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역사

사실상 조선일보/비판 no.2나 다름없다

1 일제강점기

1920년에 송병준, 조진태, 예종석 등 위시한 친일인사들이 주축이 된 친일경제단체였던 대정실업친목회[1] 주체로서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창간되었다. 초창기에는 조선총독부 시책에 동조하는 상업지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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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3월 9일자 조선일보# 조선일보 지령 3호로 이게 오늘날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조선일보다. 오늘날 조선일보의 창간호 일부분만 발견되었다.[2]

가장 오래된 '창간호'(지령 3호)의 머리기사 사설 제목은 '실업(實業)의 실지 (實地)'인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조선 5백년 실업이 미발달하였다. 위(謂)하여도 현상(現狀)의 실업보다는 십분 우승(優勝)한 바이요 현상 수십년래 실업이 극발달하였다 위하여도 5백년 유래의 실업보다는 십분 쇠퇴한 바이라 하노니 하이연야(何而然也, 무슨까닭인가)오. 5백년 유래의 실업은 실지가 유(有)하다 함이요. 현상 수십년래의 실업은 실지가 무(無)하다 위함이라.

대정친목회의 회원이었던 조진태가 사장을 맡았고, 이후 친일파 송병준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가 1924년 다시 민족주의자 신석우에게 넘어가는 등 경영권이 자주 바뀐다.[3] 이 무렵 조선일보는 민족신문이자 공산주의자(박헌영이나 김단야, 조봉암, 김재봉, 강달영 등.)도 논설기자로 받아들이는 등 이념에 구애받지 않는 신문사였다.[4] 이 시기 만큼은 조선일보가 민족지로서의 면모를 확실히 보였으며, 총독부로부터 가장 눈에 거슬렸던 신문으로 사사건건 검열과 탄압을 받았을 정도였다.[5] 1920년대 동시대 경쟁 언론사였던 동아일보는 비교할 깜냥이 안 될 정도였지...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가로 명망높았던 이상재안재홍이 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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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2월, 신간회 출범식을 다룬 조선일보 기사. 신간회는 일제강점기때 '합법적'공간에서 활동했던 좌-우 연합 성격의 독립운동 단체였다.[6] 여기 신간회 핵심 멤버들 가운데 조선일보 출신들이 많았다고 한다.(ex:안재홍, 이상재, 홍명희, 한용운 등)

1927년에는 사회주의자와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이 결성한 좌-우연합 성격의 신간회활동에 적극 주도하고 지원, 다양한 강연 주최 활동하는 등 합법적인 공간에서 독립운동과 사회활동, 계몽운동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신간회 활동 때만 해도 조선일보는 좌-우파가 어우러진 상당히 개념이 넘친 신문사였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1931년 이후 자금난을 겪고 '재만동포 자금 횡령사건'[7]에 연루되어 사장 안재홍이 구속당했다. 이후 조선일보는 사장의 공백과 총독부의 잦은 탄압과 검열로 심각한 경영난에 시달리다 1933년 친일파의 거두이자 광산왕인 방응모에게 소유권이 넘어가며[8] 이때부터 조선일보는 다시 친일적인 논조로 회귀해버렸다.[9][10] 친일적인 논조를 본격적으로 보인 시기는 1936년 새해 첫 날 신문에 당시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의 '연두교사'를 실은 내용 전후로부터였다. 그 내용은 마치 '임금이 신민(臣民)에게 내리는 교지' 정도급이었다. 물론 총독부당국의 압력이 있었다.[11] 같은 해 8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동아일보가 총독부의 압력으로 강제휴간을 당하자, 경쟁관계였던 조선일보는 전국적으로 발전자축회를 개최하는 등 이를 사세 확장의 기회로 이용했다.[12]

1937년 7월 7일, 일제가 '루거우차오 사건'을 조작해서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중일전쟁)하자, 이무렵 조선일보는 일본군의 '연전연승' 소식을 실시간 중계를 했다.[13] 일본제국의 '애국일'인 9월 12일자 신문은 '황군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전 조선적인 애국'을 부르짖었다. 총독부 당국의 명령이었다.[14] 이무렵 상하이 전투를 비롯해 난징 전투 등 일본군의 전투 소식에 중계방송하듯이 다룬 정도.(...) 여기에 1937년 12월에 일본제국이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 시를 점령했을때는 마치 '축제 분위기'인거 마냥 신나게 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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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2월, 난징성 전투. 난징 성 함락 당시 보도한 조선일보.

지나의 수도 남경은 이에 함락되었다. 진강, 구용, 심수의 소위 '제1 크트' 국방선에 의하여 난공불락을 자랑하고 수도 사수를 맹서한 국민정부도 황군 정예 앞에는 함락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면적 총공격을 개시한 이래 4개월 만에 수도 남경을 함락하였다는 것은 세계 역사상 희유(稀有)한 일이다. 남경성 방공 기타의 방위에 있어서 세계 제일이라는 칭(稱)이 있다. 지나 군대의 전투력은 근대국가의 육군으로서 손색이 없다. 함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신속적 스피드로 성과를 수하였다는 것은 지나군의 열세에 의한 것보다 충용한 황군 장병의 우월한 데 기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군사상 여러가지 '핸디캡'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단시일에 적국 수도를 함락하였다는 것은 일본군의 실력이 여하히 정예한 지를 좌증하는 것으로 다 같이 축하할 바이다.

드넓은 중국 침략 자체 병력만으로 감행할 수 없던 일제는 1938년 1월 중순 '조선이 지원병제도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는데, 여기서 조선일보는 1938년 1월 18일자 사설에 '이제 조선에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중대 사실'로서 내선일체를 표방한 것이라고 보도했다.[15]#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 발발했을때 조선일보는 사설 '독파 전단 개시/구주대전은 불가피'에서 나치독일을 지지하였고, 이어 "세계대전은 제국(일제)의 일대 비약의 호기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16]

이후 조선일보는 연달아 거의 매일 차마 보기 민망하다 싶은 수준급의 기사 글들 연달아 기고하는등 총독부로부터 국민적 입장을 가진 신문으로 극찬받을정도였다.

