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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기사.
1 에퀴테스
Equites.
라틴어로 기병을 의미한다. 고대 로마의 원로원 의원 다음가는 신분이다. 원래는 말에 타고 군무에 종사하는 사람을 의미하였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으나, 점차 일정한 재산과 자격을 구비한 사람이 이 계층에 들게 되었다. 초기 왕정 로마의 군사제도에서는 병사 자신의 재산으로 무장을 구입해야 했기 때문에 말을 사서 무장할 수 있을 정도의 재산가만이 에퀴테스가 될 수 있었다. 후에 군제 개편에 의해 로마가 직업군인제로 바뀌면서 기병이라는 의미보다는 재산가라는 뜻으로 쓰이게 된다.
과거 카이사르가 기병 부족으로 허덕일 때 굴러다니던 게르만족 기병을 로마 기병으로 고용하자, 그 게르만인들은 자신들을 인정해준 카이사르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했고 카이사르의 게르만 기병대는 사실상 카이사르의 충복 중에서도 핵심 충복으로 일컬을 정도였다.
로마 공화정 말기에는 점차 로마의 직업군인이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동시에 병사 출신인 에퀴테스들이 상업이나 무역 등에 종사한다는 것을 빌미로 원로원 의원 신분에 걸맞지 않는다 하여 그들이 상업이나 무역 등에 종사하는 것을 한동안 금지하고 각종 국가사업이나 징세를 맡기도 했다.
제정기에는 황제 원로원 대책 때문에 황제 직속의 궁정 관료로서의 위치까지 점하였으나, 제국의 쇠퇴와 더불어 점차 정치적 힘을 잃었다.
2 나이트
Knight.
합법적 무장 깡패
중세 서유럽에서의 무장한 기병을 뜻한다. 현대 영문권의 '기사'는 거의 다 이런 명칭으로 불린다. 국가마다 캐벌리어(Cavalier), 리터(Ritter), 슈바리에(Chevalier), 까바예로(Caballero) 등등으로 불렀다. 영어의 '나이트'는 독일어에 뿌리를 둔 고대 영어 cniht에서 유래된 말로, 소년 혹은 시동을 의미했고 그 시동의 뜻이 점점 더 확대 해석이 되어 왕의 부관들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아래의 역사 항목에 후술되겠지만 왕의 부관으로서 역할이 더 세분화되면서 왕을 따르는 중기병 특권 계층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2.1 역사
프랑크 왕국에서 사라센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전사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그 땅에서 말 좀 키워서 전쟁 때 타고 나와라."고 한 게 중세 기사의 효시가 되었다는 게 고전적인 중세기사론이다. 요즘은 사라센 기병은 소수였고, 그나마도 프랑크족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상태다.[1] 여기에 덧붙여 봉토를 받은 기병의 양성은 등자가 8세기 초엽 서유럽으로 전래되면서부터 군사적인 이용가치가 늘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1950년대 이래로 유력하게 떠올랐으나, 최근에는 서유럽의 등자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시기는 9세기 이후이고, 봉토 분배 이전에도 프랑크에는 다수의 승마전사들을 운영했음을 이유로 등자가 기사계급 등장의 절대적인 요인을 부정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이 설에 따르면 기사 계급의 등장은 등자보다는 8~9세기 이후의 농업생산력 증대, 샤를마뉴의 친 귀족정책 및 확장 정책에 따른 약탈로 인한 경제적 부흥, 마자르족의 침입과 바이킹의 약탈에 대한 빠른 대응의 필요성, 이민족의 침입과 각 지역의 고립으로 인한 인구급감으로 대규모 중보병대보단 소수정예의 필요성[2]에 의해 말을 탄 기사 계층 및 기병 위주의 전술이 대두되었고, 이 이후에 중세 농업혁명과 등자 및 카우치드 랜스의 등장으로 기사의 초기형태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즉, 하나의 이유만이라기보다 여러가지 복합적 이유 때문에 고대의 대규모 중보병대에서 중세의 소규모 중기병대로 편제가 변화한 것이고, 여기에 등자와 랜스가 중기병대의 효율성을 극대화시켜주면서 이러한 경향이 고착화 되었다는 것으로 보는게 옳을 것이다.
어느 쪽이던 중세 기사의 시초는 프랑크 왕국의 샤를 마르텔부터 시작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그 전까지 프랑크 왕국의 병사들은 자유민 보병이었다는 증거가 많다. 이게 점차 비용이 많이 드는 중장갑 기병으로 넘어가면서 기병들에게 봉토를 내리고 이것이 봉건제로 발전해 나갔다는 설이 주류.
중세 초에는 무기와 갑옷과 말을 지니고 무사에게 요구되는 수준의 높은 훈련을 거친 인물이라면 누구든지 기사가 될 수 있었다. 갑옷과 무기가 비싸니까 땅을 소유하고 돈이 많은 귀족이 기사가 되기 편한 게 당연하지만, 장비와 실력만 있다면 누구든지 기사가 될 수 있었으며 사실상 기사란 직업의 일종이었다. 12세기 정도까지는 기사가 되는데 딱히 고귀한 태생일 필요가 없었고, 딱히 귀족이나 왕이 기사 직위를 하사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봉토를 하사받아 왕을 섬기는 기사가 될 수도 있지만,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독학으로 무술을 익히고, 열심히 쇠고리 뜨개질을 해서 자작 체인메일을 만들어 입고, 야생마 한마리 길들여서 올라타곤 "나는 기사요."라고 자칭해도 그는 기사가 맞다.하지만 홀로서기는 힘드니까 대체로 마스터(스승 기사)를 모시면서 무술을 배우고 충분히 장비를 장만한 다음, 마스터가 "너도 이제 당당한 기사다."라면서 죽빵을 갈기면 기사가 만들어지는, 기사가 기사를 키우는 전통을 따랐다. 중세 초의 기사는 말탄 고급 군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중세 초기의 기사들은 보통 다들 투잡을 뛰었다. 원래 농장을 운영하다가 전시가 되면 상급 영주의 호출에 따라 전장에 나서고, 40일간 복무하다가 돌아와서 다시 생업에 종사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봉급을 받는 전문적인 군인이라기보다 '훈련된 부농'이라든지 작은 장원의 영주라든지 하는 경우가 많아서 전시에 생업을 관리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에 따라 주종관계를 맺은 주군이 가신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고 쌍무적 계약관계가 성립되기 시작하면서 기사는 오로지 전문적인 군인으로 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세 중기부터 기사란 게 가문이나 혈통에 주어지는 계승 직위가 되기 시작하면서, 기사라는 것이 준귀족화 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기사는 기사로 태어나는 것, 또는 군주가 하사하는 것이 된다. 군주는 기사의 직위를 준귀족의 개념으로도 하사하기 시작하며, 귀족도 자신의 가신에게 반영구적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기사위를 부여하여 하우스홀드 나이트를 만들기 시작했고, 기사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는 아버지의 기사 직위를 물려받아 기사가 되었다. 즉 기사 가문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게 된다. 때문에 출신만 된다면 기사로서 훈련을 쌓지 않아도 명목상 기사로 불릴 수는 있었다. 장자상속에 따라 작위를 얻지 못한 귀족의 차남 등등은 대신에 기사를 타이틀로 얻는 일도 빈번했다. 귀족 태생이거나 기사 가문 출신이 아니라면 기사가 되기가 매우 힘들었다. 평범한 병사가 전장에서 용맹을 보이고 왕의 눈에 들어 기사가 되는 일도 존재는 했으나, 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위에 언급된 기사들은 모두 화약무기가 크게 발달하면서 근접 전투방식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사실 화약무기 도입 초창기에 갑옷이 화약무기에 대항해 두꺼워지고, 투구와 흉갑만 두툼하게 만드는 식으로 나름대로 대항해가다가 어느 순간 무너졌듯이, 기사 역시 화약 무기 도입 초기에도 여전히 마지막 전성기를 누렸고, 총포를 다룰 줄 아는 기사도 있었을 정도로 어느 정도까지는 공존했다. 기사가 무너진 것은 총화기의 도입과 함께 군사 편제가 진화해나가며 결국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국민병 제도로 이행해나가는 과정에서 기사제도가 사회, 군사적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2.2 무기
일반적으로 기사하면 떠오르는 무기는 검과 랜스다. 특히 검은 기사의 상징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기사서임할 때나 맹세할 때를 비롯한 기사의 의례용품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특히 중세에 기독교가 정착되면서, 십자가의 형태와 비슷한 디자인의 장검은 상징적으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투를 앞두고 십자가를 대신해 검신에 키스하는 등의 관습은 유럽에서 흔한 일이었다.
