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역사

1 해외 고양이사(史)

1.1 도시의 형성과 인간과의 공존

beb7944ff89e9b1e391e56a8d9afb3f5_5o7MGm6vsag6W3lXnP.jpg
2천여년 전 고대 로마 시대 지붕 기와에 새겨진 고양이 발자국. 발자국 자랑
i4996379040.jpg
인류의 역사서에 자취를 남기기도 했다[1]

1만여년 전,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인간이 도시를 형성하기 시작했을 때 무렵, 용기 있는 아프리카 야생 고양이들이 인간의 도시에 창궐하는 쥐 따위의 설치류를 잡아먹기 위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과의 공존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들어온 아프리카 야생 고양이들이 지금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집고양이들의 조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육축용으로나 노동력의 제공 어느 면에서도 쓸모를 느끼지 못한 지역에서는 불길한 동물이라 하여 때려잡거나 먹었다. 그러나 베트남과 같은 곡창지역에서는 나 유해조수를 잡아주는 유익한 짐승으로 여겨졌다. 위에 서술되었듯이 고양이의 가축화는 저장한 곡식을 축내는 쥐를 잡기 위해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에 비해 품종이 적은 이유도 개처럼 다목적으로 사육되지 않고, 오로지 쥐를 잡는 목적으로 사육했기 때문이며, 내버려둬도 쥐를 잘 잡으므로 굳이 육종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인간과 함께 산 것으로 보이는 가장 오래된 고양이는 2001년 키프로스 남동쪽 실로우로캄보스에서 발굴된 무덤에 들어간 고양이 뼈다. 이 지역 고대 유굴을 발굴하던 프랑스 파리 자연사박물관 팀이 발견하여 발굴한 것으로 가장 오래된 사람과 밀접된 고양이 뼈로 인정받는다. 다만, 1살 정도인 어린 고양이이며 순장된 게 아닐까 하는 추정이 나오는데 머리뼈가 약간 금이 가 있기에 누군가가 때려죽인 걸로 추정된다. 물론 사고로 죽었을 가능성도 있기에 순장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아니다.

본격적인 고양이 가축화에 대한 건 역시 이집트가 많다. 위에 키프로스 무덤 발굴 이전에는 4000~5700년전쯤으로 추정된 많은 이집트 무덤에 고양이뼈가 나왔었으며 정성스럽게 매장한 흔적이 많아서 고양이에 대한 대우가 각별한 걸 알 수 있다. 이처럼 고대 이집트는 농업을 하면서 쥐를 잡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고양이를 기를 것을 장려했는데, 고양이가 신의 대리인으로 추앙받기도 했으며, 신의 사자인 파라오를 제외한 누구라도 고양이를 죽이면 사형 당했으며, 고양이를 기르는 가정은 세금 감면 혜택까지 받았다고 한다. 또한 현재 내려오는 고양이(Cat)의 각종 이름은 바스트가 들고 있던 성물 '우자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2] 오죽하면 이집트와 전쟁을 하던 페르시아살아있는 고양이들을 방패에 묶어 진격(...)했던 이야기도 있다. 당연히 이집트군들은 당황했고, 싸움은 참패했다. 그밖에도 적군들이 이집트 성을 공격할 때 산 고양이들을 투석기로 날려 공격하면, 이집트군은 고양이를 잡는 데 열중하여 제대로 싸우지 못하여 패한 적(...)도 있었다. 이후로도 적군들이 이 방법을 쓰자, 이집트는 마지못해 외국인 용병들을 고용했고,당연히 용병들은 고양이가 죽든 말든 공격을 계속했다. 국군 병사들 군복에 김일성 사진을 크게 인쇄해 붙여놓으면 북한군을 무혈 제압할 수 있다는 주장이 떠오른다.

영화 미이라에서 이모텝이 고양이만 보면 기겁하고 달아나는 게 괜히 넣은 게 아니다. 그만큼 이집트에선 존경받아왔고, 아직까지도 이집트에선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서 고양이를 안 건드린다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이다! 이집트에서 몇 해동안 거주한 이가 겪은 일인데[3] 밤중에 음식물이 담긴 쓰레기를 찢는 고양이[4]를 보고 빗자루로 내쫓다가, 이웃들이 고양이도 먹고 살고자 그러는 건데 왜 그러느냐고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나중에 친구들에게 이야길 하자, 고대 시절부터 고양이를 신성시하던 인식이 전해져서 고양이를 박대하지 않는 이집트 사람들이 많으니, 함부로 그들 앞에서 고양이를 때리는 짓 하지 말라고 충고를 했다고 한다.

이런 인식에는 이집트 사람들이 아직도 고대 이집트의 영광을 대단한 자랑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의 영향도 무시못할 것이다.[5] 이집트의 길고양이 보호단체에서도 대놓고 고대 이집트 시절에는 고양이가 대접받았는데 오늘날 길고양이들의 처지는 그렇지 않다는것이 안타깝다는 사실을 앞세울 정도. # 물론,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고양이는 대접받으니 이래저래 복합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다만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가 다 그렇듯 고양이를 학대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카이로에서 수백마리의 고양이를 독살해 문제가 된 적도 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이집트 사람들의 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좋은 편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고대 이집트에선 고양이들의 국외 반출도 금지되어 있었다. 바스테트 같은 고양이 모습을 한 신도 있었을 정도이며,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으면 미라로 만들며 장례식까지 지내줘서, 이집트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고양이 미라도 있다. 지중해 연안에서는 쥐를 잡는 용도로 초기에는 족제비류를 사용했으나, 고양이가 반입되면서 도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유는 족제비류는 체취(體臭)가 심해서[6]라고 한다.[7] 이솝 우화 역시 사실 고양이가 등장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원래 족제비가 등장하는 이야기라고.
물론 고양이 주인을 속인 사기꾼도 그 때부터 생겼나보다

그밖에 유럽에서는 약 2400여년전 걸로 추정되는 고대 그리스 동전에 고양이가 새겨진 게 보기드문 고대 그리스 시대 고양이 존재에 대한 기록이다.