그와 더불어 일제 황군의 무운을 기원하는 광고, 일장기, 일본도를 든 어린이들을 이용해 침략 전쟁을 미화한 광고 등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광고를 자주 게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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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를 제호 위에 올리고 일왕 부부 사진을 1면에 실은 <조선일보> 소화 15년(1940년) 1월 1일자 신년호

건곤일척 욱광은 동천에 빛나고 서기는 사해에 미만한 기원 2600년이요. 소화 15년의 원단을 맞이하였다. 이날을 당하여 천황폐하께옵서는 만수무강하옵심을 봉하하오며 황실의 유익강영하심을 봉축하는 것은 대일본제국 신민의 무상한 경행이요 지고한 영광이다. (중략) 대일본제국 신민은 누구나 이날이 황기 2600년이요 성전 제4년의 원단임을 깊이 기억하여서 억조일심으로 시간 극복, 성업 달성에로 매진할 결심과 각오를 모고하게 하여야 한다. 내외 다난한 이 기원 2600년에 만사가 형통하여 소기한 목적을 달성하여야만 상으로 황은에 보답하고 하로 황국의 사명에 충실하는 소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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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8월 11일자 조선일보. 폐간사.

조선일보는 신문 통제의 국책과 총독부 당국의 통제 방침에 순응하여 금일로써 폐간한다. 우(吁)라 물건은 본(本)과 말(末)이 있고 일은 시(始)와 종(終)이 있다. (중략) 금일로써 본보는 무(無)와 사(死)의 막이 내리었다.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체의 감회는 주관과 객관의 가치 판단에 있거니와 뚜렷한 사실은 이 조선일보가 영영 조선사회에서 없어진 것이다.(중략) 작년 9월에 발발한 구주대전과 독이의 대승을 계기로 하여서 세계 정세는 큰 전환을 보게 되고 국내 정세가 또한 이에 대응하여서 신체제가 건설되려고 하는 이때에 신문 통제가 국책으로 수행되는 이상 우리는 이에 순응하는 이외에 다른 사정을 운위할 바가 아니다. 본보의 폐간도 이 점에 근거가 있다. 끝으로 본보를 애독지지하여 준 사회 대중에게 감사와 미안의 말씀 이외에 다른 말이 없는 것을 심량하여 주기 바란다. -폐간사-

그러다가 1940년에 일제 조선총독부에서 '같은 논조의 신문들이 중복해서 여러개가 있을 필요 없다'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시킨다.[17][18] 조선일보는 '폐간사'와 '사고'(社告)에서 '신문 통제'라는 '국책에 순응'해서 조선일보를 폐간했다고 밝혔다. 다만, '감사와 미안의 말씀 이외에 다른 말이 없는 것'을 깊이 양해해 달라는 말로 여운을 풍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조선일보는 총독부에 저항도 못하고 동아일보와 같이 자진폐간하게 된다.[19] 그러나, 신문사가 폐간된 이후에도 사주 방응모는 월간 <조광>[20]을 계속 발간하여 전시체제기 동안 내선일체를 적극 홍보하고 침략전쟁을 미화, 찬양하는 논조를 노골적으로 보였다.

2 8.15 광복 이후 미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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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23일자 복간호.

1945년, 일제 패망 후 8.15 광복을 맞으면서 1945년 11월, 조선일보가 복간되었다. 복간과 동시에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의 노선을 적극 지지하면서 '민족의 대변자'인거마냥 나섰다. 이후 조선일보는 초창기 반탁운동, 미소공위 반대, 반공주의적 성향, 한국독립당 지지 논조를 보여왔다. 하지만, 반공주의적 논조를 보였다해도 최소한 기사,사설 기고할때는 중도적인 입장의 사설글들 기고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1945년 12월 5일. '임시정부에 제언함'이라는 사설에 조선일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력과 조선인민공화국 세력이 합작하여 민족 통일 전선을 완성할 것을 바란다. 민중의 총의에 의한 민주 정부여야 할 것. 현재 민족 통일 전선의 암이 되어 있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 문제이다. 이런 도배를 신성한 우리의 건국에서 배제함으로써 후환을 단절하는 데 어느 누가 찬동치 않을 것인가?'라고 강조를 하였다.#

조선일보는 해방정국 시기 김구를 지지하면서 한독당의 노선을 지지하면서도 초창기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사설을 기고하는 등 좌우합작 7원칙에 지지하는 사설을 기고하기도 했었다.[21][22] 1947년 국제적으로 냉전이 불어닥치기 시작한 '트루먼 독트린' 시기 전후로 냉전이 심화될 무렵. 1948년 1월, 단정 수립 지지하는 사설을 기고하면서 단정 지지로 선회했다.[23] 사장 방응모는 1948년 6월 김구가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반대하며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서 '남북협상'에 참여하자 그와 결별한 뒤 조선일보를 '반공주의적 신문'으로 변모시켰다.

3 대한민국 시기

3.1 제1공화국 시기

3.1.1 1948년 ~ 1950년

정부 수립 이후 초창기 1공화국 시기에는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이었다.[24] 어느정도로 제1공화국에 비판이 강했냐면, 반민특위 활동 당시에 조선일보는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사설을 연달아 기고하는가 하면[25][26], 1948년 11월, 정부에서 국가보안법을 제정했을 무렵에 조선일보는 이 법이 악용될 소지가 매우 크다!고 사설에가다 강력하게 규탄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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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 14일자 조선일보 사설 '국가보안법을 배격함'

(전략) 오늘의 정치적 혼란, 난마적인 사상의 불통일의 이 현상에서 더구나 정부는 국회의 내각개조론에 까지 불순을 꾸짖는 이러한 이 현상에서 이러한 법의 제정은 대한민국의 전도를 위하여서나 우리 국민의 정치적 사상적 교양과 그 자주적 훈련을 위하야 크게 우려할 악법이 될 것을 국회 제공(諸公)에게 경고코저 한다. 원래 법치국됨은 법망의 정비 교묘(巧妙)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법치국의 근대적 발달은 법이 민주적 성격을 가지고 국민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발달을 도모하여 그 자주와 권리를 존중하는데서 국가의 통치권력으로써도 이를 보장하고 침해치 않음으로써 정치의 인류사적 공헌을 목표하는데 본의가 있는 것이고 국민을 착취나 지배의 대상으로 포로시하는 그러나 법망의 주밀, 세공화는 법치의 역사성에 반역하는 것이다. 그러한 예가 군왕 전제의 일본이나 독(獨), 이(伊)의 파씨즘국가가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그러타고 이러한 원리원칙이 오늘 대한민국을 이 상태에서 그대로 적용될 것이냐고도 말할 것이나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원리원칙은 언제나 부인될 수 없는 것이고 또한 대한민국과 그 국민의 전도양양할 것을 축복코저 할 때 다시금 이러한 원리를 토대로 입법과 정치가 표(表)와 리(裏)의 물샐틈없는 실천력을 발휘하여야 한 것을 주장한다.(후략)

한편, 이 시기에도 극우 반공주의적인 논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대표적으로 여수,순천 일대에서 일어난 국군 14연대 반란 사건의 배경에 대해서는 14연대 반란군의 학살에 초점을 맞췄다. 조선일보는 "지난 20일 여수에서 국군 반란이 일어났단 보도를 듣고 우리가 제일 염려한 것은 인명의 실상과 시설의 파괴에 대한 것"이라고 전했다.[27][28]

3.1.2 1950년 ~ 1960년

6.25 전쟁 개전 초창기 이승만 전 대통령이 '수도를 사수하겠다'는 방송을 하면서 국민 몰래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갈 만큼 초기 전세는 대한민국쪽에 불리했다.

