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모가미 도시오 | ||
1948년 ~ | ||
복무 | 항공자위대 | |
기간 | 1967년~2008년 | |
임관 | 방위대학교 15기[1] | |
최종계급 | 공장[2] | |
최종보직 | 항공막료장[3] |
田母神俊雄. 일본 항공자위대의 29대 항공막료장을 역임했던 인물.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다모가미 도시오이다. 타모가미 토시오도 이 항목으로 리다이렉트된다. 한국군으로 치면 공군참모총장 출신이다.
1 생애/경력
후쿠시마 출신으로 1948년 7월 22일에 태어났고 1967년 방위대학교에 15기로 입학하였다. 이는 한국 육사 27기, 해사 25기, 공사 19기에 상당하는 기수이다. 키가 162cm이다. 1971년 삼등공위(공군소위)로 임관하였고 직종은 방공포병[4]이었다. 비행은 후방석으로 50시간을 기록하였다. 제6항공단[5] 사령관과 통합막료학교장[6]을 거쳐 2007년 3월 28일에 요시다 다다시에 이어 항공막료장이 되었다.
항공막료장 시절인 2008년 8월에 미국을 방문하여 미 공군 참모총장인 노턴 슈워츠에게 훈장을 받는 다모가미.
여기까지만 보면 훌륭한 자위대 항공막료장이다.
그러나....
2 논문 사건
2008년 10월 31일 일본의 건설사/호텔 체인인 아파(APA)그룹에서 주최한 '진정한 근현대사관 현상논문(「真の近現代史観」懸賞論文)'에 제출한 '일본은 침략국가였는가?(日本は侵略国家であったのか )'가 문제를 일으켰다. 이 논문은 해당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 전에도 다모가미는 안보 관련 현안이나 핵무장을 주장하는 발언을 일으켜 자위대 내에서 문제가 됐는데 이 논문이 골때렸던 건 중일전쟁이 장제스와 코민테른의 사주였으며 일본군은 이에 속아 넘어갔을 뿐이라고 빨갱이 탓 주장했다. 거기에서 나아가 태평양 전쟁 역시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책략에 일본이 넘어간 것으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피해자는 일본이었다고 주장했다. 문제가 되자 다모가미는 상금 300만엔의 수령을 거부하고 상장만 받았다.
논문의 수준은 음모론이었다. 일본 내에서도 당장 비판이 쏟아졌으며 무라야마 담화나 고이즈미 담화[7]와 같은 정부 견해와도 위반되는 것이었다. 특히 일본은 일본군이 과거 군부를 위시하여 정부 위에 섰던 경험 때문에 자위관의 정치 개입을 엄금했다. 어차피 다모가미는 임기 만료를 4개월 정도 남겼기 때문에 거리낄 게 없어 행동했던 것으로 보였다.
당시 방위대신이었던 하마다는 부적절했다고 평가했고 결국 다모가미는 경질되었다. 니혼TV의 설문조사결과 60%가 경질에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22%는 적절하지 않다고 봤다. 다모가미 논문은 주장의 적절성을 빼더라도 논리도 틀려먹었고 인용 등에서도 엉망이었단 평가를 받았다.
다모가미가 경질되면서 당시 항공막료부장[8]이었던 이와사키 시게루[9]가 대리를 했다. 얼마나 급격하게 잘렸는지 보통 막료장급 이상 제복[10]들이 전역을 할 땐 황거에서 파티를 열어주는데 그것도 못 하고 나갔다. 후임자는 호카조노 겐이치로이다.
퇴직하면서 퇴직금으로 7천만 엔을 받았는데 하마다 방위상이 반납을 요구했지만 반납하지 않았다.
3 그 후 행적
군문을 나선 후엔 거리낌없이 발언하고 있다. 8대 방위대학교 교장이었던 이오키베 마코토(五百籏頭真)가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을 반대했던 일이나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반대의견을 낸 걸 까기도 했다. 그가 이 문제를 든 건 방위대학교장도 자위대원[11]인데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는데 자위관인 나는 왜 못 하게 했냐며 물타기하기 위해서였다.
2009년 8월 6일에 히로시마 원폭투하 추모일에 강연을 할 계획이었으나 히로시마 시장이 핵무장을 주장하는 다모가미가 강연을 하는 건 문제라며 일정을 변경할 걸 요구했고 다모가미는 핵무장을 주장하는 내용은 없을 거라며 일정을 강행했다. 그리곤 핵 억지력을 운운하며 핵 무장을 주장했다.
2010년에 저서 자위대풍운록(自衛隊風雲録)을 냈는데 기밀 누설 혐의를 받았고 전직 자위대원 등의 명예훼손 등으로 비판을 받았다가 2012년에 일부를 교정하였다.
