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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을 알리는 포스터
LIFE, CAMERA, ACTION.
목차
1 개요
미국의 대표적인 영화 시상식.[2] 흔히 오스카상으로 불리며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들이 그 해의 영화들 중에서 투표, 선정하여 시상 하는 상이다. 기본적으로는 할리우드 영화가 대상이긴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가장 크기 때문에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시상식이다. 미국 내에서도 영화 관련 시상식 중 가장 유명하고 중요하며 권위있는 시상식이기도 하다.또한 전세계 시상식 중 가장 빨리 진행하는 시상식이다.
수상 부문은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각색상, 촬영상, 편집상, 시각효과상, 미술상, 의상상, 분장상, 음악상, 음향효과상, 주제가상, 장편애니메이션상, 단편애니메이션상, 다큐멘터리상, 외국어영화상으로 총 21개이다.
매년 11월에 사전 예비 투표로 후보작을 선정하고 그 다음 해 1월 즈음에 후보작들이 발표된다. 2월 중순에 그 최종 후보작으로 2차 투표를 실시 후 2월이나 3월의 일요일 오후 5시 30분(현지 시각)에 할리우드가 위치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상식이 개최되는 것이 관례.
주관 방송사는 ABC.[3] 시상식이 치러지는 해의 사정에 따라 개최 요일과 달은 달라질 수 있다.[4]
2 후보작 선정 기준
후보작을 정하는 제일 중요한 기준은 그 해의 12월 31일까지 시상식 개최지인 로스앤젤레스의 1개 극장 이상에서 영어로 상영된 영화를 기준으로 한다.[5] 그러기에 각종 배급사들은 작품으로써 무게감 있고 작품성이 높을 것으로 평가되는 영화들을 12월 즈음에 개봉시키는 경향이 생겼다. 첫 번째 이유로는 11월에 후보작 선정을 하기 때문에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 오른 영화"라는 식의 홍보를 할 수 있고, 두 번째로는 가장 최신 시기에 상영되어야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에 속한 영화인들의 표심을 가장 쉽게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었다고 한다. 아예 이 시기를 노리고 일부러 영화를 배치하는 경향도 생겼다. 각종 음악 부분 수상이 유력했던 《시카고》와 《드림걸즈》의 경우 미국에서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 단 1개 극장에서 상영된 후, 연말이 지나고 새해가 되자 입소문을 함께 타며 상영관 수를 계속 늘려가는 그런 경우도 있다.
꼭 그렇다고 겨울에 개봉한 영화만 주는 게 아니다. 《포레스트 검프》나 《글래디에이터》 등 여름에 개봉한 영화도 상을 휩쓸었고 11월에 나온 영화도 마찬가지. 결론적으로 개봉시기와 수상 여부는 그리 큰 관련은 없다.
3 트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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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공로상 수상자를 포함한 모든 수상자들이 받는 트로피, 오스카.
현재 전세계에서 치러지는 각종 시상식(특히 연예 관련 시상식) 중 가장 유명한 트로피 라고도 할 수 있는데, 위는 브리타니움(합금)을 입혔고 아래는 검은 금속이다. 키는 34cm고 무게는 3.85kg. 표면이라도 금이 조금 섞였기 때문에 실제로 팔 수도 있다고 한다. 왜 "오스카"라고 불리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시상식 관리자들 중 한 명이 트로피를 보고 "내 삼촌 오스카와 많이 닮았네요."라고 말한 것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오스카상 수상자 중 이름이 상이름과 동명인 수상자는 현재까지 1941년과 45년에 오스카상을 받은 뮤지컬 작곡가 '오스카 해버스타인 2세'가 유일하다.
2000년에 트로피가 몽땅 도둑맞은 일도 있다. 밑에 시상식 에피소드 참고.
4 역사
1929년, 할리우드 영화 관계자 270여 명이 로스앤젤레스의 루스벨트 호텔에 모여 개최한것이 첫 시상식으로 이 때의 수상분야는 12개 분야로 작품상, 감독상, 남.여 주연상, 촬영상, 미술상, 각색상 등이었다. 사실 1회 시상식의 분위기는 당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일곱 번째 천국》의 재닛 게이너의 회고로는 앞으로도 잘해보자는 정도의 저녁식사 모임이었다고 한다.
이듬해의 제2회 시상식부터 캘리포니아 지역 라디오 방송으로 중계가 시작되었다. 그랬던 것이 17회 시상식 때부터 미국 전역에 방송되었고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에 파병된 미군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25회 시상식부터 미국 NBC 방송을 통해 TV 생중계되었는데, 이 때의 시청률은 NBC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이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타이타닉》이 역대 최다 관왕을 휩쓴 1998년 제 70회 시상식 시청자 수가 가장 높으며 약 5,500만 명이 지켜봤다. 그 이후 슈퍼볼을 제외한 그 어떤 프로그램도 이 때의 시청자 수를 넘어선 적이 없다.
이듬 해인 1999년부터 시상식의 개최 요일이 월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되었다. 그 이유인즉 평일인 월요일에 치러지는 데다 LA 시각으로 오후 5시에 치러지다 보니 퇴근 시간 등이 겹치고 방송국도 저녁 황금 시간대 광고수입보다 저조하였다.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로 광고주 등이 아카데미 주최 측으로 항의가 계속되자 결국 일요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미 동부 시각 일요일 오후 8시 30분, 서부시각 5시 30분에 방영을 시작한다.
현재는 거의 미국 ABC에서 단독 중계하고 있다. 하지만 절대적인 시청자 수는 갈수록 떨어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작품상을 수상했던 지난 2007년 사상 최저 시청자 수를 갈아 치운데 이어 2011년 시상식의 경우 음악 시상식인 그래미상의 시청자 수에 처음으로 밀렸다. 그래미상 시상식 개최 전날 사망한 휘트니 휴스턴의 효과가 컸지만. 그래도 여전히 미국에서는 이 시상식 중계가 슈퍼볼을 비롯한 미식축구 프로그램들을 제외하면 모든 드라마, 쇼 오락 프로그램과 일회성 생방송 프로그램을 통틀어 가장 높은 시청자 수를 기록하는 프로그램인 것은 맞다.
2013년 2월 85번째로 열린 시상식에서 벤 애플렉의 세 번째 연출 영화 《아르고》가 최우수 작품상을 포함한 3관왕을, 리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가 감독상을 포함하여 4관왕을 수상하였다. 에이브러햄 링컨을 연기한 환생한 링컨 대니얼 데이루이스가 남자 배우로서는 사상 최초로 세 번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의 여주인공인 제니퍼 로렌스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일단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과 캐스린 비글로의 《제로 다크 서티》 등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고, 특히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아무르》가 최우수 작품상, 각본상 등 본상 후보에 오른 것이 화제가 되었으나 예상대로 일단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기는 했다. 시상식 중 《레 미제라블》에 출연한 배우들이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특히 007 시리즈로는 처음으로 주제가상을 수상하여 《스카이폴》의 주제가를 부른 가수 아델이 축하공연을 하기도 했다. 역시 미국 3대 방송사인 ABC가 계속 단독 중계 하였다. 시상식 시청자 수는 총 4천 70만 명으로 집계 되었다.[6]
시상식 장소는 호텔에서 만찬형식으로 치뤄지다가 관객들이 몰리기도 하고, 시상식 흥행차원에서 16회 시상식부터 극장으로 옮겨 진행하기 시작했다. 1969년부터는 LA 카운티 뮤직 센터 도러시 챈들러 파빌론에서 치뤄졌다. 이후 1988년부터는 슈라인 오디토리움과 번갈아가며 진행되다가 2002년에 할리우드에 돌비 극장이 아카데미 전용 시상식장으로 사용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5 수상작
역대 가장 많은 부문을 수상한 영화는 세 편이며, 모두 최우수 작품상 포함 총 11개 부문을 석권하였다.
