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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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칸국카라코윤루
(흑양)
아크코윤루
(백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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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1세기 경 파르티아의 판도. 지도에도 나와 있듯이 속국을 포함한 것이다.

파르티아 제국/파르티아 왕조/아르사케스 왕조(한국어)
Parthian Empire/Arsacid Dynasty(영어)
اشکان/Ashkanian(현대 페르시아어)
安息國/안식국(중국어)

1 개관

BC 247년부터 AD 224년까지 서아시아 일대를 지배한 왕조. 전성기의 영토는 서로는 시리아, 동으로는 인도 북부에 달했다. 이란 북부의 유목민 부족들이 주도 세력이었지만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후예를 자칭하였다.

초창기의 중심지는 현대의 이란 북부와 투르크메니스탄 남부 지역이었으며, 영토가 남서쪽으로 확장됨에 따라 그 중심지도 계속 이동하였다. 최종적으로는 현대의 이라크 일대와 이란 서부가 중심지가 되었다. AD 2세기 말부터 강성해지기 시작하여 서방에서 제국을 이룬 로마와 대립하였다. 로마와 중국이라는 두 거대 제국 사이라는 입지를 활용하여 비단길의 중개무역으로 번영을 누렸지만, 로마와의 전쟁에서 연패하여 국력이 점차 쇠잔하던 와중에 파르스에서 반란을 일으켜 사산 왕조를 세운 아르다시르 1세에 의해 멸망했다.

중국과 서구가 최초로 서로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하다. 로마는 파르티아에서 중국의 비단을 수입했고, 중국인들도 마찬가지로 파르티아에서 로마의 포도주와 금은세공을 구경하였다. 로마의 상인들은 중개무역이 아니라 직접무역을 하고 싶어해 몇 번 중국 진출 시도를 했으나[1] 당대에는 너무나 멀고 험한 길이어서 실패에 그쳤다.[2]

2 역사

2.1 기원 및 형성

파르티아는 카스피 해 남동쪽, 현재 이란 북부~투르크메니스탄 남부 일대를 가리카는 지명이다. 고대 페르시아어 "파르타바" 에서 유래한 말로, 다리우스 1세 시대 새겨진 behistun inscription에서 아케메네스 왕조가 지배하는 땅들을 열거할 때 처음 나온다. 이 지역에서 나라를 세웠으므로 나라 이름도 그대로 파르티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들 스스로는 시조인 아르사케스 1세(Arsaces I, Arshak 혹은 Ashk)의 이름을 따서 아르사케스 왕조라고 했는데, 중국인들은 이를 한자로 음역하여 안식국(安息國)이라고 했다.

건국자인 아르사케스는 스텝 지대에 살던 파르니(Parni)라는 유목민 부족의 지도자였다. 파르니 족은 다하이(Dahae, 고대 페르시아어 다하)[3]라는 유목민 집단의 일부였으며, 원래 파르티아 땅이 아니라 그보다 북서쪽에 있는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 살았다.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에 페르시아에 복속되었고, 알렉산드로스 3세와 다리우스 3세가 맞붙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도 동원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디아도코이 전쟁의 결과로 과거 아케메네스 제국의 영토 대부분이 셀레우코스 왕조에 편입되는 동안, 다하이 족 역시 대세를 따라 셀레우코스 세력에 굴복하였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동방 영토는 수십 년 동안 심각한 저항이나 외침을 받지 않았지만, BC 250년 경이 되자 파르티아와 박트리아 지방의 사트라프들이 연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소수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이 지배하는 셀레우코스 왕조는 시리아의 안티오케이아에 그 거점을 두고 있었으며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전쟁, 켈트인들의 갈라티아 침입 등으로 전력이 분산되어 머나먼 동방 영토를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도 파르티아 지역을 자주 약탈하던 아르사케스 1세와 파르니 부족은 파르티아의 사트라프 안드라고라스가 반란을 일으켜 독립 세력이 된 틈을 타 본격적인 침공을 감행하여 점령해 버렸고, 이것이 아르사케스 왕조의 시작이다.

2.2 초기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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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200년 경의 셀레우코스 왕조와 파르티아의 영역. 여기서 불과 100년 만에 시리아를 제외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거의 모든 영역이 파르티아로 넘어갔다.