이런 전세는 조선일보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29] 국방부의 '허위 보도자료'를 그대로 베껴써 인용하여 27일자 신문엔 '전과 혁혁·요격 태세 완비/국군 일부 해주 돌입/적 사살 180명/전차 등 격파 58대'## 이란 거짓 기사를 1면에 대서특필했을 뿐 자신들이 알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일절 보도하지 않았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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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호외를 통해 북한을 찬양하였다.

“입성한 부대들은 서대문 마포 양 형무소에 구금된 애국자들을 석방하고 괴뢰집단의 소위 대한민국 중앙청 서울시청 검찰청 미국대사관 은행 소위 유엔 위원단 및 중요한 도로 교량 체신 철도 및 각 신문사를 완전히 해방시켰다”

“오래 갈망하여 맞이하던 조선인민군대를 서울시민들은 열열한 환호로서 환영하였다”
“서울에 있던 만고역적 리승만 도당들과 미국대사관 및 유·엔위원단들은 이미 27일 오전 중에 서울에서 도망하였다”
"서울은 완전히 우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수도로 되었으며 서울 전체 시민들의 거리로 되었다. 이제 시민들은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치안당국의 지시를 절대 신임하고 반동들의 온갖 모략에 귀를 기우리지 말라"
"반동분자들의 데마(유언비어)와 테로(테러) 방화 파괴 등에 최대의 경각성을 돌리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우리민족의 경애하는 수령인 김일성장군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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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6월 28일부터 신문제작을 중단했다고 주장한다. 이 시기의 내용은 조선일보의 공식기록에 없다.#

1951년 1.4 후퇴로 서울이 또다시 점령당하자 잠깐 기간 동안 신문 발간 못하고 1.4후퇴 기간 피란수도였던 부산 남포동에 허름한 창고를 빌려 거기서 2차 전시판 뉴스로 속간 재발간했다.

한국전쟁 기간 논란있는 굵직한 사건들을 밋밋하게 다뤘다. 이를테면 고급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얼어 죽고 굶어죽는 군인들이 속출한 국민방위군 사건을 일체 다루지도 않았다. 이어 국군이 북한 인민군과 빨치산과 내통한다는 혐의를 씌워 무고한 민간인 719명을 학살한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에 반발해 이시영 부통령이 사표를 제출한 사건을 전하면서도 그 이유는 전하지 않았다.#

한편, 이승만 전 대통령의 반민주적 행위도 또한 보도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국회에 제출한 직선제 개헌안이 압도적 반대로 부결되자, 정치깡패들(땃벌떼) 동원에 헌병대 동원시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구속시켰던 무렵(부산정치파동) 조선일보는 이승만 정권의 정치 공작에 대해 일절 지적하지 않았다.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도 마찬가지로 어떠한 논평도 내지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한동안 한국전쟁 전후로 '대통령의 의중'을 떠받들고 매카시즘 논리에 휩쓸려 독재정권의 '어용지'로 전락. # 자유당 정권의 막나가는 막장짓들에 대해서는 일절 다루지도 않았다. 6.25 당시의 타격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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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3월 26일자. 이승만의 80살 생일맞아 특집 지면으로 다뤘다.

오늘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을 맞이하여 노(老) 대통령에게 경하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환희와 감격을 느끼게 된다… 80이면 고희에 10년이 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이 대통령에게 적용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가능하다면 백천(百千)세가 거듭 되었으면 한다. 왜그러냐 하면 우리의 전도(前途)에는 해결해야 할 중대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에게 더욱 신의 가호가 있어서 통일대업을 완수하고 국가 기초를 더욱 확고히 하는 데 더 한층 노력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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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시기의 조선일보.

그러다 1960년 4.19 혁명 시기에 또다시 시류에 따라 변신. 기존 노선에서 틀어 동아일보와 함께 독재정권을 맹공격하는 신문사로 활약한다. 3.15 부정선거 무렵부터 조선일보는 마산에서 일어난 부정선거 규탄 투쟁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는가 하면 4월 13일~17일자까지 이승만 정권을 강하게 비판하는 사설을 잇달아 내보냈다.

3.2 제2공화국 시기

4월 혁명 직후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교원노조 운동을 극히 소홀하게 다루다가 6월 23일자 석간 1면에 '교원노조에 대한 문교부의 부당한 해산명령'이라는 사설을 올려 노동운동을 지지하는듯한 사설을 기고했으나[31] 1960년 7.29 총선 뒤 구성된 장면 정권이 교원노조를 탄압하는 데도 조선일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후 장면 정권의 노동운동 탄압이 계속되는데도 조선일보는 여기에 외면했다.

또한 조선일보는 이 시기 반통일적인 입장을 나타내기도 했는데, 7.29 총선을 계기로 혁신세력이 '중립화 통일론','남북협상론'등을 제기하자 조선일보는 7월 10일자 석간 1면 사설을 통해 '반공 지상주의적 통일론' 또는 '타율적 정세에 의한 통일론'이라고 볼 수 있는 주장을 펼쳤다.[32] 1961년 5월, 서울대 민통련이 남북학생회담을 공식 제의하기로 결정하자 조선일보는 6일자 석간 1면에 '시도의 가치 없는 남북 학생회담 제의'라는 사설을 내보냈다.[33]

3.3 3,4공화국 시기

3.3.1 초창기부터 3선 개헌까지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조선일보는 5월 19일자부터 30일자까지 '군사혁명'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고 미화하는 사설을 무려 12편이나 내보냈다. '제2단계로 진입한 혁명의 완수를 위하여','혁명의 완수와 국내외의 기대','제2공화국의 붕괴와 최고회의의 사명','국제적으로 공고해진 혁명정부의 위치'등 사설 등이었다.#

