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병진

50 방송대상 코미디 부문 최우수상 [1]
주병진
(1990)
이경규
(1991)
width=100%
이름 주병진 (朱炳進, Choo Byeong-jin)
출생 1959년 3월 1일 (돼지띠) / 서울특별시
본관 ?
국적 대한민국
신체 175cm, 77kg, A형
가족 2남 1녀 중 둘째
학력 중앙대학교 연극학과, 경영학과 (학사)
직업 코미디언, MC, 기업인
데뷔 1977년 MBC 개그콘테스트
종교 무종교

1 개요

개그계의 신사.[2]
예능 대제.[3]

대한민국코미디언, MC, 사업가

개그맨 출신으로 톱MC의 자리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메인MC를 시작으로 주병진쇼 등 주로 토크쇼를 맡아 진행해서 토크 황제로도 통한다. 그 이전까지 MC의 역할은 배우나 가수가 맡아 대본에 따라 멘트를 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주병진은 방송 전반에 영향을 끼치며 재치와 순발력으로 프로그램을 이끌어나갔다.

1980년 초,중반부터 이미 주병진은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다만 희극인이 안 망가질려고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와 연말 시상식에서 시청자 들에게 상당히 무례한 태도를 보인적이 여러차례 있어서[4] 이미 그 당시부터 상당수의 안티를 가지고 있었다. 속옷사업으로 성공한 사업가가 되기도 했으나,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불명예스럽게 이름이 다시 거론되었고, 무죄판결을 받은 뒤 방송복귀를 시도했으나 처참하게 실패했다.

2 연예계 데뷔 및 전성기

DJ 이종환이 부업으로 운영하던 카페 '셸부르'의 사회자를 거쳐 1977년 TBC 전속 코미디언으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

원래 어릴 때의 꿈은 가수여서 셸부르의 가수를 뽑는 콘테스트에 출전했는데, 노래 가사를 까먹는 바람에 그냥 내려오기는 뻘쭘해서 시간을 때우려고 생각나는 대로 웃기는 말을 했단다. 그런데 당시 심사를 하던 이종환이 그의 웃기는 말을 듣고서는 사회자의 자질인 순발력이 있다고 평가해서 DJ로 특채했다고.

이 후 TBC가 언론통폐합으로 KBS에 통폐합된 뒤 MBC로 옮기면서 포텐셜을 유감없이 터뜨렸는데, 당시 서세원이 MC를 맡던 MBC '영 일레븐'에 밀려 시망 위기에 몰린 '젊음의 행진' MC를 맡아 시청률을 역전시킨 것을 시작으로 두시의 데이트의 DJ,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메인 MC를 맡아 노사연, 이경규.김흥국 등 막강 패널을 키워내며, MBC 예능의 대표 흥행 보증수표로 불리운다. 주병진은 청춘만만세(청춘행진곡 - 현재는 폐지된 프로그램), 일요일밤의 대행진(일요일 일요일 밤에 - 현재의 우리들의 일밤) 등 MBC에서 하는 모든 코메디 프로그램에서 그야말로 주역이었고 그가 없으면 프로그램 진행이 안될 정도였다. MBC에서는 코메디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 주병진을 중심으로 김병조, 이용식, 이주일 등을 내세워서 운영했다. 이경규김정렬은 주병진 옆에 끼워서 출연시키다시피 했을 정도였다. 당시의 주류였던 일본식 슬랩스틱 코미디 노선을 탈피해서 영미식 스탠드업 코미디를 한국형으로 적절히 바꾼 신사형 개그로 성공한 케이스. 그래서 별명도 개그계의 신사. 일밤 오프닝때 양 손을 살짝 들고 '여러분의 시선을 모아, 모아, 모아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유행어가 유명했다.

그러던 1991년 주병진은 돌연 연예계 은퇴를 선언한다. 그가 연예계 은퇴 선언을 한지 1달만에 SBS가 개국하면서 MBC 코미디언 들의 대부분을 데리고 가버리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담당 PD가 주병진이 당시 진행하던 라디오쇼에 찾아가서 은퇴 시기를 늦춰달라며 무릎 꿇고 통사정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희극인들은 악극단 내지 미8군 쇼 출신의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고 방송국 PD들은 학벌 좋은 고학력자가 많던 시절이라 PD들이 희극인들을 엄청 낮춰서 보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당시 주병진의 인기가 정말 대단했음을 말해준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의 이주일, 영구야 영구야의 심형래 등과 달리 점잖은 모습으로 웃음을 주는 주병진의 MC형 진행 방식은 주병진 은퇴 후 정재환으로 이어진다. 다만, MBC가 주병진의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밀어준 정재환은 주병진의 신사답고 지적인 이미지는 제대로 계승했으나 주병진의 개그 센스만큼은 따라가지 못했다.

