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프랑스의 핵개발

(프랑스의 핵개발에서 넘어옴)

영국과 프랑스, 특히 프랑스의 핵무기 개발 역사.

1 영국의 핵개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이 개발한 핵무기의 위력을 본 영국프랑스는 미국이 당연히 유럽 승전국인 자신들에게 핵개발 기술을 전해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핵폭탄의 정치적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은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이 기술을 제공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미국은 프랑스나 영국 같은 '2류 강대국' 따위와 권력을 나눠가질 생각이 없었다라는 심플한 논조였다.

특히 영국은 더욱 더 큰 배신감을 느꼈는데, 영국은 2차 세계대전 때 핵무기 제조 프로젝트인 튜브 앨로이 프로젝트(twin tube alloy project)를 미국에 넘겼기 때문이었다. 이 튜브 앨로이 프로젝트가 좀 더 크게 발전된 것이 맨해튼 프로젝트였다. 또한 1944년, 미국은 영국과 하이드 파크 협정이라는 비밀협약을 맺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은 영국에게 핵무기 관련 기술 지원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전쟁이 끝나자 1946년 미국은 맥마흔 법안[1]을 통과시켜 핵물질 및 핵기술의 국외 이전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면서 영국에게 엿을 먹였다.

이렇게 되자, 영국은 그 해 마침내 독자 핵개발을 시작하기로 결의한다.

1946년, 영국 정부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존 콕크로프트가 요청하여 설립한 원자력 연구 기관(Atomic Energy Research Establishment, AERE)에서 핵무기 연구를 하기 시작했으며,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을 뒷구멍으로 포섭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소련의 스파이인 클라우스 푹스도 참가해서 결과적으로 영국의 핵개발 상황을 소련에 유출하게 되지만, 푹스가 영국에 유출해줬던 팻맨과 폭축렌즈 설계도, 핵실험 데이터, 우라늄 생산법은 영국의 핵무장에 상당한 도움이 됐었다. 1947년 군사용 원자로에서 뽑은 핵연료를 재처리하기 위해 셀라필드 원자력 단지를 건설하였다. 그후 1946년부터 윌리엄 페니경[2]의 감독하에 AWE를 운영하게 된다. 1948년 영국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시인하고, 1952년 호주 몬테벨로 섬에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1957년에 수소폭탄의 실험에 성공하면서 영국은 성공적으로 핵클럽에 가입, 소련보다는 늦긴 했지만 영국도 세번째 핵 보유국이 되면서 미국과 동등한 입장에서 외교를 할 위치에 오르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자국 영토가 아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실컷 핵실험을 하였다[3]. 대표적인 핵실험 장소로는 마랄링가, 에뮤 필드, 몰든 섬, 크리스마스 섬[4], 몬테벨로 섬 등이 있다. 호주 땅에서 펑펑 터트려대다가 1958년 영국과 미국이 상호 핵무기 개발 조약을 맺고 미국 땅에서 핵실험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 후 이 관계는 매우 돈독해져, 1960년대 미국의 폴라리스 미사일을 구입하게 되고, 현재는 폴라리스의 개량판인 트라이던트 미사일을 굴리고 있다.

영국의 핵개발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고할 것.

2 프랑스의 핵개발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과학자들도 맨해튼 계획에 참가했으나, 영국과 미국 과학자들과는 달리 프랑스 과학자들은 2류도 아닌3류 취급을 받으며 중수로 건설과 플루토늄 분리 작업에만 부분적으로 참가하는데에 그쳤다.

전후 프랑스 대통령에 선출된 샤를 드 골은 전쟁이 끝난지 몇달도 안 되었던 1945년 10월, 핵폭탄의 개발을 비밀리에 명하고, 프랑스 원자력위원회(CEA)를 설립하였다. 드 골은 곧 물러났지만, 프로젝트는 잘 진행되었다.

프랑스의 핵개발 의지를 알고 있었던 미국·영국·캐나다는 우라늄공급통제조약을 맺어 프랑스를 방해하려 했지만, 다행히(?) 프랑스 국내에서 대규모의 우라늄 광산이 발견되는 행운으로 문제는 해결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독자핵개발 의지를 더욱 굳혀준 사건이 1956년에 있었는데, 제2차 중동전쟁이 그것이었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작전은 이스라엘의 주도 아래 잘 진행되었으나, 소련이 개입해 '이집트에서 얌전히 철수하기 vs 핵로켓 쳐맞고 개털리기'라는 조건을 들이댔고 미국까지 소련에 동조하자 결국 프랑스와 영국은 굴욕적인 철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공갈을 잘 치는 흐루쇼프허세도 철수 요인 중 하나였지만 소련의 위협보다는 아이젠하워가 빡쳐서 영프를 갈궈댄게 더 컸다.[5][6]

그나마 영국은 그 당시 원폭과 수폭의 개발이 거의 끝나가 양산체제에 돌입한 상태였지만, 프랑스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점점 뒤쳐지고 있다! 뭔가를 해야한다!는 정신이 프랑스에 팽배했고, 결국 일을 내고 만다.

