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유니코드 6.2에 추가된 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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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ürk Lirası (튀르크 리라스) - 대개는 그냥 밀리욘[1] "리라"혹은 "텔레(TL)"라고 한다.
동유럽의 통화 | |||
유로 ( | 터키 리라 | ||
러시아 루블 | 벨라루스 루블 | 우크라이나 흐리브냐 (카보바넷) | |
루마니아 레우 | 불가리아 레프 | 몰도바 레우 | 트란스니스트리아 루블[2] |
조지아 라리 | 아제르바이잔 마나트 | 아르메니아 드람 | 나고르노 카라바흐 드람[3] |
- 흔히 아시아의 통화로 분류하고 있지만 문화적 문제상 동유럽에 넣었다. 사실 터키 리라의 역사를 따지고 보면 파운드 스털링과 마찬가지로 리브르계열 통화라는걸 알 수 있다.
목차
1 소개
튀르크의 통화. ISO 4217코드는 TRY2015년 12월 현재 환율은 대략 400원/₺ 정도인데 2013년 9월 이후 많이 내려가서 500원대인 거고, 비싸면 700원대까지도 변동된다. 2013 터키 시위 이후 적발된 대규모 금융 비리에 에르도안 총리까지 연루되었다는 설이 돌고 1월 28일자로 터키에서 금리 인상을 시도해 어떻게든 환율방어를 하려 했지만, 1월 30일 이틀만에 약빨이 다 하고(...) 다시 신나게 폭락하고 있다. 달러 환율은 1월 29일 유럽증시 마감기준으로 달러당 2.30리라 선을 돌파했다. 2016년 2월 현재 2.90리라 선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외환은행에서 터키 리라를 취급하지만 을지로2가 본점, 지역 일부 지점, 공항점 정도만 받아주고, 수수료가 정말로 장난이 아니며[5], 순수한 매입량에 의지하는지라 구매도 어려워 매우 불편한 편이다. 과거에는 대개 한국씨티은행에서 국제현금카드를 만들고 현지에 가서 뽑아다 썼지만, 2013년 7월 이후 터키 씨티은행이 터키 국내은행인 데니즈반크(Denizbank)로 인수합병되는 바람에 더 이상 이 방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데니즈반크에서는 과거 터키 씨티은행 계좌를 가진 고객에게 데니즈반크 ATM을 이용해도 수수료를 물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지만, 외국 씨티은행 계좌에 대해서는 그런 거 없다. 다만 외국 씨티은행 현금카드로 데니즈반크 ATM을 이용할 경우 현지 ATM수수료 5리라가 면제된다. 영수증을 발급해보면, "Bu işlem için bankanız sizden ücret tahsil etmemiştir." (이 작업을 위해 당신의 은행이 당신으로부터 수수료를 물지 않았습니다.)라고 붙어있는걸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은행들은 얄짤없이 국제수수료+타은행ATM수수료 모두 떼간다.
유로화나 달러화로 중개환전하기도 하는데, 이때는 은행이나 호텔보다 사설 환전소에서 환전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다. 우선 수수료를 물지 않고, 유로, 달러화에서 터키 리라로 환전할 경우 환율도 꽤 높게 쳐주는 편이다. 다만 관광지가 아닌 지역 한정이다. 이스탄불 관광지에 있는 사설환전소에서는 굉장히 환율을 짜게 쳐주고, 환전소마다 매기는 가격이 다 다르기때문에 몇번 발품을 팔 필요가 있다. 똑같은 100달러를 환전해도, 관광지에서는 190리라 받을것을 200리라 넘게 받을 수도 있다. 이스탄불의 경우 악사라이(Aksaray)와 랄렐리(Laleli - 이스탄불 대학교 근처) 사이에 괜찮은 환전소들이 많이 있다. 터키어로 환전소는 되비즈(Döviz)라고 하며 당일환율은 http://www.doviz.com/ 에서 확인하거나, 신문을 보면 된다.
그리고 주변 나라들에 견주면 숙박비나 연료비같은 물가가 비싼 편이다. 그래도 유럽 다른 나라들에 견주면 꽤 물가가 싸기에 유럽에서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편이지만, 바로 이웃 시리아나 이란같은 나라 물가보단 비싼 편. 무엇보다 이란이나 이라크 등 석유대국들이 있는데도 이들나라에서 석유를 직접수입하기보다는 미국을 중재하여 아랍 석유를 사오기에 연료비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 리터당 5리라(2014년 1월 환율 기준으로 약 2500원)를 넘어선게 벌써 2013년 7월 일이다. 나부코 송유관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지역 자원 개발 및 운송 합의가 이뤄지면 꽤 혜택을 볼 듯 싶다는 떡밥은 2003년부터 쭉 이어져왔지만 해당 지역의 정세불안과 무엇보다도 PKK의 준동으로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터키 국민들의 극진한 아타튀르크 사랑으로 인해 이 나라 돈은 모두 아타튀르크를 주 도안으로 삼고 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의 건국 초기부터 시작된 유구한 전통(?)이다. 심지어 아타튀르크 비방만으로도 철창신세를 질 수 있으며, 아타튀르크를 게이로 묘사한 동영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유튜브를 막아버린 경력도 있다. 2011년 말까지 접속할 수 없었지만, 볼 사람들은 용케 잘 뚫고 돌아다닌다. 흠좀무. 일부나마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 같은 위대한 군주도 지폐인물로 선정하는게 어떠냐고 주장하지만 글쎄... 받아질지는 미지수(아타튀르크 자체가 1922년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렸던 인물이기에).
인플레이션은 11.14%(소비자물가), 7.65%(생산자물가)수준으로 많이 가파른 편이다. 어느 신문 기사에서 하기아 소피아를 소개했을 때 터키 리라의 인플레가 심해서 아예 터키에 갈 때 미국 달러를 갖고 가라고 말했을 정도. 특히 소비자 물가가 생산자보다 대략 1.5배 큰 수치를 기록하고 있지만 터키에서 노동자임금도 소비자물가 추세만큼이나 상승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큰 불편은 없다. 여행자들이 힘들어서 문제지.[6]
하지만 여전히 터키(중에서도 대도시, 관광지 위주)에선 달러와 유로사용이 어렵지 않은데, 다 여행자들 때문이기도 하고 기나긴 인플레 사정이기도 하다.