- 1959년작 《벤허》
- 1997년작 《타이타닉》
- 2003년작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그리고 주요 5개 부문인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남, 여우 주연상과 각본 혹은 각색상. 이 다섯 개 부문을 모두 휩쓴 영화(즉 그랜드슬램 달성) 역시 현재까지 세 편.
- 1934년작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 1975년작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 1991년작 《양들의 침묵》 [7]
기타 수상작은 아카데미 시상식/수상 기록 참조.
인물 중 가장 많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인물은 월트 디즈니. 후보에만 59회 이름을 올렸으며 이 중 22번 상을 받았다. 비경쟁부문의 상도 4번 받아서 총 수상 횟수는 26번이다.
6 특징
한국 각종 연예 시상식과의 대표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격의 차이 신인상이 없다는 점이다.[8][9]
시상자가 시상 직전 "And The Oscar goes to..."라고 발표하는 것이 사실상의 클리셰가 되었다.[10] 그 후 수상자가 무대에 올라 오스카 트로피를 받고 수상소감을 발표할 때 감격에 찬 나머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방송 연장의 주범이 되자 주최측에서는 아예 남우주연상 2연패 관록의 수상자인 톰 행크스를 시상식 안내 영상에 출연시켜 "웬만하면 1분 안에 얘기하고 내려와 달라"라고 부탁할 정도다.
대체로 (LA 현지시간 기준) 오후 5시 30분에 시작하면 9시 넘어서 끝난다. 생방송으로 방송해도 돌발적인 변수가 없는 한 3시간 후반대면 끝난다. 최우수 작품상 발표하고 끝내면 뉴욕에서는 자정이 넘는다. 아무래도 방송 편성상 정해진 시간이 있어 방송사나 주최 측에서는 돌발적인 변수를 막으려고 최대한 노력을 하고 있다. 수상소감 빨리 하고 내려가라는 것도 바로 이 때문. 공로상을 제외한 전 부문을 시상해야 되는데다 각종 축하무대에 퍼포먼스, 중간광고까지 끼어 있기에 좀 오래 걸리는 편이기도 하다. 당장 한국도 연예대상, 연기대상은 4시간 안팎으로 끊는데.
최우수작품상의 후보를 2010년 시상식 부터 5편에서 9편으로 늘렸으며 2016년 현재는 8편. 2011년부터는 시상식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작품이 거의 유일하게[11] 받을 수 있는 시각효과상 부문 역시 3편에서 5편으로 늘렸다.
종전까지 본상 시상식에서 진행되던 공로상 시상은 2007년(80회)를 기점으로 Governors Awards에서 진행된다. 수상자가 등장할 때 내로라하는 배우들과 감독들이 예를 갖추고 박수와 함께 기립하는 장면은 아카데미 시상식의 또 하나의 볼거리였지만, 시간 문제로 인해 아예 따로 시상식을 만들어서 넉넉하게 진행하고자 하는 의도로 인해 과거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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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칸부터 차례대로 샤를리즈 테론, 케리 워싱턴, 리스 위더스푼, 제니퍼 로렌스, 나오미 와츠, 조 샐다나
이런 행사가 다들 그렇지만 남자 배우들은 그렇다고 치고 시상식 전 레드카펫에 선 할리우드의 톱스타 미녀 배우들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구경할 수 있기에 남자 시청자들은 참 좋아한다(?)
이 상에 대한 패러디로 시상식 하루 전날에 치러지는 골든 라즈베리상이 존재한다. 항목 참조.
7 여담
미국 내에서도 영화계는 물론 쇼 비즈니스를 대표하는 시상식. 슈퍼볼, 그래미상, 골든글로브와 함께 미국 전역에서 시차에 관계없이 동시에 생방송되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수상한 작품들이 1990년대 까지만 해도 세계 흥행에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았으나 요즈음은 그런 효과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일반인 관점에선 노잼인 영화들이 많으니까... 최근엔 작품상 수상 이후 해당 영화의 관객 수가 증가하지 않는 등 해외에서는 큰 영향이 없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미국의 영화시상식인 만큼 한국 영화와는 별다른 접점이 없다. 외국어영화상 부문에도 관례처럼 매년 작품을 출품하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특히 한국 영화인, 아니 한국인이 이 상을 받았거나, 심지어 시상식 무대에조차 오른 일이 없었다. 이웃 나라 일본 영화는 이미 195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등 여러 부분에서 수상을 해 온 바 있으며, 1958년에는 우메키 미요시가 영화 '사요나라'로 여우조연상도 수상한 적 있음을 비교해 보면 많이 아쉬운 부분. [12] 다만 2005년 시상식 때 한국계 호주인인 박세종 감독의 작품 《버스데이 보이》가 단편 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오른 적은 있다. 이후 2013년 이민규 감독의 '아담과 개' 역시 단편 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올랐었다.
2016년에는 이병헌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시상식에 시상자로서 초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콜롬비아 출신 여배우인 소피아 베르가라와 함께 외국어영화상 부문 시상에 나섰다. 이로써 이병헌은 한국 영화인으로 처음 아카데미 레드카펫을 밟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13] 또한 성악가 조수미씨가 부른 영화 《유스》(YOUTH)의 주제가 "Simple Song #3"이 주제가상에 후보에 올라 축하공연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시상식 시간관계상 노래를 편곡해서 짧게 불러달라고 요청했던 아카데미 측과 원곡을 훼손할 수 없다는 데이비드 랭과 조수미의 의견 차이로 인해 축하공연은 아쉽게도 불발되었다. 다만 후보에 지명된 사람은 조수미가 아닌 노래를 만든 작곡가 데이비드 랭이 올랐는데 원칙적으로 주제가상은 가수가 아닌 작곡자에게 돌아가기 때문.
2015년 들어서 임권택, 봉준호가 감독으로서, 최민식, 송강호가 배우로서, 애니메이션 아티스트 김상진이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으로 아카데미 회원으로 위촉되었다. 한국인 최초로 아카데미에서 후보작에 대해 투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9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 문화관광부가 세계 4대 영화제로 칸 영화제,베니스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와 더불어 지정한다고 했다가 욕만 퍼먹고 없던 일이 되었다. 딴지일보에서는 달랑 외국어영화상 1개 부문 준다고 국제영화제로 봐야 하냐?라고 호되게 깠다.
8 시상식 기록 및 에피소드
- 1936년 9회 시상식 : 처음으로 연기 부문에서 주연상과 조연상을 나누어 시상하기 시작하였다. 이전까지는 주,조연에 관계없이 남,녀 배우 한명씩에게만 연기상 트로피가 돌아갔었고, 이 해부터 비로소 남,녀 주,조연 총 4명에게 영광이 주어지게 되었다. 이 해 첫 남우조연상 수상의 영광을 안은 월터 브레넌은 이후 총 두 번의 트로피를 더 받아 현재까지 조연상 3관왕의 업적을 달성한 유일한 배우로 기록되고 있다.