전술했다시피 셀레우코스 왕조 주적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였으며, 양국은 접경이자 요충지대인 코엘레-시리아, 페니키아, 유대 등을 두고 끊임없이 투쟁했다. 따라서 한정된 숫자의 그리스-마케도니아 군사력에 의존하는 셀레우코스 왕조는 머나먼 동방에 주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재위 246-225 BC)가 일시적으로 파르티아를 수복하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사케스의 반격을 받아 도로 빼앗겼다. 이후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재위 222-187 BC)가 BC 210년 대규모 동방 원정을 시도하여 파르티아와 박트리아로부터 형식적인 복종을 받아냈지만, 프톨레미와 벌인 수 차례의 전쟁에 이어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는 바람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국력은 결정적으로 쇠퇴하였다.

그 후 불과 수십 년만에 셀레우코스 왕조는 동방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영토를 빼앗기는 처지가 되었다. 파르티아는 미트리다테스 1세(메흐르더드 1세, 재위 167-132 BC)의 영도 아래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메소포타미아와 그 동쪽의 모든 셀레우코스 영토를 차지했다. 이를 탈환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원정을 추진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데메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재위 146-139, 129-126 BC)와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재위 138-129 BC)가 모두 패배하면서 동방에서 파르티아의 패권이 확실해졌다.

동방의 헬레니즘 왕국인 박트리아 역시 내부 분열[4]과 유목민들의 침입 때문에 파르티아의 공세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이후 흉노에 패망한 월지의 일파인 대월지가 서방으로 이주해 사카 족을 밀어내고, 밀려난 사카 족과 대월지가 대거 남하하여 박트리아를 멸망시켰다. 이들은 파르티아의 동쪽 국경도 위협했으나, 파르티아는 왕이 전사하는 등의 고전 끝에 이들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BC 1세기 말~AD 1세기 초에는 인도-파르티아 왕조[5]가 형성되고, 이후 대월지계가 북인도에 건설한 쿠샨 왕조도 파르티아와 화평을 이룸으로써 파르티아의 인도 쪽 변경은 안정되었다.

아르사케스 왕조의 최초 수도는 현재의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에 있는 니사(Nisa)였다. 니사는 미트라다테스 1세 시대에 중건되어 이름도 미트라다테스의 도시(Mithradakirt)로 바뀌고 왕실 묘역이 자리잡는 등 주요 도시로써의 위상을 유지했으나, 기원후 1세기 경 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아르사케스 1세가 파르티아를 정복한 후에는 그 지역의 중심도시였던 헤카톰퓔로스(Hecatompylos)가 새 수도가 되었다.[6] 미트라다테스 1세 시대에 메디아엑바타나로 수도를 잠시 옮겼다가, 다시 메소포타미아의 셀레우케이아로 옮겼다. 파르티아 지배층은 셀레우케이아 도시 안에 살지 않고 그 옆에 임시 정착촌을 만들어 살았는데, 이것이 점차 신도시로 발전하여 파르티아 후기와 사산 왕조의 수도인 크테시폰이 되었다. 기원후 1세기 무렵이 되면 겨울에는 크테시폰이, 여름에는 수사나 엑바타나가 수도 역할을 하게 되었다.

2.3 로마와의 조우

BC 1세기, 동방 전선이 대강 정리되자 파르티아는 본격적으로 서방으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그때 마침 아르메니아와 마주치게 된다. 아르메니아 역시 막 카프카스 산맥 일대를 평정하고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였지만 파르티아의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속국이 되었다. 이 때 로마술라와 파르티아 사이에 "유프라테스 강을 양국의 경계로 하자."는 협정이 맺어졌다.

