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주

安市城主

(? ~ ?)

1 개요

고구려영류왕, 보장왕 대의 장수. 생몰년 미상.
우주방어의 창시자 테란

645년 고구려-당 전쟁 당시의 1차 전쟁 때 당태종이 이끌고 온 대군을 안시성(安市城)에서 격파한 명장이다. 혹여나 말해두지만 안시성주는 이름이 아니라, '안시성의 성주'라는 뜻으로 쓴 일반명사다. 이 인물의 이름은 알 수 없다.

흔히 그 이름이 양만춘(楊萬春 혹은 梁萬春)이라고는 하지만 정사에는 이러한 기록이 전혀 없으며,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도 이러한 영웅의 이름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 하였다. 양만춘이란 이름은 삼국사기보다도 훨씬 후대에 지어진 조선시대의 야사에 등장하는 이름으로 송준길동춘당선생별집박지원열하일기에서 나오는 기록일 뿐이라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 이름을 따서 대한민국 해군 구축함 KDX-1의 3번함 이름이 지어지기는 했다. 참고로, 저 양만춘으로도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

그 활약상은 대단해서 삼국사기나 그 외에 구당서를 비롯한 중국사서에도 상당히 상세하게 실려있을 정도였지만 안시성 전투 이외의 기록은 상당히 부족하다. 즉, 당태종과 싸웠다는 기록을 제외하면 안시성주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2 일생

2.1 초기 일생

안시성주의 일생에 대한 기록은 대단히 부족해서 그 정확한 출생시기와 출생지를 알 수가 없다.안습 안시성주가 처음으로 역사기록에 이름을 드러냈을 때는 바로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던 때였다.

642년, 당시 고구려의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100명이나 되는 대신들을 학살하고 궁궐로 쳐들어가서 영류왕을 시해하였던 사건이 터졌다. 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은 정권을 장악한 후에 영류왕의 조카였던 보장왕을 왕으로 옹립하고 스스로 막리지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안시성주는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고 다만 성을 굳게 지켰다.

이에 화가 난 연개소문은 군사를 보내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성을 안시성주에게 그냥 내주어 버렸다(...). 이때 안시성주가 연개소문에게 끝까지 반발했는지, 혹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타협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후로 안시성주가 당군의 침입을 계속 막으려 노력한 것을 보면 적당한 선에서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1]

안시성주가 국정을 장악한 연개소문에게 대항한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어쩌면 영류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에 대한 반발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백여명이 넘는 대신들을 숙청한 후에 그 빈자리를 자신의 측근이었던 도수류금류 등의 인물로 대신하는 등 대대적인 인사 물갈이를 시행하였는데, 안시성주가 이러한 흐름에 반발하여 연개소문과 대립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안시성주가 연개소문에 대항했다는 기록은 오직 당 태종의 발언으로만 등장하기에 신빙성이 상당히 떨어진다는 의견도 있다. 중국의 기록에는 연개소문의 악행이 될만한건 과장을 해서라도 몽땅 집어넣는 판국인데 연개소문의 악행을 부각시킬만한 건수인 연개소문과 안시성주의 대립과정에 대해서는 정작 아무런 언급이 없이 그저 당 태종이 안시성주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지나가듯 한마디한 발언이 전부인 만큼 이걸 근거로 안시성주가 연개소문과 대립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는 것,

그러나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 중앙군은 당태종의 예측 가운데 하나였던 안시성주와 연계하여 당군을 상대한다는 계책을 실제로 실행하지도 않았으며 당태종 역시 고구려군이 이 계책을 실행할 거라 여기지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해선 당태종의 발언 이상의 무언가를 얻기에는 힘들것 같다.

2.2 안시성 전투

2.2.1 싸움의 서막

645년 3월, 당 태종은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살해하고 포악무도한 짓을 한 연개소문을 징벌한다는 명분으로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전쟁 초기에 당 태종이 이끌던 당나라 군대는 요동성, 개모성, 백암성 등을 비롯한 요동 지방의 성들을 차례로 격파하며 승승장구하던 중에 마침내 안시성에 이르었다.

당태종은 승세를 몰아 안시성 앞에서 벌어진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의 15만 대군을 지휘하던 북부욕살 고연수마저 격파하여 승리를 눈 앞에 두게 되었다. 고구려로서는 온 나라에서 긁어 모아 한판 뒤집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으니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나 다름이 없었다.