1.2 중세 및 근대 유럽

중세 및 근대 유럽때는 마녀패밀리어라는 인식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된다.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본래 마녀라는 개념은 유럽 사회에서 동네 점쟁이 내지는 무당의 개념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 점쟁이들이 자주 키우는 애완동물이 고양이였는데, 중세 말기부터 근대 시기에 이런 마녀들에 대한 사회적 숙청 작업(마녀사냥)이 시작되면서 고양이까지 쌍으로 이 일에 엮여든 것이다. 때문에 고양이들을 죽이거나 마녀재판에 고양이들을 같이 산채로 불태워 죽이는 일도 꽤 있었다. 여기에서 아홉 개의 목숨이 있다는 이야기가 추가되었고, 나인 라이브즈라는 별명이 붙는 원인이 되었다.[8]

1233년 6월 13일,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Vox in Rama'라는 교황 칙령에서 검은 고양이는 사탄의 분신이라고 하여 고양이 지옥시대가 열렸다. 이것이 기독교가 고양이를 학대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모든 고양이는 아니고 검은 고양이만이다. 원래 교회 가르침대로라면 검은 고양이만 죽여야 하는데, 죽이는 김에 다른색 고양이까지 죽이는 일도 당연히 많았다. 다만 아래 나오듯 교회에서는 다른색 고양이는 귀여워 하던 일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9] 그래서 유럽에서는 1200년대에서 1300년대까지 검은 고양이는 물론이고, 다른색 고양이도 학살당하는 등 고양이 학살이 가장 심했고 그게 흑사병의 원인 중 하나라는 말이 있다. 또한 이런 인식 때문에 고양이가 흑사병을 옮긴다는 오해가 만들어지면서 인식이 더 안좋아지는 악순환까지 일어났다. 물론 이런식으로 고양이를 몰아내는 바람에 오히려 쥐가 늘어나서 흑사병이 더 창궐하는 역효과만 났다. 그러다 14세기부터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고, 유럽 전체가 흑사병으로 사람이 마구 죽어나가 정신없던 통에 차츰차츰 흐지부지 되었다.

1648년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30년전쟁 종전 기념으로 고양이 화형식을 열어 직접 고양이를 불구덩이로 내던져 태워죽이고 잔치를 열었는데 밑에 서술하듯이 루이 14세를 이어 제위한 루이 15세가 고양이를 무척 좋아하던 걸 생각하면 참 기묘하다. 그밖에 1665년 런던에서 흑사병 발병이 고양이 탓이라고 하여 길고양이 20만 마리 이상을 태워죽인 적이 있는데 역시나 쥐가 넘쳐나서 흑사병이 더 창궐하고 만다.[10]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국에서는 새끼 고양이들을 자루에 담아 돌을 넣고 강에 던져 버리는 일도 빈번했다고 한다. 이로 보아 구미(歐美) 쪽에도 고양이를 불길하게 여기는 관념은 존재했던 듯하다. 검은 고양이라는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참고하자. 시대가 앞서긴 하지만, 로빈슨 크루소를 읽어보아도 고양이들이 동굴을 어질러놓고 음식을 훔쳐 먹자 총으로 쏘아 죽이고, 새끼고양이는 물에 넣어 죽이는 장면이 있다.

그 밖에도 '고양이 오르간'이라는 고양이 괴롭히기 악기까지 있었다. 오르간 안에 살아있는 고양이를 묶어두고, 오르간을 연주할 때마다 고양이 몸이나 수염, 꼬리가 당겨졌다. 당연히 고양이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고, 이 고통소리가 악기소리였다고 한다. 또한 중세 유럽인들은 고양이 목숨 내기라는 내기까지 했는데, 고양이 꼬리에 무거운 돌을 매달고 물에 집어넣고 얼마나 견딜 수 있나하는 내기를 즐겨했다. 아주 드물게 사람을 구했다든지 해서 대우받던 일부 고양이[11]도 있었지만, 당시 고양이는 이렇게 실컷 죽여도 되는 존재였다.

고양이 박해 및 학살은 18세기에서도 수가 엄청 줄었어도 종종 벌어졌다. 18세기 영국,프랑스에서도 일부 시골 지역에 마녀재판이 벌어졌는데 사람 대신 고양이를 태워 죽여 액땜을 했다. 물론 이게 알려지자 엄청나게 비난받았는데 에드워드 기번이나 볼테르가 해당 사건들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법적 금지 및 처벌을 주장하던 것도 유명하다. 그리고 마녀재판도 아님에도 고양이를 죽이는 액땜도 많았는데 벨기에 이프르 지역은 5월이면 고양이를 높은 성탑에서 내던져 죽이면 악귀가 물러난다고 하여 많은 고양이가 이렇게 끔살당했다. 놀랍게도 이런 고양이 끔살은 1817년까지 이어졌다가 당시에 동물학대 및 미신에 미쳤다는 비난 속에 고양이를 던지는 게 금지되고 대신 고양이 인형으로 대신하여 지금도 고양이 인형을 내던지는 풍습이 이어지고 있다.

다만 이 시기의 유럽 사회에서도, 고양이는 여전히 나름 메이저한 애완동물이기도 했다. 진짜로 다 때려잡았으면, 박해할 고양이가 애초에 남아있지 않았을테니 곡식을 저장하는 곳에서는 여전히 쥐를 잡기 위하여 고양이를 키웠다. 또한 황당할지도 모르지만 고양이에 대한 대우가 가장 좋은 곳은 오히려 교회였다. 자세히는 교회에 소속된 수도원 등에서는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키웠다는 기록이 무척 많이 남아 있다. 수도원은 자체적으로 농사를 짓고, 서적 필사 또한 수도원과 교회의 주요 과업이었는데 양피지를 쥐가 쏠아버리는 일이 많기 때문에 고양이와 친할 수 밖에 없었다. 1400년대 영국 엑세터 대성당에서는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주급 1페니(물론, 1페니 어치의 먹이로 추정된다)로 고용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을 정도. 특히 수녀원에서는 대접이 아주 좋아서 많은 수녀들이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키웠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다른 동물은 다 안되지만 고양이만은 애완동물로 허용한다는 규칙도 남아 있을 정도 였다.##


(고양이와 실타래로 놀아 주는 수녀 삽화. - 출처:삽화집 The Maastricht Hours 14세기 벨기에)

그 밖에도 웨일스의 국왕이었던 Hywel Dda는 고양이를 죽이는 걸 금지했다던지, 고양이가 쥐로부터 성을 지키는 유머러스한 삽화(14세기)가 남아있다던지 의외로 중세 유럽에서도 무조건 박해받지 않고 애완동물로서 대접받고 살았던 녀석들도 꽤 있었던 듯 하다. 그리고 놀랍게도 16세기까지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선 여신 디아나의 분신으로 고양이를 우대하기도 했다.

