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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몽골의 관계.

1 개요

몽골에서는 의외로 한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이건 몽골의 전성기인 몽골 제국 때 유일하게 제대로 된 우호국[1]이라고 할 만한 나라가 고려뿐이었으니까 해당된다. 러시아는 정복은 당했으나 타타르라고 경멸, 중국은 반란, 이란도 뭐(...), 베트남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러시아와 중국은 나중에 몽골의 도시들을 철저히 파괴한다. 서달의 카라코룸 불태우기 + 이반의 타타르 대학살.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몽골인들 입장이고 여몽전쟁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된 한국인 입장에서는 당연히 좋은 기억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역사적으로 고려는 그나마 끈질기게 몽골에 항쟁한 그 상징성 때문에, 항복 이후의 고려는 몽골군에게 그냥 짓밟히고 멸망당했던 다른 나라에 비하면 독자정부도 꾸리도록 허락받고 때때로 고려 왕족에게 만주 지역까지 공식적으로 통치하게 맡기는 등 꽤 후한 대접을 받은 편이었다. 어쨌든 침략자인 건 변함없지만, 어차피 당나라나 청나라 같은 중국 통일왕조들도 한반도 입장에서 침략자였던 건 마찬가지인데다 그리고 나중에는 함께 일본도 치러가고 동고동락했던 점, 몽골은 그나마 현재 한국을 위협하는 강대국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옛날보다는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좀 있는 편이다.

원나라 시절만이 아니라, 전쟁으로 일관해온 몽골의 역사에 우호국이라고 할 만한 나라는 머나먼 유럽국가 몇 개 빼고는 고려가 유일하다시피 하니 한국에 대해 좋게 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 듯하다.

어쨌든 아래에 나오는 이런 저런 정치사정과는 별개로, 몽골 사람들이 딱히 고려와 고려 사람들에 대해 호감을 가지면 가졌지, 악감정을 품을 이유가 없다는 점은 명백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봐도 될 것이다.

2 고대

몽골의 뿌리인 몽올실위는 실위의 부족인데, 실위족은 고구려에서 철을 수입했다.

3 과거, 고려와 몽골제국

한국과 몽골이 가장 깊은 관계를 맺었던 시대. 여몽 관계 항목도 참조.

3.1 항복으로 불개토풍(不改土風)을 얻다

몽골 제국의 '부마국'이라는 고려의 독특한 지위는 당시 몽골 내부의 권력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쿠빌라이 칸은 동생 아리크부카와 왕권 분쟁 도중에 훗날 고려 원종 이되는 고종의 태자 왕진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신의 한수라고 할 수 있는 항복 타이밍이었는데, 쿠빌라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랫동안 저항하던 고려가 라이벌인 아리크부카가 아니라 쿠빌라이 칸 자신에게 항복했다는 것은 곧 쿠빌라이의 명성과 권위를 드높혀주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리크부카는 몽골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에 있었고, 쿠빌라이 칸은 송나라를 정벌중이었다. 때문에 정통성에서는 오히려 쿠빌라이 칸이 밀리는 판국이었다. 이때 외국의 사신이 자기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곧 외국에서 자신을 정통 군주로 인식한다는 뜻이므로 부하들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내새울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때문에 쿠빌라이는 "고려는 그 옛날 당태종이 침공했어도 정복하지 못한 나라이다. 이제 그 나라의 왕자가 내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며 무척 기뻐했다. 자치통감 등의 중국 사서에도 7세기의 고구려는 '고려'라고 표기하고 있다. 사실 고구려나 고려나 뜻의 차이가 거의 없다.여당전쟁고구려의 국호가 '고려'였기 때문에 쿠빌라이는 고구려와 고려를 같은 나라로 알고 있어서 이렇게 이야기 한 걸지도. 혹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기에 이런게 이야기 한 듯 하다. 다만 카다안의 침입 때는 "고구려 때는 강했다면서 왜 이렇게 지금은 비실거리냐"고 의아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만주를 잃어서.