한때 버스 요금으로 100만 리라(터키 화폐, 2005년 화폐개혁당시 1달러가 약 135만 리라였다)를 내는 등의 엽기적인 인플레이션을 자랑하는 등 범상치 않은 기록이 있다. 먼저, 인플레이션시절 터키에서는 동전이 거의 통용되지 않았다. 무겁기만 하고 가치도 별로 없을뿐만 아니라 동전이 너무 자주 바뀌었기 때문에 자판기에는 아예 동전이 들어가지 않았고, 가게에서 물건을 살때에도 이를테면 담배 한갑을 살때도 잔돈으로 풍선껌이나 라이터같은걸 주었다. 모든 돈의 활용범주가 1,000,000리라에서 끊어졌는데, 때문에 신문이나 쇼핑 카탈로그에서 가격을 표시할때는 끝의 세자리를 지워 표기하는게 보통이었다. 만약에 3억리라짜리 월세방이 있다고 하면, 가격을 300.000TL[7] 이라고 표기하는 식. 나중에는 이것도 귀찮아졌는지 끝의 여섯자리를 떼어버린다. 이러한 관습이 반영된게 2005년의 화폐개혁이다. 당대에는 신문사설에서도 우리 터키인은 거지부터 부자까지 모두 억만장자식으로 비꼴정도로 억단위를 사용할 일이 많았는데, 버스비만 해도 편도 200만리라, 터키에서 제일 싼 삼순담배 한갑이 370만리라, 책 한권에 2700만리라 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물가시대에 적응해갔는데, 앞서 말한바와 같이 은행에다 돈을 꿍쳐놓으면 오히려 그 가치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저금을 하더라도 달러나 유로로 예금하는 외국환계좌가 대세였으며 필요한 돈은 은행에서 다 뽑아서 현찰로 들고다녔다. 신용카드? 그게 뭥미? 관광지에서 외국인한테 굳이 달러나 유로로 돈받으려 하는것도 그 시대에 비롯된 산물이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입장료를 아예 미국 달러로만 받았던 것도 이 때문.
헌데 화폐개혁 이후에도 옛날식으로 부르는 관습이 2013년 현재까지도 남아있어서, 터키어 초보자들에겐 여러모로 혼란을 줄 수 있다. 이를테면, 5리라짜리를 옛날 단위로 500만리라 (Beş milyon)라고 부른다던가, 3.50리라를 350만 리라라고 써서 Üç milyon beş yüz (bin) 이라고 말해버린다. 특히 1000리라 단위를 넘어서면 milyar(10억) 같은 괴물단위들까지 등장하게 된다. 부동산같은데를 유심히 보면 집들이 월세 10억(1 milyar), 매매가 756억(75,6 milyar) 리라씩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실제 통용되는 화폐로는 1000, 75600리라 라는 소리다.
다음으로 외국인들을 이유로 치면, 평소 팁을 주는 습관이 터키에 번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직까지도 고급 레스토랑이나 4성 이상급 호텔이 아닌이상 팁을 줄 필요는 없으며, 특히 배낭여행자들이 자주 가는 저렴한 상점이나 숙소에선 굳이 팁같은거 줄 필요 없는데도 팁을 주는 사례가 있어, 되려 그게 버릇돼버려 여행객을 호구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정말 감사의 뜻으로 팁을 주겠다면 지폐로 주자. 바로 앞 문단에 언급한 이유때문에 지폐를 훨씬 선호한다. (때문에 유로화보다 달러화가 더 유용한 편이다. 심지어 5리라짜리 지폐보다도 1달러가 더 싸니까.) 몰론 1리라 동전을 두고가도 상관없긴 하지만.
그런데 외환을 주역으로 사용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현지화인 리라보다 확연히 비싼값을 매기므로[8] 가급적이면 리라로 지불할 것을 권장한다. 더구나 이스탄불이나 앙카라 및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면 되려 환전하기 혹은 거래하기가 힘들어질 수도 있다.
1.1 새로운 기호
파일:Attachment/터키 리라/newtl.jpg
(예비 후보들. 가장 위에 있는것이 정식 발탁된 기호다.)
기호는 レ에 두개 줄 그어놓은 형태(대략 히라가나의 も처럼 생겼다.)가 2012년 3월에 새로 제정되었다. 그 이전에는 단순히 약칭인 TL라[9] 지정했었고, 2012년 중반 기준으로 온전한 정착이 확인되었다. 이 문자는 유니코드 6.2(2012년 9월)에 추가되었다(U+20BA).[10]
2 오스만 리라
- 이 단락은 터키 리라의 전신인 오스만 리라에 관한 내용입니다.
터키에서 최초의 리라화는 1843년 1월 5일에 오스만 제국술탄 압듈메지트에 의해 도입되었다.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화폐제도는 3악체(akçe)를 1파라(para), 40파라를 1쿠루쉬(kuruş)로 하는 은본위제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영국의 화폐제도를 본받아 금본위제를 도입한 것.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옛 화폐를 보면 Osmanlı Lirası (오스만 리라)라고 쓰여있는 표기 옆에 프랑스어 Livre Turque 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리라 도입으로 보조화폐로 전락한 쿠루쉬도 대외적으로는 피아스트르(piastre)라고 불리고 있었으며 리라화 도입 이후에도 유럽권에서는 리브르, 피아스트르라고 불렀다.
