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은(가수)

제 1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악인 부문 수상자
-휘성(남자)
이상은(여자)
빅마마(그룹)
(2004년)
이승철(남자)
이소라(여자)
클래지콰이(그룹)
(2005년)
제 3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악인 부문 수상자
이승철(남자)
이소라(여자)
클래지콰이(그룹)
(2005년)
조규찬(남자)
이상은(여자)
W(그룹)
(2006년)
이지형(남자)
박선주(여자)
노브레인(그룹)
(2007년)
제9회 MBC 강변가요제 대상
문희경
그리움은 빗물처럼
(1987)
이상은
담다디
(1988)
박영미
이젠 모두 잊고 싶어요
(1989)

파일:Attachment/이상은(가수)/lse-001.jpg
15집 프로필 사진 (2014년)

이름이상은 (李尙恩, Lee-Tzsche)
출생1970년 3월 12일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본관전주 이씨 효령대군
신체178cm[1], O형
성좌/지지물고기자리 / 개띠
학력Pratt Institute, Fine Arts, New York
가족무남독녀, 미혼
종교개신교
데뷔1988년 강변가요제 대상 '담다디'
소속사브리즈뮤직 (대표)
공식 페이스북 팬카페

1 개요

한국 가요계에서 전무후무한 캐릭터이자 레전드 싱어송라이터

"지금 생각해 보면 '담다디' 때 나는 꼭 명절에 친척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나중엔 너무너무 창피하고 화가 났다. 어떻게 내 자신이 그랬나 싶을 만큼. 그때 어른들은 나보고 그랬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그랬던 너 자신이 귀여워질 거라고. 그 말에 코웃음치며 만든 음반이 <공무도하가>다. 미국까지 멀리멀리 방황하다 돌아온 것이다. 지금은 그게 결국 나였구나 하는 것을 알 것 같다. 멀리 도망을 갔다가 와서 방에 누워 있는데 문득 그때가 그리워지는 거다. 그럴 때 깜짝 놀라며 알게 된다. 그 두 가지가 다 나라는 것을. 친척들 앞에서 '피리 부는 사나이'를 부르는 것도, 사르트르니체를 읽는 것도 나였다." --- 이상은
"어느 기자님이 '원래 이상은이라는 개인의 캐릭터를 사람들이 재미있어 했는데, 이제는 점점 음악에 귀가 가는 것 같다'고 말씀해주셔서 너무 고맙게 생각했다. 원하던 바였다. 내가 팔리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소중하게 여겨졌으면 좋겠다. 그 뮤지션이 누군지 모르고 전혀 나오지 않더라도 그냥 좋은 음악들 있지 않나? 나이 먹을수록 그런 내공을 쌓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 이상은

1988년 만 18세라는 대학생 나이에 강변가요제에서 <담다디>로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지만, 2년 후 아이돌 스타로서 회의감을 느끼고 유학을 떠난다. 미국, 일본, 영국 등을 떠돌며 자신만의 음악 스타일을 지닌 싱어송라이터로 변모하였고, 'Lee-tzsche (리채, リーチェ)'라는 이름으로 해외 활동도 하였다. 특히 2007년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 된 이상은의 앨범 두 장 중, 6집 <공무도하가> 앨범이 10위에 오르며 100대 명반의 10위권 안에 있는 유일한 여성 뮤지션이 되었다. 주로 인디씬에서 활동하며 음악 이외에도 미술, 여행작가, 라디오 DJ 등 다양한 활동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 왔고, 2014년 2월에는 정규음반 15집을 발표했다. 대표곡으로는 '담다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할거야', '언젠가는', '공무도하가', '새', '어기여디어라', '비밀의 화원', '삶은 여행' 등이 있다.

2016년 데뷔 28년차, 정규 앨범만해도 15장. 3집부터는 모두 자작곡.

이상은은 아이돌스타에서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아티스트로 진화한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꼽힌다. 보통 인기가 떨어지면 다른 길을 모색해 보는 것과 달리, 모두가 의아해 하던 한창 인기 절정 시점에 자신의 꿈을 위해 모든걸 버리고 떠났기에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 그치지않고 지금도 여전히 창작열을 불태우고 있는 현역임을 감안하면, 정말 살아있는 레전드인 동시에 후배들의 좋은 롤모델로서 손색없는 인물일 것이다.



이상은의 대표곡들의 영상을 볼 수 있다.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가 1993년 곡 '언젠가는'을 97년으로 설명한 건 에러.)

2 바이오그래피

2.1 데뷔 이전

1970년 3월 12일생(빠른학년임[2].) 당시 정말 흔치 않은 무남독녀 외동딸인 이상은은 건축가인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어린시절부터 예술쪽 재능이 뛰어났다고.[3] 미술, 만화, 문예, 연극[4]은 물론 학교 행사때마다 앞에 나가 춤추며 노래하는 끼 많은 아이였고, 공부 또한 잘 하는 그야말로 엄친딸. 이미 창덕여고 시절 학교명물로 하이틴 잡지에도 소개되고 (고1때 아래 빨강 털실가발 사진), 고2 때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매스게임에 참가했는데, 당시 연습 대기 시간에 학교별 장기자랑이 있었을 때에도 잠실야구장을 들었다놨다 한걸로 유명했고, 고3때는 학교규정상 고3출연은 안된다는 룰마저 깨버리고 MBC TV <젊음은 가득히>라는 청소년 프로에도 출연해 'Eurythmics - Sweet Dreams'를 불렀을 정도로 나름 인기도 많고 유명했었단다. 선생님들도 이뻐하는 학생이었다고 전해진다. (이상은의 고교 동창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증언1, 증언2.)

파일:Attachment/이상은(가수)/lse-002.jpg
창덕여고 시절 이상은. 장기자랑때 신디 로퍼, 마돈나 흉내 많이 냈었다고 한다.
추가로 고3때 박선주와 함께 잡지에 실렸던 희귀 사진(...)

원래 부모님도 본인도 미대에 가기를 원했고, 서울대 미대를 목표로 공부하고 화실도 다니던 고3시절, 갑자기 화실비를 못 낼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5] 진로 고민을 하게 된다. 화실도 아버지 친구분이 원장이라 계속 다닐려면 다닐 수는 있었지만, 몇 달치가 계속 밀리니 왠지 부담스러워서 다닐 수가 없었다고. (훗날 인터뷰를 보면 입시미술이 갑갑하고 그림이 싫어질 정도로 질려버린게 더 큰 이유였던 듯.) 결국 예체능계 중에 실기를 많이 안보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알아보다 입학원서 쓰기 한달 전, 과감히 미대 지망에서 한양대 연극영화과로 바꾸게 되는데 부모님 반대가 심했지만[6], 어차피 노래, 연극 등 무대에 대한 꿈도 있었기에 강하게 밀어 붙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한양대 건축학과를 나왔는데 그나마 동문이라며 좋아하셨다고. (참고로 한양대 연영과는 다른 학교 연영과와 달리 실기 비중이 낮고 성적으로 뽑는 학교로 유명하다. 특이하게도 2006년 이전까진 연극영화과가 예체능이 아닌 인문과학대 소속으로 타대학 보다 아카데믹한 분위기였고, 연영과 수석이 인문대 전체수석이었던 적도 많았단다. 관련글 한마디로 공부 잘 해야만 갈 수 있었고, 연영과가 전통적으로 연출쪽에 특화된지라 연예인들 자체가 별로 없었다. 요즘은 실기로도 선발하고 연예인 전형도 있다지만, 당시엔 유명한 연예인이라도 성적이 나쁘면 입학할 엄두도 못내던 곳이라고.[7] 더욱이 이상은은 선지원 후시험이었던 학력고사 세대이고 4년제 연영과도 전국에 딱 5군데[8] 있던 시절, 입결성적도 제일 높았던 한대.. 공부를 정말 잘 하긴 한 모양.[9] 이상은이 대학입시 과정을 직접 쓴 글.)

어쨌건 부모님은 귀한 외동딸이 고상하게 미술가가 되길 바랬지만, 뜬금없이 딴따라 가수가 되는걸 보고 한동안 어이없어 하셨다고 한다. 양장점을 하셨던 어머니[10]가 빛이 쏟아지는 쇼윈도우를 들여다보다 귀를 후비는데 하얀 진주알이 나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하는데, 뭔가 가수와도 맞아 떨어지는듯 하다. 귀에서 진주라니!

2.2 데뷔

한양대 연영과 1학년생 이상은은 1988년 8월 6일 춘천 남이섬에서 열린 <제 9회 MBC 강변가요제>에서 같은과 선배가 만들어 준 '담다디'[11]란 노래로 대상을 차지해 그야말로 혜성처럼 가요계에 등장하였다.

강변가요제 '담다디' 본선 경연모습.

당시는 댄스가수들을 평가절하 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발라드의 시대였기 때문에, 이상은은 당연히 세련된 발라드곡을 들고 나온 이상우가 대상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자신도 대상을 탄게 믿기지 않았던지 당시 MC였던 이수만SM의 그분이 "TV를 보고 (생각나는)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보시죠"라는 질문에 (당연히 부모님 이야기가 나올거라 예상한듯) "마이클 잭슨"이라고 말해버려(...) 전국민을 충격으로 몰아갔다.[12]

강변가요제 시상식 장면.

마이클 잭슨!!!

(중학교때 마이클 잭슨이 스릴러(Thriller)앨범으로 그래미상 휩쓰는 모습이 너무나 멋있게 보여서, 그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이제 가수가 되면 마이클 잭슨도 볼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 정도로 순진했었다고.)

홍석천이 강변가요제 이상은의 모습을 보고 반해서 한양대 연영과로 들어갔다고 한다. 관련기사
강변가요제 직후 바로 한양대 연영과 직속선배였던 박미선의 개그프로에 불려나가 갈굼(?)을 당하기도.. 물론 실제로는 친했음.(#사진)
지금은 뮤지컬 배우로 더 유명한 전수경은 강변가요제 예선때 담다디 피아노 반주를 해줬었는데, 과후배 이상은이 대상을 탄 것에 자극받아 그해 대학가요제에 출전해 동상을 수상했다. 관련기사

'담다디 담다디 담다디담~' 후크송 못지 않은 중독성 있는 가사와 흥겨운 리듬에 독특한 춤사위, 개구쟁이 같은 귀여운 컨셉으로 1988년에는 담다디 열풍이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당시 전국민이 흥얼거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관념적인 노랫말과 단조의 멜로디가 주류를 이루던 80년대에 '담다디'는 신선한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고, 곡의 신나는 분위기는 당시 서울 올림픽 축제의 열기를 한층 고조시키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울려퍼졌다.

담다디춤을 잘 볼 수 있는 영상. 담다디 활동 초기에 주로 보여줬던 춤이다. 담다디 부를때는 깨방정 떨어줘야 제맛! 이덕화김청이 선장과 선원으로 분해서 식인종으로 분한 이상은한테 능욕당하는 모습도 충격이다. 아저씨 맛있게 생겼다!! 아티스트 이상은을 먼저 접했던 사람들에게는 과거 모습들이 조금 충격적일 수도 있겠다(...). 전국의 각종 장기자랑 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던 담다디와 그 춤. 어깨와 다리를 이용한 쉬운 동작으로 남녀노소 가릴것 없이 모두가 들썩였던 춤이다. 손목에 운동화 끈이나 손수건을 감고 나오는 등 이상은의 독특한 스타일링 또한 화젯거리였다.

도무지 무대에서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탬버린을 신나게 흔들어대며 즐기듯 노래하는 중성적 매력의 꺽다리 여대생. 보는 이들의 눈길을 단번에 휘어잡은 이상은은 온갖 매체들의 전면을 도배하기 시작했으며, 엄청난 폭발력으로 그해 각종 시상식 수상은 물론, 이 인기에 힘입어 '담다디'라는 영화에 주연으로 연기까지 했지만.. 팬이라도 절대로 보지 말 것을 권한다. (사실 연영과 출신이라 캐스팅한거 같은데 겨우 1학년짜리가 연기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더군다나 실기 없이 성적으로 들어갔다는데..전체적으로 영화내용도 부실하고 노래 한곡으로 급조한 티가 남. 이상은이 워낙 바빠 3일만에 촬영 다 끝냈다는 얘기도 들렸다. 심지어 이상은 본인 목소리도 아니고 더빙된 다른 목소리였던걸로..)

88년 가요톱텐 연말결산 '담다디' 영상
이 영상에서의 롱코트 간지 선머슴 같은 모습과 대조적으로 88년 MBC 연말 가요대제전에서는 드레스를 입고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88년 가요대제전 영상) 빨간 떡볶이코트를 입고 나왔던 88년 골든디스크 시상식. 연말 위 세 무대만 봐도 알 수 있듯 때론 남자같이, 여자같이, 아이같이.. 무대연출이 정말 자유자재다.

1988년 보리텐 광고. - 이 광고에는 1988년의 이상은이 대중에게 보여주었던 이미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부라보콘 항목의 CF에서도 이상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상은은 '진짜 물건'이었다. 당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자가수들의 전형적인 틀을 깨버린,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갑툭튀한 이제껏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캐릭터였고, 발빠른 어른들이 그걸 보고 가만히 놔둘리 없었다. 딱 봐도 끼가 넘치는 시원 털털 유쾌발랄한 이미지에, 어린나이 답지않게 재치 있는 말솜씨와 똑똑한 대학생 이미지까지. 그렇게 이상은은 데뷔 하자마자 라디오 DJ를 시작으로 쇼프로 MC, CF, 예능, 연기 등 여기저기 엄청 불려다니면서 소비되기 시작 한다.[13]

당시 경향신문에 실렸던 이상은에 대한 평가.

  • - 강변가요제 사회를 맡았던 가수 이수만10년에 한번꼴로 등장할 비디오형 가수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심사위원 및 가요계 인사들도 88년 가요계를 주도할 새 세대의 기수로 손색이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

비디오형 가수 코스프레 했던 이상은.

  • "이른바 들국화김현식, 그리고 조용필이선희가 지배하던 80년대의 지형도에서는 굉장히 생소한 곡일 수도 있었다는 거죠. 새로운 어떤 감수성을 지닌 10대 엔터테이너의 등장이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 강헌 (대중음악 평론가)

이상은의 '담다디 열풍'에 대해 당시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칼럼도 있었다. '담다디족(族)'에 관한 짧은 명상

역설적이게도 이상은은 강변가요제 방송 직후 쏟아진 폭발적인 인기 때문에 당시 기형적인 음반시장에서 가장 피해를 본 가수가 되었다고 한다. 강변가요제 정품 음반이 2주일이 지나서야 출시되었는데, 그전에 강변가요제 실황은 테이프로 불법 복제되어 그 다음날부터 리어카에서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당시 판매 열풍을 기억하는 한 음반 리어카 판매상은 “모르긴 몰라도 100만장은 나갔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이미 길보드(불법 복제시장)에서 수요가 완전 소화됐기 때문인지 정품의 판매량은 시원치 않았던 것이다. 길보드에 망한 '담다디' (임진모 글)

그리고 1988년에 가장 센세이셔널 하고 신드롬급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댄스곡 보다 트로트나 가창력 위주의 가수들을 더 높이 쳐주고 여전히 보수적인 잣대가 존재하던 시절이었기에 조금은 저평가 당한 면도 없진 않았다. 실제로 가장 권위가 있었던 MBC 연말 시상식에서 드물게 신인상에다 10대 가수상까지 타고,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도 수상했던 거에 반해, KBS에서는 아무런 상도 받지 못했다. 심지어 당시 유일한 가요 순위프로였던 KBS 가요톱텐에서 담다디가 4주 1위까지 했었는데도, 그해 1위곡이 없었던 이지연에게 신인상을 안겼던 것이다. 여러 신문 등 언론에서도 이상은을 가장 강력한 신인상 후보로 꼽았기에 이를 두고 뒷말이 많았고, 타 방송사 가요제 출신이라 견제당했다는 말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보기엔 이전에 이선희는 신인상을 받았었다. 훗날 인터뷰들을 보면 아이돌 활동 당시 방송사와 PD들의 갑질로 인한 상처도 많았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자신이 부른 노래가 인기를 끌기 위해서는 각종의 뒷거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몹시 서글프고 노래를 부르는 의미마저 상실한 기분이었다고. 시스템 자체가 공정하지 못하고 어떤 PD는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길래 거부하고 인사도 안하고 다녔더니 활동내내 괴롭혔다고 한다. 이후의 이상은이 점점 인기나 순위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초연했던 데에는 이런 배경도 있었던 것이다.

데뷔 4개월차 때인 1988년 12월 신문 인터뷰를 보면 벌써 연예계의 문제점을 다 파악하고 많은 고민이 있었다는걸 알 수 있다.

2.3 아이돌 시대

" 처음 한 6개월은 정말 재밌었어. 그러다 문제가 어디서 발생했느냐면, 나는 그때 방송국에 우리 과 애들을 데리고 다녔다고. 매니저 아저씨들 너무 무서워, 계약하기 싫어, 집에서 전화 받고 스케줄 잡고 그랬어. 6개월쯤 지나니까 애들은 학교로 돌아가고, 나는 어설프게 프로의 세계로 들어가야 했던거지. 온통 뜯어먹으려고 덤비는 사람들. 아이돌 시스템은 상업적 이유로 구획된 인물들만 의도적으로 포진되어 있잖아. 사방이 그렇게 변해버리는 순간, 내 영감의 근원이랄까, 그런게 다 없어져버렸어." --- 이상은
" 가인(歌人)이고 싶었다. 가수라는 말은 기능적인 면만 드러내는 것 같아 왠지 싫었다. 더욱이 노래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 같은 나의 모습은 마치 혼이 빠진 허수아비처럼 느껴진다.  ...사실 당황했다. 마치 큰 파도에 떠밀려 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담다디 담'이었다. 진지한 노래를 피 토하며 부르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는데 갑자기 어릿광대가 돼버린 느낌이었고, 그런 괴리감은 나를 절망까지 몰고 갔었다. '보여지는 나', '보여주는 나', '보여주고 싶은 나'가 저마다 다른 얼굴에, 다른 곳을 가고 있는 것이었다. ...여러 활동을 하고 있지만 나는 누가 뭐래도 가인(歌人)이고 싶다." --- 이상은

당시 이상은의 사무실(연습실) 이름도 '가인방'이었다.
이상은의 신데렐라 스토리- 1989년 1집을 발표할 무렵, 한 신문사의 스타스토리 코너에 직접 글을 연재한 적이 있다. 그녀의 성장과정과 어떠한 사람인지를 대략 엿볼수 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1989년 1월에 강인원[14]이 프로듀싱한 1집을 발표하는데, 타이틀 곡은 의외로 느린 발라드 곡인 '사랑해 사랑해', 'Happy Birthday'를 선보였다. 하지만 담다디 같은 곡을 기대했던 대중들에게 발라드를 부르는 이상은은 낯설었고, 그래서인지 1집은 담다디의 폭발적인 인기에 비해 다소 실망스런 결과를 낳았다. 사실 1집 활동 당시 매니저아저씨와의 갈등과 학업 때문에 TV방송 활동을 자제한 탓도 있다. 1집때 활동 영상도 찾아보기 힘들다. 1집 '사랑해 사랑해' 영상- 이 곡은 현재까지 라디오에서도 많이 나오는 명곡이다. 당시 팬들의 환호성으로 보았을때 10대들에게 인기가 많았었다. 훤칠한 키에 웬만한 남자가수 보다 더 멋져보이는 미소년 같은 모습. (#사진) 원조 걸크러쉬라고도 불린다.[15]

갓 데뷔한 신인으로는 드물게 단독 콘서트를 열기도 했는데, 1집 첫 콘서트 날짜가 바로 이상은의 열아홉번째 생일(89. 3. 12.)이었다. 공연 끝나고 선물 더미가 어마어마했다 카더라. 참고로 2집 콘서트는 90년 3월 1일(2회)이었는데, 장소는 똑같이 63빌딩 국제회의장. 단독 콘서트를 통해 외적인 이미지 보다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보여주고자 했고, 성공리에 공연을 마치며 자신의 입지를 굳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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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도 크고 대학생이라 어리다고는 생각이 안들었는데, 지금보니 완전 앳된 모습이다. (빠른년생이라..)