훗날 에스파냐 국왕에 오르는 펠리페 2세는 아버지인 카를 5세에게 성경 어디에 고양이가 악마라고 나오지도 않는데, 고양이를 태워 죽이는 게 무슨 기독교 신앙이냐고 반문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말하자면 펠리페 2세는 종교 때문에 영국 및 네덜란드와 전쟁도 하였을 정도의 골수 가톨릭주의자였다. 애비인 카를 5세도 카톨릭 골수주의자로 개신교나 동방정교회같은 다른 종파를 증오했던 인물이던걸 보면 그 애비에 그 아들인 모양....

또한 유럽에서도 고양이로 팔자 펴는 동화가 존재한다. 장화신은 고양이 이야기 이외에도 보통 '위팅턴과 고양이'라고 알려진 이야기로, 가난한 청년 딕 위팅턴이 런던으로 상경하여 한 부잣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는데 숙소에 쥐가 무척 많아 길거리에서 새끼고양이를 사다가 길렀다. 부잣집 주인인 피츠워렌은 무역상으로 상거래를 위해 떠나는 길에 딕의 고양이를 함께 가져갔다. 이후 어느 나라에 도착하여 왕을 배알하였는데 성대한 잔치자리에 쥐가 판을 치가 딕의 고양이를 왕에게 준다. 왕은 고양이 값으로 왕가 재산의 반을 피츠워렌에게 건네주었다. 피츠워렌은 런던으로 돌아와 고양이를 판 돈을 딕에게 건네주고, 딕은 이후 거상이 되어 돈을 많이 벌었으며 피츠워렌의 딸 앨리스와 결혼하고 런던 시장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다만 이 동화는 바로 이슬람권 고양이 동화를 베껴 만든 것이라 1350년대 영국의 실존 인물이자 거상이었던 리처드 위팅턴의 생애와 고양이로 부자가 된 페르시아 고아의 이야기를 동화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후 근대에 접어들면서 고양이는 다시 사람들 곁에서 친근하게 번식했다. 15~17세기의 소위 대항해시대 및 그 이후 근대까지도 배에 타는 쥐를 없애기 위해 고양이를 태웠다. 심지어 북극 탐험선에도 타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게 된다(…).

읽다보면 유럽에서 고양이의 사회적 대우가 상당히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라는 느낌이 들 수 있는데, 사실 이는 딱히 유럽에 국한된 문제도 아니고 고양이에만 해당하는 문제도 아니다. 동물도 생명이므로 사사로이 죽여서는 안된다는 개념이 형성되지 못했던, 전근대시기의 흔한 야만성 중 하나라고 봐야할 것이다. 당장 도도새의 멸종 이유 중 하나가, 유럽인들이 단지 '재미로' 죽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국의 경우도 서구의 현대적 애완동물 개념이 보급되기 전에는 개나 고양이를 때려죽이는 경우가 흔했다.

1.3 이슬람 문화권과 고양이

이슬람 문화권에선 타 문화권에 비하여 고양이들이 꽤 대우받았다. 이슬람교의 마지막 예언자인 무함마드는 어찌나 고양이를 귀여워했는지 이런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그가 기도하는데, 귀여워하던 고양이 '무에자'가 와서 장난치다가, 어느새 무함마드 옷자락 뒤에 누워 잠을 자버렸다. 기도를 드리느라 미처 몰랐다가 이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된 무함마드는 칼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옷자락을 잘라버리고 무에자를 그대로 자게 놔두었단다. 이 이야기는 어째 중국 전한의 애제가 자기 남자 애인이던 동현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랬다는 이야기랑 똑같다?

하지만 무에자와의 일화는 이슬람 학자들에 의하면 아랍에서 구전되는 이야기일 뿐, 사실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하지만 무함마드가 고양이들을 좋아했으며 고양이의 대접이 이슬람에서 상당히 좋은 것은 사실이다.[12]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록)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우두[13]를 하기 위해 그릇에 물을 받아놓자 고양이가 와서 물을 마시기 시작했고, 무함마드는 그릇을 기울여 고양이가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양이가 떠난 후 그 물로 세정하기 시작하자, 이를 본 동료들은 "왜 짐승이 입을 대서 더러워진 물로 세정을 하려 하십니까?" 라고 묻자 무함마드는 "고양이는 더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친구입니다."고양이도 우리의 친구지예 라고 하였다.

게다가 예배 중 고양이가 주변에 어슬렁거리거나 예배하는 사람 앞을 지나가도 예배는 무효가 되지 않으며,[14] 고양이는 청결한 존재로 간주되어 고양이와 음식을 나누어먹거나 고양이가 먹던 음식을 사람이 먹는 것도(…) 허용된다. 심지어 예배를 보는 모스크 안으로 고양이가 들어와도 막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라 모로코나 튀니지나 터키에 예배를 보는 모스크에 고양이가 마음껏 들어와도 막지 않는다. 한 여행자는 튀니지에 가서 관광객이 들어오는 게 허용된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 편하게 자는 고양이 여러 마리를 보았는데 예배 보던 무슬림은 누구 하나 건드리지도 않았다는 사례를 쓰기도 했다. 심지어 예배보는 무슬림이나 성직자인 이맘에게 가서 놀아달라고 툭툭 쳐도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 국내 터키 관련 책자에서도 앞 표지에 거리에서 카페트를 깔고 예배를 보는 무슬림 앞에 고양이 한마리가 당당하게 걸어가는 사진이 있었다. 이것만 보면 고양이 신에게 예배드리는 모습이라는 제목이 어울릴 정도! 누구 하나 거부감없이 그냥 예배를 했는데 책 내용에서도 고양이를 사랑하는 터키라고 이 이야기를 했다. 만일 예배하는데 사람이 지나가면 버럭거리며 나오라고 할 것이고 개나 다른 동물이라면 마찬가지로 욕하며 내쫓을테지만 오로지 고양이만은 예외라고 한다.

개는 불청결한 존재로 간주되어 애완동물로 키우는 것이 금지되고, 예배당에 들어오거나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으며[15], 특히 검은 개를 보면 피해서 도망가거나 겁을 주어 내쫓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좋은 대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이슬람권 국가의 공항에서는 마약탐지견도 더럽다 하여 사용하지 않으려는 분위기여서, 이슬람권에 마약이 퍼지는 것을 막기 힘들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무함마드의 동료이자, 가장 공신력 있는 하디스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슬람의 대학자 아부 후라이라(Abu Hurairah, أبو هريرة)는 고양이를 아주 사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니, 애초부터 이름인 아부 후라이라(아기고양이들의 아버지)를 보면 그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는 예배당 근처에서 돌아다니는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그들과 어울려 놀며 시간을 보냈다. 이를 본 무함마드와 동료들은 아부 후라이라에게 '고양이들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붙여 불렀는데, 이게 이름으로 완전히 굳어져서, 후에는 아부 후라이라의 진짜 이름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후세의 학자들도 이에 관해 논쟁을 벌였으나 결론은 나지 않고, 아부 후라이라의 진명에 대한 설은 30개에 육박한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주장은 그의 이름이 압드 알라흐만 빈 사흐르 알아즈디(Abd al-Rahman bin Sakhr Al-Azdi)라는 것.

