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IJI

(사와다 타이지에서 넘어옴)
X JAPAN의 전 멤버
HideTAIJI
3기 LOUDNESS의 멤버
타카사키 아키라야마다 마사키사와다 타이지히구치 무네타카

 * 이 항목은 타이지, 사와다 타이지 등으로도 모두 들어올 수 있다.
 * 대한민국의 가수에 대해서는 서태지 항목을 참조할 것.
 * 서태지의 솔로 앨범은 Seo Tai Ji, 태지 항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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澤田泰司 (1966년 7월 12일 ~ 2011년 7월 17일, 향년 45세)

엑스와 라우드니스의 비밀병기

일본의 베이시스트, 기타리스트, 작곡가.

1 연주자로서의 평가

  • 주로 킬러(Killer) 사의 베이스를 애용했으며, 베이스 바디에 자개로 피닉스가 새겨져 있는 그의 시그네쳐 'KB-CRIMINAL'은 X의 팬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베이스다. 그 외에도 펜더 재즈베이스프레시전 베이스[1], 뮤직맨 스팅레이 등을 사용했고 X의 초기 영상에서는 페르난데스의 워록 베이스를 사용했던 것도 볼 수 있다.
  • 그의 거의 모든 커리어는 하드록/헤비메탈 신에 경도되어 있지만,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폭넓은 어프로치가 특기. 또한, 밴드의 기둥인 베이스가 굳건하지 못하면 밴드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누구보다도 많이 연습하고 있다 말한 적이 있다.
  • 피크를 주로 사용했으나, 검지약지를 이용한 투 핑거 피킹으로도 연주했다[2]. 슬랩 주법과 후에 타카사키 아키라에게 배운 태핑을 이용해 매우 테크니컬한 솔로를 전개한다. 아르페지오를 사용해 리프에서 독특한 뉘앙스를 연출하기도 한다.
  • 처음에는 빌리 시언이나 매노워(Manowar)를 추종하며 테크니컬한 플레이를 즐겼으나, Jealousy 레코딩을 위해 LA에 다녀온 후 곡 진행의 선명함을 돕는 프레이즈와 그루브를 중시하는 쪽으로 베이스 연주에 대한 인식을 전환했다.
  • 면전에서 후배를 칭찬하지 않는 걸로 유명한 히구치 무네타카가 그의 베이스 라인을 극찬했었고, 그와 함께 무대에 설 기회가 있었던 드러머 소우루 토오루는 "멋진 베이시스트는 지금까지 몇 명이나 만나 봤지만, 사와다 타이지는 내가 찾는 드래곤 볼 중 하나와도 같은 베이시스트"라고 절찬했다. 솔로 앨범에서 직접 베이스를 녹음한 히데도 "영향받은 베이시스트는 타이지. 그 친구는 원래 기타리스트였으니까, 가려운 곳에 손을 뻗어 긁어주는 듯한 프레이즈를 연주한다"고 코멘트를 남겼다.

2 생애

2.1 음악 입문기

1966년 7월 12일 치바에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3] 두 살 때 아버지 공장의 기계에 손을 넣었다가 오른손 중지 첫번째 관절을 잃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스키를 타다 떨어지는 사고를 겪었고 입원 기간 동안 병실에서 이나 올리비아 뉴튼 존, 비틀즈 등을 접했으며, 아버지가 연주하는 Romance를 보고 어쿠스틱 기타를 배우면서 음악을 시작했다.

고등학생 때 일렉트릭 기타를 처음으로 잡고 아이언 메이든LOUDNESS, 딥 퍼플 등을 카피했으며, 프로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트래쉬(Trash)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그의 연주를 들어보면 상당히 딥퍼플 스러운 리프가 많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인 기스(GEESS)의 권유로 디멘시아(DEMENTIA)[4]라는 밴드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베이스 기타를 접하고 베이시스트로 전향한 것은 바로 이 때. 베이스로 전향한 이유에 대해, 타이지 본인은 '여러가지 테크닉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에는 레이(Ray)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자서전에서 밝힌바로는 히데를 처음만난것도 디멘시아 시절이며, 이때 히데가 있던 '요코스카 샤벨 타이거'의 공연을 보고 "와 우리 디멘시아는 쨉도 안되는구나" 라고 느꼈다고 한다. 의외라고 생각할수도 있는데 '개인의 악기실력'과 '밴드 합주' 는 전혀 다른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특히 X 초기시절에는 히데가 합주연습에서 한번도 틀린걸 본적이 없다고 한걸로 보아 히데가 합주연습을 강하게 밀고 나갔음을 알수있다. 어쨋든 이때 히데의 카리스마에 반해 먼저 인사를 청해서 친해지고 X 시절에는 환상이 깨졌다고 한다.