2011년 8월 21일 열린 후지TV 앞에서 열린 반한 시위에도 참여했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에도 위험하지 않다며 피난하는 걸 응석부린다고 표현했다.
2012년엔 트위터로 주일미군에게 강간당한 여성 사건을 두고 1995년의 여고생 성폭행 사건을 운운하며 새벽 4시에 거기에 왜 있었냐며 피해자를 공격했다. 근데 1995년 당시 사건은 밤 8시였고 여고생이 아니라 여자 초등학생이 강간당한 사건이었다. 트인낭이다 다모가미 씨 애국자 아니었어? 이상하네?
좌익을 무턱대고 까기도 했는데 2013년에 왕따와 체벌을 언론이 다루는 것을 약해빠진 좌익 사상 때문에 그렇다며 일본이 약화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사관생도 시절에 하도 처맞아서 그런가보다 본인 인터뷰에 따르면 방위대학교에 간 것도 일반 대학에는 전공투가 있어서 갔다고.
그리고 2014년 2월 9일에 열린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다. 이시하라 신타로가 적극 지원한다. 근데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지지 선언을 받은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 vs 아베 신조 현직 총리의 지원을 받은 마스조에 요이치의 구도가 되어 그냥 묻혔다. 다 합해서 61만표(12.5%)를 얻고 4위로 탈락했다.. 근데 정작 호소카와도 3위 밖에 못 했다. 진보 성향의 우쓰노미야 겐지가 2위를 기록했다. 관련기사
이 인기를 바탕으로 향후 신당을 창당할 계획이라 하며, 2015년부터 '행복의 과학'의 교수직을 맡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만 확정된 것은 아니기에 추후 상황에 따라 수정바람. 참고로 행복의 과학은 극우 성향 사이비 정치단체이다. 한때 북한이 한국 점령 후 일본에 스파이를 풀어 나고야, 오사카, 도쿄에 핵 한방씩을 날린다는 괴랄한 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에 배포한 바 있으며 만화 작화가 사토 후미야가 이쪽에 몸 담고 있기로도 유명하다. 군인인 줄 알았더니 교주가 되려나 보다. 허경영?
트위터 활동을 굉장히 활발하게 하고 있다. 트위터에 서식하는 넷 우익들의 추종을 한 몸에 받다보니 팔로워도 자그마치 23만 명이 넘어서 인터넷상의 영향력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발언의 수준을 보면 이시하라 신타로나 하시모토 도루마저도 쌈싸먹고 남는 극우 성향을 보인다.
일단 안보에 식견이 있어야 할 전직 항공막료장이라는 양반이 북한보다도 한국을 더 적대시하는 모습을 보이며 트위터에서 북한 관련 글은 찾기 매우 힘들다. 트윗 내용이 일본의 자존심을 세우고 한국과 중국에게 굴하지 말고 떳떳하게 나가자는 취지인 것이 대부분인데 중국은 그렇다 쳐도 일본의 안보에 한국과 북한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한 지 판단할 능력은 있는 지 의심스러운 수준.
심지어 2014년 9월에 열린 강연회에서는 최저임금제를 부정했다. 잘못 본게 아니다. "최저임금제가 있는 탓에 국제경쟁에서 뒤쳐지므로 시급 300엔으로도 고용 가능하게 해야 한다"라는 내용이며 트위터에도 이 내용을 게재했다. 당연히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다모가미를 거세게 비판했다. 다모가미 당신이 시급 300엔으로 일해보라든지... 심지어 일부 넷 우익마저도 이건 아니라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거셌다. 이래도 빨아주면 진짜 답이 없지
10월에는 일본인 과학자들의 노벨상 수상을 축하하며 "이것으로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는 지금까지 22명이 되었습니다. 한국과 중국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일본 국민 여러분, 일본이 얼마나 우수한 나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가집시다."라는 내용의 트윗을 남겼다. 굳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야만 자존심이 서는 것인지의 여부는 둘째치고 내용 자체도 틀렸다. 김대중과 류샤오보 중국에서 정식은 아니지만 중국계인 가오싱젠과 중국에 최초 문학상인 모옌과 대만인 과학자2명과 같은 사람들은 그냥 투명인간으로 보이나보다.[12] 리히텐슈타인이나 시랜드 공국과 비교했으면 욕은 안 먹었겠지 이런 잇다른 실언으로 인해 다모가미는 엄청난 욕을 먹고 있으며 이 시점에도 넷 우익 지지자들이 점점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차세대당 소속으로 2014년 12월 14일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다모가미가 출마한 도쿄 제 12구는 자민당 후보가 출마하지 않은, 공명당 출신 한 현직 의원의 텃밭 선거구였는데 이 곳에서 출마한 4명 중 4위. 차세대당의 천적 일본 공산당의 후보는 2위를 차지했다. 다만 꼴찌 4위라고는 하나 2위와 크게 차이가 안나는 18.5%를 득표했다. 정확한 수치는 1위 공명당 후보 41.6%, 2위 공산당 후보 21.0%, 3위 생활당 후보 18.9%, 4위 차세대당 후보 다모가미 18.5%[1],