여기서 왕진 태자는 쿠빌라이 칸(원 세조)으로부터 중요한 약속을 받게 된다. 항복을 하는 대신에 고려의 왕실과 제도, 영토와 주민 그리고 풍속을 유지해도 좋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 등의 약조를 받아낸 것. 이를 달리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도 한다. 즉 고려의 독립성과 자치권을 보장받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다음 대의 충렬왕[2]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여 사위가 된다. 몽골 풍습에서 딸을 내어준다는 것은 자신의 씨족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지, 감시를 위한 정략결혼 수준으로 격하할 일은 아니다. 실제로 고려 국왕은 쿠릴타이(족장회의)에 원황실의 일원으로 참가해 원나라 왕위 계승 문제에 발언권을 행사하는 등 만만한 직위가 아니었다.[3]

또 국사책에는 원나라 관리인 다루가치의 횡포 식으로 알려져 있긴 한데, 고려가 부마국이 된 뒤로 다루가치는 찍소리도 못하고 본국으로 쫓겨난다. 실제 다루가치가 고려에 있던 기간은 20년이 채 안 되고 충렬왕 4년에 완전히 철수한다. 회사로 따지자면 다루가치가 본청의 부장급이라면 고려왕은 하청업체 사장이긴 하지만, 선대 회장의 외손주이자 현재 회장의 사위인 셈이니.

초창기에는 수탈을 했다. 응방, 결혼도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원은 고려의 해동청과 젊은 여성을 요구했고 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피해로 돌아갔다. 2차례의 일본 원정도 원정금의 일부를 원에서 대긴 했지만 거의 고려가 원정을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명나라-조선의 조공관계처럼 바뀌어 갔으며 원나라에 빼앗긴 자비령과 제주도의 탐라 총관부를 끈질기게 졸라서 다시 고려 땅으로 찾아오기도 했다(충렬왕 16년, 27년). 그렇지만 탐라총관부는 없어지지 않았고 탐라만호부로 이름을 바뀌어 이어지다 공민왕 5년에 가서야 폐지된다.

그래도 원나라가 고려에 일본 원정을 위한 군선 제작 비용을 저화(지폐)로 지불했다는 내용이라든지, 고려가 일본 원정용으로 제공한 군량미가 12만 3000석이었는데 나중에 고려가 흉년이 들었을때(1291년) 원나라에서 10만석을 지원해주기는 했다. (정작 딴데로 세어서 문제지...)이후로도 고려에 흉년이 들때마다 원나라에서 몇 차례씩 양곡을 지원받았다. 이런 내용이 모두 고려사에 기재되어있다. 그 밖에 원나라의 반란군인 합단군이 고려에 침입해서 원주충주가 함락되고, 국왕이 강화도로 피난가는 등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당시로선 심각한 사태였다. 이 때 고려군과 원나라군이 함께 싸워 물리쳤다는 내용 등도 남아있다. 물론 득실을 따졌을때 실이 훨씬 크다는건 부정할 수 없지만 원나라가 그냥 무작정 뜯어가기만 한 건 아니었다.

또한 고려 시대 공녀라며 원나라가 고려 여자들을 공출해서 데려간 것은 잘 알려져 있으나, 반대로 몽골 여성이 고려에 시집온 경우 역시 많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몽골의 바트술해 교수(몽골 뭉크하누대 학장)에 의하면 원나라 당시 무려 20만 명 넘는 몽골 여성이 원나라에서 한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몽골의 인구수를 감안하면 그야말로 민족 대이동이라고 할 만한 숫자이다.출처 지금 한국인 중에도 몽골 여성을 조상으로 둔 사람들이 꽤 있을 듯.

3.2 고려, 원 황실의 영지(領地)

그렇지만 주의할 게 있는데 절대 고려와 원은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일제강점기까진 아니어도 속국적인 요소가 다분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부마국으로서 역사가 지속되면서 고려왕이라는 지위는 독립국가 고려의 국왕이 아니라, 원 황실의 일원으로서 고려를 영지, 봉토로 다스리는 제후왕에 가깝게 돼버린다.

