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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김영삼의 행동대장.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호는 온산(溫山)이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요셉이다.
2 상세
1935년 8월 14일 울산군 서생면에서 태어났다. 부산공업고등학교, 동국대학교 법정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박정희 정권 때 6.3 항쟁 등에 참여하며 야당에 투신하였다. 이후 김영삼을 따르는 상도동계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상도동계 내부에선 김영삼의 최측근으로 김동영과 함께 좌동영 우형우라고 불렸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울산시-울산군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김녹영, 김한수, 김상현, 나석호, 김경인, 조윤형, 조연하, 이종남, 이세규, 박종률, 강근호, 류갑종 등과 같이 모 군부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울산시-울산군-동래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김원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울산시-울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소속 이후락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6월 신민당 김영삼 총재 체제가 출범하자 신민당 당기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80년 5.17 내란 직후 김동영 등과 함께 국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그리고 민주화추진협의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경상남도 울산시-울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김태호 후보와 민주한국당 심완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7년 6월 항쟁 때는 분신자살까지 하려고 준비 했으나 그 소식을 들은 외국 대사가 놀라서 말릴 정도로 민주주의를 크게 열망했다.[1]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동래구 을(현재의 연제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90년까지 통일민주당 원내총무를 역임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할 때 참여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가족들과 김영삼의 간곡한 부탁으로 철회, 결국 합당에 참여하게 된다. 그 해부터 1991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동력자원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정무제1장관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산악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자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아들의 경원전문대학교 부정입학 건으로 바로 사퇴하였다. 같은 해 말부터 1994년 말까지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부산광역시 연제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권 행보를 보이기도 했으나, 청와대의 뜻에 따라 대권 행보를 물리고[2] 당권을 맡아 대권 후보를 지원하는 쪽으로 선회한다. 당시 민주계 내에서 가장 정치적 지분이 컸고, 당내 세력도 확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민주계 내 어느 한 후보를 밀기 시작하면 대세론을 타고 후보가 될 수 있었기 때문. 청와대에서도 당 대표로 최형우를 점찍은 상태였다. 그러나 대선 후보 경선을 준비하는 와중에 1997년 3월 11일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그것이 최형우의 정계 마지막이었다. 이틀 뒤 최형우 몫으로 갈 예정이던 신한국당 대표는 이회창이 되었고, 이회창은 그 여세를 몰아 민정계와 대세를 읽은 일부 민주계의 지지를 얻어 대선 후보가 되었다. 최형우가 누구를 밀어 주겠다고 확실히 말한 바가 없었기 때문에 최형우의 당내 세력은 민주계 각 후보는 물론 민정계, 더 나아가 야당 쪽으로까지 뿔뿔이 흩어졌다.
정계에서 은퇴 후 현재는 거동과 의사소통조차 불편한 상태라고 전해진다. 고희연에서 잠시 언론에 노출되기도 했는데, 더듬더듬 의사소통을 겨우 할 수 있는 정도.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조문했는데, 정치적 인생을 나눈 동지였기에 크게 오열했다고 전해진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마자 곡을 하며 울었고 영정 앞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며 주저 앉았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빈소에 와서 통곡을 멈추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