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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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安羅國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일원에 위치했던, 일명 아라가야로 알려져 있던 가야연맹의 일원이다.

2 국가명

일반적으로 아라가야라고 불리고 있으나, XX가야란 이름은 고려 태조 왕건후삼국시대를 통일한 이후 행정 제도를 개편하면서 가야라는 명칭을 붙이면서 이후 XX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했기에 그 당시 불리던 정식 국명이 아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이며, 《호태왕비문》과 《일본서기》에는 안라(安羅)로서 등장한다. (호태왕비의 안라인수병 구절을 안라국으로 파악한다면)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선 《가락국기》를 인용해서 아시량국(阿尸良國)이라 기록했다. 그 외에 아나가야(阿那加耶), 아야가야(阿耶伽耶) 등 비슷한 여러가지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고유어/지명문서에서 아라가야를 찾아보자.

3 역사

교육과정에는 전기 가야의 맹주 금관가야, 후기 가야의 맹주 대가야 식으로 가르쳐서 나머지 가야 중 하나 정도로 잘 부각되지 않지만 김해의 금관국이 쇠퇴한 이후 고령의 대가야, 고성과 산청의 소가야 연맹과 함께 후기 가야연맹의 주축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금관국과 함께 독자적인 호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라고 적고 있지만 고고학적으로는 그 시기 함안에 아무런 흔적이 없기 때문에 안 그래도 힘든 가야사 복원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후기 가야 제국(諸國)에서도 대가야와 더불어 높은 위세를 보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영역은 함안을 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여 안라국이 어떻게 가야 지방에서 주요 국가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도 해명해야 할 과제. 안라국이 초기에는 마산시 진동면 지역에 있다가 점차 함안으로 중심지가 이동했다고 보아 고고학과 문헌 기록 사이의 불일치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김세기 (2012), 아라가야의 성립기반과 영역의 변천)

먼저 '변한'과 '가야'가 고고학적으로 그 역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1 전기가야(3세기 후엽~4세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금관국과 함께 독자적인 호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함안의 중심고분군인 말이산 고분군에서는 5세기 이전 분묘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전기 가야에서 아라가야가 어떤 위상이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4세기대 조업한 것이 확실한 우거리 토기가마요지에서는 아라가야의 특징적인 도질토기 문화가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있으며, 황사리 등 함안의 주변 지역에서 이 우거리요지에서 출토된 양식의 토기들이 출토된다.

함안양식 도질토기는 금관가야와 비슷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구분된다.

원삼국시대 토기인 와질토기에서 도질화(경질화)되는 단경호류에 성형시 승문타날이 가해지고 일정한 간격으로 침선을 돌려 돗자리문양(승석문)이 전면에 베풀어지며 양쪽에 귀가 붙어 있다. 또한 기벽이 대단히 얇으며 구연부나 동체부가 대칭적인데다가 아래에는 토기 종류나 장인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시문한 '기호'인 '도부호'가 그려져 있다. 이 기종을 승석문양이부호라고 부르며 아라가야 양식의 특징적인 토기로 본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아무런 조형적인 특징이랄게 없는 단경호인데도 '아! 함안토기다!'라면서 구분이 될 정도이다.

또한 고배는 '工'자 모양의 대각에 삼각형 투공(투창이 아니다!) 뚫린 무개고배가 있으며 이는 단각에 외절구연의 접시가 붙은 금관가야의 이른바 '외절구연고배'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또 파수부가 묻지 않은 노형기대도 금관가야와 구분된다.

이 토기들은 당대 경쟁국가인 금관가야의 대성동 고분군에서도 출토되며, 낙동강 건너 복천동은 물론 대구, 칠곡, 그리고 진한의 유력국이었던 사로국(후에 신라)의 고분군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넓은 지역에서 출토된다.