리라화 도입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에서는 쿠루쉬를 표준 단위로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게 워낙 소액이라(...)[11] 금화가 널리 쓰였지만 금화가 뒤죽박죽에다 변동환율이라 매우 혼란스러웠다.[12] 리라 도입 이전 오스만 제국에서 통용되던 금화 종류는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는데, 우선 소액금화로 제리 마흐붑(Zer-i mahbub)이란 금화가 있었으며 시대에 따라 환율이 미묘하게 다르지만 대체로 140~160파라(3.5~4 쿠루쉬)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하이리예(Hayriye)라는 이름의 24 쿠루쉬 가치의 금화가 있었으며, 루미 알튼(Rumi Altın)이라는 30 쿠루쉬 가치의 금화가 있었으며, 프랑스, 영국 등에서 발행한 금화도 유통되었다. 이 금화들은 변동환율제로 도시마다, 지방마다 환율이 다 달랐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서는 쿠루쉬화에 패그시킨 금화를 도입하기 시작하는데 이렇게 해서 도입된 것이 마흐무트 2세 시기의 제디드 마흐무디예(Cedid Mahmudiye = 20 쿠루쉬), 제디드 아들리(Cedid Adli = 18 쿠루쉬) 종이었다. 이렇게 되자 기존의 변동환율제 금화와 고정환율제 금화가 섞여서 오스만 제국의 화폐단위는 더더욱 혼란스럽게 되었지만, 이 제디드 마흐무디예와 제디드 아들리 금화는 오스만 제국의 금본위제를 준비하는 과정으로서 유통되었으며, 마지막으로 리라화를 도입하면서 금본위제가 완성되었다.
참고로 리라화 도입 이전에 오스만 제국에서 쓰였던 화폐단위들은 다음과 같다. 파운드 스털링/옛 단위 항목 스럽게 복잡하다.
2.1 은화
- 악체(Akçe): 오스만 제국의 은화중 가장 작은 금액이자 가장 오랫동안 기준통화였던 통화. 어원은 터키어로 '밝다'라는 의미의 ak에 지소접미사 çe가 결합된 것이다. 1327년부터 무게 1.154 그램의 순은으로 만들기 시작했다가 점점 은의 함량을 줄여가더니(...) 최후에는 순도 40%대까지 폭락하고 무게도 1g이 채 안됐으며(...) 이미 17세기 말에 이르면 잔돈으로도 쓸 수 없을 만큼 가치가 없어져버렸다. 하지만 악체 자체는 19세기 초까지도 한국의 1원짜리 동전 발행하듯 계속 발행되기는 했다(...) 시대에 따라 종류가 다양한데, 그 중에서 유명한건 1470년 메흐메트 2세때 발행한 악체이 뷔쥐르그(Akçe-i Büzürg) 혹은 귀뮈쉬이 술타느이예(Gümüş-i Sultanıyye)라고 불린 10악체짜리 은화이다. 보조화폐로 만그르(Mangır)라는 1/4 악체짜리 구리동전이 있긴 하지만 13-15세기때까지만 통용되었다.
- 파라(Para): 3악체 = 1파라, 초기에는 악체보다 큰 단위를 결제할때 많이 쓰였으며 오스만 제국 후기에도 잔돈 등으로 많이 쓰였던 통화이다. 대부분의 경우 2.5악체와 동일한 무게의 은으로 주조했지만
동작그만, 0.5악체분의 은은??후기에는 파라도 가치가 없어져 5파라, 10파라, 15파라, 20파라, 40파라, 60파라, 100파라 등의 은화가 주조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현대 터키어로 돈을 뜻하는 'para'의 어원이다. 관용어도 많은데, "beş para etmez" (반푼어치도 안된다) 같은 표현들이다. 참고로 리라화 개혁이후 화폐의 최소단위가 5파라였기 때문에 이런 말이 생겼다.
- 샤히(Şahi): (초기에는 6.5악체=1샤히, 후기에는 8악체=1샤히), 원래 페르시아의 통화이지만 페르시아와 이웃한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터키 동부, 시리아 등에서도 발행을 했던 화폐이다. 후기에는 이스탄불에서도 8악체=1샤히의 비율로 통용되었지만, 16세기에만 잠깐 쓰였다.
- 디리헴(Dirhem): 아랍-이슬람제국의 화폐 단위인 디르함과 어원이 같은 말로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무게단위로 쓰였지만 여전히 아랍지방에서는 디리헴을 기반으로 한 지방화폐가 통용되었다. 이스탄불을 비롯한 일부 오스만 제국내 지역에서도 통용되었지만 오스만 제국 전국에서 유통되지는 못했다.
- 졸타(Zolta) 혹은 졸로타(Zolota): 30파라 = 1졸타, 오스만 제국내에서 통용되던 독일 탈러화 및 마찬가지로 탈러에 패그되어있던 폴란드의 즈워티화와 패그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위로 18-19세기 초까지 널리 쓰였다. 애초에 Zolta 혹은 Zolota라는 이름 자체가 '즈워티'에서 왔다. 1졸타는 1.5탈러와 동일한 가치를 가졌으며, 1/2 졸타(1/2 Zolta), 1졸타(1 Zolta), 2졸타(2 Zolta)권이 있었다. 압뒬하미트 1세때까지 발행되었으며 이후 쿠루쉬화에 통합된다.
- 쿠루쉬(Kuruş): 40파라 = 1쿠루쉬, 1687년에 최초로 도입된 화폐로 기존의 기준통화였던 악체를 대신하기 위해 발행되었다. 쿠루쉬라는 말은 독일의 그로셴(Groschen) 은화에서 비롯되었으며 졸로타와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그로셴 은화에 패그되어 발행되었다. 공화국시대인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아있는 단위이기도 하다. 역시 후기에는 다양한 쿠루쉬화가 사용되었는데 리라화 이전에는 1/4쿠루쉬, 1/2쿠루쉬, 1쿠루쉬, 2쿠루쉬, 2 1/2쿠루쉬가 있었으며 리라화 도입 후에는 1, 2, 5, 10, 20쿠루쉬로 정착하게 된다.
- 지하디예(Cihadiye): 5쿠루쉬 = 1지하디예,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찍어낸 통화이다. 은 함량이 매우 높고 신뢰도가 높은 통화였지만, 마흐무트 2세 통치기에만 잠깐 쓰였다.
