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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러시아의 관계.
Российско-южнокорейские отношения(라씨이스카-유즈나카례이스키예 아트나셰니야)

대한민국과 미국수교 햇수를 따질 때 조선 왕조와 미국의 수교 시기부터 계산하지만[1] 한국과 러시아는 조선 왕조와 러시아 제국이 아닌, 1990년 대한민국과 소련의 수교 시기부터 계산한다.[2] 아무래도 미국의 경우 체제의 변화도 없고 일제강점기를 제외하고는 외교관계가 사실상 끊어지지 않았지만 러시아나 중국은 러시아 제국 - 소련 - 러시아 연방/청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의 과정을 거치며 국가 체제도 변하였고, 그에 따라 외교관계가 끊어진 적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1 역사

1.1 수교 이전

한국과 러시아가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일반적으로 고려 시대로 보고 있다. 몽골 제국 의 소환으로 속국들의 왕족이나 사신들이 대거 몰려왔었는데, 이 때 몽골의 영향권 안에 있던 러시아와 고려가 접촉했다는 것. 뭐 그렇게 중요한 접촉은 아니다.

이후 접촉이 없다가 나선정벌청나라의 요청으로 러시아 카자크들과 조선군 간의 교전으로 또 한 번의 접촉이 있었다. 이 때도 단편적인 만남으로 끝났고, 조선이 본격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인식을 시작한 것은 연행사가 연경(북경)에서 러시아에게 엿을 먹은 때부터이다. 평소대로 숙소에 짐을 푼 조선 사신단이 갑자기 쫓겨났는데, 청나라 관계자에게서 들은 이유는 "대비달자[3]들에게 이 숙소를 내줘야하니 너희들은 꺼져라"라는 것이었다. 조선 사신들은 어이가 없었고 반발을 하기도 했으나, 대국이 깡패인지라(...) 러시아 국력이 깡패

그 일로 인연을 갖게 된 조선 사신단은 다음부터 러시아 사신단의 숙소에 가서 필담을 나누었고, 그 반대의 상황도 자주 연출 되었다. 청나라에서는 이를 별로 탐탁지 않게 봤지만,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이후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가 러시아에 할양되면서 조선과 러시아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맞대게 된다.

1860년대 부동항을 노리는 러시아에 대한 불안이 커진 흥선대원군[4]천주교신자를 통해 영국, 프랑스와 협력해 이들을 몰아내려고 했으나 신부들의 어정쩡한 태도로 거꾸로 병인박해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만약 성공했다면 개국이 좀더 빨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고, 대원군도 척화비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고수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하간 뒷날의 조선책략에서도 드러나지만 조선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된 국가로 여겨졌던 것은 일단 열강 중에서도 영토가 바로 접해있는 러시아였다.

이후 1884년 조선과 러시아가 수교하기 이전 연해주로 불법 이주해간 조선인을 다루는 문제에 대해서 연해주의 러시아 관료와 조선 측이 조약을 맺은 적도 있고, 암암리에 서로 그 존재를 인식하던 차였다.

1.2 조러 수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부동항을 위한 러시아의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확장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불안을 야기시켰다. 영국이 뜬금없이 러시아 견제를 위해서 거문도를 점령하기도 하였다(거문도사건). 반면 고종(조선)청일전쟁이후에 밀려난 청나라를 대신하여 일본을 견제할 세력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하였다. 그래서 발생한 게 삼국간섭. 프랑스, 독일, 러시아가 힘을 합심하여 일본에게 태클을 걸어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먹은 요동 반도를 다시 토해내게 되었다.

이에 대한 일본의 반동으로 결국 친러정책을 펼치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벌어진 것이 아관파천. 하지만 아관파천 이후에 뚜렸던 정치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고[5] 영향력을 많이 잃게 된다. 이완용이 친미파에서 친러를 거쳐 친일파로 돌아선 시기도 이때. 이후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기습과 어려운 국가내부사정으로 어이없이 패배함으로써 만주와 함께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일본에 의해 완전하게 잃게 된다.

