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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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2년 2월 혹은 4월 1일1995년 12월 14일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들 중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치명적인 전쟁.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50년 만에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들 중 최대 규모의 학살이 자행된 전쟁이기도 하다.


BBC - War In Mostar Bosnia


보스니아에서 최악의 강간 피해를 입은 지역 "그르바비차"(Grbavica). 해당 사건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EBS 지식채널e 측에서 다시 편집한 영상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너무나 빠르게 잊혀지고 있다.

2 역사

2.1 내전의 시작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붕괴·분열 과정에서 가장 잔인한 전쟁이 벌어진 곳은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도 아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였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보스니아에는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연방 탈퇴로 시작된 유고 연방 내 공화국들의 분리 독립 움직임이 표면화되자, 보스니아에서도 연방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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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당시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민족 구성. 아래의 흰 선이 내전 당시의 경계다. 경계선 동쪽 세르비아계 영역에 다수 거주했던 보스니아계 민간인들이 주된 희생자가 되었으며, 이후 세르비아계의 영역 확장으로 원래 크로아티아-무슬림(보스니아)계 지역이었던 곳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문제는 이전의 분쟁 지역이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는 그 지역을 구성하는 민족 분포가 각각 슬로베니아계(90%), 크로아티아계(89%)로 세르비아계의 비율이 적었으며, 주거 지역도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어 지역 내 민족 분쟁보다는 사실상 전선 쟁탈전이었던 것과는 다르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계, 동방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계의 세 민족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섥혀 있었다. 보스니아의 분리 독립에도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는 찬성했으나 세르비아계는 반대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결국 1992년 2월 연방 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2/3를 차지하던 보스니아계, 크로아티아계가 보스니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나머지 세르비아계가 이에 반발했고, 이웃한 신 유고연방 세르비아 공화국의 지원 하에 스르프스카 공화국[1]의 이름으로 봉기를 일으켰고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세 민족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번에도 세르비아는 직접적인 전면 개입보다는 내부 사병조직과 현지 정부군 및 민병대를 활용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일단은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가 함께 세르비아계에 대항하는 양상을 띄었으나, 여기에 크로아티아가 같은 해 6월 12일 작게는 크로아티아계 공화국 지역, 크게는 헤르체고비나 전역을 목표로 참전하면서 상황은 더욱 막장이 되었다. 보스니아 내전의 하위 전쟁인 이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 에서는 사상자가 1만 명 이상이 나왔는데 62%가 보스니아계였고,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는 각각 24%, 13%였다. 크로아티아계의 무슬림 인종청소가 함께 자행되었다는 증거다. 이 때문에 크로아티아 독립의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이었던 프라뇨 투지만 역시 전범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내전 중기인 94년의 인구 구성. 세르비아계 영역이 전범위로 넓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유일한 예외로 형제국 크로아티아의 지원을 받은 지도 남쪽의 크로아티아계(파란색) 영역이 일부 확장되었다. 보스니아계가 많았던 지역을 크로아티아계가 차지한 경우도 있다. 크로아티아가 본국에서의 전쟁을 수행하기도 여력이 부족하여 세르비아를 제대로 막지 못한 탓에 대치가 지루하게 이어졌고, 세르비아 정부의 지원을 받은 스르프스카 군이 보스니아군과 크로아티아군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좀 심하게 말해서 이 전쟁은 세르비아가 이하에 서술될 반인륜적인 짓거리만 안 했어도 승리할 가능성이 무척 높았던 전쟁이었다.

2.2 스레브레니차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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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의 독립 선언으로 시작된 보스니아 내전은 다른 민족에 대한 인종 청소로 잔악의 정점을 이루었고, 자연스럽게 방화, 살상, 강간 등이 자행되어 그 잔악성이 국제사회를 경악시켰다. 특히 처음부터 전쟁을 인종청소의 기회로 삼았던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지역에 정규군보다는 민병대와 의용병을 적극 투입했고, 군법이 가하는 최소한의 규제조차도 받지 않는 무장한 병사들이 전장에서 날뛰면서 약탈, 강간, 학살이 빈번하게 벌어지게 된다. 강간 공장을 만들어서 학교, 교회 등에 가임기 여성으로 판단되는 무슬림 여성(10~60세 사이)을 한 곳에 몰아두고 집단 강간을 해서 혼혈 아기를 임신시켰다. 보스니아계의 무슬림 남성을 학살로 제거하고, 여성들에게 세르비아계의 아이를 갖게 함과 순수한 핏줄을 더럽히는 동시에 무슬림 여성을 성노예로 만들어 종교적 신앙까지 파괴하는 최악의 전쟁범죄를 조직적으로, 그리고 계획적으로 실시했다. 한국어 위키백과[2]

특히 1995년 스레브레니차 학살의 잔악성은 극에 달했다. 구글 또는 관련 자료에 대해 조회해 보면 그 잔학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굴삭기로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수많은 무슬림 남성들을 죽인 뒤 묻어버리거나 했는데 이러한 구덩이들이 너무 많고 그 위치도 정확하지 않아 수치가 정확히 계산되지 않을 정도이다.