그래서 사람들 중에는 예언자가 귀여워 한 고양이를 일종의 신앙심 차원에서 연결하여 애지중지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물론, 신학자들은 절대로 예언자가 고양이를 우상화한 것이 아니기에, 이는 신앙심과 별개라고 주장하며 불쾌하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신학자들도 우상화를 경계하였을 뿐, 고양이들을 박대하자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이집트 맘루크 왕조 시절, 고양이 보호소나 고양이 수의사들도 양성했으며 우대했다.[16] 당시 유럽에서 흑사병이 퍼져가고 있을 때, 중세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기독교 성직자들이 고양이를 이슬람에 연루하며 박대했다는 주장까지 있다. 아예 바이바르스는 1270년 세계 최초로 고양이 보호소를 만들어서 애지중지했다.이 보호소는 고양이라면 늙어도, 장애가 있어도 털빛깔을 가리지도 않았다.

지금도 이슬람권 국가들의 사람들은 고양이를 무척 아끼며, 이들의 길거리에선 고양이들이 많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으면서 살아간다. 전 세계 여러 유명 대학교들을 찾아가 거기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이야기를 나눈 책을 보면[17] 터키 이스탄불 대학교 학생들에게 '고양이가 발정 나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걸 어찌 생각해?' 하자, '그냥 귀를 막고 알아서 피하면 되지. 그럼 고양이를 구타하는 추악한 짓을 저지르겠다는 거야?' 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다만 오스만 제국에선 검은 고양이가 밤에 지나가는 사람을 지나가면 재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있던 걸 보면, 그들도 검은 고양이는 안 좋게 봤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기록에서 황실 전용 고양이들을 위한 보호소에도 검은 고양이들은 아무 문제없이 살아갔다고 하는 걸 보면, 그 검은 고양이는 '잘 모르는' 검은 고양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4 대항해시대 이후의 쉽 캣(Ship Cat)들

한편, 고양이의 역사를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배를 타던 고양이들, 쉽 캣(Ship's cat)들이다. 대항해시대 이후의 범선들에서는 쥐가 큰 골칫거리였는데, 쥐들이 식량만 훔쳐 먹는 정도라면 그래도 봐줄만 했지만, 돛을 다는 로프를 갉아먹거나 심지어는 선창의 나무를 갉아서 구멍을 내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내버려 두었다가는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라 도저히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범선마다 고양이를 태우고 다녔는데, 골칫덩이인 쥐나 벌레들을 잡아주어 많은 선원들로부터 예쁨을 받았으며, 배의 마스코트적인 존재가 되었다. 미신을 많이 믿던 당시 선원들이었던 만큼 고양이를 다치게 하면 재수가 없다거나, 갑판의 선원에게 먼저 다가갈 경우 행운이 온다는 등의 여러 가지 전설들이 있었다. 또, 고양이에게는 태풍을 부르는 힘이 있어, 고양이가 쓰러지거나 배 밖으로 떨어지면 태풍이 몰려온다는 믿음도 있었다.[18] 이렇게 배의 동료 항해사로서 함께 바다를 누볐던 쉽 캣들은 서양에서 고양이가 나쁜 이미지를 벗는 데에 매우 큰 역할을 했다.[19]

고양이들은 배위에서도 매우 잘 적응했는데, 먹이도 많이 필요하지 않고, 개처럼 행동반경이 넓거나 산책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으며, 원래 깔끔한 생물인 만큼 아무 데나 배설물을 배출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배에는 마스트 같은 고양이가 좋아하는 높은 곳이 매우 많았다. 심지어 많은 배들은 고양이용 해먹을 두고, 거기서 고양이를 재웠을 정도.

범선의 시대에서 기선의 시대로 바뀐 다음에도 전통은 살아있어, 1975년까지 영국 해군에서는 의무적으로 고양이를 태웠다. 현재에도 많은 고양이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어니스트 섀클턴도 인듀어런스에 고양이를 데리고 갔다. 이름은 치피 여사(Mrs.Chippy 그런데 이름과 달리 수컷이었다)였는데 먹을 게 없는 극한 상황에서 섀클턴이 손수 죽여야 했다고 한다. 물론 상황이 그랬지만 어니스트 섀클턴 문서에 나오듯이 이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선원도 있었으니 참고할 것.

수많은 고양이들이 배를 탔던 만큼, 전쟁의 포화도 고양이들에게 예외가 될 수 없어, 많은 고양이들이 배와 함께 차가운 물속에서 그 생명을 다했다. 이와 관련해서도 많은 일화가 남아 있는데, 영국 해군의 HMS 아메티스트의 고양이인 사이먼은 포격을 받고 심하게 부상을 당했음에도 임무(쥐잡이)에 충실하여, 군견처럼 훈장을 받고 명예대우를 받기도 했다.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오스카(Oskar)라는 독일 태생의 고양이는 원래 독일군 전함비스마르크의 쉽캣이었으나, 비스마르크가 침몰하고 판자에 매달려 떠다니던 중 영국 구축함인 HMS 코삭에 구조되어, 오스카라는 이름 대신 샘(Sam) 이라는 이름을 얻고 조국을 배신하고 영국의 쉽캣이 되었다. 이후 HMS 코삭도 어뢰에 맞아 격침되었지만, 다행히 지브롤터 해안에 떠밀려가 살아남아, 이번에는 항공모함인 아크로열로 옮겨 탔다. 그런데 이 아크로열도 몰타에서 귀환하던 중 어뢰에 맞아 격침되지만, 이번에도 살아남아 판자에 매달려 떠다니다, 영국의 HMS 라이트닝에 구조되고, HMS 리전으로 옮겨 탔다가 마침내 육지에 정착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이 고양이가 마지막으로 탔던 HMS 라이트닝과 HMS 리전 역시 1942년과 1943년에 둘 다 격침된다. 2차 세계대전의 수많은 해전에 참가했으면서도 끝내 살아남은 이 전설적인 고양이는 'Unsinkable SAM(침몰하지 않는 샘)' 불침묘 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1955년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생을 마감하며, 아직도 영국의 해양 박물관에는 이 고양이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영문 위키피디아 관련 페이지도 있다. 침몰 플래그 이름은 가라앉지 않는 인데 배가 가라앉는 신묘함 자기는 안 가라앉았으니까 상관없겠지 사실 세계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배가 침몰되지 않는 게 더 신기한 거지 불침묘 샘이라는 위엄돋는 이름에다가, 서식이 군인과 같은 표를 사용해 "복무"라고 명기되어 있고 심지어는 계급에도 "함묘(shipcat)"라고 쓰여 있어서, 위키답지 않게 익살이 느껴지는 부분. 보면 대명사도 It이 아니라 He다(...)

