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네덜란드
1 개요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주목할 점은, 중심이 되는 중앙국가 또는 특정 거점이 주변을 병합하며 성장하는 것으로 정립되는 다른 나라의 역사[1]와 달리 특정 지역의 처지와 정서가 비슷한 도시들이 따로 살았다가 외부의 위협에 직면하자 도시들끼리 뭉쳐서 국가를 만든 것이다.
마그나카르타가 실질적으로 적용된 명예 혁명 이후의 영국이나 프랑스 혁명 이후의 프랑스보다 더 빠르게 민주주의에 가까이 다가간 나라이기도 했는데, 공화제와 민주제가 혼합된 정치체제였고 정부와 주 대표 및 통치자들도 상업 가문 출신이었으며 실질적인 권력도 상인들과 지식인이 장악했다. 그래서 네덜란드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었으며, 귀족과 왕에 의한 핍박이 없었다. 또한 정치가 경제보다 우선적으로 설명되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네덜란드는 경제가 곧 정치여서 최초의 주식회사였던 동인도 회사와, 17세기에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를 세울 수 있었다.
2 고대
본래 켈트인과 게르만인이 살던 땅이었지만, BC 50년경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바타비아족을 정벌한 것을 계기로 로마인이 들어와 자기네 땅으로 만들었다. 그 때문에 이 당시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후 로마 말기에 가톨릭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프랑크인과 색슨-프리스인들이 들어와 지배를 시작했다. 8세기에는 샤를마뉴의 지배를 받으나, 이후 홀랜드를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3 중세
3.1 상업의 발달
네덜란드는 정치사와 더불어 시장상권의 역사도 중요한데 네덜란드 상권장악의 첫 시작은 북해의 청어잡이였다. 처음엔 이웃국가들도 청어잡이에 나서 쉽지 않았으나, 1358년에 빌렘 벤켈소어(Willem Beukelszoon)[2]라는 어부가 갓 잡은 청어의 이리를 제외한 내장을 단칼에 베어낼 수 있는 작은 칼을 만들고 소금에 절여 통에 보관하는 통절임 방법을 고안해내서 경쟁국가들의 청어상품들을 밀어내고 네덜란드가 돈방석에 앉게된다. 선상에서 바로 염장된 청어는 1년간 보관이 가능해졌는데 냉장고가 없었던 당시엔 획기적인 물품이었던것. [3]#
이후 북동유럽, 영국, 남유럽, 아프리카로 화물무역을 하는것으로 상업규모가 확대됐을때, 중앙유럽에 있는 라인강 하구의 지리적 이점과 간척사업을 해서 해상네트워크 구축한 교통의 이점, 순수하게 운송을 위한 새로운 선박을 개발한 이점[4][5]과 극한의 상황속에서도 운송물자엔 손을 대지 않는 철저히 상도정신으로 유럽각국의 신뢰를 받아 네덜란드의 해상무역 규모가 성장하여, 프랑스,잉글랜드,스코틀랜드의 상선을 합친 숫자보다 더 많은 약 1,800척의 상선을 보유했다고 한다.
그리고 돈이 많아진 상인들은 도시의 기존 관리자였던 귀족들에게서 자치권을 사들인 다음, 법을 제정해 귀족의 간섭을 막고 도시의 정치체제를 시민자치제로 전환시켰다. 이때까진 현재의 네덜란드가 아닌 사업에 충실한 도시국가들이 어쩌다보니 그 지역에 여럿 모인 것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3.2 부르고뉴 공국 시대
15세기 전까지는 아직 하나의 나라 꼴을 갖추지는 못하고 신성로마제국 치하의 여러 제후국과 주교령들이 있었으며, 14세기에는 비텔스바흐 가문이 이 중 홀란트·질란트·에노 백작을 겸하였다. 그런데 14세기 프랑스의 왕 장 2세의 아들로서 부르고뉴 공국을 받은 대담공 필리프가 플랑드르의 마르그리트와 결혼하고 플랑드르 땅을 획득하면서 부르고뉴 공국에 의한 저지대 통일사업이 시작된다. 15세기에는 대담공의 손자인 선량공 필리프[6]가 이 지역의 제후국을 결혼상속이나 정복으로 획득하고 비텔스바흐 가문의 재클린을 무찔러 그의 제후령을 모두 빼앗았으며, 필리프의 손자 용담공 샤를도 정복을 계속해 지금의 베네룩스 3국은 물론 프랑스 북부까지를 아우르는 큰 나라로 만들었다. 이 부르고뉴 공국령의 일부로서의 저지대를 부르고뉴령 네덜란드라 하며, 베네룩스 3국이 한데 뭉쳐 지금의 나라 꼴을 갖춘 데에는 이 발루아-부르고뉴 공작들의 공로가 컸다.
