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문서 : 오승환
목차
1 선수 생활
1.1 프로 입단 전
도신초등학교 5학년 11월. 다소 늦은 시기에 야구에 입문했다. 늦게 입문했지만 두각을 보여 우신중학교 시절 138km, 한서고등학교 1학년 때 145km/h에 육박하는 공을 던져 메이저리그 스카우트의 눈길을 끌기도 하였다. 프로 전,두각
경기고등학교 시절 오승환(오른쪽). 왼쪽은 경기고 시절 동기였던 이동현.[1]
2학년을 마친 뒤 경기고등학교의 우승 프로젝트를 위해 경기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1년 앞서 서울고에서 경기고로 옮긴 에이스 이동현의 뒤를 확실히 받쳐 줄 투펀치가 되어줄 것이라고 기대받았지만, 허리 부상 때문에 빛을 발하지 못했다. 대신에 타자로서 활약했다.[2] 경기고 졸업 후 단국대학교에 입학했다. 투수로서 재능과 가능성을 본 강문길 감독의 권유로 다시 투수가 되었다. 그러나 허리부상이 나을 때쯤, 팔꿈치 부상으로 결국 수술을 하게 되었다. 긴 재활 끝에 3학년 때 복귀해 이후, 대학 최고의 투수로 일약 명성을 떨치게 된다. 다만 수술 경력이 있고 폼이 특이하여 혹평을 당하기도 했다.
(출처 : 포토로) |
웃음꽃이 활짝 핀 대학 선수시절 봉중근?
이러한 부상 경력 때문인지 당시 삼성 감독이었던 선동열은 오승환을 뽑지 않으려고 했었다. 심지어는 계약 직전까지 갔었다는 오승환의 지역 연고 구단인 LG 트윈스 까지도 내구성 의구심에 외야자원이 필요하다는 요청으로 정의윤으로 지명을 선회했다는 소리가 있다. 그러나 삼성 스카우트진의 강력한 건의에 의해 삼성은 오승환을 2차 1순위로 지명하게 된다. 그리고 연속으로 2차 1픽이 성공했다.
1.2 삼성 라이온즈 시절
끝판왕,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전문 마무리 투수
대구의 수호신
특유의 역동적인 투구폼.
1.2.1 2005 시즌
(출처 : 포토로) |
삼성 라이온즈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그도 첫 해엔 노예였다. 아무리 대학에서 검증된 투수라고 해도 신인을 첫 시즌부터 고정 마무리로 쓸 순 없으니.. 중간계투와 마무리를 넘나들며 한경기 2이닝씩도 흔하게 던져서, 61경기 출장에 무려 99이닝을 던졌다.
결국 10승 1패 16세이브 11홀드를 기록했다. 그도 10승 투수 출신인 것이다(…). 역대 프로야구 선수 중 1시즌 10승 10세이브 10홀드를 기록한것은 아직까지도 이때의 오승환이 유일한 기록[3][4]으로 남아있다. 또한 평균자책점은 무려 1.18[5], 블론세이브는 단 하나뿐이었고, 선발도 아닌 주제에 삼진은 무려 115개를 잡아내며 삼진순위 5위에 드는 기염을 토했다. 한국시리즈에서도 3경기 등판, 1승 2세이브. 특히 2차전에선 연장 10회 무사 1,2루 위기에 등판에 3타자 연속삼진을 잡아냈다. 당연히 신인왕 쟁취. 무려 10년만에 삼성에서 배출한 신인왕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에서도 김재걸과 경쟁 끝에 MVP를 따냈다.[6]
5월 3일 마산 롯데전에서 7회 라이온(2점)-이대호(1점)에게 백투백 홈런을 맞았는데, 이것은 오승환의 프로생활 9년 동안 딱 한번(!)있었던 백투백 홈런이었다.[7]
1.2.2 2006 시즌
(출처 : 포토로)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언터쳐블 소리[8][9]를 들었다.[10] 바렛기사
또한 일본과의 경기에서 9회말 구대성이 니시오카 츠요시에게 피홈런을 기록한뒤 안타를 맞자 구원등판했다. 일본은 대주자로 아오키 노리치카를 기용하고 대타로 2005년 센트럴리그 홈런왕 아라이 타카히로를 대타로 내보낸다. 그러나 오승환은 아라이에게서 삼진을 뽑아냈다.[11] 그리고 이어서 6번타자 다무라 히토시가 초구에 거의 넘어갈뻔한 파울볼을 치자 모두 기겁했다. 그후 다무라도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내며 경기를 끝냈다. 이후 이치로가 매우 분노한듯한 모습이 보였다.[12]
그리곤 소포모어 징크스따위 엿이나 먹으라는 듯 47세이브를 기록하며 한시즌 최다세이브 기록을 경신했다. 첫 해만큼은 아니지만 63경기 79.2이닝이라는 전문마무리로선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79이닝동안 삼진을 109개나 잡아내는 괴력도 뽐냈다. 그 당시에 야갤에선 오승환을 '끝판대장'이라 부르며 1,2,3아웃을 두고 죽어도 세 번 이을 수 있다는 등의 발언을 했을 정도.