결국 프랑스는 원수 독일(!!)에게 핵무기 공동 개발을 제의하기에 이르고, 비자금 20억 마르크까지 마련해놓은 상태에서 서독이 프랑스에게 비밀리에[7] 핵 기술과 돈을 지원한다면 핵개발후 프랑스의 핵 전력에 대한 서독의 지분을 인정한다는 무시무시한 내용까지 포함한 계약이 성사되려는 찰나, 알제리 전쟁을 계기로 집권한 드 골 장군이 그 계획을 취소시킴으로서 프랑스의 단독프로젝트로 남게 된다.

계약이 취소되자 당시 서독의 국방장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힘은 군사력이며, 군사력은 오늘날 곧 핵력이다. 핵무장 없는 서독은 다른 동맹국의 군대를 위한 취사병이나 보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독의 운명은 그것으로 결판날 것이다." 그의 말 그대로, 이후 서독에는 미국의 준중거리 탄도 미사일이 대량배치되면서 완벽하게 NATO에 종속되었다.[8]

한편 NATO를 미국-프랑스-영국의 3강 체제로 만들자는 드 골의 제안마저 프랑스가 핵이 없다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자, 드 골은 그 어떤 수와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독자적인 핵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드 골은 공공연하게 프랑스의 핵개발을 주장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명백한 점은 우리 프랑스는 전적으로 프랑스의 국익을 위해 어디에서나 즉각 동원될 수 있는 군사력, 즉 독자적 핵타격력이 필요하고, 이것을 수년 내에 반드시 달성하여야 한다. 군사력의 기본이 핵무장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그것을 제조하든 혹은 돈으로 구입하든 간에 그것은 우리 수중에 있어야 한다. …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독자적 핵전력을 갖추지 못하면) 더 이상 유럽의 강대국도 주권국일 수도 없고 통합된 위성국에 지나지 않게 된다." by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

프랑스가 공개적으로 대놓고 핵개발을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하자, UN, 미국, 소련 등이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프랑스의 핵개발 포기를 종용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지만, 핵개발을 꼭 하고야 말겠다는 나라를 막을 수 없다는 국제정치판의 법칙은 이번에도 맞아 떨어졌다.[9]

결국 프랑스는 1960년 2월 알제리(당시 프랑스 영토)에서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했다. 작전 암호명은 푸른 날쥐Gerboise Bleue.

핵실험 직후 드 골이 말하길 위대한 프랑스 만세!!!!(Vive La France!!!!) 오늘 아침 이후로 프랑스는 더욱 강력하고 자랑스런 국가가 되었다!알제리 전쟁중에 대놓고 핵실험을 하는 위엄. 알제리에 방사능 뿌린게 자랑? 애꿎은 알제리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핵실험.

그러나 프랑스의 국력에 비추어 보아 소련이나 미국에 맞먹는 핵전력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비례억지전략이라는 핵전략을 채택했다. 자세한 것은 관련 항목을 참조. 간략하게 말하면 일단 어떤 국가가 프랑스와의 핵전쟁을 시작한다면 (다시 말해 프랑스가 핵공격을 받는다면) 프랑스 국민들의 몰살은 기정사실이지만, 그렇게 되면 프랑스는 상대국가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핵을 쏟아부어 최대한 많은 적국의 인간을 지옥으로 끌고 가겠다는 동귀어진 무서운 전략이다.

이는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 최종전쟁의 방아쇠를 당길 가능성이 높기에 미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전략이었으나, 이 전략을 세운 당사자인 프랑스나 제3차 세계대전 발발시 주 전장이 될 서독으로서는, 핵무기가 일단 사용되기 시작하면 인류문명이 멸망할 전면적 핵전쟁으로 갈 수 밖에 없음을 미국-소련 양 초강대국에 강요함으로서 이들이 유럽전선을 무대로 핵무기를 쓰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워싱턴모스크바에서 안전하게 전쟁놀이하면서 유럽전선에서만 핵무기를 주고받으시겠다? 웃기고 자빠졌네. 우리가 죽으면 니들도 죽는거야."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제안한 유연반응전략을 채택하면서 프랑스의 핵전략을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10]

