온 주한미군 병사도 사망할 정도였으니. 총 32명 사망(군 장병 25명, 민간인 7명)에 52명이 부상을 당했다.

4 진행

사건 직후 고양군파주군, 일대에 통금이 떨어졌다. 1월 23일까지 지속.

1월 22일 새벽 2시 25분에 제30사단 92연대의 잠정 1개 중대와 5분 대기조가 인왕산 하단의 세검정 계곡에 있던 독립가옥에서 무장공비를 발견하였다. 상당한 교전을 주고 받다가가 군에서 "나오면 살려준다"라고 회유하니 결국 무장공비 1명이 수류탄을 들고 나왔다. 자폭할 수 도 있는데 그냥 떨어트리고 손들고 나왔다. 그가 바로 김신조 소위였다. 이때문에 국방부 공식기록은 '생포'였고, 세월이 흐른 후 책이나 언론에서는 '투항'이나 '자수'라는 용어도 쓰인다. 정황상 어느쪽으로 우겨도 대충 맞는듯. 김신조는 아예 독립가옥에서 전투가 없었고 자신은 검문을 피하기 위해 무기와 장비를 모두 드보크에 묻어두고, 자폭용 수류탄 한발만 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자수가 맞다고.

04시 15분경 김신조를 인계 받은 방첩대는 그를 보자 마자 '무기 어디에다 숨겨뒀냐?'라고 물었다. 김신조의 직접 안내로 특공대원 25명은, 전날 김신조가 매복했던 비봉 승가사 옆 200미터 지점에서 드보크를 찾아 침투시 일부 장비를 회수 하였다. 이후에도 김신조는 정보 제공등의 방법으로 공비 소탕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이부분에 대해 자세한 것은 2016년 6월 28일 출판된 당시 방첩부대 특공대장이었던 이진삼 대위(육군참모총장으로 전역)의 '별처럼 또 별처럼' 참조)

이때의 무장 공비 사건으로 공비들이 엄청난 능력을 갖추고 었다는 인식이 강한데, 김신조의 증언에 의하면 체포후 자신과 함께 산악지대를 누볐던 남한 특공대원들이, 북한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자신하고 실력이 똑같았다고 한다. 김신조가 산에서 조낸 뛰었는데도 특공대원들이 옆에 딱 달라 붙어 뛰었다고 한다. 김신조는 체포된 상태라 맨몸으로 뛰고 특공대원들은 총기와 장비를 휴대한 단독군장 차림이였는데. 후덜덜... 남한에도 북파공작원 정도는 있습니다만