문제는 이런 고양이들이 대항해시대 이후 새롭게 발견되는 섬 등의 지역에 때때로 정착해, 토착 동물들을 멸종시키는 경우가 간간히 있었다는 것. 물론 이는 선박에 딸려나간 쥐 등의 동물들과 정착민들의 문제도 있지만.

배를 타는 쉽캣만이 아니라 비행선을 타는 에어쉽캣도 있었다. 미국의 비행선 아메리카를 타던 '키도'라는 이름의 에어쉽캣이 특히 유명. 이 녀석도 팔자가 좀 기구한데 1910년 첫 비행에서 폭풍을 만나 불시착하는 바람에 영국배인 Trent에 구조되어 영국배를 기릴 겸 Trent로 개명되었다. 특히 아메리카는 처음으로 통신기를 장비한 비행선이라 인간이 비행중 처음으로 지상과 교신한 역사적인 기록을 갖고 있는데.. 그 역사적인 첫번째 교신 내용이 "로이, 와서 이 빌어먹을 고양이 좀 치워!"("Roy, come and get this goddamn cat!") 였다(...)[20]

2 한국 고양이사(史)

한국에서는 산짐승처럼 밤에 눈이 빛나는 것과 처럼 세로로 째진 눈 때문에 요물이라고 기피하기도 했다. 구한말 미공사 알렌(혹은 영국의 비숍부인인지 확인 바람)에 의하면 미 공사관을 찾아온 양반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았는데, 공사관에서 키우던 고양이가 그 양반의 무릎 위로 뛰어올라 자리를 잡고 앉자, 점잖던 양반이 놀라서 그대로 혼절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고양이 생가죽을 팔 아픈 데 붙이면 낫는다는 민간요법이 떠돌았을 정도다. 이는 영조실록에도 언급되어 있는 요법인데, 그것도 어의가 영조에게 건의했을 정도. 그러나 영조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궁궐에서 고양이가 많이 노는 것을 봐 와서인지 그런 건 못할 짓이다."라고 거절했다. 《영조실록》 영조 13년(1737년) 5월 24일 기록에 실려 있다. 흠좀무. 참나 어의가없어서 진료를 못받음

이런 이야기들을 두고 유교 사회였던 조선의 영향으로 한국인들이 고양이를 외국인보다 더 무서워했다는 둥, 고양이에 대한 대우가 더 안 좋다는 등의 이야기가 몇몇 애묘가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는 사실 조선시대나 유교에 대한 지나친 편견이 반영된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고양이 본 문서에도 나온 이야기지만 사람들이 고양이에 대해 미지의 두려움을 가진 것이나 고양이를 꺼림직하게 인식한 것은 딱히 조선 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 곳곳의 전근대사회에서 많이 발견된다.[21] 조선의 기록에는 위 이야기처럼 고양이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도 많았지만 유례 없는 기록덕후 국가인 조선인만큼 오히려 고양이에 대한 긍정적인 설화나 기록, 전설도 많다.(밑에 열거된 세조와 숙종과 관련된 일화도 그렇고) 당장에 조선시대 예술품 중에 고양이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자.당장 숙종시기 도화서 소속 화원이었던 화재 변상벽의 별명이 변묘(卞猫), 즉 변고양이였다! 또한 조선시대 짬타이거는 일반 병사처럼 대접받았다. 즉 조선시대 고양이의 대접은 사람 취향마다 달랐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오늘날과 별 차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담이지만 동양화에서 고양이가 그려지면 그것은 '70 노인'이라는 뜻의 상징으로 쓰인다고도 한다. 고양이를 뜻하는 한자 '묘(猫)'의 발음이 70 노인을 뜻하는 한자 '모(耄)'와 비슷해서라고. 예를 들어 고양이와 나비가 있는 그림은 '70 노인이 80 되도록 사십시오'[22], 고양이와 참새가 있는 그림은 '부모는 70 노인이 되도록, 아들들은 높은 벼슬을 하도록'[23]이라는 뜻이 된다고 한다.

조선과 명나라 장군 사이에서,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있다. 때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직후로서, 조선은 전란으로 많은 장정을 잃었을 뿐 아니라, 남은 장정들 또한 피폐한 농촌을 복구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일을 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8도의 국방력에는 적잖은 공백이 있었다. 때문에 전후복구원조 및 군사원조를 목적으로 명나라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당시 명나라군대를 지휘하고 단속하는 총사령관은 제독 이승훈(李承勛)이었다. 그런데 이 이승훈이라는 자는 꽤나 충실한 집사였는지,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를 묘 유격(猫 遊擊)[24]이라는 애칭으로 불렀으며, 조선땅에까지 고양이를 모시고데리고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이 제독의 고양이 묘 유격이 제독이 거처하던 관사에서 탈영(...)을 해버리고 만다. 평범한 사람의 고양이도 아니고, 당시 조선의 상국, 그것도 상국의 군대를 지휘하던 제독의 고양이가 사라졌으니, 명나라 군대가 주둔하던 마을은 발칵 뒤집히고, 제독 이승훈도 병사들로 하여금 사방팔방으로 고양이를 찾게한다. 그러나 애타게 찾던 고양이를 인근에서는 찾지 못하자, 접반사 황우한을 조르며 달달 볶아 고양이를 찾아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황우한이라고 하여 눈이 4개가 달렸겠는가, 천리를 보았겠는가. 그또한 뾰족한 수가 없었고 결국, 고양이를 찾지 못해 마음이 크게 상해 삐져있던(...) 이승훈은 선조에게 게첩(공문서)을 보내 고양이를 찾아달라고 요청한다. 명나라 제독이 보낸 게첩을 받았으니 선조는 고양이를 찾으라고 세번씩이나 전교하기에 이른다. 아래는 실록의 기록이다.