원황실과의 혼인은 고려가 독립을 유지하는 데 주요한 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속국화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고려왕과 결혼한 원 황실의 공주는 왕후가 아닌 대장공주라는 명칭을 유지하며, 원 황실의 공주로서 고려왕실과 별개의 권력체로 존재했다.

충선왕심양왕의 지위를 얻은 뒤에는 더욱 곤란한 문제가 발생했다. 충선왕의 전성기에는 고려-심양이라는 두 지위를 한 몸에 지녀서 명목상 한반도와 요동을 동시에 다스리는 엄청난 권위를 지녔으나, 심양왕위가 분리되면서 고려 왕실이 계승권을 가진 왕위가 '2개'로 늘어나자 오히려 왕실 내에서 분쟁의 원인이 돼버리고 원 황실은 고려 왕실을 제어하는데 심양왕위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고려왕은 원에 의해 자의적으로 폐위와 복위를 반복하기도 했다. 충선왕, 충렬왕, 충숙왕, 충혜왕이 그 예이다. 이것도 원나라의 시각에서 보면 좀 다른데, 고려왕은 '원나라 황제의 사위'로서 '고려를 영지로 다스리는 왕'이므로 제대로 정치를 못하면 교체하는 것이 문제될게 없었다. 회사 사장이 사위라고 (합병한) 자회사 사장 자리에 앉혀주었는데 제대로 일을 안하면 교체하는 것과 비슷한 입장이다. 근현대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 총독 갈아치우듯 한 건 아니었다. 교체를 한다고 해도, 일단은 고려 왕실의 혈통으로 이어가야 했다. 그리고 충혜왕의 경우는 오히려 교체해버린 것이 백성들에게는 매우 나았다.

이러한 점들은 고려와 원이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다는 점을 증명한다. 사실 훗날의 조선도 대외적으로는 비슷한 입장이었다.

3.3 불평등하지만 우호적인 관계

원나라 역사책인 《원사(元史)》를 보면 원나라에서 고려를 무척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고려에 대한 기술이 다른 나라 전부를 합친 것만큼 많이 나오며 '고려 국왕이 병에 걸려 황제가 사신에게 약첩을 주었다' 같은 세세한 내용들이 많다. 이는 다른 어떤 중국 왕조 역사서보다 많다. 사실 다른 정복지들은 몽골에게 엄청나게 적대적이었다.

고려와 몽골의 국가 대 국가의 관계는 꽤 좋은 편이었다. 몽골 공주가 고려 왕에게 시집오고(부마국), 고려 여성이 원나라 황후가 되기도 했으니까(기황후). 덕분에 고려인은 다른 외국인이나 중국인보다 우대받아 원나라 관직에 오르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덕분에 몽골에서는 고려양(高麗樣-고려양식)이 유행했고, 고려에서는 몽골풍이 유행했었다.[4]

원궁사(元宮詞)에는 "가장 유행하는 옷은 고려 여인이 황제 앞에서 입는 고려옷이라네. 궁중 여인들이 다투어 고려 여인의 옷을 구경하러 가네."라는 말이라든지 연하곡서(輦下曲序)에는 "보초 서는 병사들은 고려어를 배우네. 어깨동무하며 나지막이 노래 부르니 우물가에 가 익어가네" 같은 말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몽골 풍속이 남게 되고, 특히 폐쇄성이 강한 왕실 용어에서는 몽골어가 오랫동안 잔존하게 된다.