그런데 파르티아에 복속되어 한때 볼모로 잡혀 있었던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재위 95-55 BC)가 왕이 되면서 아르메니아는 국력이 크게 신장되는 반면, 파르티아는 왕위 다툼과 사카 족의 재침공으로 오히려 국력이 약해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티그라네스 2세는 폰투스미트리다테스 6세(재위 120-63 BC)와 동맹을 맺고, 시리아에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위까지 차지하는 등 그 위세를 떨치며 파르티아의 영토까지 빼앗기에 이른다. 하지만 서방의 깡패 로마가 미트리다테스 6세와 티그라네스 2세를 연속으로 관광보내는 바람에 아르메니아의 짧은 전성기는 막을 내리고 만다. 미트리다테스 6세와 티그라네스 2세는 동방에 남은 유일한 강국인 파르티아에게 누차 구원을 요청했지만, 파르티아는 모두 거부했다. 물론 티그라네스 2세를 견제하는 의미도 있고, 로마의 심기를 건드릴 생각도 없었으며, 사실 왕권을 둘러싼 갈등과 내전 때문에 남의 전쟁에 신경쓸 처지도 못 되었다. 어쨌든 폰투스와 아르메니아는 나란히 로마의 속국이 되었지만 로마의 진군은 멈출 줄 몰랐고, 그 결과 양국 사이에 카르헤 전투가 발발된다.

이후 파르티아는 역습을 시도했으나 카르헤 전투에서 살아남은 카시우스의 반격으로 격퇴당했다.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고 내전이 벌어지자 카이사르 반대파를 지지하며 재침공을 감행, 티레를 제외한 시리아와 레반트 전역을 차지했다. 하지만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필리피 전투에서 박살나고,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권력을 양분한 뒤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서자 얄짤없이 얻어 터지고 점령지들을 토해내야 했다. 안토니우스는 내친 김에 파르티아 원정까지 시도했는데, 크라수스와는 달리 동맹국인 아르메니아의 산악 루트를 통해 파르티아 국경까지 무사히 진군하여 아트로파테네의 수도 프라스파를 포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르티아의 반격으로 공성은 실패했고, 안토니우스는 상당한 피해를 입고 시리아로 철군했다. 직접 공략에 실패한 안토니우스는 외교적 전술을 구사하려 했지만 옥타비아누스와의 문제 때문에 더이상 동방 문제에 집중할 수 없었고, 결국 원정을 포기했다.

안토니우스를 무찌르고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얻은 옥타비아누스는 파르티아와의 평화를 천명했고, 협상을 통해 카르헤 전투 당시 빼앗긴 군단기와 생존 포로들을 송환받았다. 이후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 끼인 아르메니아를 어느 쪽 편으로 두는가를 두고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전쟁은 아르메니아 땅에서만 이루어졌고 양측은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였다.
네로 시기에는 로마와의 협상을 통해 아르메니아 지역을 일시적으로 확보하기도 했다. 당시 파르티아의 군주인 볼로가세스는 동생 티리다테스의 양보로 즉위하였었다. 이에 티리다테스에게 보답하는 동시에 반대파를 진정시킬 목적으로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삼고자 했다. 로마에서는 티리다테스의 즉위 행사를 로마에서 치루게 하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였고 이 일로 인해 로마와 파르티아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다.
AD 97년 경에는 서역도호부의 도호였던 반초가 파르티아 국경 지대의 메르브까지 진출하여 실크로드 무역을 위협하는 유목민들을 격파하고 부하인 감영을 파르티아에 사신으로 보냈다. 감영은 원래 로마까지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로마와 한이 직접 무역 관계를 트는 것을 두려워한 파르티아인들의 공갈과 사기 끝에 결국 흑해 혹은 지중해까지만 보고 돌아갔다고 한다.