2.2 금화
리라화 도입 이전에도 금화는 굉장히 자주 쓰였지만 은본위제 특성상 금화에 대한 은화의 교환비율은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환전상에 따라 항상 변동했다(...) 일반적인 환율을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 픈득 알튼(Fındık altını): 튤립 시대의 술탄인 아흐메트 3세때 발행된 금화로 23k의 금 3.4575그램으로 만든 통화이다. 18세기에 널리 쓰인 통화로 무게에 따라 1/2, 1, 1 1/2, 2 픈득 알튼이 있었으며 모두 변동환율로 운용되었다. 평균적으로 1픈득 알튼은 3-5쿠루쉬 정도로 통용되었지만 후기에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은화 위에 금을 씌우는 짝퉁 금화가 정식으로 발행되기도 했다(...)
- 제리 마흐붑(Zer-i Mahbub): 3.5쿠루쉬 = 1제리 마흐붑, 이 통화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에서는 베네치아의 두카트, 피렌체의 플로린, 영국의 소버린, 프랑스의 리브르 등등 외국의 금화들을 자국의 은화들과 병행해서 사용했다. 하지만 외국 상인들이 저질의 금화를 가져와 오스만 제국에 유통시키는 등 자꾸만 물가혼란이 발생하자 오스만 제국에서 직접 발행한 금화로 1787년경 3.5쿠루쉬로 비율을 고정시켜놓고 유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세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변동환율로 돌아섰으며 지방에서는 꽤 오랫동안 (20세기 초까지!) 통용되었던 화폐다.
- 아들리 알튼(Adli Altın): 12쿠루쉬 = 1아들리 알튼, 마흐무트 2세때 이스탄불에서 발행한 22k 금화로 얼마 가지 않아 20k로 금의 비중을 줄인(...) 제디드 아들리 알튼(Cedid Adli Altın)이 발행되었다. 아들리 알튼이란 '법적금화'라는 뜻으로 마흐무트 2세가 서구식 금본위제 개혁을 준비하기 위해 발행한 통화라 최초의 고정환율 금화라는 점에서 의의가 큰 화폐이다. 하지만 아래에 언급할 하이리예 알튼과 마찬가지로 시대에 따라 그 고정환율의 기준이 달라졌다(...) 1823년에 1 아들리 알튼은 12쿠루쉬의 가치를 지녔지만 1833년에는 16.5쿠루쉬로, 1제디드 아들리 알튼은 15쿠루쉬로 가치가 절상되었다. 여기서 금화에 들어있는 금의 함량도 환율에 반영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2, 1, 2 아들리 알튼이 있었다.
- 하이리예 알튼(Hayriye Altın): 20쿠루쉬 = 1하이리예 알튼, 마흐무트 2세때 에디르네에서 발행된 금화로 대략 20쿠루쉬의 가치로 유통되었던 통화이다. 1/2, 1, 2 하이리예권이 있었다.
- 루미 알튼(Rumî Altın): 로마인의 금이라는 뜻의 화폐로 마흐무트 2세때 유통된 금화들 중에서 가장 가치가 높았으며, 주로 유럽과의 무역대금으로 통용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마찬가지로 변동환율이었으며 1833년경 1루미알튼은 48쿠루쉬의 가치로 유통되었다.
- 마흐무디예 알튼(Mahmudiye Altın): 마흐무트의 금이라는 뜻이지만 마흐무트 2세때는 아니고, 그 다음 황제인 압뒬메지트 시기에 유통되기 시작해 리라화 도입시기까지 아주 잠깐 (6년간)쓰였다. 20쿠루쉬=1마흐무디예 알튼으로 고정환율이었다. 사실상 금본위제도 도입에 앞선 실험적으로 통용된 임시화폐에 가깝다.
- 메지디예(Mecidiye): 20쿠루쉬 = 1메지디예, 술탄 압뒬메지트 시기에 리라화 도입 직전에 발행된 금화로 리라화 도입 이후에도 20쿠루쉬=1메지디예로 환율이 완전히 고정되어 터키 공화국 초창기까지 유통된 비교적 장수한 화폐이다. 한편 리라화 도입 이후에는 1/4리라(=25쿠루쉬)금화가 발행되었기 때문에 메지디예는 새로 발행된 20쿠루쉬 은화의 별칭으로 바뀌어 기존의 메지디예 금화와 함께 통용되었다. 참고로 금화 메지디예는 불과 1년 쓰이고 리라화로 대체되어 은화로 발행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찾아보기 힘들며, 압뒬메지트 시대에도 메지디예는 금화와 은화가 병행하고 있었다.
새로 만들어진 1리라짜리 금화는 100 쿠루쉬 (약 9.5g의 금 혹은 99.6g의 은)의 가치를 지녔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물가가 상승하고, 결정적으로 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금화로 발행된 이전의 리라화와 지폐로 발행된 리라화의 가치가 9배나 차이나는 등의 병크를 보이다가[13], 결국 1925년에 터키 공화국정부가 들어서면서 터키 공화국이 최초로 발행한 화폐이자 터키 역사상 아랍 문자로 쓰여진 마지막 화폐인 공화국 리라화를 발행하면서 이러한 혼란을 추리게 된다.
오스만 제국 시기 리라화는 오로지 금화로만 존재하다가 19세기 후반에 캬이메(Kâime)라는 이름의 100쿠루쉬짜리 지폐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도입되었다. 이 캬이메는 정부산하 조폐소인 다르프하네(Darphane)에서 발행한것이 아닌 오스만 은행같은 당시 외국계 은행에서 사설발행한 것으로 처음에는 일종의 어음이나 신용장의 용도로만 쓰였던것이 계속되는 전쟁으로 물가가 상승하자 일반에 통용되기 시작했다.
루미역법 1331년(1915년) 11월[14] 22일에 발행된 5쿠루쉬짜리 지폐의 모습. 맨위에는 당시 파디샤인 메흐메트 5세 레샤트의 서명이 있고 왼쪽에는 프랑스어로 액면가가 표시되어있다. [15]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술탄인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 제위 1년에(1918년) 발행된 5리라짜리 금화의 모습. 동전의 앞면에는 "항상 승리하는 술탄 압뒬마지트의 아들 메흐메트 한" 이라고 쓰여있는 투으라(Tuğra - 오스만 제국 황제들의 서명)와 화폐가 발행된 해 (해당 술탄의 즉위년도로부터 몇년 째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뒷면에는 "항상 승리하는 자, 코스탄티니예 (이스탄불의 옛 이름) 발행" 이라는 문구 밑에 즉위년도 이슬람력으로 1336년(1918년)이 쓰여져 있다.