3 속옷 사업

은퇴 이후 내의 회사 ‘좋은 사람들’을 설립한다. 본인이 동경하던 배우인 제임스 딘을 주병진 자신이 경영하던 카페이름도 제임스 딘으로 지었었고, 자기 회사의 내의 브랜드도 제임스 딘으로 발매했다.

본인의 책에 따르면, 자기가 카페를 열 당시에 정부에서 외래어로 된 상호는 등록을 안해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청에 '쟤 임씨든?'(…)이라는 이름으로 서류를 냈다고 한다.[5] 문제는 상표법 제7조1항2호 등 등록 거부 규정의 해석에 있었다. 당시 특허청에서는 실존 인물의 이름을 관련 없는 사람이 그대로 상표로 사용하는 것이 이에 위배되는 행동이라고 판단한 것. 법정 공방은 대법원까지 가서 결국 주병진씨의 승리로 끝이 났고, 인명 상표등록 판례(96후2173)로 남게 되었다. 나중에 제임스 딘의 이름을 썼다고 미국의 유족으로부터 소송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주병진 측이 승소하였다. 이는 국내에 드문 퍼블리시티권 판례로 남아 있다. 분쟁 과정에서 반쯤 보험 목적으로 만든 브랜드인 보디가드 역시 성공적인 속옷 브랜드가 되었다.

자금이 넉넉치 않은 중소기업으로 출발했기에 개그맨 출신다운 재미있는 마케팅으로 회사를 키웠다. 매일 손톱만한 광고를 신문에 짱박아서 마치 월리를 찾아라와 비슷한 유행을 만드는가 하면 지하철 내부 광고에 주병진식 개그가 실린 광고를 부착, 코믹 컨셉 카피의 광고로도 입소문을 탔다. 당시 주병진씨가 기획한 지하철 내부 광고는, 해당 광고를 보느라 광고 앞 자리가 붐빌 정도였다. 다음에는 어떤 기발한 카피를 내세워 광고가 나올까 기다릴 정도. 요즘이라면 다들 각자의 스마트폰을 보느라 눈이 바쁘겠지만 디지털 기기가 없던 당시에는 주병진이 기획한 광고 속 카피들이 지루한 출퇴근 시간 지하철 속 승객들의 활력소가 되었다. 이를 통해 '좋은 사람들'은 내의 시장의 강자로 성장했다.

좋은 사람들의 마케팅 중 가장 화제를 불러모은 것은 주병진 본인의 누드광고 사건이다. 정장을 입은 모습으로 신문광고에 출연, 1995년 2월 21일에 옷을 벗겠다고 공언하였다. 21일자 신문에는 약속대로 겉옷을 벗고 속옷차림의 모습으로 광고에 출연하였는데 한술 더 떠 24일에는 속옷까지 모두 벗겠다고 공언하였다.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인 시대였던만큼 파장이 엄청났다. 좋은 사람들 사무실은 항의전화로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예정된 24일이 되자 약속대로 올누드 차림의 신문광고가 나왔는데 그것은 바로 돌사진이었다. 28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일부 소비자들은 우롱당한 느낌이 든다며 항의전화를 걸기도 했지만 대부분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광고였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보수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주병진이 속옷차림의 광고가 나온 직후 더 이상 벗을 옷이 하나(?)밖에 남지 않자 알 수 없는 단체들에서 주병진에게 협박 전화나 편지를 많이 보냈다고 한다. 회사에 전화가 와서 주병진이 받으면 "당신 요새 이상한(?) 거 하던데 위에서 지켜보고 있어. 조심하시오."라는 식의 말만 하고 끊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정부기관측에서 경계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광고는 베네통의 광고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현재까지도 성공적인 티져 광고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후 황금어장 2011년 7월 13일자 방송에서 이 사진은 본인의 사진이 아니라 부하직원의 돌사진이라고 밝혔다. 이유는 본의의 누드 돌사진이 없어서라고.. 물론 당시 사람들은 그게 주병진의 돌사진인 줄 알았다고 한다. 허위광고 물러가라 물러가라 이제와서 뭐 어쩔 거야?