- 1939년 12회 시상식 : 영화사상 손꼽히는 명작들이 한 해에 쏟아져 나오면서, 이 해의 시상식은 현재까지도 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한 해로 기록되고 있다. 《오즈의 마법사》, 《굿바이 미스터 칩스》,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러브 어페어》, 《역마차》 등 헐리우드 초창기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모조리 작품상을 비롯한 다수 부문에 후보에 오르며 잔뜩 기대를 걸었으나
망했어요세기의 명화이자 당시 경이적인 흥행돌풍을 일으켰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싹쓸이에 밀려 대부분 무관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최초의 컬러영화이기도 하다.) 어이없는 것은 정작 이 작품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레트 버틀러 역의 클라크 게이블은 남우주연상 부문에서, 장엄하고 감동적인 스코어를 작곡한 맥스 스타이너는 음악상 부문에서 고배를 마셨다는 것. 한편 흑인 유모 역의 해티 맥대니얼은 이 해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아카데미 수상자가 되었다.
- 1969년 41회 시상식 : 주요 부문인 여우 주연상의 첫 공동 수상이 있었다. 바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연기부문 역대 최다관왕 수상에 빛나는 캐서린 햅번이 그 주인공.
모 국가 모 방송사와는 다르게주요부문의 공동수상이 거의 없다시피 한 이 시상식의 특성상 희귀한 일이다.[14] 당시 시상자로 나온 잉그리드 버그먼이 수상자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펼치며 수상자를 호명하려는 순간 종이를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The winner.. is a.. tie"(수상자는... 공동수상이군요) 라고 밝히며 수상자를 두 명 불렀다고 한다.
- 1971년 43회 시상식 : 《패튼 대전차군단》이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남우주연상 수상자인 배우 조지 스콧은 뭐하러 아카데미 가냐? 난 집에서 하키경기나 봐야지. 이라며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남우주연상 수상자를 발표한 골디 혼의 벙찐 표정만이 TV를 타고 전 미국에 방영... 스콧은 평소에 오스카를 싫어했고 자신에게 상을 준다고 해도 시상식에 나가지 않을 거라고 공언했었다고 한다.
- 1972년 44회 시상식 : 찰리 채플린은 매카시즘 선풍이 일때 공산주의자로 몰려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을 떠나 영국에서 활동하다가 이해에 공로상을 수상하며 미국에 돌아왔다. 백발의 채플린이 입장할 때 관중들은 기립하여 박수를 쳤고 채플린이 수상소감을 다 마칠 때까지 자리에 앉지 않고 경청했다고 한다. 한편 《클루트》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제인 폰다는 '할 말 많은데 오늘은 말 안 하겠다'라며 수상소감을 거부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폰다는 평소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 있던 차라 수상소감을 거부했다고 한다.
- 1973년 45회 시상식 : 말런 브랜도는 《대부》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 그는 미국 정부가 네이티브 아메리칸들을 차별하는것에 반대한다면서 수상을 거부하고 시상식에 불참했다. 대신 네이티브 아메리칸 전통 복장을 입은 서신 리틀페더(Sacheen Littlefeather)가 대리 수상하면서 브랜도의 불참 이유을 밝혔다고. 나중에 밝혀진 것으로는 리틀페더는 네이티브 아메리칸이 아니었기 때문에 브랜도의 수상거부의 진심이 과연 네이티브 아메리칸 차별 문제 때문이었는지는 불명. 한편 시상자로 예정된 찰턴 헤스턴 대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와서 시간을 끌다가 헤스턴이 나타나자 자리를 피했다. 헤스턴이 늦은 이유는 시상식에 오다가 자동차가 펑크가 난 탓이었다고.
- 1974년 46회 시상식 : 미국판 카우치 사건인 오펄 알몸 사건이 일어났다. 사연인 즉 사회자 데이비드 니븐이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소개하려던 순간 로버트 오펄(Robert Opel)이란 사람이 홀라당 벗은 채로 무대 중앙을 가로질러 버린것. 니븐은 일순 당황했지만 "이런 일은 항상 있기 마련이지요, 재미있습니다. 저 사람은 옷을 벗고 자기 결점을 드러내는 게 인생의 낙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네요"라며 애써 웃어넘겼다. 시상자로 나선 테일러도 당황해서 수상 후보작들을 발표할때 버벅댔다고.
- 1977년 49회 시상식 : 이 해에는 《록키》가 작품상, 감독상등을 휩쓸었는데 실베스터 스탤론이 수상을 하러 나오다가 갑자기 무하마드 알리가 슬그머니 무대뒤에서 나와서 스탤론과 복싱을 하는 일이 일어났다. 물론 이건 일종의 퍼포먼스였으며 유일하게 록키와 알리가 맞붙었던 순간이었다나(…)
- 1978년 50회 시상식 :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버네사 레드그레이브는 수상소감에서 시오니즘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 했고 시오니즘과 파시즘에 대항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유명한 안티 시오니스트였던 레드그레이브가 후보에 올랐을 때부터 반발하던 이시위대들은 이같은 발언을 듣고 사진을 불태우는 등 난리를 피웠다. 레드그레이브의 소감이 끝난 직후 이어진 각본상 시상에서 시상자 패디 차옙스키(Paddy Chayefsky)는 "개인적인 견해 및 정치 공세를 시상식을 이용한다는 것 자체가 역겨운 일이다"라고 바로 반박하고 "수상 소감을 말하는 자리는 단지 감사를 표하면 되지 선언을 할 필요는 없다"라고 일침을 가했다.[15]
- 1981년 53회 시상식 : 원래 이 해의 시상식은 3월 30일에 열릴 예정이었지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하루 연기되어 3월 31일에 열렸다. 이미 이전에 1968년 40회 시상식에도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되어 시상식이 연기된 적이 있었다.
- 1988년 60회 시상식 : 이 해 작품상은 《마지막 황제》가 차지했는데 시상을 하러 나온 에디 머피는 "할리우드가 너무 흑인을 차별 대우한다. 흑인에겐 20년에 한 번꼴로 상을 주는데 내가 상을 타려면 2004년이나 돼야 타겠네?"라며 불만을 터트렸다. 재미있게도 머피의 예언(?)이 적중했는지 2005년 77회 시상식에서 흑인 배우인 제이미 폭스가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 1991년 65회 시상식 : 여우조연상 부문에서 버네사 레드그레이브, 조앤 플로라이트, 미란다 리처드슨 등 쟁쟁한 배우들이 후보로 오른 가운데, 많은 평론가들의 예상을 깨고 당시 신인이었던 《나의 사촌 비니》의 머리사 토메이가 상을 받았다. 이 결과를 놓고 곧 실제 수상자는 버네사 레드그레이브였는데, 시상자인 잭 팰런스가 약에 취해 봉투의 이름 대신 프롬프터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후보명을 잘못 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아카데미 측이 여러 차례 근거없는 루머임을 밝히고 나섰지만 실제 수상자였던 토메이는 꽤나 마음고생을 했다는 후문.[16]
- 1994년 66회 시상식 : 영화 《필라델피아》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톰 행크스가 수상소감에서 자신에게 처음으로 연기를 가르쳐 준 은사를 들면서
아웃팅을 해버렸다.[17] 오스카상 수상소감 중 감동적인 수상 소감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런데 이 때 받고 다음 해에 또 받는다. 그 영화는 바로...