가요제 출신이면서도 아이돌이라고 불리우는 가수는 드물었는데 바로 이상은이 그런 케이스. 바꿔말하면 태생 자체가 가요제 대상 출신의 이미 검증된 아티스트 였던건데, 10대 나이에다가 실력 보다는 비주얼, 스타성이 더 부각되면서 대중은 물론 소속사나 음악 관계자들에게 조차 아이돌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움짤들(귀염주의)을 보다보면 그런 반응이 당연할 수 밖에 없었다.

데뷔당시 만 18세로 나이도 어렸고, 당시로서는 매우 보기드문 톰보이스타일로 마치 순정만화의 보이시한 남장 여주인공 이미지를 현실로 옮겨 온 듯한 판타지와 유쾌함에, 남자들이 아닌 소녀팬들의 열광적 추종을 이끌어냈던 한국가요사에서 가장 파격적인 여자아이돌 중 한명이었다. 80년대 대표 두 여자아이돌의 콜라보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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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빠!

" '남자 같다'는 말은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고, 또 그렇게 사람들이 봐주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그것은 어떻게 말하면 내 보호막이었고, 여자들이 하기 곤란한 부분까지 영역을 넓힐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었다." --- 이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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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시 스타일이지만 남자사람이랑 붙여(...)놓으면 의외로 케미가 좋아 팬들을 긴장시키는 소소한 루머들도 많았다. (아주 가끔씩 치마(!)도 입고 나타나고, 꾸미기에 따라 여성스럽고 차분한 모습도 많이 보였기에 더욱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좋았음.) 대표적으로 아래 젊음의 행진 남자MC는 팬들의 감시(?) 대상이었다고.[16] 사진은 그거랑 관련은 없지만 대략 저런 분위기가 아니였을까 싶다. 연출이니 오해하지 말자 젊은시절 이종원박상원이다. 뭐 대충 키만 맞으면..

젊음의 행진 MC 영상 1, 영상 2

1989년 당시 인기 쇼프로그램이었던 KBS '젊음의 행진' MC시절. 발랄한 이상은의 모습을 엿볼수 있다. 상업성에 내몰렸던 이시기의 이상은은 성대결절[17] 로 목상태가 안좋았음에도 활동을 계속 해야만 하던 시절이었다고. 화면을 보다 보면 목이 많이 상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상태로 2집 활동을 계속했으니 아마 속으론 이를 갈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인터뷰 영상에서도 목이 아프다는 말을 한다.

이 라이브 영상들을 보면 카메라를 보고 밝게 웃으며 노래하고는 있지만, 당시 목상태가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차라리 립싱크를 시키지..저정도면 거의 가수를 학대한 수준이다.(지금 보면 짠한 모습이기도 한데..돈에 눈먼 어른들 세계에서 어린 이상은은 심하게 상처 받고 부서지고 있었지만, 특유의 밝고 파워플한 외양 때문에 다들 전혀 그런 점은 인식하지 못했다. 사실 카메라 앞에선 이렇게 까불까불 귀엽게 잘 노는데, 그 실상을 알 수가 있었겠나..)

"담다디로 뜨고 나서 아저씨들이 이상한 곡을 채집해 오면, 나는 부르고 싶지 않았지만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목이 쉬었는데 노래를 부르게 해서 그것을 팔아먹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그때 당시 하도 울어서 베개가 누런색이었다."

"...목소리가 거의 안 나왔지. 근데 나는, 2집이 그런 식으로 내게 상처를 줬기 때문에, 다음이 가능해진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 녹음하다가 너무 화가 나서 다시는 이렇게 못하겠다, 이건 치욕이다, 다 정리하게 만들었으니까." --- 이상은

성대결절 상태에서의 무리한 레코딩으로 2집앨범과 캐럴음반, 후에 동요앨범까지 이상은의 상당히 허스키하고 거친 쇳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개중에는 이때 당시 목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본인에게는 상처였고, 그 때문인지 '아오아오아' 와 '그대 떠난후' 활동 시에는 새롭게 편곡, 녹음한 방송용 버전이 따로 있었다. 목을 충분히 쉬어줘야하는데 가수활동 외에도 MC, DJ등 목을 계속 혹사시켰으니.. (나중에 유학가서 만든 3집앨범에서는 어느 정도 회복된 목소리를 들려준다.)

파일:Attachment/이상은(가수)/lse-004(1).jpg

더불어 1989년에는 MBC 추석특집 가족드라마에 최수종이랑 남매로 출연하기도 하고(자료), 영화감독 이규형 한양대 연영과 출신이 직접 스포츠서울에 쓴 소설을 영화로 만든 <굿모닝 대통령>[18]허준호와 함께 주연으로 나온 바 있다. 이 영화는 1989년에 시행된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에 발맞춰 배낭여행을 소재로 태국 및 유럽 여러나라 올로케이션으로 찍었는데, 사전 허락도 없이 즉석으로 일을 진행하는 바람에 촬영허가가 나지않아 촬영 포기나 변경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고, 이상은은 유럽 길거리에서 춤을 추는데 이걸 보는 백인 현지인 및 다른 관광객들이 멍때리는 얼굴을 보면 처량하다. 이 영화는 서울관객 58,117명[19]으로 기대 이하 흥행을 거뒀고 평에서도 악평만 당했다. 당시 영화잡지 로드쇼에 나온 한 평론가 평-- 태국 가서 보트피플 약탈하는 해적과 싸우다가 죽은 친구를 위하여 애국가 불러준다? 그리고 담다디 이상은의 유럽 길거리 춤, 뭐하러 넣은 거냐?.. 그나마 영화 주제곡( 오,장,박- 내일이 찾아오면)이 인기를 끌었고, 리즈시절 이상은을 볼 수 있다는거 외엔 그다지 의미없는 영화. (굿모닝대통령 예고편-1980년대 영화인것을 감안하더라도 손발이 오글오글...)

배우들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연기력이지만 그래도 연영과 출신인지라, 어느 쇼프로에서는 1인 3역 연기(...)까지 한 적이 있다. 젊음의 행진 MC때는 연말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마리아 분장하고 뮤지컬 연기도 했었다. I Don't Know How To Love Him
얼굴표정 또한 변화무쌍하다. (#표정)

여러가지 활동을 하며 바쁜 와중에도 학업은 놓지 않았었다. 당시 활동 모습들을 봐도 무대의상 조차 그냥 청바지에 티셔츠, 학생티 풀풀나는 옷차림을 하고 다녔고, 수업은 많이 빼먹을수 밖에 없었지만 학생의 본분은 잊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나는 가수이기 이전에 학생이다. '이젠 옛날 생활로 돌아갈 수 없을 거다'라고 겁주는 어른들이 많지만, 그렇다고 강의실에 앉아 있는 내게 '이리 나와'라고 말한다면 옳지 못한 사람이다. 음악을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요즘 흔히 듣는 말처럼 '사람답게 살며' 음악을 하고 싶다. '반짝'하고 사라지는 이상은이 아니라 오래도록 남는 진짜 '신데렐라'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팬들에게도 항상 '학생은 공부가 우선'이라며, '쫓아다니지 말고 공부해라' 며 잔소리를 했다는 증언들이 많다. 이러한 면들은 팬들에게 더 호감을 얻는 부분이기도 했는데, 무대 위에선 정신없이 뛰어다니지만, 무대 외의 이상은은 보기 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지적으로 어필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이를테면 퀴즈 프로그램에 나와 상품을 싹쓸이 해 간다든지, 저명 인사와의 요런 만남이라든지, 팬이었던 기자의 경험담까지(...). 유학을 떠날 무렵, 한 잡지기사에서 한창 공부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수업까지 빼먹고 자신을 쫓아다니는 어린 팬들을 보며 '나는 혹시 사회악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고 한다. 당시 아이돌 가수로서 얼마나 회의감과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너무 생각이 많아도 문제임.

발라드를 내세웠던 1집의 부진 때문이었는지 1989년 12월에 발매한 2집에서는 빠른 템포의 '사랑할거야'를 타이틀곡으로 하여 가요톱텐 1위후보(2위)까지 오르며 인기를 얻었지만, 1993년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일본 록가수인 쿠와타 케이스케의 솔로앨범 수록곡 "Just a Man in Love"표절한 것으로 판명되어 흑역사가 되고 만다. 사실 도입부나 곡의 코드 진행이 거의 같기 때문에 누구든 들어보면 알 수 있을 정도이지만, 당시 일본 문화가 개방 되지 않은 상태라서 발견 되지 않았고, 이후에도 거의 언급이 되지 않는듯.[20] 어찌됐든 이상은 본인의 의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일단 별도의 작곡자 명의(최봉 작사, 원경[21]작곡)로 되어 있기도 하고, 신해철이 잠시 거쳐가기도 했던 그룹 '아기천사- 사랑할거야'의 리메이크 곡이라고 한다. 워낙 마이너한 그룹이라 대신 이 곡을 불러서 히트한 이상은이 덤터기를 쓴 꼴이 됐다. 이런 경험이 자신의 아이돌 활동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최근에 '사랑할거야' 고화질 영상이 올라왔다! 본인은 암울한 시절이었다고 얘기하지만, 당시 무대에서 보여주었던 그 특유의 생글거림을 그리워 하는 사람이 많은 듯.)

당시 인기 유아프로였던 '뽀뽀뽀'에 출연한 상은송아지.
큰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유딩, 초딩을 비롯한 남녀노소 누구나 알아보는 그야말로 전국민에게도 친근한 스타였다. 한 에피소드로 이상은이 지방공연 갔다가 '여기서는 못 알아보겠지' 하며 시골 마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밭 매던 할머니들이 '담다디 아니여?'하고 알아 보시더라는. 그때 이상은은 그런 상황이 기쁘다기 보다는 일종의 공포심을 느꼈다고 한다. 또 하루는 자고 있는데 아파트 2층 베란다로 군인이 넘어 들어와 너무 무서워서 높은 19층으로 이사를 가야했으며, 집 앞엔 항상 팬들이 진을 치고 있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이 좋아하는 떡볶이도 자유롭게 못 사먹어서 슬펐다고. 마치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 같다는 착각이 들 만큼 유명세를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주로 여행은 좀 더 자유로운 외국으로..

아이돌로 인기를 얻었던 1989년에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여 캐롤 음반을 내기도 하고, 90년에는 동요(...) 음반도 나왔었다. 하지만 이상은은 음반기획사의 '상품'에 지나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2집 앨범에 수록된 첫자작곡이기도 했던 다소 유치한 느낌의 '아오아오아'에서는 스타 시스템에 의해 조종 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빗대어 노래하기도 했다. 페이크 타이틀처럼 2집 발매전 잠시 활동했었던 곡으로 신나는 분위기지만 속뜻을 알고나면 마냥 즐겁게 들리지만은 않는 곡이다. 그 가사를 보면 '빨간 꽃 단 저 아가씨 숲에 숨어 또 우네. 달빛 아래 저 아가씨 몰래몰래 또 우네. 사람들은 모두 불가에 마주앉아 떠들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어릴적 꿈꿔오던 가수 생활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 많았다. 나 스스로가 음악보다는 형식적이고 꾸며지는 것에 길들여지다 보니 슬플 때도 많았다."

"당시 그런 시스템 문제만이 아니라, 팬들 역시 아이돌 스타로서의 이상은 만을 원했다. 대중과 나 사이에 인기는 존재했지만 음악은 존재하지 않았다." --- 이상은

그 당시 이상은의 매력을 분석한 기사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전형적인 아이돌(Teen idol)로서 노래 보다는 가수자체의 인기가 더 높았다고 볼 수 있겠다.

가요제를 통한 갑작스런 데뷔이기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학 새내기에 불과했던 이상은은 오직 돈만을 쫓는 쇼비지니스 세계에서 그 나이또래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어, 노래 외에도 영화와 드라마에 정신없이 휘둘리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인기도 많고 재능이 보이니 혹사시킨거 였겠지만, 다른 가수들에 비해 유독 이상은은 외도가 잦은 편이기도 했다. MC, DJ, CF, 영화, 드라마, 예능 등 데뷔하고 2년이란 기간 동안 연예인으로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면의 활동을 다 해본 셈이다. 또한 1, 2집의 곡들이 꾸준한 사랑을 받기는 했었지만, 점점 예상과 달리 대중성에서 벗어나 열렬한 극팬덤형 아이돌로 가는 상황이었다.) 단지 음악이 좋아서 시작했던 일인데, 대중적 인기의 결과가 결국 표절 시비와 광적인 아이돌 스타에 대한 맹목적 추종으로 나타난 것에 대한 회의감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막장사태까지 벌어졌었으니...



스스로 막을 내렸던 아이돌 시대의 마지막을 불살랐던 노래. 당시 저 20살 여자애의 무대장악력을 보시라. 자유분방하고 개성 강한 정말 매력적이였던 아이돌. 요즘 저런 스타일로 나왔어도 인기 쩔었을 듯. 탬버린과 선글라스, 스탠딩마이크로 멋들어지게 연출한 색다른 무대도 있다. 과연 여덕들이 환장할 만하다. 이게 무려 26년전 무대이고, 그 이후로 저런 보이시한 매력으로 무대를 휘어잡았던 여성솔로가 있었는지 생각해보면..가히 독보적이었다고 볼 수 밖에. 일단 기럭지부터가.. 다른 버전 그대 떠난 후 무대들을 봐도 알겠지만 정해진 안무 없이 그냥 프리스타일이다. 락카 스프레이 버전

80년대 인기 있었던 생방송 전화연결 쇼프로 출연 무대. '화요일에 만나요'- 그대떠난 후 뭔가 오글거리는 파파라치 무대연출과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그녀의 아이돌스러운(?) 몸짓이 인상적이다. 저러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으니 팬들은 멘붕..

1990년 늦가을. 2집 '사랑할거야' 후속곡으로 자신이 작사한 '그대 떠난 후'[22]를 마지막으로 라디오DJ등 모든 활동을 중단, 학교까지 휴학하고[23] 훌쩍 미술유학을 떠난다. (저 노래가사를 가만히 들어보면 뭔가 의미심장하다.)

"우리나라 대중음악계는 내가 상상을 한 것과 너무 많이 달랐다. 그래서 좀 답답했던 것 같다. 가수가 된 계기가 고등학교 때 듀란 듀란, 컬처 클럽, U2, 아하 등의 팝송을 좋아했다. 그렇게 자유롭게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코미디 프로그램 같은 데 나가는 것이 너무 싫었다. ‘이게 뭘까? 사람들이 좋아해 주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닌데,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이상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게 음악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노래를 한다는 것은 유쾌한 상상이었어요. 하지만 현실은 달랐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작곡가들의 노래를 받아서 부르는 것 뿐이었어요. 녹음실에 가면, 엔지니어들은 가수를 음악하는 사람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어요. 그저 매니저가 키우는 스타였죠. 가수가 명예로운 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할까, 이유가 뭘까’라고 고민하게 됐죠.” --- 이상은
"그때 동아기획이란 음반사가 있었다. 나도 동아기획이란 음반사에 너무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동아기획엔 못 들어간다는 거다. 나 같은 아이돌은 동아기획에 못 들어간다. 그때 동아기획의 유명 뮤지션이 '시인과 촌장'이었다. 난 안된다는 거다. 넌 아티스트가 아니야. 그래서 엄마한테 그랬다. 나 공부할래.” --- 이상은
"데뷔하고 1년쯤 지나니까 ‘이게 아니다’ 싶더라고요. 과로가 계속되니까 마음도 우울해지는 거죠. 음악에 대한 욕심도 있었어요. ‘담다디’를 무척 좋아해 주셨지만 그게 제 곡은 아니었거든요. 당시 모 대학 교수님이 캐롤 킹 음반이랑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제가 아이돌 하지 않았으면 좋겠대요. 캐롤 킹은 자기 인생을 노래하는 아티스트인데 당신이 이 사람처럼 됐으면 한다고 꼭 들어보래요. 음악 프로그램 피디 분들도 아이돌은 반짝스타니까 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사실 어린 나이니까 콧방귀도 안 뀔 수 있는 건데, 전 그 말이 맞는 것 같더라고요. 중요한 시기에 주위 어른들한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예뻐해 주신 분들이 많았어요. 처음에 아무 고생 없이 스타가 딱 됐던 거잖아요. 근데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자기 길을 0부터 걸어가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해요. 그래서 저도 다 내려놓고 0부터 시작한 거죠." --- 이상은
“(1990년) MBC 라디오 ‘밤의 디스크쇼’를 진행하며, 저쪽 세계에 있는 선배 가수들을 많이 만났다. 신촌블루스, 어떤날[24], 한영애 등. 그들 앞에서 난 초라했다. 그들은 음악인이지만, 나는 가벼운 연예인이었다. 지금처럼 살다가는 한영애 같은 가수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노선 변경을 결심했다. 세계관이 바뀐 것이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당시 그런 환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사랑할거야’ 표절 파문도 약이 됐다. 내가 곡을 직접 쓰면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결심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됐다.”  --- 이상은
"당시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어린 마음에 상처를 많이 입었던 거 같다. 모든 방송 체계가 폭력적으로 보였고, 가식적이고 거품으로 가득 찬 허상의 세계가 정말 싫었다. 그러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음악을 하는 선배들이 눈에 띄었다. 한영애 선배님도 그렇고 들국화[25]어떤날도 그렇고, 근데 그 계보에 들어가려면 아주 오랜 시간 공부를 해야 한다는걸 알게 됐다. 유학을 결심한 것도 바로 그때 였다. 음악을 하기 위해 음악에 매달리는 것 보다 미술이나 문학 같은 다른 장르의 공부를 하는 것이 음악적인 상상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다. 미술 공부는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고, 언젠가는 그림도 그릴 것이다." --- 이상은

(어찌 보면 외동딸에 자존감도 높고 자기 뜻대로 하며 자유분방하게 자라왔는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어른들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하는 상황이 받아들이기 힘들고 체질적으로도 안맞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4 유학(뉴욕)

1993년 4집<너와 함께있는 이유> + 5집 <언젠가는> (립싱크)



93년 당시 KBS 가요톱10 <언젠가는> 라이브.
(가요톱텐에서는 5위권, MBC에서는 1위까지 했던 곡이다. 참고로 당시는 서태지 등장 이후 댄스곡들이 가요계를 점령하던 시기였다.)