5 결말

  • 이 사건으로 김신조 루트로 불리던 경기도 양주시부터 서울 우이동까지 북한산 자락을 잇는 우이령길 6.8Km가 민간인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이 길은 2010년 2월 27일 41년만에 민간에 개방되었다. 현재는 서울 북악산에 소재하고 있는 김신조 루트가 트레킹 코스로 개발되어 북악하늘길의 제2산책로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또한 북한산 우이령길은 북한산둘레길의 한 코스로 개방되어 있는데 완전 개방은 아니다. 이곳을 가려면 인터넷이나 전화를 통해 탐방 하루 전에 예약을 해야 하며, 탐방할 때 본인 확인이 가능한 신분증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예약해 놓고 본인확인이 안 돼서 퇴짜 맞을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또한 하루 입장 가능 인원도 송추 방향에서 5백 명, 우이동에서 5백 명으로 하루 1천 명의 인원 제한을 두고 있다. 관련 사이트. 이곳에서 예약도 가능하다.
  • 자하문 초소 전투에서 전사한 최규식 총경은 경무관으로 추서되었고, 창의문 남쪽에 그를 추모하는 동상이 서 있다. 그런데 정작 최규식 경무관이 순직하신 곳은 그 곳이 아니다. 또한 총격이 벌어졌던 주변 지역에는 '총알소나무'라는, 당시 총격전 사이에서 15개의 탄흔이 남아 그 당시 흔적을 남긴 나무가 남아 있으며 1박 2일에서 소개되기도 하였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꾸 그 탄흔에 손가락을 넣자 수지로 그 구멍을 메워 버렸다(...)
  • 부상 경찰관 중 정종수 경사는 며칠 뒤 병원에서 사망. 창의문 최규식 경무관 동상 왼편에 순직비가 있다. 당시 소속이었던 종로경찰서 현관에는 흉상 건립.
  • 침투부대원 중 유일한 생존자 김신조는 이후 남한에서 개신교 목사로 살고 있다.본의 아니게 탈북한 셈 교과서에도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밖에 다니기 어려워서 개명신청을 하여 김재현으로 살고 있다. 목회 생활 외에 예비군 정신교육 등 안보 강연에도 가끔 참석한다. 먹고 살 방법이 없어 사실 안보강연이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3천회 넘게 했다고 한다. 술집에서 오줌누던 중 웬 청년한테 뒤통수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얼굴을 알아본 청년이 "너 때문에 군대에서 개피봤다."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라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수도 서울이 털리는 희대의 사건때문에 육해공군의 복무기간이 최대 6개월 이상 연장돼서 당시 청년들의 증오가 장난이 아니었던 것. 김신조는 그냥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한다.(...) 또 민간인까지 살상한 살인마가 버젓이 방송에 나온다며 김현희와 함께 욕하는 사람들도 아직까지 많다. 일단 김신조는 자신은 '자수'를 하였으며 직접 죽인사람은 한명도 없다고 한다.
  • 처음 이 사건 수사를 맡은 쪽이 육군 방첩대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신조에 대한 공작을 철저히 해서 그가 북한을 비난하는 쪽으로 기자회견을 하도록 만들어야 했는데, 그런 과정 생략하고 기자회견에 내보내서 위에 나온 "내래 박정희 멱 따러 왔소!"는 말이 실시간으로 전국으로 생중계되면서 전국민이 기절초풍했고 웬만해선 정치 개입안하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방첩대에 한마디하기까지 했다. 사건 직후 육군 방첩대장 윤필용 준장은 20사단장으로 좌천되고 후임 육군 방첩대장에 김재규가 임명되었다. 사건의 여파로 육군 방첩대의 위세가 꺾이고, 중앙정보부가 득세하게 되었다. 육군 방첩대는 몇달후 육군 보안사령부로 전면개편되었다.
  • 경계의 허점을 노리기 위해 두 개 부대의 담당구역이 겹쳐지는 부분이 서로서로에게 떠넘기는 심리에서 허술할 것이라 판단하고 침투지점으로 선택되었다. 이것 역시 이 사건 이후로 개선된 사항.
  • 이 침투사건을 진압한 부대가 당시는 서울지역 향토예비보병사단인 제30기계화보병사단이었는데 이 일로 제1땅굴을 발견한 제25보병사단과 함께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물론 유명한 부대인 이유는 특유의 사단마크가 약 70%를 차지하지만
  • 4년 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심야 만찬을 베풀며 이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이 때 김일성이 남긴 말은 이렇다. "청와대 습격은 우리 공화국 내부의 극좌 분자들이 임의로 일으킨 사건이오. 박 대통령을 죽인다고 남조선이 없어지겠소? 나를 죽인다고 우리 공화국이 없어지겠소?(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같은 논리란 말이오. 이 사건을 보고 받은 뒤 관련자들을 모두 철직(해임)시켰소. 남조선으로 돌아가거든 박 대통령에게는 미안한 일이 되었다고 꼭 전해주시오."못 믿겠다 가능성은 있는게 당시에는 김정일이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북한의 대외 특성이 하나 생겼는데, 자기들이 자랑하고 싶은 테러행위는 자랑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부인하고 사과하는 특이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 꿀꿀이가 하는 짓을 보면 저때만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 당시 이 사건을 계획한 북측 인물로는 김창봉, 허봉학, 김정태 등이었는데, 이들은 대남사업으로 업적을 쌓아 김일성에게 신임을 얻고 난 뒤 김일성의 동생이자 권력 서열 2인자인 당시 로동당 조직부장 김영주를 끌어내리고 군과 당권을 장악하여 김일성의 뒤를 이으려는 욕심으로 일어났다고 알려진 내막이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1962년 이후 국방력을 강화하면서 군부의 힘이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이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도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다.
  •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자신의 회고록 '혁명과 우상'에서 북이 청와대의 세부구조를 알았던 것은 남한내의 간첩의 도움이었다고 술회한다. 정확하게는 청와대 근무 직원의 부인이 간첩이었는데 그녀가 음부에다가 청와대 배치도를 넣어두었다는 것(…). 이것을 자신이 손수 적발하긴 했는데 응? 어떻게? 높으신 분들이 뭐라고 해서 풀어주었고 그래서 김신조 일행이 청와대 구조를 알 수 있었다는 건데, 이 사람 회고록의 신빙성은 말이 많으므로 그냥 이런 의견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자.
  • 당시 침투조가 사용했던 장비들(PPS-43 기관단총, 토카레프 권총, F-1 세열수류탄, RPG-43 대전차수류탄, 절단기, 단검 등)은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볼 수 있다.