- 1999년 71회 시상식 : 이 해에 로베르토 베니니가 《인생은 아름다워》로 외국어 영화 최초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수상이 발표되자 통로로 나오는 게 아니라 의자를 마구 점프해서(…) 뛰어나왔다. 또 수상소감도 "나는 모든 사람에게 키스해주고 싶다"라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이 영화는 그 해 4개 부문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한편 공로상은 원로감독 엘리아 카잔에게 돌아갔지만, 카잔은 매카시즘 선풍이 불 당시에 동료 영화인들을 밀고했던 탓으로 절반은 일어서고 절반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 박수도 치지않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18]
- 2000년 72회 시상식 : 이 해에는 오스카 트로피들이 몽땅 도난당하는 황당한 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다급해진 아카데미에서 1주일을 남겨두고 부랴부랴 트로피들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도난당한 트로피들은 시상식 며칠 전에 LA 코리아타운의 쓰레기통 속에서 발견되었으며, 누가 트로피를 훔쳤는지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 2002년 74회 시상식 : 핼리 베리가 《몬스터 볼》에서의 열연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74년 만에 흑인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기록을 남겼다. 유독 흑인배우를 홀대하는 것으로 비판받았던 아카데미였기에 이 해의 수상은 더욱 인구에 회자되었는데, 단상에 오른 베리는 감격에 겨운 나머지 폭풍 눈물을 쏟으며 자신보다 앞서 활동했던 전설적인 흑인 여배우들에게 영광을 바친다고 말해 기립박수를 받았다.[19] 한편 이 해에는 남우주연상 역시 덴절 워싱턴이 수상하면서 흑인배우가 남,녀 주연상을 휩쓰는 쾌거를 달성했는데, 공교롭게도 전설적인 원로 흑인배우 시드니 포이티어 역시 공로상을 수상하면서 말 그대로 흑인 예술인들의 위상을 크게 세워준 시상식이 되었다.
- 2003년 75회 시상식 : 이 해에 만 29세의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피아니스트》로 역대 최연소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는데 수상이 발표되어 무대에 올라가자마자 바로 시상자이던 핼리 베리에게 진하게 키스했다. 그리고 전쟁과 인간에 대한 소감을 짤막하게 이야기 했는데 사실은 더 이야기 하고 싶었으나 키스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 더 이야기 할 수 없었다고...
키스하는 광경을 보며 엄청나게 좋아하시는 잭 니컬슨 옹을 볼 수 있다.
- 2011년 83회 시상식 : 1916년생인 미국의 대배우 커크 더글러스가 여우조연상 시상자로 무대에 나서 청중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는 뇌졸중의 후유증이 남아 부자연스런 언변으로도 청중들을 즐겁게 한 끝에 영화 《파이터》에서 열연을 펼친 멜리사 리오를 수상자로 호명하였다. 리오는 더글러스에게 최고의 예를 갖추었고, 덕분에 청중들은 1984년 데뷔한 이래 긴 필모그래피를 지닌 이 여배우가 대선배 앞에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리는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제임스 프랭코와 앤 해서웨이의 시상식 진행은 눈사태 같은 혹평 속에 묻혀 버렸다. 안습.
- 2013년 85회 시상식 : 시상식 사상 최초로 미국 대통령 영부인인 미셸 오바마가 최우수 작품상을 발표하였다. 물론 시상식장에 나온 건 아니고 백악관과의 이원 생중계 형식을 빌려, 화면으로 출연하였다.. 시상식장 무대에 같이 나온 배우는 잭 니컬슨.
백악관 안주인이 나온다기에 설마 이 영화를 예상했던 이가 있었겠으나,실제 수상한 작품은 바로《아르고》.
- 2014년 86회 시상식 : 여러모로 유쾌한 면이 돋보였던 시상식. 엘런 디제너러스가 다시 진행을 맡았는데 시상식 도중 갑자기 "배고픈 사람 없나요?. 라지 피자 두 판 시키려고 하는데 괜찮겠어요?"라고 제안한 후 진짜로 피자가 등장하자
좀 있다가 작품상 트로피 받을브래드 피트가 주위 배우들에게 피자를 직접 서빙해주고 배우들이 함께 나눠먹는 모습을 보이는가하면, 디제너러스가 남우주연상 후보 브래들리 쿠퍼에게 셀카를 찍자고 나서자 주위에 피트, 제니퍼 로렌스, 안젤리나 졸리, 메릴 스트립 등 기라성같은 스타들이 모여 갤럭시 노트로 셀카를 찍는 퍼포먼스까지 보이며 화제를 낳기도 했다. 디제레너스는 그 직후 자신의 트위터에 셀카를 올렸는데 2012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 직후 올린 트윗을 제치고 역대 트위터 역사상 가장 많이 리트윗된 글이 되었다. 2016년 6월 12일 기준으로 332만 리트윗이다.전설의 트윗바다 건너 한국사람들은 유쾌한 천조국 시상식 모습에 잔잔한 문화충격을 받았다 카더라
- 2016년 88회 시상식 :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6번의 지명 끝에 드디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9 공정성 논란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투표를 거쳐 후보작과 수상작을 선정하는 만큼 시상식 진행, 특히 수상작 선정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프리메이슨이 결정한다던데[20]다음 사례 일부는 타임지의 영화평론가 리처드 콜리스가 평한 사례와 LA 타임스가 보도한 사례 참조. 연도 순서대로 나열.
- 1941년 존 포드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가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을 제치고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자, 이때부터 수상 결정 과정에서 논란이 있었다. 웰스는 각본상만 가져갔다...
- 1952년 영화 《지상 최대의 쇼》는 결투 장면으로 모두에게 유명한 《하이 눈》과, 음악 영화의 명작으로서 아예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던 《사랑은 비를 타고》 등을 제치고 작품상을 받았다.
- 1981년 로버트 레드포드의 연출 데뷔작인 《보통 사람들》이 마틴 스코세이지의 역작이라 평가되는 《분노의 주먹》과 데이비드 린치의 《엘리펀트 맨》을 제치고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등[21]을 수상했다. 당시 배우로서 엄청난 인기였던 레드포드를 '감독으로서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냐'라는 말까지 나왔다.
- 1994년 《포레스트 검프》가 《쇼생크 탈출》, 《펄프 픽션》을 제치고 작품상을 받았다. 다만 이 세 영화 모두 우열을 가리기 힘든 걸작이라 다른 건에 비해 그렇게 논란이 크지 않았고, 지금 와서도 '포레스트 검프가 아카데미상을 받은 것이 실수였다'는 의견보다는 '쇼생크 탈출/펄프 픽션이 작품상을 못 받아서 아쉽다'는 의견이 훨씬 많다.
- 1999년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제치고 작품상을 수상해 논란이 있었다. 게다가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귀네스 팰트로의 여우주연상 수상도 반발이 심했다. 경쟁자들도 메릴 스트립이나 케이트 블랜칫[22]등이었기에 논란을 더 가열하였다. 이 때문에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아카데미 시상식 최악의 실수 중 하나로 회자된다.
- 2001년 《와호장룡》이 비영어권[23] 영화로서는 최초로 1억 달러를 돌파하며 아카데미 작품상에 대한 기대를 모았으나 리들리 스콧의 《글래디에이터》가 작품상을 타면서 외국어 영화상에 만족해야만 했다. 10년이 넘었지만 한국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의 공정성에 대한 관심을 얻은 건 이때부터.
- 2003년 영화 《시카고》 역시, 유력한 수상 예정작이던 《갱스 오브 뉴욕》을 제치고 작품상을 차지해 논란이 또 벌어졌다.
자꾸 희생양이 스코세이지가 되는 건 왜일까사실 《갱스 오브 뉴욕》보다 《시카고》가 훨씬 유력했다. 영화 자체도 인기가 있었지만, 배급사인 미라맥스가 워낙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쳐 《시카고》의 작품상 수상은 시상식 개최 전부터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일 사회를 맡은 스티브 마틴은 오프닝 모놀로그에서 "《시카고》의 인기가 마케팅 때문이라고들 하는데, 미라맥스가 죄가 있다면 모두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든 것뿐이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재밌는 것은 《갱스 오브 뉴욕》의 배급사 또한 미라맥스였다는 점. 《갱스 오브 뉴욕》이 호평을 받긴 했으나 전설적인 스코세이지 이름값에 비하면 조금 모자랐다는 점, 《갱스 오브 뉴욕》는 다른 제작사와 공동 제작이었지만 《시카고》는 단독 제작이라는 점 때문에 《시카고》에 더 무게를 실어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시카고》의 감독 롭 마셜이 신인이라 감독상을 스코세이지가 받을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실제론 《피아니스트》의 로만 폴란스키가 받았다.