이어 1963년 민정이양을 앞두고 박정희가 이른바 '혁명공약'을 저버리면서 군복을 벗고 대통령에 출마하기 위해 '번의'를 거듭하던 무렵, 조선일보는 이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논조를 펼쳤다.# 그러나 이무렵 강하게 의혹이 일던 김종필이 주도한 '공화당 사전 조직'에 대해서는 진상을 보도하지 않았다. 1963년 쿠테타세력이 저지른 '4대 의혹 사건'(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새나라자동차 사건,빠징코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가 1964년 '언론윤리위법 파동'을 이용해 언론사주들을 어르고 달래자 조선일보는 한동안 그 '악법'에 저항하는 논조를 보였다. 특히 최석채 주필[34]이 재직했을 당시 1964년~1969년까지의 조선일보는 사회적 약자, 노동운동에 많은 관심과 옹호하는가하면 박정희 정권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적인 논조들을 상당히 많이 기고하는 등 민주주의적인 입장을 지지하여 당시로서 매우 용기있는 주장들을 과감하게 다뤘다.[35][36][37]

3.3.2 3선 개헌 전후 입장 변화와 유신체제 시기

1969년 3선 개헌을 전후로 조선일보는 '친박정희' 노선으로 변해버렸다.[38][39]

이후 조선일보는 연일 내내 '친 박정희' 논조를 보이면서 1972년 유신 정권 시기로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싶을 정도로 '유신'을 적극 지지[40]한 뒤 '유신 찬양 시리즈'를 잇달아 내보내면서 반민주주의적인 입장을 확실하게 보였다.[41]

그때부터 1979년 박정희가 암살당하는 날까지 조선일보는 유신독재를 제대로 비판한 적이 거의 없었다.[42].#

3.4 제5공화국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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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당시 조선일보의 보도. 조선일보는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폭동'내지 '난동'으로 보도했다. 지금도 조선일보는 이와 관련해서 어떠한 사과 한마디도 안하고 있다.

1979년 느닷없이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들이 주도한 12.12 군사반란 시기 조선일보는 전두환 세력의 군사반란을 긍정적인 면으로 보도하고##하고 지지[43], '혁명'으로 미화[44][45]하였다. 이듬해 1980년 5월 17일 '서울의 봄'을 유린하는 군사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과 노태우의 '신군부'는 바로 이튿날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시위가 대대적인 민중항쟁으로 발전하자 무참한 '학살'로 그 사태를 '진압'했다. 조선일보는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 또는 '난동'이라고 허위 보도해버렸다.[46]

"광주시를 서쪽에서 들어가는 폭 40m의 도로에 화정동이라는 이름의 고개가 있다. 그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드가 쳐져있고 그 동쪽 너머에 '무정부상태의 光州'가 있다. 쓰러진 전주.각목.벽돌 등으로 쳐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광주로 통하는 모든 통로가 막힌 상태에서 광주에는 식품과 의약품 등 생필품의 품귀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타지에서 반입되던 생필품이 끊긴데서 비롯된 것이지만 대부분의 상점과 시장들이 가게를 열었을 때의 안정이 보장받지 않은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고 바리케이드 저편에서 온 몇 사람들은 얘기했다...."

이어 5월 27일자, 조선일보는 <혼미-광주사태 10일째>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상가·은행 등 문 못열어" "외부와 두절, 생필품난 극심"하다며, 임시취재반을 통해 항쟁 10일째로 접어든 광주시내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광주시내의 쌀과 보리는 거의 동이 났고, 일부 문을 연 변두리지역 정육점과 어물전의 재고도 고갈 직전에 있으며, 도시가스도 공급이 제한되고 있다....강경파들은 '계엄군이 진주하면 도청에 있는 1천여발의 수류탄과 광주시 절반이 파괴될 수 있는 TNT를 터트리겠다'고 위협했다...."

광주가 계엄군의 무력에 의해 완전히 정복된 이 날, 조선일보는 <악몽을 씻고 일어나자-광주에 국민적 동포애를 호소하면서>라는, 대한민국 언론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사설을 게재했다.

"지금 오직 명백한 것은 광주 시민 여러분은 이제 아무런 위협도, 공포도 불안도 느끼지 않아도 될, 여러분의 생명과 재산을 포함한 모든 안전이 확고하게 보장되는 조건과 환경의 보호를 받게 됐고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주사태를 진정시킨 군의 어려웠던 사정을 우리는 알고도 있다. 30년전 6.25의 국가적 전란 때를 빼고는 가장 난삽했던 사태에 직면한 비상계엄군으로서의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성공했다...."
"10.26 이후 거센 변혁기를 가면서 광주에서 극악화해버리고 만 이번 사태의 결과를 놓고 어찌 광주시민들에게만 그 책임을 전적으로 물을 수 있는 일일 것인가. 그것은 하나의 국민-민족집단으로서의 윤리적 차원에서 그러하며, 분단상황의 잠재적, 현재적 위기 속에 30여년을 함께 해 온 동족이요 동포로서 죄의식을 더불어 나누어가짐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마음에서이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에 진압 당한 이후, 조선일보는 전두환을 영웅화하는 작업에 대대적으로 앞장섰다. 대표적인 기사는 1980년 8월 23일자 3면 전체를 차지한 '전두환 특집'이었다. 그것은 전두환이 대통령 되기도 전에 그에게 바친 '용비어천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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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공화국 시절, 1980년 8월 23일자 조선일보. 독재자+대국민학살자를 상당히 심하게 빨아대기까지 했다.(...) 보기가 참 민망한 수준...[47]

그의 투철한 국가관과 불굴의 의지, 비리를 보고선 잠시도 참지 못하는 하지만 자기 자신은 비리를 저지를 수 있는불같은 성품과 책임감, 그러면서도 아랫사람에겐 한없이 자상한 오늘의 '지도자적 자질'은 수도생활보다도 엄격하고 규칙적인 육군사관학교 4년 생활에서 갈고 닦아 더욱 살찌운 것인듯 하다. 그가 육사를 지망한 것은 적의 군화에 짓밟힌 나라를 위하는 길은 내 한 몸 나라에 던져 총칼을 들고 싸우는 길 밖에 없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1987년 6월 항쟁까지 조선일보는 전두환 정권의 악정과 학정을 전혀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옹호하는 '친위대' 같은 구실을 하면서 독재정권의 나팔수 언론의 선두주자 위치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일보는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엄청난 수혜와 혜택을 받아가며 권언유착을 즐겼고, 1980년에서 1987년 사이에 24.1%의 성장을 기록하면서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를 압살했다. 신문계 1등이 된 때는 1978년이다.[48]

3.4.1 6월 항쟁 때의 보도

6월 항쟁의 촉발이 되었던 계기 중 하나였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박종철군이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을때, 조선일보는 '고문'이란 단어를 빼고 '조사받던 서울대생 사망'#이라고 전했다. 이는 동아일보가 고문당한 정황을 구체적으로 보도한 것과 매우 달랐다.#