평균자책점이 첫 해보다 못하지만 FIP의 경우 2006시즌이 최고였는데 0.6, 조정기록 FIP+ 599정도로 역대 단일시즌 불펜투수 중 최고의 FIP을 기록했다. [13] 괴물1 괴물2
WBC, 코나미컵 대회 등으로 인해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계속 던져 온 탓인지 2006년 연말에는 구속이 시즌 중보다는 좀 떨어진 편이었고 그 때문에 아시안게임 한일전에서 오뎅장수 출신의 사회인 야구선수에게 홈런을 쳐맞으며 졸지에 '오뎅환'이라 불리며 까이기도 했다.[14]
컴투스 프로야구 for 매니저에도 흠좀무한 능력치로 등장한다. 부상 시즌이었던 09~10시즌을 제외하면 모두 ㅎㄷㄷ 한 능력치로 나오며 06오승환과 11오승환은 변화구와 제구 능력치가 100에 육박한다. 삼성 올스타 효과에 장비빨을 더하는 것 만으로 변제가 110에 육박하고, 연도덱을 맞춘다면 그 이상도 노릴 수 있다. 11오승환은 멘탈까지 90으로, 일단 올라오는 경기는 지지 않는다는 걸 체감할 수 있을 정도. (그래도 93선동열 95선동열에는 미치지못하지만...)
1.2.3 200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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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불허전 오승환, 40세이브를 기록하며 KBO 사상 최초로 2년 연속 40세이브를 기록했다. 다만 탈삼진율은 전 시즌에 비해 상당히 하락했다. 물론 그래도 이닝당 탈삼진 개수가 1은 넘었다는거(...)
07년 시즌부터는 1이닝을 초과해서 투구하는 경기가 적어지는 등, 제대로 관리되는 전문 마무리투수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게 된다.
1.2.4 2008 시즌
그간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국제대회 등을 거치며 지쳤는지 2008 시즌에서는 정상이 아닌 몸 상태로 던졌지만[15] , 떨어진 구속을 구위, 제구력으로 메꿔내는 마술을 보였다. 다만 4월 25일 롯데 자이언츠 전에서는 시즌 첫 패와 블론을 당했다. 롯데팬들에겐 3대 역전대첩으로 남은 경기다 나머지 둘은 2011년 4월 23일 SK전과 2012년 4월 24일 브래드 토마스에게 시즌 중반 잠시 세이브 1위를 넘겨준 적도 있지만 이는 오승환이 못했다기보다는 팀이 막장이었기 때문. 저 때 삼성은 선발들이 조기에 털리는 바람에 세이브 기회 자체가 잘 오지 않았다. 후반부 들어서는 구속도 상당부분 회복되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39세이브를 기록하며 세이브 1위는 했지만, 단 1개 차이로 아쉽게 3년연속 40세이브를 기록하지 못했다.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로 뽑혀 갔지만, 정작 그가 기록한 성적은 1승 1세이브가 끝. 이는 본인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어서였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저 1승은 승부치기로 흘러갔던 중국전에서 중국 측 주자의 태그업 미스 덕분에 얻은 것. 그러나 야구팬들은 작가를 까기에 혈안이 된 상태여서 오히려 묻히고 말았다.