하지만 러시아로 건너가는 조선 농민들의 상황은 당시까지는 의외로 괜찮았다고 한다. 시베리아를 개척해야 하는 러시아 입장에서는 건너온 조선인들의 노동력이 소중했고, 따라서 딱히 간섭이라든가 과중한 세금을 매기지 않았고, 그래서 조선 국내의 농민들의 상태보다 더 양호했다고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언급하고 있다. 적어도 이후의 강철의 대원수보다야 민영환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축하하는 사절 겸 미국유럽을 포함한 한국인 최초의 세계일주를 하기도 했다. [6]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만주와 더불어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연해주 등은 일본에 매수된 군벌이 지배하는 만주보다도 훨씬 상황이 양호했고, 더욱이 적백내전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러시아의 상황으로 무기나 물자 조달, 활동에 있어서 상당히 자유로웠다. 3.1 운동으로 촉발된 정부수립 운동으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생겨나기 이전 생겨난 여러 정부들 중 하나인 대한 국민회의가 바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생겨났을 정도다[7].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데라우치 총리가 시베리아 출병을 강행하자 소련은 초기과정에서 한국 독립세력을 지원하면서 적백내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고 했다. 적의 적은 나의 편의 논리.

다만 적백 내전이 정리된 후 독립군 내부의 사상 분열때문에 독립군들은 자유시 참변을 당하고(이전 문서에 볼셰비키가 일본과의 충돌을 원치 않아서였다고 썼는데 소련은 친일적 태도를 취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되려 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 제국과 일본이 동맹으로 발전했으나 러시아 혁명으로 엎어졌고 일본의 이권도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볼셰비키는 적백내전 당시 일본군과 공식적으로 적으로 교전했고 이후에도 계속 적국이었으며 한번도 우호관계인 적 없었다. 자유시 참변의 원인은 독립군 간의 내분이 원인이다), 나아가 스탈린이 집권한 후 일본과의 내통을 우려한 스탈린의 염려(?)로 연해주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 중 상당수가 중앙아시아로 끌려가 정착시키게 하고 그 중 상당수가 그 과정에서 사망하기에 이른다. 이들 중에는 그 유명한 독립군 장군인 홍범도 장군도 끼어 있었다. 이들이 바로 고려인의 시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가한 조선인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남일.

1.3 냉전 시대

냉전 기간 동안 소련은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대한민국이 UN에 가입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막아댔던 대표적인 국가였다. 어찌 보면 진영논리 때문에 반대한 면이 큰데, 마찬가지로 북한의 UN 가입은 미국 측에서 반대해왔다.

만주 작전으로 소련군이 한반도의 일부에 상륙하면서 한국과 러시아의 연관관계는 다시 시작되었다. 북조선을 군정하고, 한국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기에 남한 입장에서는 사이가 대단히 안 좋았다. 당시 우리나라 측에서 만든 선전물을 보면 북한 인민군 뒤에는 김일성이 있고, 김일성 뒤에는 마오쩌둥이 있고, 그 뒤에는 최종보스스탈린이 그려져 있는 것이 많았다. 소련을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단독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 스탈린이 지지하긴 했다. 48번이나 거절했던 걸 김일성이 거듭 요청한 끝에 얻어낸 지지였지만.

나중에 한국이 UN에 가입하려고 해도 소련이 안보리에서 계속 디스를 거는 등 안 좋은 일만 있었고, 미국-소련, 미국-중국이 슬슬 냉전체제를 완화하려고 하는 70년대에도 소련에 대한 우리나라의 입장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그리고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발생하자 한국과 소련의 관계는 역대 최악을 찍으며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한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990년에 가서야 수교할 수 있었다.

1.3.1 페레스트로이카와 수교

표면적으로는 1985년이나 돼서야 페레스트로이카의 시작으로 러시아에 자유화 바람이 불면서 우리나라와 수교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내부적으로는 70년대부터 소련은 중국과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손만 벌리는 북한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남한과 수교를 맺으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북한은 소련시절 러시아에게 지원받은 엄청난 자금을 아직도 반환 하지 않고있다. 반면 남한은 수교후 소련에 되려 30억 달러를 빌려주게 된다. 이 차관에 대한 결과는 불곰사업을 참조.