6 사건의 직접적인 여파

위의 결말부에서 대부분의 중요한 이야기는 나왔지만, 그밖에 이 사건이 후세에 크게 남긴 영향이 몇가지 있다.

  • 주민등록번호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13자리만 알고있어도 어느정도 그사람 행세가 가능한 매우 중요한 개인정보이지만, 간단한 회원가입시에도 심심찮게 요구하고, 이미 전국민이 한번 이상은 털릴 정도로 유출이 되어 말도많고 탈도많은 제도가 탄생한 만악의 근원이다.유용한 점도 있긴하다만 이미 털릴대로 털려서.. 참고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주민등록 뒷번호는 100001 이며 아내인 육영수 여사는 200002이다. 나중에 개정을 통해 뒷번호 두번째와 세번째 숫자는 출신지역으로 변경되었다. 그런 말인 즉, 박정희 대통령이 지금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을 경우 100001이 아니라 1710001이 되었을 것이다.
  • 군대를 가는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성에게 남긴 것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예비군5분대기조, 그리고 육군3사관학교가 이 사건 때문에 창설되었다는 것. 그리고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도 이에 대비하기 위해 그 후 매년 실시하고 있다. 게다가 당시 복무기간이 축소되던 중에 있었는데 이 일로 현역병들은 육군/해병대는 6개월(36개월), 해군/공군은 3개월(39개월)씩 복무기간이 연장되었다.듣기만 해도 치가 떨린다 만악의 근원 그 당시 제대할 날짜만 세고 있던 말년병장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 복무기간뿐 아니라 이 사건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훈련 강도가 세졌고 군기가 대대적으로 확립되었다.행군할때도 완전군장 챙기고 행군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이 사건 때문이다 당시 말년병장이었던 분의 회고를 들어보면 제대 날짜 세면서 매일 개울가서 천렵하고 낚시하는데 갑자기 간첩이 넘어왔다고 하더니 삼킬로 짜리 모래주머니를 발에 채우고 매일 뛰게 시켜서 지옥 같았다고 한다. 이 사건 이전에는 지금 군대로는 상상할 수 없는 당나라 군대였다고. 우리가 알던 쌍팔년도[8] 군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유격 훈련이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생겨났다고 한다. 김신조 본인이 말했으니 신빙성이 있다. 이 때 늘어난 복무기간은 육군의 경우 1977년, 해/공군은 1979년이 되어서야 그 이전의 기간과 비슷한 수준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육군 33개월, 해/공군 35개월)
  •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경찰 차원에서 유사시 대간첩작전등에 동원할 병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경찰청이 전투경찰순경을 창설한다. 이 제도를 이용해 육군해군(→해경 전경)의 전력을 대용하는 전환복무를 실시하게 되는데…. 지금 현실은 다들 아시다시피 하루하루 시위 진압하는 로봇 기계 부대.
  • 당시 침투할 때 철책의 기둥 바깥면에 있는 쇠망에서 기둥에 가려진 부분을 끊어놓고 들어와 안에서 얼핏 보면 끊어진 구간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철책경비시 계속 망을 흔들어 보면서 진행하는 절차는 이러한 것을 감지하기 위한 것.
  • 이들이 이렇게 깊숙히 침투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마법의 말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국군에서 장교와 부사관이 원리원칙을 어기더라도 병사들이 거기에 거역하지 못하는 문화가 있는 것을 연구하여 국군과 접촉할 때마다 배짱 좋게 "나 간부다."라고 하고 넘어갔던 것이다. 사실 일반 사병에게는 간부다라고 했고 고위 장교가 물어볼때는 우리는 방첩대 내지는 북파 특수부대라고 했었다. 최규식 총경이 씹는 바람에 막혔던 것이지만[9] 그나마 이런 사건사례들이 많이 전파되면서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비슷한 사례들은 8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된다. 요즘에도 이런게 통한다는게 함정[10]
  • 이 사건의 보복을 위해 창설된 부대가 바로 684부대. 실미도(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북한 공비들과의 교전이 이 1.21 사건이다.
  • 육군소령으로 복무 중이었던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사건이 일어나기 석 달전 집필한 <혁명전쟁과 대남전략>이, 사건 발생 후 이북의 대남전략을 연구하는 육사, 군, 경찰, 중앙정보부 교육기관의 교재로 채택되어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이후 율곡사업의 실무진[11]으로 발탁되는 등 승승장구.
  • 이 사건 때문에 북대문(숙정문)이 쭉 폐쇄되었다가 2006년 4월 민간에 개방하였다.
  • 우이령 도로가 폐쇄되어 빙 돌아가야한다.[12]
  • 7~80년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실습이 실시되었다.