라드코 믈라디치, 학살의 주범

원래 스레브레니차는 보스니아 무슬림 민병대가 조직되어 세르비아계들을 축출하고 자위권을 행사하고 있던 도시였는데, UN은 이곳을 안전지대로 선포하며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에 민병대를 무장해제시켰다. 이에 믈라디치는 스레브레니차의 방어력이 형편없는 점을 노리고 공격을 감행했다. 스레브레니차에 주둔한 네덜란드 평화 유지군은 안전지대에 공격이 가해지자 폭격을 요청했으나 기각되었고, 기세가 오른 세르비아 군대는 네덜란드 평화 유지군을 포격했으며 결국 평화유지군 병사들은 항복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도 NATO는 관망할 따름이었다. 당시의 UN에는 이러한 내전 형태의 전쟁에 개입할 만한 규정상의 권한이 없었다. 최소한의 치안 유지를 위해 평화유지군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내정간섭이었던 것. 도시를 점령한 믈라디치는 무슬림 아녀자들을 상대로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선전을 했으며 실제로 여자와 아이들은 생명만은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믈라디치는 남성들까지 지켜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 8,400명에 달하는 무슬림 남성들이 네덜란드 평화 유지군의 눈앞에서 살해당했다. 뿐만 아니라, 무슬림 여성에 대한 집단 강간을 벌였다. 스레브레니차는 UN이 "안전지대"로 선포한 드리나 강 동안의 3대 도시 중 하나였다. 나머지 두 도시는 제파와 고라주데로 이 중에 고라주데만이 유일하게 함락되지 않았으나 세르비아 민병대의 맹렬한 공격으로 수백명의 민간인이 포격으로 죽었으며 전 세계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드리나 강 서안의 안전지대로는 비하치, 사라예보가 있었다. 하지만 그 두 지역은 함락은 면했을지언정 역시 포격으로 피바다가 되었다. 사실 말이 안전지대였지 이미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UN이 지정한 안전지대를 '실내사격장'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당시 네덜란드군은 150여명 정도의 경무장 소부대였으므로 사실상 처음부터 세르비아군 대부대를 저지할 힘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도 끔찍했다. 이 때문에 2014년 네덜란드 민사법원에서 스레브레니차 학살에 네덜란드 정부의 책임이 있으며 희생자들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기사 링크

애초에 스르프스카 공화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영토의 50% 가까이를 차지했으며, 사라예보 역시 바로 국경에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르비아계의 우세 아래 이들의 전쟁 범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세르비아군의 90%가 전쟁범죄에 가담했다는 CIA의 추정이 있다. 인종 청소는 보통 이들이 점령한 동보스니아 지역에서 일어났으며, 대부분 피해자는 스르프스카 공화국 내 인구 비율이 높았던 보스니아 인이었다. 유엔군과 NATO군이 파견된 95년까지 이 지역은 사실상 방치된 상황이었다. 드리나 강 서쪽의 피해도 막심해서 수도 사라예보에서만 시민 1만 2천명이 세르비아인들의 공격으로 살해되었다. 당시 스르프스카 공화국군은 보스니아 시민이 세르비아계든, 보스니아계든, 크로아티아계든 가리지 않고 무조건 학살했다. 참고로 저 수치는 민간인만 집계한 것이 저 정도다. 보스니아군 사망자는 6천여 명. 오늘날까지 사라예보는 포위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오늘날 인구는 전쟁 전 인구의 60% 수준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라예보의 경우는 밀수꾼까지 자발적으로 봉사하여 시내에 보급품을 전달했을 정도로 보스니아 정부의 방위의지가 필사적이었다. 결국 끝까지 지켜낸다.

