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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강점기 시절의 친일행위
"이렇게 손쉬운 돈벌이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토지 투자 사업은 순조로웠다. 식산은행의 금고가 마치 나의 금고로 착각될 정도가 되었다. 1년이 지나자 나는 연수 1만석거리, 2백만 평의 대지주가 되어 있었다." - <호암자전>, 이병철의 자서전
삼성그룹의 초대 회장 이병철은 부유한 가산을 밑바탕으로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다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토지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병철이 사업의 후보지로 삼은 나산은 경남 일대의 농산물 집산지였고, 조선식산은행에서 담보 대출을 받아 무모한 차입 경영으로 20대 중반의 나이에 어느새 200만평의 대지주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2#3 당시 식산은행의 마산지점장은 히라다였는데 그와의 인연은 8.15 광복 이후 방일 시점까지 이어진다.
조선식산은행은 1918년 일본의 산업기관에 자금을 대출할 목적으로 설립한 특수 은행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으면서 토지 매입 등의 활동으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적 침략에 큰 역할을 한 곳이다. 특히 1920년부터 1941년까지 실시된 산미증식계획에서 자금 공급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당시 이병철이 조선식산은행에서 담보 대출을 받아 공격적인 사업 확장을 벌여 막대한 이윤을 취한 이면에 조선인 농작인의 희생과 일제의 식민착취가 있었던 사실은 분명하다. 대지주였던 아버지 이찬우처럼 소작인 착취를 기반으로 한 경영방식은 둘째치고 간접적으로 친일행위를 하였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일본 유학까지 받은 엘리트 이병철이 식산은행과 연계한 토지사업이 조선총독부의 착취와 관련이 있단 사실을 모를 리 없다.[1] 1936년에 협동정미소를 운영하며 일본에 조선의 쌀을 수출한 이병철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자서전에서 사업보국이라는, "총칼들고 싸우는 것만이 독립운동은 아니다. 가난을 구제하는 것도 독립운동이다"는 해괴한 변명을 했다.
하지만 이병철은 나중에 과도한 차입 경영의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1937년 7월 7일 만주에서 발생한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전쟁에 돌입한 조선총독부가 비상 조치의 일환으로 토지 담보 대출을 일체 중단하면서 조선식산은행에게서 대출금 회수 통보를 받은 것이다. ##2 때문에 이병철은 일본 은행으로부터 빌린 엄청난 규모의 부채를 갚기 위해 시가보다 낮은 가격에 토지를 팔아넘겨야 했으며, 협동정미소와 운송회사까지 다 처분하고 나서야 이병철은 겨우 자신이 빌린 은행권 부채를 청산할 수 있었다. #
이후 은행 빚을 청산한 이병철은 본격적으로 중일전쟁에 돌입한 중국 대륙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장거리 여행을 다녀왔고, 1938년 자본금 3만원 규모의 대규모 상회를 대구에 연다. 이것이 삼성그룹의 첫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삼성상회였다. 삼성상회는 대구와 포항 일대에서 생산되는 청과물, 건어물과 같은 군량미를 만주의 일본군에게 수출하였는데 전시상황의 폭등하는 수요를 바탕으로 1939년까지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데 성공하였다. ##2#3 사실상 일제의 대륙 침략을 기회로 삼아 재기한 것이다. 박노자는 중일전쟁 당시 삼성상회의 행각에 대해서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의 군납업체라며 비판하였다.