원나라 쿠빌라이 칸은 '고려국유학제학사'(高麗國留學提學司)를 설치해 고려 유학을 연구하기도 했고, 원나라 수도 연경에 '만권당(萬卷堂)'이란 학당을 열어 두 나라의 학자들이 만나 학문을 교류했으며 심지어 고려의 바둑 고수들을 불러서 800년 전의 국제기전을 벌이기도 했다.#

4 조선 시대 이후

몽골은 내몽골북원이 들어서고 외몽골에 할하 부족과 오이라트 부족이 자리 잡으면서 통일성이 깨졌다. 거대 제국이었던 원나라가 사라진 탓이다. 이후 내몽골명나라오이라트 쌍방과 고비 사막과 만리장성을 경계로 각각 대립하다가 후금이 들어선 이후 북원의 후계인 차하르부가 청태종에게 귀부하여 원의 옥새를 바치면서 청나라의 일부가 되었고, 혼인 동맹으로 사실상 만주족과 일체화되었다. 그리고 외몽골의 경우 할하 부족이 정착하였으나 곧 등장한 오이라트의 후신 준가르에 복속되었다.

내외몽골 둘 다 조선과 거리가 멀어서 사실상 한몽교류는 끊겼다가 정묘호란병자호란만주족과 일체화되어 팔기군의 일원으로 등장한 내몽골 기병들이 한성을 약탈하면서 최악의 형태로 돌아왔다. 조선으로서는 대몽항쟁의 악몽을 떠올릴 만했다(한성 약탈을 자행한 팔기부대는 분명히 몽고병, 즉 내몽골군으로 청병이라 표시된 만주군이나 한병이라 표시된 중국군과는 구별된다). 삼전도의 굴욕 당시에 항복 문서는 몽골어한문으로 적히기도 했다.

외몽골은 자연스레 교류가 없어 말 그대로 남이 되었고, 외몽골이 1921년 소련의 원조로 독립해 아시아 최초 공산국가가 되면서 대한민국과는 적대관계가 된 반면 북한과는 우방이 되어 6.25 전쟁 당시 군사원조까지 해 주었다. 이후 1992년 한중수교로 내몽골은 자연스레 중국, 1990년 한소 수교로 부랴티아는 자연스레 러시아의 일원으로 교류를 재개했고 1993년 한몽수교로 외몽골이 몽골국까지 수교 국가가 되어 한몽교류가 복원되었다.

5 근현대

5.1 일제강점기 ~ 1980년대

의사 및 독립운동가였던 이태준은 일제강점기 때 몽골로 건너가 활동했다.

몽골은 적백내전에서 소련위성국이 되었고, 이후 공산국가로 남았다. 1948년북한과 먼저 수교하여 북한 단독수교국으로 있었고, 그 때문에 징기스칸 같은 노래도 공산국가 찬양곡이라며(...) 금지되었다.

그러나 냉전이 해빙되면서 1988년 서울에서 열린 하계올림픽(서울 올림픽) 때 자국 선수,임원단을 파견하고 2년 후인 1990년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5.2 냉전 종결 이후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한몽 간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대한민국의 15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임시절인 1999년 방몽(訪蒙)하였다.

몽골인들의 국외 거주 인구는 주변국인 러시아와 중국 다음으로 한국이 많다. 약 34,000명 정도. 적어보이지만 몽골 인구가 300만인 걸 감안하면 인구의 1%가 넘으니 적은 게 아니다. 중국에 사는 한국인이 중국조선족을 제외한 수가 약 40만 명이니 비율상 이보다 많다고 보면 된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국가에서 해외에 노동자로 일하러 가는 경우 아무래도 한국보다 경제규모가 큰 일본으로 가는 인구가 더 많다. 예를 들면 일본 거주 필리핀인 21만 명, 한국 거주 필리핀인 8만 명, 일본 거주 네팔인 10만 명, 한국 거주 네팔인 1만 명. 그런데 몽골의 경우 일본 거주 인구는 겨우 5,000명으로 특이하게 한국이 압도적으로 많다.