보스니아인들의 고초가 어찌나 심했는지를 다룬 서적으론 조 사코의 만화 고라즈데가 있다. 거기서 인터뷰한 인물들의 발언이 의미심장하다. 상당수는 인터뷰를 아예 거절했고 간신히 섭외한 어느 여인은 조 사코가 인터뷰를 시도하자 머뭇거리더니 "다 말해줄 수는 없수. 눈이 뽑힌 사람들을 봤지."라고 말하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비셰그라드 학살을 목격한 노인은 세르비아 민병대가 여자와 아이들도 죽였냐고 묻는 조 사코의 질문에 "그렇게 당연한 것을 왜 묻소?"라고 코웃음을 쳤다.

보스니아에서 자행된 학살에서 한 가지 끔찍한 점은, 전혀 낯모르는 민병대들이 몰려와서 학살을 자행한 것이 아니라 어제까지만 해도 친구였고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돌변하여 군복을 입고 나타난 다음에 같이 술을 마시고 밥을 먹고 공부를 하고 파티를 하던 사람들에게 총칼질을 해대며 죽이고 약탈하고 강간해서 임신시켜 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계 주민들도 엄청나게 학살 당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친구이자 이웃이었던 사람들을 죽일 수가 없어서 결국 그들도 친구이자 이웃들과 함께 구덩이에 들어가고 말았다.

한편으론 전혀 예측이 불가능했던 건 또 아니었다. 무슬림계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와 세르비아계의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의 정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분위기가 차츰 살벌해졌고, 서로 친했던 무슬림과 세르비아계 이웃들은 이미 한 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았으며 인사를 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세르비아계들은 과거 우스탸샤 정권에 의해 학살당한 경험이 있어 피해의식이 강했고 "너희 무슬림과 크로아티아 새끼들이 우릴 다 죽이고 너희들만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고 있지?"란 말을 공공연히 했다고 한다.

학살의 생존자들은 자신들에게 총을 쏘고 칼로 목을 따던 학살자들의 직업, 이름, 취미까지 죄다 다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일부 세르비아 민병대는 최대한 자신들의 무슬림계와 크로아티아계 지인을 보호하려고 애를 썼고 어떤 세르비아계들은 보스니아 공화국에 여전히 충성을 바쳤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가령 세르비아계에 의한 보스니아 포위전 당시 50대 후반의 노구를 이끌고 보스니아 공화국에 충성을 바친 요반 디브야크(Jovan Divjak, 1993~1997년 동안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군 부사령관) 장군도 있다. 그래서 당연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들이 1순위로 제일 먼저 처형당했다. 민족의 반역자라는 이유로.

위와 같은 인종청소가 서방세계에는 민족갈등에 의해 표출된 것이라고 표현하지만, 종교적인 이유도 강했다. 전술한 것과 같이 보스니아에는 무슬림이 많이 살았으며 이들은 대부분 중산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와 달리 보스니아에서의 세르비아계(동방정교회)는 저소득층이 많았다. 스레브레나차는 안전지대로 설정하여 민병대의 무장해제를 UN이 시키고, 그리고 서방측이 위와 같은 인종학살에 대한 언급이 과거 나치 독일의 범죄와 같은 궤로 두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종교적인 이유에 있다. 세르비아계의 동방정교회라 하여도 결국 서방측의 기독교계열의 종교인 반면에 보스니아계는 대부분 무슬림이었다. 서방측과 UN의 유고내전 초기의 미적지근한 반응도 이로 인한 것이었다. 서방측은 본래 구성원인 무슬림 지도층으로 이루어진 보스니아 내각보다는 동방정교회로 이루어진 기독교 기반의 친서방 내각이 구성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계는 실질적으로 서방측의 푸쉬를 받았다. 군사적으로 완벽하게 무장된 세르비아에 대한 제제가 거의 없었다. 반면 보스니아계는 서방측에게 묶인뒤 일방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고 늦게나마 보스니아계 무슬림에 대하여 사우디아라비아등의 무슬림 국가들이 지원을 해주려 했으나 이미 시기를 놓친 상황이었다.[3]