그러나 용담공 샤를이 아들 없이 죽으면서 그가 이룩한 부르고뉴 공국은 명목의 상위 군주 루이 11세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면서 샤를의 사위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가 서로 소유를 주장했고, 결국 부르고뉴 공국령 중 신성로마제국령이 막시밀리안 1세의 손에 남으면서 부르고뉴령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가 돼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스페인 국왕으로는 카를로스 1세)의 즉위 이후부터는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었다. 아니, 카를 5세의 경우에는 네덜란드의 지배자[7]가 스페인 왕을 겸한다는 게 오히려 맞을지도 모르겠다.
3.3 근세
네덜란드 토박이었고, 네덜란드의 특성을 잘 이해해 종교적 관용을 보여줬던 카를로스 1세와는 달리 아들이었던 펠리페 2세는 스페인에서만 자랐으므로 인기가 좋지 않았고, 극도로 보수적인 카톨릭 군주로서 네덜란드에 카톨릭을 강요해 큰 반발을 일으킨다.
종교개혁 이후 신교 바람이 분 네덜란드 지역을 카톨릭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알바 공과 같은 스페인 파견 총독들의 실정과 스페인 군대의 약탈 등[8]으로 반발이 거세진다. 이 때문에 각지에서 교회와 성상 파괴가 일어나고 결국 빌럼 반 오라녜가 주축이 되어 종교적 자유와 독립을 선언한다.[9]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발발, 80년 동안 휴전과 개전의 연속 끝에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 유럽 열강으로부터 독립국으로 인정받는다.
그런데 정치보다 사업을 중요시여긴 네덜란드인들은 마치 CEO를 데려다 앉혀놓듯이 처음엔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나라를 맡겼으나 스페인 국왕보다 더 돈을 많이 받자 네덜란드인 중에서 지도자[10]를 다시 뽑았는데 이 사람이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영웅인 빌럼 반 오라녜이다. 다른 나라의 왕권보다 약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1581년에야 7개 주의 자치주로 이루어진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이 출범하게 된다. 다만, 오라녜 공이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기 때문에 오라녜 가의 사람들이 대대로 국가원수를 맡았다.
또한 종교적으로 경직되어갔으나 "잘나가던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살던 유대인과 이슬람 계열의 주민들이 종교재판소 등에 의해 이교도로 몰려 재산을 빼앗기고 학살당하는 등 핍박을 당하자 자유로운 분위기의 네덜란드로 이주하였는데[11] 이들에겐 종교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기술과 노하우가 있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오랜기간 대부업을 하여 귀금속 가공 기술과 금융업에 대한 노하우가 많았고, 이는 네덜란드의 해운업 발전과 맞물려 무역업을 크게 발전시키고 초기 자본주의 형성의 기초가 된다.
3.4 17세기와 황금시대
세계문명사, 강대국의 비밀 4부 가장 작은 제국, 네덜란드 |
독립은 했지만 국토, 인구, 자원 모두 열세였고 세금 문제 이외의 문제는 합의하지 못해서 구조가 허술한데다[12] 스페인과의 관계도 악화돼서 네덜란드 선박의 스페인 입항이 금지당해 스페인과 무역을 할 수 없어 네덜란드 경제가 막대한 타격을 입을 위기에 처하자, 1602년 투자금 650만 길더[13]로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해 주식을 발행하여 자금을 더 끌어모은 다음[14] 대양으로 나섰다. 동인도 회사에 최초로 자본을 모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선주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유대인이었다.