특히 아라가야 양식의 단경호는 4세기 후엽 대구 신당동 요지에서도 모방품이 제작되었는데, 전체적으로 형태는 비슷하지만 기벽이 두껍고 타날 간격에서 차이가 관찰되며 결정적으로 도부호가 시문되지 않은 점이 큰 차이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함안양식 토기들이 단순히 영남지역 전체로 운반되어 부장된 것 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도질토기 생산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금관가야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외절구연고배를 비롯한 파수부노형기대, 단경호 등이 진영분지,창원,고김해만,부산 동래지역 등에서만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것과 대비된다. 즉, 금관가야의 특징적인 양식은 금관가야 권역안에서만 유통된 반면, 아라가야 양식의 토기들은 부산, 김해를 비롯한 경주, 대구, 칠곡 등 범 영남지역에 전체적으로 유통된다. 심지어는 남해안 지역을 따라 영산강유역의 호남지역과 일본열도에서도 반출된다.

이상 서술하 바가 의미하는 것은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안라국은 구야국(금관가야)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당대의 최첨단 기술인 도질토기 제조기술과 생산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 뿐만 아니라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발달된 성형기법을 보유하여 이미 4세기 전반대에 기벽이 대단히 얇은 양질의 도질 단경호를 생산하 * 독특한 스타일의 토기 기종군들도 보유하고 있다.
  • 또 안라국의 토기는 금관가야나 사로국과 같은 유력국을 포함한 영남지역의 여타 소국의 지배계층의 분묘에 부장될 뿐만 아니라, 그곳의 도질토기 생산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 고로 3세기~4세기의 아라가야의 위상은 금관가야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다만, 금관가야는 자기 양식의 토기들이 철저히 자기 권역내에서만 출토되는데 반해 아라가야의 토기들은 광범위하게 분포하면서 모방품 생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생산과 관련된 제 기술 및 기술자뿐만 유통망까지도 제어할 수 있는 권력이 금관가야에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되는 점에서 금관가야가 아라가야 보다는 위상이 좀 더 높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아라가야의 위상은 변한의 국가 중 금관국과 함께 유이하게 마한 왕의 우대를 받은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위상을 가진 국가였기 떄문에 금관가야와 경쟁하던 신라는 그를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아라가야와 긴밀히 교류한 것으로 보이며, 4세기 포상팔국의 공격으로 부터 신라의 지원군을 받는 등의 사실도 그를 방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함안 아라가야의 중심 고분군인 말이산 고분군에서의 3~4세기에 해당하는 고분의 조사사례가 없는 것이 연구에 어려움을 겪게 한다. 말이산 고분군에서 5세기 이전 분묘의 조사가 절실히 요망된다고 하겠다.

3.2 후기(5세기~6세기 중엽)

위에서 언급한 함안 아라가야의 중심 고분군인 말이산 고분군에서 현재 조사된 고분은 대부분 5세기 이후의 고분이다(도항리(문)35호 등 4세기 후엽의 고분이 일부 조사되긴 했다). 이 5세기대 아라가야 고분은 다른 영남지역과 마찬가지로 고대한 봉토를 축조하는데, 이는 이전 시기 목곽묘와는 현저히 다른 전통이다. 즉, 단순히 매장과 재례에서 그치던 무덤의 기능이 보다 가시적인 효과가 영속적으로 지속되는 지역집단의 랜드마크 형태로 분묘가 변했음을 의미힌다. 영남지역에서는 5세기 영남지역의 패자라 할 수 있는 경주를 정점으로 대규모의 고분들이 각 지역에 등장한다(이를 고총이라 부르며 이전 시기 고분과 구분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특히 함안 아라가야의 고총군 가야지역이라 할 수 있는 낙동강 이서 지역에서는 후기가야의 맹주인 대가야 다음 가는 규모와 크기를 자랑한다. 다만 매장주체부의 변화는 더딘 편이어서 다른 지역보다 늦게 석곽을 채용하는 것도 특징이다. 이러한 도항리 고분군의 위상에서 대가야 다음가는 후기가야의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전기에는 금관가야에 밀리고 후기에는 대가야에 밀리고 ㅜ.ㅜ 콩가야?)