2.3 전황이 뒤집히다

전쟁이 시작되자, 1992년부터 미국, 영국 등 서방세계 NATO 가입국의 주도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신 유고연방 세르비아 공화국에 대한 단계적인 제재가 가해졌다. 신 유고 연방에 경제적 제재와 무역 금수 조치가 단행되었고, 심지어 국제연합에서도 신 유고연방의 회원국 자격을 박탈하면서 세르비아를 비롯한 신 유고연방은 국제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외교적인 차질과는 별개로, 당시 서방이 가했던 세르비아에 대한 경제 제재와 금수조치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세르비아와 인접한 주변 동유럽 국가들이 밀수, 밀거래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내전 당시 세르비아가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등지에서 자행하는 전쟁범죄와 학살 행위를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르비아 애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경제 봉쇄로 압력을 가하는 대신 외교적으로 전쟁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서방의 경제적 제재를 반대하는 등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 심지어는 자기네들도 이웃나라랑 무역을 안 하면 먹고 살기 힘들다면서 세르비아 상대로 벌어지는 밀무역을 어느 정도 용인했다.[4] 이런 상황에서 결국 미국을 중심으로 UN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으나, 이들은 애초에 현장 관리만 맡는 소규모 군대였고 세르비아계 입장에서는 직접 공격만 안 하면 상관없었기 때문에 내전의 종결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세르비아 민병대 사령관이던 소위 '슈퍼 장군' 라드코 믈라디치는 고라즈데, 사라예보, 비하치 세 도시만 점령하면 이제 전쟁은 끝이라고 호언장담하면서 승리를 확신했으며 실제로 보스니아 공화국의 운명은 무척 위태로웠다.

세르비아계의 테러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라예보세르비아의 수도로 잘못 인식되기도 했는데, 사라예보는 1461년 도시가 세워진 이래 쭉 보스니아 소속이자 주도였고 예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 내였다. 그런데 첫소리와 글자 수가 비슷해서 그런 것인지 사라예보와 세르비아를 연관지어 기억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세르비아의 수도는 베오그라드다.

1995년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사라예보 시장을 폭격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반전되었다. 평화로운 일요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의 번화가 시장에 대한 세르비아계의 포격으로 수많은 무고한 시민이 학살당한 이 사건 때문에 국제적 여론이 완전히 돌아섰던 것이다. 사라예보는 당시 양측의 경계였고, 전쟁 중 우세한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지역에 포위되어 있었으나 수도라는 등의 이유로 전쟁 위협에서 벗어나 방치되고 있었는데 이것이 깨지게 된 것이다.

우세한 여론을 등에 업고, NATO가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으로 명명된 세르비아계에 대한 전면 공습을 개시했다. 8월 경에 시작된 NATO 소속 항공기들은 사라예보 일대에 배치된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야포 진지와 물자 집적소, 통신시설을 집중 폭격했으며 세르비아계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핵심 시설도 덩달아 폭격의 대상이 되어 이로서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진격은 저지당했다. 정작 폭격의 효과는 미미했다고 하지만, NATO가 이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제대로 천명한 셈이었다. 이에 세르비아계는 매우 당황하기 시작했다. 사실 폭격 자체는 이전에도 있었으나 고작 6발밖에 안 투하하는 등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세르비아계의 수장 라도반 카라지치가 이제 미국놈들에게 보여 줄 예의는 없다고 선포하며 반발심만 커지게 만드는 등 악효과만 끼쳤다. 여기에 세르비아 민병대가 2대의 NATO 항공기를 격추하면서 사기만 잔뜩 올려주고 말았으나, 다시 대규모 폭격을 가하면서 이를 완전히 뒤집은 셈이다.

라드코 믈라디치 장군은 UN군 포로들을 전략 거점에 묶어서 인간 방패로 삼았고 프랑스 평화유지군 사령관이자 UN군 사령관 베르나르 잔비엘 장군에게 '폭격을 계속하면 보스니아 민간인들과 UN군 포로들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으나, 이미 여론은 세르비아에 불리하게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영국군 평화유지군 사령관 로즈 장군은 학살이 없었다고 주장했으며 지렛대만 있으면 어린아이들도 전차를 저지할 수 있다느니, 보스니아인들이 엄살을 부린다고(...) 주장했다가 빈축을 사기도 했다. 대전차 전략 수준이 북한군 수준이시네, 과연 기행의 나라