여러가지로 연예계 생활에 회의를 느끼던 이상은은 1990년 높은 인기를 뒤로 하고 돌연, 그간 꿈꿔왔던 미술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가, 1991년에는 다시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떠난다. (제발 멀리 가지 말라는 부모님의 부탁도 있었고, 처음엔 일러스트레이션쪽 관심이 있어 가까운 일본으로 갔다가, 순수 미술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뉴욕으로 간거라고.) 뉴욕에서 미대 입학 준비하는 와중에도 음악에 대한 열정은 계속되어, 1991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제작한 셀프 프로듀스 앨범 3집 <더딘 하루>를 발표한다. 당시 뉴욕에서 매주 발간되는 정보지 '빌리지 보이스'를 통해 만나게 된 발레 음악하는 편곡자 Tom Semanski와 줄리어드 음대에 다니는 친구들이 세션으로 참여했는데, 클래식 악기가 많이 쓰여서인지 앨범이 정갈한 소품집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음반을 들어보면 이때 치고는 굉장히 음악적으로는 세련되었으며 기존의 이상은 노래와 완전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때부터 싱어송라이터 뮤지션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음반이라 할 수 있다. 더딘하루 당시 출연영상

미국의 명문 미대로 손꼽히는 백남준이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던 프랫 인스티튜트 유학시절에도 틈틈이 음반을 만들어 방학을 이용해 활동하게 되는데, 1992년 6월에는 흑인음악 프로듀서 김홍순과의 공동작업으로 힙합, 하우스풍의 4집 <Begin>을 발표하였다. 김홍순은 한국대중가요에 흑인음악의 작법을 거의 최초로 접목시킨 작곡가로 손꼽히는 인물로 당시 뉴저지에 살고 있던 양희은의 소개로 그의 아파트에 찾아갔는데 처음 보는 컴퓨터 장비와 시스템에 놀랐었다고 한다. 그때는 학교생활에 집중하느라 미리 써둔 곡이 없어서 김홍순이 리듬을 만들어 놓으면 거기에 맞춰 이상은이 가사와 멜로디를 붙여나가는 새로운 방식으로 재미있게 작업했다고 한다. 그래서 4집의 모든 곡은 공동작곡으로 표기되었다. 학교수업과 앨범작업을 병행하느라 코피 마를 날이 없었다는데, 4집앨범 쟈켓이 빨간색인 이유는 자신이 흘린 코피를 상징하는 거라고 장난스레 얘기한 적이 있다. 지금 들으면 촌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 앨범 발매 이후로 대세가 되었던 하우스, 힙합 장르의 초창기 명반으로 뒤늦게 재평가 받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에는 한국이 아닌 일본의 'JAZZ LIFE'에 추천음반으로 소개 되는걸 보고 참 신기했었다고 한다. 뉴욕에서 4집작업 당시 이상은의 그림편지

92년 <너와 함께 있는 이유> 영상 노래만 듣고 춤은 신경 쓰지말자(...)
92년 <솔직히 말해줘> 영상 (목에 걸고 있는게 미대 학생증이다.)
이상은은 여름 방학이 되자 귀국하여 '너와 함께 있는 이유'를 타이틀로 4집 활동을 시작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솔직히 말해줘'로 곡을 바꾸게 된다. 같은 시기에 변진섭이 똑같은 제목의 발라드곡 '너와 함께 있는 이유'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한 방송에서 곡제목 얘기가 나오자 이상은이 외국에 있어서 잘 몰랐다며 미리 알았으면 타이틀을 그 곡으로 안했을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차피 짧게 활동하고 갈거라서 도의상 중간에 활동곡을 바꾼듯 하다.
(4집 활동때 이문세 별밤 라디오 공개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당시 들려줬던 진솔한 이야기와 노래를 부르다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팬들의 마음까지 아프게 했던.. 팬들사이에 두고두고 회자 되던 방송이 있다. 한번쯤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하다. Moon River 외)

1993년 1월에는 편곡자 안진우와 뉴욕에서 작업한 어쿠스틱 음반인 5집 <LEE SANG EUN>을 발표하였다. 특히 5집에 수록된 '언젠가는' 이라는 노래는 당시에도 히트를 했었지만, 나얼, 싸이, 슈퍼주니어, 티에이피(결혼의 여신 OST), 핑크토끼 등 후배들에 의해 꾸준히 리메이크 되며 아직까지도 불려지는 명곡이다.

- 언젠가는 -

1.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 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눈물 같은 시간의 강 위에
떠내려가는 건 한 다발의 추억
그렇게 이제 뒤돌아 보니
젊음도 사랑도 아주 소중했구나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2. 젊은 날엔 젊음을 잊었고
사랑할 땐 사랑이 흔해만 보였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23살 짜리의 흔한 감성(...)
(93년 1월초 발매면 92년에 녹음을 했을테니, '언젠가는'의 그 깊이 있는 가사가 23살때 나온거..더 정확히 말하면 만22살에 만든거다. 애늙은이?)

93년 대학로 소극장공연 '언젠가는'MV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항상 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아이돌을 거부한 후, 소극장 공연을 시작하며 비로소 팬들과 진정으로 가까이 할 수 있었던 이상은의 모습에서 아이러니한 감동이 느껴진다.

이상은 5집은 작품성과 대중성의 균형을 맞춘 명반으로 평가 되고 있다. (워낙 괴물 같은 명반 6집<공무도하가>에 묻혀서 그렇지..) 참고로 5집 당시 제작자가 서세원이었다고 한다. 이상은이 어느정도 대중성을 염두해두고 만들게 된 배경도 그의 영향이 있는듯 하다.[26] 앨범만 던져놓고 가버렸던 3, 4집때와는 달리 학교를 잠시 휴학하고 본격적으로 콘서트와 방송 활동을 많이 하는 등 홍보도 잘 되어서 타이틀곡 '언젠가는'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지만 , 정당한 대가도 받지 못했고 나중에는 계약 연장하자고 엄청 시달리기도 했다고 카더라. 서세원이 어떤 인간인지는 말안해도.. 어쩌면 이후의 이상은이 주류 연예계로는 아예 눈길도 안주고, 일본으로 건너가 대중성 보단 예술성에 치중하게 되었던 원인일 수도 있겠다. 나중에 한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얘기한다.

" ...한국에 왔더니 이미 서세원씨가 세팅을 다 해놓은 거야. 주요 프로그램 PD 다 구워 삶아 놓고, 매니저 기다리고 있고, 자동차 뽑아 놓고, 코디네이터 붙어 있고. 그런데 정신 차려보니, 내가 정말 이런 환경이 갑갑해서 떠났는데, 내가 코미디를 막 하고 있는거야.."

'언젠가는' 활동 당시 예능프로그램 출연도 많았는데, '특종 TV연예' MC였던 임백천과 같이 코믹무대를 선보인 적도 있다. 천이와 은이 '너는 왜'
여담으로..당대 최고의 인기 쇼프로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메인 MC였던 이문세는 당시 출연했었던 이상은의 말한마디에 자극받아 이후에 예능을 그만두고 음악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선배도 깨우치게 만드는 후배 관련영상

2.5 아티스트로의 길

"제가 자라면서 느껴지는 성장의 아픔 같은 것들도 음악으로 표현을 하면 진실하기 때문에 함께 커가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공감해 줄 것이다, 대중음악이라 하더라도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나 아티스트로서의 생각 그런 것들을 표현하는게 훨씬 값어치 있는 일일 것이다, 라고 믿었을 뿐이에요."  --- 이상은



1995년 6집 '공무도하가' 라이브.
얼마전까지만 해도 '언젠가는~ 우리 다시~만나리~'를 외치던 이상은이 갑자기 기괴한(?) 음악을 들고 돌아왔을때 대중들은 또한번 충격에 휩싸였다. 이후로는 아예 아티스틱하고 매니악한 음악스타일로 갔다.
( 95년 당시 토크쇼 출연방송 - 이상은의 '공무도하가' 앨범에 대한 설명과 라이브도 들을 수 있다.)

6집 '새' MV
6집 'Summer clouds' MV - 뉴욕에서 학교 다닐때 찍은 뮤비인듯.
마지막에 같이 나오는 키작은 사람이 이상은의 동갑내기 절친인 황보령이다. 지금 현재 SMACKSOFT(스맥소프트) 밴드로 홍대 인디씬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상은이 뉴욕 유학시절 알게 된 같은학교(Pratt) 친구라고 한다.
('언젠가는' 활동 당시 황보령과 같이 서울 혜화동에 Recyclism카페 겸 복합문화공간 'Sun&Fish(해와 물고기)'를 만들어 운영한 적도 있는데, 미성년자 출입금지에 여러 소모임(독서, 여행, 어학..) 회원제로 운영되다보니 1년도 안되어 망했어요.)

이상은은 '한류'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전인 1990년대 초반부터 일본 활동(논노에 실렸던 사진, 그걸 또 기사화한 한국잡지)을 꾸준히 해왔었는데, 싱어송라이터로서 이상은이 만든 음악들은 한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인정을 받게 된다. (사실 이상은은 일본에서 활동할 생각은 크게 없었는데, 재일교포 저널리스트 강신자씨와의 만남이 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3집 앨범을 들고 한국에 잠시 나왔을 때, 인터뷰 건으로 만나서 친해진 그 언니의 초대 편지를 받고 일본 시골에 놀러갔다가 그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가수라고 하니 노래 듣고 싶다해서 맨 처음 가라오케 가서 팝송을 불러줬던게 일이 점점 커져 버린거라고. 그 친구들이 주로 방송국이나 문화기획사 쪽에서 일하고 있어 주변으로 이상은의 앨범을 들려줬는데 그게 의외로 반응이 좋았단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었는데, 당시 일본 신문에서 '마음을 치유하는 목소리' 라며 소개되는 걸 보고 행복감을 느꼈다고 한다.) 기존의 아이돌 이미지에 가려 한국에서 외면받았던 3집, 4집은 구마모토라는 일본의 한 지방도시에 팬클럽이 생겨나게 하였고, 이 팬들을 위한 작은 공연이 불씨가 되어 나중에는 '크로스비트 아시아'라는 아시아 민간 문화교류 단체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 단체를 중심으로 틈틈이 소규모 공연을 하며 문화운동을 벌이던 것이 점점 입소문으로 번져 결국엔 도쿄에 있는 회사와 계약하게 되고, 이에 본격적으로 일본인 아티스트들과 손잡고 1995년 6집 <공무도하가>를 발표한다.

6집은 '공무도하가', '삼도천', '새' 등 실험적인 음악을 선보인 앨범으로, 뉴욕도쿄를 오가며 2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음악 감독으로서 일본 스텝들을 이끌며 만든, 그녀의 이미지를 새롭게 인식시킨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가사에서는 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의지를 보이면서, 동양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자켓과 타이틀곡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당히 오리엔탈 스타일을 추구하면서도 영어 가사의 곡을 5곡이나 넣는 등 동서양의 문화적 접촉을 시도한 앨범. 우리는 이 앨범을 통해 과거와 현재, 국악과 양악, 한국어와 영어, 한국인과 일본인, 전통과 현대음악이 산재되어 있으면서도 통일되어 만들어지는 새로운 경지를 만날 수 있다. (작품을 이루는 소재들은 하나같이 ‘흐름’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이는 진정 이상은의 보헤미안 기질과 미술적 감각, 뮤지션으로서의 예술적 영감이 황금비율로 결합된 최고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일본어로 노래하지 않았기에 세일즈가 잘 되거나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건 아니지만, 이 앨범은 일본내에서도 신선한 충격이었고, 「동양과 서양을 잇는 중개자」, 「아시아의 가희」, 「섬세하고 폭넓은 표현을 가진 가수」등등 평론가들의 극찬이 쏟아졌다. 여러 신문과 잡지에 주목할 만한 앨범으로 누차 소개 되기도 했던 이 앨범은 일본에서 먼저 발매가 되고, 우리나라에는 라이센스(Polydor / PolyGram) 되어 역으로 수입된 보기 드문 케이스이다. 이 음반은 2007년 가슴네트워크에서 선정하고 경향신문과 네이버뮤직 스페셜을 통해 공개 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10위[27]를, 100Beat 선정 '1990년대 베스트 앨범 100'에서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발매 당시에는 대중들의 철저한 외면을 받기도 했었지만, 희대의 명반으로 재조명 되면서 꾸준히 재발매 되는 등, 이상은의 대표적인 앨범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코미디언 김신영은 이상은의 "공무도하가"가 소름끼치는 곡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7집 '어기여디어라' MV
(이상은 뒤에서 퍼포먼스 하고 있는 남자가 어어부프로젝트의 백현진이다. 7집 앨범자켓에 있는 꽃그림도 그의 작품.)
이 노래 한곡으로 7집 앨범 전체를 판단하면 큰 오산. 앨범 마지막곡으로 일종의 '치유'곡인데, 그전까진 사람의 감정을 마구마구 헤집고 뒤흔들어 놓는다고 보면 된다. 이상은이 Mars로 이사를 가서 만든 앨범이라 카더라[28] 성향의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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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다루는 악기가 없다는 '다케다 하지무(竹田 元)' + '이상은' = Penguins
(둘의 팀 이름을 지으려고 사전을 딱 펼쳤을 때 '펭귄'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마치 연미복을 입은 것 같이 예의 바른 펭귄의 모습이 자신들이 음악을 대하는 정중한 태도와 닮아 있는 것 같아 '펭귄즈'라 지었다고 한다.)

일본의 화려한 세션들이 대거 등장했던 6집과는 달리, 1997년 3월에 발표한 7집 <외롭고 웃긴 가게>는 이상은이 다케다 하지무와 '펭귄즈'라는 팀을 결성해 1인 세션으로 작업한 음반으로, 로우파이 녹음을 통해 독특한 세계관을 표현하였다. 이는 한국의 현실을 고발하고 치유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한다. (6집에서 7집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상당히 반항적이고 시니컬한 모습들을 많이 보였는데, 외국과는 다른 한국의 척박한 음악 환경에 절망하여, 어깨 밑으로 곱게 길렀던 머리를 완전삭발(...)하고 퍼포먼스 공연도 하고 다녔다. ## 이상은 본인도 '가장 상태가 안좋을 때 만든 음반'이라고 자평할 정도. 그런데도 명반.)

"일본에서는 귀족적인 미가 담긴 음악을 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한국에서 내가 느낀 현실은 '외롭고 웃긴 가게'였다. 그리고 상당히 가슴이 아팠다. 예전에는 '아저씨들 싫어 싫어. 나 도망 갈래' 였다면, 지금은 '내 눈에는 현실이 이렇게 보이는데요' 이다. 다들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꼬집어서 얘기하고 싶은 부분들이 보였고, 내 내면에서도 나 자신의 모순과 더러움까지도 끄집어 내고 싶었다. 그것들을 표현하려면 로우파이 사운드가 어울렸다. 한국의 현실은 하이파이 사운드가 안 어울렸다. 필연적이었다" --- 이상은
"6집은 옴니버스 영화 같은 보이는 그림이었구요, 7집은 보이지 않는 그림, 내면의 그림, 상상속의 세계..라고까지만 말씀 드릴께요." --- 이상은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은 7집 앨범이 발표된 후 "우리는 브라운관의 스타 한 사람은 이미 잃었지만, 고요한 시인 한 사람을 이제 얻은 것이다" 라고 평가했다.
7집에 실린 곡들은 원래 모두 영어가사로 썼던 곡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해서 녹음한 것이라고 한다. 7집 공연 중에 '외롭고 웃긴 가게'를 아무 설명없이 영어버젼으로 불러 제켜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일도 있었다. 이들 곡중 6곡은 후에 8집앨범에 영어가사로 다시 실리게 된다. (이런 이유로 8집을 한국에서 못들을 했다.)

7집 앨범 역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99위)과 '1990년대 베스트 앨범 100' (33위)에 포함되는 명반이다. 이제 이상은은 '담다디'의 귀여운 소녀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진정한 뮤지션이 되어버렸다.
7집 앨범 발매기념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외롭고 웃긴 가게> 항목 참조.

(여담으로 7집 앨범 나왔을 무렵, 윤상신해철 라디오 프로에 출연해서 이 앨범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데, 둘이서 막 '여러분~상은이가 해냈어요! 한국 남자 뮤지션들은 다 나가 죽어야해~ 흑흑..' 이렇게 장난스레 얘기하며 이 앨범을 극찬했었다.)

"그녀는 이 땅에서 음악의 한 유파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이상은과 비슷한 성향의··· '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 박준흠 (대중음악 평론가)

2.6 리채 (Lee-Tzsche, リーチェ)

“너의 음악이 우리 일본 사람들 마음에 와 닿고 또 음악 관계자들이 들었을 때 다 좋다고 한다. 넌 순수하게 무엇이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음악인지 고민해봐라. 그러면서 너의 아이덴티티를 버리지 않고 갈 수 있는 음악을 그려라."

이상은이 일본에서 서포트를 받으며 들었던 말이라고 한다. 일본에는 좋은 사람 또한 많다.

1997년 12월에 발매된 8집부터는 이제 아예 이름을 바꾸어 리채(Lee-tzsche)[29]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다. 리채의 '리'는 아버지의 성을, '채'는 어머니의 성을, 부모님 성씨를 합쳐서 만든 이름이란다. 'tzsche'라는 표기는 자신이 좋아하는 철학자 니체(nietzsche)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상은은 영국의 유명 레코드사인 버진(Virgin)의 일본지사와 음반계약을 맺어 리채라는 이름으로 영어앨범 8집 < LEE-TZSCHE > 9집 < Asian Prescription >(1999년)을 일본에서 발표한다. 8집은 일본에서 발매된 후 한국에 라이센스가 되지 않아 한국팬들은 이상야릇하고도 어려운 유통구조로 겨우 구해 듣는 아이러니를 먼저 선보였었는데, 그나마도 음반을 못 구한 많은 매니아들이 한국 EMI측에 발매 서명운동까지 벌이는 악착같음을 발휘, 일본에서 발매된지 3년만인 2000년 8월에야 한국에서 발매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국에서 9집 보다 8집 발매일이 늦은 이유다.)

이들 앨범은 6집 이후로 함께 작업했던 다케다 하지무 등 일본 스탭과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 시기 이상은의 음악은 그 자체에 대한 평은 나쁘지 않지만, 오리엔탈리즘에 천착했다는 비평을 피하지 못한다. 지난 20세기 동안 서구인들이 동양에 덮어씌운 '신비롭고 여성적인 동양'이라는 이미지를, 동양인인 이상은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해외 지향 앨범인 8집과 9집에서 주로 이런 경향을 보였는데, 특히 9집은 대놓고 제목이 '아시아식 처방전'. 아시아를 그들의 입장에서 보지 않고, 타자로서 치유를 얻고 오는 대상으로서만 보는 서양인들의 시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이상은 개인의 의도였다기 보다는 메이저 레코드 회사와의 계약에 따른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보는게 맞을 듯.

주로 해외음반 수입을 해오던 도시바EMI가 동양에서 서양 음반시장으로 수출을 해보자는 목표로 세계적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Virgin 레코드와 합작, 버진재팬(VJ)을 런칭하고 그 첫 테이프를 끊은 아티스트가 바로 이상은이었다. 이런 면에서는 일본이 대인배스러움. 소속사가 아닌 음반사에서 직접, EMI내에서도 전례가 없었다던 아티스트 육성비까지 책정, 지원하고 이상은에게 애정을 쏟으며 외국진출을 타진해 보지만, '아직 이르다. 독창적이고 음악성은 뛰어나지만 시장성이 없다. 아깝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넌 고흐처럼 될거다 죽고 나서 뜰거다' 라는 악담(?)까지 들어봤다고..)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반응을 살펴보다 결국은 자국에서 대박난 아티스트인 우타다 히카루로 미국 진출을 시도했으나 역시 높은 진입장벽만 확인 했을뿐 초기의 그들 꿈은 좌절되었고, 시이나 링고 등이 들어오게 되면서 레이블 성격도 점점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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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집활동 당시 리채. 90년대에 이미 저러고 다님. 일본이니깐(...)
8집 타이틀곡으로 내세운 'Actually, Finally'는 버진 영국본사에 가서 폴 매카트니, 펫 샵 보이즈, 앨라니스 모리셋 등과 작업했던 영국의 유명 프로듀서 리차드 나일스(Richaed Niles)와 작업한 곡(1번과 11번트랙 2곡)으로 상당히 팝적인 분위기의 편곡이었는데, 이는 6집과 7집으로 이어지는 '이상은 풍'에 위배되는 팝 성향의 곡으로 지금까지 그녀의 음악을 꾸준히 들어온 팬들에게는 '앨범의 컨셉에 맞지 않는다' 라는 얘깃거리를 만들었던 곡. 한번 들어보자. (이 곡은 후에 옴니버스 앨범 '도시락특공대 2집'에 다케다하지무 편곡의 오리지널 버젼으로 실린 적이 있는데, 팬들은 당연히 이상은과 함께 작업을 해왔던 다케다의 편곡을 맘에 들어 했다. 일본 음반사측에서도 이를 의식했는지 나중에 발매된 'Lee-tzsche 베스트 앨범'에는 8집 버젼이 아닌 오리지널 버젼을 싣기도 했다.) 사실 타이틀곡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상은풍(?) 노래들이다. 대략 요런 느낌의..