기사의 검은 롱소드라고 알려져있지만, 이는 롱소드라는 단어를 한손검으로 생각하는 데에서 나온 잘못된 인식이다. 도검사에서 롱소드는 한손반-양손검을 말하는 것이고, 전통적인 기사의 부무장인 검은 한손검인 아밍 소드다. 그래서 아밍 소드를 나이틀리 소드(기사검)라고 부르기도 한다. 판금갑옷의 대두로 양손무기가 주력이 되면서 롱소드의 비중이 높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마상 사용과 지상 사용, 일상의 부무장과 전쟁용 부무장 모두를 겸할 수 있는 한손검인 아밍 소드와 그 후계 도검은 중세와 르네상스를 통틀어 꾸준히 애용되어 왔다.
검은 중장갑에 비효율적이라 실제 전장에선 도끼나 메이스 같은 둔기가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의견도 있는데, 윌리엄 1세가 벌였던 헤이스팅스 전투의 유적지 발굴에서 검에게 베인 체인메일 같은 유물이 발견되면서, 전장에서도 검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중세 기사들의 무기는 현대처럼 규격화된 것이 아니라 자비로 장만하는 것이라, 같은 기사라도 무기는 천차만별로 다를 수 있었다.[3] 게다가 기사의 무장은 다종다양한 무기를 갖추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 검의 장점으로는 무게중심이 손잡이 부분에 있어서 다루기가 쉽고[4], 적은 힘으로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으며, 둔기보다 리치가 긴 편이다. 실제로 같은 무게의 둔기에 비해 검이 리치가 길다. 둔기는 헤드에 무게를 집중시키느라 무게 효율이 좋지 않은 편이다.
또한 칼집과 소드벨트를 이용해 패용하기 때문에 다른 무장의 유무에 관계없이 항상 부무장으로 휴대하기도 좋았다. 말하자면 현대 군인들의 권총과 같은 역할이었다. 하지만 방패와 함께 사용하면 창이나 도끼 같은 장병기에 대해서도 충분히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주무장으로도 손색이 없으며, 한손반 그립을 가진 장검계열은 방패를 버리고 양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중세 후기에 장창대열이 생기고 나서는 투핸디드 소드(츠바이핸더) 같은 양손으로만 쓸 수 있는 거대한 검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거대한 검은 장창을 쳐내고 파고들기에 좋았다. 다만 그러한 거대한 양손검이 전장에서 활약한 장면은 한손검이나 한손반검과는 달리, 칼의 모양을 한 폴암의 위치에 가까웠다.
갑주가 점점 발달되어 플레이트 계열의 갑옷이 등장한 이후엔, 검으로 갑주를 입은 기사를 죽이는 게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칼날이 들어갈 구석이 없다 보니, 플레이트 아머가 등장한 시기의 중세 검술에서는 맨몸의 상대를 대적하는 평복 검술과 갑옷을 입은 상대를 대적하는 갑주 검술의 기법이 서로 달랐다. 갑주 전투 시에는 왼손으로 칼날 중간을 짧게 잡고 창처럼 사용해서 칼끝으로 갑옷의 관절 틈새를 찌르거나, 칼을 거꾸로 잡고 폼멜[5]이나 가드를 망치처럼 휘둘러 둔격으로 쓰러트리거나[6], 혹은 전투 레슬링을 걸어서 쓰러트리고는 미저리코드와 런들 대거 같은 갑옷의 빈 틈을 찌르는데 특화된 송곳형 단검을 갑옷의 틈새에 쑤셔넣었다. 이 때문에 당시 기사의 부무장으로 런들 대거 타입의 단검이 널리 쓰였다.
이 시기의 검 역시 그런 용법을 부응하기 위해 뻣뻣하고 뾰죽한 찌르기에 적합한 검 형태가 유행한다. 즉, 한국 양판소처럼 풀플레이트 입은 기사를 검으로 베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판금갑옷은 양판소 작가나 독자들의 생각보다 굉장히 튼튼하다. 판금갑옷이 총기의 등장과 함께 사라져 갔다는 건 역으로 그 이하의 파괴력으로 플레이트를 뚫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7] 물론 이 정도 되는 물건을 들고 날뛸 수 있는 세계관이라면 또 모를지도 그런걸 들고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스펙이 높다면 갑옷도 그만큼 두꺼운걸 입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걸 피할 수 있을만큼 빠르거나
기사들끼리 죽이기는 힘들었지만, 이는 기사들에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왜냐면 중세 기사들은 사로잡은 다음 몸값을 주고받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죽일 필요 없이 무기를 날리고 항복을 받은 다음 구속하여 몸값을 받는 걸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고로 몸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평민 병사나 중장병은 무자비하게 죽였다. 맨앳암즈로 불리는 중세 중후기의 중장병들은 무장으로만 보면 기사나 다름없었으며 잡히면 살해당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보통 기사 이상으로 치열하게 저항하는 일이 빈번했고 때문에 기사들은 갑주 입은 상대를 끝장내는 기법을 잘 알아야 했다. 허나 기사들끼리 서로 죽이지 않는 것도 관례가 그렇다는 것일 뿐, 실제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였다. 아래에도 얘기가 나올 기사가 강도로 전업하는 도둑기사나, 산적단으로 변한 프리 컴퍼니 같은 경우에는 몸값 잡고 그런 것도 없었으니 예의 차리고 몸값 받아낼 수 없는 상황에서는 무자비하게 죽이는 일이 빈번했다. 백년전쟁 당시 크레시에서도 전황이 극히 불리하다 판단한 영국군이 포로로 잡은 기사와 귀족을 참살했고, 그 때문에 후대 푸아티에 전투 등에서 부모나 친척을 잃은 프랑스 기사들이 복수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었다. 그러나 또 털렸지.