사실 주병진이 기획한 이 광고는, 1994년 프랑스 어느 선거에서 모 정당이 사용한 홍보 기법을 발빠르게 도입한 것으로, 미모의 여성 모델이 날짜를 정해놓고 한 번에 옷 하나씩 벗어서 화제를 모았던 정치 홍보 이벤트였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해진 날짜에 내보낸 광고에서 해당 여성모델이 가슴(!)을 시원하게 보여줘서 관심을 모았었다. 이후 다음 날짜에 전신 누드를 공약, 세계적인 관심을 끌어놓곤 여성모델의 '뒷모습' 전라만 보여줘서 반전을 가져왔던 것인데 노출에 관대한 유럽이라 가능했던 이 독특한 광고를 주병진이 한국식으로 재치있게 변용해서 내보냈던 것.

참고로 베네통식 뒷모습 누드 광고를 선보였던 것은 고 최동원씨가 현역 은퇴 후 '안티구아'란 이름의 스포츠 의류 브랜드를 국내에 런칭하면서 기획했던 광고로,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 그리고 백인 아이가 마치 한 가족처럼 서 있는 뒷모습을 지면광고로 내보내서 이목을 끌었었다. 하지만 이 광고는, 누드 광고는 물론이요 흑인남성의 성적매력을 터부시하던 국내 정서에 맞지 않았던 데다가 '안티구아'란 브랜드 자체가 국내에선 듣보잡이라서 반짝 화제에 그치고 말았고 베네통의 파격적인 광고를 흉내낸 국내 광고가 있었다더라 정도의 기억만 남기고 '안티구아'란 제품은 사라졌다. 최동원이 주도한 광고였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었다.

아무튼 주병진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광고에 힘입어 비록 후발주자였지만 활로를 개척, 당시 내의업계의 양대 강자였던 이라 쓰고 아저씨 속옷이라 말하는 쌍방울태창이 부도가 난 것에 대한 반사이익과 '패션 내의'라는 컨셉으로 소비자들에게 어필한다. 그 결과[6] 지금은 코스닥에서도 알아주는 저평가 우량주 회사로 성장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 사업가로서의 성공이라고 말해온 그였기에 연예계 복귀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변의 관측이 많았다. 물론 MBC 코미디 프로 위기론이 나올때마다 복귀설이 있지만 본인이 거부했었다.

창업자로서 좋은 사람들의 경영자이자 최대주주였던 그는 2008년 자신의 지분과 경영권을 매각하고 속옷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 다만 사장과 경영권만 바뀐거지 회사는 여전히 잘 굴러간다. 2013년에는 유명 유아복 브랜드였던 베비라를 인수하기도 했다.

4 요거트 아이스크림 사업

3년 만에 다시 사업가로 복귀하여 2011년 스노우 스푼이라는 요거트 아이스크림 전문 브랜드를 창업하였다. 홍대 앞에 있는 스노우 스푼의 사장이 바로 주병진이다. 가게는 매우 깨끗한 편이었으나 현재는 외부에 비해 내부는 낡은 느낌과 청소가 제대로 안되어있는 모습이 잦다.. 아이스크림및 토핑을 자유롭게 골라 먹는 방식. 북미나 일본쪽에선 이미 유명했던 방식이었다. 가끔 밤에 가면 혼자 창가에 앉아서 유유히 커피를 마시고 있는 주병진을 직접 볼 수 있다. 근데 좀 비싼 면이 없지 않아 1g당 25원씩 받는데, 이거 의외로 가장 작은 컵에 가득 담으면 5천원은 훌쩍 넘어버린다.

5 2011년 연예계 복귀와 좌절

2011년 7월 6일[7]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10년 만에 방송에 출연하는 것이어서 사람들이 많은 기대를 하였고, 병풍 올밴방송분량을 책임지며 녹슬지 않은 입담을 보여주었다.

MBC는 그를 모시기 위해 물밑 접촉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공석을 만들기 위해 FM4U 두시의 데이트윤도현에게 DJ자리에 관한 아무런 사전교감없이 일방적으로 시간대 변경을 통보하는 병크를 터트린다. 무례한 조치에 반발한 윤도현은 9월 27일 DJ를 그만둔다고 선언하였고, 그러고 나서 MBC가 주병진더러 그 자리에 앉으라고 하니 부담을 느낀 주병진은 당연히 고사하였고 9월 29일 잠적하였다. 연예기사와 뉴스댓글란에서는 후배를 밀어내는 모양새를 연출한 MBC에게 비판이 집중되었다.#