비슷한 시기 대구에서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청주 양조장인 조선양조가 매물로 나와 있었다. 당시 조선양조는 연간 막걸리 생산량 8천섬 규모로 대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는 8대 양조장 가운데 하나였고, 막걸리나 약주 판매는 조선인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청주의 판매 상권은 일본인이 독점하고 있었다. 이병철은 조선인이 운영하는 막걸리나 약주가 아닌 일본인이 경영하는 양조업체에 눈독을 들였다. ##2
당시 청주를 만드는 양조사업은 조선총독부의 허가가 있어야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양조장을 인수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게 관례화 돼 있었다. 그런 까닭에 조선양조의 경우 매입가만 무려 10만원(현재 시가 대략 120억)을 호가했지만 이병철은 10만원이란 거금을 들여 조선인 최초로 일본인이 운영하던 조선양조를 인수하였는데, 중일전쟁으로 세수 확보에 혈안이 된 조선총독부는 밀주 단속을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양조업자들은 재고 부족을 고민해야 할 정도로 주문이 폭증하고 있었으며 양조업에 대한 총독부의 과세는 보잘갓없어 고수익이 보장되는 사업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제는 조선에서 거둬들인 자금이나 자재, 설비, 노동력 등 모든 것을 군수산업에 동원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당시 조선양조에서 생산된 청주의 무려 95%가 만주에 주둔중인 일본군의 군수품으로 납품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병철이 자기 맘대로 국내에 판매할 수 있는 청주는 겨우 5%에 불과하고 나머지 95%는 일본군에 대규모로 납품되었던 것이다. 사업가에게 있어 이보다 안정적인 수요처는 없었다. 이처럼 1939년 이병철이 조선인 최초로 인수한 조선양조는 실제로는 일제의 군수지정공장이었다. ##2 이병철이 인수한 조선양조 바로 옆에는 일본 군수국 분실 사무소와 미쓰이와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의 군수재벌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일본 병사들의 군량미 수송의 경우 30%의 고수익이 보장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양조의 발흥은 지난 몇년간 사업을 벌이며 요정 출입을 통해 다져진 일본 관리들의 끈끈한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저서 <한국현대사(Korea's Place in the Sun)>에서 1930년대에 이병철이 "항상 자신을 '일본 신사'로 여겼고 일본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했다"고 서술하였다. 이병철 역시 <호암자전>에서 "항상 친구나 양조업자들과 어울려 요정으로 향하는 일이 잦았다. 돈과 시간을 주체 못해 밤마다 새벽 1시가 넘어서 귀가하고 아침에는 열시가 넘어서 일어나는 나태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대구의 요정이 싫증이 나면 서울이나 동래 등지로 나들이를 했으며 그래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일본의 별부나 경도 등지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이병철의 자서전 50~51쪽을 보면 1950년 2월에 GHQ의 요청으로 일본경제시찰단원 신분으로 방일하여, 도쿄 하네다공항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 수석 총무국장 '호즈미', 조선식산은행 마산지점당 '히라다', 경북지사 '노다' 등의 관리와 만났다면서 친분이 있었음을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병철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고향으로 낙항하였다. 박상하는 <한국기업성장사>에서 "1941년 전쟁 발발 이후 점차 일본인 관료들마저 곤경을 호소하는 절박한 상황들을 지켜보며 일본의 패망을 확신한 이병철은 대구 근교에 1만평 남짓한 과수원을 사서 닥쳐올 식량난에 대비했다. 그런 다음 대구에 벌여놓은 삼성상회와 조선양조㈜의 경영 일체를 관리인에게 맡긴 뒤 낙향의 길을 택했다. 머지않아 도래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기 위한 칩거에 들어갔던 것이다. 8.15 광복 전 이병철(당시 35세)은 경북 의령의 고향 집에 머물고 있었다"고 서술하였다.
당시 이병철의 친일행적 때문에, 훗날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진 해인 1966년 10월 17일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투쟁위원회는 "민족의 피를 빤 이병철을 즉각 구속하고 민족적 대죄를 진 악덕재벌의 재산을 몰수하라. 조국의 경제적 질서를 도괴시키고 살쪄가는 밀수의 아성과 미쯔이를 비롯한 일본 상사를 즉각 추방하라"고 규탄하였다. 동시에 이병철과 미쓰이그룹과의 유착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일본에서 들여온 한국비료 건설자금 4390만달러의 상업차관을 제공한 곳이 미쓰이물산이었기 때문이다.
