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하르트 트리스탄 오이겐 하이드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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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라인하르트 트리스탄 오이겐 하이드리히
(Reinhard Tristan Eugen Heydrich)
생물년1904년 3월 7일 ~ 1942년 6월 4일
출생지독일 제국 할레
사망지나치독일 보헤미아 모라바 보호령 프라하
정당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배우자리나 하이드리히
저는 저의 큰아버지를 존경합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제 사촌들과 저와 제 동생들에게 매우 자상한 큰아버지였습니다. 제 아버지에게도 매우 따스한 형이었습니다.[1] 그래서 저는 큰아버지를 존경합니다. 다만 이와 별개로 큰아버지가 저지른 학살은 미화하기 싫군요. 저희에게 자상한 거하고 죄없는 사람을 죽인 거하고는 별개이니까요.

- 라인하르트의 조카였던 피터 토마스 오이겐 하이드리히가 큰아버지를 회상하면서

1 개요

나치 독일의 국가보안성(Reichssicherheitshauptamt[2] 약칭 RHSA) 장관. 하인리히 뮐러와 함께 그 유명한 게슈타포의 악명을 만든 장본인으로 하이드리히가 나치당에 들어오고 그가 죽을 때까지 나치당이 관련되어 있는 사건에는 모두 하이드리히가 관련되어 있다고 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펼친 인물이다.

2 생애

1904년 3월 7일 독일 동부의 할레안데어잘레(Halle an der Saal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곡가이자 오페라 가수(테너)인 리하르트 브루노 하이드리히(Richard Bruno Heydrich), 어머니는 작센 왕국의 드레스덴 궁정의 궁정 고문관을 맡은 음악 연구자 게오르크 오이겐 크란츠 교수(Georg Eugen Krantz)의 딸 엘리자베트 아나 마리아 아말리아 크란츠(Elisabeth Anna Maria Amalia Krantz)다.

하이드리히는 학창시절 때부터 유대인이라면서 왕따를 당해왔는데,[3] 아버지가 유대인들과 절친했고 집으로 랍비들까지 데려와 사이좋게 이야기도 나누고 술자리를 가진 점때문에 이런 소문은 신빙성을 얻었다고 한다. 물론 본인이나 아버지는 극구 부인했고 사업이나 여러 인맥 때문에 유대인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밝혔음에도[4] 그 소문은 하이드리히가 죽을때까지 끈질기게 거론됐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조사로는 유대인이 아니라고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인리히 힘러가 하이드리히를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소문의 유포를 막지 않았다고 한다.[5]

1922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중위까지 진급했으나 1931년에 모종의 이유로 쫒겨났다. 일설에 의하면 한 처녀를 강간했기 때문이라고 하나, 하이드리히가 훗날 이 사건을 은폐했기 때문에 진상은 알 수 없는데, 일부에서는 약혼녀가 있음에도 다른 처녀와 내연관계를 가진 것이 발각되어 "여성의 명예와 장교의 품위를 훼손했다."는 명목으로 퇴역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의 기준으로는 퇴역처분이 내려지지 않을 사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처녀의 아버지가 당시 해군총사령관이던 에리히 레더 상급대장과 막역한 친구였기 때문에 강제로 퇴역되었다 한다. 레더 제독은 1928년 10월 1일 한스 젠커 상급대장에 이어 총사령관에 취임했으므로, 강제 예편의 발단이 되는 사건은 최소한 이 이후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하이드리히의 직속상관은 독일 국방군 정보부서인 압베어(Abwehr)를 이끌던 빌헬름 카나리스 해군 소장이었다. 훗날 대장까지 진급한 아프베어의 지휘관 카나리스 제독과 나치당 소속 SD(보안국)를 이끌던 하이드리히는 정보기관 특유의 충성경쟁 때문에 라이벌이 된다. 나치당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스럽고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인[6] 카나리스가 히틀러 집권 후에도 계속 압베어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카나리스가 위에도 언급된 하이드리히의 석연찮은 전역에 관련된 진상을 아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는 유대인 가계라는 것을 카나리스가 알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국방군-나치당 할 것 없이 모든 정보부서를 자기 휘하에 두고싶어했던 하이드리히가 그래서 카나리스에게는 꼼짝 못했다고 한다. 힘러와의 암투에서 보듯이 하이드리히는 상관이라고 공손해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이는 신빙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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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이 묘하게 이 분과 닮았다.