참고로 8집과 9집은 그 이전에 국내에서 발표했던 3~7집의 곡들을 영어로 번안, 편곡하고 거기에 영어로 만든 신곡 네다섯곡을 덧붙인 것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해외 1집, 해외 2집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실제로 이 두 장의 음반은 Virgin Japan-도시바EMI를 통해 일본에서 먼저 발매되고 그 후에 한국으로 수입되는 형태로 발매되었다. 이상은은 이에 대해 그냥 '일본에서 활동한 게 한국으로 유출된 것'이라 말하더라(...). 당시 한국에서는 이상은의 일본활동 소식을 전하며 앨범만 덜렁 나왔을 뿐, 8, 9집과 관련한 국내활동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여러모로 한국팬들만 안습 상황.. 99년 당시 신문기사
(저작권 문제 때문인지 일본에서 리채로 발매했던 8,9,10집은 현재 국내 음원사이트에서 서비스가 안되고 있다. 물론 음반 구하기도 하늘의 별따기... 유튜브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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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집때 리채. 몽환적 이미지가 컨셉이었던 듯. 노래도 명상음악 같다.
< Asian Prescription >앨범은 베스트음반 성격이 강하긴 하지만 공을 많이 들인 작품으로, 완성도가 빼어나다는 평을 받았으며 리채음악의 정수로 꼽힌다. 후에 이상은 본인도 사람들이 다시 들어봐줬으면 하는 음반으로 9집을 얘기하기도 했다. 9집 'A Path' MV (배경은 중국?)

일본에 진출한 대부분의 한국 가수가 그랬듯 보통은 현지화 작업을 거치게 마련인데, 이상은은 일본에서 활동하면서도 일본어로 노래 부르지 않았고, 영어나 한국어로 불렀다. 영어 보단 일본어를 더 잘 하지만, 공식적인 인터뷰들은 주로 영어로 했다고 한다. 이는 이상은이 얼마나 고유의 음악성으로 인정받고 아티스트로 대우 받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자국 출신이 아닌데도 자기들이 나서서 세계시장에 선보이고 싶어 했을 만큼 욕심이 나고 좋긴 했던 모양. 어느 인터뷰에서도 일본에서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며 공주처럼 지냈다고 말함. 덕분에 공주병도 덤으로.. 이상은은 처음부터 인기를 목적으로 활동한 것이 아닌 문화교류 운동을 해 오며, 트로트 장르 외에 다양한 한국의 음악을 좀 더 세련되고 멋지게 자랑하고 싶은 '외교관스러운’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그런 고집이 가능했던 것이다. 본인 스스로도 일본에서 한국말로 노래하고 영어로 앨범 내는 건 미친 짓이었고, 그런 미친 사람도 자기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방송에 나가기 보다는 라이브 공연 위주로 활동을 했었단다. 일본 사람들이 은근 한국을 무시하는게 싫었다던 이상은은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고,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일반 대중들 보다 음악을 좀 깊이 있게 듣는 마니아들이나 크리에이터, 평론가 또는 기자, 변호사 등 소위 식자 계층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걸 보고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었다고.[30] 공연을 본 어느 일본의 노부부가 이상은의 숙소까지 찾아와 편지를 주고 갔는데, "오늘 저희들의 마음이 많은 곳을 여행했습니다."라는 글을 보고 정말 기뻤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한국 음악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영화 '간밧떼 이키맛쇼이 (がんばっていきまっしょい, 화이팅 에츠코)'의 영화 음악을 맡았다.
7집의 '어기여디어라'[31] 영어버전인 'Ogiyodiora'가 주제곡으로 쓰이며 화제를 모았고[32], 이 곡을 포함한 이상은의 OST앨범 < Give it all >(1998년) 역시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 이상은의 곡 중 거의 유일하게 차트 상위권에 오르며 대중적으로 히트한 노래로, 유튜브에 'Ogiyodiora (オギヨディオラ)' 검색 하면 커버영상이 꽤 나온다.
(잠시 딴 얘기지만, 비슷한 시기에 박철수 감독의 영화 '봉자'(2000년) 음악도 맡았었다. 일본영화가 교육적인 내용이었던 것에 반해, '봉자'는 성(性)에 대한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상은이 그 음악을 담당했다는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이상은은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안하고 싶었는데 (관련 발언영상), 성도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데 예술한다는 사람이 편견을 갖고 있어서야 되겠냐며 계속 설득 당해 결국은 하게 됐다고(...). 결과적으로 음악 이외에는 혹평만 당한 영화지만, 봉자 OST 'She Wanted'는 오랜만에 국내에서 나온 앨범이라 이상은의 정규앨범 못지 않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었다. 이 앨범은 또 다른 의미로 소소한 화제를 모았었는데, 앨범쟈켓을 유심히 보면... 근데 별로 놀랍지도 않은게 외국 나가서는 항상 저런 차림이라, 아주 오래전 영화 '굿모닝 대통령'에서도 저렇게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나왔었다. )

후에 한 인터뷰에서 리채활동 당시 회사내에서 '누구를 더 밀어줄 것인가' 하고 어느 일본가수와 경합이 붙었는데, '이애는 한국애니까' 하고 밀려났었고 그때 '내가 남의 나라에서 뭐하고 있지?'하며 서러웠던 경험이 있다고 한다.[33] 이국 땅에서 자신은 결국 이방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고. 또한 8, 9집 이후로 버진재팬의 모회사인 도시바EMI로 이적하게 되는데, 실력도 인정 받고 좋은 일이긴 했지만, 원래 자신의 팀들이 아닌 대기업 사람들이랑 일하다보니 상업성에 대한 압박도 심해지고, 계약 때문에 자발성 없이 의무감으로 하게 되는 (훗날 어느 인터뷰에서 '어서 재주 부려봐'하고 꼬챙이로 찌르는 느낌이었다고 말함), 그러면서 점점 일본 활동에도 흥미를 잃고 슬럼프에 빠져서 2000년도에 잠시 런던으로 미술유학 도망?을 떠나기도 했었다고 한다.

한창 팔팔한 20대 나이에 '담다디'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강박으로 예술적인 음악을 추구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지만, 그 '공무도하가' 이미지 또한 점점 부담으로 다가왔다고. 공연에서는 고상하게 앉아서 노래를 부르지만, 공연 끝나고서는 클럽가서 춤추고 노는 이중생활도 점점 재미가 없어진 것이다. (데뷔때나 최근까지 무대위 모습을 봐도 그렇고..알고보면 원래부터 흥이 많은 사람임. 공연에서 이러고 노는거 좋아함, 떼창도 즐김. 그러니 얌전히 노래만 부르는 것도 답답했을 듯.) 이후로는 서서히 어깨에 힘을 빼고 스스로가 즐길 수 있는 음악을 하기 시작한다.



2001년 이상은은 30대로서의 첫 앨범인 10집 <Endless Lay>를 발표한다.
(위 뮤비는 도시바EMI 소속 아티스트로 프로모션차 내한(?)했을때 쇼케이스 영상. 뭔가 묘한 상황이다..)
< Endless Lay > 역시 일본에서 발매되고 한국에 라이센스 된 음반으로 지난 앨범들에 비해 한층 힘을 빼고 편하게 만든 곡들로 구성되어, 30대로 접어든 그녀의 심리를 노래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 앨범은 팬들과 평단 사이에서 그다지 좋지 않은 반응을 얻고 만다. 자신의 심리를 노래한 것은 좋지만, 이게 과하다보니 자뻑으로 흘러갔다는 평이 많았다.

이상은은 10집앨범 이후 2002년 < Asian Breeze >라는 스튜디오 라이브 베스트 앨범 발매를 끝으로 일본 계약활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홍대 인디씬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사실 훨씬 전부터 일본 왔다갔다하며 홍대에서 활동을 해 오긴 했었다.

이상은이 오랜 일본 활동을 접고 돌아왔던 이유를 알 수 있는 인터뷰.

"일본의 음반사(EMI)와 마지막 앨범을 낼 때, 그때 상처를 많이 받았어. 그때 당시에는 심하게 모욕 당하는 것 같았어. 대중성에 관한 문제 때문에 나를 닦달했던 마케팅부의 한 담당자가 있었는데, 진짜 강적이었어. 나는 인디적인 사람이었고, 그사람은 자본주의적인 논리가 강한 사람이어서 부딪치는게 많았지."

그 영향 때문인지 모르지만, < Asian Breeze >라는 앨범에 신곡 한곡이 들어갔는데, 일본어가사 노래였다. 9번트랙 'En'은 이상은이 만든 유일한 일본어 노래로 1절은 일본어, 2절은 한국어로 불렀다.
그 가사를 보면..

En (縁) - 인연

1. .永遠にとなりに住む不思議な縁だから
(영원히 마주하며 사는 놀라운 인연이기에)
あの海は時間のように踊っている
(저 바다는 시간처럼 춤추고 있네)
未来の子供に平和を教えてる
(미래의 아이에게 평화를 가르치고)
良い友達にきっとなれると思ってた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
兄弟みたいな顔でこれからおもしろく過ごせるように
(형제 같은 얼굴로 앞으로 재미있게 지냈으면..)


空からあなたの窓に届く白い太陽は今
(하늘에서 너의 창문에 와 닿는 하얀 태양은 지금)
となりの国の私の目にも光っているよ
(이웃나라 나의 눈에도 빛나고 있어)


2. 사람이란 모두 똑같다고 생각했어
누구나가 행복을 원하고 있으니까
허나 그리 단순한 세계는 아니지만
자기가 있는 그곳에서 열심히 사는 것
언제 깊은 상처가 나을 날이 올 것인지..


하늘에서 우리 동네에 와 닿는 투명한 별들은 지금
이웃 나라 너의 고운 눈에도 빛나고 있겠지


시간 같은 건 똑같으니까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에
사람들의 가슴의 고동 소리를 들어봐요
時間なんか一緒だから (시간 같은 건 똑같으니까)
同じ黒い髪と瞳の (같은 검은 머리와 눈동자의)
人々の胸の鼓動を聞いてみて (사람들 가슴의 고동소릴 들어봐)

노래가사는 참 평화롭다. 하지만..
결국은 일본어로는 노래 안할려고 했는데 (일본활동 당시 인터뷰에서 역사적인 문제도 신경쓰고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 진짜 강적을 만나 계약이 남았으니 어쩔수 없이 만들어 불러야 했고, 비록 곡 절반 정도였지만 아무튼 자존심 상하는 일이여서, 그런 압박들이 싫어 돌아왔다는 얘기로 들린다. 참..어찌보면 남들은 죽어라 노력해도 될까말까한 모두가 부러워하는 일들을 쉽게 해내고, 또 다들 못가져서 안달인 돈과 인기를 피해 다녔던 정말 특이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리채시절 출연한 방송에서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반항아로 찍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인터뷰(관련내용은 14분쯤부터)

2.7 30대

"한국에서 음악을 하니까 내가 동양인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작업할 필요가 없어져서 편해요. 일본에서 활동할 때는 뭔가 동양인, 한국인이라는 아이덴티티(identity)를 드러내야 했거든요." --- 이상은
"한국에 돌아와 고생을 하면서 철이 좀 든 것 같다. 일본에서 일할 때는 공주처럼 대해주고 하니까 정말로 철이 없었다." --- 이상은
"20대 때는 '20대스러운', 30대 때는 '30대스러운' 음악이 나온것 같아요. '공무도하가'는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시도한 앨범이었거든요. 가장 먼 곳에 가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고, 가장 깊은 이야기를 노래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서른살 때부터 생각이 바뀐것 같아요. 새로운 것들에 눈이 뜨이는데, 저의 경우에는 일상이었어요. 일상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즐겁게 견뎌나가는 힘을 주지 못한다면 아무리 멀리 가고 높이 날아간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 이상은

11집 '비밀의 화원' 영상
2003년 11집 <신비체험>에서는 일렉트로니카/IDM 프로듀서인 KAYIP(이우준), 장영규, 달파란(강기영) 등과 동업, 일렉트로니카의 작법을 도입하여 파격을 더했다. 이 앨범에서는 리드 싱글격이자 밝은 팝 곡인 '비밀의 화원'이 배스킨라빈스의 CM에 사용되는 등 간만에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고 마음만 먹으면 히트곡을 쓰는 여자, 2004년 제1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여자가수상'을 수상하였다.[34]
11집 당시 인터뷰. 사고의 변화와 성장을 느낄 수 있다. 참고로 '비밀의 화원'은 런던에서 만든 곡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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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모드..(2004~2006) 앨범에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언급을 안할 수가 없다.
2005년 12집 < Romantopia >에서는 라운지 음악을 중심으로 전작들보다 포근한 느낌의 팝을 시도했다. 한창 연애 중에 나온 앨범으로 앨범타이틀이 말해주듯, 이상은의 로맨틱한 이상향을 담은 앨범이다. 대중들의 반응은 좋은 편이었지만 팬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이 앨범에서도 다케다 하지무와 함께 작업했는데, 작업 당시 수록곡의 방향성을 놓고 다케다와 의견 충돌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당시 12살 연하 남친과 공개연애 중이던 말랑해진 이상은을 팬들은 낯설어 하기도했다. 이 앨범으로도 제3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여자가수상'을 수상했고, 타이틀곡 '돌고래 자리'로 '제7회 KBS 바른언어상- 아름다운 노랫말 부문' 상도 수상했다. 또한 GQ Korea 매거진에서 별 다섯개 평점을 받기도했는데, 이는 지큐 창간이래 만점을 받은 최초의 앨범이었다고 한다. 별 다섯개!



2007년 13집 < The Third Place >는 일본 오키나와 바다에 머물며 만든 앨범으로, 남친과 헤어진 후 만들었다는 '삶은 여행'이 실려있다. 이 노래는 후에 '꽃보다 누나'에 엔딩곡으로 삽입되어 뒤늦게 더 인기를 끈 곡이기도 하다. 이 앨범은 6집 <공무도하가>의 일본 프로듀서(와다 이즈미)와 다시 작업한 앨범으로, 뛰어난 완성도에 제5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종합), 올해의 음악인(종합), 최우수 팝 음반(장르), 최우수 팝 노래(장르) 등 4개부문에 후보에도 선정됐지만 아쉽게도 수상에는 실패했다.
위 영상을 보면 데뷔시절에 비해 상당히 여성스러워 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데뷔때도 스타일이 보이시해서 그렇지 원래부터 얼굴은 나름 이쁘장했다.)

2014년 새롭게 편곡된 '삶은 여행' 라이브 영상도 있다. (윤상의 프로듀싱 그룹 'OnePiece' 멤버인 Davink와의 콜라보)

2.8 40대 이후

그녀의 20대, 30대, 40대..

"20대와 30대는 전 너무 달랐어요. 20대 때는 너무 어두웠죠. 고민을 너무 많이 했거든요. 굉장히 부정적인 아이였는데 30대 되면서 좀 밝아졌어요. 저의 경우에 20대 때는 부정적이었지만 장점은 꿈이 컸어요. 모든 20대들이 꿈이 클 거에요. 어마어마한 꿈을 가지고 있죠. 근데 20대가 가지고 있는 단점은 되게 부정적이라는 거에요. 꿈이 크면서 긍정적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근데 삶을 알아가잖아요? 그럼 꿈이 점점 줄어들어요. 하지만 부정적이었던 게 점점 긍정적이 되긴 하죠. 꿈을 크게 가지면서 긍정적인 마인드를 지니는 것은 40대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는 가봐요. 30대 까지는 부정적인 것들을 고친 거죠. 하지만 그 덕분에 꿈이 줄어든 거에요. 다시 모험을 떠나야하고 다시 열려야 되고 두려움과 싸워서 이겨야 하고 20대의 열정을 되찾아야 하는 거죠. 긍정적인 마음으로 작아진 꿈을 늘리는 게 40대의 과제라 생각해요." --- 이상은

14집 타이틀곡 'Something in the air' 귀염 돋는 MV
(이 곡은 뉴욕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인 데이빗 보위 트리뷰트 파티에 갔을때 영감을 받아 쓴 곡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보위 노래와 곡제목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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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집 미래지향적 이미지...
2010년 14집 < We Are Made of Stardust >뉴욕에서 작업한 음반으로 이상은 11집, 클래지콰이, 윤상의 음반과 브라이언 이노의 공연세션으로도 참여했던 프로듀서 KAYIP(이우준)과 함께 글리치 음악을 시도하여 일렉트로니카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나타냈다. (Stardust 곡 후반부에 글리치 특성이 잘 나타난다.) 실제로 이상은은 케미컬 브라더스직접 만난 적까지 있는 비요크도 좋아하고, 네이버 뮤직과의 인터뷰에서 추천 음반으로 다프트 펑크[35]의 음반을 거론했을 정도로 일렉트로니카에 대한 관심이 많다. 사실 이상은은 우리나라 대중가요에 일렉트로닉이 대세가 되기 훨씬 전부터 일렉트로니카 요소들을 선구적으로 사용해 왔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음반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인데, 특히 멜로디 메이킹과 가사가 난해하고 작위적이라는 평이 많았다.
(2015년 KBS의 한 라디오 PD는 방송에서 히든 베스트곡으로 14집의 'Cosmic Nomad'를 추천하며 이상은의 노래를 듣다보면 여기가 미국인지 한국인지, 지구인지 우주인지, 내가 나인지 너인지, 난 사람인지 아닌지 헷갈릴 수 있다는 평을 남기기도 하였다(...).)
※ 참고로 14집부터는 'Breeze Music <브리즈뮤직>[36]'이라는 인디레이블을 만들어 자신이 직접 앨범까지 제작하고 있음.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고, 컴퓨터 음악을 배워서 음악을 직접 만들어 보고도 싶었어요. 물론 곡을 예전에도 제가 만들었지만 그것은 곡의 원형인거고 같이 작업하시는 분들이 편곡을 하게 되거든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음악을 만들면 시작단계부터 편곡을 해나가면서 만들게 돼요. 그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이전 방식으로 작곡을 한다면, 가사를 만들고 거기에 멜로디를 붙이고, 다케다 상과 함께 코드를 붙이고, 이런 식으로 아주 클래식한 방식으로 작업을 해나갔었죠. 근데 이건 그냥 처음부터 완성단계가 그냥 나와요. 그게 재미있었죠. 제가 누군가와 작업을 할 때는 눈치를 많이 봤었어요. 알게 모르게 다른 분들과 작업을 하다보면, 표현도 조금 줄이게 되고. 물론 컴퓨터로 작업을 해도 모든 작업들이 제가 혼자 할 수는 없지만, 이번(14집)에는 아무도 없이 제가 생각하는 걸 그냥 그려낼 수 있어서 너무 재미있었어요. 자유도가 훨씬 있고, 더욱 솔직하게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걸 표현할 수 있었죠." --- 이상은

(이상은은 진작부터 일렉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주위에서 말렸다고 한다. 관련기사. 결국 본인이 하고 싶은 건 하는 성격?)