이런 움직임이 보이자 북한은 오히려 자기 무덤을 팠는데 소련에 알리지 않고 미국과 접촉하기도 했고 소련과 남한의 관계를 험악하게 만들기 위해 소련의 지원을 받은 핵무기 개발 정보를 은근 슬쩍 넘기기도 했다. 소련 수뇌부는 분노했고 정통주의자인 소련 외무인민위원 안드레이 그로미코만이 북한과의 관계를 지지했다. 그런데 북한은 이 그로미코가 방북하자 홀대를 했고 결국 마지막 친북파들 마져 돌아서서 그후 소련은 북한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남한과 수교를 하기 위한 물밑협정을 시작한다.

하지만 로널드 레이건마거릿 대처의 강경책으로 냉전 시기 갈등이 첨예해지던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으로 잠시 소련과의 관계가 급냉각 됐다.

그런 와중에도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 [8]로 소련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고, 소련이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참가를 결정함에 따라 소련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매우 좋아졌다. 당시 농구 준결승에 미국 말고 소련을 응원했을 정도다![9] 올림픽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사건이 공산주의가 체제경쟁에서 패배했음을 알린 신호탄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미국과 러시아가 대결하는데 자본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러시아를 응원할 자유(!)가 있다는 사실에 동유럽 국가 국민들이 받은 충격이 적지 않았다고...

마침내 1990년, 남한과 소련은 역사적인 갈등관계를 풀고 수교를 하게 된다.

1.4 냉전 이후

1990년 한국과 소련이 수교한 이래 러시아로 변한 후에도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러시아 연방이 기존 소련을 승계하기 때문이다. 국가승계 문서 참조.

한러 양국은 냉전 끝물부터 꽤 교류를 했고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같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집권과 버락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유로마이단 등으로 인해 러시아가 서방 국가들과 급격하게 사이가 나빠지면서 영향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북한의 4차 핵실험사드에 대해서도 중국과 비슷한 입장이라서 한중관계 같이 친교가 그 이상 더 발전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국 때문에 2010년대 러시아는 친북, 반서방인데다 탈북자 문제 등에서 오히려 한국과 관계가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질 건수가 없다.

1.4.1 2012년: 비자면제 협정

2012년 8월 29일, 한국과 러시아는 비자 면제협정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9월 초에 열리는 APEC 회담에서 발표된다. 한국은 또한 러시아에게 한-러 FTA협정을 재추진하자고 제안했다.한-러시아, ‘비자면제 협정’ 추진하기로

사실 이전에도 블라디보스토크상트페테르부르크를 특정 여행사를 경유해서 72시간동안 무비자로 방문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자유여행이라도 할라 치면 비자 받는 것이 복잡했으니 앞으로는 러시아여행이 한결 수월해질 듯.

2013년 11월에 한러간 비자면제협정이 체결되었고 2014년 1월 1일 부터 발효되었다.

1.4.2 2014년: 비자 면제 협정 발효

2014년 1월 1일부로 대한민국과 러시아 간의, 비자 면제 협정이 발효된다. 유효한 여권을 소지한 양 국가의 시민은 관광이나 친지 방문을 위한 60일 이내의 단순 단기 체류에 대하여 사증을 면제 받을 수 있다. 더 자세한 정보가 궁금하다면 주한 러시아연방 대사관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참고로 이전부터 대한민국은 이미 미국과 무비자 협정이 맺어져 있으며 따라서 칠레에 이어 두 번째로 미,러 2개국에 대해 모두 무비자 협정을 맺은 국가가 되었다!

1.4.3 2016년 FTA 협정 추진

2016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회담을 계기로 한러FTA, 한-유라시아FTA를 추진할려는 움직임도 있다.## 그리고 한-유라시아 FTA를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2 경제교류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현재 러시아는 한국과 이권이 겹치는 부분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거의 없다고 보면 될 것이다.