2.4 쇠퇴와 몰락

AD 114년, 로마의 침공을 우려한 파르티아 측이 일방적으로 아르메니아의 왕 티리다테스를 폐위시키면서 양측의 평화는 끝났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재위 98-117)는 볼모로 와 있던 파르티아 왕자를 죽여버리고 파르티아를 전면 침공, 수도 크테시폰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점령하고 페르시아 만까지 진출했다. 파르티아는 자기들끼리 싸우고 암살하는 등 갖가지 삽질을 저지르며 연전연패하여 수사까지 빼앗겼지만, 로마 측도 보급선이 길어지고 파르티아의 지속적인 저항으로 손해가 더 커지게 되어 결국 더 이상의 원정을 포기한다. 트라야누스가 죽고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가 제위에 오른 뒤 양측의 국경은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 재위 시기인 161년 볼로가세스 4세(재위 147-191)가 시리아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역관광을 당했다. 로마군은 두 번째로 크테시폰을 점령했으나, 마침 제국에 퍼진 "안토니누스의 역병"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후 197년에도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재위 193-211)가 파르티아를 침공하여 크테시폰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그 역시 전대 황제들처럼 오래 버티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처럼 파르티아는 1세기 동안 수도가 3차례나 점령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하지만 다른 농경 왕조들과 다르게 파르티아의 지배층들은 대부분 유목민들이었으므로 수도가 털려도 나라가 뒤집어지거나 멸망을 하거나 하진 않았다.[7] 그렇다 해도 점령 중의 약탈과 방화, 농경지의 황폐화 등으로 생기는 경제적 피해와 농경민들의 불만과 반란 문제가 있고 크테시폰과 메소포타미아 일대가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 경제적 요충지였음을 감안하면 국가 자체로서는 심각한 타격이었다. 실제로 파르티아의 국력은 나날이 쇠약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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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볼로가세스 6세와 아르타바누스 4세가 왕위를 두고 내전을 벌이고, 로마 황제 카라칼라의 침공을 맞아 니시비스 전투를 치르는 등 고전하는 사이 파르스의 에스타크르에서 봉기한 아르다시르 1세가 급격히 세력을 확장, 224년 아르타바누스 4세와 싸워 이기고 사산 왕조를 세우면서 파르티아 아르사케스 왕조는 멸망하였다.

3 정치/사회

왕중왕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며, 상당히 중앙 집권화된 정부와 관료제를 유지했던 전대의 아케메네스 왕조나 후대의 사산 왕조와 달리, 아르사케스 왕조는 중앙 집권화가 상당히 덜 돼 있었다. 아예 파르티아 국가 소속이면서도 자치권과 세습권을 가진 부왕(副王, lesser king, Shardar)들이 수십 명에 달했을 정도다. 맨 위의 지도에서 그 중 대표적인 지역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오스로에네, 아디아베네(7번), 아트로파테네(8번), 카라케네(9번), 엘람(10번), 페르시스, 인도-파르티아, 후대의 아르메니아 아르사케스 왕조 등이 있다.

이처럼 왕까지는 못 되더라도, 주요 귀족들 역시 하메단, 메르브, 케르만, 베르카나, 데일람, 라가이 등 주요 거점을 두고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귀족들과 왕의 관계는 봉건제도 하의 중세 유럽의 경우와 비슷하여, 귀족들은 평시에는 왕에게 세금을 바치고 전시에는 군사력을 제공하는 대신 그 외 분야에선 독자적인 권한을 누렸다. 귀족들은 3단계로 구분되었는데, 첫째는 위에 언급한 "부왕"들, 둘째는 왕중왕과 개인적 연줄이나 혼인 관계가 있는 귀족들, 셋째는 그 이외였다. 왕권이 약할 때에는 귀족들이 왕위 계승 문제에 관여하기도 했으며, 왕위 계승을 두고 경쟁하는 왕자들끼리 내전이 벌어질 경우에도 귀족들이 누구 편에 서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이와 같은 지방 분권의 양상은 대부분 이전 시대 셀레우코스 왕조에서 이어진 것이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최상위 지배층을 몰아낸 마케도니아인들은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토착 엘리트들의 협조와 복종을 받아야 했고, 군사적으로 반항하지 않는 한 상당한 자치권을 주었다. 또한 행정 체계에 있어서도 "새로운 이민족 군사 지배계급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 장악"이라는 추가 요소를 빼면 기존 아케메네스 왕조의 체계를 답습하였다. 군사력으로 지배권을 획득한 외부세력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과 크게 다를 게 없었던 파르티아인들도 그런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셀레우케이아나 수사처럼 그리스계 거주민이 특별히 많은 곳에서는 폴리스 체제가 잔존하기도 했다.

단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과 아시아인들 사이를 분명히 구분하고 항상 차별 정책과 긴장 상태를 유지했으며, 지배권을 그리 오래 유지하지도 못했던 셀레우코스 시대의 양상과 파르티아 시대의 양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파르티아인들은 수백 년 동안이나 지배 세력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당대에 이미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페르시아 문화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으므로 서서히 페르시아화하여 사산 왕조 시대까지 이르게 된다.

경제적으로는 한에서 출발한 비단길을 통한 육상 교역로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풍부한 농업 생산력을 그 기반으로 삼았을 것으로 보인다.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파르티아의 인구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며, 그 경제 규모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파르티아가 차지한 지역이 고대부터 인구와 경제의 중심지였고, 비단길을 통해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파르티아가 수백 년 동안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한 것을 통해 그 번영을 짐작할 뿐이다.