마상창으로 잘 알려진 랜스는 형태상 크게 보병창이나 별 다름 없는 라이트 랜스와, 흔히 기사의 거창 하면 생각나는 둥근 손보호대가 달린 헤비 랜스로 나뉜다. 물론 창의 길이나, 무게추 등으로 다양하게 바리에이션이 있다. 기마 중에 투창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카우치드 랜스가 대세먹은 이후에도 스페인에서는 기마 투창질이 꽤나 애용됐다. 또한 랜스의 사용법도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하는데, 투창 하듯이 어깨 위에 들고 가다가 내리찍는 방식과, 허리 쯤 아래에 한 손으로 들고 찌르는 방식, 양손으로 창을 잡고 휘두르는 방식, 그리고 중세 기사 하면 딱 대표되는 겨드랑이에 끼는 방식이 있었다. 이 방식을 카우치드 랜스 기법이라 한다.
각 기법마다 다양한 장단점이 있으나, 기수가 어지간한 충격을 받아도 낙마하지 않게 해 주는 등자와 전투용 안장, 그리고 창의 리치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카우치드 랜스 기법이 한데 뭉치면 말의 운동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하여 냉병기로서는 어마어마한 공격 거리에서 극대화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므로, 이 콤보가 중세 중기부터 유럽의 대세가 되었다. 중무장한 기사가 밀집대형으로 랜스 차징을 하면 그 자체가 보병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동양에서도 유목민족 기병들이 비슷하게 운용한 기록이 있으며, 말과 말을 쇠사슬로 연결하기도 하였다. 운좋게 옆으로 뛰어 말을 피하더라도 쇠사슬이(...). 다만 이렇게 연결하는 경우에는 집단 돌격시의 템포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랜스 차징은 대열을 맞추어서 일사분란하게 동시에 들이박는 조직력 중시 방식과, 대충 각개 돌격으로 최고 속력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나뉘는데 두 방식 공히 동서양에 모두 혼재했다.
십자군 전쟁 때 기사들을 상대한 아랍측의 기록으로는 돌격하는 기사들을 '쏘아진 화살과 같다'라고 평했으며 장창이 등장하기 전까진 정면에서 막는 게 거의 불가능하였다. 기사의 랜스 차징 자체는 매우 강력했지만 랜스는 대부분 1회용이라 차징이 끝나면 부러지거나 해서 재사용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돌격이 끝나면 랜스를 버리고 검이나 보조무기를 꺼내들고 싸우거나, 본진으로 회군하여 여분의 랜스를 다시 장비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전쟁사 기록을 살펴보면, 랜스 차징은 상대 진형이 무너질 때까지 수차례, 낮에 시작해서 해질 때까지 반복했다는 이야기가 흔히 나온다.
이러한 기사들의 랜스차징을 막기 위해 잉글랜드의 궁병들은 말뚝을 들고 다니다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말뚝을 적 방향으로 박아넣기도 하였고, 스코틀랜드는 기마돌격에 부적합한 험한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하거나, 윌리엄 월레스[8]는 보병대가 팔랑크스와 흡사한 장창의 벽 쉴트론(schiltron)을 만들어 돌격을 저지하게 하기도 하였다. 특히 장창 전술은 중세 말에 보병의 기본 전술이 되었다. 근데, 기병이 특히 발달한 동유럽에선 '그럼 장창보다 더 긴 랜스를 쓰면 되겠네?'라면서 후사르에게 엄청나게 긴 랜스[9]를 주어 장창병을 돌격으로 밀어버리는 위엄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총이 나오면서 장창진으로 보호받는 총병대가 원거리에서 사격을 가하는 파이크 앤 샷 전술이 장창전술의 후계를 잇고, 랜스만으로 안 된다는 것을 느낀 기병들이 이제 권총 들고 마상총질하는 카라콜 전법을 쓰다가, 결국 권총보다 강한 머스킷의 화력에 밀려 중장기병의 시대가 저물고 엽병 같은 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물론 앞서 말했듯 가장 중요한 원인은 봉건 체제에서 변화해나가면서 생긴 전장 변화다.
토너먼트 경기에서 쓰는 랜스는 끝이 뭉툭하고 더욱 잘 부러지게 개조한 토너먼트 전용 랜스이다. 기사 윌리엄 같은 영화에서 묘사된 토너먼트 경기를 보면 랜스가 스치기만 해도 와자작 부서지는 이유가 그 때문. 이 때문에 토너먼트 경기에서 주인공을 쓰러뜨리려는 악역들은 랜스 끝을 뾰족하게 하고 잘 안 부러지는 재질로 만들기도 한다.
그 외에 지역에 따라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였고, 폴액스나 할버드 같은 폴암류부터 단검, 레슬링, 한손검, 양손검, 방패술, 창, 기마전투술, 갑주전투술 등 사실상 보편적인 무기는 두루 다 다룰 줄 알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격 무기는 잘 사용하지 않았다. 대체로 중세 기사들은 사격 무기를 천시하거나 비겁한 무기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주로 징집된 평민이나 용기병들이 사격무기를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얘기로, 급하면 아무 무기나 쓰게 되어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궁술은 이것 하나에만 매진하는 다년간의 단련이 필요한 전문분야이고, 쇠뇌는 그것 자체로도 엄청나게 비싼 전문무기이기 때문에 전쟁터에서는 전문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유럽의 중장기병들은 보통 기마돌격과 근접전을 담당하기 때문에 궁술을 뽐낼 장면은 그다지 없었고, 그런 것은 전문 궁병에게 맡기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기사 중에도 궁술을 아는 자는 드물지 않았을 것이다. 중세의 그림을 보면 맨앳암즈나 기사가 사격 무기를 사용하는 장면도 곧잘 등장하고, 중세 무술서적에서는 말을 타고 달아나면서 등 뒤로 쇠뇌를 쏘는 파르티안 샷을 가르치는 장면이 나온다. 게다가 기사들이 평시에 심심하면 하던 스포츠가 사냥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10] 활 다루는 것의 기본기 정도는 하는 기사가 많았을 것이다. 단지, 기사 말고도 활을 다룰줄 아는 사람이 있는데 많은 기회비용을 주고 키워서 근접전을 담당해야 하는 기사가 궁술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을 따름이다. 전쟁은 상대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는가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얼마나 적은 피해를 입는가 역시 중요한데 본인의 역할이 다른 부대의 피해를 감소시키기 위한 근접 전투임에도 전장에서 원거리 무기에 의존하는 방식을 고집한다면 전장에서의 자기 역할을 하지못한 즉 권리만 받아챙기고 의무는 행사하지 않는 비겁자 취급을 받을 여지가 충분하며 따라서 이 때문에 '원거리 무기=비겁자' 인식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3 기사가 되는 과정/계급
3.1 페이지/스콰이어
먼저 기사 가문 출신이나 귀족 태생, 혹은 귀족의 봉신 출신의 어린 나이[11]의 소년이 페이지(Page)라는 시동이 되어, 그가 스승으로 모실 기사 혹은 장차 섬길 영주의 성에 들어가 기사와 영주를 위한 온갖 잡일을 하면서 예법을 익히고 틈틈이 기초체력단련을 해야 한다. 페이지 과정은 관습적으로 7년이 보통이다.