몇 년 후 오승환 본인이 밝히길 부상시즌 09~10 이전인 2008년부터 팔꿈치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1.2.5 2009 시즌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출전했으나, 구위가 정상이 아닌데다 나올 기회가 좀처럼 오질 않아 낚시하러 떠난 손민한 다음으로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이어 시작된 정규시즌에도 초반 한 시즌에 하나 당하기 힘들었던 피홈런을 2개나 당하면서 평균자책점이 급상승. 마침 마무리 투수의 내구연한은 3년이 한계인가?라는 기사가 올라오면서 이제 오승환도 끝인가 하는 견해가 올라왔지만, 1주일도 안 돼서 그런 기사 따위 엿이나 먹으라는 듯 데뷔 초의 150km/h 돌직구를 부활시켰다(…).
문제는 1점차 세이브 상황에서 더 잘 던진다는 것. 점수 차이가 많이 벌어지거나 세이브 상황이 아닌 동점에 올라올 때는 그냥 제대로 샌드백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2009년 7월 2일 18세이브를 기록하며 세이브 부문 단독 선두... 까지는 좋은데 평균자책점이 4.40으로 한기주급 평균자책점. 게다가 피홈런 7개로 벌써 한 시즌 맞을 홈런을 다 맞은 상황. 흠좀무.
이 상황에서 블론세이브는 아직 5월 15일 롯데전에서 기록한 1개. 9이닝당 삼진 비율은 14.38개로 웬만한 선발 에이스를 훨씬 웃도는 수준. 참고로 7월 2일 현재 삼진 1위인 고효준의 9이닝당 삼진 비율은 10.37개.[16]
다만 7월 19일 어깨통증으로 강판[17]당했는데 이게 알고보니 어깨 인대가 찢어져 버렸다고 해서 시즌 아웃. 그뒤에 재활에 들어갔다. 재활이 성공적으로 된듯.
1.2.6 2010 시즌
2010년, 3월 17일 시범경기에서 1이닝 1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를 하면서 더이상의 블론세이브는 없습니다. 올해 목표는 몇 세이브가 아니라 최대한 불을 안 지르는거지요라는 목표를 내놓았다.
3월 27일 개막전에서 최고구속 147km/h의 위력적인 공을 뿌리며 호투했지만 세이브까지 원 스트라이크를 남기고 이진영에게 동점홈런. 첫 경기부터 블론세이브를 기록했다. 결국 삼성은 그 경기에서 졌다.
하지만 바로 며칠 뒤 열린 한화전에서 8회말 2사부터 올라와 4타자 연속삼진을 잡아내면서 아직도 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당연하지 상대가 한화인데 두경기 밖에 등판 안했지만 이 페이스대로라면 돌직구가 부활했다고 봐도 무방할듯 싶었다. 그런데 4월 8일 강정호에게 쓰리런을 맞으며 또 블론세이브를 기록했다. 다행히 끝내기 폭투로 팀이 승리하긴 했다.
4월 30일, 대전 한화전에서 9회 마무리로 등판했던 오승환은 부상으로 인해 자진강판되는데, 문제는 자진강판의 사유가 사타구니 가래톳 부상. 가래톳 부상은 하필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매독, 임질의 증상으로 나오는터라, 졸지에 성병환, 톳승환이라는 별명이 붙어버렸다(…).
6월 16일, 사직 롯데전에서 9회말 2아웃에서 마무리로 나와서 이대호에게 홈런을 맞으면서 또 블론(…) 다행히 팀이 이기긴 했지만….
7월 2일까지 팀의 블론세이브가 3개뿐인데 그게 전부 오승환이다.
6월 18일, 팔꿈치 부상으로 2군으로 내려가는데 검진 결과 팔꿈치에 뼛조각이 발견되어 결국 뼛조각 제거수술을 받게 되었고 복귀는 포스트시즌 이후로 예상, 선감독은 포스트시즌에 등판하긴 무리라 예상했다.
2010년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벌인 자체 청백전에서 폭풍같은 3실점. 구속은 147km/h을 찍었다고 한다. 포스트시즌 등판 의욕이 엄청나게 강해서 선동렬 감독이 놀랐다고 했다. 근데 두산 베어스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전 엔트리에서는 제외되었다.안습.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고, 오승환은 프란시스코 크루세타와 채상병을 대신하여 구자운과 함께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는 포함되었다.
2010년 10월 15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3 : 2로 이기던 5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 4번째 투수로 등판했지만, 6번타자 김강민의 대타로 나온 박재홍에게 밀어내기 볼넷, 7번타자 김재현 2타점 적시타를 맞고 정현욱으로 교체되었다.