물론 수치 자체는 10개월전인 2월 도쿄도지사 선거때에 비해서 6% 상승한 수치. 아무래도 초선 국회의원이 도쿄도 지사보단 급이 낮은 것 같지만 넘어가자. 그래도 중의원선거는 소선거구제라 1위만 당선되지만, 참의원은 소선거구제+중선거구제 혼합형이라(2016년 7월에 열리는 참의원 선거에서는 1인 선거구 32곳, 2인 선거구 4곳, 3인 선거구 5곳, 4인 선거구 3곳, 6인 선거구 1곳이다.) 6명을 뽑는 도쿄 선거구에서는 6위만 해도 당선이 되기떄문에, 10%만 득표해도 당선이 충분히 가능한 곳이라, 다모가미 정도 득표력이라면 2016년 제24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 에서 도쿄 선거구로 출마한 시 당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2015년에 들어서도 병신짓은 계속되어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의 일본인 인질 고토 켄지씨의 납치 사건에 대해 "고토 켄지씨와 아버지의 성이 다르다. 인터넷에선 재일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데 국가에서 철저히 알아봐야 한다."라며 트위터에서 주장하여 물의를 빚었다. 재혼 등의 경우에는 아버지와의 성이 다른 경우가 꽤 있어서 말 그대로 개소리 중의 개소리. 트위터의 니트 넷 우익들과 사상이 거의 동급까지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 상식인은 물론 일부 넷 우익에게도 "그럼 고토가 재일이면 구출하지 말라는 거냐?"라며 비판을 받았다. 근 2년간의 온갖 병크로 인해 점점 지지층이 떨어져나가는 모양새다.
2015년 2월에는 자신의 회계담당자가 정치자금을 횡령했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2015 12월 한일 위안부 협의에 대해 "자국이 하지않은 위안부강제연행을 인정한게 됐다", "중국에서도 배상하라 할것이다" 등의 막말을 본인의 페이스북에 쏟아냈다.
2016년 4월 14일,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2] 2014년 도지사 선거 낙선 후 위로명목으로 선거운동원들에게 금품을 제공한 혐의. 지지자 진영에서는 의리를 지킨 것(...)이 왜 불법이냐며 두둔하는 있는 상황.의리는 지키고 법은 안지킨다 2016년 참의원 선거에서 도쿄 선거구에 출마할 경우, 도쿄에 있는 다모가미 고정표로 제법 당선가능성이 있었으나(6등까지 당선) 체포되면서 강제 불출마행이 되어버렸다.
4 기타
(...)
일본 내에서는 최초로 대장 출신 아이돌을 노린다 카더라는 평가도 있다.
일본 인터넷에서 자위대 관련 얘기가 있을 때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방위대학교에서 선후배간에 가혹행위로 구강성교가 있다는 얘기가 나오면 다모가미씨도 했을 거라고 꾸준글이 달리는 식.
2014년 2월 도쿄도지사 선거 당시 홈페이지에서 쓴 말이 심장을 바쳐 다모가미 도시오(心臓を捧げよ田母神俊雄)였다. 선거후폐쇄했다- ↑ 1971년에 임관하였다.
- ↑ 공군중장에 해당한다. 다만 항공막료장은 대장으로 친다.
- ↑ 각 자위대 막료장 및 통합막료장은 각군 대장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는다.
- ↑ 일본에선 고사포라고 한다.
- ↑ 항공단은 한국의 비행단에 해당한다. 6항공단은 이사카와에 있다.
- ↑ 한국의 합참대학에 준한다.
- ↑ 2005년에 발표한 담화로 고이즈미 본인은 일단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같은 문제를 일으키긴 했지만 총리로서는 중일전쟁이나 한일강제합병이 일단 침략임을 인정했다.
- ↑ 한국의 공군참모차장에 상당한다.
- ↑ 2013년부터 일본 제복자위관 최선임인 통합막료장을 맡고 있다.
- ↑ 일본에선 보통 문관에 대비되는 의미로, 무관이나 경찰관 등 제복을 착용하는 공무원들을 제복이라 부르기도 한다.
- ↑ 자위대원은 자위관과는 뜻이 다르다. 자위관에 공무원이나 군무원에 해당하는 공무원 등을 포함한 더 큰 개념이다.
- ↑ 정황상 평화상을 제외한 학술분야 수상자만으로 한정한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