또한 동인도 주식회사 이외에 1609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를 설립해 영국과의 국채 거래로만 매년 2500만 길더 이상의 수익을 얻는 등[15] 너무 빨리 돈이 돌자 과부하를 막기위해 1609년에 은행을 만들어 다른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16][17] 이를 통해 네덜란드의 금융업은 더욱 발전되었으며, 네덜란드에서는 불과 3%에 불과한 이자율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한편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40%가 넘는 이자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며 결국 파산하게 된다(...).
한편 네덜란드로 모여든 조선 기술자들은 제조비용은 저렴하고 짐칸은 크며 선원은 적게 필요한 플류트 선을 개발하게 되어 네덜란드의 해운 산업 경쟁력이 높아진다. 플류트선의 제조비용은 영국의 배가 1300파운드일 때 800파운드에 불과하였으며, 최종적인 운송비용은 영국의 1/3 수준으로 떨어졌다. 특히, 네덜란드에서 건조한 플류트 선은 네덜란드가 북해 무역의 주도권을 쥐게 해줬는데, 덴마크가 셸란 해협을 지나는 상선에 세금을 부과하는 기준이었던 상갑판을 좁히는 대신, 중갑판과 하갑판을 넓게 설계해서 건조하는 방법[18]으로 다른 나라의 배보다 동일 수송량 대비 적은 세금을 부과받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렇게 여러가지 혁신이 하나의 체계가 되자 네덜란드는 신대륙과 아프리카, 인도, 중국, 일본 등과의 귀중품(설탕 등) 무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결국 17세기의 2만여 척에 달하는 세계 전체의 무역선 중 만 오천 척 정도는 네덜란드의 것이었다. 이러한 네덜란드의 전성기는 황금시대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남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북미에도 뉴 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을 세우는 등 그 위세를 떨쳤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 전 세기까지 대양의 패자이자 네덜란드 본토까지도 통치하던 스페인은 계속 바닥으로 떨어졌으니, 하늘에 있는 카를 5세가 봤다면 땅을 쳤을 일.
이 시기의 네덜란드는 제국 칭호가 거부감이 없을 정도로 세계 방방곡곡에 식민지를 넓혔다. 이 시기 네덜란드는 거대한 양의 물자를 수송하는 데 뿐만 아니라 노예무역에도 열을 올려 세계의 인종 분포도를 싸그리 바꿔놨다. 이를테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유럽, 아메리카 대륙으로 보낸다든지, 인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남미로 보낸다든지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세계의 무역을 좌지우지 하기 위해 네덜란드는 세계를 반분하여 각각 동인도 회사와 서인도 회사를 내세워 관리할 정도였는데 이 방식은 적국인 영국마저 벤치마킹할 정도였다. 일본이 에도 막부 내내 유일하게 수교하던 유럽 국가이기도 했으니 그 수완은 알만한 바. 당시 관할령은 아래와 같다.
- 서인도 회사 관할
조선에 표류했던 벨테브레이와 헨드릭 하멜도 이 나라 출신. 하멜은 알다시피 탈출하여 조국으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쓴다.
참고로 식민지 쟁탈을 위해 네덜란드인들이 저지른 만행은 영국, 포르투갈 저리가라 수준. 향신료 독점을 위해 60여만 그루의 나무를 15,000여 그루 남기고 모조리 베어버린다든가, 포르투갈 총독에게 자신들의 입주 조건으로 거액을 약속한 후, 상륙하자마자 총독 저택으로 몰려가서 죽여버린다든가, 8만여 명의 주민은 18,000여 명 남기고 모두 살해한다든가(...).