한국인의 경우도 몽골에 진출하는 사람들이 많아 울란바토르 시내에서 한글이 뚜렷이 써진(개별용달 등등; 도난중고차가 몽골로 온 사례) 자동차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으며,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늘고 있다. 몽골국영방송과 UBS, TV5를 비롯한 주요방송국에서도 한국드라마와 오락프로그램을 대거 수입해서 틀어주며 작품에 따라 시청률이 오락가락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꽤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다.[5]

대한민국에서 이삿짐 업계에 몽골인들의 진출은 상당한 편. 체격과 힘이 좋아 짐 나르기에도 좋고, 순수하고 성실한 편이라 이삿짐 센터에서 중요한 도난 사고 등의 문제가 없어 급여적인 면이나 능력적인 면에서 한국인에 비해 출중하기 때문. 또한 다른 외국인 노동자와 달리 한국인과 비슷하게 생긴 외모 덕에 의뢰인들이 부담을 가지지도 않는다고 한다. 다만 이삿짐 파손은 한국인보다 좀 더 많다고 한다. 이거 말고도 물류센터 택배상하차, 건설현장, 대형마트 창고일 등 힘을 많이 쓰는 직업에서 몽골 출신들을 쉽게 볼수있다.

허나 이와 함께 몽골인들이 한국에서 저지르는 범죄도 늘었다. 불법체류자도 상당하며, 범죄율은 한국에 체류 중인 외국인 중에 1위. 몽골인들이 순수하다는 말이 있지만 그건 유목 생활을 하는 시골 초원 사람들의 이야기고 도시 사람들은 많이 다르다. 게다가 순수한 사람이라고 해도 순수하기 때문에 오히려 말보다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이것도 범죄로 이어진다. 이로 인해 한국인들의 몽골인에 대한 반감도 늘어날 듯하다. 하지만 언론에선 동남아 사건이 더 많이 나오기 때문에 아직까진 반감은 덜한 편.

최근에는 다른 면에서 몽골이 한국에게 중요해지고 있다. 탈북민들의 탈북경로 상당수가 동남아 혹은 몽골 경유 루트로 바뀌고 있기 때문. 일단 몽골 경유 루트는 동남아 루트에 비하면 중국의 인구밀집지대(=감시망 밀집지대)를 빨리 벗어날 수 있고 탈북루트의 시발점인 베이징이나 선양에서의 거리도 압도적으로 가까워 인기가 높다. 문제는 그 몽골 진입 방식이라는 게 철조망을 돌파해 어떻게는 국경을 넘어 몽골 국경 수비대에게 발견된다는 것이라 물도 식량도 고갈된 상태에서 몽골 국경 수비대를 만나지 못한 채 밤을 맞으면 건장한 남성이 아닌 이상 얼어죽는 경우가 대부분(...)[6] 일단 몽골 정부는 탈북민들이 한국행을 원할 경우 한국 대사관에 인도해주고는 있는데, 문제는 이 한국 대사관에 인도받는 과정이나 출국 허가가 나는 과정이 OTL, 한국 정부로써도 각종 인력이나 시설 등의 문제로 이들을 무작정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여러가지로 난감한 문제가 있다. 때문에 민간단체들을 중심으로 탈북민들을 위한 정착촌 등을 몽골에 건설하는 방안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몽골로 탈출하는 탈북민들은 장률 감독의 영화 경계에도 드러나고 있다.

이밖에 TMR(몽골횡단철도)이 중국을 거쳐 한국 철도와 연결될 경우 세계적인 항구도시와 철도로 연결되는 만큼 몽골의 자원개발에 탄력이 붙을 것을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특히 몽골과 이웃한 중국은 자원 수출에 필수적인 항구를 몽골에게 내어주지 않고 있고 러시아도 마찬가지라둘 다 역사, 민족적으로 몽골을 보는 입장이...영 좋지 않다 몽골 입장에서는 한반도의 항구를 이용하는 것이 급선무인 상황. 덕분에 몽골은 잘 드러나진 않지만 북한의 개방과 한반도 통일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국가들 중 하나다. 가장 열렬하게 지지한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몽골 대통령이 평양 한복판에서 대놓고 민주화를 외쳤을 정도다.. 더불어 서로가 껄끄러운 6자회담 당사국들과 동아시아 역내 국가들에게는 몽골이 나름 편한 회담 개최지로 주목받고 있어 최근들어서는 울란바타르를 아시아의 제네바 만들겠다는 구상도 조금씩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몽골인들이 한국을 좋아한다고 보기에는 좀 그렇다. 2000년대 초반 몽골의 젊은 여성들이 한국의 남성들과 국제결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시골으로 팔려갔다가 도망쳐 나오는 등의 사고 사례가 많았고, 교민들에 따르면 이미지가 극히 좋지 않다고 한다. 반한이 매우 많아졌다. 울란바타르 거리 곳곳에 FUCK KOREA라는 낙서를 하고 다니는 단체가 있다.