2 독재정권에 협력 및 정관계 로비
참여연대는 2005년 '삼성그룹의 불법정치자금의 역사와 사법처리 현황'이란 자료를 통해 "삼성이 역대 정권기간 동안 정계에 제공한 불법 정치자금은 860억원에 달한다"고 주장하며, 한국에 집권한 모든 정권에 삼성이 자금을 제공해 부당한 특혜를 누려왔다고 비판하였다. 참여연대는 "삼성그룹은 이승만정권부터 시작해 전두환 정권하에서 220억원, 노태우 정권하에서 250억원, 김대중 정권때 5억원을 제공했으며 2002년 대선때는 여야 후보에게 385억원을 제공하는 등 삼성이 정계에 제공한 불법정치자금은 모두 860억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2 그나마 참여연대의 발표 역시 언론보도 등의 공개자료를 취합한 것뿐이어서 그밖에 알려지지 않은 자료가 새로이 공개될 경우, 삼성이 당대의 정권을 포함해 정치권에 제공한 불법자금의 액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치권 안팎의 공통된 시각이다.
정권을 가리지 않고 불법자금을 제공했던 삼성그룹은 단 한차례도 제대로 된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 매번 정권은 비리 핵심 몸통인 그룹 회장을 수사대상에서 제외하거나, 처벌하더라도 빠른 시일 내에 사면하는 수법으로 삼성그룹에 면죄부를 줬는데, 예컨대 전두환 정부 시절 삼성그룹 전 회장 이병철씨는 1987년 사망을 이유로 검찰 기소가 되지 않았고, 노태우 정부 시절에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검찰에 기소돼 징역 2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지만, 불과 1년만에 사면됐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이건희 회장은 한 차례의 소환 조사 없이 무혐의 처분을 받고, 이학수 전 비서실장 역시 징역 2년 6월 집행유예 4년을 받았으나, 불과 8개월만에 사면됐다.
2.1 해방이후 제1공화국 시절
8.15 광복 이후 삼성은 적산기업의 인수를 통해 현재 삼성의 기반을 다졌다. 당시 삼성은 미쓰코시백화점과 조선생명을 불하받아 신세계백화점과 삼성화재로 발전하였다. 또한 1956년의 은행 주식의 민간 불하로 우리은행(옛 흥업은행) 주식 85%와 조흥은행(2003년 신한은행에 인수됨) 주식 50%를 확보했다. # 이 시기 적산을 통해 민간에게 불하된 기업들은 총 2,700개였는데 이 중 오늘날까지 생존해 있는 기업은 40~50개 정도에 불과하다. 당시 귀속기업을 불하받아 대기업으로 성장한 주요 사례는 SK그룹(최종건, 선경직물), 한화그룹(김종희, 조선유지 인천공장), 두산그룹(박두병, 소화기린맥주), 쌍용그룹(김성곤, 동경방직, 조선직물), 해태그룹(민후식 등, 영강제과), 동양그룹(이양구, 소야전시멘트 삼척공장) 등이다. 은행 주식의 민간 불하도 1956년 마지막으로 실시됐다. 적산에 해당하는 귀속 사업체 불하 조건은 매각 대금의 최소 20%를 계약금으로 납부하고 잔액은 연리 7푼(7%)으로 10년간 분할 상환한다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감안한다면 이 같은 조건은 거의 무상이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불하 대상자는 관리인이나 주주 등 이해 관계자들이 우선적으로 선정됐다. 또 대규모 귀속 사업체를 불하받기 위해서는 담당 관료나 정치가들과의 유착이 당연히 이뤄졌다. # 이것은 삼성그룹의 친일행각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반증이며,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경제에서 정경유착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삼성은 한국전쟁 와중에서도 부를 축적했다. 1951년에 이병철은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제일 제당을 설립하게 된다. 제일제당은 대충자금[2]을 통한 설탕 생산으로 막대한 부를 쌓게 된다.