베이시스트로 잘 알려져 있지만 기타 실력도 매우 뛰어나다. X의 메이저 2집 Jealousy에 수록된 Voiceless Screaming은 타이지가 클래식 기타를 연주했는데, 팀의 기타리스트인 히데너무 어려워서 못 치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LOUDNESS 가입 당시 기타리스트 타카사키 아키라 앞에서 기타를 연주했는데, 타카사키도 그의 기타 실력을 인정했다는 일화가 있다.

2.2 X에서의 활동

85년에 한번 가입했다 탈퇴했던 엑스(X)에 재가입하면서, 이 때부터 가장 잘 알려진 예명인 'TAIJI'를 사용한다. 그는 "음악 스타일은 나와 잘 맞지 않지만, 이 밴드는 뭔가 재미있을 것 같다"며 X에 가입했다.

인디 시절부터 멤버에게 부과되는 지출이 컸던 X JAPAN의 초기에는 고생을 많이 했다. 음악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병행했으나 돈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돈 되는 물건은 다 팔아먹고, 전기도 끊기고, 나중에는 편의점에서 빵을 훔쳐서 연명해야 했을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거쳤다.

이런일화도 있었다. 한번은 멤버들끼리 같이 레스토랑에 가서 음식을 먹고 난후 멤버들의 지갑을 다 털어봐도 돈이없었다고 한다. 이때 히데가 '뛰어' 라고 해서 멤버들 모두 도망을 갔는데, 히데가 워낙 저질체력이다 보니(...) 타이지가 직접 업고 도망쳤다고 한다.

X를 재탈퇴한 적도 있었는데, 이것은 Yoshiki 때문이였다.[5] 베이스와 편곡에 치중하고 싶다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너의 베이스 실력이나 편곡 능력은 알고 있지만 X는 돈도 없고 오겠다는 사람도 없다"며 기타리스트로 전업을 요구했다. 히데를 얻고 나서야 X의 멤버 변동은 마무리된다.

X에 대한 반감 때문에 X 재적 시절을 흑역사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음악적으로는 이후의 행보에 비해 미진할지 몰라도 금전적인 면에서만큼은 리즈시절이었고 그의 빛나는 편곡능력도 이 시기가 황금기였다.

X JAPAN으로 개명하기 전 X의 명곡들은 거의 모두 타이지의 편곡을 거쳤다. 멜로디를 짜내는 능력은 뛰어난 반면 편곡에는 젬병인 요시키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던 멤버. 당시 X가 록 밴드로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요시키의 멜로디와 타이지의 편곡, 그리고 히데가 만들어내는 리프라는 삼각편대가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X의 음악적 완성도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타이지였다.

결국 X의 음악적 전성기는 타이지의 탈퇴와 함께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타이지의 편곡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요시키표 발라드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음악에 타이지의 능력이 사용되었다. Week end, Rose of Pain, 紅(쿠레나이), Silent Jealousy 등 짜임새 있고 드라마틱한 X의 음악은 모두 타이지의 손을 거쳤다. 타이지 탈퇴 이후 X는 음악적인 부활을 하지 못하고 끝내 해체한 걸 생각한다면, 결국 그의 빈자리를 대체하지 못했다는 의미.

하지만 요시키는 "나 혼자 밴드의 인세를 2배로 받겠다"며 막장 행보를 시작했고, 음악성 차이 등의 이유로 타이지는 1992년 엑스를 탈퇴한다. 그러나 그 과정을 보면 차라리 해고에 가깝다.

물론 타이지는 트러블 메이커였다. 89년 라우드니스의 한국 공연을 따라가는 바람에 TV에 4명만 출연하기도 했고, 90년에는 말도 없이 친구 야기 사토시의 밴드를 도와주는 등 이미 갈등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에서 해고당한 것. 그리고 타이지는 X에서 해고되자마자, 그를 매의 눈으로 바라보던 타카사키 아키라의 권유로 Loudness에 가입한다.

2.3 LOUDNESS에서의 활동

라우드니스의 멤버로 재적했을 때는, 본명인 사와다 타이지(沢田泰司)로 활동했다.