2014년 2월 15집 < LuLu >를 발표하였다. 전체적으로 음반의 분위기는 빈티지 컨셉의 포근한 팝으로 회귀한 듯 하다. 또한 기존 작업방식과 달리 편곡자와 세션연주 없이 이상은이 컴퓨터장비를 이용해 홈레코딩으로 홀로 만들어낸 앨범이기도 하다. 14집때는 독학으로 Ableton Live를 공부해 작업했었고, 15집때는 Logic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14집활동 당시 유희열 라디오천국에 나와[37] 로직은 뭔가 사무적이고 딱딱한 느낌인데 반해, 에이블톤 라이브는 화면이 컬러플해서 좋다는 독특한 발언을 한 적이 있는데..결국은 로직도 접수.) 곡이 없는 상태에서 데드라인을 잡고 작업을 해 완성까지 약 3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집에 틀어박혀 혼자서 앨범 한장을 그냥 뚝딱! (일부 믹싱과 마스터링 같은 마무리 작업 때만 3호선 버터플라이 멤버 김남윤의 도움을 얻었다고.) 처음 시도한거라 그런지 이전 앨범들에 비해서 앨범의 완성도는 좀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워낙 기대치가 높은 사람이니..오히려 소박해져서 좋다는 사람도 많지만. 암튼 새로운 도전이었고, 이제 작사/작곡/편곡에서 더 나아가 사운드메이킹/믹싱 쪽으로도 발전 가능성을 열어둔 데에 의의를 두도록 하자.

“국내에 여성 편곡자가 별로 없어요.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편곡을 하면 이성적이면서 딱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한 편곡에선 꼭 맞아떨어지는 느낌은 별로 없어요. 그래도 멜로디, 노랫말과 분위기가 맞다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감성적으로 접근했어요. 컴퓨터랑 낑낑대며 씨름하는 석 달간 무지 힘들었지만, 꾸준히 개척하고 도전할 신세계를 발견해서 신나고 즐거워요.” --- 이상은

(15집앨범 속지를 보면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전한 멘트가 있는데, 한 인터뷰에서 15집은 아버지가 디렉팅을 하셨다고 밝혔다. "상은아, 음악이 너무 어렵다. 너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만, 사람들이 널 봤을 때는 80년대가 기억나는데 너는 왜 실험적인 것만 하니. 사람들의 그 마음을 읽고 좀 해주면 안되겠니?" 아버지의 조언을 듣고, 요번 앨범은 좀 쉽게 복고풍으로 만들어봐야지 생각했다고 한다. 하긴 전작 14집은 우주로(...) 너무 멀리 가긴 했었다.)

  • 참고로 이상은은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유학도 미술유학이었다. 작곡을 할 때에도 악보를 그리지 않고, 자신만 알아보는 악보가 따로 있다고 한다. (다케다 하지무는 이상은에게 상상력을 제한하니 음악에 관한 어떤 것도 배우지 말라고 했었단다.) 능숙하게 다루는 악기도 없어서[38] 항상 음반을 만들 때는 편곡자들과 함께 작업을 했었는데, 이번 15집은 그런 조력자들 없이 혼자서 만든 앨범인 것이다. 11집부터 14집까지 이상은 앨범에 참여를 해 왔던 이병훈(우쿨렐레피크닉,영화음악감독)의 이상은15집에 대한 리뷰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이상은은 천재다?



15집 타이틀곡 '태양은 가득히'. 데뷔 26년차 (2014년).. 요즘 노래하는 그녀는 참 편안해 보인다.
쉬운 길 놔두고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이었는데, 힘들었던 시간을 거쳐 이제는 여유와 내공이 느껴지는 듯하다.

2015년 7월에는 대중가수에게 무대를 잘 내어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국립극장에서 이틀에 걸쳐 단독공연을 열기도 했다.[39] 국악축제의 일환으로서 이상은은 기존 자신의 곡들에 국악적인 색채를 가미해 새로운 무대를 선보였다. 국립극장 공연모습. 
이렇듯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성에 예술성까지 겸비한 아티스트로 인정을 받고 있다. 

2015년 10월 월간 객석의 인터뷰에서 16집 앨범 준비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객석 인터뷰 근데 여긴 클래식쪽 잡지인데??

사실 이상은이 처음 강변가요제를 통해 데뷔했을 때만 해도 지금처럼 아티스트의 길을 걷게 될거라는 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간 이상은이 보여줬던 놀라운 진화 과정을 혹자는 한국의 가요 환경에서 나오기 힘든 기적 같은 일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끊임없이 추구해 온 변화의 스펙트럼은 우리 음악사에 거의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행보에는 전형적일 정도로 명쾌한 픽션 같은 면이 있어서, 어떤 식으로 요약하든 결국 하나로 정리된다.
열화와 같은 인기와 돈 보다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꿈과 삶을 스케치하고자 노력했던 이상은.
실천적 지성인이자 아티스트로서 행동력이 돋보이는 그녀의 도전은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이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이 아주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무지개 끝에는 보물이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무지개 건너 보물을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상은
"다들 완성된 것을 보여주는데 저는 그 과정에서 실험했던 것을 보여줬던 것 같아요. 음악도 그렇고. 매끈한 것 보다 약간 아방가르드 한 것..제가 그런 것을 좋아하니까요. 음악의 질이나 수준을 높이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저는 예나 지금이나 진심이 담긴 것을 원했고, 그런 작업들을 해 왔다고 자부해요." --- 이상은
"직접 자신이 곡을 쓰고 부르는 가수의 곡을 보면 그 가수 내면의 기록이 보인다. 나 역시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땐 길을 헤매는 듯 방황하는 분위기의 노래들을 썼다. '외롭고 웃긴 가게' 같은 노래들이다. 이제는 삶을 직시할 여유가 생겨 그때처럼 우울하지 않지만, 대중은 그때의 음반을 명반이라며 좋아한다. 내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우울한 기억인데 말이다." --- 이상은
"한가지 일을 오래 하다 보면 뭔가 묵직한 심지 같은 것이 생긴다. 그저 내 일을 해 나간다는 담담함이 좋다. 여전히 재료(사운드)를 연구하고 그들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알아가야 하는 일. 그렇게 뭔가 알아간다는 게 행복하다." --- 이상은

3 음반

3.1 정규 앨범

3.2 컴필레이션 앨범

  • 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 (1989년 12월): 캐럴 앨범 (中 내가 꿈꾸는 크리스마스)
  • 까치소리 동동동 (1990년 4월): 동요 앨범, 김흥국과의 스플릿 앨범 (中 사랑의 집)
  • 이상은 베스트 담다디 (1992년 5월)
  • 1991-1998 Best Album Don't say that was yesterday (2000년 11월): 일본 베스트 앨범
  • Asian Breeze (2002년 3월): 일본 스튜디오 라이브 베스트 앨범 (中 Cli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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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1990년 동요앨범으로 조용필, 김흥국과 함께 당시 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3.3 EP

  • Out of Space[40] (2007년 8월): 미발표곡집

3.4 싱글

  • Actually, Finally (1997년 11월): 일본
  • Ogiyodiora (1998년 8월): 일본
  • A Path (1999년 2월): 일본
  • Bliss (2011년 8월): 리컷 리믹스 싱글(14집 Bliss, 11집 비밀의 화원)
  • 안녕, 좋은 하루 (2012년 2월)

3.5 사운드트랙

  • Give it all (1998년 9월): 일본영화 '간밧테이키맛쇼이' OST
  • She Wanted (2000년 10월): 영화 '봉자' OST
  • Falling (2011년 5월): MBC TV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 OST (vocal)
  • 정읍사 (2013년 11월): MBC TV 드라마 '제왕의 딸 수백향' OST (vocal)

4 트리비아

  • 그녀는 꼭두각시 같았던 아이돌 시절인 1980년대 후반을 생각하기 꺼려 한다. 하지만 아직도 대중들에겐 이상은을 생각하면 '담다디'라는 노래가 떠오르기 마련. 공연에서 그녀의 다른 히트곡들을 들으며 열광적이고 만족스런 반응을 보이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곧바로 담다디를 불러달라고 외칠 정도라서 지금은 그녀도 반쯤 포기하고 있는 상태이다. 요즘은 기분 내키면 아예 셋리스트에 '담다디'도 포함시킨다고 한다. 대신 새롭게 편곡된 얌전한(?) 버전으로.. 한 공연에서 자신이 담다디를 부르는 것은 마치 당근, 강남콩, 브로콜리를 간 쥬스를 마시는 어린 아이 같은 심정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싫지만 마시면 엄마는 너무 좋아한다고. 관객들이 그런 엄마 같다고..
    그만큼 이상은의 데뷔곡 '담다디'는 대중들에게 엄청난 임팩트를 남겼던, 남녀노소 가릴것 없이 전세대를 아우르는 국민가요로서 현재까지도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곡이다. 또한 기타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담다디'라는 곡을 모를 수가 없다고. 분위기도 흥겹고, 코드가 단순하고 쉬워서, 기타를 잡으면 젤 처음 배우는 가요가 '담다디'라고 한다. 유명 기타리스트 박주원은 기타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담다디'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거기에 요즘은 우쿨렐레가 가세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 서서히 담다디 꼬리표가 잊혀지고 이제 젊은 세대들에겐 아티스트 이상은으로 알려지는가 싶더니.. 안타깝게도 성공적으로 응답한 드라마 때문에 담다디 시절 영상들이 다시 발굴되어 인터넷상에 돌아다니는가 하면, 새파란 초딩들까지 흥얼거리는 노래가 되어버렸다(...). 정말 벗어날 수 없는 무서운 곡이다 담다디에 대한 적절한 드립(...)
  • 여담이지만 이상은이 처음 가수로 데뷔했을 때 안그래도 178cm나 되는 장신인데다가 짧은 헤어스타일, 허스키한 목소리에 화장도 안 하고 옷도 남자처럼 입고 무대에 올라갔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이름도 중성적인 이름이라서 항간에는 이상은이 남자라는 루머가 심하게 퍼져서 이상은이 남자라고 굳게 믿는 사람이 존재할 정도였다. 엠버의 원조격[41] 당시 방송에서도 남자같다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이 무대는 1989년 당시 서울올림픽 1주년 특집으로 마련된 무대로 당대 최고의 여가수였던 양수경이지연[42]이랑 함께 했던 합동 무대였는데, 이상은이 상당히 키가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년도별 강변가요제 대상 수상자들 무대에선 키를 맞추기 위해서인지 이런 웃픈 상황이 나오기도 했다.
(이상은 집안이 원래 농구집안이란다. 친척 중에 국가대표출신 농구선수가 많고, 현재 고려대학교 농구부의 이민형 감독이 이상은의 사촌오빠라고 한다.#1,#2 좀 닮은듯. 우월한 기럭지 덕분에 이상은도 한때 농구부에 스카웃[43] 제의도 받고 연습도 해봤는데...운동은 젬병이라고. 어렸을때는 발레리나[44]가 꿈이었는데 무용 선생님에게 키 때문에 힘들거라는 말을 듣고 좌절했었단다. 몇년 전 한 방송에서 자신보다 더 큰, 이름도 똑같은 발레리나 이상은을 만나 인터뷰하며 놀라워하기도 했다. #)
  • 이상은은 마이크 잡을때 손모양이 특이한데 바로 양쪽 새끼손가락 부분. 유독 새끼손가락만 구부려 세워 잡거나 따로 노는 모습들이 보이는데, 노래 부를 때 손을 유심히 살펴 보면 알 수 있다. (워낙 음악색깔이 많이 바뀌고 스타일도 달라져서 긴가민가 하다가도 저 튀는 새끼손가락을 보며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구나 안심을 하게 된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 새끼손가락이 잘 안 접혀서 그렇다는 말도 있는데, 암튼 팬들은 그 모습도 멋있다고 따라하곤 했다고.
    얘기 할 때는 얼굴 표정이나 제스처가 풍부한 편이고, 코를 자주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다.
    뉴욕 유학중 잠깐 귀국해 TV 예능프로에 나왔을때, 같이 지내는 친구가 이상은은 겨털이 안난다고 신체비밀을 폭로한 적이 있다. 저걸 친구라고! 이상은의 반응으로 보아 사실인 듯 하다. 민소매 의상도 즐겨입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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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새끼손가락! 가운데 손가락 아님

  • 역대 강변가요제 사상 가장 치열한 경쟁 끝에 대상을 차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45] 남매는 아니고 비슷한 이름의 이상우와 연장전까지 갔다고 하니 당시 분위기를 알 만하다. 이때 이상우 쪽이 대상을 받았어야 했다는 의견도 많았을 정도였다. 뭐 정리하자면 둘 다 대상감이었지만 좀 더 스타성이 있는 이상은에게 대상이 돌아갔다고 보는게 정답일 듯. 여담으로 본선 참가자 합숙기간 중 이상우가 대장(연장자)을 맡았었고, 이상은이 제일 어린 막내였다고 한다. 7살 차이
    (신해철도 88년 겨울 대학가요제 나가기 전 여름에 '아기천사'라는 밴드의 멤버로 강변가요제에도 출전해 최종 예선까지 올랐지만 본선엔 떨어졌었다고. 본선까진 누구나 이상우가 대상이라고 인정하는 분위기였는데, 결선 현장에서 이상은이 관중들의 시선을 사로 잡으면서 결국 대상을 차지하는 걸 보고 '역시 저거구나!' 하고 깨달음을 얻은 뒤, 바로 무한궤도라는 밴드를 새로 만들어 대학가요제에 출전해 대상을 차지했다. 대상곡 '그대에게'의 전주 부분이 요란한 이유가 바로 그 깨달음의 결과란다.ㅋ)
  • 한때 동성애자라는 소문도 있었다. 이미 학창시절부터 보이시한 스타일로 또래 여학생들에게 선물이나 편지받는 일이 잦았었고, 데뷔 이후로도 한참동안 그 컨셉으로 전국의 여학생들 동성애 감성을 자극한 인물이라 어찌보면 신빙성 있게 들릴 수도 있는 소문이었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면이 없진 않았는데, 결국은 남친을 사귀면서 그쪽 세계에선 꽤나 배신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후에 한 케이블 방송에서 밝히길 자신은 어려서부터 외국을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동성애자들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편은 아니란다. 패션 쪽이나 예술 관련쪽에 그런 성향의 친구들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같이 어울리고 모임에도 따라가고 같이 앉아 있다보니 그런 소문이 나는 것인데, 자신은 별로 크게 신경쓰거나 남들 눈치보고 가리는 타입은 아니라고. 그냥 서로 말이 잘 통하는 친구일 뿐이고, 오히려 게이친구들 그 특유의 섬세한 감각이 부러울 때도 많다고 얘기하고 있다. 다만, 지나치게 자신을 동성애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드러내는 편이다. (관련영상)

    요약해보면 이상은은 상당히 쿨하고 깨인 성격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면은 종교관에서도 드러난다. 본인은 크리스천이지만, 타 종교에 대해서도 존중하면서 비교적 열린 사고를 하고 있다.[46] 일본에 있을 때 만든 노래 중에 '삼도천', 'Sumi Mountain(수미산)' 같은 경우는 다 불교에서 쓰이는 용어들. 가끔 불교, 천주교, 원불교 가리지 않고 방송이나 행사에 참가하고 친분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뭔가 틀을 깨고 초월적인 걸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음악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오버이면서도 언더이기도 하고, 장르 구분 없이 이것 저것 해 보고 싶은 거 다 해보는... 덕분에 이상은은 락 페스티벌을 비롯해, 예술 공연, 재즈, 일렉, 심지어 국악 공연에서도 그 이름을 찾아 볼 수 있다. 음악적 스펙트럼이 워낙 넓다보니 이상은의 음악을 처음 접한 시점에 따라 팬들의 취향도 다양하게 갈리는 편이다. 때문에 콘서트때 1부, 2부, 앵콜무대의 분위기를 다르게 한다던지, 하루는 신나는(스탠딩) 분위기로 다음날은 차분한(좌석) 분위기로 아예 나눠서 공연을 한 적도 있다.
특이하게도 2002년에 시사매거진 2580이 이상은의 변신에 대한 취재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MBC 2580 영상. 시사프로까지 진출(...)
어디 그뿐인가? 미술, 영화, 패션, 출판, 방송, 사회계..정말 이래저래 안엮이는 데가 없다.(글고보니 아이돌시절부터 문어발식 활동을 했었다. 호기심이 많아서인가? 아님 쉽게 싫증 내는 스타일??) 이상은의 다재다능함과 관련된 기사1, 기사2, 기사3
  • 국립국악관현악단 전 예술감독이었던 '원일'의 앨범<아수라>에 실렸던 '달빛항해(Moonlight Sailing)'- '몽금포타령'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이상은이 노래 했다. 퓨전국악으로 꽤 유명한 곡이다. 참고로 이 애니메이션 뮤비는 2005년 국악축전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라 한다.
    이상은이 만들고 부른 2005년 국악축전 공식음악도 있다. Dancing goddess
아주 가끔씩 여기가 아니라 KBS 국악한마당에도 출연한다. 출연영상
"존 레논오노 요코의 자유롭고 조화로운 삶과 예술을 사랑한다. 함께 무언가 도모하고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소울메이트를 만나고 싶다."

" ..진짜 내 짝이라면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기 어렵지 않을 거고, 무엇보다 열심히 살아왔으니 언젠가 나에게 맞는 사람을 만나게 되겠지요. 대충 만나, 대강 맞으면 하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렵게 만난 만큼 평생을 사랑할 수 있는 그저 서로 많이 닮은 사람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빨리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만나는 것이니, 인내심을 키우고 있죠." --- 이상은

  • 오타쿠 기질이 있어 어딘가에 한번 빠지면 깊게 파고드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이상은은 오래 전부터 영국밴드 The Verve의 리드싱어 리차드 애쉬크로프트의 엄청난 빠순이로도 유명하고[47], 한창 사랑에 빠졌을때는 닭살커플(...)로도 유명했었다. 의류 광고에 같이 나오기도 하고#1, 잡지에서 남친볼에 뽀뽀하며 껴안는 포즈는 기본 #2, 콘서트장에서도 새해 카운트다운 끝나자마자 남친과 무대 위에서 키스를 나누는 염장질 만행으로 팬들의 질투 섞인 원성을 사기도 했다고. 띠동갑 연하에 키도 더 크고 잘 생긴 훈남이었다고 전해진다. (남친이 원래 팬이었고 안사귀어주면 죽겠다는 적극적인 대시에 어쩔수 없이 사귀게 됐다는데...사실 티는 안냈지만 남친 보고 첫눈에 반했었다고 함.[48] 혹시 외모가 1순위?? 암튼 능력자! 그러니 자랑하고 싶었겠지.)
"... 어느 순간에 이 사람이랑 나랑 너무 안 맞는구나, 그점이 자각되자 함께 있는게 너무 불편해졌어. 애들 놀이기구 중에 네모, 동그라미, 세모 모양의 빈 구멍에 맞는 모양을 끼워 맞추는 나무로 된 퍼즐 장난감 있잖아, 난 네모인데 그는 세모더라구. 사람을 내 스타일로 고쳐서 함께 하려는건 옳지 못한 욕망이라고 생각해. 멀리서 봤을 때 우린 쌍둥이처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워지면 질수록 너무 다르더라구. 내가 사각형이면 삼각형을 닮은 사각형이 아니라 특별히 고칠게 없는, 그냥 사각형인 사람을 만나고 싶어."
나중에 결국은 나이차 극복못하고 깨졌다고 함. 관련기사, 이 말은 은근 연애고수?, 점점 연애도 귀찮음?, 이소라와의 이 대화영상을 보면 귀찮아하는(...) 이유가 대략 나온다.
  • 의외로 수줍음도 많고, 어릴때부터 순정만화 좋아하고[49] , 이쁘고 아기자기한거 좋아하는 소녀감성에, 꽃돌이 취향으로 알려져 있음. 일본 배우중에 오다기리 조를 그렇게 애정한다고 한다. 근데 또 워낙 이것저것 관심사도 많고 취향도 자주자주 바뀌는 편이라고. 최근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요즘은 퀼트 등 바느질은 기본, 화장품 종류도 직접 만들어 보고, 홈베이킹도 하며 DIY에 푹 빠져있다고 함. 이 또한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오죽하면 기자가 질문할 때마다 대답이 바뀐다고 뭐라 그럴 정도라고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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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오덕스러운 컨셉도 나름 잘(...) 일본(오키나와)이었으니깐..