당시 하이드리히는 리나 폰 오스텐(Lina von Osten 1911년 6월14일~1985년 8월14일)과 약혼한 상태였다. 리나는 발트 해 연안의 페마른 섬 출신의 마을 학교 교장의 딸로, 엷은 황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하이드리히의 불명예스러운 행동이 무엇이였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듯했다. 리나의 동생 위르겐[7]은 1928년 히틀러의 연설을 들은 뒤 히틀러에게 완전히 빠져들었고. 리나 자신도 나치당 여성단체에 가입했다. 하이드리히에게는 나치당에서의 길이 이미 다져져 있는 셈이었지만, 처음에는 나치당의 사상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돌격대의 거친 이미지만 보고 그들을 판단했다. 그러다가 약혼녀 리나 폰 오스텐은 하이드리히에게 SS에 입대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8] 당시 SS는 히틀러의 친위 경호대로써 약 1만 명의 대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1931년 27세의 하이드리히는 나치당에 가입하고 SS의 대원이 되었다. 당시 SS의 첩보 부서를 창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SS장관 하인리히 힘러에게 발탁되어, 친위대에 입대했다. 하이드리히가 힘러의 부관으로 임명된 이유는 특히 그가 장신의 금발에 탄탄한 체구를 가져서 겉으로는 게르만족의 전형으로 보인다는 점에 히믈러가 완전히 매료되었기 때문이였다. 알려진 바로는 그가 자신의 집안을 통해서 당시 친위대 상급대령 카를 폰 에버슈타인(Karl von Eberstein) 남작을 알게 되었고, 히믈러의 측근이였던 에버슈타인은 하이드리히와 히믈러의 만남을 주선했다.

나중에 들리는 설명에 따르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첫 만남은 오해로 인해 이루어졌다. 당시 하이드리히는 통신전문가(하이드리히가 해군에 있었을때의 직무가 통신분야였다.)를 모집하는줄 알고 친위대에 입대했는데 정작 힘러는 보안전문가를 찾다가 하이드리히를 고용하게 된 것이었다. 하이드리히는 어렵게 인터뷰 기회를 잡았기 때문에 제국지도자의 착각을 바로잡아주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힘러는 하이드리히에게 단 20분을 주고 친위대 정보부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 써보라고 했다. 하이드리히는 자신이 해군 정보 세미나에서 얻은 피상적인 지식과 오래전 바다에서 긴 시간을 보내면서 대부분 스릴러 소설을 읽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기억에 남는 것을 추가했고,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적절하고 정확하다고 생각되는 군 전문 용어의 실례를 포함시켰다. 그 결과 힘러는 그것을 검토한 뒤 만족스럽다고 평했다. 하이드리히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힘러로부터 고향 함부르크를 떠나 뮌헨으로 갈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31년 7월 14일 하이드리히는 친위대 상병이라는 초라한 계급으로 함부르크 친위대에 합류했다. 함부르크 친위대 대원 대부분은 도시의 홍등가와 비어홀에서 빌붙어 살던 젊은 사회부적응자들로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10월 5일 뮌헨에서 전문이 왔는데 내용은 "당원 번호 544916번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당원은 본부의 명령에 따라 올해 10월부로 친위원수의 참모진에 합류한다."라는 내용으로 함부르크 본부를 놀라게 했다.봉급은 190제국마르크로 변변치 않았고 정보국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하부조직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뮌헨 투르프켄슈트라세(turfkenstrasse) 23번지 건물의 비좁은 4층에서 하이드리히는 비서인 아내와 조수 3명과 함께 팀을 이루어 일했다.