3 공화국 터키 리라
공식적으로는 "E(Emission)+숫자"의 형태로 표현한다. 그러니 현행권의 경우는 E9시리즈. 2012년 현재, E7까지는 사실상 사용중지, E8은 제한적 사용이 가능하고, E9가 주로 통용된다.
3.1 1차 (1기)
1926년 공화국 리라 등장 이후 파운드 및 프랑스 프랑에 강력한 페그(고정환)를 걸었기 때문에 환율이 2.8리라/USD 정도로 일정하게 유지되어 왔다. 국어(오스만 터키어)가 아랍문자로 쓰여진 처음이자 마지막 공화국 리라이며, 뒷면에는 프랑스어[16]가 병기된 유일한 시리즈이기도 하다. 제작에는 9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막 새로운 수도로 결정된 앙카라를 도안소재로 폭넓게 사용하였다.
1930년대 후반경에 국문표기법 변경으로 인한 신권이 발행되면서 통용이 중지되었다.
앞면 | 뒷면 | ||
1TL | 앙카라 국회의사당를 배경삼아 소로 쟁기끄는 농부[17] | 수상관저 | |
5TL | 회색늑대와 마을 | 앙카라 교각 | |
10TL | 앙카라 성채와 회색 늑대 | 앙카라 성채 | |
50TL | 무스타파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 | 아피욘의 성채[18] | |
100TL | 아타튀르크 | 마을(소재지 불명) | |
500TL | 아타튀르크와 괵메드레세(사히비예 메드레세시)[19] | 시바스[20] | |
1,000TL | 아타튀르크 | 사카리야[21]의 철길 |
3.2 2차 (1기)
2~4차는 굉장히 짧은 통용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유인 즉, 세계 2차 대전이 터진 탓.[22] 전쟁때는 공급이 자주 끊기는 바람에 모든권종이 한꺼번에 쓰인 적은 없고, 1937년에서 1944년까지 자주 등장했다 사라졌다 했다. 마지막으로 중지된 시기는 1952년 11월. 참고로 영국산이다.
앞면 | 뒷면 | ||
0.5TL (50kr) (쿠루쉬) | 무스타파 이스메트 이뇌뉘[23] | 터키은행 본관 | |
1TL | 보스포루스 해협 | ||
2.5TL | 아타튀르크 | 울루스광장(앙카라)의 승리상 | |
5TL | 군인상(앙카라) | ||
10TL | 앙카라 성채 | ||
50TL | 앙카라 염소[24] | ||
100TL | 다르다넬스 해협[25] | ||
500TL | 루멜리 히사르(요새)[26] | ||
1,000TL | 군인상(앙카라) |
- 500리라와 1,000리라는 아주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2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3.3 3차 (1기)
모든 시리즈에 지금은 지겹게 볼 수 있는 아타튀르크가 빠지고 이뇌뉘가 들어간 첫 시리즈. 2차 시리즈와 혼용되어 사용된 긴급발행권의 성격을 지닌다. 1942년부터 1947년까지이며, 영국(초반), 독일, 미국산(후반)이 섞여있다. 급한대로 뽑아다 쓴 모양이다. 종류는 2.5리라부터 1,000리라까지 1, 5단위로 올라가며 7종.
3.4 4차 (1기)
2차 및 3차와 혼용되어 쓰인 시리즈인데 영국과 독일이 서로 싸우느라 나라꼴이 시망ㅋ해버리니 발주가 곤란해지자 미국에 발주넣어 들여온 시리즈이다. 극혼란기에만 잠깐 쓰였다. (47년 ~ 48년) 종류는 단 2가지(10, 100리라)이며, 이뇌뉘가 그려져 있다.
3.5 5차 (1기)
1951년부터 등장해 7종류(2.5 ~ 1,000리라)가 여러번 변화를 거치며 32가지 바리에이션을 만들고는 1971년에 숨을 거둔 나름 장수한 시리즈. 전란 후폭풍에서 벗어나고 점차 외주를 줄이며 국내산(터키)으로 찍어내 예전의 영광을 되찾았다. 전성기 당시 환율은 9리라/USD정도. 이때부터 모든 돈 앞면에 아타튀르크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3.6 6차 (1기)
1966년 처음 도입되기 시작해 1983년까지 생존한 두번째 장수 시리즈. 20리라만 영국에서 만들고 나머지는 모두 터키국내산으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시장개방을 위해 점진적으로 환율을 변동제로 풀어주는 과정에서 무언가가 잘못되었는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되었다. 말기의 환율이 100리라/USD까지 치솟았었다고 한다.
앞면 | 뒷면 | ||
5TL | 아타튀르크 | 마나브가트 폭포 | |
10TL | 크즈 쿨레시[27] | ||
20TL | 아늣카비르(앙카라)[28] | ||
50TL | 톱카프 궁전[29]의 장미정원 내 분수대 | ||
100TL | 아라라트 산[30] | ||
500TL | 이스탄불 대학의 정문[31] | ||
1,000TL | 보스포루스 교각 |
3.7 7차 (1기) - 전반부
1979년부터 등장한 시리즈로, 인플레 혼란기에 해당한다. E7에 해당하는 시리즈는 모두 15개 종류에 36가지 바리에이션이 존재하는 참으로 방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최저액권과 최고액권의 격차는 무려 2,000,000배. 당연하지만 전 종류가 한꺼번에 쓰인 적은 없다.