보통은 친구나 친척처럼 가까운 사람 아이를 들여오거나 기사들끼리 서로 아이를 교환해 맡았다.
힘있는 귀족이나 대영주들은 중요한 가신, 다른 유력귀족이나 영주 등 좋은 가문의 아이를 들여와 다른 관료나 귀족에게 심부름, 전언 등을 전달하는데 쓰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가문 간의 친목질에 더해 아이들에게 정치/행정 등의 실무 경험을 쌓게 해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고, 유사시에는 인질로 쓸 수도 있었다.
페이지 상태로 나이 좀 먹고 청소년기가 되면,[12] 견습기사 스콰이어(Squire)가 되며, 전장에 직접 기사를 따라다니며 무기와 갑옷을 손질하고, 승마술, 무기를 다루는 법, 맨손격투술, 기초적인 전법 등의 전투기술, 기사의 복장을 챙기고 말을 손질하는 등의 잡일, 그리고 노래와 춤과 악기 다루는 법음?을 익힌다. 전장에서 기사에게 시중을 들어주는 건 대부분이 스콰이어다. 단순히 시중만 드는 게 아니라 전장에서 스승의 등도 지켜주고, 스승이 포로로 잡혔다면 그를 구출하러 나서기도 하는 등 전투 임무도 수행했다.
3.2 나이트 배철러
스콰이어 상태로 충분히 교육을 받아[13] 20~21세가 되거나, 혹시라도 따라나간 전쟁터에서 무공이라도 세워서 "고놈 기사 시켜볼 만하군!"하고 기사가 될만한 용기와 가치가 있는 인물임을 인정받으면, 자신이 모시던 마스터 혹은 가신 기사의 경우 영주에게 가서 기사 서임하고 몽둥이 찜질을 받고[14][15] 정식 기사가 된다. 이때 기사로 임명하는 주군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은 봉신이 두 손을 합장하고 고개를 숙이는 자세를 가리키는 용어가 바로 오마주이다.
이 정식 기사에 해당하는 계급은 그냥 기사라고만 부르거나, 영국식으로는 나이트 배철러(knight bachelor)[16]라고 한다. 엄밀히 말해 영국식 배철러는 기사단에 들지 않은, 왕으로부터 전쟁터에서의 무력을 인정받아 직접 기사 직위를 수여받은 초창기 형태의 기사, 혹은 그런 기사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다른 기사를 마스터로 섬기면서 전통적인 페이지-스콰이어-기사 과정을 거쳐 인정받은 토종 기사들에 붙이는 말이다. 귀족이나 영주 가문을 반영구적으로 봉신으로 섬기기로 맹세하고 기사위를 수여받은 하우스홀드 나이트(가신 기사) 역시 배철러라고 불린다.
기사단에 들어가는 것으로 기사가 되는 경우는 배철러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기사라고만 한다. 기사단 출신 기사의 그 원형은 십자군 원정 시기의 군사적 기사단이며, 그때만 해도 기사단에 드는 것에는 신분의 자격이 없었다. 그런데 중세 중 후기에 이르면서 기사 계급이 경직되고, 기사도적 이상을 숭상하기 위한 기사단이 생겨나면서 기사단 출신 기사라는 게 귀족용으로 변했다. 이런 기사단은 사실상 상류층 귀족들을 위한 멤버수가 한정된 귀족 클럽이었기 때문에 귀족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전통 방식을 거치지 않고도 기사가 될 수도 있었다.
귀족 출신 기사는 태생이 좋다보니 (하급 귀족인) 기사 가문 출신의 배철러를 좀 얕잡아보기도 하지만, 기사의 본질로 보자면 배철러야말로 진짜 원조의 전통을 지켜온 쪽이다. 기사의 아들로 태어나 기사를 생업으로 알고 어릴 때부터 부단히 수련을 거쳐온 쪽과 귀족 도련님 간에 실력 차이는 뻔하지 않겠는가. 물론 차남이나 서자로 태어나서 장래에 상속 받을 게 없는 귀족 자제들도 전통 방식을 거쳐서 제대로 직업 기사로 나서기도 했으니, 귀족 출신이라고 항상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3.3 나이트 배너렛
나이트 배너렛(Knight banneret)은 흔히 상급기사 등으로 번역하는데, 기사로 이루어진 부대나 일정 병력을 지휘하는 단대 지휘관 급의 기사를 말한다. 상비군 제도가 없어서 군제가 느슨했던 중세 시대에 부대를 지휘하는 전문 장교가 있을 리가 만무하므로, 기사 중에 실력이 있고 지휘력이 있는 경력있는 기사 혹은 전장에서 실제 용맹을 보인 기사를 배너렛으로 임명하여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일반 기사가 호봉수 찼다고 저절로 배너렛으로 승급하는 것은 아니다. 배너렛은 반드시 전시에 전장에서 군주가 임명해야하는 직위이다. 고로 평시에는 배너렛이 임명되지 않으며, 군주에게 직접 임명받지 않으면 배너렛이 될 수도 없다. 약간 편법으로 군주의 깃발을 전령이 챙겨가서 '여기 전하의 깃발이 있으므로 어전인 것으로 치고 원격 임명(?)하겠소.'하는 경우는 있으나, 평시에 호봉수 높은 기사랍시고 배너렛으로 붙여주는 법은 없었다. 애초에 평시에 기사와 기병 지휘관이 필요할 정도로 대규모의 기사를 측근으로 두는 일이 없기도 하고.
하지만 귀족의 차남 이하는 기사 서임을 받자마자 배너렛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귀족이다보니 부모님이 붙여준 가신 기사나 부하들 수십을 이끌고 전쟁터에 출진하면 왕은 많은 부하를 끌고 힘을 보태러 온 기특한 기사를 보고 "네가 데려온 애들 네가 지휘해라."라면서 베너렛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귀족 장남은 결격사유가 없는 한 영주의 후계자니 배너렛보다 높았다. 역시 고대로부터 인간 사회는 혈연과 돈이 쥐고 있었다.
