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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 베트남(월남)의 관계.
Quan hệ Việt - Hàn (關係越韓 관계월한)
목차
1 현대 이전
고려 시대에는 리 왕조(李朝, 1009년 – 1225년) 6대 황제인 영종의 아들 이용상(李龍祥)이 고려로 망명해 와서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된것이 가장 유명하다. 또한 리 왕조 인종의 셋째 아들이자 5대 황제 신종 이양환의 아우인 이양혼(李陽焜)이 1127년 고려로 망명하여 정선 이씨의 시조가 된 바 있다. 그 이외에도 유학자 막딘찌(막정지, 莫挺之)가 원나라에서 사귄 고려 사신의 초청을 받고 고려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 사람은 베트남과 원나라 두 국가의 과거시험에 합격한 수재였다. 원나라에서 시와 필담으로 고려 사신들과 교류하면서 친해졌다.
무신정권 이의민의 조상이 베트남계라고한다
조선의 경우 베트남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는 없었지만 명나라, 청나라로 간 사신들과 역시 중국에 온 베트남 사신들이 서로 교류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이수광과 후 레 왕조(後 黎朝, 1428년 - 1788년) 사신인 풍칵코안(풍극관 - 馮克寬)이 서로 시와 필담을 주고 받으며 유교 경전과 서로의 역사와 풍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것. 풍칵코안은 베트남으로 돌아가 이수광의 한시를 베트남에 소개했으며 이수광 역시 베트남 사신들과 나눈 필담을 책으로 엮어 냈는데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 베트남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을 가지게 해 주었다. 이항복이 쓴 글을 보면 한나라의 베트남 지배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쯩짝(徵側) 쯩니(徵貳)의 이야기도 조선에 알려져 있던듯하다. 조선 사신들은 중국에 온 외국 사신들 중 베트남과 가장 많은 교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의 베트남 침공을 두고 태종 실록에 명나라를 경계하는 내용과 세종 실록에 독립한 베트남을 보고 명나라 황제를 까는 내용이 나온다.
파일:Attachment/한월관계/testbeta.jpg
중국에 온 베트남 사신들의 모습을 조선 사신이 그린 그림.
1687년에는 24명의 조선인들이 제주도에서 풍랑을 만나 베트남까지 표류했다가 귀국하기도 했다. 베트남 측에서는 이들을 돌려보내면서 외교 문서들을 동봉해서 보냈으나 조선 측에서는 크게 관심을 안가진듯 하다(...).
여담으로, 정조 때 베이징에서 얼어 죽은 베트남 사신에 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1]
조선과 베트남 사이에 공식적인 외교 관계는 없었지만 중국을 통한 간접적인 교류는 있었으며 베트남의 정세는 꽤 신속하게 조선 조정에 보고되곤 했다. 18세기 후반 베트남을 휩쓴 농민 반란인 떠이썬당의 난과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 소식이 들려올때마다 조선 조정에서는 꽤 심란해 했다.
개화기때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는 베트남을 보면서 일종의 반면교시로 삼았다. 베트남의 몰락 과정을 적은 '월남망국사'가 국내에 출판되기도 했다.결국 조선도 사이좋게 식민지로 전락한게 함정
2 베트남 공화국 시기의 역사
대한민국과는 구(舊) 남베트남 시절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으며, 대한민국은 미국과 함께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었고 상당한 공을 세운 바 있기 때문에 적화통일이 된 현재의 베트남 정권 입장에서는 결코 달갑지 않은 역사적 악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달리 먼나라인지라 한월수교 이후를 기점으로 "어제의 적은 우리의 친구"로 인식이 바뀌었지만, 지금은 국제결혼 문제 등 다른 차원에서 약간의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3 통일 이후의 역사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게 참패하고 1975년 남베트남 공화국의 수립과 1976년 베트남의 통일을 계기로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 그러다가 1988년 서울에서 열렸던 올림픽대회 때 통일 베트남 선수단이 서울에 파견되었던 것을 계기로 양국은 1992년에 공식 외교관계를 맺게 되어 경제적, 문화적, 인적으로도 교류가 활발해지게 되었고, 수위권의 무역대상국이 되었다.