정현욱이 8번타자 박경완을 삼진으로 잡아 이닝을 끝내서 오승환의 실점은 없었고, 오승환은 이날 0이닝 투구수 12, 1피안타 1볼넷 무실점을 기록했다. 팀은 스코어 5 - 9로 역전패했다.
오승환은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2경기 1⅔이닝 1피안타 1볼넷 무실점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패4대떡로 준우승에 그쳤다.
팀은 준우승했지만 고작 4세이브를 기록하며 커리어로우를 기록한 오승환에게는 잊고 싶은 한 해가 되었다. 그러나 2011년 이후에는….
1.2.7 2011 시즌
본인의 아시아 세이브 신기록 타이와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다
"오승환 Save Us",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이 종결된다.
오승환이 등판한 경기에서 단 한번도 팀의 패배는 없다.
해당 문서 참조 .
1.2.8 2012 시즌
작년에 비해서 다소 세이브 개수가 줄어들었으며, 특히 424대첩에서 ⅔이닝동안 무려 6실점(2실점은 안지만의 분식)을 하는 등 초반에 불안불안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시즌 종료 후 세이브 타이틀의 주인공은 역시 오승환이었다.
해당 문서 참조.
1.2.9 2013 시즌
팀이 승리를 거둘 때 대승하는 경우 또는 끝내기로 이긴 경우가 많아서인지 세이브 기회가 많이 오지 않았고 부상 없이 풀 타임 마무리를 소화한 시즌 중에 유일하게 타이틀 확보에 실패하였다.
해당 문서 참조.
1.3 일본프로야구 진출: 한신 타이거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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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경기의 끝에 등장하는 최강자
2014년 10월 12일 일본 니시노미야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2014 일본프로야구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2차전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한신 타이거스의 경기에서 한신이 퍼스트 스테이지 1승 1무로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을 확정지었을 때의 모습.
국내 정상급 선수들이 다 그렇듯이 오승환도 일본 진출 떡밥이 존재했다. 압도적인 모습으로 부활한 2011년때 슬슬 제기되기 시작했는데 당시 오치아이 투수코치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의견에 의하면 일본리그 진출을 가정할 경우, 투피치의 적은 구종이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제구력 좋은 강속구 투수이기에 마무리로서 분명히 상위클래스에는 들어간다고 했다. 참고로 오치아이 투수코치는 한일간의 야구격차에 대해서 굉장히 솔직하게 평가한다. 즉 한국야구가 일본야구 수준이라는 식의 립서비스는 하지 않는 사람. 단 같은 팀 선수라서 립서비스해줬을 가능성은 있다.
결론적으로 분명히 일본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구위이기에 성공 가능성이 낮지는 않지만 더 좋은 제구력과 더 다양하고 예리한 변화구가 뒷받침 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일본에 진출한다면 자칫 한국선수의 일본진출 잔혹사가 또 하나 늘어날 수 있다는 평가였다. 물론 애초에 리그간 이적이라는게 단순히 선수의 기량을 떠나서 수많은 변수[18]가 존재하기에 아무도 예상 할 수 없다. 그 누가 알았겠는가? 일본 역대 최고의 투수라던 헤이세이의 괴물은 MLB에 가서 반짝 활약을 보이다 ERA/FIP 4점대로 처참히 몰락하고, 탁구장을 홈구장으로 삼았던 만년 하위권 팀에서 멘탈 훈련만 계속 해 온 어느 에이스가 MLB에서 여러 시즌 동안 꾸준한 활약을 해 올 줄이야......[19]
한편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국대팀이 폭망한 와중에도 완벽한 투구 내용[20]을 보여주면서, 일본 진출이 다시 한번 거론되었다. 특히 오릭스 버팔로스와 후지카와 큐지가 미국으로 떠난 한신 타이거스 등의 구단은 대놓고 관심을 표했다.