삼성은 자유당에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는데, 3.15 부정선거에 자금을 제공해 혁명기 당시 많은 사람들은 부정축재자 이병철의 처단을 요구했다. 5.16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를 의장으로 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조사결과 삼성이 자유당 정부에게 당시 기준으로 정치자금 4억2500만환을 제공한 사실이 밝혀졌으며, 사회 정화 차원에서 설립된 부정축재 처리위원회의 조사 결과 고 이병철 회장은 정치자금 제공 이외에도 귀속국유재산 불하 부정액이 5395만7827환, 조세포탈액이 33억501만7931환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이에 대해 부정축재자에게 벌과금을 부과하고, 공장을 건설해 그 주식으로 벌과금을 납부하는 '부정축재환수절차법'을 공표해 형사 처벌없이 부정축재와 불법정치자금 제공 혐의를 받은 이병철을 면책했다. #2
2.2 제3공화국 ~ 제4공화국 시절
이처럼 정권에 협조하여 각종 특혜를 누리는 삼성의 행보는 이승만 정권 붕괴에도 계속되었다. 박정희가 한국의 실세를 잡자, 삼성은 1961년에 ‘한국경제인협회’를 만들어 박정희 정권에 대규모 로비를 해 부정 축재자 처리를 무력화했고, 1964년 삼분폭리사건, 1966년 한국비료 밀수 사건(사카린 밀수 사건)[3] 등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엄청난 부당이익을 취했다. 사카린 밀수 사건 당시 야당에 의해 밝혀진 밀수 품목은 ‘사카린’을 비롯해 표백제, 전화기 제품, 수세식 변기, 욕조에 이르기까지 1만여 가지나 됐다. 이 사건에 이병철의 아들인 차남 이창희가 관련돼 투옥되자 불만을 품고 아버지 이병철의 비리 내용을 청와대에 탄원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삼성가의 집안 싸움으로 확산됐다. 이창희는 아버지가 기업자금을 해외로 빼돌리고 제일모직과 제일제당에서 탈세했다는 내용을 투서했고, 이병철은 이창희의 모반 사건에 이맹희가 "그 일에 어떤 형태로든 개입"됐다고 생각하여 이맹희는 은둔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 이병철이 사망하기 두 달 전까지도 애증의 관계에 있었다. # 1970년대에도 삼성은 박정희 정권과 철저하게 유착해 중화학공업, 기계, 화학, 전자, 호텔 등으로 사업을 확대하였다.
2대 회장인 이건희의 부인 홍라희의 아버지 홍진기는 일제 판사 출신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이고, 자유당 정권의 실세 중 하나였다. 법무부장관을 역임하며 정권에 비판적인 경향신문을 강제 폐간시킨 것도 바로 홍진기며, 독립운동가 조봉암의 사형에도 관여하였다. 3.15 부정선거를 수습해 준 공로로 인해 이승만의 신임을 얻어 내무부장관에 선임됐다. 4.19 혁명 당시 시위대에게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고 발언하여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발포를 지시하기도 했다. 이 일로 수도권에서만 2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5.16 군사정변 직후 벌어진 혁명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병철의 도움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얼마 안 가 석방되었다. 이후 이병철과 사돈 관계를 맺고 많은 도움을 받아 동양방송 사장을 시작으로 1986년에 사망할 때까지 삼성을 대변하는 친재벌 성향의 신문 중앙일보의 초대 회장으로 있었다. #
2.3 제5공화국 ~ 제6공화국 시절
독재정권과의 유착은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계속됐다. 전두환은 산업 합리화와 부실기업 정리 등을 통해 삼성의 자본 축적을 지원했으며, 그 대가로 삼성은 전두환 정권에 엄청난 액수의 정치자금을 헌납하였다. 1982년 삼성그룹 총매출액은 한국 GNP(48조 3천억 원)의 5.3퍼센트(5조 3천억 원)를 차지했다. 이것은 정경유착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엄청난 자본 집중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고속도로 건설, 차세대 전투기, 반도체, 율곡사업 등의 이권을 삼성에 제공했으며 이병철은 그런 특혜에 보답해 여덟 차례에 걸쳐 모두 220억 원을 전두환 정권에게 헌납했다. 구체적으로는, 전두환이 금융 세제 운용 등 기업경영과 관련된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삼성그룹을 봐달라는 의도로 정권에 10~50억원을 정기적으로 제공하여 수척억원대에 달하는 전두환의 비자금 조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병철은 전두환에게 1983년 12월 10억원을 시작으로 1984년 12월 10억원, 1985년 9월 20억, 1985년 12월 20억원, 1986년 9월 30억원, 1986년 12월 30억원, 1987년 6월 50억, 1987년 10월 50억원 등 총 8회에 걸쳐 뇌물을 제공하였다. 동시대 삼성과 같은 정치자금을 제공한 기업은 현대그룹의 정주영 뿐이다.