- 2006년 모든 언론이 예상한 《브로크백 마운틴》을 제치고 《크래시》가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해 상당한 논란이 있었는데 이 부분은 LA 타임스에서도 깠다.
- 홍콩 영화 《무간도》를 리메이크한 《디파티드》가 7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한 감독상, 각색상, 편집상, 남우조연상 (마크 월버그) 5개 부분에 후보로 올라 남우조연상을 제외한 4개 부분을 수상했지만 이 영화가 아카데미 후보에 들 작품인가 대해서 논란이 되었다. 이 영화를 제외한 작품상 후보에 있던 네 편의 영화는 작품성과 예술성이 뛰어났지만 작품성은 물론 예술성에 떨어지는 상업성 영화였기에 일부 팬들과 평론가는《디파티드》의 작품상 수상을 비판을 한 바 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기존의 스코세이지 영화와 달리 홍콩 영화의 리메이크작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서술되었듯 스코세이지를 위한 상이라고들 해석하는 사람도 많다.
- 2009년 81회 시상식, 흥행과 비평에서 새 기록을 새웠던 《다크 나이트》가 중요 부문(작품상,감독상,각색상)에 후보가 되지 못했다. 그 원인을 히어로 영화라는 한계로 감안할 수 있겠지만 《다크 나이트》는 단순히 히어로물이 아닌 완전한 독립영화를 탄생시켰기 때문에 수상할 수도 있었다는 평가. 대신에 8개 부문(남우조연상(히스 레저), 미술상, 촬영상, 편집상, 분장상, 음향상, 음향효과상, 시각효과상)에 후보지명되었고 이 중 남우조연상, 음향효과상을 수상했다. 이외에 픽사 에니메이션의 《월-E》, 《타이타닉》의 커플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즐릿의 두 번째 출연 작품인 《레볼루셔너리 로드》, 배우 겸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가 지명되지 않았다. 이 논란 이후로 다음 시상식때는 아카데미 후보작 수가 5편에서 10편으로 증가 하였다.
- 2013년 85회 시상식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배트맨 시리즈의 완결편인《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시상식에서 한 분야에도 지명되지 않았다. 한때 일부 팬들과 평론가들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수상 가능성을 높게 점치기도 했으나, 전작인 《다크 나이트》 보다 평이
많이좋지 않아 수상이 힘들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또한 전세계 흥행 3위를 기록한 《어벤져스》는 시각효과상 한 분야에 지명되는 데에 그쳤다. 이에 일부 팬들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시리즈의 완결편이기 때문에 기술상 부문이라도 받아야 했다, 《어벤져스》는 노미네이트가 되었는데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왜 노미네이트가 되지 않았냐며 아카데미를 비난했지만, 원래 기술상을 제외하면 블록버스터에 박한 게 아카데미다. 역시 남우주연상 후보로 내정되어 있었던 크리스천 베일은 이미 《파이터》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기 때문인지 《다크 나이트》에 이어 《다크 나이트 라이즈》 때도 남우주연상에 지명되지 않았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통해 캣우먼을 재해석한 앤 해서웨이 또한 지명되지 못했지만 대신 《레미제라블》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또한 이때 《제로 다크 서티》도 골든글로브에서 여우주연상을 받는 등 주요부문 수상 가능성이 높았으나 영화에서 묘사된 CIA의 비밀감옥, 고문 등에 대한 논란으로 인해 음향편집상을 《스카이폴》과 공동수상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 미남 배우들이 과소평가 받는다는 평이 있다. 할리우드 대표 남배우 중 오스카를 받은 사람은 생각보다 적은 편. 이 희한한 역사는 무척 오래되어 헐리우드의 대표 미남배우였던 그레고리 펙은 5번째, 폴 뉴먼은 무려 7번째 후보지명 끝에서야 겨우 상을 받았고,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4번이나 후보에 올랐지만 끝내 수상하지 못했다. 톰 크루즈, 레이프 파인즈, 주드 로 같은 헐리우드의 대표격 미남 배우들도 여러 번 후보지명되었으나 번번이 수상에는 실패. 그 중 조지 클루니는
남우주연상은 아니어도2006년에, 브래드 피트는 2014년에 작품상 을, 이 분야 끝판왕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2016년에 수상한다.
- 2016년 아카데미 후보들이 백인 투성이라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비백인 배우 중 작품성으로나 연기로나 주목할 만한 배우가 있는데 한 명도 후보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 조지 클루니가 이를 비판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이 문제는 진행자인 크리스 락도 정작 본인은 동양인 스테레오 타입 어린이들을 통해 인종 차별 발언을 해서 또 다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9.1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상 관련
2000년대 초 이 부문이 신설된 이후로 상업적인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 영화들[24]만 수상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다. 지브리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제외하면, 드림웍스의 슈렉을 시작으로 픽사의 업, 라따뚜이, 토이 스토리 3, 인사이드 아웃, 디즈니의 겨울왕국, 빅 히어로 등이 줄줄이 수상하였다. 반면 빌 플림톤의 작품들이나 벨빌의 세쌍둥이, 페르세폴리스, 바다의 노래, 아노말리사, 소년 세상을 만나다 등 전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고 여러 영화제에서 초청되고 수상을 받은 저예산 예술 애니들은 계속 후보에만 머물렀다. 때문에 냉정하게 말해 애니 업계쪽에서의 권위는 제로에 가깝다. 더불어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상의 경우도 제작비가 많이 든 3d 애니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10 아카데미의 콩라인(?)
10.1 감독상
- 앨프리드 히치콕 : 클래런스 브라운, 킹 비더, 로버트 올트먼 등과 함께 5회 후보선정-무수상 부문(5회가 최다)에 오른 히치콕이 되겠다. 《레베카》(1939), 《구명보트》(1944), 《망각의 여로》(1945), 《이창》(1954), 《싸이코》(1960)를 통해 감독상 후보에 올랐지만 모조리 실패. 그래도 《레베카》는 그 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긴 했고, 1968년에는 지금의 공로상격인 어빙 G. 솔버그상을 수상했다.
- 로버트 올트먼 : 5회에 걸쳐서 감독상 후보에 선정되었지만(《야전병원 매쉬》(1970), 《내슈빌》(1975), 《플레이어》(1992), 《숏 컷》(1993), 《고스포드 파크》(2001)) 단 한번도 수상을 못했다. 《야전병원 매쉬》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그의 다른 작품들이 다른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여럿 받은데 비해, 아카데미와 관련된 상은 단 하나도 받지 못했다는 면에서 진정한 콩라인으로 볼 수도 있겠다. 결국 2006년 감독상이 아닌 공로상을 수상해 콩라인의 한을 풀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해 11월에 사망했다. 그 전에라도 콩라인의 한을 풀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
- 스탠리 큐브릭 : 4회에 걸쳐 감독상 후보에 선정.(《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 《시계태엽 오렌지》(1971), 《배리 린든》(1975)) 큐브릭의 영화는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작중 가장 파격적인 영화들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수상엔 실패했다(…) 큐브릭이 유일하게 받은 아카데미상은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로 시각효과상을 받은 것뿐.