  • 큰 키와 깡마른 몸매로 패션화보도 많이 찍었고, 1996년에는 S/S SFAA 서울컬렉션에 패션쇼 모델로 활동한 적도 있다. 당시 좋아한다던 모델 케이트 모스의 영향 때문인지 예상대로 빈약한 마른 몸매를 과감히 드러내고 드레시한 옷들을 입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부터. 유명 사진작가 조세현과 작업한 사진들에서는 상반신 세미누드를 선보이기도 했다. (책 또는 팔로 가리고 있어 아랫부분만 살짝 보이는 정도. 다른 패션지 화보에서는 티팬티에 시스루 롱원피스 차림의 적나라한 뒤태 노출도 있었다고..)
1993년 '언젠가는' 활동 당시에 한 예능프로에서 모델 이소라와 같이 모델워킹을 시전한 적이 있다.
2000년도에 윤종신과의 이 대화영상을 보면 모델활동은 숨기고 싶어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근데 충공깽스런 화장이나 모습은 완전 모델포스.
패션쪽에 관심은 많지만, 정작 본인이 평소 하고다니는 스타일은 명품들 보다는 그냥 부담없이 편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듯. 그래도 유명인인데 너무 신경 안쓰는거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안꾸미고 소탈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가장 최근의 모습은 예전에 비하면 좀 후덕해진 인상이다.
(여담으로 SNS에서 자신의 몸매를 셀프디스 하기도 했다... ##)  
  • 데뷔시절부터 쭈욱 보면 알겠지만 성형이나 별다른 시술 없이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다. 간혹 체중의 변화에 따라 혹은 헤어 스타일이나 화장법에 따라 약간씩 달라보이는 경우는 있으나 자세히 뜯어보면 원판 그대로인걸 알 수 있다. 굳이 달라진 점을 찾으라면 왼쪽 눈 옆과 입술 위쪽에 점이 있었는데 눈 옆의 점만 이후에 뺀 듯하고, 데뷔초기에는 비교적 치열이 고른 편이었는데 뒤늦게 사랑니가 나면서 눈에 띌 정도로 치열이 틀어져 버렸다. 외국 유학하면서 치료 시기를 놓친듯 하다. 이후에 라디오 진행할 때 치과 치료 중이라는 멘트를 날린 적이 있는데 변화가 없는걸 보면 딱히 치아교정 생각은 없어 보인다. 참고로 데뷔초기 자신의 얼굴 중 마음에 안드는 부분을 꼽으라는 질문에 라고 답한 적은 있다.
  • 평소 영화보는거 좋아하고, 영화관련 음악작업도 여러번 했으며, 직접 출연(...)도 했고, 또 나름 연영과 출신이라 영화계 인맥도 있고 인연이 깊은편. 심지어 전남친도 독립영화감독 영화관련 행사나 시사회 등에서도 자주 모습을 볼 수 있다. 요런 트레일러 영상도 찍었고, 영화추천영상 (역시 남자주인공 외모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도 몇 개 된다. 음악을 설명할 때조차 영화와 관련지어 얘기하는 경우도 많다.

이상은은 주로 앨범 만드는데 제작비를 많이 쏟는 편이라, 홍보를 위한 뮤직비디오 제작은 거의 안습 수준 15집은 아예 없다 ㅠ... 암튼 영화쪽에서 연락이 많이 오는지 영화를 이용한 뮤직비디오가 꽤 된다. 보통은 그냥 영화 편집화면에 노래를 덧입혀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 중 유일하게 따로 촬영 된, 롱테이크 촬영 기법으로 이상은이 노래한 뮤직 비디오가 있다. 11집 Soulmate(영화'4인용식탁')

단편 애니메이션 'Africa a.F.r.I.c.A'의 음악을 담당한 적도 있다. 이 작품은 한국 작품, 그것도 10분짜리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2004년 도쿄국제애니메이션페어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화제를 모았었고, 이후 장편으로 만들어진다는 얘기도 있었으나 무산된 듯하다. (아프리카 아프리카 OST.) 이것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상은이 2006년 민간구호단체 피스프렌드 아프리카 홍보대사를 맡기도 하였다.
  • 성량이 아주 풍부하다거나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로 꼽히지는 않지만, 특유의 음색과 창법으로 다양한 스타일의 노래를 소화하는 개성 있는 보컬이기도 하다. 보컬리스트로서의 매력은 화려한 악기 구성일때 보다는, 피아노나 기타 한대 등 단순한 악기 구성일때 더 잘 드러나는 편이다.
영화나 드라마 OST에 순수 보컬로서 참여하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는데, 특히 2013년 MBC드라마 '제왕의 딸 수백향'에서 백제가요인 '정읍사'를 불러서, 고조선 시가 '공무도하가'와 더불어 우리나라 고대가요(古代歌謠) 전문가수(...)라고 불려지게 된다. 특히 이상은이 부른 '공무도하가'는 실제 문학 수업시간에 학습 자료로도 쓰인다 카더라.
그렇다고 이렇게 처연한 노래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인디성향의 그녀 목소리가 뜬금없이 로코 드라마(마이 프린세스)에 콧소리 작렬하며 흘러 나와 팬들을 당황시키기도 했다.마이 프린세스-Falling (김태희가 일본 팬미팅때 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
피처링은 보통 친분관계가 있어서 해 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시 의외의 피처링이라 여겨졌던 CB MASS(다이나믹 듀오의 전신)의 '흔적'.
어느 영화 OST에서는 재즈풍의 노래를 부른 적도 있다. 당신 생각에 ('꽃을 든 남자' OST) 
또 어떤 공연에서는 전설의 무용가 최승희가 불렀던 1930년대 근대가요를 재해석해 나름 맛깔나게 부르기도 하였다. 이태리의 정원
이렇듯 보컬리스트로서도 독특한 존재감을 나타낸다.
"전 음역, 발성, 음정 등 소리를 잘 내는 것 보다는 그냥 느끼는 대로, 제 라이프 스타일 대로 부르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자연스럽게 나온 노래라면 자연스럽게 불러야 맞지요." --- 이상은
"제가 생각하기에 가슴에 딱 손을 얹고, 내가 노래를 해서 사람들한테 도움이 됐구나 이정도면.. 그럴 때쯤에 노래를 그만하고 싶어요."

"음악을 하고 싶을 때 하고, 앨범을 만들고 싶을 때 만드는 게 좋다. 너무 노력해야 될 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는 조용히 그림 그리며 살고 싶다. 특히 난 보컬리스트다. 노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이가 들어서 기운이 없어질 때까지 서서 노래하고 싶지는 않다. 허리가 아플 즈음엔 그림을 해야지."  --- 이상은

  • 어린시절부터 그림을 그렸고, 뉴욕에서 조각을, 런던에서는 페인팅을 전공하여 틈틈이 전시회에도 참여하는 등 미술방면으로도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근래에는 사진작업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음악에 비해서 미술쪽은 눈에 띄는 활동은 하지 않는 편인데, 그림작업은 시간이 많이 요구되고 자기색깔을 가지려면 오랜 시간 고생을 거쳐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 점점 그게 얼마나 다른 세계고, 예술의 세계가 얼마나 깊고 어려운지를 아니까 조심스럽고 신중해 진다고.. 좀더 시간이 흐르면 집중해서 작업해 보고 싶다고 한다.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미술은 첫사랑 같고, 음악은 결혼한 상대와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음악으로 공적인 사람들(대중)에게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그게 결혼과 비슷한 거라고..결국 첫사랑도 못 잊는다는 얘기? 여행다닐 때도 미술전시회나 박물관 등을 꼭 찾아본다는 이상은은 작품을 대할 때도 남다른 감성을 보여준다. 09년 클림트전 감상평, 15년 프리다 칼로전 감상평
    이상은이 데뷔 초기부터 최근 인터뷰까지 항상 해오던 얘기가 있다. 먼 훗날에 무엇을 하고 있을것 같냐는 질문에 나오는 똑같은 대답. 동화를 그리고 있을거 같다고. 음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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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이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 초영노트. (2001년 아트웍스 한정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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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이 어느 국딩 초딩 남학생 팬에게 그려 보내줬다는 엽서.
(방송에 며칠 안나왔다고 죽었다(...)는 소문이 돌아서 그걸 슬퍼하는 동생을 보고 누나가 이상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왔단다. 데뷔한지 얼마나 됐다고..8월 6일 강변가요제 데뷔인데, 1988년 8월 18일이란 날짜가 놀랍다. 오른쪽아래 깨알같은 탬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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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 발매된 캐럴음반. 이상은이 직접 그렸다고 한다.
(2014.12.23.공연에서 이 캐럴을 불렀다! 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 원곡은 들국화 2집에 수록된 곡이다.)

  • 대학교 졸업장과는 인연이 없는 편이다. '한양대 연극영화과'(88꿈나무학번)[50]는 3학년까지 다니다 휴학하고, 1991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2년 정도 유화, 조각을 전공하다가 일본 활동 때문에 도중에 그만 두게 된다. 2000년도에 영국으로 건너가 다시 미술공부를 하게 되는데, 미국과 영국은 학제가 틀리고 뉴욕 프랫에서 공부한 게 인정이 안되어, 런던 '첼시 칼리지'에서 파인아트 파운데이션 과정을 거쳐, '센트럴 세인트 마틴' BA과정(순수회화) 합격해서 다니다가(관련자료) 그마저도 10집 음반 활동 때문에 중단하고 돌아오게 된다. 후에 영국은 학비와 특히 물가가 비싸서 다시 돌아가서 공부하는게 망설여 진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실은 악명 높은 이것[51] 때문일지도..) 모두 그 계통의 명문으로 불리는 학교들을 다녔는데 어쨌거나 최종학력은 고졸인 셈. 사실 음악활동 하면서 학업을 병행하는거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인데 틈만나면 학교 다니려 하고, 확실히 뭔가를 배우려는 욕심이 많은 듯 하다. 어느 인터뷰에서는 자신에게 음악과 미술은 마치 '들숨과 날숨'과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쉬고 싶을땐 미술을, 좀 더 내지르고 싶을땐 음악을 하며 주기적으로 완급 조절을 해왔다고. 요즘은 미술쪽 보단 음악관련 컴퓨터 장비나 프로그램 공부에 열심이라고 한다. 최근 15집 앨범도 컴퓨터를 이용해 혼자서 다 작업한 앨범이었는데, 앞으로도 그 쪽으로 계속 공부해 나갈 모양. (지금의 그녀에게 대학졸업장 따윈 필요없잖아.)
“가난했고, 착했고, 무모했고, 여렸고, 무지했고, 순수했다. 오로지 궁금한 것을 알아보고 체험해 보자는 것이 바람의 전부였다. 정신 차려보면 총성이 가끔씩 들려오는 브룩클린의 작은 아파트 어둠 속에 누워 공포에 떨기도 하고, 정신을 차려보면 일본의 어느 바닷가 스튜디오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또 눈을 떠보면 런던의 기숙사에서 숙제더미로 어지럽혀진 좁은 침대에 누워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울다 잠들기도 하고...” --- 이상은
  • 보헤미안 이미지에 여행도 잘 다니고 씩씩해 보여도 보기 보다 몸도 약하고 겁이 많단다. 그래서 여행지도 위험한 곳으로는 잘 안다니는 편이고, 사막이나 정글, 오지 등의 와일드한 자연 보다는 자연과 문명이 잘 어우러진 도시 같은 곳이 좋고, 산 보다는 바다를 좋아한다고 한다. 겁도 많지만 새로운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더 많아서 여행을 많이 다녀 도장 찍을데가 없어 갱신한 여권만 세 권이란다. 이것도 10년전쯤 얘기이니 지금은 더 늘어났을수도. 책도 6권 정도 냈는데, 그 중 4권은 여행 관련 책이다. EBS TV '세계테마기행'을 비롯한 여러 여행 다큐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인터뷰 등에서 여행 고수다운 발언도 많이 했는데, 주된 핵심은 '어디든지 여행을 가는 건 다 배울 점이 있다. 리조트 같은데 들어가는 것 보다 배낭여행처럼 실제적으로 그쪽의 문화랑 만나는 가난한 여행들이 훨씬 자아를 발견하는데 도움이 된다. 돈으로 보호막을 만들지 않는 그런 여행을 다녀라' 이다. 한 방송에서는 거리에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길을 물어볼 때가 자신이 여행 중에 가장 큰 기쁨을 느끼는 포인트라고 말한 적도 있다. 현지인 코스프레?
베를린, 스페인 여행기 등 여행작가로도 꾸준히 활동을 해왔는데, 2016년 5월부터 매주 한편씩 12주간 하와이 여행기 포스트를 연재하기도 했다. 이상은의 와이 하와이?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로는 자메이카를 여러번 거론했었는데, 뉴욕 유학 시절 저렴한 여행지로 나와 친구랑 한번 가봤는데 작은 경비행기를 타고 갈 때부터 무서웠다고. 같이 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무사히 도착하자 모두 할렐루야!를 외치며 박수치고 기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단다. 당시 총 들고 다니는 사람도 많고 무서워서 호텔안에서 꼼짝 못하고 이게 뭐야! 했던게 기억에 남는다고.. 그래도 그곳에 가니 항상 레게 음악이 흘러나오고 밥 말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고도 말했었다. (참고로 현재도 여행자제 국가로 지정돼 있다.)
이상은은 처음 뉴욕으로 유학갔을 때도 공포를 먼저 느꼈다고 했다. 미대가 브루클린에 있어 학교주변 외에는 위험한 지역이 많은데다 밤에는 총소리와 싸이렌 소리도 들리고, 특히 흑인들이 무서웠다고 한다. 나중에는 겉보기와 달리 친절하고 순박한 사람들도 많다는 걸 알았지만, 어린 나이에 문화적 충격도 크고 매일 코피를 쏟을 정도로 처음에는 적응하는게 너무 힘들었다고. 사실 낯가림과 겁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기 실험을 하고 습득 하려고 노력하는 등 실로 엄청난 도전들을 해 온 셈이다. 항상 돌아오고 싶어했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한다. 얘기를 들어보면 겉으로는 강해보여도 속은 여리고, 남한테는 눈물을 안보이는 전형적인 '외강내유'형 캐릭터인 듯. 이는 강변가요제 수상 소감에서 부터도 알 수 있다. "울지 않으려고 마음 먹었어요. 집에 가서 울 거에요."
걷는 건 좋아하는데 운동은 별로 안좋아하고, 스노보드 같은 스포츠도 무서워서 못한다고. 운전면허증은 있는데 겁이 많아서 운전은 안한다고 한다. 장롱면허 예전에 중국 공연 갔을 때 자전거 타는 모습이 방송 된 적이 있는데, 그나마 자전거는 잘 타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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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세계테마기행 - 스페인편 : 이상은이 플라멩코 배우는 장면(...).

  • 책을 많이 읽는 책벌레로도 알려져 있다. ## 데뷔초기 인터뷰에서 가수가 되고나서 좋은 점을 묻는 질문에 사고 싶었던 것, 특히 책을 마음껏 살 수 있어서 신난다고 답했었다. 외국여행 가서도 서점에 들러 외국잡지나 서적들을 사오느라 가방이 바윗덩이가 될 때도 많았는데, 요즘은 전자책이 나와서 간편하고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소설류 보다는 궁금한 것을 다이렉트로 알 수 있는 이론 서적들을 즐겨 읽는다고 한다. 가끔 추천도서들 보면 제목만 봐도 머리 아플 때가...추천도서
    한때 자본론(...)에 대한 책의 추천사를 써서 출판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을 정도라고.관련기사
또한 프랑스 파리에서 벨기에 출신의 유명 소설가 아멜리 노통브를 만나 인터뷰 하고 직접 그린 그림도 있다.
(이상은이 신해철 라디오방송에 출연했을때 신해철이 '예전에 항상 대기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얘기를 했는데, '그건 신해철씨도 마찬가지잖아요' 하자, '저는 주로 만화책이었고, 이상은씨는 활자로만 되어있는 책이었어요. 나중에 유학갔다는 얘기를 듣고 역시~ 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며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둘 다 책벌레)
  • 라디오DJ 경력도 상당한데, 지금까지 7개 프로나 했을 만큼 라디오에 많은 애착을 보였다. 2002년 KBS2 FM '사랑해요 FM' DJ 때에는 당시 파격적으로 라디오 진행 도중 벙개를 때려 기사화 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2010년부터 MBC FM '이상은의 골든디스크'를 2년반 정도 진행했었다. 이상은은 아이돌 시절 유학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로 1990년 이종환의 후임으로 MBC FM '밤의 디스크쇼'[52] 라디오 진행을 하면서 부터라고 밝힌 바 있다. 지금 보다 라디오가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시절, 이미 데뷔 하자마자 낮시간 라디오 프로를 진행한 경험이 있긴 했지만, 어린 나이에 단독으로 밤 10시 2시간짜리 전국 방송을 맡으면서 부담감도 컸었고, 초대 손님으로 나온 정말 내로라하는 선배 뮤지션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음악적으로 부족함을 느끼고 아티스트로 각성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즈음 부터라고 한다. 자신의 팬이었던 어느 장우철기자와의 편한(?) 인터뷰를 통해 당시 그녀의 심정을 살짝 엿볼수 있다.
"...결정적으로 나혼자 고민하던 것들을 피크에 다다르게 만든게 '밤디(밤의 디스크쇼)'였어. 라디오와 TV가 너무 다른게, TV는 퀴즈프로그램 PD라도 언젠가 쇼프로그램 PD를 할 수 있으니 나가는게 좋다 그러면, 네 나갈게요, 그런 느낌인데 라디오에 딱 갔더니 분위기가, 음악성이랄까? 그렇다고 힙스터 느낌은 아닌, 바비 맥퍼린이 나오고 어떤날(조동익,이병우)이 나오고 그랬어. 절대로 나한테 프로그램을 맞춰주지 않았어. 몰랐던 음악을 되게 많이 들었지. 그때가 실은 대한민국 창작음악사의 르네상스였어. 어떤날, 들국화, 유재하가 함께 나오는 시기였다고. 그분들이 전부 초대손님으로 나오는거야. 편지나 엽서도 애들이 없어. 작가가 송지나씨였어. 리드멘트도 너무 어른스럽고. 초대손님과 인터뷰를 하는데, 음악에 대해 내가 뭘 모르는 거야. 어떡해, 다 어른이고 나혼자 스무살. 매일매일 죽을 맛인 거지. 모르니까. 한번은 한영애 선배님이 복도를 가는데 PD들이 이렇게 인사를 하는거야.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저 사람은 예술가라서 그렇구나, 였어. 자기 작품으로 존중 받는구나, 딱 깨달았어. 아이돌인 나는 어떤 건널수 없는 강을 건너야만 하겠구나. 라디오가 나를 완전히 바꿨지. 하여간 방송 끝나고 집에 가면 날마다 울었어. 자존심도 상하고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베개가 다 젖도록 울었어."
이상은 밤디 마지막 방송: 1990년 4월 16일~ 10월 14일까지 진행했고, 유학을 이유로 물러났었다. 참고로 그때는 밤의 디스크쇼 바로 전타임이 배철수의 음악캠프였는데, 초기엔 PM 8~10시 방송이었다. 당시 이상은과 배철수가 MBC FM 특집 한여름밤의 축제 야외공개방송을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2002년에는 배철수 휴가기간에 이상은이 일주일 동안 음악캠프 임시DJ도 했었다. 배철수가 당시 배캠 첫PD였던 박혜영(現라디오국 부국장)과 결혼했는데, 그 부인이 후에 '이상은의 골든디스크' PD를 맡았었다.