7 생존자

추정 인원이나 생사 불명 인원에 대해서는 말이 상당히 많았다. 일단 시체의 신원 확인도 김신조의 입회하에서 했지만 머리가 으스러지거나 화염방사기에 구워진 시체가 많아서 식별은 본인도 어려웠다고 한다.

80년대 자료에는 생사불명 1인은 북한에 가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사실은 32명이었는데 하나는 살고 하나는 북에 올라가서 부상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2004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신조 목사는 이 한명은 북으로 도주하였으며, 이후 2000년에 송이버섯을 들고 서울땅을 밟은 박재경 대장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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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덕분에 출세했소 vs 내래 살아서 다시왔소.[13]
2000년 9월 11일, 신라호텔 에메랄드 룸에서 열린 칠보산 송이버섯 선물 전달행사. 가장 좌측은 임동원 대통령 특보, 우측 끝은 박재경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부국장. 박재경 대장은 당시 송이버섯을 전달하러 방문한 김용순 특사의 수행원이었다.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귀환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개성 CIQ에서 박재경(좌측) 인민무력부 부부장에게 송이버섯 선물을 받고 있다.

그런데 2015년 7월, 박재경이 자신이 현영철에 이어 다음 숙청 타겟이 된 것을 알고 해외로 망명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사실이라면 참으로 인생무상인듯. 어떤 의미로 인생이 스펙타클하다...