퓨 리서치 센터의 2015년도 조사에 의하면 베트남인의 82%가 한국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조사되었다. 이는 조사 대상국(아시아 9개국)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
3.1 베트남 전쟁 관련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8월 방한 중 베트남 주석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사과했는데, 이에 대해 국내에서는 수많은 베트남전 파병 한국인들을 무시하는 처사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1995년 베트남 통일 20주년 행사 때 MBC가 인터뷰한 베트남군 수뇌부의 한 장군은 "한국이 타의에 의해 참전한 것을 알고 있다. 과거는 잊고 미래를 위해 협력하면 된다."라는 발언을 했다. #. 즉, 한국이 원해서 스스로 참전한게 아니라 미국이 배후에 있으므로 굳이 한국에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 뭐 사실 저 때 이미 미국과도 수교한데다 21세기 들어서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밀월 관계에까지 접어든 베트남이 굳이 한국에 적대감을 가질 일이 없긴 하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베트남이 한국을 보는 시각은 한국이 중국을 보는 시각과 비슷하지 않을까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한국인들은 6.25 당시의 중국을 대한민국을 점령하러 온 세력보다는 북한측 참전국으로 보는 편이고, 따라서 중국에 대하여 일본보다는 훨씬 적은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비슷하게, 베트남도 한국을 냉전하에서의 참전국으로 보아서, 한국에 대하여 프랑스 식민제국이나 미국에 대하여 갖고 있는 정도의 적개심은 없을 것이라는 것. 베트남이 공식 성명 등에서 보이는 한국에 대한 태도 또한 한국이 중국에 대하여 보이는 태도와 비슷하게 보인다.
다만 베트남에 대학살을 일으켰다거나 혼혈을 임신시킬 목적으로 밥먹듯이 강간을 했다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한국군이 있지도 않은 독가스나 B-52 폭격기를 써서 학살을 했다고 주장하는 등 신뢰성은 밥 말아먹고 제대로 된 근거도 내놓지 않는 처지다. 게릴라전이라는 특성상 민간인 피해가 없었을 리는 없지만 한국군=침략군 주장은 황당한 주장이다. 일본과 자주 비교되는데 일본은 엄밀히 강제적으로 한국을 지배하고, 한국인 대상으로 위안부나 강제 징용, 생체실험 등을 했지만 한국은 당시 최소 다수의 정부들이 인정한 [1] 월남 정부의 지원 요청의 파병을 한 것이고 월맹 영토로 올라간 적이 없다. 그리고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불법적으로 침범한 일본과는 엄밀히 다르다. 자세한 것은 베트남 전쟁/한국군 문서 참조.
한국의 경우 서로 총대를 겨눈 사실에 유감을 표했지만 김대중 정권의 사과 당시 나타난 야당의 사과 반대를 근거로 지속적으로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했다면 한월간에 큰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일본도 무라야마 담화나 간 담화로 사과를 했었으나 일부 극우 정치인들의 망언으로 아직까지도 사과를 요구받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하지만, 이걸 일본과 비교하는 건 말이 안된다. 일본은 강제로 한반도에 침략, 합병을 했고, 한국은 엄밀히 당시에 인정받았던 정부를 도와주기 위해 잠시 병사를 주둔한 것이다. 월남의 상황이 진정되면 철수했을 것이고 실제로 1973년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비록 1년도 안돼서 월맹이 위반했지만 철수했다. 그리고 월남전 자체가 딱히 누가 잘못했는지에 대해서 말이 많은 문제라 미국/월남이 잘못했는지, 아니면 월맹이 잘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그런 이치라면 미국이 대한민국을 도와준 것을 북한이나 중국에게(물론, 한국전쟁의 경우는 비교할 가치도 없이 명백한 북한의 도발이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과 한국의 참전을 비교하는 것도 똑같이 말도 안되는 것.) 사죄해야 한다.
3.2 일본과의 외교경쟁(...)
박근혜 대통령이 G20 이후 곧장 베트남으로 향했는데, 그 이전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이미 동남아 순회를 마치는 등 동남아 외교경쟁이 가열되는 분위기다. 일단 한국과 일본이 산업구조가 비슷한만큼 개도국인 베트남에 제시할 수 있는 패도 비슷비슷한지라(...) 한국의 대아세안 교역량이 날로 증대하는 만큼 아세안의 대표적인 지역강국 중 하나인 베트남과의 관계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1951년에 남베트남, 1973년 북베트남과 수교했고 통일 베트남과도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나날이 깊어가는 중국과의 센카쿠 열도 분쟁 때문에, 비슷한 영토분쟁을 겪고 있는 베트남을 끌어들여 중국을 견제하려는 입장이다.
베트남 역시 2차 세계대전 당시 식민지배를 하던 프랑스가 독일에게 고전하는 사이 일본이 쳐들어온 역사가 있으나, 프랑스의 식민지배가 더 길고 악랄하게 기억되어 있고, 호치민의 월맹이 프랑스군에 맞서 항전해왔으며 현재 동남아가 일본과 친하려는 노력의 기운을 타기 때문에 반일 정서는 반불 정서보다 옅은 편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그 일본의 몇년 지배로 200만명이 넘게 굶어죽은 역사가 있고 국부인 호치민은 일본을 이전부터 프랑스랑 다를 거 없는, 아니 더하면 더할 제국주의 침략자로 견제했던 점. 더불어 일본의 이 태평양 전쟁의 베트남 통치와 착취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는 중이기에 베트남이라고 일본에 대하여 완전히 이미지가 좋은 건 아니다.