당태종은 안시성 자체로서도 상당히 험준한 요새인데다가 안시성주가 싸움에 능하고 병사들이 하나같이 정예병이기 때문에 함부로 치는 것 보다도[2] 우선 남쪽의 건안성을 칠 것을 주위 신하들에게 물었다, 건안성은 병력이 약한데다가 식량도 적으니까 불의에 나가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것. 당태종도 처음에는 안시성을 공략할 의지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이에 장군 이적(이세적)이 나서며 북쪽의 안시성을 그냥 지나치면 나중에 요동성에서 출발하는 당군의 보급선을 유지하기가 힘들 것이라며 보급로를 끊어버리면 아군은 고립무원이니 마땅히 안시성을 먼저 함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들은 당태종은 마지못해 이적으로 하여금 안시성을 공격하도록 명하였다.[3]

2.2.2 우주방어

당나라 군대는 고연수 등 항복한 사람들을 옹위하여 성 밑에서 안시성 내의 사람들을 불러 내었는데[4], 안시성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북과 장구를 치면서 소리를 지르는 등 되려 도발하였다.[5] 이에 당태종은 크게 노했고, 이세적도 몹시 약이 올라 성이 함락되면 모든 남자를 죽여버리겠다고 공언하였으나,[6] 되려 이건 안시성 주민들의 결사항전만 독려하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 이적이 직접 성에 공격을 퍼부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성을 빼앗지 못하였다. 즉 서로 빡쳐서 전투력만 올렸다는 이야기

계속된 공격에도 안시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군의 피해만 점점 늘어났을 뿐이었다. 당태종을 따라 출전한 신하들은 "그냥 여기서 시간 낭비말고 먼저 남쪽의 오골성을 친 다음에 바로 평양으로 직공가죠."라고 청했다. 특히 안시성을 구원하러 왔다가 주필산에서 패전한 고구려 항장, 즉, 고연수와 고혜진이 가장 적극적이었다.[7] 그 논리는 오골성(烏骨城)을 지키는 인물은 늙었으니 쉽게 공략할 수 있을 테고, 오골성을 무너뜨리면 바로 평양을 타격할 수 있다는 것 이었다. 또한 장량의 병력이 있는 비사성에서 오골성까지 이틀이면 당도하므로, 힘을 합치면 오골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태종의 오른팔과 같았던 장손무기가 나서서 동작그만 밑장빼기냐 "천자께서 직접 하시는 정벌인데 함부로 움직여선 안된다. 지금 안시성 포기하고 오골성으로 돌리면 분명 적군이 우리 뒤를 칠 것이다[8]. 안시성과 건안성을 먼저 함락시켜야한다 "라며 반발하자 안시성 공략을 계속 하기로 결정이 났다.[9]

한편 당태종은 안시성에서 밥짓는 연기가 줄고 돼지를 잡는 소리가 나자 안시성주가 병사들을 잘 먹여서 야습을 하려 하는 것이라 여기고 대비하였다가 밤에 밧줄을 타고 내려온 고구려 병사 수십명을 무찌르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공성전에서는 실패의 연속. 안시성은 어떠한 흔들림의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안시성에서 당군의 피해가 필요 이상으로 커지자 당 태종은 마침내 단순한 공성전을 포기하고 장기전으로 전략을 변경한다.

2.2.3 토산을 빼앗다

안시성에서 당군의 피해가 커지자 당태종을 따라 출전한 강화왕 이도종은 험준한 안시성 공략을 수월히 하기 위하여 흙으로 토산을 쌓았다. 그러자 안시성주는 근성을 발휘하여 똑같이 성을 높게 쌓아 막았다. 또한, 당나라 군사들이 토산 위로 올라가 충거와 포석으로 성벽과 망루를 무너뜨리려 하였지만 그때마다 안시성주가 나무로 만든 목책으로 무너진 틈을 막아버리고 반격을 가해서 이런 시도도 번번히 실패하였다.

아무리 공격해도 안시성이 무너지지 않자 당태종은 토산을 높이 쌓는 것이야말로 안시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다. 때문에 당태종은 토산을 쌓던 이도종이 사고를 당해 발을 다치자 손수 침을 놓아 주며 보살펴주었고, 60일 동안에 인원을 50만명이나 동원하여[10] 토산의 높이를 올릴 정도로 토산을 쌓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토산은 안시성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높아졌다.