이처럼 군사정권과 유착한 삼성은 6월 항쟁으로 한국사회가 민주화되자 위기에 봉착했으나, 민주화세력의 갈등으로 군사정권의 후예인 노태우가 당선되자 아홉 차례에 걸쳐 모두 250억 원을 노태우 정권에 헌납했다. 당시 회장은 이건희로, 노태우 정권도 차세대 전투기, 상용차 사업, 건설 사업 등 각종 이권을 삼성에 줬다. # #2 구체적으로 삼성은 노태우 정권에게 1988년 3월 20억, 1988년 12월 30억, 1989년 9월 20억, 1989년 12월 30억, 1990년 9월 50억, 1990년 12월 20억, 1991년 9월 20억, 1991년 12월 30억, 1992년 8월 30억원을 제공했다.
결국 이건희는 1995년 11월 대검 중수부가 조사한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때, 노태우에게 100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건넨 혐의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지만 그나마도 1997년 개천절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돼 사면됐다. 김영삼 정부도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 진출할 수 있도록 허가해준 답례로 1997년 대선 때 신한국당에 10억 원의 대선자금을 받았다. 이 같은 더러운 정강유착은 삼성 X파일 사건으로 비로소 수면 위에 떠올랐다. X파일 사건이란 2005년 7월 22일 MBC 이상호 기자가 국가안전기획부의 도청 내용이 담긴 테이프를 입수하여 삼성그룹과 정치권·검찰 사이의 관계를 폭로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태로, 대선 당시 부정자금 제공과 더불어 삼성과 홍석현 전 사장이 최고위급 검찰 간부들에게 명절 때마다 떡값 명목으로 500만~1000만원의 금품을 제공하면서 검찰 인맥 관리를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삼성과 정치권의 유착은 1997년 외환 위기의 원인 중 하나로도 지목받았다. # X파일 사건 녹취록에 따르면, 삼성은 정치권 로비를 통해 기아차 인수에 관여했는데, 때문에 기아자동차가 급격한 부채상환 요구를 받고 파산해 한국 기업에 대한 신뢰 저하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시기 삼성은 이른바 삼성공화국으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했다.
삼성기업의 부도덕한 행보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2002년 7월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인 김홍업은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으로 근무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아들이란 지위를 악용하여 각종 이권청탁을 받고 대가를 받는 등 알선수재와 변호사법 위반, 조세범처벌법 위반 (증여세탈세) 등으로 구속된 바 있다. 이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1999년 12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씨에게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김인주)가 5억원을 전달한 사실이 밝혀졌다. 김홍업은 증여세 포탈로 처벌을 받았으나 김인주씨는 이와 관련된 어떠한 형사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재판결과대로 이 돈이 구조조정본부에서 나왔다면 배임, 횡령의 문제가 발생함에도 이에 대한 검찰의 수사결과는 없었다. #
2002년 대선 당시에는 이학수 삼성그룹 기업구조조정본부장이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 김종필 자민련 총재 등에게 385억원대 불법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이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밝혀졌다. # 하지만 검찰은 당시 불법자금의 출처가 단순히 이 회장 개인재산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여 회사재산을 빼돌린 횡령, 배임은 조사조차 하지 않고 면죄부를 준 점이다. 이건희 회장에 대해서는 소환조사없이 무혐의로 종결됐다. #2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정경언 유착보다 도청문제가 본질이라면서 물타기를 시도, 사실상 삼성이 관련된 정경유착에 관련돼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였다. #, #2 법조계의 삼성 봐주기 논란은 삼성장학생이란 신조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2009년에는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삼성 비자금 사건에 대해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집행유예를 받는 것으로 끝났다. 전직 법무팀장 김용철이 관리해오던 재벌일가의 비자금은 50여억원에 달했으며, 검찰과 시민단체에 대한 로비를 이건희 회장이 직접 지시했다는 문건이 공개되었다. 하지만 사건을 맡은 조준옹 특검의 아들이 비자금 재판 뒤 특채로 삼성에 입사하고 이건희 회장이 이후 단독 사면되는 등 사건이 발생하여 한국 사회에 만연한 정경유착의 대표적인 예시로 남게 됐다. 현재도 이러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2014년에는 핵심기술개발 사업과제 등 방위산업 계열사들의 연구개발예산이 책정돼 국고 보조금 수혜액이 1,684억원으로 1위란 보도가 나왔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삼성이 정권의 비호로 부당하게 부를 축적해왔음에도 여태껏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재벌과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노골적인 불신으로 이어졌다.