종교적으로 자유로운 국가에서 경제가 발전하자 사상도 크게 발전하였으며,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가 나오고 이와 같은 사상이나 신교 저작물을 퍼트리기 위한 출판산업이 발전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미술도 크게 발전했는데, 돈은 많은데 땅이 좁아서 다른 투자수단을 찾은게 미술품이다. 그리고 칼뱅주의 풍토로 종교적인 내용을 담은 미술품을 만들 수 없기에 당시 유럽 미술계의 큰 손인 교회에 파는대신 전 유럽인들에게 파는 것으로 타겟을 바꿨다.[19] 또 기존에 교회가 주문을 한대로 미술품을 만드는 것에서 미술가들이 직접 나와서 물건을 파는 것으로 판매 방식도 바꾸면서 미술품 거래가 활발해지자 작품의 양질도 같이 향상됐다. # 이 시기에 등장한 거장 중 대표적인 인물이 렘브란트다.
또 벌어들인 돈의 대부분이 왕과 귀족의 호화스런 왕궁을 만드는데 쓰이는 대신 중소상인들을 위한 주택을 만드는데 쓰였다고 한다.
미술품 외에도 터키에서 들어온 튤립이 인기를 얻으면서 튤립 구근이 하나의 투자수단으로 인식되어 투기가 벌어졌는데 결국은 튤립 공황이라는, 역사상 최초의 버블붕괴로 끝을 맺었다.
3.5 쇠퇴
그러나 유럽의 전통인 잘 나가는 놈은 일단 패고 본다 주의에 휘말려(…) 영란전쟁이라는 된서리를 맞은 끝에 영국(과 프랑스에) 상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그 전성기인 17세기의 위상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는 국력을 발휘하여 전 세계 상권을 주름잡고, 심지어 3차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동맹을 맺어 다굴을 쳐도[20] 처발랐을 만큼의 쩌는 힘을 발휘하였다. 먼나라 이웃나라 등의 영향으로 인하여 국내에서는 일반적으로 올리버 크롬웰에게 얻어 맞은 이후로 바로 잉글랜드에게 밀린 것으로 아나, 1차 영란전쟁에서도 부분적으로 패한 이후 (전쟁은 대략 무승부였다) 곧바로 해군을 재건하여 2차, 3차에서는 되려 잉글랜드 해군을 개처발랐다. 미힐 드 로이테르, 마르텐 트롬프 같은 해전사의 유수한 명장들이 활약한 것도 이 시절.
이후 잉글랜드에서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가 쫓겨나자 제임스 2세의 딸 메리 2세와 그 남편인 네덜란드 오라녜 공 빌렘 3세(윌리엄 3세)가 잉글랜드 왕으로 추대되어 잉글랜드와의 전쟁은 끝났다.[21] 사실 네덜란드를 결정적으로 몰락시킨건 잉글랜드가 아니라 17세기 말 루이 14세 치하 프랑스와의 처음부터 게임이 안되는 장기전으로, 잉글랜드는 이 공백을 틈타 4차 영란전쟁에서 네덜란드를 쳐바른다.
4 근대
1793년에 혁명 프랑스 군대에 점령되어 잠시 나라가 없어졌으나, 1815년에 나폴레옹이 완전히 패퇴하자 1815년 빈 회의에서 벨기에와 한 국가로 독립했다(이후 벨기에에서는 프랑스계 왈롱인들과의 세력 다툼이 벌어져 결국 1830년 벨기에 혁명과 함께 분열되고 말았다). 특이한 점이 일반적으로 역사상 다른 국가들은 전제 왕국으로 시작하여 19세기~20세기에 걸쳐 공화국으로 변한 반면,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때는 7개들의 주가 연합한 공화국으로 시작했으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 다시 독립하면서 이 때까지 네덜란드 정계에서 가장 강력했으며 국부 오라녜 공 빌럼의 가문이었던 오라녜 가문을 왕가로 추대하면서 공화국에서 왕정으로 변하게 되었다.[22]
5 현대
이후로도 계속해서 고만고만 하게나마 세력을 유지하고 알토란 같은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점유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시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본토는 독일에게, 동인도 식민지는 일본에게 점령되었다. 일본이 물러난 뒤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선언, 인도네시아 독립전쟁[23]을 벌이자 아주 필사적으로 군대를 보내 막으려 했으나 결국 독립을 인정했다. 이 당시 네덜란드가 벌인 학살과 인권 침해로 인해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24] 이 당시 미국이 중립을 지키려했으나 인도네시아 독립군에게 소련이 무기를 제공한다고 하면서 소련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네덜란드에게 압력을 가하여 독립시켜줄 것을 요구했고 네덜란드는 막대한 자원을 아쉬워하면서도 결국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허락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현재 가진 식민지는 舊 네덜란드령 안틸레스와 아루바만이 남아있다.