2001년 한대수 공연에서 이상은이 코러스를 하는 영상인데, 본인 공연때 보다 더 정말 열심히 부른다..(볼륨 좀 높여 들어야함.)

  • 오랜 활동기간 만큼 다방면으로 인맥이 넓고 친분이 있는 음악인들도 많은데, 이상은이 항상 멘토로 생각하고 존경하는 분으로 꼽는 사람은 한국 모던포크의 대부 한대수이다. 이상은이 속해 있던 일본 민간 문화운동단체 '크로스비트 아시아'에서 주최한 한대수의 1997년 후쿠오카 공연에서 코러스를 맡으면서 처음 만났는데 그의 음악도 놀라웠지만, 알고보니 둘 다 생일(3월12일)이 같고, 한대수는 무녀독남, 이상은은 무남독녀로 성향도 비슷하고 공통점이 많아서 친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한대수의 부인이 이상은이랑 동갑이었다고.. 22살차이 흠좀무
    한대수의 공연에 코러스로 자주 참여 해 왔었고, 2015년 4월 발매 된 한대수 40주년 기념 트리뷰트 앨범에도 참여했다. One day 
    여담으로 강산에와는 아예 산에 형! 형동생하는 사이로, 이상은의 추천으로 일본에서 문화운동을 하며 같이 고생한 사이라 더욱 돈독하다고 한다.
한번은 이상은이 김C 라디오 프로에 출연 했었는데 김C와는 데뷔 이전부터 친분관계가 있었던 모양. 김C 얘기로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상은이 눈썹이 지저분해 보인다며 눈썹 손질을 해준 적이 있었는데, 연예인이 해주니 신기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고. 일본에선 남자도 눈썹손질을 많이 하니 당시 유행하는 스타일로 다듬어 준 건데, 그 후에 보는 사람마다 남자가 눈썹이 그게 뭐냐며 한참 동안 놀림을 받았었다고 한다(...).
  • 1990년대 후반부터 홍대거리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홍대 인디씬 1세대 레전드로서, 현재는 홍대 인디음악인들의 대모로 불린다. 고양이들을 길냥이에게 간택 당한 집사 키우면서 여전히 홍대주민으로 살고 있으며, 부모님은 충남 공주에서 전원생활을 하신다고 한다. 이제는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예전처럼 외국에 자주 나가진 않고, 시간이 날때면 되도록 부모님 곁에 있으려고 한다고. 그래서인지 근처 세종시 대형마트에서 이상은을 봤다는 글도 가끔씩 올라오곤 한다.
  • 어릴때부터 애완동물을 키웠고 동물들을 좋아하는데 특히 돌고래를 좋아한다고 한다. 여러 곡의 가사에서도 돌고래를 찾아볼 수 있고 곡제목돌고래 자리으로도 쓰였는가 하면, 개인 아이디도 glassdolphin. 한 방송에서는 그런 그녀를 위해 아예 돌고래와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일본의 프로듀서는 옛날에 한 수족관에서 돌고래와 대화하고 있는 그녀를 목격한 적이 있다고 한다. #관련 사진(...)
  • 성격은 비교적 밝은 편이라고 한다. 한편으론 아무래도 외동으로 자라다보니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예민하고 내향적인 면도 많다고 함. 처음부터 낯을 가리는 성격은 아니였으나 데뷔하고나서 워낙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많지만, 나쁜 사람도 많다는 걸 깨달은 이후론 사람을 가려서 사귀게 됐다고 말함. 예전에 한 방송(놀러와)에 나와서도 낯가림이 심하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는데, 그런 이유를 어느정도 알 수 있는 인터뷰 내용.
- 네가 싫어하는 것들을 좀 말해봐. - "내가 현실감각이 없다는 것을 악용하는 사람들. 사람들이 멀리서 날 볼 때는 철두철미하게 느껴지나봐. 그런데 알고 보면 빈틈투성이고, 비현실적인데다 개념이 없으니까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구. 그래서 쉽게 사람들이랑 안 친해져. 아무하고나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고. 난 따분한 거, 심심한 것도 되게 싫어해."
(가만히 얘기들을 들어보면 그 낯가림이라는 것도 한국에서는 자신에 대해 미리 파악하고 접근해 오는 불리한 상황이 많았기에 방어 차원에서 그런거고, 외국에서는 서로 모르는 동등한 입장이라 오히려 낯가림이 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자신에게 상대방을 좀 더 빨리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거라 생각했는지 칼 융심리학이나 관상, 혈액형 성격설 등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다.)
친해지는데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일단 친해지고 나면 완전 분위기메이커에 그렇게 웃길 수가 없다고. 기분좋게 취하면 수다쟁이에 댄스본능(...)까지 발휘 되는 걸로 전해짐. 이상은이 놀러와에 출연했을때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춤추는게 술버릇이라고 말했었는데, 김나영이 예전에 단상에 올라가 춤추는거 목격한 적이 있다고 말하자 이상은이 민망해 하기도 했다.
또 한 인터넷 방송에서 어느 기자(남)의 경험담에 의하면 이상은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사진 찍는 것도 영 어색해하고 조용조용 얘기하고 그래서 생각했던 이미지랑 달라 놀랬었고, 한번은 우연히 지인들 술자리에 합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목소리도 엄청 크고 호탕하게 잘 웃고 그래서 과연 동일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상반된 모습에 또 한번 놀랬었다고 한다. 그때 그때 달~라요~



2014.7.16. 최근 인터뷰방송 - 여러가지 곡에 대한 에피소드나 그녀의 생각들을 들을수 있다. 이런 얘기들을 공중파방송에 나와서 좀 해주지..

2014.8.14. 주병진의 방자전- 위 인터뷰 영상에서의 차분한 모습과 달리, 이 영상에서 볼 수 있듯 친분이 있고 편안한 자리에서는 밝고 엉뚱한 4차원적 매력이 묻어나온다. 무장해제 상태에서는 그냥 담다디 때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이 나온다고 보면 될 듯. (전체영상은 이곳에서..) 자세히보면 위의 영상때 보다 피부가 살짝 그을린 걸 알 수 있는데 그새 태국여행 다녀왔다고 한다.

2014.10.4. 광화문 콘서트 - 이 영상에 박경림과의 대화에서도 보면.. 역시나 조금만 분위기 띄워주면 잘 노는 사람이란 걸 확인할 수 있다. 박경림이 어렸을때 최초로 좋아한 연예인이 이상은이었다고 한다.