앞면 | 뒷면 | ||
10TL | 아타튀르크 | 아타튀르크에게 꽃을 전달하는 초딩들 | |
100TL | 마흐메트 아키프 에르소이[32] | ||
500TL | 이즈미르 시계탑 | ||
1,000TL | 파티흐 술탄 메흐메트 2세와 오스만 시절 이스탄불의 전경 | ||
5,000TL | 4종류가 있다.[33] | ||
10,000TL | 미마르 시난[34]과 셀리미예 모스크(에디르네[35]) | ||
20,000TL | 터키 중앙 은행 본관 | ||
50,000TL | 터키 대 국민의회 (국회의사당, 앙카라) |
3.7.1 7차 (1기) - 후반부
디자인상 10만 리라(1990년 첫 발행)를 기준으로 전반과 후반을 나눈다. 최고액권인 2000만 리라는 2002년에 등장하였고, 모든 종류는 2005년 1월 1일부터 사용이 중단되었다. 개혁 직전인 2004년에는 환율이 135만 리라/USD이었다. 2016년 1월 1일부로 통화로서 효력을 잃는데, 계산하기도 귀찮고 교환하기도 귀찮은 탓에 이미 이것들은 시중에서 거의 안 받아주는 편.
워낙에 "0"이 많다보니 당시 계산할 때, 일단 0을 3개 먼저 빼놓고 계산했다고 한다.
10만 리라, 25만 리라는 동전도 발행되었다.
앞면 | 뒷면 | ||
100mTL | 아타튀르크 | 아타튀르크에게 꽃을 전달하는 초딩들 | |
250mTL | 크즐 쿨레(알란야)[36] | ||
500mTL | 갈리폴리 전투 기념관(차낙칼레)[37] | ||
1,000mTL | 아타튀르크 댐 | ||
5,000mTL | 아타튀르크의 영묘 (아늣카비르) | ||
10,000mTL | 피리 레이스의 지도[38] | ||
20,000mTL | 에페소스의 유적지[39] |
3.8 8차 (2기)
디노미 탈출을 위해 삽질에 삽질을 거듭하다 결국 2005년에 개혁한 시리즈(Yeni Türk Lirası)로, 이때부터 ISO 4217코드가 TRY로 바뀌었다. 약간의 진통은 이어졌지만 강력한 통화정책의 덕분인지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리고 대신에 물가가 빠르게 오르고 있다. 구권과의 디노미 비율은 1(신):1,000,000(구). 20리라까지는 E7의 디자인을 이어받았고, 뒤늦게 나온 2종은 새롭게 개정된 신판이다.
참고로 이 당시에는 구권인 TL과 구분하기 위해 일부러 YTL이라고 표기하였다. 2020년 1월 1일부터 통화효력을 잃어버린다.
앞면 | 뒷면 | ||
200px | 1YTL | 구권과 동일 | |
200px | 5YTL | ||
200px | 10YTL | ||
200px | 20YTL | ||
200px | 50YTL | 아타튀르크 | 카파도키아 |
200px | 100YTL | 이샤크 파샤 궁전[40] |
이 시기의 병크였던 자판기로 돈벌기(...)는 여기 참조. 물론 지금은 E9가 등장하면서 해결된 상태. 동전의 최소단위는 1쿠루쉬이며, 구권 1만 리라에 해당했다. 이때 1만 리라 이하의 지폐는 아예 취급하지 않았었는데, 이미 사장되었었기 때문. 그리고 새 터키리라 도입당시에도 1쿠루쉬는 쓸일이 없어서 상점에서 물건을 살때 잔돈을 받을때면 5쿠루쉬 이하는 그냥 버렸다. 오오 적절한 반올림 이것은 2012년 현재도 마찬가지이며, 한국에서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3.9 9차 (2기)
2009년 1월 1일 부터 통용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시리즈. 이때부터 YTL의 Y가 탈락하였다. 유적지에 중점을 두던 과거와 달리, 전반적으로 유명인사를 디자인 소재로 적극 기용하는 방향.
환율은 이제 거의 안정화 되었는데... 터키 경제성장률이 매년 5% 이상씩을 찍으면서 초반에 언급했듯 물가상승률은 여전히 가파른 편이다. 예를들면 이스탄불의 교통토큰인 제톤(Jeton) 1개의 가격도 2004년에는 65~100만 리라(0.65~1 새 터키리라)였지만 2012년 현재는 3리라(300만 리라)로 많이 올랐다. 다만 교통카드로는 1.95리라, 터키 학생이라면 0.90리라라는게 함정
195px | 195px | 195px |
아타튀르크 A타입 | 아타튀르크 B타입 | 아타튀르크 C타입 |
앞면 | 뒷면 | ||
200px | ₺5 | 아타튀르크 A타입 | 아이든 사이을르[41]와 태양계 및 Z-DNA구조 그림 (현재는 자청색으로 바뀌는 중.)[42] |
200px | ₺10 | 자히트 아르프[43] | |
200px | ₺20 | 아타튀르크 B타입 | 미마르 케말렛딘(건축가)과 그가 세운 가지 대학 본관 |
200px | ₺50 | 파티마 알리예 토푸즈(작가)와 꽃과 서적들 | |
200px | ₺100 | 아타튀르크 C타입 | 부흐리자데 무스타파 으트리(음악가)와 류트와 삽화고서 |
200px | ₺200 | 유누스 엠레(시인)와 영묘와 비둘기 |
- 위 200리라는 구권으로 치면 2억 리라에 해당한다. =구권 최고액의 10배.
지폐의 경우, 50리라까지는 무난하게 통용이 되지만 100리라(약 41,000원)는 터키에선 상당히 큰 돈이라 시장이나 작은 상점에서 100리라짜리를 내면 "거슬러줄 수 없다."라고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200리라는 ATM에서도 취급하지 않고, 200리라는 액수도 큰데다가 숫자의 애매한 특수성 때문에 정말정말 드물게 사용된다. 만약에 200리라짜리는 내밀면 굉장히 신기하게 쳐다보거나(...) 위조감별기로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터키에서 사는 사람이라도 200리라 지폐 구경하기는 쉽지 않다.
동전은 1쿠루쉬가 탈락하여 5, 10, 25, 50쿠루쉬와 1리라의 5종이 되었다. 이 중에서 1리라 동전이 가장 보편적으로 이용되고 25, 50쿠루쉬가 보조단위로 주로 이용된다.[44] 10, 5쿠루쉬는 마트나 패스트푸드점과 같은 대형업체에서나 볼 수 있다. 5쿠루쉬 미만은 그냥 버린다. 마트같은 곳에선 잔돈이 부족할 경우 10쿠루쉬 단위로도 버리는걸 볼 수 있다.