4 문화


아르사케스 1세의 주화. 스키타이식 뾰족한 가죽 모자와 뒷면의 활을 볼 수 있다.

시조인 아르사케스 1세의 주화에서 그 초창기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초창기 파르티아 지배층은 이란어족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사치스러운 고급 문화를 향유하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지배층과는 거리가 먼 유목민 집단이었다. 초창기 파르티아의 이웃이나 적은 셀레우코스 왕조와 박트리아 같은 헬레니즘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초기 파르티아는 동전을 그리스식으로 새기고 "그리스인 애호자(필헬레노스)"라는 어구가 포함된 그리스어 명문을 넣는 등 헬레니즘에 상당히 신경쓰는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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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박트리아의 헬리오클레스 1세(재위 145-130 BC),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재위 175-163 BC), 파르티아의 미트라다테스 1세(재위 165-132 BC)의 주화. 양식이 거의 비슷하다. 명문도 확실히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다.

조각, 건축 등 예술 분야에서도 헬레니즘의 영향이 드러나며, 카르헤 전투 이후 참수된 크라수스의 머리가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에게 배달될 당시 그가 아르메니아의 왕과 함께 그리스식 연극을 관람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헬레니즘 국가들이 쇠퇴하고 몰락함에 따라 그 영향력은 점차 약해졌으며, 이란 문화가 크게 부흥하면서 거기에 희석되고 융화되었다. 물론 아르사케스 왕조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후예를 자처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특별히 페르시아 문화를 장려하고 중흥시키려 노력했다거나 헬레니즘 문화를 박해하고 금지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헬레니즘 국가들이 몰락하면서 안그래도 적던 그리스계 거주민들이 거의 사라져 가고, 수백여 년의 전통을 가진 페르시아 문화가 자연스럽게 융성하면서 아르사케스 왕조 지배층도 이를 받아들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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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파르티아의 사나트루케스 1세(재위 77-70 BC)와 볼로가세스 4세(재위 148-191), 사산 왕조의 샤푸르 1세(재위 242-272)의 주화. 위의 두 주화는 각각 파르티아 중기와 말기에 해당하는데, 왕의 면상을 새긴 앞면은 동방 삘이 나게 많이 변했지만 뒷면을 보면 왕조 말기까지도 헬레니즘적 모티프와 그리스 문자로 된 명문이 잔존함을 알 수 있다. 그리스 문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불의 제단이 새겨진 사산 왕조의 주화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파르티아와 사산 왕조 모두 왕중왕을 칭했지만, "šāhān šāh ērān ud anērān"이라 하여 페르시아어를 쓰고 이란의 정체성이 강조된 사산 왕조의 칭호와 달리 파르티아는 "ΒΑΣΙΛΕΩΣ ΒΑΣΙΛΕΩΝ ΑΡΣΑΚΟΥ", 즉 왕중왕 아르사케스라고 그리스어를 썼다.

종교적으로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중앙 집권적 조로아스터교 교단 조직이 와해된 후 아후라 마즈다의 조력자로써의 위치에 머무르던 미트라(메흐르)와 아나히타가 주요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미트라의 경우 왕의 이름(미트리다테스-메흐르더드)에 들어갈 정도로 인기가 있었으며, 아나히타 신전의 대제사장은 사산 왕조 초기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였다. 조로아스터교의 분파들 외에도 유대교도, 초창기 기독교도 등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종교 생활을 누렸다. 헬레니즘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던 초창기에는 그리스 신화의 신격과 조로아스터교의 신격이 뒤섞여서 제우스-아후라 마즈다, 아폴론-미트라 같은 식으로 대응되기도 했다. 파르티아 지배층들은 대부분 조로아스터교 혹은 그 변종들을 신봉했지만, 이를 특별히 국교로 만들고 장려했던 것 같지는 않다. 조로아스터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적극 활용했던 아케메네스 왕조나 기독교나 마니교 등을 박해했던 사산 왕조와 대비되는 부분이다. 특히 왕조 교체 이후 강력한 조로아스터교 교단과 교리, 위계질서를 구축하던 사산 왕조 초기, 파르티아의 종교에 대한 태도는 종교적 나태와 타락의 상징으로 비난받았다.