하이드리히는 처음부터 세 사람 몫의 능력을 하며 밤낮으로 일을 했다. 하이드리히의 업무량은 베를린의 있는 괴링의 업무량과 맞먹을 정도였다.그 돼지가 일을 할 줄 아나? 하이드리히는 기존의 친위대 기록에서 자료를 뽑아 독재 권력의 기반인 방대한 색인 카드를 만들었고 그 속에는 동료 친위대원들에 대한 세세한 사항들을 비롯해 정권에 미약하게나마 위협을 줄 수 있는 모든 인물들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친위대 보안대(SD)로 이어졌다. 보안대는 하인리히 힘러의 보안 기관이었지만, 실제로는 하이드리히의 지휘하에 있었다 그 후 쾌속 진급해 SS 대위로서 보안방첩국(Sicherheitsdienst, SD)의 초대 부장이 되었다. 하이드리히의 보안국은 나치가 벌인 숙청과 정치공작을 진두지휘하며 은폐공작을 벌였다. 나치 당내 온건파(좌파)와 돌격대를 싸잡아 숙청한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이나 폴란드 침공을 위한 증거조작(통조림:Konserve 작전), 수정의 밤(Kristallnacht) 등이 대표적인 하이드리히의 작품이다. 전쟁전 소련의 손발을 자르는 삽질이었던 대숙청국방군 방첩부(Abwehr)와 SD가 보기드문 공동공작으로 촉발되었다는 연구도 있으며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장군의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 1939년 8월에 폴란드에서 일어난 그라이비츠 사건, 1939년 11월에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펜로 사건 등 국내외의 정치사건에는 대부분 하이드리히가 관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 9월, 하이드리히는 스스로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SD와 보안경찰을 통합하고 "국가보안본부"를 세우고 그 자리에 올랐다. 1941년 6월에는 독소전쟁에 앞서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의 토벌을 위해서 살인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을 조직해서 유대인들을 대량학살했으며, 1941년 7월에는 헤르만 괴링으로부터 유럽전역에 걸친 "유대인 문제 최종해결책"을 건의받았고 이를 근거로 해서 1942년 1월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내 학살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유대인 학살계획은 하이드리히의 이름을 따서 "라인하르트 작전"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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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리히는 냉혹냉철한 성격에 무자비한 일처리 방식, 타고난 근면성과 예리한 정치수완에 해군에 있을때부터 익힌 정보능력(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해 해군시절 정보부에 적을 두기도 했다.) 등 출중한 능력으로 히틀러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권력서열로는 뒤쳐졌으나 정보/경찰권을 장악한만큼 나치 당내에서조차 히틀러 유고시 권력을 장악할 제1순위라는 예측이 떠돌 정도였다. 이쯤 되니 하이드리히를 처음 발탁한 힘러 또한 하이드리히를 경계하여 죽을 때까지 냉각관계를 유지했다. 하이드리히도 힘러를 무능하다고 경멸하여 힘러의 의견에 반대되는 보고서를 제출해 물먹인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고 이에 힘러는 쪼잔하게 하이드리히의 째진 눈을 트집잡아 "몽골리안"이라 욕하곤 했다.풉. 누가 누구보고 몽골리안이란거야? 하이드리히가 키가 작았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이드리히의 키는 191cm으로 오히려 매우 큰 편이었으며, 밑의 사진에서도 하이드리히의 키가 제일 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오히려 전형적인 아시아인에 가까운 외모를 지녔던 사람은 힘러였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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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줄의 세 명 중 가운데가 하이드리히.

1936년에 게슈타포는 사법경찰(Kriminalpolizei)까지 흡수하여 공안경찰(SiPo)으로 거대해졌다. 하이드리히는 상급대장 직위의 게슈타포의 초대 국장이 되었으며 1941년 37살의 나이에 노이라트의 뒤를 이어 체코 총독[10]이 되었다. 잔인한 철권통치를 펼쳐 저항조직을 분쇄하고 체코인들의 저항을 찍어눌렀다. 이때 얻은 별명이 '프라하의 학살자' 혹은 '교수인 하이드리히'다. 헌데 강경책만 쓴 것이 아니라 체코인 노동자들에게 배급량을 대폭 늘려주거나, 체코인 대표단을 정기적으로 접견하거나, 휴양시설을 개방하는 등의 온건책도 병행하여 체코 지역의 민심이 '안정'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채찍과 당근'의 교과서적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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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이드리히는 나치스 경력의 정점에서 인생의 아이러니를 맞이한다. 독일의 체코 지배를 정착시킨 원흉으로써 1942년 5월 27일, 체코 망명정부와 영국군 SOE가 공모한 암살계획 '유인원 작전'(Operation Anthropoid)작전명이 왜그래 사실 하이드리히가 유인원보다 못한 새끼라는 뜻이라 카더라의 목표가 된 것이다. 영화 새벽의 7인은 이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당시 영국에 망명 중이던 체코 정부로부터 요제프 가브첵 상사와 얀 크비스 중사 등 10명의 체코 군인이 선발되어 영국군 특수공작부 SOE로부터 암살에 필요한 훈련과 장비를 지급받았다. 암살단은 영국공군기로 체코영내에 낙하해서 프라하로 잠입했다. 1942년 5월 27일 이른 아침부터 암살단은 트로야 다리 앞의 홀레쇼비체 거리로 향하는 커브길에서 프라하 성으로 출근하는 하이드리히의 차량을 기다렸고 오전 10시 반 경에 하이드리히의 메르세데스 벤츠 오픈카가 도달했는데 역시나 평소 하이드리히의 습관답게 호위차량은 없었고 운전병만 권총을 가지고 있던 상태였다. 차량이 커브길에 접어들자 속도를 줄이기위해 브레이크를 밟자 암살자 가브첵이 차량 앞으로 뛰어들면서 숨겨둔 스텐 기관단총을 꺼내 쏘았다. 하지만 탄환이 약실에 걸려 발사되지 않았고명불허전 스텐 놀란 하이드리히는 운전병인 클라인에게 차를 멈추라고 명령했다. 가브첵이 달아나자 클라인이 그 뒤를 쫓았는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혼자가 된 하이드리히에게 크비스 중사가 라이플을 꺼내 쏘았다. 하지만 탄환은 빗나갔고 하이드리히는 차 밖으로 몸을 피했는데 연료통에 박힌 탄환은 차를 불태우고 말았다. 크비스도 실패한 것을 알고 하이드리히가 권총을 난사해오자 곧장 달아났다. 하이드리히는 무사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차량이 화재로 폭발시 튄 파편이 복부와 견갑골에 박혔다. 하이드리히는 현장을 지나던 프라하 시민에 의해 바로 브로프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원측은 다른 환자들을 모두 내쫓고 하이드리히 전용 응급체제를 갖추고는 현지의 외과의사들에 의해 수술이 진행되었다. 하이드리히 피격의 보고를 받은 베를린의 히믈러는 우수한 친위대 의사들을 모이게 한 후 그들을 데리고 프라하로 건너갔다. 하지만 하이드리히는 처음 수술 당시의 예상과는 달리 패혈증이 생겨 회생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렸고 결국 사건이 발생한지 고작 1주일 만인 6월 4일 오전 4시 30분에 사망하고 말았다.