게다가 메이저리그 진출 떡밥이 갑작스럽게도 2013 시즌에 접어들면서 튀어나왔는데, 류현진이 한국야구에서 워낙 독보적 에이스로서 한국야구 최초로 포스팅을 통해 메이저리그로 간 사례로 인해 독보적인 최강의 마무리인 그 역시도 메이저리그 진출이 가능하지 않냐는 의견이 나온 것이 계기. 공식적으로 언급된 것은 아니지만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오승환을 체크하고 있는 모습이 13시즌에 종종 보였다.[21][22]
그리고 2013년 11월 5일, 삼성 라이온즈 측에서 대승적 차원으로 오승환의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23]
일단 각 리그에서 오승환을 노리는 관심 구단을 하나씩만 꼽자면 우선 NPB의 한신 타이거스. 위에서도 말했지만 WBC에서의 호투에서부터 오승환을 대놓고 노리고 있었고 거액의 돈으로 러브콜을 날릴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MLB의 뉴욕 양키스. 마리아노 리베라가 은퇴해서 불펜 보강이 시급하기 때문에 우완 투수인 오승환을 노리고 있다는 루머가 떴다.[24]
2013년 11월 20일, 한신 타이거스와 2년간 7억엔으로 입단을 합의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틀 후인 11월 22일, 한신 타이거스와 2년간 9억엔(계약금 2억엔, 연봉 3억엔, 옵션 연간 5천만엔)에 계약을 확정하였다. 카더라지만 몇몇 MLB 구단은 왜 포스팅 시스템도 안해보고 성급하게 일본행을 결정했냐는 아쉬움의 소리를 했다고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카더라에 불과.
일본 현지팬의 반응은 한국에서의 모습을 찾아보고 기대하는 팬과, 아무리 그렇다해도 타리그 출신의 마무리투수에게 너무 돈을 썼다는 우려가 교차하는 중. 또한 한국팬들과 마찬가지로 현지팬들 또한 오승환의 모습에서 후지카와 큐지를 겹쳐보는 시선이 많았다. 한편으로 1회 WBC때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았던 게 오승환이라는 루머가 일본에서 잠깐 돌았으나 얼마 안 가 서재응으로 밝혀졌다.
한편 등번호는 후지카와 큐지의 22번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한신 구단에서 오승환에게 거는 기대를 알 수 있는 대목. 등장 테마곡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라젠카 세이브 어스'를 쓸 예정이라고 한다. 변경점이 있다면 종소리가 일본 학교에서 흔히 쓰이는 종소리로 바뀌고 원곡자인 N.EX.T와 작곡가 윤치웅이 편곡할 예정이라고 한다.#
힙합가수 주석이 오승환에게 선물한 Oh가 2014년 오승환의 테마곡으로 바뀌었다. [1]
1.3.1 2014 시즌
일본에서 맞은 첫 시즌. 첫 해부터 NPB의 외국인 투수 데뷔 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을 세웠으며 한국인 첫 구원왕이 되었다. 또한 선동열이 가지고 있던 종전 한국인 최다 세이브 기록을 갱신하였다. 성적은 64경기 66⅔이닝 2승 4패 5홀드 39세이브, 평균자책점 1.76.
블론세이브 6개를 기록하며 오승환답지 않은 기록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세이브성공율은 리그 내 최고였고, 기타 (거의) 모든 세부스탯이 리그 불펜투수들 중 최고였다. 2014시즌 리그 MVP 4위라는 불펜으로선 상당한 활약도를 보인 첫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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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스윕하고 시리즈 MVP로 선정되었을 때.
2014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MVP 수상. 6경기 8⅓이닝 2실점(평균자책점 2.16) 4세이브 1홀드.[25]
한일 통산 300세이브 달성은 덤이다.
1.3.2 2015 시즌
야구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다사다난했던 해. 2년 연속 센트럴리그 구원왕을 차지했으나 부상으로 시즌을 조기 마감해야 했으며, 시즌 막판에는 도박사건에 연루되는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한신과 좋지 못한 결별을 맞았다.[26] 또한 유리와 연애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이 해 결별하였다.
1.4 메이저리그 진출
1.4.1 2016 시즌
"Penultimate Boss", 이제는 새로운 "Final Boss"
끊임없이 불을 지르는 세인트루이스 불펜진의 믿음직한 수호신으로 등극하다.
명불허전의 활약을 보여주는 중. 6월까지 기록으로나 영향력으로나 내셔널리그 탑 셋업맨이라도 해도 과장이 아닌 수준으로 던지더니 7월에는 로젠탈을 밀어내고 마무리 자리를 꿰찼으며 도박사건으로 인해 따가웠던 국내 팬들의 시선이 어느정도 누그러 들고 있다. 자세한 활약상은 해당 항목 참고.