- 시드니 루멧 : 역시 4회에 걸쳐 감독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은 실패.(《12인의 노한 사람들》(1957), 《뜨거운 오후》(1975), 《네트워크》(1976), 《심판》(1982)). 베를린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12인의 노한 사람들》이나 《네트워크》 같은 경우가 아까운 케이스로 꼽히는데, 특히 《네트워크》같은 경우에는 각본상과 더불어 연기상 부문에 5명 노미네이트, 3명 수상[25]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도, 작품상과 감독상은 《록키》에게 내줘 아쉬움을 더 한 케이스. 2004년에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큐브릭과 루멧 이외에도 4회 선정-무수상에는 피터 위어와 페데리코 펠리니 등이 있다.
- 리들리 스콧 : 3회에 걸쳐 감독상 후보에 선정.(《델마와 루이스》(1991), 《글래디에이터》(2000), 《블랙 호크 다운》(2001)) 《델마와 루이스》 때는 《양들의 침묵》의 조너선 데미에게, 《글래디에이터》 때는 《트래픽》의 스티븐 소더버그에게, 《블랙 호크 다운》 때는 《뷰티풀 마인드》의 론 하워드에게 감독상을 뺏겼었다. 다만 감독상 3회 후보 선정-무수상부터는 좀 많아지는데, 2014년 현재 기준으로 잉마르 베리만, 노먼 주이슨, 스티븐 돌드리, 데이비드 린치, 알렉산더 페인, 데이비드 O.러셀 등이 있다. 그래도 이분은 글래디에이터로 작품상을 수상했다.
- 마틴 스코세이지 : 2007년 《무간도》의 리메이크인 《디파티드》로 감독상을 수상하긴 했으나, 상을 받기 위해 무려 7번을 미끄러져야 했다.(《성난 황소》(1980), 《예수 최후의 유혹》(1988), 《좋은 친구들》(1990), 《순수의 시대》(1993), 《갱스 오브 뉴욕》(2003), 《애비에이터》(2004)) 《택시 드라이버》로 칸 국제영화제에서, 《좋은 친구들》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했었지만 말이다. 비록 염원하던 감독상을 받긴 했으나 《디파티드》의 수상에는 뒷말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리고 2014년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로 후보에 오르며 8번을 채웠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
- 스티븐 스필버그 : 스필버그의 감독상 도전사는 눈물겨울 정도. 《미지와의 조우》, 《레이더스》, 《E.T.》, 《칼라퍼플》로 도전했지만 모두 미끄러졌다.[26] 《E.T.》는 가장 아까운 수상 실패작이라고 할 정도이고 《칼라퍼플》은 아카데미의 구미에 맞는 작품성을 갖춘 영화였지만 흑인 여성의 인권이라는 소재가 발목을 잡은 듯. 결국 《쉰들러 리스트》로 눈물겨운 도전사가 승리로 장식되긴 했다. 그리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두 번째 수상에도 성공했다. 21세기에는 실화를 각색한 두 영화인 2005년 《뮌헨》으로, 2012년 《링컨》으로 두 차례 감독상에 지명되면서, 2014년 기준으로 2승 5패가 되었다.
10.2 연기상
- 피터 오툴 : 아카데미의 진정한 콩라인. 무려 8회에 걸쳐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에 모두 실패했다(…) 가장 아까웠던 순간은 1962년의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뛰어난 연기에도 불구하고 수상을 하지 못했다.[27] 이 때의 남우주연상 수상 실패를 아카데미의 사상 최악의 실수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2007년에도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에 실패했고, 결국 2013년 12월 14일 사망했다. 그나마 2003년에 아카데미에서 평생공로상은 받았다.
- 리처드 버튼 :남우주연상 후보에 6번, 남우조연상 후보에 1번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에 모두 실패했다. 피터 오툴과는 달리 평생공로상도 받지 못한 채 1984년 8월 5일 58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 데보라 커 : 피터 오툴과 동시대의 콩라인. 6회에 걸쳐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에 모두 실패했다. 《지상에서 영원으로》에 출연했을 때는 오드리 헵번이, 《왕과 나》에 출연했을 때는 잉그리드 버그만이 수상했다. 1994년 평생공로상을 받았고 2007년 10월 16일 사망했다.
- 글렌 클로즈 : 현 시대의 데보라 커 혹은 여자 버전 피터 오툴 1983년, 1984년, 1985년 모두 여우조연상 후보로, 1988,1989년 그리고 가장 최근은 2012년 [28]여우주연상 후보로 올랐는데 단 한 번도 수상받지 못했다. 1989년 영화 위험한 정사로 가장 유력한 수상후보였지만 조디 포스터가 여우주연상을 가져갔다.
- 에이미 아담스 : 여우조연상 후보에 4번, 여우주연상에 후보에 1번 총 5번 후보에 올랐지만 전부 수상에 실패했다. 사실 매년 후보에 오를때마다 상대 후보가 더 주목을 받는 불운의 케이스. 2006년 《준벅》으로 후보에 올랐을땐 《콘스탄트 가드너》의 레이첼 바이스가 수상했고, 2009년 《다우트》로 후보에 올랐을때,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의 페넬로페 크루즈가 수상, 2011년에 《파이터》로 후보에 올랐을때, 같은 영화에 출연한 멜리사 리오가 수상했다. 2013년엔 《마스터(영화)》에서의 연기력이 찬사를 받아 드디어 오스카를 수상하는게 아니냐는 여론이 있었으나... 하반기에 공개된 《레 미제라블》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앤 해서웨이가 수상자가 되었다... 그리고 2014년 《아메리칸 허슬》로 생애 첫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나, 수상자는 그 해 모든 시상식을 휩쓸었던 《블루 재스민》의 케이트 블란쳇. 블란쳇이 《블루 재스민》에서 워낙에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기에, 거의 확정적이였던 셈이다. 사실 이와 관련해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인연 아닌 인연이 있는데, 2014년에 둘 다 통합 5번째로 남녀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 실패했다. 둘이 같은 나이인데다가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같이 호흡을 맞춘 적이 있어서 그런지 그 해 최대의 콩라인으로 같이 언급되기도 했다...
물론 디카프리오 쪽의 언급이 더 많긴 했다.2016년에 디카프리오가 남우주연상을 받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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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길버트 그레이프》, 《블러드 다이아몬드》, 《에비에이터》,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1번과 남우주연상에 3번, 작품상 1번[29]으로 총 5번이나 후보에 이름을 올렸지만 단 한 차례도 수상하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더 출중한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기에 많은 팬들이 그가 수상하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하고 있다.[30][31] 또한 《타이타닉》 때에는 후보에도 오르지 못하면서 한동안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32]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조차 미끄러지면서 아예 미국 웹에서는 '오스카를 못 받는 디카프리오 놀리기'가 하나의 밈이 되었다(...) 디카프리오, 아카데미 집착이 조롱받는 이유 현재는 아카데미 콩라인 관련 인물로서 일반인에게는 가장 유명한 인물. 이에 굴하지 않고 레버넌트에서 그야말로 개고생해가며 연기한 끝에 2016년 또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런 게임도 나왔을 정도. 그러나 이번만큼은 수상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많았고, 기어코 2016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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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파치노: 역시 빼놓을 수 없다. 1972년 《대부》에서 처음 남우조연상에 이름이 불린 후 1974년 《대부2》, 1975년《뜨거운 오후》[33][34] 등 총 8편의 영화로 후보에 올랐으나 모두 실패. 93년 65회 에서 《글렌게리 글렌 로즈》로 남우조연상을, 맹인 퇴역 장교로 큰 인상을 다시 한번 남겼던 《여인의 향기》로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었는데, 먼저 시상된 조연상은 진 해크먼이 가져가면서 올해도 공치는 분위기인가 싶었지만, 주연상을 기어이 따내면서 동료배우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았다. 저서 《65년간의 오스카: 아카데미 시상식의 역사》에서 저자가 파치노 사진 아래에 “그는 언제나 신부의 들러리 같았지 신부 같진 않았다.”라고 밝힌 바 있다.