속옷 사업에서 손을 뗀 이후 무릎팍 후속이나 1박 2일 후속으로 들어간다는 루머들도 꾸준히 있었으나 모두 사실이 아닌 것들로 판명되었다. 2011년 12월 1일부터 매주 목요일 밤 11시에 자신의 이름을 건 주병진 토크 콘서트로 연예계 복귀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결국 토크 콘서트는 '주병진만 모시면 된다'는 일념으로 급히 기획되다보니, 프로그램 컨셉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매회 컨셉이 바뀌게 되고, 게스트 섭외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서 MC인 주병진 개인의 인맥을 총동원하는 수준이었다.
2010~12년 김재철 사장 집권 하의 MBC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결국 몇 달 못 가 조기종영. 프로그램 컨셉이 안 잡히고 주병진이 최신 방송 트렌드에 적응하지 못하는 중이라고는 하지만, SBS 런닝맨의 성공사례처럼 당장 실적에 연연하지 말고 한 번 느긋이 믿어줬으면 하는 시청자들의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 결국 이 이후 주병진은 다시 모든 방송을 접게 되었고, 본인의 이미지에 오히려 악영향만 미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후 2014년에 tvN의 전 방송이었던 근대가요사 방자전으로 다시 컴백했었다.

2015년 KBS 제2라디오의 개편으로 오전 9시 5분부터 오전 11시까지 방송하는 "매일 그대와"의 진행을 성악가 김동규로부터 이어받아 진행했다. 2016년 1월 17일을 마지막으로 유열에게 넘기고 하차.

2015년 12월에는 채널A개밥 주는 남자웰시 코기 대, 중, 소와 함께 출연 중이다. 웰시 코기 종의 특성상 털빠짐 때문에 돌겠다고.....하지만 세 마리 덕분에 본인의 인지도도 조금씩 올라가고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지도.

6 사건사고

흑역사를 쓰라고 하면 A4 용지 1장을 꽉 채우고도 남을 인물. 강남 모 호텔에서 자신에게 치근거리는 꽃뱀 강민지를 떼어내려고 1억이 든 돈가방을 줬다가 꽃뱀 떼어내자고 1억이나?! 성폭행 누명을 쓰고서 2년 간 재판을 받은 끝에 무죄 판결을 받은 안습한 사연은 지금도 네이버에서 주병진을 검색할 시 연관 검색어로 뜰 정도이다. 이 사연은 2003년에 MBC의 <실화극장 죄와벌>이라는 극화 드라마에서 장장 2부작에 걸쳐 방영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70년대 후반 연예계를 뒤 흔들었던 대마초 밀반입 사건, 음주 측정 거부사건, 필리핀 원정도박 사건 등의 혐의로 여러 차례 콩밥을 드셨다.

특히 위의 성폭행 사건은 찌라시의 단골소재가 되었다. 일례로 주병진 미스터리…강간? 화간?. 당시 검찰은 주병진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1심의 재판장이 성범죄에 대해서는 '유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한다고 반농담 삼아 얘기가 나올 정도로 성범죄에 매우 엄격한 법관이었고 결국 집행유예 4년 선고를 받았다. 공판 때는 성폭행 혐의를 부인하기도 했다. '고소인에게 돈을 줬다'라는 얘기가 잡지에서 다뤄진 적이 있는데, 정확히는 1심 판결 전에 변호사가 고소인과 합의를 해 고소를 취소하게 하고 합의금으로 돈을 준 것.[8] 원래 강간치상은 친고죄가 아니기 때문에 고소를 취소하면 양형 정도에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변호사가 쓸데없는 짓 한 거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런데 이후 사건은 급반전. 합의금의 분배를 둘러싸고 고소인 측에서 분열이 일어났고, 결국 증인이 고소인의 상처는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폭로했다. 그리고 진실(상처 조작)이 밝혀지자 항소를 했고, 항소심서 무죄를 받았다. 계획대로

참고로 이 때 후배 코미디언들인 이경실, 박미선, 이성미 등은 주병진의 누명을 벗겨주려고 이 사건의 목격자를 찾아내기 위해 사방 팔방을 돌아다녔다. 특히 이들 중에는 당시 임신한 상태인 코미디언도 있었다.

엄격히 말하면 꽃뱀 사건은 '누명'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대법원의 판결은 고등법원과 달리 '무죄'가 아닌 공소기각 판결이었기 때문이다. 즉 강간을 했든 안 했든 공소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으므로(친고죄인 강간죄의 특성상 고소를 취소했으면 처벌을 할 수 없다) 그에 대한 판단 자체를 보류하고 공소를 기각한 것이다. 따라서 강간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적어도 법적으로는 불명확하게 남게 되었다. 고등법원에서 선고된 무죄는 강간에 대한 것이 아닌 강간치상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법적 관계에 무지한 일반인의 눈으로 볼 때 강간죄 자체가 무죄라는 오해를 사기 쉽게 되어 있다. 이는 친고죄가 아닌 강간치상이 강간죄로 바뀌면서 무죄가 공소기각으로 되는 드문 변화를 거쳤기 때문에, 형사소송법을 공부하다 보면 곁다리 이야기로 가끔 나온다. 안습.