접반사 황우한이 제독 이승훈이 잃어버린 고양이에 대해 아뢰다

이 제독 접반사 황우한(黃佑漢)이 아뢰기를,

"고양이 한 마리 잃어버린 것 때문에 이 제독(李提督)이 성상에게 게첩(揭帖)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하였는데,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마을의 당부(當部) 서원(書員)을 불러 어르기도 하고 으르기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혹은 하리에게 사실을 말해주고 내외의 방방 곡곡에 널리 수소문하여 찾아보게 하여 거의 찾아낼 수 있는 희망도 가졌었는데, 그 뒤에 시일이 오래되었는데도 찾아서 바치지 못하여 매우 미안했습니다. 이에 우선 아문(衙門)에 가서 사과하려고 하였으나 주 중군(周中軍)이 ‘우리 노야께서 그 고양이를 못잊어 하고 있으니 만약에 찾아낼 수 있는 길이 있으면 며칠 더 있다가 와서 사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므로 도로 물러나왔습니다. 고양이를 찾는 일에 대해 두 번씩이나 전교를 내리셨는데, 사세가 이러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다른 사람의 고양이더라도 오히려 훔쳐서는 안 될 것인데, 더구나 아문이 기르는 것이겠는가. 지붕 위의 까마귀도 사랑하는 것인데 더구나 대인(大人)이 기르는 것이겠는가. 감히 몰래 훔칠 생각으로 숨겨놓고 돌려주지 않거나 혹은 만에 하나 죽이게 된다면 이는 작은 것으로 인하여 큰 것을 보여주는 꼴이 된다. 대인이 우리 나라의 인심을 가리켜 어떻다고 하겠는가. 이 어찌 내가 평소에 겉으로만 대하고 정성으로 대하지 못한 소치가 아니겠는가. 접반사는 맡은 소임이 무엇이길래 이러한 일도 잘 살펴서 조처하지 못하고 대인으로 하여금 게첩까지 하게 한단 말인가. 직무를 충실히 하지 못한 것을 또한 알 수가 있다. 끝내 찾아내 바치지 못한다면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할 것인가."

하였다.

3 역사속의 유명인과 고양이

고양이에 대하여 인식이 크게 달라진 데에는 예술가들이 한몫했다.

오노레 드 발자크찰스 디킨스같은 유명 작가들은 고양이를 애지중지했으며, 디킨스가 아끼던 고양이 미티는 디킨스가 밤늦게 촛불을 켜고 글 쓰면 와서 촛불을 훅 불어서 끄기까지 했다고 한다. 디킨스가 촛불을 다시 켜면 야옹 화내면서 또 꺼버렸고, 어둠 속에서 글을 쓰자 또 야옹거리면서 화냈기에, 마지못해 잠자리에 들면 비로소 얌전하게 곁에서 잠이 들었다. 그래서 디킨스는 글로 '이 고양이 때문에 내가 잠자야겠다, 녀석이 내가 잠 안자는 걸 무척 싫어하는데 내 어찌 녀석의 기분을 거스를 수 있겠나'라는 글까지 썼었다. 디킨스가 남긴 말 "고양이에게 사랑받는 일처럼 즐거운 일은 없다"는 걸 봐도 그가 얼마나 고양이를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프랑스 성직자이자 정치인인 리슐리외 추기경도 고양이를 무척 귀여워했다. 덕분에 그는 개인 취향을 공적인 정치에 반영하여 고양이 학살이나 박대를 상당수 금지하였다. 14마리나 되는 고양이를 키웠으며, 당시에는 더더욱 지금도 진품은 비싸지만 사람 먹기에도 비싼 푸아그라까지 먹게 해줄 정도로 엄청나게 귀여워했다. 유언으로도 고양이들을 맡을 집과 돈, 돌볼 사람까지 다 준비하게 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도 고양이를 아껴서 대신들에게 고양이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덕분에 당시까지도 고양이를 꺼림칙하게 여기던 인식이 크게 타격을 받게 되는데, 국왕이 주는 고양이를 외면할 수도 없거니와, 성직자들도 더 이상 고양이가 악마라는 소릴 삼가게 된다. 그리고 고양이를 선물로 받은 대신은 그걸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위에 서술한 대로 프랑스 일부 지역에서 고양이를 사람 대신 태워 죽이는 마녀재판이 있자 이걸 전해듣은 루이 15세가 격분하여 해당 마을 사람들을 죄다 죽이라고 명령했다가 신하들이 너무 가혹하다고 하여 죽이는 건 참았지만 관련자 일부를 10년~15년 징역형을 내리게 했다. 볼테르는 이걸 무척 찬양했는데 고양이 몇마리 태워죽이고 10년 이상 징역형이라는 엄벌이 기다린다는 소문이 퍼지자 고양이를 태워죽이는 일은 차츰 줄어들게 된다.

루즈벨트나 윈스턴 처칠이 고양이를 무척 좋아했으며, 몽고메리 같은 장군도 고양이를 아꼈다. 특히 처칠은 죽기 전까지, 나이 아흔이 되어가는 늘그막 사진을 보아도 고양이를 안고 다녔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애묘인인데, 그의 교황 취임 당시, LA추기경은 "그분이 고양이를 좋아한다(love)는 소문은 틀렸습니다. 그분은 고양이를 흠모(adore)합니다."라고 증언했다. 그야말로 Cat holic.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고양이는 신이 빚어낸 최고의 걸작품이다'라거나 '고양잇과 동물들 중 가장 작은 그것이야말로 걸작이다'라거나 '가장 작은 고양이조차도 완벽한 예술 작품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다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고양이만을 좋아한 게 아니라 모든 동물을 다 사랑했다.

T. S. 엘리엇은 《노련한 고양이에 대한 늙은 주머니쥐의 책(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이라는 시집을 썼다. 시집 전체가 고양이 이야기. 고양이 이름 짓기 같은 시를 보면 고양이에 대한 애정빠심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저 유명한 뮤지컬 캣츠의 원작이기도 하다.

밀림의 성자로 유명한 슈바이처도 유명한 애묘인. 평소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2가지 방법은 음악과 고양이'라고 말했을 정도.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도 고양이를 좋아해서, 어째서 고양이가 보다 우월한지에 대해 수필도 썼다. 크툴루 신화와 그의 다른 작품들의 고양이들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으며, 고양이를 학대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끔살당한다.[25] 그가 어렸을 때 기르던 고양이인 Nigger Man[26]은 단편 벽 속의 쥐에서 주인공의 애완 고양이로 등장한다. Nigger Man은 1904년에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필립 말로시리즈의 작가인 레이먼드 챈들러 또한 '타키'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20년 가까이 키웠다고 한다.