- 폴 뉴먼 : 5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를 호령한 차도남의 조상으로, 클리프트-브랜도-딘을 잇는 할리우드의 반항아이자, '스크린의 전설, 슈퍼스타, 영화 역사 상 가장 유명한 푸른 눈을 가진 배우'이다(Screen legend, superstar, and the man with the most famous blue eyes in movie history)[35]. 그러나 이 분도 뛰어난 연기력과 화려한 경력에 비해 아카데미와 지독히 인연 없기로 유명하다. 1959년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처음 후보로 오른 뒤로, 1962년 《허슬러》, 1964년 《허드》, 1968년 《폭력 탈옥》, 1982년 《선택》, 1983년 《심판》으로 계속해서 남우주연상 후보에만 올랐다. 게다가 1969년에는 자신이 감독한 《레이첼, 레이첼》이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가 수상에 실패했다. 진정한 콩라인.. 그러다가 1986년에는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았고 1987년에는 드디어 《컬러 오브 머니》로 남우주연상을 받아 30년 동안 묵은 한을 풀었.....는데, 하필 본인은 이 해 시상식 때 '더 이상 실망하기 싫다'라며 참석하지 않았었다고. 더구나 이 해 칸 국제영화제를 비롯, 미국 4대 비평가 협회와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 등을 싹쓸이하며 오스카 수상이 거의 확실시되었던 《모나리자》의 밥 호스킨스가 뉴먼에 밀려 수상하지 못한 데 대해 지금까지도 비판하는 여론도 있다.
10.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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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니오 모리코네: 5회에 걸쳐서 음악상 후보에 선정.(《천국의 나날들》(1978), 《미션》(1986), 《언터처블》(1987), 《벅시》(1991), 《말레나》(2000)) 그러나 수상에는 실패했다. 우리에겐 널리 알려진 《시네마 천국》이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아예 음악상 후보도 들지 못했다.[36] 결국 2006년 제7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명예상을 겨우 수상하는데 그쳤다. 여담이지만 명예상 수상 때 이탈리아인인 그는 영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라서 당연히 이탈리아어로 수상소감을 말했는데 아카데미 측이 통역을 준비하지 않은 탓에 관중은 뭔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했고 시상을 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옆에 서있다 황급히 통역을 해주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2016년에 《헤이트풀8》으로 마침내 음악상을 받았다.
- 이안 : 이쪽은 감독상은 두 번이나 탔으니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작품상과 인연이 전혀 없어서 해당되는 케이스. 2001년에는 《와호장룡》이 나왔지만 《글래디에이터》에 밀려 작품상 후보에 그치고, 2005년엔 《브로크백 마운틴》을 선보였으나 《크래쉬》에 인해 탈락, 2013년엔 《아르고》가 차지했다.
- SF 영화 :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스티븐 스필버그의 《E.T.》가 작품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다. 그러나 모두 다 미끄러졌다(…) 다만 SF영화는 2010년 82회 시상식에 《아바타》와 《디스트릭트9》이 후보에 올랐기 때문에 콩탈할 가능성이 그 어느 때 보다 커지긴 했지만 결국 골든 글로브가 선택했던 《아바타》는 아카데미에선 미끄러지고 말았다. 결국 콩탈 실패. 2011년 83회 시상식에는 크리스토퍼 놀런의 《인셉션》이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블랙 스완》과 《킹스 스피치》라는 막강한 경쟁자들이 있어서 콩탈 실패의 가능성이 커보인다. 결국 작품상의 영예는 말 더듬이 임금님에게로 넘어갔다.
예상대로 콩탈 실패.2014년 86회 시상식에는 《그래비티》가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된 상황인데 이번의 경우는 《노예 12년》이나 《내브래스카》같은 경쟁작들이 있지만 2010년의 《블랙스완》, 《킹스 스피치》에 비하면 막강하다고 하긴 힘들다는 지적이 있어서 이번에야 말로 사상 최초의 SF 영화의 작품상 수상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오곤 있지만... 일단 골든 글로브는 《노예 12년》을 선택했는데 《아바타》와 《허트 로커》가 맟붙었던 2010년과는 정반대의 상황.골든 글로브와 반대로 가면 그래비티가 수상하나?《그래비티》는 무려 7개부분을 석권했지만 작품상은 골든 글로브처럼 《노예 12년》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알폰소 쿠아론이 감독상을 수상했는데 흑인감독의 흑인영화 최초 작품상 수상이라는 오스카 역사를 새로 쓴 노예 12년에 가려져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사실이지만 SF 영화로 감독상을 받은것은 《그래비티》가 최초라고 할수 있다.감독상 접수했으니 다음은 작품상이다!
- 토머스 뉴먼: 《월-E》, 《니모를 찾아서》, 영화 《로드 투 퍼디션》, 《아메리칸 뷰티》, 《쇼생크 탈출》 등에 참여하여 일곱 번이나 음악상에 후보로 올랐지만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스카이폴》로 여덟 번째 음악상에 지명되었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에 밀려서 실패했다. 그 뒤로 《스파이 브릿지》로 9번째로 음악상 후보에 올랐으나 이번에도 수상은 하지 못했다.
- 케빈 오코널: 아카데미의 또다른 콩라인 이자 총 18번 후보지명 (...)《탑건》, 《스파이더맨》, 《트랜스포머》 등 음향으로 참여하여 18번 후보에 총 20편이 지명[37] 되었지만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인지 미국 CBS 방송에도 출연까지 할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다.[38][39]
- 제임스 뉴턴 하워드 : 《사랑과 추억》, 《도망자》, 《쥬니어》, 《원 파인 데이》,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빌리지》, 《마이클 클레이튼》, 《디파이언스》로 무려 8번이나 음악상에 노미네이트 됐지만 단 한번도 수상하지 못했다. 《빌리지》로 수상이 점쳐졌지만 상은 《네버랜드를 찾아서》의 얀 A.P. 카치마레크가 가져가게 된다.
- 로저 디킨스 : 1949년 5월 24일 영국 데번 주의 토키 출신으로, 1975년 단편 다큐멘터리 《Mothers Own》에서 촬영 감독으로 데뷔한 뒤, 1977년 영화 《Cruel Passion》으로 처음으로 영화 촬영 감독을 맡게된다. 그 뒤 《쇼생크 탈출》, 《파고》, 《쿤둔》,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 《레볼루셔너리 로드》,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더 브레이브》, 《스카이폴》, 《프리즈너스》로 촬영상으로 총 11번 노미네이트됐으나 단 한번도 수상하지 못했다.《언브로큰》으로 또 노미네이트가 됐지만...
근데 유력한 후보가 있는지라...결국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2016년엔 시카리오로 13번째 노미네이트 되었는데, 악몽이 다시 재현되었다.??? : PROFIT!
10.4 콩라인으로 보기에는 억울한(?) 경우
- 메릴 스트립 : 총 19번 후보지명, 3번 수상 더이상 설명이 必要韓紙?