그런데 주병진의 상대녀가 의사에게 가서 진단서 끊을 정도의 상처는 없다고 하자 친구에게 부탁해서 상처를 냈다던가, 돈을 더 받으려다가 가짜라는게 들통나자 강민지는 허위고소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으나 미국으로 도피했다는 정황을 보아 합의금을 내줬지만, 강제로 한 건 아니다.(…) 강민지 검거 소식이 없는 걸로 보아서 아직 못 잡은 듯.

나중에 언론을 상대로 일부 승소했다. 익명의 모 언론사는 주병진에게 배상하기도 했고, 액수는 무려 1억 9천만원.

이경규가 무서워한 선배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대학 시절 선배인 강석우,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코미디언 선배이자 자신을 보조 MC로 데리고 있던 메인 MC 주병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주병진이 은퇴함으로서 병풍이나 쩌리... 소리를 들었던 이경규가 메인으로 성장했으니 전화위복인 셈. 주로 주병진이 일방적으로 이경규를 골탕먹이고 억누르는 역할이었는데 개그 스타일이 영미식 스탠드 코메디의 형태를 띄던 주병진이 이경규의 재능을 인정하여 이경규의 코미디 스타일(콩트가 가미된 일본식 만담)에 맞춰주면서 함께 방송에 출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둘의 메인 프로그램이었던 일밤에서 주병진이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떠나자 이경규가 전면에 나서게 되었는데 앞 사람의 후광에 가려서 묻혔던 사람이 결국 전임자의 그림자에서 못 벗어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본다면 여기서 이경규 자신도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엔 평범했던 이름이 요즘엔 인터넷 비속어 중 하나로 사용되는 바람에 몇몇 사이트에서는 주병♡으로 필터링되기도 하는 안습함도.

뭐 90년대 만화 짬보람보에서 주병신(....)이란 이름으로 나오기도 했다. 이 만화에서 변진섭이 변변섭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주병진은...

7 기타

탤런트 윤제문이 주병진, 특히 현재의 모습을 거의 빼다박은듯이 닮았다.그런데 윤제문은 상습적으로 음주운전흑역사가 있다
  1. 1995년부터 2000년까지는 MBC 코미디대상, 2001년부터 MBC 방송연예대상으로 바뀌었다.
  2. 전성기 시절 그를 대표하는 수식어였다. 우스꽝스런 분장과 무조건 망가지면서 웃기던 정통 코미디언들과 다르게 깔끔한 수트차림과 재치있는 입담, 좋은 매너들을 통해 현재 버라이어티 예능 그중에서도 토크쇼 메인진행자의 프로토타입을 제시한 인물이다.
  3. 주병진은 개그맨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톱 MC자리까지 거머쥔 연예인이었고 그동안 비주류였던 '콩트에 큰 영향을 받지않은 예능 버라이어티' 를 개척 및 발전시켜서 한국 코미디의 주류로 바꾼 2명중 1명이다. (다른 한명은 알다시피 이경규이다.) 물론 주병진 이전에도 곽규석, 김병조와 같은 개그맨 출신 MC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극히 소수였으며 이들의 코미디 스타일은 정통 코미디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더욱이 이들보다는 이주일, 심형래, 최양락 같은 콩트 코미디언들의 인기가 훨씬 높았다.
  4. 예를 들어 시상식 석상에서 거의 대부분 정장을 하고 얌전히 앉아있는 가운데 평상 캐주얼차림으로 다리를 꼬고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던 모습을 방송사 카메라가 클로즈업해 보여주기도 했고, 시상식 소감 얘기할때도 '아 상받았네요 기쁩니다 됐네요' 하는 식으로 건방지고 성의없는 소감을 얘기하면서 인사도 안하고 들어갔던 일이 있었다. 당시 방송사와 무슨 트러블이 있어서 시상식을 망쳐버리려고 일부러 그랬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자세한 내막은 알려진 것이 없다.
  5. 옆집 ‘알카포네’는 ‘알고가보네’…
  6. 사업초기 유통망 확보가 어려워서 업계에 발붙이기 힘들 정도로 텃세가 심했는데 도매상들을 찾아가서 "당신네들 한달수입 사장님 업소에서 한탕 뛰면 버는돈이다. 재고 걱정말고 사달라"고 말해서 거래를 뚫었을정도였다고 한다.
  7. 2회분으로 13일까지 방영했었다.
  8.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덧붙이자면 친고죄에서 돈을 받고 고소를 취소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심지어 친고죄가 아니더라도 양형을 고려해 피해자와 합의하는 일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