여담으로 9차 한정으로 동전에도 앞면에 아타튀르크가 그려져 있는데 최소액권인 5쿠루쉬는 완전한 옆모습을 하고 있다가 위 사진처럼 액면이 커질수록 아타튀르크가 점차 앞쪽으로 돌아보는 모습으로 바뀐다. 아타튀르크는 큰 돈을 좋아합니다! 비정상회담의 에네스 카야가 이를 언급했었다.[45]
4 유로화 전환 관련
사실 터키는 강남살이 좀 해보려고 자신들도 유럽에 들어가싶다 해왔고, 그 일환으로서 유로화 전환을 적극 추진하고자 안달이나 온갖 노력을 다 하고 있지만... 원년멤버인 그리스의 적극적인 디스질[46]......은 과거시절 이야기고, 2002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의 집권이후 외교관계 개선으로 그리스는 터키의 EU가입을 지지하겠다고 선포한 상황이다. 하지만 산너머 산이라고 아직 키프로스가 남아있다
- ↑ 취소선 쳐놨지만 실제로 터키에 살다보면 많이 들을 수 있다. 과거 2005년에 기존의 100만 리라를 1 새 터키 리라로 전환하는 디노미네이션이 행해졌는데 사람들은 입에 익은 100만 (밀리욘)을 그대로 사용한데서 비롯되었다.
- ↑ 미승인국이다.
- ↑ 미승인국이다.
- ↑ 2005년 개혁 이전에는 TRL이었다.
- ↑ 리라당 50원이나 떼간다!
- ↑ 과거 터키가 전설적인 인플레이션을 기록할때에도 돈을 은행에 넣어둔 사람들은 손해를 봤지만, 보통 터키인들은 은행을 잘 이용하지 않고, 사용하더라도 매달 15일, 즉 월급날에 계좌에 들어온 모든 돈을 다 뽑아 가기때문에 크게 불편한점은 없었다. 그저 0자가 많아서 계산하기 힘든정도.
- ↑ 터키에서는 소숫점을 ,로 자리점은 .로 찍는다. 한국과 반대다.
- ↑ 2016년 현재 3.24리라/EUR인데, 유로화로 계산하면 대개 3리라/EUR로 통크게 내쳐버린다. 한화로 치면 리라당 100원 가까이 손해보는 셈이다. 달러도 상황이 비슷한데 대략 2.96리라/USD 정도. 여담이지만 면세점이나 페리회사등, 유로로 가격을 매겨놓은 곳에선 역차별하기도 한다.
- ↑ 화폐개혁 직후에는 YTL(Yeni Türk Lirası - 새 터키 리라)
- ↑ 그런데 이걸 둥글게 해서 뒤집은 것(즉, "も"를 정확히 180도 돌린것)이
원쑤아르메니아 드람의 기호다보니, 일부에게 까이기도 한다고. - ↑ 83%은 기준으로 1그램이 채 안된다(...) 그래서 45.3%, 25% 정도밖에 안되는 은화도 흔했다.
이쯤되면 은화가 아니다. - ↑ 다른 이야기지만, 오스만 제국에서는 각 지방에서도 별도로 화폐를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스탄불에서 발행된 화폐는 지방에서도 통했지만, 지방에서 발행된 화폐는 이스탄불이나 다른 지방에서 잘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환전소를 들려 돈을 환전하든가, 아니면 금화를 들고 다녔어야 했으므로 금본위제 경제가 아닌데도 오스만 제국 사람들의 금화의 사용도는 매우 높았다.
- ↑ 당연한 얘기다. 전쟁통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은행들은 자신들이 발행한 지폐에 대한 금태환을 거부했다. 결국 사람들이 지폐를 믿지 못하고 금화에만 의존하게 된것.
- ↑ 현대 터키어로 11월은 kasım이지만, 당시에는 kanun-i evvel이라고 불렀다.
- ↑ 과거에는 이 항목에 이슬람력이라고 되어있었지만, 당시 오스만 제국의 공식역법은 히즈라 기년을 사용하지만 내용은 율리우스력인 루미역법(Rumi takvim)을 사용하고 있었다. 루미역법은 1840년 탄지마트 개혁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달력으로, 새해가 3월에 시작하고 그레고리우스력과 비교할때 13일이 더 빨랐다. 이러던것이 점진적인 개혁을 거쳐 1916년 (1332)에는 새해를 3월에서 1월로 앞당기기 위해 이 해는 10달만을 가지게 되었고, 13일을 앞당기기 위해 10월이 18일까지밖에 없었다. 결국 1333년(1917년)부터는 기년법을 제외하고는 그레고리우스력과 완전히 동일하게 개혁이 이루어졌고 1928년에 터키 공화국이 히즈라 기년을 폐지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 ↑ 프랑스어로 단위는 리브르.
- ↑ 이때까지만 해도 앙카라는 한적한 시골에 불과했다.
- ↑ Afyonkarahisar, 아피욘카라히사르(카라히사르 이 사힙 아피움 카라 히사르). 검은아편성이라는 뜻으로, 중앙 아나톨리아 지방에서도 어느정도 규모는 있는 중소도시지만 주변부에 워낙 인기있는 관광지(동쪽의 소금호수와 카파도키아, 서쪽의 파묵칼레)로 포위되어 있다시피해 그대로 아오안이 되어버린 비운의 도시.
- ↑ 하늘의 마드라사(학원(院))라는 뜻. 시바스에 있다.
- ↑ 중앙동부 아나톨리아에 있는 중간규모의 도시. 터키와 중동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 ↑ 터키 서북부의 아다파자르가 있는 지역. 이스탄불 동부에서 아시아 본토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으며, 터키 독립전쟁 당시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터키군이 사카리야 강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그리스군의 진군을 저지. 전쟁의 전황을 뒤바꾸었다.
- ↑ 1차대전 당시엔 오스만 제국이었다.