3 회장일가의 탈세와 비자금 조성, 불법승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1996년과 2009년에 비자금조성·배임·조세 포탈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96년 삼성에버랜드가 전환사채를 7700원이라는 헐값에 발행하였는데 이를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이 인수해 에버랜드 1대 주주로 등극했다. 당시 에버랜드 적정 주식가치는 주당 22만 3000원 정도로 추정돼, 기존 주주들이 인수를 포기해 결과적으로 아들에게 물려줄려고 꾸민 짓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다. 이에 업무상 배임죄로 허태학, 박노빈 전현직 애버랜드사장과 삼성특검의 출범으로 이건희 역시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조세 포탈에 대해서는 유죄가 인정되었지만 에버랜드 주식을 헐값에 발행한 것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는 조세 포탈에 대한 징역 3년 집형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판결하였다. 별개로 이건희 등 제일모직 이사진을 상대로 소액주주들이 낸 소송은 2011년 2월 민사 재판에서 배임죄가 인정돼 제일모직에 130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 이 같은 부정한 방법으로 이병철 - 이건희 - 이재용의 3대 세습 체제를 거의 구축하면서 사실상 재벌판 북한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4 병역 면제
삼성그룹 총수 일가의 병역면제율이 73%에 이르러 재벌 가족 중에서도 가장 높다. 설마 가족력 아니겠느냐[4]하는 멍청한 사람은 없기를 바란다. 명백한 병역면탈이다.
5 순환출자
가장 대표적인 논란거리 중 하나는 순환출자다. 삼성은 과세상의 몇 가지 문제와 조세포탈 등, 약간의 책임만 해결하면 오히려 삼성으로서는 출자·승계 구도를 완벽하게 합법화하고 법적으로 인정받아 재벌일가는 부도덕하다는 인식을 만들어냈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 1970년대 국가 주도의 경제성장전략에서 정권에 야합하여 많은 특혜를 받은 삼성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2011년 순환출자 탈피선언을 하긴 했지만, 5년이상 의미있게 뭔가를 진행하고 있지는 않다.
6 노동착취
삼성은 경영과 운영에서 법적으로 보장된 노동조합의 결성을 막고 있다.# 이용주 중앙일보 전 편집부국장은 이용우씨는 전두환 정권 말기 1987년 6·29 선언 이후 노사갈등이 전국을 휩쓸면서 정주영의 현대마저 노조설립을 허용했지만 삼성은 달랐다며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 설립은 용인할 수 없다는 이병철의 말 뒤에는 '삼성 계열의 재벌언론사인 중앙일보가 버티고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일단 삼성그룹은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카드, 삼성중공업, 삼성정밀화학, 호텔신라, 에스원에 모두 노조가 존재한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실제 노동자들이 결성한 것이 아니고 회사측에서 문서상의 노동조합을 설립한 것이고 그렇지 않는 노동조합은 기업의 인수합병시 피인수 기업에 존재하던 노동조합이다. 사실상 무노조 경영이다. # 삼성 인사업무를 담당한 수원삼성SDI 소속의 신모 차장은 과거 노조를 결성하려다가 해고된 류모 씨의 집에 고성능 도청기로 도청하다 발각당하며 고소당했다. #
시민사회의 비판이 거세지자,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 인정하지 않는 것은 노조가 아니라 노조의 필요성"이라고 하였고, "삼성은 노사 안정을 실천하려는 삼성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노사문제를 예방적으로 해결하고 있고, 업계 최고의 처우를 보장하고, 노사협의회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공정한 인사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필요없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른바 삼성 반도체 공장 노동자 백혈병 사건으로 허구임이 입증되었다.