2005년에는 관련글 몽골 대학에서 한국인이 현지 여성을 고용해 헤어 누드를 찍다가 적발되어 여권을 압수당했다고 한다. 몽골 현지에서는 이 사건으로 대소동이 일어나고 반한감정이 치솟았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일부 인터넷 언론만 보도하고 잊혀졌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지금도 몽골에서 두고 두고 회자된다.

2012년에는 대한민국에서 편의점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욕설을 한 몽골인을 한국인이 폭행해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해당 기사의 댓글을 보면 알겠지만, 몽골인이 맞아 죽을 짓을 했다는 식의 댓글이 상당수였으며, 며칠 후에 보도된 모 아이돌 그룹의 실언에 묻혀 버렸고 현재 더 이상 거론되지 않는다. 아이돌 그룹의 경우 과거의 실언이 두고두고 거론되며 비난받는 것과는 대조적인 반응이다.

2014년 10월 6일 퇴임 후 한국에서 병 치료를 받고 있던 남바린 엥흐바야르 전 몽골 대통령이 한국으로 망명했다고 중앙일보가 보도했다. 사실이라면 전현직 외국 국가원수의 한국 망명은 사상 최초의 일. 엥흐바야르 전 대통령은 2005년부터 2009년까지 대통령을 지냈으며 후에 부정부패로 구속되어 2013년 8월에 사면받은 전적이 있다. 하지만 이는 오보로 밝혀졌다. 10월 29일 남바린 엥흐바야르가 몽골에 일시 귀국, 현지 인터뷰에서 망명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몽골 영자 신문).

중앙일보 역시 망명 기사는 오보였다고 정정 기사를 내보냈다. 엥흐바야르 전 대통령은 잠시 몽골에 머문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명목상은) 한국 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기 위해서라고 한다.

KT SAT가 몽골 최대 위성 방송 사업자 DDISH TV(디디쉬티비)와 위성 중계기 임대 계약을 2016년 3월 2일 체결했다. 올해 말 동경 113도에 발사예정인 KOREASAT-5A(무궁화 5호 대체 위성)의 중계기 4기에 대한 임대 계약으로, KT SAT은 오는 2017년부터 위성 수명에 해당하는 17년 동안 몽골에 위성 방송 서비스(DTH)용 중계기를 제공한다. KT SAT, 몽골에 위성 중계기 임대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는 고려사(寺)라는 한국식 불교사찰이 있다. 2000년대 초중반에 한국 불교 단체에서 지원 형식으로 지은 것. 몽골 인구의 절반 이상이 불교(주로 티벳 불교)를 믿는 지라 별 거부감은 없고, 양국의 불교 교류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6 북한과 몽골

1980년대까지만 해도 꽤나 교류가 있던상황이었고 북한영화가 꽤나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90년대 이후 몽골이 체제를 전환하고 북한이 돈이 없어지면서 관계가 소원해졌다. 2013년 차히르 엘벡도르지 몽골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으나 김정은이 만나주지 않아 정상회담을 하지 않았다. 이는 상당한 외교적 결례이다. 방문 당시 엘벡도르지 대통령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연설을 했는데 "어떠한 폭정과 독재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며, 이는 영원한 힘입니다."라는 등 평양 한복판에서 독재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연설을 해서 화제가 되었다. 이분이 우리의 열쇠다!

