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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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대통령 후보
기호이름기호이름기호이름
1정동영5심대평9전관
2이명박6문국현10금민
3권영길7정근모11이수성
4이인제8허경영12이회창

權永吉
1941년 11월 05일 ~

1 개요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대한민국의 언론인, 노동운동가, 진보 정치인이다. 1941년 일본 야마구치 현에서 권우현의 아들로 태어났다. 8.15 광복 후 아버지를 따라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 권우현은 빨치산으로 6.25 전쟁 때 토벌 과정에서 사살되었다. 이후 부산 경남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잠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대한일보, 서울신문 기자로 재직하였다. 1980년부터 1987년까지 서울신문 파리 특파원으로 주재하였다.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서울신문 초대 노조위원장을 맡으면서 노동운동에 발을 들여놓았다.[1] 이때부터 1987년 언론노동조합연맹 초대 위원장, 1990년 5월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2] 초대 위원장, 1995년 11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3] 초대 위원장을 맡으면서 노동운동의 최일선에서 활약하였다. 이후 1996년 12월 24일 새벽에 신한국당이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기습적으로 날치기 처리하자, 이에 항의하는 역사적인 총파업 투쟁을 이끌면서 사람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이후 진보정당의 뒷받침이 없는 노동운동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직접 진보정당건설에 뛰어들었다. 1997년 9월 제15대 대통령 선거을 앞두고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이 결집한 임시대책기구 국민승리21초대 대표 겸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선거에선 득표율 1.2% 고작 30만6천표 득표에 그치면서 쓴맛을 보았다.

대선참패로 진보진영과 노동운동 상당수가 진보정당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여주는 와중에도[4], 국민승리21 대표로 진보정당 건설운동을 계속 이어가면서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고 초대 당대표를 맡았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경상남도 창원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이주영 후보[5]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에도 계속 민주노동당 대표로 활동하면서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이때 여론조사에서 3%이상을 넘으면서 중앙선관위 결정에 의거해서[6] 최초로 대선후보 TV토론회에 참여하여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냈다. 오랜 기간의 꾸준한 활동과 대선TV토론 참여로 민주노동과 권영길에 대한 지지도가 급상승하여 선거운동기간 도중 한때는 지지율 10%에 육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투표 전날 정몽준의 일방적인 단일화 철회 선언으로 상당수 지지표가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지지로 넘어가면서[7], 최종적으로는 득표율 3.9% 약96만표를 득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 조봉암 후보가 216만표를 득표한 이후 진보정당이 거둔 최고의 성과였다. 이때부터 민주노동당과 권영길은 국회의원 한명 없는 원외정당이면서도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인식된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역시 창원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 이주영 후보에게 설욕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2012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민주통합당의 공민배와 단일화를 하여 야권단일 후보로 경상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새누리당 홍준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2013년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은퇴 이후에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의당 선대위 고문으로 역임하는 등 정의당의 평당원으로서는 계속 활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노회찬 당시 경남 창원성산 후보 사무소 개소식 때 참여했던 모습이 이전의 익숙했던 모습과 달리 한동안 희귀병 투병생활로 머리가 다 세었으며 얼굴이 붓고 야윈 모습으로 역변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과 공포를 느끼고 안타까움을 자아냈었다. 그래도 개표방송 땐 어느 정도 병세가 완화되었는지 이전의 모습을 그럭저럭 되찾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2 기타

3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97제15대 대통령 선거국민승리21306,026 (1.2%)낙선 (4위)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창원시 을)민주노동당36,579 (38.7%)낙선 (2위)
2002제16대 대통령 선거민주노동당957,148 (3.9%)낙선 (3위)
200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창원시 을)민주노동당52,758 (49.8%)당선 (1위)진보정당 첫 지역구 당선[8]
2007제17대 대통령 선거민주노동당712,121 (3.1%)낙선 (5위)
2008제18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창원시 을)민주노동당42,809 (48.2%)당선 (1위)
20122012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경상남도지사)[9]무소속702,689 (37.8%)낙선 (2위)범야권 단일후보
  1. 노조를 만들긴 했는데, 누가 위원장을 맡을 것인가로 노조원들끼리 갑론을박을 벌이다가 결론이 나지 않자, 당시 마흔 일곱살로 노조원 중에서 최연장자였던 권영길을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2. 약칭 업종회의. 언론·금융·교사·병원·공공기관 등 사무직/전문연구직 노조들의 연합체. 14개 연맹 586개 노동조합, 200,197명 조합원으로 출발하였다.
  3. 생산직 노조 연합체였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과 사무직 노조연합체였던 '업종회의' 그리고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맹(약칭 현총련) 3개 조직의 대통합으로 출범하였다. 만장일치로 권영길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3개 조직 출신을 골고루 안배해서 초대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4. 심지어 당시 전국금속노동조합 사무처장으로 민주노총의 숨은 실세라는 이야기를 듣던 심상정도 진보정당에 대해서 냉소적인 자세였다. 대다수 노동운동가들은 현장에서 싸워야한다는 입장으로, 심지어 지금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탄압당하고 있는데, 당신네들은 무슨 금뱃지 타령이냐면서 비아냥대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한다. 진보정당의 필요성에 대해서 공감하는 사람들도 한국사회에선 오랜 기간 형성된 냉전반공의식 때문에 실현불가능이라고 보는 진보인사들도 상당했다. 이런 사람들은 그나마 가까운 민주당 계열에 대한 '비판적지지' 노선을 고수했다.
  5.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의 해양수산부 장관 맞다
  6. 당시 국회에 의석이 없던 민주노동당은 TV토론회 참여를 위해서 법원에 소송까지 제기한 끝에 여론조사에서 3%가 넘는 후보는 TV토론회에 참여가능하다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7. 언론과 여론조사 전문가들에 따라서 최소 50만에서 최대 100만표 이상으로 추정한다.
  8. 같은 선거 울산 북구 지역구에서 당선된 같은 당 조승수가 있는데 2005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9. 전임자 김두관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사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