기사가 준귀족화되고 기사로 태어나지 않았으면서 기사가 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가 되면서부터, 국가적으로 볼 때 중장기병은 많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나눠줄 봉토도 없고 귀족층만 늘려서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을 안 지배층은 중무장을 하고 말에 타고 싸움 다 잘 하지만 정식 기사는 아닌 전문 군인층을 고용하기 시작한다. 기사 서임을 받지 않더라도 평민 병사 중에 집에 돈 좀 있는 경우 기사에 준하는 무장을 스스로 마련하고 전쟁터에 뛰어드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평민 중장기병과 기사를 합쳐서 맨앳암즈(Men-at-Arms)라고 부른다. 중세의 전장에서 나온 기병의 절대 다수는 진짜 '기사'가 아니라 평민 중장기병 맨앳암즈였고, 나이트 베너렛은 그 기병 부대의 지휘관이다.
특히 국토가 좁은 영국은 기사의 수는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대신에 맨앳암즈를 많이 동원하여 중기병 전력을 메꾸었는데, 그렇게 되자 맨앳암즈의 위상이 묘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맨앳암즈는 기사처럼 제대로 된 계승 준귀족 계층은 아니지만, 일단 시골 동네에서 신사 소리 들으면서 헛기침 좀 하면서 사는 동네 유지인 경우가 많았고,[17], 기사가 되고 싶지만 태생이 안돼서 못 되었을 따름인지라 기사도적 이상을 꿈꾸면서 스스로 기사답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출신이 기사 계급이 아니더라도 이런 맨앳암즈에 속한 평민이나 심지어는 일개 잡병이라도 무공을 세워 기사가 되는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돈 많은 평민 자체가 흔치 않은 데다가 10살 이전부터 이런저런 훈련을 받아 기사가 된 내츄럴 본 인간 병기하고 평소에 가업을 돕다가 힘 좀 쓴다고 나온 동네 좀 사는 집 아들내미 A의 전투력이 같을 리도 없고, 계급이 다른 만큼 텃세도 심해서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존 호크우드처럼 용병으로 나섰는데 너무 잘 싸우니까 상으로 기사위 받은 경우가 아예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4 환상과 현실
기사도의 환상 때문인지 기사들이 명예를 소중히 하고 자신만의 여성을 두는 등 낭만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합법적인 무장 깡패에 가까웠다. 물론 이 말은 무력으로 통치하는 역사상의 모든 봉건 세력에 붙일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무력 통치를 하지 않는다고 뭐 달라질 것도 없다. 기사는 옛 봉건 시대의 통치 세력 중에서 문관 쪽이 아니라 무관 쪽일 따름이다. 로마시대처럼 평민이 뒤집어 엎지 못한 건 무기 잡은 쪽이 로마와는 다르게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로마의 평민층 역시 특권층이었다는 개소리가 있지만, 로마의 평민 신분이 특권층 처럼 취급된 건 제정 이후부터다. 공화정 시대 평민들은 귀족과 대등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 계속해서 투쟁을 해서 명목상의 권리를 얻었어도 재력 문제로 발목을 잡혀 완전히 대등한 신분이 되지는 못했다. 평민 역시 특권층이 된 제정 시대에도 결국에는 귀족을 넘어서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했다.
중세 초의 유럽의 기사나 귀족들은 글을 안 배운 걸 자랑으로 여겨서(...)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인간들이 수두룩했다. 왜냐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을 고용할 만큼 부유하다는 말이니까.(...) 실제로 한 국가의 통치자였던 샤를마뉴 대제도 까막눈이었다. 그 당시 동로마에서는 샤를마뉴를 '구멍을 뚫어놓은 금판을 대고 서명하는 무식한 놈'이라고 까댔다고 한다. 게다가 기사들은 똑똑해지면 그만큼 몸이 허약해진다고 굳게 믿어서 일부러 무식해지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물론 샤를마뉴도 이래선 안돼겠다 싶었는지 문화 육성에 앞장섰지만... 단, 샤를마뉴는 듣고 말하는 건 라틴어도 포함해서 무리없는 수준을 넘어 정말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문자를 익히기 위해 엄청 노력했지만 결과가 별로 좋지 않았을 뿐.(...)
기사도? 판타지소설에 나온 말 한마디를 인용하자면, 기사가 기사도를 잘 지켰다면 기사도라는 단어가 있지도 않았겠지. 인간이 도덕적이었다면 도덕이라는 단어가 있지도 않았겠지. 노동자들이 단결했다면 마르크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말하지 않았겠지[18]
다만, 위에서 말한 건 어디까지나 로마가 망하고 난 후 사회질서가 붕괴되고 혼란스러운 중세 초의 이야기다. 중세 중기에 접어들어서 사회 체제가 안정되면서 기사계급도 슬슬 영지 경영의 필요성 때문에 이런저런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르네상스 시기쯤 되면 지식이 있는 것이 우대받는 시대가 되면서 기사들도 책 정도는 읽게 되었다.
또한 중세 기사가 글을 못 배웠다고 주장하더라도 그걸 항상 100% 믿는 것도 곤란하다. 예를 들어 12~13세기 고명한 기사이자 미네징거[19]인 볼프람 폰 에센바흐[20]는 작품 내에서 "나는 글도 모르는 야인입니다." 운운하면서 구술로 썼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진짜로 글을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글월 깨나 읽는답시고 시건방지고 콧대높게 굴던 학자들이나 라틴어를 포함한 정규 교육을 받은 메이저 작가들에 대한 빈정거림 내지는 자신은 아마추어리즘에 충실하므로 저런 자들과는 다르다는 의미의 상징적 발언일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볼프람의 글은 작가의 폭넓은 지식과 문학적 시도가 있는 만큼 그가 문맹일 리는 없다.
라틴어를 못해서 글을 모른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중세 시대 식자들의 언어는 라틴어였고, 대부분의 책을 라틴어로 썼으며 De Re Militari 같은 군사서도 라틴어로 적혀있다 보니 그걸 못 읽는 군주가 전쟁터에서 글(라틴어)을 아는 기사를 불러다가 해석을 시켜 군략의 조언을 얻곤 했다.[21] 하지만 그 군주도 평상시에 자기네 말로 편지 쓰고 사무 보고 할 거 잘만 했다.
또한 실제로 기사가 왕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기간은 겨우 1년에 40일 정도로 짧았다. 왜 이렇게 짧았냐면, 기사들이 전쟁에 나가있는 동안 영지가 개판이 되어서 오랫동안 영지를 비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사는 보기보다 돈이 그리 잘 벌리는 것도 아니라 영지의 농민들을 착취했기에 당연히 기사가 자리를 비우면 농민 반란이 수시로 일어났고, 관리인 또한 주인이 없는 틈을 타 황령을 일삼았으며, 부인도 남편의 부재를 이용해 바람을 피우곤 했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막아보려고 복무기간을 일부러 짧게 한 것이다. 다만 영지로 침입해온 적에게 맞서 싸우는 방어전일 경우에는 시간제한 없이 적을 격퇴해야 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복무해야 했다.