89년 라우드니스의 한국 공연을 따라가면서 인연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라우드니스가 눈여겨 보던 인재였다. SOLDIER OF FORTUNE의 초반 녹음을 X와 같은 스튜디오에서 했던 아키라는, "X의 멤버중 제대로 연주하고 있는건 타이지 한 명 뿐"이라고 말했으며 이 무렵 개인적으로 태핑을 가르쳐주었는데 타이지는 그걸 곧바로 익혀서 Rose of pain 연주에 써먹었다.

라우드니스 가입 후 타이지의 행보는 순탄치 않았다. 전임 베이시스트인 야마시타 마사요시가 "잠깐 쉬고 싶다"며 탈퇴하면서 후임으로 추천하는 식으로 가입했는데, 당시 하드록과 헤비메탈계에서는 타이지를 아이돌 밴드 짓이나 하던 비천한 놈 취급하는 등, 분위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당시 타이지는 무대에 오르는 것에 일종의 공포를 느낄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라우드니스 공연장마다 타이지에게 쏟아지는 기존 라우드니스 팬들의 야유였다. 투어 공연 내내 X 시절 극성팬들의 만행이 말로 못 할 만큼 심했기 때문에, 타이지 본인에게까지 그 불똥이 튄 것이다.

참고로 이 당시의 힘들었던 타이지를 격려하고 감싸줬던 사람이 라우드니스의 드러머 히구치 무네타카였다. 가장 따뜻하게 라우드니스로 잘 왔다고 반겨주었고 타이지를 비난하던 반응에 대해 보호를 해주었고, 타카사키 아키라와 함께 라우드니스로 오라고 권유를 한 사람이 바로 히구치였다.

하지만 음악적 역량은 이 때가 리즈시절. 마이크 베세라를 해고한 후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보컬인 E.Z.O야마다 마사키가 가입했고, 하프 다운 튜닝에다 판테라 스타일의 파워 메탈로 방향을 선회한 92년작 셀프 타이틀 앨범 LOUDNESS는 타카사키 아키라가 스스로 최강의 멤버로 제작된 최강의 록 앨범이라 자신한 만큼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었으며, 연주자로서 내공이 쌓인 멤버들 역시 절정의 테크닉을 보여주며 Loudness의 제 2의 전성기를 만들어낸다. 이 당시의 라우드니스 영상을 본다면 가히 엄청난 포스가 느껴진다.

앨범 판매량은 오리콘 차트 2위를 기록했으며, X 시절의 타이지를 기억하는 사람들 덕에 라우드니스는 청소년과 여성팬들 사이에서도 높은 인기를 누렸고 기존의 록 전문잡지들 뿐 아니라 비주얼 계열을 주로 다루는 SHOXX에 전문지 YOUNG GUITAR까지 취재 공세도 이어졌다. 투어인 Welcome To Slaughter House는 전회 매진을 기록하는 등, 일부에서는 이 때가 Loudness의 진정한 전성기라 부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이 당시 타이지는 대선배들로 가득한 라우드니스의 멤버들에게 밀리지 않는 패기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 당시 투어 영상 중 TWISTED

하지만 이 시기 즈음하여 라우드니스에는 수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타카사키 아키라와 소속사 사이의 갈등이 날로 심해졌고, 지분 조정으로 워너 뮤직과의 불화에다 과거 음반 판권 문제까지 벌어지는 등 문제가 이어지자, 93년 야마다 마사키가 탈퇴 의사를 내비쳤으며 그 때문에 라우드니스가 임시해산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 타이지는 개인 사무소 TAO 코퍼레이션을 설립하면서 타카사키 아키라의 뒤통수를 친 것. 그래도 그를 아꼈던 아키라는 라우드니스에서 활동한다면 눈감아 주겠다고까지 했으나, 타이지는 개인 팬클럽인 가솔린 카우보이를 만들면서 1993년 11월 라우드니스를 탈퇴한다.

2.4 D.T.R에서의 활동

D.T.R에서의 예명은, 발음은 같고 한자는 다른 사와다 타이지(沢田大司)였다.

자기 음악을 하고 싶었던 타이지는 보컬리스트 타케우치 미츠오, 기타리스트 후지모토 타이지 등과 함께 D.T.R을 결성했고, 첫 앨범인 DIRTY TRASHROAD는 꽤 성공을 거두었다. 악곡의 완성도나 연주력 모두 높은 평가를 받았고 기존 하드록/헤비메탈 청자들에게도 인정받았으나, D.T.R의 전성기는 이 앨범으로 끝이었다. X 시절의 팬들은 타이지를 보러 오는 것일 뿐 그의 음악을 들으러 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2집 DARING TRIBAL ROAR는, 악곡의 퀄리티와 상관없이 세일즈에서 참패.[6] 이 때 찾아온 일본 메탈 암흑기는 그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었다.