언어는 중세 이란어군의 한 분파인 파르티아어를 썼는데, 사산 왕조 이후 중세 페르시아어/팔라비(Pahlavi)어가 공용어가 되면서 점차 사멸했다. 파르티아어 기록도 사산 왕조 초기의 것만 조금 남아 있다. 기록을 위해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 공용 문자 중 하나였던 아람 문자를 쓰기도 했으며, 상술한 바대로 주화에 그리스 문자를 쓴 것을 보아 그리스어 역시 지배층 사이에서 쓰였을 가능성도 높다. 문학은 주로 (사산 왕조 시대까지 이어지는) 음유시인들이나 악사들이 부르는 노래와 시로 향유되었으며, 페르도우시가 남긴 샤나메(왕의 책)의 일부 에피소드에 파르티아 귀족들을 다룬 내용이 있다.

절벽이나 주화에 새겨진 명문 등을 제외하면 파르티아인 자신들이 남긴 문자 기록은 매우 드물고, 하물며 역사 기록은 말할 것도 없다. 사산 왕조는 물론이요 전대의 아케메네스 왕조 때보다도 부족해서 이란/페르시아 역사에서 가장 문헌 사료가 적은 시기라고 할 정도다. 파르티아 역사 연구는 그리스/로마 역사가들의 단편적인 기록과 유물/유적들을 발굴, 해석하는 고고학과 금석문학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5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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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의 카타프락토이와 파르티안 샷을 선보이고 있는 궁기병.

인구에서 압도적인[8] 로마 제국과 동급으로 맞서싸울 정도로 굉장히 강력했다. 특히 파르티아 군대의 주력은 항상 기병이었으며, 다수의 경무장한 궁기병들과 소수의 중무장한 카타프락토이로 구성된다. 합성궁을 사용하는 궁기병들이 스웜 전술을 통해 적을 교란시키고 괴롭히다가 틈이 생기면 카타프락토이들의 강력한 돌격으로 적진을 붕괴시키는 것이 기본 전술이었다. 카르헤 전투는 이러한 전술이 완벽하게 성공한 예다. 크라수스가 거의 샌드백이나 다름없었기에 가능했지만

카타프락토이들은 매우 비싼 마갑+갑옷+무기+말 풀 셋을 갖추고 평상시 승마와 전투 훈련을 할 수 있었던 귀족과 그 가신들이었다. 파르티아 군대는 유사시 이런 귀족들이 자기 영지의 부족민이나 가신들을 긁어모아 편성한 봉건 군대였다. 전대의 아케메네스 왕조나 사산 왕조 역시 강력한 기병이 주력이었지만 다수의 경무장 징집병과 중보병대를 적극적으로 운용했던 반면, 파르티아는 중앙 집권화 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전통 유목민 출신인 지배층의 군사 문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병에 훨씬 크게 의존했다. 그러다보니 기병이 부족한 로마군은 파르티아 기병한테 굉장히 털렸고 대기병 전술이랑 보조군 기병으로 대응해야 했다.

징집병이 아닌 전문 보병대를 양성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보병대는 대개 그리스계 전쟁 포로용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사카 족과 싸우던 프라아테스 2세(재위 132-127 BC)가 셀레우코스 왕조의 투항병에게 살해되는 등 몇 차례의 실패를 겪은 뒤 파르티아는 중보병 세력을 양성하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했다. 국경지대의 요새나 주요 도시에는 보병대가 주둔했던 증거들이 있지만, 대개 근처 주민들을 징집한 경보병이나 궁병으로써 크게 중요한 전력은 아니었다.

파르티아는 왕이나 주요 귀족들에 딸린 친위대와 카타프락토이들, 그리고 국경의 일부 거점도시들에 주둔한 수비대를 제외하면 상비군이 없었다. 이는 지방 분권적/봉건적인 파르티아의 사회 구조와 맞물려 파르티아의 군사적 역량을 크게 제한했다. 파르티아의 왕중왕이 대규모 군사행동을 하려면 일단 제국 각지에 거점을 두고 있는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군대를 끌어모아야 했다. 따라서 양면전선이 형성된다거나 대외 전쟁 중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난다거나 할 경우 아주 골치아파지게 된다. 파르티아가 로마를 상대로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특히 국력에서 압도적인 로마제국을 상대로 장기전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서 우월한 기동력으로 로마군에게 타격을 입히는 전술로 싸웠다. 게다가 파르티아까지의 거리가 워낙 멀고 파르티아의 영토도 사막이 대부분인 불모지다보니 로마 제국으로선 보급의 어려움이 심하니 장기전이 힘들었다. 로마도 장거리 원정에 대한 부담에 파르티아와의 전쟁은 패주고 자기 영토로 철수하는 식으로 끝냈다.[9]