복무 기간이 끝나면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자신의 영토를 경영하면서 지냈으며, 만약 그 40일 이상 복무할 경우 돈이나 땅으로 추가 보수를 받았다. 나중에는 병사들을 데리고 나가 복무하는 대신 현찰로 떼우고 왕은 그 돈으로 용병들을 고용하는 방식이 생기기도 했는데, 일반적으로는 왕은 시간 제한이 없는 안정적인 병력을 확보하게 되고, 영주나 기사들은 영지를 비우는 위험을 피하게 되니 양자에게 좋은 윈윈 게임이였다.[22] 이렇게 복무를 대신하는 세금은 Scutage 혹은 shield pay라고 불렀다.
따라서 대부분의 기사들은 자신의 영지를 제대로 경영하기 위해 영주로서 나름대로 학식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종종 흙 만지는 게 너무 좋아서 토너먼트에 나가지도 않고 농사만 짓는 기사를 보고 레이디가 "그런 남자는 싫어요."했더니 토너먼트로 나가서 훌륭한 성적을 거둬오더라 하는 옛 이야기가 있는 걸 보면 적어도 농사 짓는 법이나 영지 내에서 돈 버는 각종 수단 등에 대해서 상당히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기사의 부인이 될 여인 역시 바깥양반 부재 시에 가정을 챙기고 집안의 사업을 돕기 위해 글을 읽고 쓰고 셈을 할 줄 알아야 했다는 것을 보면 기사가 언제까지나 칼만 휘두르는 무식한 인물로만 존재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기사들의 진짜 꿈은 어디가지나 기사도의 구현 따위의 환상이 아니라 쌈 좀 나가서 영주나 왕이 주는 봉급도 챙기고, 전리품도 얻고 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영주나 왕이 하사하는 영지인 장원을 갖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그러나 실제로는 장원도 없고 재산도 없는 기사가 많았다. 특히 이런 가난한 기사들은 장가도 못 가고 늙어야 하는 일이 허다했다.(...) 장가 가서 가족이 있는 기사들의 경우 식구들 먹여 살린다고 애를 써야 했다. 기사도 로망스 따위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기사 따위는 기사들의 행패를 보다 못한 교회와 왕실 등에서 좀 도덕적으로 교화시켜보고자 만든 일종의 개줄 같은 개념이고, 실제 기사는 훨씬 현실적이고 돈벌이에 민감했다. 모시는 주군을 뒤치기한 기사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국왕이나 대영주들은 부하 기사를 신뢰하지 못했다.
실제로 기사들의 삶은 매스컴에서 보여주는 환상과는 달리 매우 빈곤했다.매스컴을 믿지말자 설령 말단 기사에서 성공해 중소 영주가 되었다해도 식구들 먹여살리고 말과 무기 및 갑옷 등을 사거나 보수하는것, 성채 보수[23] 때문에 편력과 토너먼트로 모은 돈을 곧바로 소비해야했다. 더 심한 경우 막대한 재산과 명예, 지위를 얻고 고향 땅으로 돌아와 초호화 연회를 베풀어 벌어온 돈들을 소비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대영주나 국왕이 영지에 오면 대접한다고 많은 돈을 써야했다. 그러니 기사들은 자신의 주군이 영지에 오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요즘 군인들이 높으신 분들의 부대방문을 싫어하듯이 말이지. 그리고 1525~1526년 사이에 발생한 독일의 아인 지방의 농민 전쟁 때 1970개의 기사와 영주의 성이 습격받아 그 피해를 적은 기록에서 고가 물품이나 미술품도 없었고, 각종 식재료, 약간의 가구만 있었고 심지어 무기조차도 없던 곳이 있었다. 이 때문에 기사들은 장원이 없는 경우엔 돈을 벌기 위해 편력과 토너먼트를 찾아 각지를 떠돌아다니는 용병 생활을 해야 했고,[24] 있는 경우엔 주변 사람들을 그야말로 마구잡이로 착취해야만 했다. 물론 착취도 적당히 했다. 잘못해서 농민들의 반란과 폭동이 일어나면 돈을 벌지 못해 큰 손해이기 때문이다.
하도 돈벌이가 없는 극단적인 경우에는 도적으로 돌변해 주변을 지나가는 상인들을 털어댔는데, 지리에 익숙한데다 완전무장한 기사가 갑자기 튀어나오니 아예 덤불기사가렌?나 도적기사라는 용어가 따로 나올 정도였다. 한바탕 털어버린 후 험지에 있는 자신의 성에 처박히거나 멀리 달아나버리면 어떻게 응징할 방법도 없어서 상당히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특히 지금의 독일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의 경우 대공위 시대에 많이 출몰했고, 영방으로 쪼개진덕에 직접적인 제제를 가할 수단이 부족한 관계로 당시 관세 사무소를 습격하거나 강가의 화물선을 나포하는 등 무법 행위를 자행했다.[25] 실제로 봉토도 없고 모시는 주군도 없어서 돈 나올 구석이 없는 가난한 기사들은 한밑천 벌기 위해 토너먼트에 나가서 싸우거나, 전쟁이 나면 용병으로 고용되거나, 길 막고 강도짓 하는 게 흔했다.[26][27]
한 일본 학습만화[28]의 묘사에 따르면, 십자군 전쟁 이후 몇몇 타락한 무술실력이 뛰어난 기사는 모시는 주인도 없이 기마창 시합마다 돌아다니며 영주들로부터 알바를 하며 상금에 눈이 먼 것으로 묘사된다. 영주들은 왕이나 주교 같은 높은 사람들 앞에서 그 기사가 자기네 가신이라고 뻥치고 다니면서 체면을 유지한다.
물론 모든 기사가 그런 강도무리는 아니어서, 형편이 극도로 나빠졌지만 기독교적/인간적 양심이 있는 가난한 기사들은 강도짓이라도 불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경제가 나빠지는 경우 영지를 반납하거나 교회에 봉헌하고 십자군을 떠나거나 수도원 소속 기사로 들어가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대개 대기근이나 전염병 등이 대유행했을때 볼 수 있는 모습이고, 노후가 불안정하고 영지가 없는 노기사/병사들도 흔히 택하는 방식이었다.
토너먼트 밀리 경기에서 승자는 패자를 잡고 몸값을 요구하거나 갑옷을 벗겨서 자기가 가질 수 있으니, 가진게 말 한필과 갑옷에 창검 뿐인 가난한 기사는 돈 놓고 돈 먹기 한다는 생각으로 토너먼트에 나가 다른 기사를 털어먹었다. 사실 말과 무기, 갑주의 유지비가 엄청나게 많이 들다보니 가난한 기사들로선 돈을 벌려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밀리 경기는 1대1이 아니라 전쟁처럼 꽤 규모가 큰 팀전이라, 아예 이 길로 나섰다가 크게 대성해서 토너먼트 전문 기사단을 꾸린 기사도 있다. 사자심왕을 이긴 사나이로 유명한 윌리엄 마샬이 대표적인 케이스.