8 기타

  • 김신조의 자서전('나의 슬픈역사를 말한다' 동아출판사, 1994)에 의하면 침투당시 수신했으나, 암호담당자가 없어서 해독하지 못했던 암호를 훗날 중앙정보부에서 해독해보니 내용이 원대 복귀였다고 한다.괜히 침투했잖아 이 내용은 TV조선의 방송과 2014년 11월 30일 자 팟캐스트 방송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에도 소개되었다.
  • 80년대 나온 어린이 반공동화에서는 고 최규식 총경이 죽으면서 6.25 전쟁때 공산당에게 살해된 아버지를 그리는 장면이 나왔는데, 일설에 의하면 최규식 총경의 아버지는 유명한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14]이었다고 한다.
  • 이 사건에 관해, 행정법학계에서는 행정개입청구권과 관련한 중요한 판례가 생기게 되는데, 당시 체신부 공무원이던 이용선씨의 집에 들어온 이들을 이용선씨가 대적하는 동안 가족이 60~70미터 떨어진 군경진지로 가서 출동을 요청했으나, 군경이 출동하고 안 하고는 자신들 재량에 달려있다며 개입을 거부하고 무려 15분이나 지난뒤에야 출동하는 일이 벌어졌다. 용감하게 격투를 벌이던 이씨는 결국 사망했으며 가족들은 당연히 국가손해배상 재판을 걸었는데, 많은이들이 군경의 늦장대응에 의문을 표하는 과정을 거치며 결국 이용선씨의 유족들이 재판에 승리하게 되었다. 당시 판결에 따라 '아무리 경찰이 출동하고 마는 일이 재량에 달려 있을지라도, 위급·긴급한 상황이 발생함에 따라 재량이 0으로 수축되면 즉시 개입해야 한다'는 원칙이 확정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는 것. 판결문 일부를 발췌하자면 이렇다.
무장공비색출체포를 위한 대간첩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파출소 소장, 순경 및 육군 장교 수명 등이 파출소에서 합동대기하고 있던 중 그로부터 불과 60-70미터 거리에서 약 15분간에 걸쳐 주민들이 무장간첩과 격투하던 주민 중 1인이 무장간첩의 발사 권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면 위 군경공무원들의 직무유기행위와 위 사망인의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대판 1971. 4. 6, 71다124)
  1. 현 인민무력부
  2. 김춘식이라는 공비 1명도 생포되었으나 치안국으로 압송하는 과정에서 무장해제 도중 숨겨둔 수류탄으로 자폭하여 사망함. 이 과정에서 우리측 피해는 없었고 사살로 포함함.
  3. 실제 동년 10월달에는 후방에 유격전 근거지(해방구)를 만듭답시고 울진, 삼척 지역에 100여명 규모의 대규모 게릴라를 침투시켰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항목 참조.
  4. 후일 김신조의 인터뷰에 의하면 작전 도중 만나는 민간인은 모두 죽이라고 지침을 받았는데 시체를 숨기기 위해 한겨울에 꽁꽁 언 땅을 파기 귀찮아서 그냥 살려줬다고 한다. 동료들중에서 죽이자는 사람도 있었는데 김신조는 말렸다고. 집어 치우시라요! 겨울에 땅파기 얼마나 심든지 알기요? 동무! 훗날 모 종편방송 인터뷰에선 4형제 중 2명은 돌아가시고 나머지 분들과는 아직도 연락하고, 만나기도 한다고 했다. 인터뷰에선 위키와 달리 4형제라고 언급했다.
  5. 북한 상부에서는 민간인 만나거든 그냥 쓸어버리라고 지침을 내렸기 때문에 좀 많이 다른 이야기지만, 미국 영화 론 서바이버(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나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도 나오는 소재로 이런 상황이 닥쳤을때 적에게 아군의 존재를 누설할 것이 뻔한 이 민간인을 죽여야 하는가, 냅둬야 하는가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한다는 전제하에(북한은 제대로 된 생각을 안하는 놈들이니까...) 복잡한 딜레마가 된다. 아군의 입장에서 이들을 살려보내면 더 많은 아군이 희생될 테지만 군인도 아닌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절대 옳은 일이 아니며 아군의 대외 이미지 관리 면에서도 이득이 될 게 없기 때문. 영화 론 서바이버에서는 4명의 네이비씰 대원들이 자신들을 발견한 양치기 3명을 죽일지 살릴지 의견이 서로 갈렸는데 결국 지휘관인 마이클 머피 대위가 풀어주라고 결정 하였다. 그리고 풀려난 양치기 소년이 탈레반에 알려서 네이비씰 대원중 3명은 사망, 구원나온 치누크 헬기가 격추되어 탑승자 20명 몽땅 사망 크리. 이때 유일한 생존자가 론 서바이버의 저자 마커스 러트렐이다.
  6. 북한의 암호 지령을 풀지 못한 상태에서 원래의 계획대로 행동한 것이었다.
  7. 사후 준장으로 추서되었다.
  8. 88년도가 아니다!
  9. 비슷한 시기를 소재로 한 이문열의 필론의 돼지라는 작품에 보면 북파공작 특수부대를 자처하는 인간들이 제대병들 돈을 뜯고 구타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10. 농담이 아니라 수하에 불응할 경우 총맞아도 할말없는 GOP 같은 최전방 지역이 아닌이상 씹는 경우가 있다. 경계병이 수하를 계속 시도할 경우 응하기야 하지만 이후 못알아봤다고 폭갈하는 그런 지적으로 부족한 새끼가 지금도 진짜로 있다. 경계작전의 성공여부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수하, 야간수하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그걸 강조해도 모자를 군 간부가 이를 무시하고 횡포를 부리는 것을 말하는 것에 대해 새끼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다지 과한 것이 아니다.
  11. 실무진의 책임자격이었던 고 이재전 장군이 쓴 회고록이 국방일보에 연재되었으니 참고바람
  12. 현재는 환경단체의 반발 때문에 도로 통행이 안된다.
  13. 위의 사건여파 항목 참조.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평안도 출신.
  14. 적어도 친척관계인 건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