의 보컬인 프레디 머큐리도 대단한 애묘가이다. 생전에도 많은 고양이를 길렀고 그 중 길고양이도 상단히 많았다. 심지어는 죽었을 때 재산을 그의 전 연인과 가족들,그리고 고양이들한테 준다고 말할 정도였다. 록스피릿 집사

이 외에도 고양이가 주인보다 더 유명한 경우도 있다.F.D.C. 월러드란 고양이. Jack H. Hetherington란 물리학자는 논문을 쓴 뒤, 글을 검토하다가 'I'를 'We'로 쓴 것을 발견했다. 이를 고치기 싫어서[27] 고민한 끝에, 공동 저자 이름에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 이름을 붙여서 논문을 내버린 것. 이 덕분에 월러드는 과학 논문을 쓴 고양이가 되었다. 참고로 월러드는 주인이 붙여준 예명이자 이 고양이의 어미의 이름이었으며, 실제 이름은 체스터(Chester)였다. 이름의 F.D.C. 도 '집고양이 체스터'란 뜻의 Felis Domesticus Chester에서 따온 이름. 논문에 들어가는 서명은 고양이 앞발에 잉크를 묻힌 뒤 발자국을 찍어서 했다고. 나중에는 F.D.C. 월러드의 단독 저작이 대중 과학잡지 La Recherche에 나오기도 했다. 사실은 La Recherche의 기사 방침을 비판하던 한 학자가 가명으로 쓴 장난이었다.
이 외에도 학자들이 논문이나 책을 집필한 뒤 '글을 쓰는 데 도움을 준 인물'에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 등 애완동물의 이름을 올리는 장난을 가끔 치긴 한다.

스펀지에는 고양이 악보[28]라는 게 소개되기도 했는데, 오스트리아의 화가,조각가였던 모리츠 폰 슈빈트(1804~1871, 슈베르트 문서에 나오는 친구)가 음표를 고양이 그림으로 대신하여 만든 악보이다. 스펀지에서 각종 노력을 기울인 끝에 어떻게 연주하는지를 알아내서 연주해보니, 그야말로 한 마리의 고양이가 사뿐사뿐 춤추는 듯한 명곡이 나왔다고.

한국에선 특이하게도, 평민도 아닌 임금 숙종이 고양이 한 마리를 금손(金孫)이라 이름 붙여, 손수 먹이를 먹이며 정사를 볼 때도 곁에 두고 쓰다듬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29] 자세한 부분은 숙종 문서를 참조. 숙종실록을 보면 고양이가 궁궐 내에 들어와 깽판(?)을 친 기록이 남아있고, 유독 고양이가 궁궐에서 깽판을 치는 기록이 숙종실록 이후 영조실록에까지 많이 나타난다. 궁궐에 고양이가 많기는 많았던 모양. 이 외에도 기형 고양이에 대한 기록도 숙종대에 가장 많이 나온다.

파일:Attachment/AKR20121210195551005 01 i 59 20121211150314.jpg

너는 시집에 가 (정성을) 바친다고는 하거니와 어이 괴양이는 품고 있느냐?[30] 행여 감기나 걸렸거든 약이나 하여 먹어라.

또한 숙종의 고모이자 효종의 딸인 숙명공주도 고양이를 좋아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효종이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에 "시집을 갔으면 남편에게 정성을 다해야지 고양이만 끌어안고 있으면 어찌하느냐?"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정작 이 무렵을 다룬 드라마 마의에서 고양이를 좋아하는 공주로 각색된 인물은 숙명공주의 동생인 숙휘공주.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세조 때 불단에서 절하던 세조를 고양이가 절하는 걸 방해해서, 세조를 노리던 암살자로부터 구해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평창 상원사에 고양이 상이 서 있고, 인근의 기름진 땅들을 고양이를 키우기 위한 논으로 절에 내려줬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평창 상원사에 가면, 절 주변에서 뛰어놀고 있는 고양이들을 볼 수 있다.

세조~성종 연간에 활약한 문인 서거정[31]도 고양이를 길렀는데, 고양이에게 오원자(烏圓子)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이 고양이를 주제로 시를 짓기도 했다.[32]

그 외에도 조선조 중종 때의 문신(文臣)인 눌재(訥齎) 박상(朴祥, 1474~1530)이 고양이 덕분에 목숨을 구한 이야기도 있다. 그는 연산군의 폭거에 항거했다가 사약을 받을 뻔했으나, 직접 서울로 올라가 당당한 자세로 대죄(待罪)할 것을 결심하고, 사람들이 말림에도 불구하고 한양으로 올라가다가「장성갈재」를 넘어 입암산(笠岩山)밑 갈림길에 이르렀다. 그런데 난데없이 들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박상 선생의 앞을 가로막고는, 그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잡아당기며 숲으로 향했다. 분명 사연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따라간 그는 사약을 가지고 오던 금부도사와 엇갈려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박상 선생은 이 일로 자신의 친가가 있는 오산 마을에 그 고양이를 제사 지내는 논인 묘창답(描倉畓)을 수십 두락을 두어 정양사(正陽寺)에서 관리하게 했는데, 이 땅은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면 곡식이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33]