물론 하이드리히는 총상으로 치명상을 입은 것이 아니라서 사건 직후 공작원들에게 총질을 할 정도로 멀쩡했으나 체코인 의사들을 믿지 못해 치료가 지체되었고 뒤늦게 도착한 독일인 의사들도 시간을 낭비하다가 결국 2차감염에 의한 합병증으로 6월 4일 사망했다. 지금이야 정말 이렇게 사람이 죽느냐며 황당하겠지만 페니실린 등의 항생제가 널리 보급되고 감염 예방이란 개념이 확립되기 전에는 이런 경우가 제법 많았다. 물론 치료받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죽을 수 있느냐는 의문 때문에 힘러가 의사들을 매수해 하이드리히를 암살했다는 음모론을 제시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이는 당시 힘러가 파견한 의사가 힘러의 주치의 카를 게브하르트인 점에서 신빙성이 있다.[11]

생전에 그가 가졌던 수많은 직위들은 다음과 같이 분산되었다. 제국보안본부장은 하인리히 힘러를 거쳐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가져갔으며 게슈타포 총수직은 하인리히 뮐러가 승계하였다. ICPC[12]의 수장은 아르투어 네베에게 승계되었고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총독직은 형식적으로는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에게 반환되었으나 실권은 쿠르트 달뤼게가 가지고 있었다. 친위대의 정보부서를 이처럼 완전장악했던 것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3 트리비아

하이드리히는 야심이 매우 큰 인물이였다고 하며 이는 발터 셸렌베르크의 회고록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사령부에서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시무시한 보안대 대장 하이드리히와 첫 만남을 가졌다. 하이드리히의 사무실이 있는 게슈타포 건물로 걸어 들어가면서 나는 상당히 걱정스러웠다. 하이드리히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넓고 유난히 솟은 이마에 짐승의 눈처럼 빛나는 섬뜩함이 느껴지는 작고 찢어진 눈, 포식동물 같은 긴 코, 크고 두툼한 입술을 가진 인상적인 인물이였다. 그의 손은 가늘면서 좀 지나치게 길어서 거미의 다리를 연상시켰다. 그의 큰 엉덩이는 멋진 용모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이 주는 여성적 효과는 그를 더욱 더 사악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그렇게 체격이 큰 남자에게서 나오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높았고 말투는 신경질인 스타카토였다. 이후 수년간 하이드리히를 알고 지냈지만, 그에 대한 첫인상은 바뀌지 않았다. 하이드리히는 나치 독일의 막후 실세였고, 정권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국가 전체의 발전 방향은 그의 강한 성격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정계의 모든 동료들보다 우월했고, 보안대의 방대한 정보기구를 장악하듯 그들을 장악했다. 하이드리히는 야심이 너무 컸다. 마치 한 무리의 포악한 늑대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는 항상 자신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리더십을 발휘해야 했다. 그는 모든 일에서 속임수든, 배신이든, 폭력이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일등이고 최고가 되려고 했다. 하이드리히는 얼음같이 차가운 지성의 도움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불의를 잔인함의 극단까지 몰고 갈 수 있었다.