1.4.1.1 WBC 국가대표 합류 여부 논란
김인식감독이 WBC의 국가대표로 참가해서 속죄투를 던지라는 식의 인터뷰를 하는 바람에 도박과 관련된 논란이 재점화 되었는데 전체적인 여론은 오승환을 비판하는 쪽이나 옹호하는 쪽 모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오승환을 도박사건으로 비판하는 쪽에서는 실력만 있으면 범죄자를 국가대표로 써도 되냐면서 그런식이면 박현준, 이태양(범죄자)도 국제대회 한정으로 기용하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고, 오승환을 옹호하는 쪽 역시도 국가대표로 참여한다고 해서 오승환의 KBO 징계가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국가를 위해 속죄투를 던지라는 말은 전형적인 꼰대식 발언이며 이미 리그에서 피로가 누적된 오승환이 휴식기간에 국제대회에 나가는 것은 혹사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조금 다른 의견으로는 김인식 감독 동정론이 있다. 발언의 잘잘못과는 별개로 현직 감독들은 리그를 핑계로 본인이 사령탑을 맡는 것을 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코치와 선수 차출마저도 비협조적인 주제에 국제대회와 관련된 모든 책임은 김인식 감독에게 떠맡기고 있다. 거기다 하필이면 리그의 우완 투수들이 단체로 부진에 빠져있으며 그나마 괜찮은 성적을 내는 투수였던 이태양(범죄자)은 승부조작 혐의를 시인해서 완전히 제명되었으며, 윤성환과 이재학은 조사가 끝나지 않았기에 무혐의가 확정될 때 까지는 엔트리에 확실하게 넣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김인식 감독이 본인이 무리수인 것을 알면서도 엔트리 구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오승환의 이름을 언급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 ↑ 이 때만 해도 이동현은 경기고의 에이스 투수였고 오승환은 그냥 후보
물주전자에 불과했다... - ↑ 주로 1번 타자에 외야수로 출장했으며, 당시 야수로서도 괜찮은 활약을 보였다. 발도 제법 빠른 편이라고. 하일성 위원도 경기고 경기를 중계하면서 오승환이 프로에서 통할 만한 타격 재질을 가졌다고 칭찬했다.
- ↑ 여담이지만 선동렬 감독이 (뭔가 다른 의미의) 트리플 크라운을 만들어 주기 위해 시즌 막판 9승이었던 오승환을 일부러 등판시켜서 1승을 슬쩍 챙기게 했다(...). 덕분에 졸지에 10-10-10 멤버가 되긴 했지만… 김성한이 출동하면 어떨까?
- ↑ 2015년 8월 16일 현재 SK정우람이 7승 4패 11세이브 10홀드로 가시권에 두고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인지도는...지못미
- ↑ 역대 시즌 중 가장 많은 이닝을 던진 시즌이지만, 0점대 평균자책점의 몬스터시즌인 '11시즌만 제외한다면 가장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시즌이다. 세이브 신기록을 세웠던 2006시즌의 평균자책점도 1.59이었다.
- ↑ 정작 본인은 김재걸선배가 MVP받는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2011년에도 다시 MVP를 득템한다. 지금도 대구아재들이 가장 그리워하고 있다.
- ↑ 실제로 오승환은 이대호에게 약한데, 상대타율은 그렇게 높지도 낮지도 않지만, 통산 28피홈런 중 3홈런이 이대호에게 맞은 홈런이다(오승환 상대 홈런 1위). 그 다음으로는 2홈런의 손시헌. 또한 이대호가 오승환에게 블론세이브를 안긴 횟수도 2012년 기준 통산 블론세이브 16회중 2회, 무려 전체의 12.5%를 차지한다.
- ↑ 1회 WBC에 출전한 포수 마이클 바렛(당시 시카고 컵스), 공격형 포수로 이름이 높다.
진숙희한테 원 펀치를 날린걸로도 유명.)은 우왕 저 친구 방금 100마일을 던지는 거 같았어라고 평가했다. - ↑ 그런데 사실 100마일을 던지는 듯한 자신감을 가졌다는 말을 했지 공의 위력 자체가 100마일급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 ↑ 하지만 당시 바렛의 글 문맥을 고려하면 단순한 자신감으로 한정하기엔 애매하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
- ↑ 이때 총 6개의 공을 뿌렸는데 스트라이크 3개가 모두 헛스윙이다...
- ↑ 경기후 인터뷰에서 이치로는 자기 야구인생에서 가장 굴욕적인 날 이라고 했다.