이어 '직선제 개헌이 불가하다'는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이후 시민들의 저항은 거세졌고, 6월 9일에는 연세대 이한열군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항쟁의 불길은 커져갔을때, 조선일보는 '6.10 항쟁'에 대해 많은지면에 걸쳐 보도하면서 다루되, 시위 현장의 민심을 '친 민정당'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는 논조를 보였다.[49]

이어, 6월 14일자에 '벼랑에 섰다/ 다음에 올 것을 오지 않게 하려면'이라는 사설을 기고하면서 '헌정 중단'의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며 시위 자제를 촉구했다. 이는 계엄 선포 등 '일종의 협박'으로 읽히는 내용이었다.#

여야의 모든 정치인들과 재야와 학생, 종교인 및 공권력과 시민 제위에 깊은 시름을 안고서 마지막 절실한 호소를 하고자 한다. 이제 우리는 문자 그대로 천 길 낭떠러지 끝에 와 서 있다. 한 치만 더 나아가도 우리는 또다시 저 무서운 추락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시위대가 곳곳에 출몰하여 이를 경찰력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될때, 그 다음 올 것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일이다. 공격을 할 때는 항상 상대방을 어디까지 밀어붙일 것인가의 그 정도를 정확하게 재야 한다. 그러지 않고 무턱대고 계속 밀어붙여서 깜빡할 사이에 적정선을 넘으면, 그 다음부터는 오히려 상대방의 역공으로 사태가 순식간에 악화된다. 야권과 학생들은 이 절묘한 '정세의 동학'을 무시하지 말기 바란다. 그리하여 지금이얌라로 벼랑의 끝에 섰음을 감지하고서, 다음에 '올 것'을 어떻게 해서든 오지 않게 하도록, 야권과 학생들은 최대의 슬기와 절제 그리고 온유함의 자세로 돌아갈 것을 당부한다. (중략) 어쨋든 우리는 올림픽도 해야하고 민주화도 해야하고 개헌도 해야한다. 이러자면 지금 필요한 것은 여야의 동시적인 대안 제시에 의한 국면 전화, 즉 '큰 정치'가 절실한 것이지, "올 것이 왔다"를 재촉하는 것이 아니다.

6월 29일, 전두환을 지지하던 조선일보는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 평화적 정부 이양을 약속한 '6.29 선언'을 발표하자, 이전의 논조를 또 한번 확 바꿨다.

6월 30일자 1면에 그 소식을 대서특필하고 2면에 '위대한 나라로의 전진을 위해/대전환의 계기가 된 노 대표의 극적 선언'이라는 통단 사설을 실으면서 노태우를 적극적으로 띄어주는 논조의 사설을 기고했다.# 정치 개혁의 대상을 정치 개혁의 주체로 바꾸어주는 조선일보의 위엄

3.5 제6공화국

3.5.1 노태우 정부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뼈대로한 '6.29 선언'을 발판 삼아 전두환의 후계자가 된 노태우 정권 시기에 조선일보는 우익의 정론지 구실을 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을 '반정부','불법','과격'으로 보도하는가 하면 이 시기에 설립된 전교조에 대해서는 적대적 논조로 일관했다.

그리고 '전통야당' 지도자를 자처하던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이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하겠다고 발표하자 조선일보는 그것을 야합이라고 비판하기는 커녕 옹호하는 사설을 기고했다.#

노태우 정부 시기 내내 조선일보는 학생과 재야세력의 운동을 극렬히 비난하면서 '공안정국' 조성의 '확성기'노릇을 확실히 했다.[50]

1992년 대통령 선거때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한 김영삼이 '초원복국집 사건'으로 위기에 부닥치자 그를 변호하는데 전면적으로 나섰다. 당시 조선일보는 "공식적인 대책회의라기 보다는 김기춘 전 법무장관의 초대에 의한 회동이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모임의 대화 내용을 공개한 통일국민당 후보 정주영의 아들 정몽준이 '도청'을 했다고 비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중요점을 교묘히 바꾼 것이다.

3.5.2 문민정부 시기

김영삼과 김대중이 맞선 대통령 선거에서 철저히 김영삼을 지원한 조선일보는 김영삼의 문민정부에 비판(금융실명제 등)을 가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우호적인 논조를 펼쳤다. 하지만 '소통령'이라고 불리던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이 저지를 부정과 비리가 잇달아 드러나는데다 대통령 임기 말에 '환란'까지 터지자 조선일보의 태도는 서서히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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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터지기 직전에 조선일보 보도. IMF 구제금융 사태가 거론되기 시작하던 때는 김영삼 정부을 구하려고 거짓보도들을 일삼았다.

IMF가 터지자 "결국 지금의 우리 정부와 사회는 지난 30여년의 압축적 개발경제의 성장유산을 제대로 관리하는 데 실패했으며 그 가장 큰 이유는 가치지향과 정책자세로 새로운 변화와 질적 구조 전환의 시대를 관리하고 재단하려 했던 지배층의 오만과 미성숙에서 찾아야한다"며 발을 뺐다.

1997년 12월의 제15대 대통령 선거 기간에 조선일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김대중을 떨어뜨리기 위한 기사와 논설들을 연일 쏟아냈다. 특히 DJP연합을 맹비판했다.

3.5.3 김대중 정부 시기

김대중 정부 시기 초창기부터 조선일보는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고수해 왔다.

대표적으로 자매지인 월간조선을 통해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 최장집씨에 관한 사상논쟁을 일으켜 그가 끝내 사퇴하게 만드는가 하면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3개월만에 '옷 로비 사건'이 터지자 조선일보는 '김대중 정권의 도덕성이 파탄에 이르렀다'는 논조를 펴면서 맹비판을 퍼부었다. 이는 한나라당의 연합공세까지 추가되어 초창기 국민의 정부는 레임덕 직전에 까지 이르었다.

그리고 이어, 김대중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햇볕정책'과 그 결과로 나타난 '6.15 선언'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기사와 사설을 대대적으로 내보내며 북한과의 화해에 대해 회의적인 논조를 보였다.

김대중 정권은 '자민련과의 연합'이라는 약점 때문에 언론세무조사을 과감하게 추진하지 못하다가 임기 후반인 2001년 2월. 대형 언론사들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가장 주요한 표적은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였다. 세무조사에서 조선일보 사장 방상훈이 거액의 탈세를 했다는 혐의가 밝혀져 구속조치되고 실형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하자. 조선일보에서는 '세무사찰은 언론의 탄압'이라고 비난중앙일보 사주가 탈세혐의로 구속되었을때 '언론사 사주도 납세의 의무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으면서# 하면서 김대중 정권의 핵심 인사들과 정책에 대해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 논조의 사설을 기고했다.