거기에 이웃한 크로아티아 공화국 영내에서는 미국의 후원으로 재정비된 크로아티아 공화국군의 '폭풍' 작전이 시작되었다. 크로아티아에 대해서는 미국 정부의 직접적 개입이 힘들었는데, 그래서 미 국무부는 크로아티아군에게 미국 민간 군사업체를 알선해 주었고 이를 통해 크로아티아 군대의 훈련을 MPRI라는 업체가 맡게 되었다. 상당수가 미군의 전직 고위 장성 출신들이었으며 이들의 훈련을 통해 크로아티아군은 NATO의 교리 체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크로아티아군은 이렇게 재정비를 했음에도 여전히 형편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전이 가능했던 것은, 적인 세르비아계 병사들도 세르비아 정부군이 전면 개입을 꺼리는 상황에서 주로 크라이나 공화국군과 의용병만으로 구성되어 전력면에서 나을 게 없었던 데다 보스니아에 너무 쏟아부은 나머지 크로아티아 전선에 상대적으로 소홀해졌기 때문으로, 이를 통해 크로아티아 공화국을 점령하고 있었던 세르비아계 크라이나 공화국은 붕괴되었다. 나머지 잔당은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지역으로 도망쳤다.

이어서 미국 특사가 세르비아를 후원하던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을 만나 압력을 넣으면서 전쟁이 수습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옐친은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에게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후원하지 말라고 경고했으며,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계 민병대 지도자에게 더 이상의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회담에 응하라고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을 '기만자'라고 맹렬히 비난하며 세르비아 편을 들었으나, 사라예보와 고라즈데에서 벌어진 참상으로 인해 반전된 여론에 밀려 세르비아에게 등을 돌렸고 세르비아인들은 최소한의 인도적 한계도 지키고 있지 않다며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2.4 내전이 끝나다

결국 1995년 12월 14일, 미국 오하이오 주 데이튼에서 역사적인 데이튼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계승되어 독립국으로써 인정되었으나, 각각 영토를 절반씩 차지한 세르비아계 스르프스카 공화국과 크로아티아-무슬림 연합의 두 세력이 한 연방 내에서 공존하는 식으로 합의되었다. 대통령직은 세 민족이 돌아가며 맡게 된다는 협정 내용은 결국 갈등의 근본 원인인 민족 분쟁의 씨앗을 제거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후 1996년 3월부터 사라예보에서 스르프스카 공화국군이 철수하였다. 이를 관리 감독하기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는 UN 감시이행군과 러시아군이 공동으로 주둔하게 되었다. 러시아군이 별도로 추가된 것은 세르비아계의 요청으로, 협정상 보장에 따라서 러시아군이 세르비아계의 이익을 대변하게 된 것.

다행히 2016년 현재까지는 큰 탈이 없지만 언제 타오를지 모르는 불안한 불씨가 남겨진 셈으로, 주변국들의 EU 가입이 미뤄지거나 아예 고려되지 않는 이유가 되었다.

이 내전은 제1차 세계대전과 비슷한 면이 있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지역의 민족 분쟁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점,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벌어진 테러가 전면적인 국제전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점, 세르비아 뒤에 범슬라브주의의 대부를 자처하는 러시아가 있었다는 점 등이다. 결국 발칸반도는 세계의 화약고가 맞다 냉전 시기였다면 세계대전까지 내다볼 수 있었던 상황인데, 다행히 1990년대의 국제정세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약화가 명확하던 시기였고 결국 유일 최강국이었던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의 강경한 입장에 밀려 러시아가 개입을 포기하게 되면서 더 큰 전쟁으로 번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평가에 대한 반론도 많다. 유고 내전 당시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 경제적,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무리한 개입이 쉽지 않았으며, 개입했다면 전쟁은 빠르게 종결되었을 것이기에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 밑에서 인종청소와 같은 범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다. 또한 러시아가 개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서방측은 유고 내전을 최소화시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경제적 이유로 인하여 이를 관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내전이 심화되는 와중에도 서방측이 안이하게 행동하면서 그 피해를 더 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보스니아에서 인종청소가 벌어진 이면에는 무슬림 정권을 축출해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방관만 하고 있었던 서방세력의 태도가 자리잡고 있었음이 분명한 사실이다. 서방도 이 전쟁에 대해 큰소리 칠 입장은 결코 되지 못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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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의 민족 구성. 두 공화국의 경계로 민족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경계 너머 세르비아계의 대대적인 민족 이동이 수반되었고, 전쟁 중 심각한 피해를 입은 보스니아계 지역은 일부만이 회복되었다.