당태종은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로 하여금 군사 수백명을 이끌고 산꼭대기로 올라가 적의 공격을 대비하도록 하였는데 별안간 산이 무너져 버렸다![11] 게다가 공교롭게도 토산이 무너지면서 안시성 성벽을 덮쳐 성벽 일부가 무너져 토산과 안시성 사이에 연결 통로가 생겼다. 이 상황은 당군이 안시성 내로 진입하기에도 유리한 상황인 동시에 안시성 방어군이 반격에 나서 토산을 무력화하기에도 유리한 양날의 칼과 같은 상황으로서 누가 먼저 기회를 잡느냐 하는 타이밍 싸움이었는데... 당군에게는 불행히도 하필이면 바로 그 순간에 부복애가 사사로운 일 때문에 토산을 떠나 있었다. 적절한 타이밍에 고구려군은 성 밖으로 나가 토산을 점령하고 붕괴된 성벽 일부는 당나라군의 접근을 막기위해 재빨리 통나무로 매우고 불을 질렀다. 안시성주는 점령한 토산을 깎아서 요새화시켜버리고 방어선을 설치하여, 당군이 애써 조성한 토산은 한 순간에 안시성의 방어전을 더 유리하게 만들어주는 보루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

유일한 희망이었던 토산이 고구려군의 손에 넘어가자 당태종은 참고 참았던 분노가 한순간에 폭발해 버렸다. 당태종은 토산을 비운 부복애를 잡아서 토산을 빼앗긴 책임을 물어 참수해버렸다. 그리고는 군사들을 보내 빼앗긴 토산을 되찾도록 하였으나 3일 동안의 맹공격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군의 거센 방어에 밀려 끝내 탈환에 실패하고 말았다.

토산을 빼앗기자 토산의 책임자였던 이도종은 맨발로 무릎을 꿇고 황제 앞에 나아가서 죽기를 청하였으나, 당태종은 "너의 죄는 죽을 죄이지만 개모성과 요동성을 격파한 공이 있으니 용서한다."라며 대인배 인증을 하였다. 하지만 일전에 다리에 부상을 입었을 당시, 그를 직접 치료까지 해주던 당태종이었던걸 생각하면 꽤나 차가운 태도였다.

2.2.4 승리

당나라 군대가 안시성에서 발목이 묶여 내지로 진격하지 못하는 사이에 결국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다. 차츰 강한 추위가 찾아왔으며, 과 풀이 얼어서 식수와 먹이를 구하기도 힘들게 되었을 뿐더러 설상가상으로 양식마저 떨어져 가고 있었다. 게다가 몽골 고원의 강자인 투르크 계민족인 철륵(鐵勒)의 설연타가 당나라의 뒷통수를 때려버렸다(자세한 내용은 삼국통일전쟁 참조).

버티다 못한 태종은 결국 퇴각 명령을 내렸는데 안시성에서 전투가 일어난 지 무려 3개월 만이었으며, 그 때가 645년 9월이었다. 이리하여 안시성주는 마침내 중원을 통일한 희대의 영웅이었던 당 태종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는 영광을 얻었으며 바람 앞의 등불 마냥 위태로웠던 고구려를 살려낼 수 있었다.

당나라 군대가 퇴각하던 날에 안시성의 군사들은 모두 성 안으로 들어가서 자취를 감추었으나 안시성주는 직접 성에 올라 떠나가는 태종에게 절을 올리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고 한다. 간지폭발 이를 지켜본 태종은 안시성주가 끝까지 성을 지켜낸 것을 가상하게 여겨 비단 1백 필을 성 앞에 남기고 갔으며 앞으로도 임금을 충실히 섬기도록 격려하였다.[12] 대륙의 츤데레?

사서에는 이때 당군이 순수하게 전투로만 입은 손실이 전사자만 수천에 말의 7~8할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은 병사들까지 합하면 당군의 피해는 상당하였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후 태종이 요택을 건너며 고구려 정벌을 후회한 것이나 당군의 처참한 상황 묘사 등을 보면 당군의 전력 손실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안시성에서의 전투는 그토록 치열했던 것이다.

2.3 전후의 삶

당태종으로부터 안시성을 지켜낸 후에 안시성주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애초에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으니 당연한건가 당연히 언제, 어떻게 죽었는가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안시성은 이후의 기록에서도 종종 등장한다.