  • 배우 최강희가 이상은의 골수팬으로 유명하다. #기사. 최강희가 라디오DJ할때 이상은이 초대손님으로 나온 적이 있었는데, 흥분해서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상은이 라디오 진행할 땐 최강희와 전화 연결 하기도 했다. 공연장에 모습을 보이고 인터뷰에서 이상은 앨범을 추천하거나, 방송에서 이상은 노래를 부르는 등 여러번 대놓고 인증하였다.
  • 모델 겸 배우 변정수가 학창시절에 이상은 닮은 꼴로 유명했고, 그 덕분에 또래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자신은 원래 그림그리기 좋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는데, 교내 행사때마다 이상은 분장을 하고 담다디를 불러야 했다는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2015년 변정수는 라디오 DJ를 맡자마자 꼭 만나고 싶었다면서 이상은을 초대했고, 방송내내 들뜬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인증샷도 올렸다.
  • 웹마 개발자가 만든 무료 가계부 프로그램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가계부 이름이 '리채(Lee-tzsche)'이다. 현재 리채2 버전까지 나왔는데, 개발자가 이상은 팬이라서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개발자의 글
  • 빈지노izm인터뷰에서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아티스트로 이상은을 꼽았다. 2016.7. 인터뷰. 빈지노 모노그래프 책에서도 요즘 꽂혀있는 노래라며 이상은의 '비밀의 화원'을 언급하기도 했다.
  • 홍대 합정동에 펍레스토랑 겸 복합문화공간 '무대륙'은 이상은이 이름을 지어준 곳으로 알려져 있다. # 영국 제임스 처치워드의 ‘The Lost Continent of Mu'(1926년) 라는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며 번창했다던 고대의 무대륙 처럼 홍대 무대륙에서도 다양한 문화가 꽃피우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 한때 유행했던 '신이 ㅇㅇ를 만들 때' 이상은 버전도 있다. 나름 그녀의 특징을 한 눈에 파악 할 수 있는 신이 리채를 만들때.
  • 2016년 5월 한 공연에서 이제까지 청와대 오찬에 초청 받은 적이 딱 한번 있었다는 말을 했는데 거짓말로 드러났다(...). 증거자료
  • 그외 이상은의 음반과 저서, 방송 등 다양한 활동에 대해 정리가 잘 되어 있는곳 --> 이상은 위키백과
  1. 데뷔때는 176.5cm였는데 계속 컸다! 최근 방송(2014년)에서 178.5cm라고 밝히기도 했다. 깡마른 체격에 몸무게는 많이 말랐을 때는 50kg도 안나갔다고 한다. 그 키에 그 몸무게면 대략 이런 혹은 요런 실루엣이 나온다고 보면 된다. 40대가 되면서는 살이 좀 오른 모습을 보인다. 나잇살? 2집활동 당시 방송에서 신발치수를 묻는 질문에 245mm라고 답한 바 있다. 키에 비해선 발이 작은 편이라 휘청거릴 때가 많다고.
  2. 3월생인데 조기입학했다. 한 방송에서 윤종신(1969년생)이 같은 88학번이라고 얘기하자 이상은이 원래는 89학번인데 학교 일찍 들어가서 88학번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여담으로 국민초등학교 입학 당시에는 키가 작아 앞쪽에 섰었는데, 졸업할 때는 거의 맨 뒷줄이었다고 한다.
  3. 여러 인터뷰에서 밝히길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남자아이처럼 놓아(?)기르시는 바람에 무척 개구쟁이였다고 한다. 6학년때까지는 성적표도 보지 않으시고 정말 아이답게 마음껏 뛰어놀게 했고, 실컷 즐기며 놀고나니 나중에는 저절로 공부하게 되더라고. 그렇게 쌓은 자유의 에너지들이 바로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해준 아버지에게 고맙다는 얘기도 했었다. 자신의 예술적 재능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고, 수많은 외국서적과 명화책, 가구들이 있던 아버지의 디자인 사무실은 방과 후에 자신의 놀이터이기도 했다고 한다. 사무실에 넓디넓은 원목 회의 테이블이 있었는데 아버지에게 혼날땐 그 밑에 숨기도 좋았고, 아무도 안볼때 테이블 위에 올라가 배를 깔고 미끄러지는 맛이 아주 좋았다고(...).그러니까 혼나지.. 한창 외국 유학하며 돌아다닐 때에도 딸걱정에 하루 빨리 결혼하거나 정착하길 바라던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이해한다, 가라, 내가 못했던 거 니가 하렴" 하며 항상 응원해 주셨다고 한다.
  4. 그림과 연극이 하고 싶었던 이상은은 원래 예술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싶었으나, 부모님이 인문계 진학해서 우선 학과공부 열심히 하고, 미술하길 원하셨다고 한다. 허나 인문계 진학 후에도 여전히 연극에 관심이 많아, 고2때는 직접 연극부를 만들고 연극부장을 맡으며 첫 각본, 연출, 연기한 <B사감과 러브레터>, 한양대 청소년연극제에 출품했던 <살로메>에서는 주인공 살로메역을 맡았는데, 자신이 아닌 후배가 우수연기상을 받는 걸 보고 이후로 연기는 포기 했었다고.. 그 외에도 글재주가 좋아 교지에 실리기도 하고, 준(June)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음악 연습도 하고 했는데, 고3 올라가면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화실다니느라 자연적으로 해산되었다고 한다. 이상은은 고교 졸업 하자마자 바로 스타덤에 올랐기 때문에, 비교적 학창시절 얘기 또한 입소문으로 많이 퍼지며 화제를 모았었다. 학창시절부터 인기 많고 튀는 아이였는데다, 공부도 1등, 학급임원에, 다재다능함까지 알려지며 그것이 더욱 10대들에게 큰 인기 요인으로 작용했다.
  5. 아버지 병환도 있었고, 고3 여름때는 집이 수해까지 입었다고 한다. 그때 물난리로 앨범이 다 젖어 어릴적 사진이 남아있지 않고, 키우던 강아지도 하늘로 떠나보내야 했다고. 물난리 당시 얘기
  6. 아버지에게 종아리에 회초리까지 맞았을 정도로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아버지와의 갈등에 대해서 방송에서도 얘기한 적이 있다. 데뷔한지 한달도 안되었을때 출연한 라디오 방송이다. 1988년 9월 별밤 공개방송(29분부터 관련내용이 나온다.) 들어보면 이미 데뷔 이전부터 확고한 자기소신이 있었다.
  7. 때문에 한양대 연영과는 다른 학교 연영과보다 출신 연예인 비중도 적은 편이고 외모들도 그다지.. 주로 영화감독이나 방송국PD 등 연출쪽 유명인사와 유오성, 권해효, 설경구, 이문식 등 개성파 배우들이 많다. 박미선, 전수경, 홍석천, 조혜련도 이 곳 출신이다. 같은 과 출신이라 하더라도 이후에 이런 애들은 저들처럼 공부머리로 들어간 게 아니다.
  8. 연영과 개설년도 순으로 당시에는 중앙대, 동국대, 한양대, 청주대(충북), 경성대(부산) 등 5개 대학, 2년제 전문대학으로 서울예전이 있었다.
  9. 예전에 한 라디오 방송에서 자신의 공부방법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아버지가 수업시간에 항상 선생님의 눈을 쳐다보라고 말씀하셔서 그렇게 했었다고. 근데 이 방법의 단점은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다보면 '쟤 뭐 좀 아나보다' 하고 발표에 자주 걸렸다고 한다. 결국 수업시간에 집중해라는 얘기.
  10. 데뷔직후 이문세 별밤 라디오 공개방송에 나와서 어린 시절을 묻는 질문에 어머니가 의상실을 하셨는데, 아주 어릴 때는 못돌아다니게 몸에 끈을 매어 재봉틀 다리에 묶어 놓았다는 얘기를 했었다. 어머니가 일을 하실때 그렇게 혼자서 천쪼가리 가지고 놀거나 종이에 낙서도 하고 어찌보면 슬픈 기억이라며, 외동은 외로워서 안좋다는 얘기도 했었다. 후술되어 있지만, 아버지가 일찍 재혼을 했었기에 이는 친어머니에 대한 기억인 듯하다. 어느 인터뷰에선 어렸을때 엄마랑 똑같은 옷을 만들어 입고 다녔는데 그게 너무너무 좋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92년 출연방송을 들어보면 엄마가 그립고, 어린 시절이 그립다는 얘기를 하는데, 당시에는 단순히 외국 생활로 인한 그리움 정도로 비춰졌지만 실제로는 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낸거라 볼 수 있다.
  11. 원래는 〈그대는 정말〉이라는 제목의 슬픈 발라드 곡이었는데, 가요제를 준비하면서 이상은의 아이디어로 '담다디'로 제목을 바꾸고 곡도 빠르게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밝은 분위기에 비해 가사내용은 슬펐던 것이다. 담다디는 ‘아리랑’이나 ‘아으 동동다리’와 같은, 의미없는 여흥구라고 한다. 이 노래는 후에 태국에서 무단으로 번안되었다. 가끔 인터넷 돌아다니다 보면 이상은이 태국 담디(1989년)를 표절했니 어쨌니하는 헛소리들이 보이는데 최근에 원작자 김남균은 태국의 담디가 담다디를 허락없이 무단으로 표절하여 발표한 곡이라는 댓글을 달았다. 고로 태국에서 담다디를 표절한게 팩트다. 참고로 '담다디'는 1986년에 만들어져서, 1988년에 강변가요제를 통해 발표된 곡이다. 처음에 담다디 작곡자로 알려졌던 김남경 감독은 2010년에 별세하였다.(기사) 저작권 소송을 통해 '담다디'는 현재 故김남경 감독의 동생 김남균으로 저작권 등록이 되어 있다. (기사)
  12. 물론 그전에 보고 싶은 사람이 있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과 부모님, 함께 연습한 친구들 얘기는 했다.
  13. 이상은이 당시 대단했던 점은 요즘 아이돌들이 각종 트레이닝을 거쳐 데뷔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반면, 이상은은 그냥 타고난 끼와 재능으로 완전 생초보 상태에서 여러가지 활동들을 다 소화해 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이상은은 MBC TV와 라디오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 되었던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탄 직후부터 그야말로 아주 난리가 났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조차 할 새가 없었다. 당시는 TV방송채널이 KBS와 MBC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만큼 방송 파급효과가 요즘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컸다.
  14. 민해경의 히트곡들, '비오는 날의 수채화'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이상은의 1집 프로듀서를 맡았던 강인원은 "특이한 아이가 나왔다고 생각했다. 이상은은 선머슴 같은 느낌이고 발랄한 댄스 가수인지라 내 음악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만나보니 착하고 맑은 심성을 가지고 있어 마음에 들었다"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재기발랄한 이상은의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강인원은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그녀의 여성성을 보여주기 위해 일종의 음악적 실험을 시도했다고 한다.
  15. 실제로 이는 거의 30년이 지난 현재의 여초사이트에서 댓글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1, #2 게다가 당시의 이미지는 요즘 젊은 연령층에게도 먹히는 모양.#3
  16. 당시 젊음의 행진 PD가 이상은을 MC로 쓰고 싶은데 이상은이 워낙 장신이라 어울리는 남자MC가 없어 고민하던 중, 단지 이상은과 키가 맞다는 이유로 신인 가수였던 이정현(1966)을 MC로 낙점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정현은 호주교포 출신으로 한국말이 조금 서툴렀기에 초반에는 이상은이 주도적으로 진행을 이끌어가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둘이 호흡도 잘 맞고 다른 방송에서도 여러번 커플로 묶여 나오는 바람에 사귄다는 소문까지 났었는데, 그런 소문을 의식해서인지 나중에는 티격태격 서로 갈구는 장면을 자주 연출하기도 했다(...). 후술되어 있지만 농구선수인 사촌오빠가 이상은의 콘서트에 꽃다발 들고 찾아왔다가 그게 열애설로까지 번지는 해프닝이 일어났을 정도로 당시 팬들의 극성이 말도 못했다.
  17. 그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데뷔초기의 허스키하고 볼륨감 있는 음색에, 힘 있고 시원시원한 보컬스타일에서 음악적 변화와 함께 서서히 목소리에 힘을 빼고 부유하는 듯한, 한층 맑고 담백한 창법으로 변화하였다. 타고난 성대가 약한지 무리하면 목이 잘 쉬기도 하고, 컨디션에 따라 라이브 편차가 있는 편이다.
  18. 20년 후 장진이 감독한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년)와는 다른 영화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대통령을 꿈꾸는 여대생 역을 맡은 이상은은 배낭 여행중 만난 외국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대통령'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아침인사가...영문을 모르는 남자 주인공들이 그 모습을 보고 황당해하는 장면도 나온다. '굿모닝 대통령' 편집영상  
  19. 당시 인기가수들을 주연으로한 영화들이 많이 나왔는데 다른 가수들에 비하면, 더군다나 데뷔한지 채 1년도 안된 여주인공 원톱 영화임을 감안하면 이상은은 그래도 양호한 편임. 살펴보니(KMDb 자료) 당시 서울관객 기준으로 이승철은 6649, 박남정은 28900, 강수지 6792, 김흥국 131(...). 당시엔 대부분의 영화들이 단관개봉 되던 시절이었고, 지금처럼 전국 관객의 수를 측정할 수 없어서 서울 관객의 수가 곧 흥행 척도였다. 참고로 80년대 흥행작으로 불리던 전영록 주연의 액션영화 돌아이 시리즈도 최대 서울관객수가 98,600명 정도이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가왕과 최고의 여배우 유지인이 주연한 영화도 서울관객 71,209명에 그쳤다. 어쨌든 결과는 망했어요. 전작 '담다디(서울관객 27,593명)' 보단 그나마 볼만한.. 어차피 작품성 따위 있을리 없는 이러한 영화들은 그냥 팬덤 장사
  20. 신기하게도 '사랑할거야' 이 노래는 표절판정 이후에도 박혜경, 서영은, 바다, 등이 리메이크 했고, 케이윌이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 - 이상은, 이상우> 편에 출연했을때 이 노래를 편곡해서 부르기도 했다.
  21. 신해철의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 작곡자 이기도 하다. 한양대 작곡과 출신으로 그룹 아기천사의 여성 키보디스트였다. 88년 강변가요제에 아기천사도 참가했지만 본선 진출엔 실패했었는데, 가요제때 신해철이 객원보컬로 참여하면서 부른 곡이 바로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이다. 아기천사 데뷔앨범에도 '사랑할거야'와 '슬픈 표정..' 두 곡 다 실려있다. 이상은이 방송에 나와서 '사랑할 거야'가 같은 학교 선배의 곡이라고 소개까지 했었는데 알고보니...
  22. 이 노래는 '그대 떠난 후'로 얘기하면 잘 모르고 '똥꼬베이베'(...)라고 말해야 알 정도로 제목보다 후렴구가 더 유명한 곡이었다. 당시 이상은이 출연했던 드라마 내에서 어떤 할머니가 TV를 보다 이노래를 듣고 "똥꼬? 뭐라고?"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똥꼬가 아니라 Don't go babe"라고 설명하는 장면이 방영된 적이 있었는데, 그 강력한 똥꼬한방 때문에 팬들조차 그렇게 부르고 다녔었다(...). 참고로 이 노래 작곡자 박정원은 후에 그룹 '모노'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이상우의 곡들, 가을동화, 겨울연가의 OST를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
  23. 당시 유학설은 계속 나오긴 했었으나, 학교 졸업후 간다고 했었는데..그 남은 1년도 견디기 힘들었던 듯.
  24. 이상은은 자신의 SNS에서 창작음악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던 앨범이 '어떤날 2집'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 참고로 어떤날의 조동익은 이상은 2집에서 편곡과 베이스 세션으로 참여했었다.
  25. 고등학생때 친구따라 들국화 콘서트에 갔다가 '우리나라에도 이런 음악이 있구나' 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상은이 일본방송에 출연해 한국음악 소개할 때도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을 추천했을 정도로 팬이고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방송에서 '그것만이 내 세상', '사랑한 후에'를 부른 적도 있다. 참고로 들국화의 드러머 주찬권은 이상은 2집에도 참여했었다. 이상은 캐롤앨범에도 들국화의 노래가 실렸고, 이상은이 부른 '매일 그대와'도 유명하다.
  26. 당시 대중성을 잘 아는 전문 작곡가(안진우)를 뉴욕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상은은 작곡가에게 '마음대로 만들면 잘 안 팔린다. 한 곡정도는 같이 작업하는게 어떠냐'라는 말을 들었었고, 그래서 '언젠가는'은 만들어진 기타 코드를 듣고 이상은이 멜로디와 가사를 붙이는 방식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타이틀곡 '언젠가는'은 이상은·안진우 공동작곡이다. 그 외엔 단독작곡. 참고로 4집이 100% 컴퓨터 사운드였다면, 5집은 No 신디사이저, No 메트로놈의 전 곡 어쿠스틱 사운드이다.
  27. 여성 뮤지션의 앨범 중에서는 최고 순위. 또한 이상은의 7집 역시 99위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28. 7집 '사람은 다 사람' 가사중에 화성이 나온다. 참고로 원곡인 영어버전 'Simple Like People'에서는 화성이 아닌 목성으로 되어 있다. 'Why do people move to Jupiter?'
  29. 외국 활동이 많아지면서 쉽게 부를수 있는 이름이 필요해 만든 것으로, 90년대 후반에 있었던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에서 착안해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리채란 이름을 씀으로서 본의아니게 팬들에게는 지금의 어머니가 새어머니란 것도 알려지게 되었다. 데뷔때부터 알려진 어머니는 '지'씨 성을 가지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어느 인터뷰에서 밝히기로는 아주 어렸을때 헤어져서 친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고, 새어머니가 좋으신 분이고 어렸을 때부터 항상 옆에서 챙겨주시며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는 분이라 거의 친어머니나 다름이 없다고 한다. 실제로 데뷔 초기때부터 최근(2016년) 공연까지도 어머니와 같이 다니는 모습이 목격될 정도이다. 아버지와 친어머니는 집안에서 밀어 붙인 정략결혼이었는데, 이혼 후 원래 연인이셨던 지금의 어머니와 다시 합치신 거라는 얘기도 했었다. 비록 어릴때 상처는 있었지만, 무남독녀로 애지중지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어느 절친 정유희기자의 증언에 의하면 이상은의 공주 부모님댁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아버님이 딸에게 해줄 음식 리스트를 직접 그림까지 그려서 짜놓은 것을 보고 상당히 인상깊었고, 또 바쁜 딸을 위해 책도 미리 읽어보고 좋은 책들을 골라 선물해 주시는 멋진 딸바보셨다고 한다.) 리채란 이름을 쓴 것도 특별히 다른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새어머니 성씨를 붙인 '리지' 보단 친어머니의 성씨를 붙인 '리채'가 여러모로 나아보여서 쓴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30. 백지연 피플인사이드 인터뷰에서 과거 일본활동 당시의 생각들을 얘기했었다.(25분쯤부터) 다른 인터뷰에서는 일본에 가면 꼭 전사가 된 기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31. '어기여디어라' 곡에 대한 이상은의 코멘트 : "일본에서 만들었구요. 당시 제가 마음속으로는 일본을 미워했어요. 어떻게 하다보니 일본에서 활동을 하고 있지만 너무 짜증나는 거에요. 실제로 살아보니까 전혀 차별이 없다고 말할수 없고, 어렵고 힘들고 짜증내던 어느 순간 '아냐, 이렇게 계속 미워만 하면 안돼'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이랑 손을 붙잡고 함께 갔으면 좋겠다.. 사실 (가사) 배에 탄 두 사람이 한국과 일본이거든요. 화해를 하고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혼자 스스로에게 심어주며 만든 곡인데 용케도 그걸 알았는지 일본에서 그 노래를 많이 좋아해 주었죠. 이 곡은 제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서 만든 노래에요."
  32. 영화제작사 알타미라 픽처스의 프로듀서가 우연히 NHK 방송에서 이상은이 한국어로 '어기여디어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뜻은 모르지만 왠지 자신들의 영화와 어울릴거라 생각하고 연락을 해왔는데, 배(고등학교 조정부)에 관한 영화에 배에 관한 노래여서 오로지 그 음악적 느낌만으로 이상은을 음악감독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일본 영화 관계자들은 '이건 대단한 우연의 일치'라며 놀라워 했었다고. '간밧떼 이키맛쇼이'는 1995년 '봇짱 문학상' 대상 수상작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98년 소규모로 개봉되어 꾸준한 선전으로 평판을 불러, 이례적인 롱런 상영을 기록했고 각 영화상을 휩쓸며 인기작이 되었다. 2005년에는 동명의 TV 드라마로도 제작 되었다고 한다.
  33. 그때 경합붙었던 가수가 우타다 히카루ㄷㄷ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회사입장에선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밖에.
  34. 당시 김광진과 이상은이 시상식 MC를 맡았는데, 사회를 보던 이상은은 수상을 위해 사회자석에 김광진만 남겨둔 채 무대로 나와야 했다.
  35. 2002년 KBS2 FM '이상은의 사랑해요 FM' 진행할 때 DJ취향의 선곡으로 당시 한국에서는 생소했던 다프트 펑크의 'One more time'을 많이 틀어줬는데, 청취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으면서 '교가'로 선정되며 수시로 춤판(...)을 벌렸었다. (청취자들에게 애칭으로 DJ는 쌤, PD는 교장쌤으로 불렸고, 간혹 방송에서 출석을 부르곤 했었다.) 이 곡은 몇년 후에 광고에도 쓰이며 국내에서 히트하기 시작했다. 뒷북? '제2교가'도 있었다. 역시나 들썩들썩!
  36. 2009년에 만든 이상은의 1인 기획사. 14집부터 음반 제작은 Breeze Music, 유통/배급은 Sony Music으로 하고 있다. 14집 활동당시 자체진행에 어려움을 겪었는지 15집때는 브이엔터테인먼트와 따로 매니지먼트 계약(1년)을 맺고 활동하였으나, 2015년 재계약 없이 계약종료 한 것으로 보인다. 워낙 묶여있기 싫어하는 사람이라..
  37. 이때 유희열이 자기에겐 아주 친숙한 분이라고 소개를 했는데, 바로 유희열 아내 이름도 이상은이었기 때문이다. 동명이인이다.
  38. 어린 시절 피아노 학원을 다닌 적이 있는데 성격상 자꾸 조급하게 진도를 건너뛰다가 나중엔 뒤죽박죽 되버려서 그만뒀다고 한다. 악기는 조금씩 다루기는 하지만 남들 앞에 보이기엔 민망한 수준이라고.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다는 말로 짐작해 보건데, 악기 연주와 같이 꾸준히 반복 연습을 필요로 하는 것엔 약한 모습을 보이고 또 쉽게 싫증을 내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운동도 별로 안좋아하는 편이고, 유일한 운동이 춤추는 거(...)라고 말했었다.
  39. 이 공연은 단순 대관공연이 아닌 '여우락(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이라는 국립극장 기획공연이었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 전통예술을 중시하는 국립극장은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전당과 더불어 일반 대중가수에게는 대관 조차 쉽지 않은 곳으로 유명하다. 2009년에는 김장훈이 대관신청했다가 '대중가수 공연은 대관규정에 없기 때문에 접수 자체가 안된다'는 이유로 거절당해 한바탕 논란 끝에 대관이 성사된 적이 있었다. ## 
  40. 보통 대중적이지 않고 어렵다는 평을 받는 이상은의 앨범 중에서도 곡분위기 자체가 팬들조차 접근이 쉽지않은 난이도 최상으로 꼽히는 실험적인 앨범이다. 한곡 빼고 다 영어가사라는건 그냥 넘어가자
  41. 엠버는 키라도 작았지 이상은은...
  42. 동갑내기 이자 당대 라이벌 관계였던 이지연은 한때 이상은과의 루머 때문에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했다. 관련내용은 이지연(가수, 요리연구가)항목 참조.
  43. 6학년때 부모님과 장충동 족발집에서 밥먹고 있다가 스카웃 되었다고 한다(...). 때마침 은광여고 농구부 스텝들이 회식왔다가 이상은의 키와 먹성을 보고는 관절 이곳저곳 만져보더니 농구 해보지 않겠냐며 권유를 했었단다. 삼촌 2명도 농구를 했었기때문에 부모님이 허락을 해서 농구부에 들어가 한달간 연습을 해봤는데, 워낙 운동신경이 둔해 점프력과 순발력에서 밀리는데다가 단체기합을 한번 받고나서는 기겁을 하며 농구부를 나왔다고 한다.
  44. 발레리나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듯 하다. 데뷔초기 어릴적 꿈을 묻는 질문의 답에는 항상 발레리나가 있었다. (이런 짤도 있다. 흑조?) 뉴욕에서 3집앨범 작업할 때도 편곡자(Tom Semanski)가 발레음악하는 사람이라 마음에 들어 선택했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45. 1988년 강변가요제는 이상은, 이상우, 박성신, 박광현, 이재영 등 당시 인기가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전설적인 대회였다. 본선진출자 12팀 가운데 5팀이나 프로가수로 데뷔한 것이다. 참고로 1970~90년대 대표적인 가수 등용문이었던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는 가수 지망생들의 로망이었고, 대학생 중심의 창작 가요 경연대회였기 때문에 '가요제 나가기 위해 대학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기였다. 실제로 이 두 가요제를 통해 이선희, 신해철 등 수많은 가수들이 배출 되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대형 기획사와 각종 오디션 방송 프로그램이 생기면서 실력있는 신인들은 이미 10대때 데뷔를 하고, 굳이 어렵게 대학에 들어가서 가요제에 나갈 필요가 없어지고, 더이상 가요제를 통해 스타가 배출되지 않으면서 점점 폐지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46. "제 생각으로는 불교에 심취해 있으면 음악이 난해해지거든요. 불교적인 마인드를 가지면 내 자신의 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어요. 고통이 생겨도 받아들여야 하고, 불교가 어떻게 보면 철학적이죠. 아픈 부분도 있구요.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다 버리고 '저 좀 도와주세요' 하는 마음이니까 밝아지고 명랑해지고 그래요. 긍정적이고 쉽고 단순한 것, 기독교적인 것이에요." 긍정적인 그녀의 글(...)
  47. 단지 리차드 얼굴보러 영국 공연까지 쫓아간 적도 있고, 리차드 땜에 영국이 좋아져서 나중엔 아예 런던으로 미술유학을 갔다(...). 영어발음도 영국식을 선호하는 듯. 버브가 일본 공연 왔을때 같은 Virgin 소속 아티스트 자격으로 무대 뒤에서 리차드를 직접 만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때 악수도 하고 자신의 CD도 선물했는데 암튼 너무 떨려서 말도 제대로 못했었다고. 리차드가 윙크까지 해주더란다 영국 공연까지 쫓아가서도 차마 만날 용기도 못내고... 의외로 소심한 면이 많음. 악기 연주하며 노래부르는 모습은 매우 보기 힘든데, 빠심 충만함으로 직접 기타 연주하며 리차드 노래(Sonnet) 부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자신이 직접 팬질을 해보니 이제 팬들의 그 마음을 알 것 같다며 자신의 팬들에게 좀 더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오~오~리차드느님! 그가 유부남인걸 상당히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단다.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그녀의 취향으로 볼때 리차드는 그 취향을 넘어선 다른 매력이 있는듯 하다. 리차드 외모는 그다지... 이상은이 97년 런던 메트로폴리스 스튜디오에서 8집 레코딩 중일때 휴게실에서 잠깐 쉬는데 그때 Bitter~ 뮤직비디오를 보고 한눈에 반해 엔지니어한테 '뮤지션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버브라는 팀인데 지금 밑에서 녹음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만날수 없냐고 내선전화를 걸었더니, 아쉽게도 리차드는 녹음하다 말고 잠적했더라는...버브가 레코딩하다 기물파손에, 행방불명되고 하는 악동들이란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고. 오죽하면 별명도 매드(mad) 리차드. 나쁜 남자에게 끌림? 이상은이 워낙 좋아하는 티를 많이 냈기 때문에 특히 라디오 진행할 때는 애청자들이 아예 리차드를 형부(...)라 지칭하며 신청곡으로 형부노래 틀어달라고 말할 정도였다.
  48. 당시 김성주가 진행하던 TV프로에 남친이랑 같이 일본여행 간 모습이 나왔었는데, 이때 남친은 "꿈에 상은이(...)가 나왔는데 전혀 모른 상태로 홍대앞 놀이터에 갔다가 그날 처음 봤었다. 꿈꾸고 난뒤 실제로 보게 되서 꿈 같았다."고 인터뷰 하기도 했다. 이상은은 홍대의 한 클럽파티에서 강산에와 지인들이랑 술 마시다가 우연히 2층에 서있던 남친이랑 눈이 마주쳤는데, 마치 왕자님이 서있는 것처럼 멋있게 보이더란다. 그날 남친에게 쪽지도 받았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강산에랑도 친분이 있었고 괜찮은 친구라고 다리를 놔줘서 만나게 됐다고. 처음엔 사귈 생각도 전혀 못했고 나이차 때문에 많이 망설이기도 했다는데, 나이보다 어른스럽고 진중한 모습에 호감이 가던차에 더군다나 잘생긴 남자가 계속 들이대니.. 결국은 콩깍지 제대로 씐 모습들을 보여주곤 했다. 하록선장 닮았다고.. 남친이 경상도 출신이여서 그런지 당시 이상은이 라디오방송 같은데 나와서 가끔 경상도 억양을 흉내내는 모습도 보였었고, 남친이 은근 가부장적인 면도 있고, 과묵한 스타일이라 가끔 심심할 때도 있다는 말까지 했었다. 교제 허락받고 실은 중간에 결혼까지 할 뻔 했었는데 이상은이 미뤘었단다. 12집의 '둥글게' 노래가사 초반에 나오는 작은 가게가 바로 둘이 처음 눈 맞았던 그곳 이야기라고 한다. 참고로 11집 '비밀의 화원'에 나왔던 사람은 이 남친이 아니라 다른 남자였다고(...).
  49. 만화도 잘 그림. 만화가가 되려고도 했었다고. 데뷔시절 좋아하는 만화가로 김영숙(우에하라 기미코)을 꼽았었다. 순정만화계의 대모 황미나와도 친분이 있고, 만나서 서로를 그려준 그림도 있다. 그림.
  50. 여담이지만 한양대 연극영화과 88학번은 영화계 황금라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기사까지 나왔다. 이한, 정지우 감독을 비롯한 88학번 동기인 6명의 감독이 20편이 넘는 장편 영화를 관객에게 선보였는데, 타 대학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한 한양대에서, 더군다나 한 학번에서 이렇게 많은 기성 감독이 배출된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51. 맛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먹고 사는 것엔 거의 포기한 나라 같다는 말까지 했었다. 2001년 영국 유학 시절 잠깐 귀국했을때 인터뷰 ( 42분쯤에 음식얘기가 나온다.)
  52. '밤의 디스크쇼'는 1981년부터 1999년까지 18년간 방송된 밤10시 MBC FM의 간판 프로였다. 라디오계의 전설 이종환이 초대DJ로 8년동안 진행해오다 성시완을 거쳐 이상은, 신해철, 윤상, 김현철, 신성우, 이소라, 김윤아가 그 뒤를 이었었다. 명단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20살이었던 이상은의 투입은 분위기 쇄신을 위한 파격적인 조치였다. 전문DJ에서 청소년에게 인기 있는 가수DJ로 교체함으로써 청취율을 올릴 목적이었다. 팝 선곡이 많았던 음악 전문 프로라 처음에는 PD 조차 아이돌 DJ에 대해 우려를 했을 만큼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어린 나이에 부담감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전에도 이미 MBC는 88년 여름에 데뷔한 이상은을 바로 라디오 가을 개편 때 'FM은 내친구' DJ로 앉히는 파격을 보이긴 했었다. 여가수 DJ도 드물었을 뿐더러, 당시 만18세로 지상파 최연소 단독 DJ였다.) 아무튼 이 프로그램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냐면 여름방학 특집으로 전국 대도시 체육관을 돌며 공개방송을 할 정도였다. 당시 기사 출연 가수들이 후덜덜 하다. 가왕이 공개방송에 나오던 시절 그와 동시에 CBS 라디오 '우리들의 이야기'의 진행을 맡기도 했었는데, 겹치기 진행에 대한 비판 기사에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었다. 당시 이상은의 인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다. 2010년에는 또 다른 라디오계의 전설 김기덕이 13년간 진행하던 팝 전문프로 '골든디스크'의 후임DJ를 맡았는데, 이 또한 분위기 쇄신을 위한 조치로, 김기덕이 막방에서 타의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다는 뉘앙스를 풍겨 한동안 이상은은 골디 골수팬들의 원망 아닌 원망을 들어야했다. 파격의 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