7 몽골과 한국의 정체성

몽골어로 한국을 '솔롱고스(Солонгос)'라 부른다. 솔롱고스의 유래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설은 없다.
단순히 직역하자면 "무지개의 나라"라는 뜻이 되지만, 보통은 "신라"를 음차한것이라고 보고있다

황석영을 포함하여 '한-몽골 국가연합론'을 제안한 사람이 있으나, 양국의 상호 인식 수준이 너무 다르고 특히 몽골은 생각보다 한국을 낮게 평가한다. 그리고 한반도 통일도 해결 안 된 상황이라 황석영 등은 '알타이 문화 제전'을 여는 등 노력을 하는 듯하지만 고고학/역사학/언어학계에서 한국의 알타이 계통론은 이미 후퇴할 대로 후퇴한 상황이다. 물론 몽골과 한국이 같은 계통이라고 열심히 주장하는 양반들이 있긴 한데(...)[7] 최근까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학교 교육에서는) 한국어는 (우랄-)알타이 계통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요사이 알타이어족 자체가 거의 폐지되었고, 한국어는 계통 미상의 고립어로 취급되고 있다. 즉 알타이 제어가 어족인지도 불확실하지만 어족이라고 해도 한국어가 거기 속하는가의 여부는 더욱 불확실하다. 알타이 제어 항목 참조.

다만 최근 중국의 성장세를 껄끄럽게 바라본다는 공통점은 있는데 이건 중국 주변 국가들의 공통점이니...그 외 07대선에서 경제공화당 후보 허경영이 국가연합이 아닌 몽골과의 통일을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다. 물론 몽골 정부와의 사전협의는...있었을 리가(...). 2016년 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이 한국-몽골-연해주-북한-만주를 아우르는 그랜드 칸[GRAND, KHAN, 대환국(大桓國)레알 환빠네]국을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답이 없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몽골인과 한국인은 외모가 꽤 비슷해서 하지만 몽골인이나 현지 교민들이나 보면 바로 서로 구별한다해외취업 등의 방법으로 한국에 많이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당연한 얘기로 동아시아에서 몽골인만 한국인과 비슷한게 아니다. 일단 몽골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강호동이나 유퉁 같은 '건장하고 통통한 몸'에 붉그스름한 기가 얼굴에 도는 거친 피부인데 이건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 냉정히 말하자면 한국인은 몽골인보다는 일본인, 만주인, (북반부의 한족)중국인이 혈통적으로 훨씬 더 가깝다.[8] 사실 한족도 야마토족도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허름한 양복 상의(속칭 마이) 등으로 뭔가 다르지만 거주기간이 길어지면 스타일도 한국화되고 차이가 사라져서 '입만 다물고 있으면' 중국인인지 모른다. 특히 젊은 사람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다만 외국인들이 보기에 외모적으로 한국인이 중국인, 일본인에 비해 광대뼈 같은 스테레오 타입에 더 가까운 건 있지만...어쨋건 몽골인은 혼혈이 아니면 분명히 한국인과 구분되는 점이 있다. 특히 붉거나 오렌지 계통의 엷은 빛깔 머리색을 가진 사람이 몽골쪽에 더 많다.붉은머리계통은 켈트족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일부지역에도 있다고 하던데. 그리고 한국인처럼 북방계에 가까운 편 정도가 아니라 극단적으로 북방계 얼굴인 몽골인들도 많은데 그런 경우 제법 이국적으로 느껴진다.[9] 다만 각각 농경문화와 유목민족이라 문화적으로 다른 편.[10] 젓가락 위주의 식사가 아니고 주로 숟가락과 포크를 사용한다고 한다. 국수 같은 음식을 먹을땐 젓가락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서툴다고 한다...그리고 물을 차게 마시며 음식이 자극적인 맛인 등.