나는 절대 X JAPAN을 따라하지 않겠다!라는 말과 달리 비주얼계에 모습을 드러냈고 당시 라우드니스와 사이가 극히 좋지 않았던 ROCKIN'F에 출연하는 등, 결국 그를 아끼던 타카사키 아키라까지 그에게 실망하게 된다. 게다가 이혼까지 겹쳐 전 재산을 탕진했고 양육권까지 빼앗기며 인생이 막장으로 떨어졌고, 그는 길거리에 나앉으며 노숙자가 된다.

2.5 노숙자 생활

기타 한 대, 수통 하나, 냄비 하나, 룩색 하나를 가지고 우에노 공원 근처에서 노숙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노숙자에게 폭행을 가하는 범죄행위인 소위 "홈리스 사냥"의 피해자가 되어 턱이 부러지고 이가 4개나 나가는 등, 이 시절의 타이지는 영등포역이나 서울역 근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숙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왕년의 록스타가 그야말로 거지가 되었다.

타카사키 아키라는 그가 행방불명자로 등록되었는데도 아끼던 후배의 몰락을 마음아파하며 그의 통장에 꼬박꼬박 인세를 넣어주었고, D.T.R 시절의 인세도 조금씩 들어오면서 그나마 최소한의 생계는 유지할 수 있었다.

의절했던 어머니의 도움으로 임대 아파트를 구하여 살 수 있었으나, 매일 근처 강변에서 자살기도를 하는 비참한 상황.

그가 이런 방황을 끝낸 계기는, X 시절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 히데의 죽음이었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어졌을 때, 항상 내 곁에서 힘이 되어준 건 히데 뿐이었습니다. 그는 늘 나에게 말했어요. '타이지, 너라면 더 잘 할 수 있을 거야' 라고... 함께 영혼을 찾을 수 있는 여행을 하고 싶었던… 친구에게…

2.6 복귀

히구치 무네타카의 도움으로 COZY POWELL FOREVER 앨범에 세션으로 참가하면서, 재기의 뜻을 다진다. 그 여세를 몰아 투어에도 참전. 친구의 죽음을 딛고 일어난 실력있는 뮤지션의 컴백이라는 타이틀도 얻어 화려한 재기를 하려던 찰나… 그놈의 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투어 첫날부터 급성 간염 진단을 받고 불참하는 바람에 투어 자체가 무산될 뻔했지만, 라우드니스의 베이시스트였던 야마시타 마사요시 덕분에 투어는 진행될 수 있었다.

2.7 그 후

1998년 밴드 Cloud Nine을 결성하지만, 어쿠스틱 음악을 하고 싶다며 탈퇴하고 자기 여동생 사와다 마사요(후에 Sister MAYO라는 예명으로 활동)와 함께 밴드 오토카제(音風)를 결성. 오토카제에서는 기타리스트와 베이시스트를 겸임했다.

2005년 오토바이 사고로 인해 다리 인대가 끊어지는 중상을 입었고, 이후 그는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록계 신인들과 함께 타이지 위드 헤븐스(TAIJI with Heaven's)라는 밴드를 결성했으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X JAPAN닛산 스타디움 공연 때 티켓이 너무 안 팔려서 Yoshiki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 그는 공연에 게스트로 참전하면서 게런티를 무려 500만엔이나 요구했다. 그 공연의 결과는 닛산 스타디움 사상 최소 관객 동원. 결국 그는 공연을 준비하던 기획팀에게 수전노로 찍혀버렸고, 이 사실들이 알려지며 평가가 악화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다카다노 바바 클럽 페이즈에서 열린 알디오스(Aldious)[7]와 스파이널 코드와의 합동 공연 당시 그의 프로젝트 밴드인 TSP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관객들의 반응이 좋지 않자 관객들에게 욕설을 하며 베이스를 부숴 버렸다. 게다가 나중에 블로그에서 "라이브하우스의 엔지니어가 나빴다. 라이브는 중고딩 축제나 유치원 학예회와는 다르다. 여자한테 미쳐서 유희 메탈 따위를 빨아주는 관객들 때문에, 그 자리에서 토하고 싶었다. 두 번 다시 오지 마라. 유희 메탈이나 보러 가라. TSP는 그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라는 글을 남기는 상병크를 폭발시켰다.