667년 9월에 당군이 고구려에 침입했는데 이때 당나라 장수 학처준이 안시성에 이르자 안시성에서 3만 군사를 풀어 당군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학처준은 이를 맞아 싸워 격파하였다. 또한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한 후, 669년 2월에 검모잠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당시에도 안시성 역시 이에 동조하여 당나라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이후 671년 7월, 안시성은 검모잠의 고구려 부흥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온 당나라 장수 고간에게 공격당하여 끝내 함락당했는데 그 시기까지도 안시성주가 살아있었다면 아마 이 때에 죽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645년에 당 태종의 공격을 막아낸지 약 30여년 후의 일이었다.[13]

3 평가

그야말로 1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의 최고의 영웅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는 활약상을 보였다. 비록 안시성이 견고하고 식량도 상당량 비축되어 있었기에 방어하기에는 유리한 곳이었지만 당시 안시성 공략에 나선 이들은 수없이 많은 중국의 군벌들을 무찌르고 나라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당태종, 당대에 당나라 최고의 명장 가운데 하나였던 이적, 그리고 황제의 오른팔 장손무기 등의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이런 먼치킨스러운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지켜낸 것은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으며, 하다못해 당태종이 이 싸움에서 너무 오래 시간을 끄는 바람에 다 이겨가던 전쟁에서 패하여 돌아갔을 정도이니 비록 정체가 불명이긴 하지만(…) 대단한 명장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게다가 당태종의 언급에 따르면 안시성주는 당나라 군대와 싸우기 이전에도 이미 연개소문이 보낸 군사로부터 성을 지켜낸 전력이 있다. 고구려의 실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조차도 어쩌지 못해서 그냥 성을 내줄 정도였으면 보통 비범한 사람이 아니었을 것 같다.

김부식삼국사기를 편천하면서 사론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며 안시성주와 같은 호걸의 이름이 역사에 전해지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당태종은 총명하고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기 드문 임금이다. 난을 평정함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에 비할 만하고, 다스리는 것은 성왕(成王), 강왕(康王)에 가깝다. 병력을 운용함에 이르러서는 기묘한 계책을 냄이 끝이 없고 향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동방을 정벌하는 일에서는 안시에서 패하였으니 그 성주는 가히 호걸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에 그 성명이 전하지 않으니 양자(楊子)가 말하기를 “제(齊)와 노(魯)의 대신이 역사에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매우 애석하다고 할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본기의 보장왕 본기에서는 당태종이 심복장수인 이적과 함께 안시성주에 대해 재능과 용기가 있다고 평가하는 대목을 볼 수 있다. 당태종이 안시성주에 대해 자세히 언급했다는 사실은 곧 당태종이 안시성에 이르기 전부터 안시성주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안시성에서의 승리는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극적이었으며, 당나라의 입장에서는 충격 그 자체였다. 중국 최고의 명군이 직접 출병했음에도 실패한 전투였을 뿐만 아니라 당군이 고구려군을 거의 다 궤멸시킨 상태에서 겪은 패배라 충격은 더했다. 때문에 중국인들은 수와 당을 연이어 격퇴한 고구려에 대해 치를 떨기 시작했으며 동아시아 일대에서는 안시성에서의 전투가 일종의 전설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안시성주의 활약 덕분에 고구려는 물론 후대의 고려와 조선 모두 당태종의 정벌군을 격퇴한 강국이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얻었으며 조선인들도 이러한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대표적인 예로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이 선조가 국가에 훌륭한 장수가 필요하다고 하자 옛날에는 안시성주와 을지문덕이라는 뛰어난 장수가 있어 중국의 역사에도 찬미했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해당기사. 이 모든것이 안시성주의 공이었으니 안시성주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는 더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다.

4 의문점

4.1 안시성주의 이름은 양만춘인가?

안타깝게도 안시성주의 진짜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안시성주에 대해 다룬 가장 오래된 사서라고 할 수 있는 신/구당서나 삼국사기 등에는 그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楊萬春 혹은 梁萬春)이라는 설은 기록상으로 볼때 조선시대부터 내려져오고 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인 윤근수는 그의 저서인 <월정만필>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인 구정도의 말을 빌어서 중국인들이 <태종 동정기>와 <당서연의> 등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서책에 안시성주의 이름을 '양만춘'이라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안시성주가 누구이며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서 자신들의 서책에 기록했다고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이 책들이 모두 전하지 않으니 진위여부를 파악할 수 없다.