유연반응전략이 무엇인가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유럽전선에서 소련이 전술핵을 한 발 사용하면 미국도 한 발 사용한다. 소련이 두 발 사용하면 미국도 두 발 사용한다. 소련 서기장도 미국 대통령도 사람이기에 죽고 싶지 않으므로, 이러한 핵전략은 결과적으로 미국과 소련을 직접적으로 겨누고 있는 장거리 전략핵의 사용가능성을 줄여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 허나 동시에, 이는 미국-소련 수뇌부가 전술핵사용을 결단하는데 따르는 부담감을 크게 낮춰주는 부작용이 있다. "핵을 사용하면 미국과 소련도 끝장이야. 그러니 유럽전선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핵은 최대한 자제해야지"가 아니라 "핵무기 사용을 '안전한' 유럽전선에 국한시킬 수 있다면, 전술핵 몇 발 쯤은 사용해도 괜찮지 않겠나?"로 상황이 바뀐다는 것. 다시 말해 유럽은 리얼 북두의 권을 찍게 된다는 소리다.

당연하게도 이는 유럽국가인 프랑스 입장에서는 용납불가였다. 결국 드골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고[11] 모스크바를 방문했으며, 미군 장성이 지휘권을 행사하는 NATO통합군에서 탈퇴하고[12] 주둔 미군까지 쫓아내면서 사실상의 독자노선을 취하게 된다.

이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유럽에서 걷어내고, 위대한 프랑스의 휘광 아래에 전유럽을 보듬으려는 드 골의 야심과도 일맥상통했다.

열혈 프랑스 민족주의자 드 골 쨩은 또 다시 말하길(…)

"NATO는 프랑스의 독립과 국익에 배치된다. 우리가 NATO 회원국이 된 것은 소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으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소련이 공격해 올 것으로 믿지 않는다. … NATO는 이제 더 이상 동맹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종속체제이다. 프랑스가 독립성을 회복한 이후에 가서는 프랑스가 서방국가들의 어떤 동맹에 참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책임져주는 미국과 같은 상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 이 인간 대인배 맞는 듯

결국 이 팽팽한 갈등은 민주당 정권과 드 골 정권이 모두 끝난 1969년에 끝난다. 정권을 잡은 공화당(미국) 닉슨 정권은 프랑스의 그 고집에 질려서(…) 결국 프랑스에게 기술지원을 해주기에 이른다. 어차피 프랑스가 독자적인 핵무장에 성공한 이상, 차라리 도와주고 관계개선을 시도하려고 한 것. 대신 나토 들어와

당시 프랑스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서로 다른 목표를 맞출 수 있는 여러 개의 핵탄두를 탑재하는데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미국이 이를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맥마흔 법에 의해 기술의 해외이전은 금지되어 있었고, 결국 미국은 Negative Guidance라는 편법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프랑스 기술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문제를 풀기 위한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그러면 미국 기술자는 그게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만 짚어주는 것이다. 스무고개 수수께끼 그렇게 하여 미국측 기술자가 범법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은 네바다 핵실험장에 프랑스가 자신들의 측정장치를 가져다 놓는 것을 허락함으로서, 핵실험 회수를 줄여 개발비를 절약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며(…) 아예 핵탄두를 들고 와서 직접 핵실험을 하라고까지 제안했으나, 무슨 생각인지 이건 또 거절했다. 대신 미국은 과학자들을 파견해 프랑스의 무루루아 섬 핵실험장의 건설을 지원했다.

이렇게 미국은 프랑스에 여러가지 지원을 했지만, 끝까지 전략핵잠수함에 대한 기술은 지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해군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전략핵잠은 해군의 보물이니까요.(…) 결국 프랑스는 이 분야에서도 외부 지원 없이 자체개발에 성공한다.(!)

당시 프랑스의 한 관계자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 핵무기 관계자들은 모두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미국이 프랑스의 앞길을 막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의 기술지원을 받아 핵무기를 발전시켰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게 좀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영국-캐나다 3국의 우라늄공급통제협정으로 핵개발을 저지당할 뻔 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프랑스는 미국에게 지원을 받은 이후로도 1970년대 독자적인 핵개발을 추진하던 한국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을 판매하려 시도하는 등 미국의 핵비확산 정책에 대해 불쾌한 입장을 표명하곤 했다.(…)

그외에 이스라엘의 핵개발도 프랑스의 핵기술과 관련이 있다는 국내외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미국이 프랑스를 지원하는 대신, 프랑스는 미국이 유럽땅에 자신들의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을 지지했고, NATO군에서는 탈퇴했으나 유사시 프랑스군이 NATO 산하에 들어가는 것을 비밀리에 허락했다.