여담으로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 벌어진 인도네시아 여러 섬지역의 독립 요구에 네덜란드도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말루쿠 제도같은 경우에는 개신교가 대부분인데 1950년대 독립요구하다가 인도네시아에게 가혹하게 탄압받았다. 결국 말루쿠 인들이 몇 만명이나 네덜란드로 이주해야 했고 그 여파로 말루쿠 독립파들이 네덜란드에 있는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테러를 가하거나 인도네시아 정계요인을 공격한다든지 1977년에는 네덜란드 열차를 납치하여 말루쿠 독립운동가 석방을 요구한다든지 네덜란드도 덩달아 당하는 게 많았다.- ↑ 당장 로마만 해도 이탈리아 반도에 있던 그 도시국가가 성장하는 일대기로 그려지고 있고, 영국의 역사를 논할 때도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소개되며, 독일도 프랑크 왕국 → 신성 로마 제국 →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양강 구도로 서술된다.
- ↑ 현대 기준으로 벨기에와의 국경지대인 비어플릿(Biervliet)에 살았던 사람이며, 현재에도 마을에는 이 사람을 기리는 동상이 있다.
- ↑ 15세기 초에도 청어의 산란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발트해에서 북해로 바뀌는 통에 네덜란드는 포획에서 가공ㆍ수출까지 독점체제를 갖췄다. 네덜란드는 저장용 통의 재질과 소금의 종류, 그물코의 크기를 정하고 어획기를 한정해 청어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이끌었다. 청어산업 자금력이 꽤 오래동안 유지가 된것이다.
- ↑ 그동안 다른 유럽각국의 배들은 해적의 습격을 대비해 상선에 무기를 달았고 그 무게를 견디기 위해 좋은 재료로 배를 만들어야 해서 배의 단가가 비쌌고 이는 운송비용이 비싼 원인이기도 했는데, 네덜란드는 무기를 달지 않는 완전한 상선을 유럽 최초로 만들어 배의 단가를 떨어뜨리고 운송비용도 낮춰 최저운송비용을 실현했다.
- ↑ 또 배의 갑판을 좁게 만든 대신 배의 중간부분이 깊은 배를 만들어 갑판의 넓이가 넓을수록 세금을 많이 내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세금정책으로 인한 손실을 최소화 했다.
- ↑ 선량공이라는 칭호처럼 자선사업 등 선행을 많이 했지만 잔 다르크를 영국에다가 팔아넘긴 사람이기도 하다.
선량공이라며 - ↑ 이때까지는 공식적으로 저지대 전체나 네덜란드 지역 전체를 다스리는 작위가 없었다. 카를의 무지막지하게 긴 작위 중 브라방·림부르크·룩셈부르크·겔데른 공작, 플랑드르·아르투와·에노·홀란드·제일란트 백작이 저지대에 해당한다.
- ↑ 안트베르펜에서 일어난 "스페인의 분노"란 사건으로, 네덜란드 주둔 스페인군의 봉급을 운반하던 배가 영국에 의해 약탈당하자 빡친 스페인 군대가 현지인들을 다시 약탈한 사건이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눈 흘기기의 전형.