이 참담한 전쟁에서 보스니아에서는 3만 명이 넘는 군인과 이에 비슷한 수치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으며, 세르비아도 2만 명의 군인(주로 세르비아계 의용병과 스르프스카군)과 4천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크로아티아 역시 5천 명의 군인과 2천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실제 사망자는 앞 수치들의 도합인 9만여 명보다 1~2만 명 정도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상자나 난민은 물론 그보다 훨씬 많았다. 무려 22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 직전 인구는 435만 명이었는데, 현재는 402만 명으로 줄었으니 난민의 규모와 전쟁의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민간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전쟁의 생존자가 작성한 글을 읽어보면, 얼마나 피폐하게 버텼는지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 그나마 국제 사회의 적극적인 지원과 더불어 제노사이드가 조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애초에 인구도 얼마 없는 동네라는 점 덕분에 아프리카 지역처럼 백만 단위에 이르는 대규모 사망자가 쏟아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스포츠 부분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올림픽이나 FIFA 월드컵, 유니버시아드 대회 등 각종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 경기 출전 금지령까지 내려졌던 것. 과거 냉전 시기 동유럽의 스포츠 강국이었던 유고슬라비아는 보스니아 내전으로 인해 세계 운동경기에서 존재감이 사라지게 된다. 전쟁의 장기화와 유고 연방의 분리로 국가대표 선수들의 혼란 또한 당연히 발생됐다. 유고 연방 분리로 국가대표 각 선수들은 독립한 자신의 모국으로 국적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구 유고슬라비아 시절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던 축구, 수구, 테니스 등의 전력이 급감하게 된다. 가장 유명한 사례로 유로 1992를 들 수 있다. 당시 UEFA유고슬라비아의 유로 대회 출전을 박탈했고, 그 자리를 대신한 덴마크유로 1992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아예 국가대표급 테니스 선수 중 모니카 셀레스슬로보단 지보이노비치같은 선수들은 미국 등 국외로 망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출신으로 유명한 축구 선수인 에딘 제코 역시 보스니아 내전을 눈앞에서 경험하였다.

3 매체에서

팔레스타인을 그려 유명해진 만화가 조 사코가 그린 안전지대 고라즈데카라쥐치의 크리스마스가 보스니아 내전을 다루고 있다.

제프 롱의 소설 디센트(소설)의 주인공 일라이어스 브랜치가 보스니아에 주둔한 유엔군 출신이다.

한국에서 코메디 영화로 선전되어 쫄딱 망했던 비운의 걸작 노맨스랜드[5]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그르바비차가 보스니아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

GTA 4의 주인공인 니코 벨릭이 이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대량 학살과 신체 절단 같은 수많은 잔학 행위 를 목격했고 직접 행하였는데, 이로 인해 정신적 고통과 극심한 우울에 시달리며 인생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스티븐 갤러웨이 作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역시 보스니아 내전 당시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다.

영화 에너미 라인스는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해 격추됐던 미 공군의 스콧 오그래디 대위의 실화를 다룬 영화이다.

보스니아 내전이 한창이던 1994년에는 멀리 떨어진 르완다에서 대학살극이 벌어졌다. 이를 이용해서 보스니아 내전과 르완다 내전을 다룬 창작물에서는 각각의 사건을 창작물 내에서 따로 언급할 때가 있다. 가령 르완다 내전을 다룬 영화 호텔 르완다는 보스니아에서 학살극이 자행되었다는 뉴스 장면이 나오며, 보스니아 내전을 다룬 노 맨스 랜드에선 등장인물들이 '르완다에서 무슨 일이 났나봐.'라고 언급하는 식.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설 '안녕 요정'에서는 중요하게 다뤄진다.

4 관련 문서

  1. 처음에는 SAO 보산스카 크라이나, SAO 헤르체고비나, SAO 로마니아 등 SAO(사라예보 자치주)로 독립했으나 이후 스르프스카 공화국으로 통합된다.
  2.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 문서를 보는 것이 추천한다.
  3. 다만 소총 한자루만 가지고 개인적으로 밀입국해 들어와 '성전'을 치루는 무슬림은 꽤 있었다.
  4. 다만 아예 이해가 안갔던건 아닌게 당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경제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지하경제가 크게 성행하고 있었고 중앙정부에서 지하경제 융성에 대해 단속조차 못하던판이기는 했다.
  5.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까지 수상한 작품인데, 어째 미국에서도 코미디 영화로 선전되었다(...)
  6. 실제 보스니아 내전이 종식된 후 내전에서 살아남은 한 생존자에게 "도심 SHIFT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해야했는가"라는 주제로 질문을 했었는데 그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게임이다. 이 게임을 해보는 것 만으로도 보스니아 내전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대충이다. 실제 내전은 이보다 훨씬 처참했다.
  7. 훗날 밈으로 되버린(...) 뽕짝 거리는 노래가 이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