토너먼트에 나가서 체면은 세우고 싶지만 괜히 져서 쪽팔리는 건 싫던 왕이나 이름난 귀족들은 승률 높은 기사를 고용해서 호위로 두곤 했다. 이때 이렇게 용병으로 팔려다닌 기사들의 모습에서 따온 단어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프리랜서(Free Lancer)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라서 기병이 부족한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선 이런 기사들을 고용하여 기병을 충원했다.
기사단도 실존하긴 했지만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달랐다. 중세 유럽에서 기사단의 시작은 구호기사단이나 성전기사단처럼 십자군 원정을 위해 만들어진 특별 조직이었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기사라는 돈 잡아 먹는 중기병 유닛을 상설 유지하기엔 필요성도 가능성도 별로 없었다. 십자군 시절의 기사단 역시 종교의 적과 싸운다는 대의명분 하에 세워진 경향이 있어서 절대적 필요성 자체는 글쎄올씨다 싶은 수준이다. 중세 말에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유럽 각국의 국가/사설 기사단은 대개 소수의 자격을 갖춘 기사만이 참여할 수 있는 귀족 클럽에 가까운 양상을 띄고 있었으므로, 보통 생각하는 기사 무력집단으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다만 무슬림 정복 이래 꾸준히 무슬림과 싸울 필요가 있었던 스페인은 유럽 내에서도 특이한 케이스다. 무슬림에 대항하기 위해 기독교라는 구심점을 들기는 했으나, 스페인 기사들은 실제로 자기 땅을 침략한 적과 싸워야 한다는 절실하고도 실질적인 목표가 있었고, 그래서 종교보다는 충성을 바치는 군주를 중심으로 뭉치는 경향이 있었다. 현대에까지 남아 있는 유명 스페인 기사단들의 건립 연혁은 12~13세기까지 올라가고, 하나같이 실제 무력 집단으로서의 가치를 높게 쳤었다. 물론 다른 유럽 지역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기사단도 중세 말로 가면서 귀족 집단화하게 된다.
5 나이트 에런트
나이트-에런트(Knight-errant)는 기사의 계급이 아니다. 나이트 에런트 자체가 편력 기사라는 뜻인데, 말 뜻을 잘 생각해보면 기사 계급이 아니라는 걸 쉽게 이해할 수 있다. errant 편력(遍歷)이란 여기저기 쏘다니는 방랑을 뜻하는 것이므로, 즉 어디 소속해있지 않은 낭인이라는 의미이다.
중세 초기라면 몰라도 사실 영지나 작위란 게 한정돼있어서 그리 쉽게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마저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나눠줄 수 있는 것에 한계가 닥치다보니 나중에는 기사로 서임받더라도 영지나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드물었고, 그래서 기사로 태어났으되 물려받은 재산과 봉토가 없는 많은 가난한 기사들은 편력기사(遍歷騎士)가 되어 떠돌면서 마치 용병처럼 생활하거나 자신을 고용해줄 영주를 찾다가 적당한 조건에 동네 영주의 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어디 먼 동네에 있는 악당을 혼내주러 다닌다든지 물질적 이득을 외면하고 명성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레이디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 한다.'는 흔히 아는 편력 기사의 이미지는 중세가 아니라 근대에 나온 기사도 로망스를 통해 생긴 것이다.
즉 방랑 기사, 편력 행위를 하는 떠돌이 기사 자체는 실존했다. 그러나 실제로 편력 행위를 하는 경우는 숭고한 이상이나 정의를 위한 게 아니었다. 그냥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라서 어디 토너먼트나 껀수 없을까, 높은 사람들과 인맥 만들 수 없을까, 어느 가문 아래 들어갈 수 없을까 등등 온갖 이유로 쑤시고 다니는 것이었다. 편력기사가 좀 악랄하게 굴자면, 괜히 지나가는 다른 기사나 상인한테 시비 걸어서 자기 솜씨를 뽐내고 장비를 빼앗아 한밑천 삼으려 할 수 있었다. 그나마 건전한 이유를 꼽자면 자기 동네를 위협하는 산적이나 강도 따위를 처리하기 위해서 그 동네 기사가 발벗고 나선 치안 행위 같은 것이 해당된다. 즉 실제의 편력 행위는 봉건 기사의 위치를 탈피한 숭고한 무언가라기보다는 봉건 기사의 위치로 가려는 발버둥에 가까웠다.
아무 기사나 방패에 문양을 새길 수 없다는 속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에런트든 아니든 간에 방패에 자기 가문이나 개인의 문장을 그리는 것은 제한이 없다. 앞서 언급된 윌리엄 마샬은 자신이 신세졌던 가문의 문장을 좀 더 써먹으려고 갖고 다니기도 했다. 색깔로 의미가 부여된 흑기사나 백기사 역시도 아서 왕의 죽음 같은 기사도 로망스에서 만들어낸 허구이자 상징. 작중 등장인물의 역할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에 불과하지, 딱히 실제 관습과는 관련없는 것이다. 기사가 창끝에 달던 작은 삼각형이나 제비꼬리형 깃발은 페넌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것으로, 기사라면 아무나 페넌을 쓸 수 있었다.
아무나 달지 못하는 깃발은 배너라는 것인데,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제법 큰 깃발이다. 배너를 소유할 수 있는 기사를 두고 베너렛 기사라고 부른다. 배너는 일종의 지휘기, 부대기라서 전장에서 배너를 사용하는 것은 배너렛 기사, 그리고 부대를 지휘하는 귀족에게만 허용되었다.
6 현대의 기사
현대에도 기사는 존재해서, 일부 군주정 국가에서 큰 업적을 세운 사람에게 기사작위를 서임한다.
대표적으로 영연방에서는 2등급 이상(1, 2등급)의 훈장을 받거나 Knight Bachelor를 받으면 이름 앞에 'Sir(경)'을 붙일 수 있게 된다. 여성이 2등급 이상의 훈장을 받을 경우 'Dame(여사: 女士)'을 이름 앞에 붙인다. 이러한 기사작위는 기본적으로 비세습이라 자식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29] 또한 중세처럼 땅을 준다거나 정치적 입지[30]를 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문장(coat of arms)을 만들어 쓸 수 있는 등 명예 차원의 여러 의전이 따라 붙는다. 유서깊은 전통이 있기도 하거니와 영국 사회가 아직 말투로도 암묵적으로 계층을 나누는 철저한 명예 중심 사회이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공인하는 이런 경칭은 자국민 입장에서는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도 교황이 훈장을 내려주는 성좌 고유 기사단이 존재한다.- ↑ 실제로 푸아티에 전투 1년전인 732년에 교회령을 몰수하여 봉토를 내렸으며, 명분도 북방 유목민족을 상대로였다는 증거도 나와 있다.
- ↑ 단순 전력만 비교할 땐 보병보다 기병이 더 우월하니
- ↑ 실제로 검이 아닌 메이스나 플레일, 워해머 같은 둔기를 선호하는 기사들도 있었다.