3.5.4 노무현 정부 시기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새천년민주당 후보 노무현은 초선 국회의원 시절부터 조선일보의 적이었다. 조선일보는 한나라당의 이회창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노무현의 온갖 약점을 파고들었으며 악의적인 허위사실을 보도하는 일도 많았다.

심지어 대통령 선거 전날 밤에 정몽준이 단일화 상대였던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갑자기 철회하자, 원래 나가기로 되어있던 사설 대신에 노무현을 찍지 말 것을 노골적으로 촉구하는 사설을 싣는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 언론사에 수치로 남을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 사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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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도 노무현 지지 철회했으니 최종 선택은 너희 몫이다
그러나 결국 노무현 후보가 어렵게 승리하자 조선일보는 정부를 강력히 비판하는 고수위의 기사와 사설들을 수시로 내보냈다.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때때로 노무현 대통령이 언론을 탄압한다고 까기도 했지만 그런 논조의 보도까지 보도되는걸로 봐선 언론자유가 크게 보장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3.5.5 이명박 정부 시기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대통합민주신당 후보 정동영이 여론조사에서 이명박의 상대가 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는데도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아 정권교체를 이루겠다는 우익의 총력전에서 조선일보는 엄청난 애를 썼다 .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어 선거공약인 '대운하 사업'을 '4대강 살리기'로 슬그머니 바꿈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는 이를 지지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명박이 재임기간 5년 내내 미디어법, 광우병, 4대강 등으로 야당과 진보진영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지만 조선일보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와는 달리 이 정부를 계속 지지했다.

그리고 2012년 대선 투표일 직전 새누리당 후보 박근혜가 국정원이 여론조작의 혐의를 받은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을 적에도 조선일보는 여러 반박 등을 보도, 박근혜 후보의 당선에 큰 공을 세웠다.