결론적으로, 프랑스의 100% 순수 프랑스 기술로 만들어진 force de frappe(핵타격군)은 강하고 위대한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다. MIRV개발과 몇몇 부분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기는 했으나, 엄연히 자체기술로 핵실험에 성공했고 지상/수중배치 핵탄두와 그 발사체까지 갖추는 데 성공한 것이다. 우리가 만든 핵 우리가 쓰자

반면 영국은 SLBM체계 개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이후 결국 미국의 폴라리스, 트라이던트 미사일을 구입해서 운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미국은 프랑스에게 굴복을 강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참고로, 이 때 프랑스의 핵개발예산은 한 때 국방예산의 25%에 이르렀을 정도이며 여당이건 야당이건 좌우를 가리지 않고 한 목소리로 조국의 핵무장을 외쳤다.[13]

미국의 지원으로 프랑스의 태도 또한 달라졌다. 프랑스는 미국을 위해 자국의 핵전략도 고쳐주었으며, 그외에도 미군의 유럽배치를 허락하는 등 많은걸 양보했다.

냉전은 끝났고, 비밀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자, 프랑스는 정식으로 NATO에 복귀했고 이 비밀을 마침내 발견한 언론들에게 짧은 성명으로 그 사실을 인정했으나, 이는 곧 묻혔다.(…)

더 자세한 사항을 알고 싶다면 - 여기를 참조.

하지만 미국 내의 불쾌한 여론이 반영되었는지 미국판 고질라는 90년대 프랑스의 핵 실험 때문에 도마뱀이 변이되어 생기는 것으로 나온다. 일본 원작 고지라의 출처가 암묵적으로 미국이었음을 생각한다면 (남쪽에서 왔다는 설정) 조금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 여하간 반핵마인드는 같다