그 후 메탈 신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타이지의 재개를 바랐던 팬들마저도 나오는 소식들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2.8 최후

나리타로부터 사이판으로 향하는 항공기 내에서 옆자리에 앉은 매니저 키타미 테루미(北見輝美)[8]와 말다툼을 하던 끝에, 창을 주먹으로 치거나 좌석을 차는 등 난동을 부렸다. 그리고 곧바로 달려온 승무원을 폭행하고 사이판 경찰에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나를 붙잡았다가는 X JAPAN 팬들이 가만있지 않을걸?

이 말을 남긴 채 체포된 타이지는 즉시 구치소에 수감되었으나 침대 시트를 이용해 자살을 기도했으며, 결국 뇌사상태에 빠졌고, 가족의 동의를 받아 인공호흡기를 뗀 후 7월 17일에 사망했다.

3 총평

비운의 천재 뮤지션이자, 스스로 파멸로 떨어진 안타까운 뮤지션.

실력도 출중했고, 주변에 조력자도 많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재기할 수 있었으나, 언제나 그의 재기를 막았던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런 면에서 참으로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음악적인 역량에 대해서는 거의 이견이 없이 모두가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ANTHEM시바타 나오토나 Loudness의 야마시타 마사요시, ANIMETAL/CANTA의 마사키 등과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기본기와 테크닉을 가진 베이시스트이며 X의 하드록적인 면을 전적으로 떠받치던 편곡능력까지 갖춘 다재다능한 뮤지션이였다. 당장 일본 헤비메탈의 대표밴드인 LOUDNESS의 전성기 중 하나로 타이지가 베이시스트로 활동한 시절이라 인정받는 것만 해도 어디서든 탐내고 빛났을 뮤지션이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 관리에 실패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스스로 파멸하고 말았다. 맡았던 팀마다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며, 자기 절제가 되지 않아 그의 인생은 나락과 파멸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쓰러지고 일어서고 다시 쓰러지고 일어서고 결국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그의 인생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면서 추락했던 그의 위상이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하다못해 한명이라도 타이지가 잘못 걸어갈 때 옆에서 진심으로 설득해주며 무절제하게 폭주한 그의 성격을 바로잡아주는 이가 있었다면, 아니 그에게 유일하게 바른소리 해주던 hide라도 살아 있어서 그의 옆에서 바로 잡아주었다면 하는[9] 아쉬움이 크게 남는 뮤지션이다.

특히 히데를 처음만났던 '디멘시아' 시절부터 'X' 시절까지 타이지는 히데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결정을 바꾼적이 여러번 있었기 때문에, 팬들이 매우 아쉬워 하고있다. 특히 둘은 음악성도 잘 맞았다고 하니...[10]

  1. 레코딩 시 애용하던 베이스라고 전해진다.
  2. 베이스에서 핑거피킹을 할 경우 주로 검지와 중지를 쓰지만, 그는 어릴 적에 오른손 중지 첫 마디를 사고로 잃었기 때문에 중지를 피킹에 사용할 수 없었다.
  3. 여동생이 마법전대 마지레인저의 엔딩곡을 부른 시스터 마요다. 시스터 마요의 본명이 사와다 마사요(沢田雅世/澤田雅世).
  4. 치매라는 뜻.
  5. 사실 X 초창기의 심한 멤버 변동은 Yoshiki의 말종스러운 성격 탓이 가장 컸다.
  6. 타이지는 이 앨범을 "내 방랑 생활의 계기가 된 앨범"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7. 멤버 전원이 여성인 헤비메탈 밴드로, 화려한 의상과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그에 뒤지지 않는 뛰어난 연주력으로 주목받았다.
  8. 타이지 위드 헤븐스의 한국 공연 취소 후부터 그의 매니저를 맡았다.
  9. 실제로 타이지는 잠깐이긴 했지만 히데의 죽음이후로 정신 차리고 음악을 진지하게 하려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X-JAPAN에서 그가 갖가지 말썽에 휘말리고 멤버들과 불화가 있을때도 유일하게 그를 따뜻하게 대해준건 히데뿐이었다.
  10. 히데와 타이지는 엑스시절 발라드곡을 연주하는 것을 안좋아했다고 한다. 타이지는 이에대해 대놓고 싫다고 따졌었고, 히데는 안좋아도 밴드를 위해 그냥 넘어가는 선을 취하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