- ↑ 참고로 선동열 커리어 중 FIP+가 최고였던 1995년도의 그의 기록 499
- ↑ 사실 오승환에게 홈런을 때린 쵸노 히사요시는 프로팀에게 지명을 받았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지명을 받기 위해 지명을 두번이나 거부하고 사회인 야구에서 뛰다 2009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에 1순위로 지명될 정도로 재능 있는 선수였다. 그리고 2010년 센트럴 신인왕에 이어 2011년 센트럴 리그 타격왕을 수상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당연히 오뎅 장사라는 건 사실이 아니며 이 루머는 아시안게임 한일전 직후 2CH에 올라온 걸로 가장해서 개드립을 친 면갤러 '더리올'이 썼는데-오뎅장사, 시골 역 역장 등 아마추어로 구성된 일본 대표팀이 한국 대표팀을 꺾었고, 말년에 그 일을 회상한다는 내용- 경기 패배 후 이 면갤러는 야갤에 2CH 눈치를 보러 갔다가 이런 글이 있더라라는 식으로 구라를 깠고 당시 일본 사회인 야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던 상황이라 국내 네티즌들은 진짜로 대표팀이 조기 야구회 같은 동호회 집단한테 발리고 온 줄 알고 가루가 되도록 깠고 결국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이미 굳어져 버린 별명이라 그냥 그대로 쓰이고 있다.
사실 입에 찰지게 달라 붙는기는 하다덤으로 이 면갤러는 08베이징 올림픽 우승,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 이후에도 번역인 척 개드립을 쳐서 수많은 이들을 낚았다. - ↑ 유일하게 이닝당 탈삼진이 1보다 작은 시즌이다
- ↑ 단, 이 기록은 본래 불펜 투수가 유리한 기록이긴 하다. 2010 시즌 류현진도 이 부분에선 불펜 투수들에 밀려 10위권 안에 간신히(…)들었다.
- ↑ 사실 이 이전인 7월 16일에도 구속이 140밖에 안 나오자 선동열 감독이 바로 내리고 배영수를 기용한 적이 있었다. 물론 결과는 대 역전패.
- ↑ 팀의 선수 관리나 선수의 적응력 같은 것을 의미한다.
- ↑ 단 구로다는 팀이 막장이라서 그렇지 이미 센트럴리그를 씹어먹던 에이스 중 하나였다.
- ↑ 8타자 상대 6타자를 삼진...
- ↑ 잠시 최정, 김현수, 강정호도 언급됐지만 어느 순간부터 성장이 정체됐다는 느낌을 주면서 묻혔다.
- ↑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포스팅을 통해 불펜투수를 영입한 적은 없다. 아무리 불펜투수들의 몸값이 오르고 있다지만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포스팅 비용까지 투입하며 불펜투수를 영입하기는 꺼려한다.
- ↑ 실제로 삼성 라이온즈 구단은 이 약속을 확실히 지켰는데, 이적료를 고작 5천만엔(한화 약 5억원)만 받으면서 오승환이 용병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대우의 연봉을 받고 팀을 옮기게 지원해줬다. 이전까지 자유계약 신분이 아닌 상태에서 이적한 한국 선수들이 이적료로 수 억엔이 발생했던 것에 비하면 오승환의 이적료는 사실상 형식적인 액수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오승환이 라디오 스타에서 밝힌 바로는, 그 이적료마저 오승환에게 줬다고 한다.
- ↑ 허나 이쪽은 말 그대로 루머에 불과. 이미 양키스는 셋업맨인 데이빗 로벗슨을 차기 마무리로 낙점해두고 있었기에 오승환을 노릴 이유가 사실상 없었다. 로벗슨이 화이트삭스로 떠난 후에는 FA시장에 나온 앤드류 밀러를 바로 영입했다.
- ↑ 기록만 보면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저 2실점은 마지막경기 6점차로 벌어진 상황에서 헹가레투수로 등판한 경기에서 한 것이고 결정적인 경기에서 3이닝을 던지는 등 정규시즌 후반부터 순위다툼을 위한 혹사 속에서 호투했다고 볼 수 있다.
- ↑ 애초부터 오승환이 메이져 도전을 염두에 뒀다는게 정설이지만 일단 공식적인 한신의 입장은 도박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범죄자를 마운드에 올릴 수 없다는 이유로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