3 같이 보기

  1. 비밀리에 진행된 맨해튼 프로젝트가 있는 줄도 몰랐던 미국 의회가 원자폭탄이 존재함을 알게 되자, "아니, 이렇게 좋은 무기를 왜 다른 놈들하고 나눠가져? 이건 오로지 미국만 가져야 함!"이라고 외치며 만든 법이다. 즉, 외교 관계 따위는 싹 말아먹고 의원님네들의 근시안만으로 만들어진 법. 하지만 당시의 반공 분위기도 한몫했다. 사실 소련에게 넘어가는 걸 더 우려한 법안이라. 그래도 만들었지만
  2. William Penney. 영국 물리학자로, 영국의 핵무장에 매우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인해 귀족 작위를 수여받았다.
  3. 물론, 알더마스턴의 핵무기 연구소 과학자들이 본토 안에서 자리를 찾아보니, 요크셔 스킵시(Skipsea)가 최적이어서 2차 원폭 실험을 하려 했지만, 근처 방갈로 등에 피해간다고 결국 계획이 취소된다. 아깝다?
  4. 다큐멘터리를 보면 나오는 홍게들이 마구 몰려다니는 그 섬이다. 나중에 미국도 여기서 핵실험을 해준다.
  5. 그런데 이때 흐루쇼프가 생각한 것이 "아, '니 수도 핵 로켓으로 날라감 뿌우'를 하면 다 쫄아서 나한테 기는구나."여서 이후로도 몇번 공갈을 더 치게 된다. 쿠바 미사일 위기라든가... 아이젠하워는 나름 전쟁을 피할려고 했던 거고, 사실 수에즈에서 영프가 이스라엘과 깽판친게 그렇게 잘한 짓은 아니었지만, 아이젠하워의 이미지는 무능한 겁쟁이 식으로 굳어지면서 졸지에 민주당이 호전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존 F. 케네디의 강경정책도 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6.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제 2차 중동전쟁 당시 수에즈에서 보여준 영프 양국의 행태는 '그렇게 잘한 짓은 아니다' 라고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파렴치하고 뻔뻔했다는 점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이집트의 주요한 이권 중 하나인 수에즈 운하 운영권을 꿀꺽한 뒤, 한 세기 가까이 실컷 꿀을 빨다가 탈 제국주의가 대세가 된 시대의 흐름에 패권과 이권을 상실할 처지가 되자 명분이고 도의고 그냥 이건 내가 가져야겠다는 식으로 이스라엘과 손잡고 이집트에 쳐들어가서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려 한 것이 바로 수에즈 전쟁 이다. 한국인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편하게 설명하자면, 광복 이후 한국에서의 이권을 빼앗긴 것에 이를 갈던 일본이 한국전쟁의 와중에 군대를 보내 일제시대에 일본이 가졌던 각종 이권이나 시설들을 다시 차지하려고 시도한 격이다. 게다가, 더 우습게도, 이런 파렴치한 짓을 시도했지만 소련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결국 도덕적인 차원에서 따져보자면 동네 양아치가 코흘리개 꼬마를 삥뜯으려고 하다가 어른에게 걸려서 데꿀데꿀 멍멍하고 튀지 않으면 존나 두들겨 맞을 상황이 된 셈이다.(...) 이 과정에서 소련에게 호의적인 평가자라면 소련이 양식있는 동네 어른이나 경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것이고, 비판적인 평가자라면 양아치가 삥뜯다가 진짜 조폭에게 걸린 셈이라고 평가하겠지만, 소련을 어찌 보건 당시 영프의 소행이 동네 양아치 수준이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리고 이 점을 감안하면 당시 아이젠하워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도 말하기도 도저히 어려운 것이, 1) '영국과 프랑스의 파렴치한 행태에 동참해서 도덕적으로 체면을 완전히 구기면서, 변변히 얻는 것도 없이 자국민과 더 나아가 온 인류를 전쟁의 위협에 내모는 것' 2) '영국과 프랑스가 친 사고는 그냥 영국과 프랑스가 해결하라고 손 털고 나가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는 쪽이 더 바람직할지는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흐루쇼프가 이 사건 이후 '나한테 개기면 니 수도에 핵로켓 날아감 뿌우우~ 하면 다 쫄아서 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갈을 쳤다는 서술도 다소 애매한 것이... 쿠바 미사일 위기를 비롯한 미국과의 핵대결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핵전력이 우세인 상황에서 니가 나 치면 나도 너 치고 한방한방 치다가 같이 죽는거라는 식이었지, 핵 맞기 싫으면 내 말 들으라는 윽박지름과는 조금 궤가 다르다.
  7. 2차대전이 종결된 지 기껏해야 십수년이 지난 상황임을 기억하자. 실제로 서독의 재무장은 바로 1년 전인 1955년에야 허락되었고, 징병 재개는 1956년에야 이루어졌다. 그러니 그보다 더한 핵무장계획이 비밀인 것은 당연한 일.
  8. 이에 대한 반발로 1970년대 서독에서 반핵 운동이 엄청난 규모로 일어난다. 연일 수십만명이 미군의 핵기지를 포위하고 시위를 할 정도였다. 녹색당이 의회에 진출해서 주요 정치세력이 된것과 핵발전소 대신 대체에너지 개발에 주력해서 독일이 풍력 발전태양광 에너지 분야에서 기술강국이 된것도 모두 이때의 여파이다.
  9. 북한의 핵개발은 물론이고, 이란,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 비공인 핵보유국들의 사례만 봐도 한 국가의 수뇌부가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핵개발을 하겠다'라고 마음만 먹는다면 이를 외부에서 완전히 저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군사적으로 해당 국가를 박살내고 점령해버릴 때 비로소 완전히 핵개발을 저지할수 있는데, 이것은 현재의 국제정세상, 그리고 비용문제상 꺼려지는 최후의 수단이다. 때문에 기본적으로 경제적·외교적 수단을 통해 그 국가를 피폐하게 만드는 식으로 방해를 하게 되는데, 이 정도로는 핵개발을 못 막는다. 핵개발 자체는 40년대 기술로도 이룬 만큼 중소국이 못 할 만큼 어려운 프로젝트가 전혀 아니다. 물론 한국도 가능하다. 당연하다, 세계 최빈국인 북한도 하는데... 다만 아직까진 핵개발을 할 정도로 절박하지 않고, 무엇보다 핵개발을 하느라 치르는 대가가 너무 막대하기 때문에 안 하는 것 뿐이다. 당장 핵개발에 드는 막대한 비용은 물론이요 외교적으로 독박쓰기 시작하면 대한민국처럼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는 답이 없다. 결국 핵개발을 하려면 막대한 경제적 후퇴를 감수하고 해야 하는 것이다.
  10. 그러나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맥나라마도 "유연한 대응 그딴 거 없고 그냥 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11. 참고도 당시는 대만이 중국의 유일합법정부로 UN의 상임이사국이던 시절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UN가입도 못하고 있었다.
  12. NATO에서 탈퇴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미군이 주도하는 NATO군의 지휘체계에서 이탈한 것이다.
  13. 물론 드골주의 성향이 드골 사임 후에도 강했다는 점이 한몫 하긴했다. 그 대가로 프랑스군의 재래식 전력은 정체 일변도의 길을 걸었다. 리비아 내전에선 니콜라 사르코지가 폭격 좀 놨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