3.5.6 박근혜 정부 시기

오늘날 현재 조선일보는 상당히 반노조적[51][52], 친 신자유주의적, 반북반중적인 성향을 띤 동시에 반공주의를 띤 선두주자로서 대한민국의 언론을 주도해 오고 있다.하지만 그들은 2016년 9월 이후로 반정부적 성향도 보이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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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정은 당시 덴노였던 다이쇼덴노 및 연호에서 따온듯. 후일 중일전쟁 시기 일본제국 수상이던 고노에 후미마로를 수장으로 하는 군국주의 단체 <대정익찬회>와는 한국어 한자독음의 첫 2음절이 같은 것만 빼면 관련 없다. 그나마 정 자도 대정익찬회는 政.
  2. 창간호는 1920년 3월 5일이라고 하는데, 창간호를 봤다는 사람들 얘기조차도 현재로써는 없다. 그러나 2010년에 창간호의 일부분을 발견했다. 이어 1920년 3월 7일자로 낸 조선일보 제2호 역시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는 조선일보의 경영권이 불안정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과거 신문(아카이브)의 보존 상태가 불량했다는 얘기다.
  3. 경영진이 자주 바뀌는 동안 재미있는것은 1920년~1924년 기간동안 조선일보 사장, 운영진들이 송병준을 비롯한 친일파 거두였음에도 그 밑에 말단 기자들은 조선총독부에 반대하는 항일 민족지 + 사회주의적 성향이 아주 강했다는 것이다. 특히 친일 거두 송병준이 사주로 있던 1922년~1924년초 사이가 사주(경영진) vs 말단 기자 間의 대립이 아주 격렬했는데, 조선일보 말단 기자들은 해외에서 불어닥친 '사회주의 이론'을 활발하게 소개##하면서 당시 '민족지'를 자임하던 동아일보에 맞서 훨씬 혁신적인 노선을 지향했다. 20년대 초반에 동아일보는 '민족개량주의' 주장으로 욕 엄청 먹었지. ㅉㅉ 친일파 경영진으로 구성된 사주나 다수 편집간부들과 달리 대척점에 있어 훨씬 진보적인, 사회주의나 유물사관을 신봉하던 젊은 기자들의 적극적 문필활동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조선총독 사이토씨에게 사직을 권고한다코렁탕논설을 쓰는가하면, 독립군 의용대원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교전한 사실을 크게 보도#하면서 총독부로부터 압수 여러차례 겪었다. 압수수색->정간조치 여러 차례 + 경영진(친일파)로부터 압박을 당해도 조선일보내 말단기자들은 계속해서 이런식의 사회주의 성향 + 항일 논조로 일관해왔다. 결국 송병준은 1924년 9월에 경영을 포기하면서 판권을 넘기고, 독립운동가 신석우가 인수하게 된다.
  4. 대표적인 사례로 1925년 9월 8일자 조선일보 기자 신일용(이 사람은 20년대 서울청년회 계열에서 활동한 공산주의자였다. 해방 후 우익계열에서 활동)이 '조선과 노국과의 정치적 관계'라는 사설에서 '소련의 힘을 빌려 조선독립을 쟁취하자!'라는 굉장히 과격한 사설을 실어, 총독부 당국에서 검열에 걸려 조선일보가 1개월간 정간, 윤전기까지 압수당한 사건이 있었다.#(해당 기사는 검열받아 삭제됨) 이를 '신일용 필화 사건'이라 불리는데, 윤전기를 쥔 총독부는 진보적인 신문기자들을 해고시키지 않으면 신문을 내지 못하게 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조선총독부의 진보적인 신문기자들에 대한 해고압력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선 것은 조선일보내 보수적인 민족주의 성향의 기자들이었다. 그 정도로 이념에 구애받지 않았던게 당시 조선일보였다.
  5. 항일지 면모를 확실히 보였던 단적인 특종 보도 한가지 사례를 들자면, 일본 경찰이 '조선인 28명을 학살'한 사건을 심층취재, 대서특필로 다뤄 당시로서는 매우 용기있는 언론으로서의 사명을 지닌 개념충만한 보도들을 쏟아내곤 했었을 정도였다. 1924년 9월 27일자 '渭原학살사건 현장 답사 실기. 朝不慮夕하는 국경 주민의 생명 暮夜無知中 何者의 소위인지, 1촌 6호의 전멸 극형끝에 참화/燒死한 28명/귀곡성 楸推한 초토의 폐허/정적이라고는 '지가다비'자리/방관하는 사법당국' - #
  6. 당시 회원 수도 엄청났는데 약 3만 8천여명~4만여명 사이였다고 한다.
  7. 1932년 '재만 조선인 동포를 위한 의연금' 가운데 일부 자금을 조선일보가 빼돌려 회사 운영비로 사용한 사건.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조선일보가 오랜기간동안 반일논조와 민족주의적인 논조를 보이면서 총독부로부터 수차례 정간과 탄압을 받으면서 경영난이 심했던것에서 비롯되었다.
  8. 방응모가 사장이 된 과정이 좀 복잡한데. 조선일보 측에 따르면, 1932년 2월에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이 '재만동포 자금 횡령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의해 구속당했고 조선일보는 당시 재정악화로 고리대금업자 임경래가 조선일보 발행권을 인수했다 한다. 그리고 임경래는 6월부터 부사장을 맡아 발행인과 편집인을 겸했는데, 여기서 조선일보 사원들의 반발이 극심해졌고 조선일보 사원들은 협의를 통해 1932년 7월에 막 출소한 여운형을 조선일보 사장직으로 영입하려 했었다고 한다. 당시 감옥에 수감중이었던 전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 역시 여운형을 조선일보 사장직 후임으로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외일보(당시의 중앙일보 -현재의 중앙일보가 아니다.-) 기자로 활동했던 홍증식이 먼저 선수를 쳐 여운형을 찾아가 중앙일보 사장으로 영입. 여운형은 1933년 2월에 중앙일보 사장직으로 취임한다. 선수뺏긴 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 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지역감정(당시 서북인과 기호인들 간 대립 등)으로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당시 '광산왕'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9. 다만, 처음부터 대놓고 친일적인 논조를 보이지는 않았다. 방응모 사장 체제 초창기에는 주로 '민족개량주의'적인 범주내에 문화,상업지 등 실력양성 위주로 주장하는 위주의 입장(이는 당시 부사장이었던 이광수의 영향으로 보인다.), 기사들 위주로 내보내면서 기존 20년대~30년대 초반 사회주의에 우호적인 입장들이 30년대 초중반 전후로 갑작스럽게 반공주의적인 색채를 띠다가 1936년에 느닷없이 친일 성향으로 확실히 띠게 된다.
  10. 이 기간동안 조선일보는 지면을 통해 동아일보 상대로 이전투구개싸움을 여러차례 벌였는데, 좋게 순화해서 '이전투구'라고 표현한 것이지 실상은 보기 참 흉하다 싶을 정도로 서로간 이권 놓고 쌈박질하고 공격질하고 다녔다.#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 공격#동아일보를 '광태난무'(狂態亂舞)하다고 공격##급기야는 자신의 신문사야말로 '조선민중의 공기'라고 자화자찬하고 경쟁사를 깎아내린다#, 그리고 이러한 이전투구개싸움는 훗날 80년대에 다시 재연된다.
  11. 1936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 각계인사의 년두사. 년두의 사. 우원조선 총독 #
  12. 이 시기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는 전국 지역지국 시찰에 나서고 다녔는데, 1937년 2월 원산의 순회강연에서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는 망언을 서슴지않아 참석자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한 시민은 극도로 분개하여 탁자를 마구 두드리고 일부 시민은 마침내 완력을 써서 호소했다고...- 출처 - <조선출판경찰월보> 제102호 <중앙시보> 中 #. 참고로 <조선출판경찰월보>는 조선총독부의 언론·출판·문화예술 부문 검열기구였던 경무국 도서과가 1928년 9월부터 매달 발간했던 자료로써 일제가 조선내 출판·간행물을 대상으로 검열, 삭제한 내용을 담고 있다.
  13. 개전 직후였던 1937년 7월 11일에 조선일보 사내 간부회의에서 매우 중요한 회의가 있었는데, 이 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 씨' 등으로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그러자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이에 반대입장을 나타냈지만. 사장 방응모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몇십만원의 손해를 보았을뿐만 아니라 3.1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후 조선일보의 지면은 철저히 '국민적 입장'으로 변했다는 조선총독부 당국으로부터 평가를 받았고, 조선일보 사원들 내부를 비롯해 안팎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러한 편집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14. 1937년 9월 12일자 조선일보 - #
  15. 조선일보 1938년 1월 18일자 사설. #
  16. http://srchdb1.chosun.com/pdf/i_archive/index.jsp?Y=1939&M=9&D=2&x=39&y=8 獨波戰 端開始
  17. 출처 - 조선총독부 보고서 - 언문신문통제안(諺文新聞統制案)-1939년 작성-