- ↑ 장군 출신의 2대 대통령. 이뇌뉘라는 성은 자신이 이끄는 군이 그리스군에 맞서 대승을 거둔 곳인 이뇌뉘 강에서 따왔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 시절인 1884년생으로 본래 성씨가 없었으나, 1934년의 성씨 개혁
창씨개명과는 다르다!으로 모든 터키인이 성(姓)을 갖게 되었다. - ↑ 털이 복실복실한게 양과 염소를 섞어놓은 모습인데 라마와도 좀 닮았다.
- ↑ 마르마라 해(다르다넬스와 보스포루스의 사이에 끼어있는 바다)와 에게 해를 잇는 해협. 여기도 유럽과 아시아의 좁다란 경계지점이나, 보스포루스 해협의 인기에 밀려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게 다 이스탄불 때문이다차낙칼레 및 트로이와 매우 가깝다. - ↑ 1452년 오스만 제국의 황제 메메드 2세가 4개월만에 구축한, 이스탄불 교외에 자리한 요새. 당시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기 위해 만든 요새로 루멜리아(Rumelia)의 요새라는 뜻. 여기에서 루멜리아란 '로마인들의 땅' 이라는 뜻으로, 오스만 제국 시절에 발칸 반도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 ↑ 처녀의 탑이라는 뜻.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 해협 남단에 있는 등대이다. 1110년 비잔틴 시절에 지어졌다.
- ↑ 아타튀르크와 이뇌뉘가 잠들어있는 묘소. 아타튀르크 사후 15년이 지나서야 완공되었고, 터키 공화국 건국사 박물관(+ 아타튀르크 전시장)을 겸하고 있다. 원래는 프리키아 족의 고분(공동묘지)이 있던 자리였는데, 이 건물이 세워지면서 철저히 갈아 엎어버렸다. 몰론 유물과 유골은 들어내 인근 박물관에 모셔다 놓았지만.
- ↑ 이스탄불에서도 가장 절경인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 금각만(유럽쪽 이스탄불을 남북으로 나누는 만)의 세 지점이 만나는 곳에 있으며, 1453년에 지어진 이래 1853년에 돌마바체 궁이 세워질 때까지 오스만 제국의 황궁으로 쓰였다. 역대 황제들마다 각자의 필요성에 따라 계속해서 증축하고 새로 짓고 한 덕분에 다른 이슬람권 궁전에 비해 구조가 통일성이 없다고 한다.
구경에도 공부가 필요합니다.기본 요금으로는 비룬과 엔데룬까지 관람할 수 있고, 더 안쪽에 있는 하렘은 별도 요금을 내야 볼 수 있다. 하지만 별도 요금을 내면서까지 볼 것은 그닥 없었다는 것이 하렘을 다녀온 사람들의 중론.상상했던 그게 아니였던 게지 - ↑ 이란과 마주하는 접경지대에 있는 성층화산. 높이 5137m이며, 구역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있었던 산이라 전해진다.
- ↑ 언덕위에 있어 접근하기 어려운데다, 모 블로거의 말에 의하면 학생증을 검사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 ↑ 작사가. 터키 국가를 만들었다.
- ↑ 1판(콘야의 메블라나 묘소), 2~3판(메블라나 루미와 그의 묘소), 4판(아프신-엘비스탄의 지력발전소). 앞면도 1판과 2~4판의 초상화가 다르다. 즉, 2판은 앞면도안 변경, 3판과 4판은 뒷면도안 변경인 셈.
- ↑ 카이세리(카파도키아의 동쪽에 있는 중간규모 도시.) 출신의 기독교도. 데브시르메 제도에 따라 예니체리로 징집되었으나, 황제 쉴레이만 1세의 눈에 들어 건축가로 전직하였다. 참고로 미마르(mimar)는 성이 아니라, 터키어로 건축가라는 뜻.
- ↑ 이스탄불 서북쪽의 도시로, 1370년대 내지 1380년대에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이래 1453년까지 아나톨리아 반도 쪽의 부르사와 함께 오스만 제국의 공동 수도였다.
- ↑ 붉은 탑이라는 뜻. 요새로 이용되었다.
- ↑ 위령비 같은 곳이다.
- ↑ 오스만 제국의 해군 제독이자 항해사인 피리 레이스가 그린 고지도. 유럽과 아프리카 서부 및 남미 동부(브라질)까지 그려져 있지만, 이 지방들을 식민지배하려는 의도였다기보다 '그냥 자료가 있으니까 그려 넣었다' 에 가깝다.
- ↑ 터키 서남부 해안의 셀축(이즈미르 남쪽) 남쪽에 있다. 터키에 남아있는 그리스 유적지 중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지역.
- ↑ 터키 아시아쪽 동부 끝자락의 도우베야즈트에 위치한 오스만 제국 시절의 성. 17세기 중엽에 지어지기 시작했지만 무슨 사정에서인지 18세기 후반에야 완공되었으며, 이샤크 파샤는 완공한 사람의 이름이다.
- ↑ 역사과학자.
- ↑ 50리라와 헷갈린다는 이유로
- ↑ 터키의 수학자로 그가 세운 아르프 불변식이 뒷면에 함께 있다.
- ↑ 1/2, 1/4단위를 사용하는 이슬람 문화권과 닮아있는 부분 중 하나이다. 가령 터키어를 어설프게 배운 여행객들이 가장 혼동하는 단위가 çeyrek과 yarım, 그리고 buçuk인데, '체이렉'은 1/4 (페르시아어 'châhâr-e yek' 처허레 옉'에서 온 단어다), '야름'과 '부축'은 1/2를 뜻한다. 다만 야름은 '반 리라', '반 킬로' 같이 다른 숫자가 붙지 않을때만 사용하며, '부축'은 10.50리라 - 10리라 반 같이 앞에 다른 숫자가 있을때 쓴다. 가령 터키어로 3,25TL 10,50TL, 500.000TL은 각각 Üç çeyrek, On buçuk, Yarım milyon lira가 된다.
- ↑ 7차, 8차에서는 옆을 보다가 앞을 보다가 다시 옆을 본다.
- ↑ 역사적인 이유로 그리스와 터키는 매우 험악하다. 그리스 뿐 아니라 발칸반도의 대부분 유럽국가 및 키프로스, 아르메니아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 유로화 도입은 커녕, 유럽연합 가입후보국에 머물러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