다만 이전시기 큰 특징이었던 아라가야양식의 토기는 그 양식이 이전 시기와는 구별되면서도 분포 범위는 축소되어 주목된다.

5세기 아라가야양식의 고배는 4세기 아라가야의 특징적인 형식이었던 '工'자형 대각의 폭이 넓어지며, 화염 문양의 투창이 뚫린다. 이전시기의 아라가야의 특징적인 토기라 할 수 있는 양이부승석문호도 입구가 C자형으로 부드럽게 외반하면서 양 귀가 없어진다(내귀!!! ㅜㅠㅜ). 또 장식성이 높은 고사리 모양의 손잡이들이 부착된 통형기대라던지, 마찬가지로 고사리가 가운데 붙은 각배 등 조형미가 뛰어난 토기들이 여전히 제작된다.

다만 그 분포 범위는 그야말로 '범영남지역'에 분포하던 이전 시기와는 달리 함안분지내로 축소된다. 이렇듯 토기 분포양상만 보면 이전 시기보다 훨씬 쇠퇴하였다고 해석되어도 무방할 정도인데, 그렇지 않다.

이전 시기 가야 중 유력국인 금관가야 토기가 부산-김해-창원-진영 외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것은 독자적인 생산체계뿐만 아니라 유통망까지도 제어할 수 있었던 권력이나 시스템이 존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같은 시기 광역분포망과 비슷한 수준의 제작기술과 체계를 갖추고 있던 아라가야보다 금관가야의 시스템이나 권력이 보다 우월했다고 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시기 함안 아라가야는 이전 시기 금관가야가 그랬듯이 독자적인 토기 제작기술과 양식을 보유하면서, 그 유통까지도 제어할 수 있는 단계로 올라선 것이다. 이를 통해 4세기 아라가야보다 5세기 아라가야가 좀 더 발전된 국가 체계를 보여준다고 보기도 한다(박승규 2010 외). 이와 함께 상당한 규모의 고총군과 그 규모에서도 대가야만큼은 아니지만 전 시기 금관가야를 초월하는 국가로 보기도 한다(비록 토기 권역은 좁아졌을지언정...)

다만 고총 내에서 출토되는 마구나 무기류들은 신라산과 대가야산이 섞여 있는데, 특히 신라산이 우월하다. 역시 신라지역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합천 다라국에서 대가야 양식 토기와 무기류, 장신구류가 신라산과 경쟁하는데 반해, 다라국보다 좀 더 낙동강 서쪽에 위치한 아라가야에서 신라산 무기류나 마구류가 많은 것은 다소 의외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아라가야가 대가야나 소가야등 여타 가야국과 경쟁하면서 낙동강 동안의 패자 신라와 친선 관계를 맺은 결과로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는 독자적인 양식의 뮈기나 마구의 생산(생산을 안해다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의 양식이 없을 뿐이지...), 무엇보다 신분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금공품의 부재는 아라가야의 명백한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즉, 화려한 금공품 문화와 장식 마구 등 독자적인 문화를 가졌던 백제, 신라, 그리고 그와 구별되는 금공품과 무기체계를 갖춘 대가야보다는 국가 체계가 덜 잡힌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가야는 5~6세기에도 이전 시기처럼 여타 가야 소국들보다 우월한 지위로 인정 받았는데, 이는 이전 시기부터 내려오던 변한의 우대국의 지위와 함께 국가적으로도 대가야 다음가는 국가체계를 정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리더쉽은 대가야가 백제에 의해 섬진강유역을 상실하고, 이에 대응하여 신라와 결혼동맹 맺었지만 모종의 사태로 동맹이 파탄나는 혼란이 가중되는 520년대, 530년대에 본격화된다. 대가야는 섬진강유역의 상실, 이어서 중요 교역항인 다사진(지금의 경남 하동)을 백제로 부터 상실하고, 이에 대응한 것이 신라와의 결혼동맹인데 이 과정 중에 여러 가야소국들이 불만을 품은 점, 이로 인해 종국적으로 결혼동맹이 파기되고 신라가 금관가야를 멸망시키고 낙동강 서안 지역으로의 침략을 노골화하면서 여타 가야소국들은 대가야보다는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대응하게 된다. 그것이 고당회의와 웅진회의, 제1차, 제2차 사비회의로 묘사되는데 여타 가야소국들은 안라국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에 대해서 일본서기에서는 가야 소국들이 안라국을 형님처럼 모신다라고 묘사될 정도이 점에서 가야 말기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안라국도 백제에 의해 반속국화되며, 안라국을 중심으로 이뤄진 외교적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어 탁순국이 신라에 멸망하는 등의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대가야와 달리 안라국의 멸망은 사서에 나오지 않는데, 성산산성 출토 목간으로 보아 대가야 멸망 이전에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