- 발터 셀렌베르크의 "셀렌베르크 회고록" 중에서

하이드리히의 업적 중 하나는 별볼일없는 부내 조직에 불과했던 보안국을 군 방첩부를 본떠 독일 최대의 정보기관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보안부장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하이드리히는 1934년 게슈타포와 보안국 양쪽을 이끌면서 악명높은 비밀경찰의 수장으로서 활약했다. 게슈타포를 창설한 것은 괴링이지만, 게슈타포의 악명을 만들어낸 인물은 사실상 하이드리히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SD는 조직적으로는 매우 정비되어 있었으나 자신들의 수장의 암살계획을 눈치채지 못하는 등, 실제 정보 수집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못하였다.

빌헬름 카나리스는 하이드리히 암살 계획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방조했다. 하이드리히가 카나리스와 영국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SD는 이후 아프베어와 권력다툼을 지속하였으며 결국 방첩부 수장이던 카나리스 제독이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자 방첩부를 흡수시키면서 제국의 최고 정보부서로 등극했다.[13]

하이드리히가 유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총통의 지시를 받아 유태인 최종해결계획(홀로코스트)을 수립, 추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격적으로 실행한 홀로코스트 실무 총책임자가 바로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직접 집행한 게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나치 독일의 엄친아라고 할 수 있는 인물로, 음악가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바이올린 연주에 능했다. 또한 만능 스포츠맨으로 수영, 스키, 승마는 선수급이었고 특히 펜싱 실력은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때 독일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될 정도였다. 공군 예비역으로 JG-1에 소속되어 Bf109E-3, Bf109E-4형을 몰고 폴란드 전선에서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동부전선에서 소련 파일럿에 의해 격추된 후로 히틀러가 하마터면 소중한 인재를 잃을 뻔했다고 버럭해서(…) 비행금지명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체코의 총독으로 있을 당시에는 자신의 지배력을 과시하기 위해 경호차량 없이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오픈카로 종종 다녔다고 한다. 이는 암살 이후 히틀러가 사석에서 하이드리히가 방탄설비를 갖추지 않은 오픈카를 타고 이동하다가 암살당한 것을 두고, 멍청한 짓이라고 놀리는 등 나치당 최상층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히틀러는 이후 점령지역의 고위관료들에 대한 경비수준을 상향시켰다.

중국쪽 자료에 따르면 하이드리히는 대단한 나르시스트로, 히틀러없는 독일은 존재해도 자신이 없는 독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얼마후에 펜싱 클럽의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그(히틀러)는 독일에게 해가 되는 존재"라고 험담하였다고 한다. 하이드리히의 지인들은 만약 하이드리히가 암살되지 않았다면 1944년의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하거나 아니면 직접 히틀러 암살계획을 작성하고 실행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그리고 피아노 갈고리에 매달려 교수형 당했겠지

사실 이런 풍문 수준의 자료가 아닌 서방쪽 자료에서도 뚱뚱보, 난쟁이, 샌님 등 코미디 무대를 방불케하던 추물투성이인 나치 당내에서,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함께 전형적인 게르만인의 외모를 하고 능력도 있었기에 히틀러를 제외한 나치 최고간부들을 꽤나 깔보았다는 자료가 남아있다. 지독히 의심이 많고 까다로운 자기중심적 성격으로, 하이드리히의 아내조차 친구를 사귀는 것을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증언한다. 동생 지크프리트 하이드리히[14]는 형이 자행한 일들이 어떤 것인지를 전혀 몰랐으나, 암살 후 그 행적을 알게되자 충격을 받고 괴로워하다 유태인 탈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하지만 게슈타포가 자기를 조사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자 권총으로 자살했다.

1939년에 하이드리히는 SD의 자금을 이용해 살롱 키티라는 매춘업소를 운영했다. 여기에는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요인들과 외국귀빈들의 도청에 이용되었는데 하이드리히 자신이 이용할 때에는 도청기가 모두 떼어졌다고 한다.