  1. 참고로 몽골 제국의 속국은 엄청나게 많다. 러시아 대부분, 버마, 루마니아, 파키스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페르시아, 이라크지방처럼 그냥 먹힌 곳도 많고, 노브고로드 공국, 스몰렌스크 공국 처럼 완전 속국이 된 경우도 많고, 조공이나 상납금을 바친 나라는 2차 불가리아 제국, 트레비존드 제국, 안티오크 공국과 트리폴리 백국같은 십자군 나라도 있고, 베트남, 참파왕국, 크메르 왕국, 말레이시아 부족 등등... 엄청나게 많다. 비잔티움 제국조차 황녀와 공물을 킵차크 칸국의 노가이 칸(정확히는 청장 칸국)에게 보냈을 정도. 다만 이 나라들이 비록 조공은 바쳤을 지라도 과연 고려처럼 몽골과 우호적인 관계(적어도 정치적으로는)였냐면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2. 이때부터 고려왕의 이름에 충(忠)자가 들어가는데 일반적으로 임금의 이름에 충을 붙이는 건 말이 안 된다. 임금은 가장 높은 사람이라 충성할 필요가 없기 때문. 이는 고려가 독립과 자치는 하였지만 원 제국으로부터 부마국으로서의 대접과 간섭을 받았다는 걸 드러내는 단적인 사례다.
  3. 쿠릴타이에서는 주로 대세와 본가를 따르는 쪽인데 이는 칸을 선출될 때 마다 반복되어, 대세를 따르다 보니 새로 선출되는 칸마다 고려왕이 지지하는 사람이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새로 선출된 칸은 자신을 지지해준 고려왕에게 고마워하며 항상 무언가를 배풀어주게 되었다.
  4. 고려에서 몽골풍이 공민왕에 의해 폐지되기는 했지만 한복에 몽골 복장인 델의 영향이 상당히 남아있게되었으며 고기 요리에도 몽골 요리의 영향을 상당수 받았다, 반대로 고려풍이 몽골에 영향을 끼치면서 몽골 요리와 몽골 델(의복)에 고려복장과 한국 요리의 영향이 남아있게 되었다.
  5. 다만 몽골에서 이전에도 한국어와 한국문화가 아주 낯선건 아니었다. 공산시절에 상당수 북한영화가 수입되면서 사극류를 중심으로 꽤나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라나.(이중에서 가장 히트한 작품은 홍길동이었다고 한다.)
  6. 이는 영화 크로싱에도 나온다. 영화에서도 국경을 넘은 아들 김준(신명철)이 몽골 국경 수비대를 만나지 못해 얼어죽었다.
  7. 우리가 역사자료로 최대한 추정할 수 있는 고조선의 시기엔 이미 완전히 분리된 민족이긴 하나 유전자 분석등의 자료로 유추해볼땐 그보다 훨씬 오래전의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먼 황인종관계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넓게 보면 흉노, 돌궐, 만주족등 가까이 있었던 다른 북방계 민족들도 그렇게 볼 수 있다. 언어 문제도 확실히 말 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 현대한국어와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의 언어가 그것부터 꽤 차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몇가지 공통점을 제외하고 켈트족에 가까운 골족이 조상인 프랑스인들이 언어는 로망스어군계통 언어를 쓰는 경우도 생각해보자. 수만년이 훨씬 넘을지도 모를 세월속에서 언어로 혈통적 연관성을 찾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어디까지나 할 수 있는 일은 유전자 분석을 통한 추정 정도일 뿐이다.
  8. 남방계 한족의 경우에는 분명 한국인-북부 중국인의 DNA보다 훨씬 더 차이가 난다. 동북부의 한족이라고 한다면 원나라/청나라의 영향으로 북방계의 유전자가 많이 섞여서 그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대개 중국인들의 정체성은 북방민족이 아니라 엄연히 한족에 기준을 두고 있다. 그런 중국이 어떻게 고구려랑 엮어서 동북공정을 진행하는지 생각해보자. 뭐 현대의 한국인들도 약 30%가량 남방계가 섞여있어서 애매하긴 하다. 일본은 북부 몽골로이드에 속하지만 남방계의 특성이 더 많다
  9. 붉은머리의 경우처럼 러시아계와의 혼혈영향도 고려 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10. 참고로 한국의 농경은 신석기 시대부터 조금씩 시작되어 청동기철기가 보급된 고조선시대에 본격화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