3.3 기타

포상팔국의 난 해석과 관련해서도 초기엔 안라국이 이들 배후에서 금관국을 공격했다는 설이 다수였으나, 2000년대에는 역으로 금관국과 함께 가야 초기를 주도하던 안라국이 포상팔국의 공격대상이었다는 설이 나오고 있다. 4세기 초반의 화염투창고배의 대유행을 이와 연결시켜 포상팔국의 난이 4세기 초에 발생했고 이를 성공적으로 수습하여 세력을 확장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함안에 거대 수혈식 봉분이 조성되는 건 5세기는 되어서이고 최대 영역은 함안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 광개토대왕 남정 이후 함안 말산리 말이산 고분이 축조되면서 크게 발전하고, 나중 반파국(대가야)에 대항하는 가야 남부 일대 국가들의 주축이 되기도 했다. 고고자료로 볼 때 아라가야 유물과 반파국의 유물은 서로 공존하지 않는다. 역으로 소가야 토기와 창녕양식 토기등은 아라가야 토기와 공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이라 완전히 신뢰할수는 없지만 안라회의도 안라국의 주도 하에 개최한 국제회의인 만큼 후기 가야 연맹에서 강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주도하였으나, 점차 신라의 압박이 강해지자 성왕에게 요청해 사비회의를 주선했으나 결렬되고, 생존을 위해 고구려와 손을 잡았으나 고구려군도 독산성 전투에서 나제동맹군에 패배해 이후 백제에 종속됐다가 관산성 전투로 백제가 약해지자 결국은 559년 신라에 항복했고 그 자리에 성산산성이 축조되었다.

통일신라의 행정구역 9주 5소경에서 알 수 있듯 신라는 서라벌(경주시)을 중심으로 전국에 작은 수도 소경을 두었는데, 통일 이전에 함안에는 아시촌(阿尸村) 소경을 설치했다. 尸는 향찰로 ㄹ 받침을 뜻하므로 알촌, 알마을로 위의 안라, 아라와 사실상 같은 이름이다. 통일 이전에는 신라 전국에서 손에 꼽히는 주요 도시였지만 안습하게도 통일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밀려난 듯, 9주 5소경의 5소경에는 들지 못했다.

4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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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서는 전기 후기 금관가야 대가야 이렇게만 가르치기에 금관가야와 대가야에 밀려 인지도가 희미하지만 함안군의 말이산 고분군은 가야 고분 유적 중 최대, 경주시 대릉원에 맞먹는 백 기가 넘는 고분이 발견되었다. 함안군청사 바로 뒤에 있어서 외국인 관광객이나 높으신 분들이 순시하러 들리기도 한다. 소싯적에 여기서 비료푸대 깔고 미끄럼 타다가 군청 직원한테 혼난 아라초등학교 학생들 많을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