  18. 이 시점의 일제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이후로 전선에서 고착화되어가고 국제적으로도 고립되어가던 시기여서 물자부족등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래서 일제 총독부는 '같은 논조의 기관지가 여러개 있을 필요없다. 경성일보매일신보만으로도 충분하다!'이런 태도를 보인것.
  19.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는 조선일보,동아일보가 '자발적'으로 폐간했다고 밝히고 있다.#
  20. 월간조선의 전신.
  21. 조선일보 1946년 10월 4일자 - #
  22. 당시 조선일보는 한국독립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입장을 가져왔었는데. 당시 한독당은 '충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해왔었다. 반탁,미소공위 반대와 같이 입장 나타내고 같이 활동했던 이승만과 다른점이 바로 이 부분. 이승만이 주장해왔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안' 주장과는 이 부분에서 크게 갈렸다.
  23. 이 시기를 전후로 조선일보는 김구와 결별하게 된다.
  24. 제1공화국 당시 신문을 놓고 보자면, 친정부 어용기관지 서울신문, 자유신문 등이었고, 친야당(민주당) 기관지로는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이었다. 이 가운데 조선일보가 정부에 가장 날카롭게 보도를 많이 했었다고... 어디까지나 1948년~1950년 즉 6.25 전까지 한정. 50년대 중반 무렵에는 경향신문이 이쪽에서 가장 날카로웠고50년대 말에 경향신문은 여적필화 사건으로 정간당하는 탄압 받기도 했지만..., 50년대 말에는 동아일보가 날카로웠고...
  25. 오늘날 조선일보가 보이는 친일파 문제에 관한 입장과는 확연하게 정 반대를 보일 정도다.
  26. 다만,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이 시기 반민특위 와해공작 중 하나였던 국회 프락치 사건 등에 관해서는 깊이있게 취재한 기사나 문제점과 의문을 제기하는 논설을 전혀 보도하지 않아 다소 좀 밋밋한면이 있긴 했다.
  27. 1948년 10월 28일자 사설 '叛亂의 속보를 듣고 '- #
  28. 여순사건을 일으킨 14연대 반란군들이 여수와 순천에서 민간인 동조자들과 함께 주요한 관청들을 습격해서 경찰관들을 비롯한 우익계 인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살육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그들이 벌인 행태에 대해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여순사건 이래 60년이 넘게 많은 현대사 연구가들이 조사하고 연구해서 발표한 자료들이나 당시 외국인 기자의 보도를 보면 반란군과 동조자들의 살육이나 '인민재판'에 비해 진압군의 '학살'과 인권유린도 그만큼 가혹했었다.(특히 김종원의 잔학한 진압과 학살은 특히 가혹했다. 사상이 의심되기만 해도 일본도로 죽인다거나...얼마나 심했으면 이승만 정부도 그를 직위해제했다.)
  29. 조선일보가 발간한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라는 책에 따르면, "전쟁이 터진 25일 조선일보 사원들은 사장실에 모였다. 전방에 나갔다 온 기자들은 '전황이 매우 불리하다'며 비관적인 전망을 보고했다"고 전했다.
  30. 이는 조선일보뿐만 아니라 동아일보,경향신문,서울신문,자유신문. 국내 언론매체들이 다 그렇게 오보를 저질렀다. 이는 한국 언론사에 있어 매우 커다란 오점.
  31. 조선일보 1960년 6월 23일자 - #
  32. 조선일보 1960년 7월 10일자 - #
  33. 조선일보 1961년 5월 6일 - #
  34.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 당시 그 매일신문 주필 겸 편집부장이었던 최석채다.
  35. 조선일보 1966년 1월 19일자 사설 - #
  36. 조선일보 1966년 2월 18일자 사설- #
  37. 이 시기 조선일보는 경쟁사 동아일보와 선의의 경쟁을 했을정도로 개념찼는데, 심지어 동아일보 주필이었던 천관우가 조선일보 신년사에 직접 칼럼 기고하고, 덕담을 여러차례 나누고 그랬다고...
  38. 조선일보의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조선일보 內 주필 최석채(최석채 주필은 1971년에 물러가지만, 69년 3선 개헌무렵부터 사내에서 그의 입지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가 물러난 것과 더불어 논설, 사설에 핵심역할했던 리영희 기자가 정부에 대한 강한 비판 사설들 연달아 기고하면서 정보당국으로부터 압력(이 시기동안 리영희 조선일보 기자는 정보당국으로부터 여러차례 협박과 회유를 받는가하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기까지 했다.)받아 강제해직 당한 것이 가장 컸다.(특히 베트남 전쟁 파병에 대한 비판 사설 글을 여러차례 기고했던것이 결정타.) 리영희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다 강제해직 당한 이후, 그동안 박정희가 밀어붙혔던 '언론윤리위법'에 저항하던 기자들이 리영희의 강제해직 전후로 결국 무너져 '친 박정희', 반민주주의적인 논조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 전후로 조선일보 주필은 선우휘-김대중 등으로 이어지는 라인들이 주류로 자리잡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자리잡고 있다.
  39. 3선 개헌을 전후로 조선일보는 정권으로부터 엄청난 특혜를 받기 시작한다. 조선일보사는 정권의 허가를 얻어내 1969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최초의 민간차관으로 일본의 이토추상사(세지마 류조가 대표로 있던 회사)로부터 거금 400만 달러를 연리 6%에 들여왔다. 이 돈으로 조선일보는 '코리아나 호텔'을 지었다.
  40. 이 당시 조선일보는 4.19 혁명때 참여하다 후에 변절한 사람들 동원해가면서 '10월 유신은 4·19정신의 계승'이라는 성명서망언를 크게 보도했다.
  41. 조선일보 1972년 10월 18일자 사설 '평화통일을 위한 신체제' - #
  42. 다만, 75년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자유언론투쟁'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 일부 뜻있는 기자들이 '조선자유언론투쟁위원회'(약칭 조선투위)를 결성해 유신 반대, 언론자유 투쟁하다가 강제해직된 경우가 있었다. 이때 조선일보 발행인 겸 대표이사이던 故 방우영과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가 조선투위 기자들 상대로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여담으로 이때 조선투위 결성해 해직된 기자가 32명.. 반면, 경쟁사이던 동아일보는 무려 160명이나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강제해직되었다. 이 강제해직 당한 '조선투위' 해직기자들은 대부분 출판업계(청람출판사, 두레 출판등이 조선투위 해직기자들이 만든 출판사로 대표적), 번역하는 일에 종사 하다가 훗날 1980년대 후반에 '동아투위' 해직기자들과 같이 한겨레신문을 창간한다.
  43. 李熺性계엄사령관의 담화문 # - 이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담화문을 통해 "군의 입장이 전 국민의 공감과 지지를 받아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44. 격동의 70년대를 보낸다. 허기진 과객아닌 생존의 책임자로서 # - 이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안보를 앞세우며 전두환의 군사반란세력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보였다. 그 의미는 행간에서 더욱 강조되어 전두환에 대한 절대적 지지이자 '아부'의 수준이었다.
  45. "군부는 암투없다" 국방부대변인 밝혀 # - 조선일보는 국방부 대변인의 외신기자 회견내용을 실으면서 전두환의 군사반란 세력에 대한 찬사를 기회가 있을때마다 드러냈다.
  46. 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취재해 '폭동','난동'이라고 매도했던 조선일보 취재 기자가 바로 오랜기간동안 조선일보에서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는 김대중(언론인)이었다. 오늘날 광주 민주화운동을 ' 광주폭동'으로 주장하는 자들 상당수가 이시기 독재정권의 조종을 받은 보도에 그대로 받아들인 경우들이 대부분.
  47. 이 지면은 3면에 대서특필로 실렸다. 그런데, 오늘날 조선일보는 자신들도 이게 창피하다는것을 느끼고 있었는지 조선일보 아카이브 서비스3면이 없고 1면, 2면에 이어 바로 4면이 나온다. 이 문제의 '3면'은 조선일보 아카이브 서비스에도 국립중앙도서관 아카이브 신문 열람실에도 없다. 국회도서관에서만 문제의 지면을 찾아 볼 수 있다.
  48. 전두환 정권을 전후로 조선일보는 급격히 판매부수, 회사 규모가 매우 방대하게 비중이 늘어나 엄청난 이익을 받았다.(조선일보 기자였던 허문도가 5공 정권의 실세로써 엄청나게 권한을 휘두르고 다녔음을 생각해보자.)
  49. 1987년 6월 12일 - 사설 ' 자 이제는…"6.10" 다음에 기대한다.'#
  50. 대표적으로 분신정국 시기 일관되게 보여준 논조.
  51. #
  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