2012년 CLW의 조사보고서의 일부(왼쪽). 2014년 조사보고서에서 밝혀진 14세 소녀 노동자(오른쪽 위)와 공장 내 식당에서 배식을 기다리고 있는 중국 노동자들의 모습(오른쪽) |
삼성그룹의 대표적 계열사인 삼성전자는 해외에서 아동착취란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다. 삼성전자의 협력업체들은 거의 매년 빠짐없이 아동노동으로 도마에 올랐다. 2012년, 2014년, 2015년
2013년에는 중국공장 노동여건 열악을 이유로 프랑스 비정부기구에 제소당했으며, 2014년에는 추악한 관리로 돈을 벌었다며 피노키오상을 수상했다. 2015년 12월에는 프랑스 주요 시민단체들이 삼성전자 프랑스법인을 상대로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기업 시민이 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촉진하고자 한다"고 기만적인 윤리 마케팅을 일삼는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7 각종 사고
삼성그룹의 준법의식 부재는 여러 참사로 이어지기도 했다.
-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 (1993) : 삼성종합건설. 열차 운행선의 노반 밑을 관통하는 지하 전력구를 설치하기 위한 발파작업을 하면서 사전 협의 없이 맘대로 작업을 시행함으로써 사고를 일으켜 78명의 사망자와 198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 삼성 1호-허베이 스피릿 호 원유 유출 사고 (태안 참사) : 삼성중공업이 일으켰다. 지역생태계는 물론 지역사회의 경제기반을 완전히 파괴하였음에도 6년 뒤에야 보상금 지급 절차에 들어가는 등 많은 원성을 샀다.
- 서울시가 동절기 미철거 원칙을 어기고 겨울철에 철거를 강행하면서 발생한 용산 참사에도 용역을 투입했다. #
- 하이패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타사의 제품이 시험중일 때 전파방해를 해서 오작동을 일으키게 만들어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다.
- 하이패스 기술 (ETCS기술) 을 가지고 최초로 한국에 들어올려고 했던 회사는 미국의 한 기술회사(회사의 사장은 한국인 2세). 그 미국의 회사는 한국에 들어와서 하이패스 기술을 납품하기위해, 토탈솔루션으로 삼성을 선택 함.
- 그 회사는 삼성에게 찾아가 사업제휴를 하자라고 제안.
- 삼성 : 기술을 통채로 넘겨라, 그리고 기술료-특허료는 생각하지말고 일시불로 얼마줄테니까 이거먹고 떨어져라.
- 기술을 가진 미국의 회사 :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 우린 이미 시스템 다 완성됐고 실제로 생산 중이며 이 시장은 한국만 있는게 아니고 전세계가 시장이다, 난 당신들과 계약을 못하겠다
삼성 : 당신 담당자분이 누구신지는 모르겠는데, 당신이 삼성하고 거래안하고 한국에서 장사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냐? 아직 들어온지 얼마안되서 한국사회의 실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 ETCS의 기술을 가진 미국의 그 회사는 결국, 포스데이타와 제휴를 했고, 포스데이타는 로열티 퍼센티지를 다 쳐주고 칩 가격 다 쳐주며 계약을 함.
- 포스데이타는 솔루션을 가지고 한국도로공사를 찾아갔지만 한국도로공사는 원래 이런 큰 사업은 전통적으로 삼성SDS와 한다고 함. 당시, 삼성SDS는 급하게 일본에서 기술을 사왔지만 포스데이타에 비해 기술력이 훨씬 떨어짐. 결국 한국도로공사는 (입찰경쟁상대인) 포스데이타와 삼성SDS 양측을 불러서, 성능테스트를 시행. 한국도로공사는 고속도로 중 실제로는 쓰지않고 막아놓고 있는 도로를 테스트 필드로 사용하여 하이패스를 기술을 평가하는 입찰을 진행. 그 당시, 객관적으로 포스데이타의 기술력을 삼성을 압살하는 수준이였고, 삼성SDS 훨씬 떨어지는 수준 (당시, 포스데이타의 인식률은 150km기준 인식률은 99.98% 정도).
- 하지만 실제로 인식률을 평가해봤더니, 포스데이타 기술을 부착한 차량이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순간 말도 안되는 수준의 (60%) 인식률 나옴.
- 포스데이타 직원들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시험도로 옆에 정상도로에서 계속 같은 구간을 맴도는 차량을 발견.