당연히 부하들에게도 냉혹한 상사로 하이드리히의 암살을 도리어 기뻐한 부하들도 적지 않았다. 히틀러에게만은 충성했지만, 괴벨스같은 맹목적 충성이 아니라 퍽 타산적인 충성이었다고 한다.

하이드리히가 처음 프라하에 도착했을 때 벌어진 부대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스바테호 비타 성당(Katedraia svateho vata)에서 있었던 보헤미아 왕들의 왕관 보석 전시회였다. 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작품은 스바테호 바츨라프(svateho vactav)의 금관으로, 그곳에 박힌 사파이어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것으로 유명했다. 하이드리히는 10세기에 동생 볼레슬라프(boleslav)가 음모를 꾸며서 살해되었으며[15] 바츨라프가 원래는 독일의 친구였기 때문에 동쪽에서 온 악랄한 패거리들에게 굴욕을 당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히틀러가 체코를 보호령으로 만든 것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행위라는 것을 강조했다. 왕관의 보석들은 전시되지 않을 때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개의 봉인을 상징하는 7개의 자물쇠가 채워지는데 전통적으로 열쇠는 국가원수를 포함한 7명의 사람들이 보관했는데 이 열쇠들은 하하(hacha) 대통령이 하이드리히에게 양도했다. 그러자 하이드리히는 "이것은 우리의 신뢰와 당신의 의무에 대한 증표로 보아주십시요"라며 열쇠 3개를 보여주었다. 그러던 중 하이드리히는 이 보석이 박힌 왕관을 삼엄하게 경비하는 이유가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전설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고대 왕국의 진정한 계승자가 아닌 사람이 그 왕관을 쓰거나 그 왕관에 손을 대는 자는 죽음의 표적이 된다는 전설이였다, 그러나 하이드리히는 그 전설을 미신으로 생각하고 왕관을 반 쯤 들어올렸는데 그로부터 약 9개월 후 저격당해서 사망했다.[16]

하이드리히가 사망하자 프라하 성의 명예의 궁전에 안치된 하이드리히의 관에 꽃과 화환을 바치기 위해서 보호령 전 지역의 당국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하이드리히의 관은 카를 다리 위의 궁전에서 중앙 철도역으로 옮겨졌고, 친위대 상급자인 쿠르트 달뤼게[17]는 하이드리히의 관이 베를린으로 운구될 때 동행했다. 하이드리히의 장례 절차는 베를린에 신설된 제국 수상 관저에서 치러졌고 배경 음악은 히틀러가 가장 좋아하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지크프리트의 라인 기행"이 연주되었다. 1942년 6월 9일 히틀러는 죽은 하이드리히를 찬양하면서 훈장을 수여했고, 특히 하이드리히의 두 어린 자녀들을 만났다. 이 훈장은 1942년 2월 11일에 만들어진 제3제국 최고 영예의 훈장이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하이드리히에게 훈장을 선물하면서 추모 연설을 했다.

"나는 이 죽은 이에게 몇 가지 할 말이 있습니다. 그는 가장 훌륭한 국가사회주의자들 중 한 사람이였고. 독일 제국 사상 가장 강력한 보호자들 중 한 사람이였으며, 제국의 모든 적들의 가장 강력한 적수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국을 방어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순교자로서 쓰러져갔습니다. 당의 지도자이자 독일 제국의 지도자로서 나는 친애하는 동지 하이드리히 당신에게 최고 영예의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보답을 드립니다. 당신은 당 동지 프리츠 토드 이후 두 번째로 이 상을 받게 되는 사람입니다."

히틀러가 정중한 표현보다 "친애하는 동지 하이드리히 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하이드리히는 살아 생전에 히틀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하이드리히의 관은 베를린 도로를 지나 인발리덴 묘지로 옮겨져 1813년에서 1815년의 해방전쟁 때에 나폴레옹에 맞서 싸운 보병 연대장 타우엔치엔 폰 비텐베르크 백작의 무덤 옆에 전사로서의 명예와 함께 묻혔다. 영국 언론은 이 장례식을 "화려한 시카고식의 갱스터 장례식"이라고 불렀다. 하이드리히를 위해서 건축가 빌헬름 크라이스와 아르노 브레커가 디자인한 기념묘가 세워질 예정이였으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상황이였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없었다.