- ↑ 도끼나 메이스 같은 둔기는 무게중심이 머리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민첩하게 다루기 힘들었다.
- ↑ 손잡이 끝의 무게추
- ↑ 이렇게 칼날을 손으로 잡고 싸우는 검술을 하프소딩이라 하는데 칼날을 잡는 방법이 따로 있어서 맨손으로도 사용한다.
- ↑ 초기형 머스켓으로도 잘 뚫리지 않았다. 갑옷 장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갑옷이 총알을 막을 수 있다는 증거로 갑옷에 실제로 총을 쏴서 총알 자국을 남겼는데 이 총알(bullet) 증거(proof)가 방탄(bulletproof)이라는 단어가 되버린다.
- ↑ 자세한 건 브레이브 하트 참조
- ↑ 랜스 길이가 무려 5.5m에 달한다. 물론 서방의 파이크도 5.5미터에 달하지만 이들이 설칠 즈음의 동유럽의 장창은 3~4m 정도로 짧았고, 그 규모도 적었다. 다만 후기에는 역관광 당하지만...
- ↑ 당장 사냥을 할 때 사용하는 무기가 뭔지를 한번 생각해보라. 물론 보어스피어 같은 것을 쓰는 경우도 종종 있겠지만 말이다.
- ↑ 보통 7~8세 정도
- ↑ 14~16세 정도. 관습에 따라 페이지를 시작한 지 7년 후에 스콰이어가 되는 게 보통이었다.
- ↑ 관습적으로 4~7년의 훈련과정
- ↑ 영화 등에서 칼이나 권장 등으로 어께와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는 것은 이것을 간소화한 것이다. 몽둥이 찜질이 아닌 경우 보통 따귀를 때려서 코피를 보았다. 실제로 몽둥이 찜질로 죽은 기사 후보생도 종종 있었다고 하며, 기사서임식에서 쳐맞고 뻗는 신참 기사가 나오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두들겨 패는 것이 너무 심해서 부상자랑 사망자가 많이 나온 나머지 지역에 따라 따귀 한대 치는 걸로 간략화 되거나, 하룻밤 정결하게 지내면서 의식을 거치거나, 칼로 어깨와 머리를 두드리는 정도로 변형된다.
- ↑ 영화 킹덤 오브 헤븐 에서도 훌룡히 고증된 장면이 몇번 나오는데, 주인공 벨리안의 아버지 고드프리가 죽기전에 그를 기사로 임명하면서 따귀를 후려치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무슨 짓인가 싶기도 한다. 또 나중에 벨리안도 예루살렘 방어전에서 성안의 모든 남성들에게 기사 직위를 내릴때 대표중 한 청년의 뺨을 후려치면서 똑같이 하는 장면이 나온다
- ↑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하급기사라고 번역한다. 지금도 영국에서는 1920년대에 창설된 하급기사협회가 하급기사들을 관리한다.
- ↑ 이런 집안들이 향사(鄕士) 혹은 젠트리 계급으로 발전한다. 심지어는 이들 중 몇 대 뒤의 후손이 귀족 작위를 따내기도 한다. 노퍽 공작위를 가진 하워드 가의 경우, 젠트리이던 하워드 집안이 런던으로 진입하여 돈을 모으면서 법관이 되고 이 법관직을 대대로 잇다가 노퍽 백작위를 가진 여성과 결혼한 후손이 공작위로 승격하면서 공작가문을 만든 것. 이 때가 중세의 끝무렵에 일어난 일이다. 이런 경우가 상대적으로 프랑스보다 많았던 영국이 왕정복고를 오랬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했고.
- ↑ 우리가 흔히 아는 기사도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니 기사의 이미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편이다.
- ↑ 중세 독일의 궁정을 중심으로 하여 성행한 '미네장(연애시)'을 지은 시인들.
- ↑ 유명한 파르지발이 볼프람의 작품이다.
- ↑ 동양에서 한문이 어려운 만큼 유럽에선 라틴어가 굉장히 어렵다.
- ↑ 다만 중장기적으로 볼 때, 이런 용병제의 성행은 기사가 가진 원래 위치를 위협하는 군사적 사회적 변화의 전조곡이기도 하다.
- ↑ 이거 반드시 필요한것이 중세 시대는 전쟁이 잦고 치안이 개판이라서 언제 적이 들이닥칠지 몰랐기에 성채 보수는 필수였다.
- ↑ 이탈리아의 기사들도 이런 용병들이다.
- ↑ 괴테의 희곡인 괴츠 폰 베를리힝엔의 주인공이 모델이 되는 기사 역시 도적기사였다.
- ↑ 물론 강도짓은 자주 안했다. 자주 벌였다가는 왕이나 대영주가 족칠것이 분명하며 이렇게 되면 불리한데다 기사 자신의 명성을 떨어뜨려 다른 돈벌이를 하는데 지장이 있으니까.
- ↑ 그러다보니 상인들은 털리지 않으려고 전문 싸움꾼 용병들을 필수적으로 고용했다.
- ↑ 슈에이샤(集英社)가 1980년대에 내놓은 시리즈. 국내에서 해적판으로 상당히 많이 나왔다.
- ↑ 준남작(Baronet) 작위를 받아도 Sir라고 부르는데, 이 경우는 세습할 수 있다. 다만 20세기 중반부터는 이런 세습작위가 새로 주어지지 않는 추세라 마가렛 대처 전 총리의 남편 데니스 대처가 90년대 초에 받은 게 유일하다는 게 함정. 데니스 대처도 고인이 됐기 때문에, 현재 실존하는 준남작들은 모두 오래 전부터 세습되어온 작위를 승계한 2대 준남작, 3대 준남작 등등이다. 이렇게 준남작이 새로 주어지지 않는 이유는 준남작이 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도, 제도 자체가 휴면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 기사작위를 받은 이후에도 공헌을 꾸준히 쌓은 인물에게는 요즘엔 '오더 오브 메리트(OM)'나 '컴패니언 오브 아너(CH)' 등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지휘자 사이먼 래틀 경이 있다. 현대사회에 맞게 서훈제도가 바뀌어가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 ↑ 정치적 입지는 남작 이상 작위의 이야기다. 20세기 중반부터 세습작위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 추세지만, 영국의 의회 중 상원은 이름부터가 여전히 'House of Lords'다. 그래서 지금도 여기 들어오려면 Lord, 즉 남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영국에서 정치인이 상원에 진입하고자 하거나 다른 분야의 유명인사가 정치를 하게 될 경우, 현대에는 형식적으로 비세습 작위(Life peer)를 받은 이후 들어오게 된다. 이 경우 대부분 비세습 남작 작위가 주어진다. 그래서 남작이라 하면 의전상 기사보다 높은 작위임은 사실이지만, 현대에는 정치적 성격도 강한 타이틀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공헌인정 성격이 강한 기사작위와는 성격이 좀 다른 타이틀이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