-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포스데이타 직원들은 그 차량을 추격하여 멈춰세웠고, 그 차량 안의 운전자는 처음에 아무관계도 없는 사람이라고 부인했지만 결국, 그 운전자의 신원은 삼성SDS직원이란게 밝혀졌고, 그 차량 안에는 전파방해장치가 실려있었음. 즉, 삼성차량이 통과할때는 가만히 있고, 포스데이타 차량이 통과할 때는 전파방해장치를 쏘는 것
- 삼성과 포스데이타 측은 재판에 들어갔고, 그 차량은 삼성SDS 직원 명의로 빌린 렌트가 차량으로 밝혀짐. 그 직원들은 징역 2년을 선고받음. 하지만, 삼성SDS가 하이패스 사업권을 따내는 것으로 마무리.
덕분에 대한민국 하이패스 산업은 2~3년 지연 됨.
역시 공명정대한 삼성 착한 리콜 삼성 삼성이 하면 다르긴 달라요
8 각종 비리
정권과 직접적으로 결탁해 저지른 것으로 판명난 비리 외에도 삼성그룹은 많은 부정을 저질렀다.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중앙일보를 위장 분리한 사실은 김용철의 폭로로 드러났고, 이재용 자녀의 영훈국제중 부정 입학 비리 사건은 교육계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사건이다. 중소기업에 갖은 불공정거래를 일삼는다는 것도 드러났다. #
특히, 특검 수사 과정에서 광범위한 차명계좌 거래 사실이 확인돼 경영일선에서 퇴진했던 배호원 전 삼성증권 사장은 2009년 인사에서 삼성정밀화학 사장으로 복귀했다. 경영권 불법승계 혐의에 연루돼 기소된 유석렬 삼성카드 사장은 삼성토탈 사장이 됐다. 삼성의 정보수집과 로비업무를 총괄했던 장충기 전 전략기획실 부사장은 사장으로 승진해서 삼성 브랜드 관리위원장을 맡게 됐다. # 이를 두고 삼성 수뇌부가 매우 부패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사건 이후 이건희 회장은 차명재산(약 4조 원 이상)을 '실명전환 후 좋은 일'에 쓰기로 약속했지만 최소 3000억 원에서 최대 6천억 원이 모자라, 삼성 측이 금융실명법을 지키지 않고 과징금을 납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이 사건으로 삼성화재가 고객의 돈을 빼돌려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는데, 이러한 미지급 보험금을 다시 고객의 몫으로 돌려줬다는 소식이 없다. ##2#3 이처럼 삼성그룹의 초법적인 횡포는 국민들 사이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단어가 유행하기도 했다.
1998년부터 2012년까지 공정거래위원회가 주요 조사 방해 행위와 관련해 과태료를 부과한 16건 중 6건이 삼성계열사에서 일어났다. 1998년에는 삼성자동차와 임직원의 조사거부 및 방해(과태료 1억2000만원)가 있었고 2003년은 삼성카드가 허위보고, 허위자료 제출(2천만 원)을 했다. 2005년은 삼성토탈 직원의 조사 방해(1억8500만원)도 있었다. 삼성전자는 2005년과 2008년에 벌인 조사 방해로 5천만 원, 4천만 원의 과태료를 각각 부과받았으며 2011년의 방해행위로 2012년엔 사상 최고액인 4억원의 과태료를 부과받았다. #
9 의료민영화의 최대 수혜자
박근혜정부가 추진하는 의료 민영화 정책의 최대 수혜자가 삼성그룹이 될 것이란 평가가 있다. ##2#3 2010년 삼성경제연구소가 MB 정부에 제안했던 의료 관련 정책들이 박근혜 정부에 들어 하나둘씩 실현되고 있는 추세로, 현재 삼성그룹은 삼성의료원을 필두로 삼성생명, 삼성화재(금융업), 삼성메디슨(의료기기), 삼성바이오로직스(제약), 365홈케어(건강관리), 삼성전자/삼성종합기술원/삼성테크윈/삼성SDS/유헬스 등의 계열사를 소유하고 있으며 2009년부터 의료 산업에 매우 공격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의료민영화 정책은 자본이 부족해 의료 사업을 추진하지 못하는 대형병원이 자본투자를 받아 관련 산업에 뛰어들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삼성, 현대와 같이 이미 진출해 있는 기업이 보다 손쉽게 기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준 것이란 비판이 나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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