- ↑ 대국굴기에선 여기에 대해, 스페인 국왕이 네덜란드와 스페인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했을 때도, 네덜란드의 행정구역을 재편할 때도, 신임총독을 파견했을 때도 동의하거나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지만 펠리페 2세가 프랑스와의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의 돈에 손대려하자 반발했다고 이야기한다.
- ↑ 엄밀하게 말하면 이때는 네덜란드가 명목상 공화국이었으므로 '왕'이 아니라 그냥 '국가원수'(Stadtholder)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 ↑ 원래 스페인인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이슬람 세력들과 싸우던 레콩키스타 시기에는 비교적 관용적이었지만, 이 싸움이 마무리되자마자 15세기의 알람브라 칙령을 통해 유대인 추방 등 뒤통수를 쳐버렸고, 쫓겨난 유대인들은 포르투칼로 이주하게 된다. 하지만 16세기에 포르투칼이 스페인 세력에 들어가자 다시 네덜란드로 오게 된 것.
- ↑ 알베르트 알크메르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 법학과 교수는 현재의 유럽 연합에 비유했다.
- ↑ 현재 가치로 300만 유로, 2013년 12월 3일 기준의 원화로 약 43억 7백만 원
- ↑ 대국굴기에선 암스테르담 시장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의 쌈짓돈조차 동인도회사에 투자됐다고 한다.
- ↑ 백금 200만 톤에 해당
- ↑ 이 당시에 신용대출도 있었다고 한다.
- ↑ 은행은 신용도를 높이기 위해 은행에 간섭할 수 없도록 법을 제정했는데 네덜란드 공화국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적대국에게도 합법적으로 돈을 빌려줬다.
- ↑ 텀블홈 형태라고 한다. 세금 아끼려고 만들어진 함형이지만, 꽤 장수해서 근대에까지 등장했다. 1800년대말~1900년대 초까지 굴러다니던 증기 전투함들은 경사장갑 효과를 노리고 많이 채용했다. 그러나 함 밸런스를 잘못 맞추면 안정성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구조이기도 하다. 러시아 제국 해군의 보로디노급 전함들이 이 문제를 일으켜 결국은 쓰시마 해전에서 바다의 무덤으로 직행하게 된다.
- ↑ 국왕, 신하, 귀족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 위주로 표현을 했으며 사람의 욕망이 잘 나타나 있는 유화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 ↑ 20세기 이전 양국이 유일하게 동맹을 맺은 일이었다.
크림 전쟁, 2차 아편전쟁은? - ↑ 빌렘 3세 부부가 런던으로 올때 네덜란드 함대가 호위하고 왔기 때문에 런던 시민들에게는 마치 네덜란드 해군이 런던을 점령한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 ↑ 오라녜 공 빌럼은 독립전쟁의 지도자로 신망이 높았기 때문에, 독립 후 공화국 시대에도 국가수반인 스타트홀더 직을 오라녜 공의 후손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오라녜 공 빌럼 3세가 영국의 명예혁명 후 영국 왕으로 추대되는 등 오라녜 공 가문은 정식 왕정 수립 이전부터 사실상 네덜란드의 왕가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 ↑ 인도네시아 독립군 무기는 매우 열악했기에 농기구나 정말 오래전 엽총으로 저항하다가 일본군이 쓰다남긴 3년식 기관총같은 저질 무기라도 첨단무기 수준이었는데 이놈은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의외로 인도네시아 독립군들이 잘 써먹었다.
- ↑ 2000년대 중반에 세계 여러 나라를 자전거로 여행하던 미국인 여행가가 쓴 책자에서도 네덜란드 여행 도중에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라든지 여러 전쟁을 비난하던 네덜란드인에게 그런 네덜란드는 그래 인도네시아에서 뭐했더라? 라고 따지자 네덜란드인들도 할 말이 없는지 말문이 막혔다고 나올 정도이다.
하지만 이라크나 인도네시아 사람 입장에서는 가해자들끼리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말하면서 욕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