사실 필모그래피 부터 연기력까지 못해도 평타 이상이라서 공평성을 위해 아카데미에서 상을 안주는 것이...2012년 2월 26일에 열릴 예정인 제 8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되어 기록을 갱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녀의 선정 기록은 아카데미 역사상 최다 후보지명 기록인데 그걸 또 갈아치우기에 이르렀다. 그녀가 이번에 수상할지에 관심이 모이고 있는 중인데 일단 아카데미 시상식 예측의 척도인 골든글로브 시상식에 이어 84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에 수상하며 3번째 수상에 성공했다. 그리고 2014년 86회 시상식에서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이란 영화로 또 다시 여우 주연상 후보에 오른 바 있다. 후보에 많이 올랐으나 겨우 3번 받았다고 콩라인(?)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메릴 스트립 항목이나 여기서도 위에 콩라인에 그녀가 있었다위에 보았듯이 후보에 여럿 오르고 1번도 받지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도 있는 판국에 3번 수상은 콩라인이라고 할 게 있을까? 심지어 오는 2017년 시상식에서도 《플로렌스(영화)》로 여우주연상 후보 지명이 매우 유력시되는데, 이 경우 배우로서는 최초로 개인 통산 20회 노미네이션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하게 된다.
- 잭 니콜슨 : 총 14번 후보지명, 3번 수상. 여배우에 스트립이 있다면 남배우에는 니컬슨이 있다. 연기력 하나에선 역시 타의 추종을 넘는 배우로 평가받고 있다.
11 그외 기록
11.1 흑인 영화인
- 아프리카계 미국인배우[40]들에게 상당히 박하다. 오래전부터 헐리우드에 영화인으로 기여한 것에 비해 수상한 흑인 배우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히스패닉, 아시아계-미국인은 더 참담하다.
- 남우주연상: 1958년작 《흑과 백》(The Defiant Ones)에 출연한 시드니 포이티어가 처음 후보에 오른 뒤 2015년 시상식까지 20번의 노미네이트가 있었다. 1963년작 《들백합》(Lilies of the Field)에 출연한 시드니 포이티어, 2001년작 《트레이닝 데이》에 출연한 덴절 워싱턴, 2004년작 《레이》에 출연한 제이미 폭스, 2006년작 《라스트 킹》에 출연한 포레스트 휘태커가 수상했다.
- 남우조연상: 1969년작 《멤피스로 간 세 도둑》에 출연한 루퍼트 크로스가 처음 후보에 오른 뒤 2015년 시상식까지 17번의 노미네이트가 있었다. 1982년작 《사관과 신사》에 출연한 루이스 고셋 주니어, 1989년작 영광의 깃발에 출연한 덴절 워싱턴, 1996년작 《제리 맥과이어》에 출연한 쿠바 구딩 주니어, 2004년작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출연한 모건 프리먼이 수상했다.
- 여우주연상: 1954년작 《카르멘 존스》에 출연한 도러시 댄드리지가 처음 후보에 오른 뒤 2015년 시상식까지 10번의 노미네이트가 있었다. 수상자는 2001년작 《몬스터볼》에 출연한 할리 베리가 유일하다.[41]
- 여우조연상: 1939년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출연한 해티 맥대니얼이 처음 후보에 올라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2015년 시상식까지 19번의 노미네이트가 있었다. 1990년 《사랑과 영혼》에 출연한 우피 골드버그, 2006년작 《드림걸즈》에 출연한 제니퍼 허드슨, 2009년작 《프레셔스》(Precious)에 출연한 모니크, 2011년작 《헬프》에 출연한 옥타비아 스펜서, 2013년작 《노예 12년》에 출연한 루피타 뇽오가 수상했다.
- 작품상의 경우 1985년작《컬러 퍼플》(퀸시 존스)이 처음 후보에 오른 뒤 2015년 시상식까지 6번의 노미네이트가 있었다. 수상작은 2013년작 노예 12년(스티브 매퀸)이 유일하다. 감독상의 경우 2015년 시상식까지 1991년 존 싱글턴, 2009년 리 대니얼스, 2013년 스티브 매퀸 감독이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은 하지 못했다.
11.2 아시아계 영화인
- 감독상: 1964년작 《모래의 여자》[42]를 감독한 테시가하라 히로시가 196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처음 후보에 올랐다. 이후 2015년 현재까지 1985년작 《란》을 감독한 구로사와 아키라[43], 1999년작 《식스 센스》를 감독한 M. 나이트 샤말란, 2000년작 《와호장룡》, 2005년작 《브로크백 마운틴》, 2012년작 《라이프 오브 파이》를 감독한 이안 감독이 후보에 올랐다. 수상자는 2006년 시상식과 2013년 시상식에서 각각 수상한 이안 감독이 유일하다. 이중 테시가하라, 구로사와 감독은 일본인, 샤말란 감독은 인도계 미국인, 이안 감독은 대만 출신 미국인이다.
- 작품상: 1986년 《전망 좋은 방》(이스마일 머천트[44], 인도계 영국인)을 시작으로 2015년 현재까지 8번의 노미네이트가 있었지만 수상은 하지 못했다. 《와호장룡》과 《라이프 오브 파이》로 작품상 후보에 이름을 올린 이안 감독 역시 수상하지 못했다. 이들 이외에 후보에 오른 키트먼 호(A. Kitman Ho)[45]는 홍콩 출신, 리처드 사카이[46]는 일본계 미국인이다.
- 남우주연상: 1956년작 《왕과 나》에 출연한 율 브리너(할머니가 몽골계 혈통인 러시아계 미국인)가 처음 후보에 올라 수상했고, 1982년작 《간디》, 2003년작 《모래와 안개의 집》에 출연한 벤 킹즐리(아버지가 인도계)가 후보에 올라 《간디》로 수상했다.
- 남우조연상: 1957년작 콰이 강의 다리에 출연한 하야카와 셋슈(일본 출신)가 처음 후보에 올랐고, 1984년작 《킬링필드》에 출연한 행 송남 응오(캄보디아 출신)가 수상했다. 하지만 행 송남 응오는 조연상이 아니라 주연상을 받아야 한다는 논란이 거셌고 조연상을 받아야 했다던 백인 배우 샘 워터스튼이 주연상을 받으며 더 말이 많았다. 결국 이 둘 다 이후로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못하며 배우로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못했다. 이외에 《산 파블로》에 출연한 이와마츠 마코(일본 출신), 《가라데 키드》에 출연한 팻 모리타(캘리포니아 출신 일본계 미국인), 《라스트 사무라이》에 출여한 와타나베 켄이 후보에 올랐다.
- 여우조연상: 1957년작 《사요나라》에 출연한 우메키 미요시(일본 출신)가 처음 후보에 올라 수상했다. 이외에 《신의 아그네스》에 출연한 멕 틸리와 《브로드웨이를 쏴라》에 출연한 제니퍼 틸리(아버지가 중국계), 《모래와 안개의 집》에 출연한 쇼레 아그다슐루(이란계 미국인), 《바벨》에 출연한 기쿠치 린코(일본인), 《트루 그릿》에 출연한 헤일리 스타인펠드(어머니가 필리핀계 포함)이 후보에 올랐다.
- 여우주연상: 1935년작 《다크 엔젤》에 출연한 멜 오베론(인도계 영국인)이 후보에 오른게 유일하다.
11.3 여성 감독
1976년 《Seven Beauties/Pasqualino Settebellezze》의 리나 베르트뮬러[47], 1993년 《피아노》의 제인 캠피언, 2003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소피아 코폴라, 2009년 《허트 로커》의 캐스린 비글로 감독 4명만이 감독상 후보에 올랐으며, 이 중 수상자는 비글로 감독이 유일하다.
11.4 외국어 영화상
2009년 2월 23일,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일본 영화 굿바이가 외국어 영화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