파르티아의 이름을 딴 전술 내지는 마상 사격술로 파르티안 궁법이 있다. 퇴각하는 말 위에서 등을 홱 돌려 후방에 있는, 혹은 추격하는 적을 사격하는 기술, 즉 위 그림의 궁기병이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 조금만 상상해 보면 알겠지만 고삐에서 양손을 놓고 진행방향과 반대를 보고 활까지 쏴야 하는 굉장히 어려운 기술이다. 한 술 더 떠 당시는 등자가 발명되기 한참 이전이었기 때문에 기수는 허벅지와 허리 힘만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말등을 붙잡고 균형을 잡아야 했다. 이 기술에 파르티아의 이름이 붙은 이유는 역시 카르헤 전투에서의 인상적인 모습 덕이다.

6 역대 왕

비고 안의 큰따옴표는 페르시아어 발음이다.

사실 파르티아 왕들의 연대기와 재위 기간을 정확히 나열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우선 아르사케스 왕조의 왕들은 즉위하면 모두 "아르사케스" 라는 이름을 썼고, 왕의 본명은 나중에 쓰거나 안 쓰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혼란의 여지가 많다. 왕위를 두고 대립하던 왕자들이 동시대에 서로 제멋대로 주화를 찍어내거나, 왕의 친척을 속국에 보내 왕 노릇을 시킨 경우 동시대에 서로 다른 "아르사케스 왕"의 주화들이 공존하기도 한다.

심지어 후대 사산 왕조의 성직자들이 종교적 목적으로 아르사케스 왕조의 연대를 축소시킨 경우도 있고, 무엇보다도 교차검증할 사료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를 규명해내기란 매우 어렵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도 작성자마다 참고한 출처가 달라서 같은 왕의 재위 연대가 항목마다 서로 다르게 표시될 정도다. 일단 본 항목은 영문 위키피디아의 list of parthian kings 항목을 따른다.

이름재위 기간가족 관계비고
아르사케스 1세247 - 211 BC시조"Arshak" 혹은 "Ashk"
티리다테스 1세? - ? BC아르사케스 1세의 동생"Tirdad", 실제 재위했는지 의문
아르사케스 2세211 - 185 BC아르사케스 1세의 아들안티오코스 3세의 침공
프리아파티우스185 - 170 BC티리다테스 1세의 손자
프라아테스 1세170 - 168 BC프리아파티우스의 아들"Farhad"
미트라다테스 1세167 - 132 BC프리아파티우스의 아들"Mehrdad", 메소포타미아까지 정복
프라아테스 2세132 - 127 BC미트리다테스 1세의 아들사카와 전쟁 중 전사
아르타바누스 1세127 - 126 BC프리아파티우스의 아들"Ardawan", 대월지와 전쟁 중 전사
볼로가세스126 - 122 BC프리아파티우스의 아들"Valakhsh" 혹은 "Balash"
아르타바누스122 - 121 BC프리아파티우스의 아들
미트리다테스 2세121 - 91 BC아르타바누스 1세의 아들
고타르제스 1세91 - 87 BC미트리다테스 2세의 아들
아르타바누스91 - 77 BC볼로가세스의 아들
미트리다테스88 - 67 BC미트리다테스 2세의 아들
오로데스 1세80 - 75 BC미트리다테스 1세의 아들"Orodus"
사나트루케스 1세77 - 70 BC볼로가세스의 아들
프라아테스 3세70 - 57 BC사나트루케스 1세의 아들
미트리다테스 3세67 - 54 BC프라아테스 3세의 아들
오로데스 2세57 - 38 BC프라아테스 3세의 아들카르헤 전투
파코루스 1세50 - 38 BC오로데스 2세의 아들시리아 침공했다가 전사
프라아테스 4세38 - 2 BC오로데스 2세의 아들로마 출신 왕비에게 독살당함
프라아테스 5세2 BC - 4 AD프라아테스 4세의 아들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와 결혼
오로데스 3세4 - 6미트리다테스의 후손(?)귀족들에게 제거당함
보노네스 1세8 - 12프라아테스 4세의 아들로마에 볼모로 가서 죽음
아르타바누스 2세10 - 40미트리다테스의 후손(?)
고타르제스 2세40 - 51아르타바누스 2세의 아들
바르다네스 1세40 - 46아르타바누스 2세의 아들형에게 제거당함
볼로가세스 1세51 - 77아르타바누스 2세의 손자로마의 코르불로와 전쟁
파코루스 2세77 - 115볼로가세스 1세의 아들
오스로에스 1세89 - 130볼로가세스 1세의 손자
미트리다테스 4세115 - 145오스로에스 1세의 형제로마의 트라야누스와 전쟁 중 전사
사나트루케스 2세145 - 145미트리다테스 4세의 아들로마의 트라야누스와 전쟁 중 전사
볼로가세스 4세148 - 191미트리다테스 4세의 아들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전쟁
볼로가세스 5세191 - 208볼로가세스 4세의 아들로마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전쟁
볼로가세스 6세208 - 228볼로가세스 5세의 아들아르다시르 1세에게 살해당함
아르타바누스 4세213 - 226볼로가세스 5세의 아들아르다시르 1세에게 살해당함