한편 조선 후기에 지어진 송준길동춘당선생별집박지원열하일기에서는 윤근수가 전한 말을 그대로 따라서 안시성주의 이름을 양만춘이라 표기하였다. 그런데 출처로서 언급되는 책의 이름에 '연의'가 들어있는 걸로 보아 본래 소설에 나오는 이름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대한민국 해군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3번함(DDH-973)의 함명은 상기 문헌들에 의해 전승되는 안시성주의 이름을 따서 양만춘함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4.2 당태종은 정말 애꾸눈이 되었는가?

안시성 전투에서 당태종이 한쪽 눈을 잃고 애꾸눈이 되었다는 기록은 정사에는 없으며, 한국의 야사에 전해져 내려온다. 14세기 고려말의 학자 이곡은 가정집(稼亭集)에서 당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고 도망쳤다고 밝히고 있고, 동시대의 학자이자 삼은(三隱)중 하나인 목은 이색(이곡의 아들)은 관련 시를 지었다.

謂是囊中一物耳 고구려를 주머니 속의 물건으로 여겼으니

那知玄花落白羽 백우시[14]에 눈이 빠질 줄 어찌 알았으랴

15세기 조선의 학자 김종직은 이색의 시를 소개하면서 "당태종의 애꾸눈 비사는 중국 정사에 없지만 목은(이색)이 시를 지은 것은 그가 중국유학 시절 견문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라고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당태종이 눈을 잃었다는 기록은 정사에는 없기 때문에 실제로 그러하였다고 믿기는 어렵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안구의 시신경은 뇌와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활에서 날라온 초스피드의 화살이 박히면[15] 99.9%의 확률로 즉사 하거나 0.1%의 확률로 뇌사, 또는 식물인간이 되어버린다. 마찬가지 이유로 삼국지의 하후돈이 화살에 눈을 잃었다는 이야기 역시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16]

하지만 극적으로 좋은 소재기 때문에 국내 사극에 등장하는 당태종은 결국 고구려에 왔다가 늘 한쪽 눈에 안대를 싸맨 채로 돌아간다(...).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양만춘이 당태종이 타고있는 마차 곁의 깃대를 화살로 쏴서 그 깃대 꼭대기에 달린 창날이 당태종한테 쓰러지면서 눈을 다친걸로 좀 더 현실적으로 묘사했다. 물론 날이 직접 닿는 것도 위험하니 스치는 식으로 처리.

5 등장하는 매체

중요한 전투의 지휘관인만큼 고구려 말기를 다루는 드라마나 소설에 잘 등장한다. 아무래도 등장인물의 이름은 있어야하니 나오면 양만춘으로 등장.

삼국통일기를 다룬 대표적인 소설 중 하나인 김정산의 삼한지에서도 등장하며, 실제 역사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에게 반대하여 무력 충돌까지 일으키나 연개소문은 오히려 양만춘을 잘 다독여 살려두었다가 당 태종을 막는 결전 병기로 써먹는다(...). 뛰어난 능력자로 묘사되는 것에 비해서 비중은 거의 공기에 가깝다. 작중 안시성에서 당나라 군대를 격퇴한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조차 일절 언급이 없다.

KBS에서 방영했던 삼국기에서도 등장하였는데, 탤런트 임혁씨가 열연하였다.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본명으로 일찌기 연개소문을 모신 심복가문 출신이라는 설정이 추가되었으며, 주군의 집안이 멸문당하자 그 적자인 연개소문을 수십년간 찾아다니다 마침내 그와 만나게 되어 충실한 오른팔이 된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는 정변은 끝까지 반대했고 이 때문에 내전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그를 직접 찾아간 연개소문의 설득에 의해 다시 마음을 돌리기도 했다. 안시성 전투 부분에서는 당연히 주인공급으로 나오고, 고구려 멸망 후에는 안시성의 대당 항전을 지휘하다가 성이 함락당한 후 대조영에게 고구려를 다시 세우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KBS 1TV 대조영에서는 임동진씨가 연기하였는데, 대조영에게 우호적이며 연개소문 못지 않은 위치를 가진 명장으로 나온다. 연개소문이 중앙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다면, 양만춘은 당을 막는 요동전선 총사령관으로 묘사된다. 연개소문 사후에는 보장왕에 의하여 대막리지로 임명되나, 자객으로 잠입한 사부구에 의하여 암살당한다. 참고로 임동진씨는 이 드라마를 끝으로 TV 드라마에는 더는 출연하지 않고 목회활동[17]에만 힘쓰신다고 하다가 무려 9년 뒤 KBS 1TV 징비록으로 복귀하여 윤두수 역을 한다. 위 기록을 보면, 참 기분이 묘한 상황을 피할 수 없다.

