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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사건 경위
" 수술대에 눕혀진 포로들에게 마취가 진행됐고 옷이 벗겨졌다. 팔에 꽂은 주사기를 통해 투명한 액체가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도노 옹은 “나중에야 그게 바닷물이었으며 혈액 대용으로 주입됐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그 다음 광경은 더 끔찍했다. 포로 몸에서 장기가 하나씩 적출되는 것이 아닌가. 지켜보고 있던 일본 군인 한 명이 갑자기 “이놈은 일본을 무차별 폭격했다. 총살을 당해야 할 놈이란 말이다”라고 외쳐댔다.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일이 정당한 일이라는 변명이었다."[1]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가는 1945년 5월 일본을 공습하던 초대형 폭격기 B-29 한 대가 오이타현과 구마모토현 경계 근처에, 19살짜리 학도병이 조종하던 전투기의 공격에 의해 불시착했다. 뭐?!
큐슈 지구를 관할하던 서부군사령부는 탑승원이었던 윌리엄 프레드릭 소령을 포함한 12명을 포로로 잡고 재판 없이약식 재판으로[2] [3] 12명의 탑승원 중 8명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이때 큐슈제국대학 제일의 이시야마 외과 교수와 큐슈제국대학 의학부 외과 출신의 코모리 타쿠 군의관은 『생체실험』을 서부군사령부에 제안하여 사토 요시나오 대좌의 허가를 받은 후, 큐슈제국대학 의학부는 사형이 선고된 포로 8명을 서부군사령부로부터 인수했다. 이동된 수용지가 병원임을 깨닫자 8명의 미군 포로들은 사형의 공포에서 벗어나 안도했으며 그중에는 웃는 얼굴로 의사들을 향해 「Thank You」라고 말하는 포로도 있었다고 한다.
큐슈제국대학 의학부의 이시야마 교수를 포함하여 토리스 타로 교수, 히라오 켄이치 조교수 외과 의사, S교수, 의학부 학생, 간호사 등 50여명이 동원되어 미군 포로를 수술실로 연행하여 산 채로 간, 심장 등의 기관을 없애거나 혈액 대용으로 개발 중인 생리식염수를 해수로 대체 가능한지 등의 실험[4]을 했다. 이때 이시야마 교수는 수술대를 둘러싼 제자들에게 「심장은 자르는 것도 꿰매는 것도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니다」등의 교육을 했다고 한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군 총사령부(GHQ)는 포로수용소에서 행방불명된 연합군 포로의 행방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고 원자폭탄 공격으로 인해 사망하거나 학대 등으로 사망한 포로들 이외에 미심쩍은 이유로 사라진 포로들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여 해당 지역에서의 B, C급 전범들에 대한 재판 및 처벌을 시행하였다.[5]
후쿠오카에서 실종된 포로의 행방에 대해 의문을 품은 총사령부 법무국의 알버트 카펜터 대령은 5개월간에 걸쳐 철저하게 조사했다. 그 결과 그들이 병원에서 산 채로 해부되었고 일설에는 해부와 실험이 종료된 후 제거된 심장이나 간 등의 내장 기관과 근육, 피부 등은 그대로 잘게 썰려져 회가 되거나 불로 조리되어 육군 장교 집회소 연회에 제공되었다는 진술도 확보했다.[6]
결국 의학부의 이시야마 교수, 토리스 교수, 히라오 조교수, 수간호사 츠츠이 시즈코, 재판 없이 8명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서부 군사령관 요코야마 이사무 중장, 인육을 먹은 호리우치 키요신 소장 등 29명을 기소했다.
1946년 7월 이시야마 교수는 후쿠오카 도테쵸 형무소에서 「모든 것은 군부의 명령. 책임은 나에게 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제자와 간호사들의 석방을 요청하며 목을 매고 자살했다. 그 이전부터, 이시야마 교수는 731 부대(일명 마루타부대)의 설립과 운영에 직ㆍ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쳐왔다는 의혹이 있었고 731부대의 군의관들로부터 생체실험 결과물들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
1948년 8월 27일, 요코하마의 점령군 제8군 군사법정은 미군 포로에 대해 생체해부 실험을 실시한 큐슈제국대학 의학부 관계자, 군부 관계자 등 14명 중 토리스, 히로, 요코야마 등 5명에게 교수형[7], 츠츠이 등 4명에게 종신형을 판결했다. 그러나 인육을 먹은 혐의를 받고 있던 호리우치 등 5명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 상세
2.1 교수형 수형자(1948년 8월 요코하마군사재판)
- 서부군사령부 소속자
- 큐슈제국대학 관계자
2.2 희생자
2.3 실험내용
2.3.1 기획
사토 요시나오 대좌, 고모리 타쿠 군의관, 이시야마 후쿠지로 교수
2.3.2 장소
큐슈제국대학 의학부 해부학교실 실습실
2.3.3 기간
2.3.4 목적
2.3.5 방법
3 지탄받아 마땅한 몇 가지 이유
- 전쟁 포로 처리를 군사 재판을 열지 않고 즉결 처분한 것
- 피험자들을 고의로 살해하기 위해 생체실험을 자행한 것
- 동서고금에도 없는 유례가 없는 포로들에 대한 생체실험을 자행한 것
- 포로의 규정 제네바 협약에 따르지 않고 포로들을 살해하고 생체실험 도구로 쓰고 그 시체를 유기한 것.