7 여담

동방박사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파르티아 출신으로 흔히 추정된다.

8 참고 자료

영문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

The heritage of Persia/Frye, Richard Nelson/Mazda/1993/

Ancient Persia /Curtis, John/British Museum/2000/

The age of the Parthians /Curtis, Vesta Sarkhosh/I.B. Tauris in association with The London Middle East Institute at SOAS and the British Museum/2007/
  1. 한나라 정사에 통상과 수교를 원하는 로마의 외교사절이 도착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로마에는 기록이 없으므로 상인세력으로 생각된다.
  2. 길안내를 해줘야 할 파르티아인들이나 여타 중개무역에 종사하는 나라나 상인들도 호의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에 가고 싶어하던 중국인 여행자에게 중개상인들이 아라비아 반도를 돌아가는 해로를 소개하면서 몇 년을 바다에서 보내야 한다고 거짓말을 해 중국인 여행자가 포기한 기록이 있다. 중개무역업자들은 로마와 중국이 직접 연결될 가능성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3. 도둑떼라는 뜻이다.
  4. 박트리아가 인도 북부 일부 지역을 정복하였는데, 이 정복지들이 인도-그리스 왕국(Indo-Greek Kingdom)으로 따로 떨어져 나가서 모국인 박트리아 왕국(Greco-Bactrian Kingdom)에 뒤지지 않는 세력을 갖고 대립했다.
  5. 파르티아의 동쪽 변경에 세워진 왕조. 그 위치는 항목 맨 위의 지도에 나와 있다. 동전에 새겨진 왕의 이름을 따서 곤도파레스 왕조라고도 한다. 남은 유물이 파르티아의 양식과 유사해 인도-파르티아라 불리지만, 당시 동부의 여러 이란어족 분파들이 연합한 나라로 추측한다. 한때는 파르티아와 대등한 동맹을 맺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 파르티아의 속령으로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단명한 왕조인데다 남은 사료가 부족해서 그 성격이 명확하지 않다.
  6. 헤카톰퓔로스란 그리스어로 100개의 성문이란 뜻인데, 이는 성문이 많이 있는 대도시를 가리킬 때 가끔 쓰이던 별칭이라고 한다. 파르티아 고유의 도시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7. 사실 내부분열이 그토록 극심했던 것도 몽골과 같은 유목민들 특유의 살벌한 경쟁적 문화의 영향이다.
  8. 로마 인구는 5천만인데 파르티아는 고작 500만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10배가 넘는 적을 상대했던 것.
  9. 전근대의 중국을 상대하던 북방의 유목민족들도 이런 방식으로 싸웠다. 중국 왕조들도 국력에서는 북방 유목민들을 압도하지만 그들을 칮다는것 자체가 장거리 원정이고 부담이 엄청나서 방어전으로 나가며 화친맺고 거래하는 방식으로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