4 경제
한국이 동남아시아 전체와 교역이 증대되고 있는 중이며 베트남과도 물론 경제 교역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특히 삼성전자가 제 1공장을 베트남에 건설했으며, 제 2공장조차 베트남에 건설할 계획을 언급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삼성전자가 공장을 건설한 후엔 차츰 무역 적자가 흑자로 변환되어 가고 있는 것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베트남 전체 수출의 18%를 차지한다고 한다. 참고
게다가 2015년 한국의 주요 수출국 4위를 차지했고,(1위 중국, 2위 미국, 3위 홍콩) 한편 3대 수출국이었던 일본은 5위로 밀려나는 대이변이 일어났다. 홍콩이 중국의 자치구이므로 사실상 베트남이 3위를 차지한 것으로 볼 수 있는만큼, 우리 경제에 매우 중요한 국가라 할 수 있게 되었다. 기사. 중소기업중앙회는 개성공단 폐쇄 이후 베트남 진출을 통해 피해를 메꾸려는 듯 하다. 기사
5 문화
동남아가 대개 그렇듯 베트남에도 한류열풍이 불고있다. 1998년에 "의가형제"가 인기를 끌면서 VTV나 HTV등 베트남 주요방송국에서 한국드라마를 앞다투어 수입하고, 한국노래도 인기를 끌면서, 베트남에 여행가서 숙소서 TV를 켜보면 여기가 베트남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한국 드라마와 가요프로가 많이 나온다. 책이나 만화 같은 것도, 물론 베트남어로 더빙이나 통역, 번역 출간이 되고 있다.
6 국제결혼
소위 '베트남 신부'들이 국제결혼을 통해 꾸준히 한국 사회로 편입되고 있다.
이들은 대개 농촌지역에 모여있고, 이들의 2세대도 아직 아동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크게 표가 나지는 않지만, 앞으로 몇 년 후에는 베트남 혼혈 한국인들을 사회의 여러 방면에서 꽤 많이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예로 최근 수능 외국어 시험에 베트남어가 추가되기도 했다.
7 반한감정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온 베트남인 신부의 살해사건으로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오던 국제결혼 문제가 터져 베트남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악감정을 심어주면서 한국과 한국인 전체의 명예와 자존심을 모욕하고 있다. 한국 남성들이 떼거지로 몰려가 원나잇하고 가버려 그대로 남은 2세 문제라든가, 베트남 국제결혼 하고난 후 악질적인 일부 한국 사람(주로 남자)들이 베트남 사람들에게 폭행등의 몹쓸 짓을 한다든가, 아주 많다. 착한 한국인들은 절대로 이런짓을 하지말고 협박에도 굴복하지 말고 발견 즉시 반드시 무조건 신고하자.
반대로 베트남 신부가 아이를 납치해서 친가로 보내고 본인만 한국에 와서 돈을 안 주면 아이를 못만나게 한다는 일까지 나타나고 있는데다, 애초부터 한국에 올 빌미로 국제결혼을 이용한다고. 한국에 오자마자 이혼한 뒤 불체자 보호관련시설에 배우자를 고발한 뒤 한국에서 거주해버리는 수법인데, 애초부터 이걸 국제결혼 가기 전에 가르쳐준다고(...)한다.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지고 있는지라 이런 상황은 한국에도 반월감정이나 다문화 반대운동을 유발시키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1968년에서 1970년대 초반 사이에 걸쳐 베트남 전쟁 참전 때에도 반한 감정이 현재의 일본과 거의 비슷한 극과 극 수준에 도달되는 상태로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8 북한과의 관계
북한과는 일찍이 1950년 북베트남과 수교를 맺어왔으며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우호관계를 맺어왔다. 다만 1990년대 이후에는 북한이 경제적으로 막장테크를 타면서 다소 소원해진 편.
북한은 총 120만달러 규모의 자본으로 5개의 프로젝트를 베트남에 투자하였으며 이는 對베트남 투자 순위 중 81위에 머무름.
5개의 프로젝트중 4개의 프로젝트가 요식업과 관련된 부분이며 나머지 하나는 홍삼제품과 건강식품 판매사업이다. 그러나 2014년 8월 베트남 보건부의 식품국(VFA)에 따르면 제품에서 납, 수은, 비소가 안전 기준치 보다 높게 나와 해당 제품에 대해 수입을 금지 시켰다. 즉, 망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기록된 베트남 해외투자 중 북한 투자는 없다. 북한의 경제전망 자체가 불투명하며 한국과의 관계도 있으니 앞으로도 없을 전망으로 보인다.아니 우호관계라지만 돈도 없고 신뢰도도 제로인데 투자해주고 싶겠나??
9 라이따이한 문제
항목 참조.
- ↑ 물론 공산주의 국가들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건 반공 국가들이 월맹을 인정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