SBS 사극 연개소문에서도 등장하지만, 여기선 연개소문이 안시성으로 들어가 전투를 지휘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의 존재감이 약해졌다(...). 배우는 신동훈.

KBS 2TV칼과 꽃에서는 주진모가 연기한 양문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영류왕와 연개소문 사이에 끼어있는 중립적 성향의 인물로, 영류왕 일파와 연개소문 일파와는 조정의 권력을 삼등분하고 있는 권세가로 묘사된다. 작중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휘어잡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자 낙향을 했다는 묘사로 보아 안시성주가 모티브인 인물로 여겨진다. 이후 보장왕과 결탁하여 왕실의 권위를 되찾고자 하지만 계획이 탄로나는 바람에 살해당한다.

  1. 한편 훗날 고구려를 침략해와 안시성에서 안시성주와 싸웠던 당 태종은 이를 두고 안시성주의 능력이 상당하다고 평하였다.
  2. 이 부분에서 안시성주와 연개소문의 대립에 관한 소문이 언급된다.
  3. 공격을 명하는 대목에서 "널 내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네 말을 듣지 않겠냐. 근데 지면 죽는다(...)."라는 식의 투로 말하는 듯한 티가 팍팍난다.
  4. 고연수의 이름이 언급되는건 구당서의 기록
  5. 기록에는 그냥 소리를 질렀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도발을 위해 욕설을 퍼부었을 가능성이 크다(...).
  6. 이세적은 10대 중후반부터 도적패, 반란군 이끌고 다니던 사람이다. 최소한 전투에선 인정사정 없었을 것이다.
  7. 이는 어서 빨리 당군이 승리해야 자신들의 가족이 무사하기 때문이었다.
  8. 신당서에선 장손무기가 안시성의 병력만 10만이라고 주장했고 자치통감삼국사기에선 신성 + 건안성의 병력이 10만이라고 주장했다. 이병도의 경우 '신당서 기록은 중국애들이 뻥튀기 한게 아니냐?' 라고 주석을 달아 의문을 제기했다.
  9. 위에 나온 이적의 주장이나 장손무기의 주장은 단순히 두 사람이 신중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당나라 입장에서는 이미 한차례 전 왕조이긴 하지만 고구려를 상대로 요충지를 우회해서 수도인 평양성을 바로 공격하는 작전을 펼쳤다가 완벽하게 박살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10. 실제로 50만명이 쌓은 것은 아니고 아마 몇명의 병사들이 순번을 돌려가며 차례에 따라 쌓았을 것이다. 즉 '연인원' 개념일 가능성이 높다.
  11. 산이 무너진 이유에 대하서는 많은 추측이 있다. 급조된 토산이 병사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거나, 혹은 갑자기 비가 왔다거나 하는 등.
  12. 후술하겠지만, 당나라군 피해가 엄청나다. 전사자 수천, 대부분의 말이 소실되었고, 당태종이 진흙탕에 빠진 자신의 수레를 직접 밀고갔다는 말을 보아서는 비단 100필을 줄 만한 여유따위 없었다
  13. 다만 당 태종을 패퇴시켰던 안시성주 정도의 인물이 싸움에서 전사했다면 그 사실이 사서에 실려야 할 것인데, 사서에는 그런 기록이 없으므로 이때에 안시성주는 이미 죽고 없었거나 혹은 안시성에 있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14. 白羽矢:흰 깃을 달아 만든 화살
  15. 위력 좋은 활은 몇겹씩 겹쳐놓은 철판을 뚫을 정도로 관통력, 파워가 강하다
  16. 물론 예외는 있어서 부상으로 끝나는 경우는 있다. 이 경우 직격으로 맞은 것이 아니라 방패 등에 맞고 속도가 떨어진 유시를 맞는 경우. 당태종의 눈을 잃었다는 기록은 신뢰하기 어려우나, 정말 만에 하나 눈을 잃었다면 이 쪽이 더 타당할 것이다. 혹은 얼굴에 직격된 게 아니라 비스듬한 방향으로 지나가는 화살에 스쳐 눈을 상하는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눈 주변에 상처를 입고,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감염증에 걸려 안구가 상해서 시력을 잃거나 등등.
  17. 2007년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