나치 독일은 하이드리히가 죽자 하이드리히가 죽은 체코의 리디체(Lidice)라는 마을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16세 이상 남자 196명을 모두 처형한 뒤에, 여자와 아이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 그렇게 수용소로 끌려간 105명의 아이 중 88명이 죽고 17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학살 사실을 전세계에 공표했다.(…) 위키피디아 링크 또한 레자키에서는 SOE의 라디오 장비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50명의 마을주민이 학살되고, 마찬가지로 마을 전체를 파괴하였다. 암살 이후, 여름까지 지속된 독일의 보복행위로 1,500명 가량의 민족주의자들, 전직장교, 지식인, 공산주의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저항조직원들이 살해당핬고, 3천명의 체코 유대인들을 테레지엔슈타트의 절멸수용소에 수감시키는 한편. 베를린에서는 수정의 밤 때처럼, "분노한 독일인들의 자연스러운 봉기"로 150명 가량의 유대인들이 살해당했다. 이 때문에 연합군의 첩보작전에 큰 차질이 생겼다. 실제로 본래 에드발트 베네스(Edvard Beneš), 체코 망명정부 대통령은 하이드리히 이후에도 나치 점령정부에서 교육 및 국민계몽 장관을 맡고 있는 전직 체코군 장교 엠마누엘 모라베치(Emanuel Moravec)와 하이드리히의 후임자, 카를 헤르만 프랑크(Karl Hermann Frank)를 암살할 생각이었지만, 하이드리히 암살로 촉발된 독일의 보복으로 인해, 점령지 주민들이 겁을 집어먹고 협력하기를 극도로 꺼려하자 더 이상의 암살은 감히 기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 첩보부는 방침을 암살에서 납치로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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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리히의 관을 지켜보는 하인리히 힘러 이때 힘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참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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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리히를 기리던 추모비. 물론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죄다 박살났다. 하이드리히의 목재 묘비는 1945년에 사라져버리고 무덤에는 현재 아무런 표지도 없다. 하이드리히의 데스 마스크만이 나치가 하이드리히를 기리기 위해서 발행한 우표에 존재할 뿐이다.

하이드리히 사후 국가보안본부장에는 힘러에 충직한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임명되었고, 1943년 1월 말에 정식 취임했다.

다수의 사학자들은 2차대전의 개전 직전까지 하이드리히가 상관인 하인리히 힘러를 암살하거나 격하시켜서 자신이 SS제국지도자가 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개전 이후 1941년에 하이드리히는 '공식적'으로 힘러의 후계자가 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4 창작물에서

암살 사건 자체를 다루는 영화로는 암살 바로 직후인 1943년에 미국으로 망명해 있던 프리츠 랑 감독, 베르톨트 브레히트 각본의 '사형집행인도 죽는다(Hangmen Also Die!)'가 있고[18], 대중적으로는 1975년작 새벽의 7인(Operation Daybreak)이 유명하다. 2016년 현재 킬리언 머피, 제이미 도넌이 체코 암살요원 역을, 독일 배우 데틀레프 보테가 하이드리히 역을 맡은 영화 앤트로포이드(Anthropoid)가 제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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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트로포이드에 출연한 데틀레프 보테, 실제 하이드리히와 엄청난 싱크로율을 보여주고 있다.

나치의 승리를 다루는 여러 대체역사소설에서 히틀러의 뒤를 이을 후계자, 또는 아예 2대 총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당신들의 조국에서 하이드리히는 괴링, 힘러 등 자기 윗자리의 거물들을 소련 잔당의 테러로 위장하여 암살해버리고 히틀러의 후계자로 공인받고 있다. 겁스 무한세계에서는 나치가 승리한 평행계[19]라이히-5[20], 라이히-2에서 2대 총통으로 등극한다고 언급한다. 해리 터틀도브의 강철 심장의 사나이에서는 멸망한 독일에서 베오울프를 이끌고 연합군에 대한 테러 공격을 감행하여[21] 최종적으로는 연합군의 독일 철수를[22] 실행시킨다.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는 SS상급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전후 아프리카 총독이 되어 독일령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전멸시켰다고 묘사된다.[23]

Dies irae의 등장인물 라인하르트 트리스탄 오이겐 하이드리히(Dies irae)의 모델이 이 인물이다.