4 큐슈제국대학의 조직적 관여 의혹에 관하여
연합국측의 전후 수사 내용에 의거하면, 본 사건에 대학이 조직적으로 관여한 정황은 없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그러나 큐슈제국대학의 후신인 큐슈대학은 본 사건이 의학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의학윤리와 인간 존엄이 심하게 훼손된 사건으로 간주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에, 의학부 내에서 08년 11월 29일 개최된 일본생명윤리학회 20회 학회에서 당 학부 출신 의학박사[8]에 의해 본 사건과 관련된 강연을 열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끔 하였다.
공식적으로 큐슈대학 의학부에서는 생체실험을 자행했다는 사실 등의 언급을 꺼리고 있었지만, 2015년부터 병원캠퍼스의 의학역사관에 전쟁범죄에 관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관련 링크)
5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작품
엔도 슈사쿠의 걸작 바다와 독약은 바로 이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다만 정현웅의 마루타 같은 불쏘시개가 아니라 이러한 잔인한 사건에 대한 고발과 여기에 참가하면서도 아무런 제지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 피해자들이 불쌍은 하지만 전문적인 일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기술 관료, 생활고 때문에 심성이 파괴돼서 범죄에 참가하면서도 야릇한 즐거움을 느끼는 나약한 민중들을 대변하는 인물들을 배치해서 문학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걸작을 남겼다.
다만 사건이 사건인지라 실제 인물들의 이름[9]과 상황은 작품에 맞게 개작했고[10] 후쿠오카시 대신 F시로 개명한 도시로 그렸다.
이 작품은 1950년대 말에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상당히 잔인한 장면의 생생한 묘사와 시대 상황에 대한 고증 및 배우들의 열연으로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했다. 당연히 일본 우익들의 공격과 극장 난입으로 국내 흥행은 실패했다.
원작 소설은 해적판으로 돌다가 1990년대말에 정식 출간되었다.
여담으로 사카키바라 사건의 범인이 상술한 S교수의 외손자라는 소문이 퍼졌지만 실체는 없다. 자세한 사실은 가문에 흐르는 악의 피 참조.- ↑ 1945년 일본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 목격자 도노 도시오의 인터뷰
- ↑ 실제로 이 시기에 재판 없이 개발살난 포로들도 꽤 많았다.
- ↑ 조종사였던 마빈 S.왓킨스 소위는 도쿄로 압송되었다.
- ↑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 수형 당시 이 실험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런 실험은 인공혈액 성분 조사에 필수적으로서 연합국에서도 하던 일이지만 동물로 했다는 게 다르다.
- ↑ 이때 포로 학대 혐의로 상당히 많은 조선인, 대만인 군무원들이 처형된다.
- ↑ 단 이 부분은 유력한 소문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에 이 혐의는 불기소 처분된다. 실제로
대한독립유공자고위 일본 장교 한 사람도 이런 소문으로 꽤 욕을 먹은 바 있지만 사실과 무관한 것으로 판명났다. 애초에 그랬으면 그도 처벌을 받았지, 2년만에 나오는 일은 없었을거다. 오히려 항목보면 알겠지만 이 사람 싱가포르 화교 학살당시 주민들을 보호했다. - ↑ 이마저도 1950년 재심 감형으로 사형수는 교수형을 면하고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 ↑ 50명의 학생들 중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당시 만 19세.
- ↑ 사토 요시나오(佐藤 吉直)를 극중에서는 가토 나오키치(加藤 直吉)로, 고모리 타쿠(小森 卓)를 오오모리 타쿠(大森 卓)로 등
- ↑ 이를테면 거기 참가한 주인공은 양심의 가책 때문에 전후에 시골에 내려와 은둔하면서 산다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