반대로 고양이를 싫어하는 인물도 여럿 되는데, 그 중 하나로 아돌프 히틀러가 유명하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유달리 고양이를 싫어하여, 식구 중 누군가가 고양이를 귀여워하자 언짢은 얼굴을 하며 손도 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카이사르, 알렉산더 왕,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같은 이들이 고양이를 싫어했다고 한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고양이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사진 속 도서는 15세기경에 저술되었다고 한다.#
  2. 참고로 고대 이집트어로 고양이는 miw라고 읽는다. 미~우
  3. 출처: 《그래도 사랑해 이집트》, 문윤경, 2009, 밀리언스마일북스.
  4. 이집트는 분리수거가 전혀 안 된다.
  5. 이집트의 모든 통화에는 한쪽면에 스핑크스나 이집트 전차 같은 고대 이집트와 관련된 도안이 그려져 있다. 물론 반대쪽 면에는 이슬람 교와 관련된 도안이 실려 있다. 직접 이집트 사람들에게 고대이집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봐도 이교도였던 건 좀 그렇지만 훌륭한 문명을 만들어낸 것이 자랑스럽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사실 안 그러면 이상한 것이 인류 역사상 이집트가 초강대국이었던 기간이 무려 수천년이나 되니까..,
  6. 현대에 애완용으로 키우는 족제비류인 페릿도 이 체취 문제 때문에 대개 중성화수술을 받은 뒤에야 애완용으로 키울 수 있다.
  7. 출처: 《고양이 문화사》, 데틀레프 블룸 저, 두행숙 역, 2008, 들녘
  8. 이러한 고양이 박해의 원인에는, 북구 신화의 여신 프레이야가 고양이가 끄는 전차를 탄다는 설정 때문으로, '이교도의 상징물 = 악마'라는 논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다만 이 설은 신빙성이 낮은데, 이교도의 상징물이라고 해서 박해하지 않을 정도의 지성은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있었다. 당장 독수리만 하더라도 로마인들이 유피테르의 상징물이라면서 깃발에 박아놓았지만, 후대의 유럽 국가들은 그게 간지난다면서 잘만 독수리 깃발을 돌려썻다(...) 또한 다신교의 문물인 오벨리스크크고 아름답다는 이유로 성당에 박아놓기도 했고 기사수도회에 '황금양털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어차피 이교도의 신은 존재하지도 않는데, 오벨리스크를 박든 그리스 신화를 읽든 무슨 상관'에 가까운 마인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타문화들이 본격적으로 공격 받은건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측에서 가톨릭 측에 기독교의 순수성 논쟁을 건 이후이다.
  9. 모순되는 말 같지만 중세 교회야말로 교황의 말을 철저히 따르는 집단이었으니 다른색 고양이까지 잡아죽일 필요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을 대충 전해들은 농민들이 검은 고양이를 죽이는 김에 그냥 다른색 고양이까지 싸잡아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
  10. 이 흑사병 창궐로 당시 런던에 유학 중이던 아이작 뉴턴이 런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바 있다.
  11. 16세기 영국 귀족이던 헨리 와이어트란 인물이 런던탑에 갇혀서 굶어죽게 되었을 때, 한 도둑고양이가 새나 쥐를 잡아서 그가 갇힌 곳에 들어왔다고 한다. 굶어죽느니 그거라도 먹자 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이 귀족은 고양이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고 여겨서, 나중에 석방될 때 그 고양이를 소중히 데려가서 평생을 애지중지 돌봐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12. 무함마드는 해로운 동물로 돼지, 쥐, 솔개, 개를 지정했는데 돼지야 불길하고 더럽고 쥐는 사람먹을 걸 건드리고 오염시키며 솔개는 귀중한 양을 노리며 개도 더럽고 피해를 준다고 지정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이들 동물이 직접 해가 안된다면 쥐를 빼면 되도록이면 죽이지 말라고 글을 남겼으며 개에서도 목축견은 유목민들에게 귀한 친구이니 목축견만은 예외로 뺐다. 더불어 무함마드도 유목민이었기에 목축견을 귀여워했다. 그가 개에 대하여 거부감을 보인 이유는 반무함마드군들이 추격하던 군견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다는 야사가 있다.
  13. 이슬람에서 예배를 하기 전에 행하는 세정.
  14. 예배 중 다른 사람이나 동물이 어슬렁대면 예배가 무효화되기 때문에 예배를 다시 해야 한다.
  15. 이슬람 나라에서 드물게 개를 박대하지 않고 오래전부터 개를 아끼던 터키나 인도네시아같은 나라들도 지금도 예배당에 개가 들어오면 내쫓는다.물론 개만 그런게 아니라,고양이를 뺀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인도네시아 한 모스크에서는 염소가 예배 중 들어오자, 발길질로 내쫓던 여행자 목격담도 있다.
  16. 참고로 세계 최초로 수의사가 나온 곳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 대왕 시절이라고 한다.
  17. 《캠퍼스 로드》, 박정범, 권용태, 김성탄 지음, 세종서적
  18.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데, 고양이는 평형감각이 매우 뛰어난 동물이라, 고양이가 스스로 넘어질 정도면 태풍이 불어 올만큼 저기압인 경우가 많았다.
  19. 단 이렇게 전 세계를 돌아다닌 고양이들이 가끔 대륙과 멀리 떨어진 섬 따위에 정착하여, 그 지역 토착 동물들을 전멸시킨 경우도 있다. 도도라던가, 카카포라던가...
  20. 첫 비행이라 겁을 먹어 난리를 피웠다고 한다. 나중에는 진정되서 잠잠해 졌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행하는게 기분 좋아 보였다고. 하지만 날씨가 악화됨에 따라 기분이 점점 나빠져 나중에는 해먹으로 숨어들어갔다고 하는데 당시 승무원의 말로는 어떤 기압계보다 정확했다고 한다.
  21. 애당초 유교의 사서삼경의 하나인 서경에서도 고양이를 기르는 것은 권농을 위함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다산 정약용은 지역 수령들의 창고 관리 방법 중에 고양이를 기를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22. 나비를 뜻하는 한자의 발음이 80 노인을 뜻하는 한자의 발음과 비슷해서. 이게 함축된 대표적인 그림이 바로 단원 김홍도의 황묘농접도이다.
  23. 이때 참새는 보통 아들들 수만큼 그린다고 한다. 역시 참새를 뜻하는 한자 '작(雀)'과 벼슬을 뜻하는 한자 '작(爵)'의 발음이 같기 때문에.
  24. 당시 명나라의 군사계급. 참장(參將)의 지휘를 받는다.
  25. 대표적인 예가 <울타의 고양이들(The Cats of Ulthar)>에 등장하는 노부부. 한 소년의 고양이를 죽였다가 그 소년의 저주로 인해 도시의 고양이들 전부에게 공격당해 잡아먹힌다.
  26. 말 그대로 검둥이 남자...라는 뜻. 러브크래프트가 당시 기준으로도 꽤나 심각한 수준의 인종주의자였다는 것을 기억하자.
  27. 당시(1975년)에는 워드프로세서가
  28. 고양이 심포니로도 알려져 있다.
  29. 다음웹툰 탐묘인간 85~89화
  30. "너 시집 갔으면 시가에 정성을 다해야지, 고양이만 품고 있으면 어쩌니?"라는 의미다.
  31. 서울 지하철 7호선 사가정역의 유래가 되는 사람이다.
  32. 사가시집 권1 <오원자부>
  33. 그런데, 이 논은 결국 해방 후에 국유지로 편입되었다고 한다... 어? 다른 '사람'이 아니고 '국가'라서 괜찮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