5 진급 내역

• 1922. 4. 1 : 해군 사관 후보생(Fähnrich Zur See)
• 1924. 4. 1 : 준위(Oberfähnrich Zur See)
• 1926. 7. 1 : 소위(Leutnant Zur See)
• 1928. 7. 1 : 중위(Oberleutnant zur See)
• 1931. 7.14 : SS 이병(Mann)
• 1931. 8.10 : SS 소위(Sturmführer)
• 1931.12. 1 : SS 대위(Sturmhauptführer)
• 1931.12.25 : SS 소령(Sturmbannführer)
• 1932. 7.29 : SS 대령(Standartenführer)
• 1933. 3.21 : SS 준장(Oberführer)
• 1933.11. 9 : SS 소장(Brigadeführer)
• 1934. 6.30 : SS 중장(Gruppenführer)

• 1941. 9.27 : SS 대장(Obergruppenführer)
  1. 바로 아래의 지크프리트 하이드리히. 이 사람은 형같은 쓰레기와는 달리 굉장히 심성이 고왔다. 무장친위대 장교인데도.
  2. 라이히스 지허하하이츠 하웁트 암트
  3. 내성적인 성격과 톤이 높았던 목소리도 한 몫 했다. 해군사관학교에서의 별명은 모세 헨델이었다.
  4. 당시 독일 음악계에 유대인들 비중이 높았기에 음악가들이 유대인들과 친한 경우는 허다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히틀러의 나치 찬양곡 지휘요구를 묵살하자, 히틀러가 수용소로 보낸다고 협박함에도 거리낌없이 "그거 잘됐네요. 수용소로 가면 음악가 친구들이 많을테니 저는 반갑게 가겠습니다."라고 대꾸할 정도로 음악가들에 유대인들이 많았다. 결국은 푸르트벵글러가 유대인 음악가들에 한하여 자비를 베풀어주는 조건으로 지휘를 수락했지만…
  5. 다만 이 소문에 대해 하인리히 힘러는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라 일갈했고 이후 소문은 잠잠해진다. 이거 괴링항목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6. U-보트 지휘관으로 유명하며 훗날 해군 총사령관, 제국 대통령을 역임한 해군원수 카를 되니츠 제독은 자신의 전쟁 회고록에서 카나리스를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로 묘사했다.
  7. 우린 대체 무엇을 위해 싸웠습니까? 를 말한 주인공이라고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동명이인이라고 한다.
  8. 이후 리나는 하이드리히와 결혼하여 실케, 마르테, 클라우스, 하이더를 낳았다.
  9. 하이드리히는 힘러를 상당히 무시하였으며 업무상으로도 여러번 힘러를 물먹이는 보고를 상부에 하였다.
  10. 당시 나치 독일의 명칭은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밀 하하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 정부가 있기는 했으나 사실상 나치 독일의 점령지였다.
  11. 이 드라마틱한 사건은 여러차례 영화로 만들어졌으나 특히 유명한 것은 거장 감독 프리츠 랑의 1943년작 '교수인 또한 죽는다(Hangmen Also Die)'이다. 다만 국내 한정으로 1975년작 '새벽의 7인(Operation Daybreak)'이 더 인지도가 있다.
  12. 현재의 인터폴이다.
  13. 하이드리히는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전에 죽었지만 하이드리히의 심복인 발터 쉘렌베르크와 하인리히 뮐러가 계속 방첩부를 약화시키고 결국 카나리스도 체포해 처형했다.
  14. 이 사람도 형처럼 SS장교였다.
  15. 유대인들이 배신하는 것을 연상시키기 위해서 한 말
  16. 영화 새벽의 7인에서는 부하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있었던 일로 각색되고 하이드리히가 왕관을 머리에 써보자 부하들이 총통의 후계자가 되실 거라고 축하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17. 체코의 리디체 마을 주민을 학살한 인물로 훗날 전쟁이 끝나고 이 죄를 물어서 1946년 프라하에서 처형되었다. 친위대에 4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상급대장의 최초 역임자이며 에밀 마우리체와 함께 친위대의 창설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자이다.
  18. 시기를 보면 알다시피 미국의 전시 프로파간다 영화이긴 하지만 감독과 각본가가 세계적 거장인 만큼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19. 라이히-n이라고 명명된다.
  20. 홈라인/센트럼과 더불어 무한세계의 3대 세계중 하나.
  21. 패튼을 비롯한 주요 군 지휘관 암살. 연합군 장병 납치참수, 방사능 오염, 친연합군 인사 발트하임 살해, 수송기 납치해서 자폭공격 등등
  22. 그 전에 사살되지만 스코르체니가 뒤를 잇는다.
  23. 드라마판에서는 히틀러를 죽이고 자기가 총통이 되려하는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보낸 암살자가 오히려 히틀러의 카리스마에 눌려 자살하고(...) 죽은 줄 알았던 히틀러의 전화를 받고 놀라다가 SS대장 존 스미스의 총격을 맞고 죽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