소련 붕괴 초기에는 부산항이 주요 교역창고였다. 2000년 이후에는 동해안에서도 활발하게 교역을 확장하였다. 예를 들어 속초항은 대러시아 중고차 수출 거점 항구이다. 현재까지 서로 적당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는 한국과의 수교에 대해서 실망감이 있는 듯하다. 러시아에선 한국과의 수교 이후 시베리아 투자 등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한국은 그 기대를 저버렸다고. 터키보다 투자가 적다고 불평한 러시아인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위에 북한이 버티는 상황에서 가기 힘든 시베리아에 투자하기 힘든게 있으니 이쪽도 할 말 없는건 아니다. 그래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천명하였고, 경제와 문화 면에서의 협력이 차차 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쪽에서 최근에 나진-핫산 프로젝트에 한국의 참여를 배제 혹은 포기한 상황이 되었다.관련기사 물론 외부적인 정치적 안보대립의 형태가 불러온 문제이기도 하다.

한-러관계에서 현재 가장 큰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것은 시베리아 천연가스관 설치 계획이다. 한-중-일-북 모든 동북아시아의 국가가 자국에 유리하게 가스관을 설치/관통하도록 원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그래봤자 러시아의 잠가라 밸브에 무기력해질 것이지만. 이외에도 지금은 가능성이 한없이 낮아졌지만 한때는 철도를 이용하여 북한을 통과,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하여 유럽에 수출하는 운송루트를 고려한 적이 있었다.

국내 몇몇 중소기업들은 러시아에 진출하여 짭짤한 수익을 거두고 있다 한다. 한 예로 러시아는 희대의 초코파이 덕후들이다.몽쉘은 안 좋아하나? G20 정상회담 당시 러시아 기자들이 초코파이를 순식간에 동낸 적이 있다. 비슷하게 도시락 컵라면, 마요네즈, 꽃게랑, 신라면, 레쓰비 기타등등 식료품들이 광범위하게 진출해서 크게 성공했다. 항목 참조.

해양수산부외교통상부의 수산물, 특히 명태의 확보를 위한 중요 상대국이기도 하다. 명태는 국내 수요가 매우 크지만 한국 근해의 명태는 사실상 씨가 마른 상태라서 오호츠크 해 및 북태평양 근해 등 러시아의 배타적 경제수역에서 잡아와야 한다. 따라서 이 명태 쿼터를 확보하기 위해 매년 러시아 당국과 협상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와 크게 충돌한 적은 아직 없지만 러시아 입장에서도 오호츠크 해의 수산업은 중요한 산업이라서 한국에 대해 조금씩 민감하게 대응하기도 한다.

그런데 수입 수산물의 방사능 함량을 검사한 결과 한국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일본산보다 러시아산이 훨씬 심각한 결과가 나왔다.# 사실 이건 일본산 방사능 수산물 떡밥이 한창 돌아다닐 때부터 꾸준히 나온 얘긴데, 러시아가 동해 인근부터 시작해서 근처 바다에 방사능 폐기물을 열심히 버려댔으므로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3 군사교류

노태우 정부 이후 구소련시절부터 천궁, 불곰사업 등을 통하여 무기도입, 기술이전 등의 군사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한국에서 개발한 상당수의 미사일에는 러시아의 기술력과 노하우가 들어가 있다. 미사일 기술은 군사기술 중에서도 핵심적인 집약체로 대부분의 국가들이 기술이전을 꺼리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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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 안토노프 러시아 국방부 국제협력차관

2013년 10월 8일, 한-러시아 군사협력협정이 곧 체결될 것이라는 소식이 언론을 통하여 공개되었다. 한국 국방부의 백승주 차관은 러시아의 아나톨리 안토노프 국방부 국제협력차관을 만나 한.러 군사협력협정의 문안 협의를 완성할 것이라고 한다.# 한-러시아 군사협력협정은 조약형식이 될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1996년에 체결된 한-러시아 군사협력 양해각서를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역시 한국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지속하고 있다. 학술적 문제를 통하여도 한미동맹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했거니와 천안함 피격사건연평도 포격 사태때에도 중립포지션은 지켜도 북한에 대한 감싸기를 시도했었던 전례와 함께 최근 북한의 4차 핵실험2016년 로켓사건에서 대응하는 러시아의 태도는 한국과 군사적인 갈등도 공존하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관련기사2

4 한국인들의 러시아 인식

이웃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러시아에 대한 인식은 극히 피상적이다. 비행기 한두 시간이면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나라인데, 왠지 머나먼 나라처럼 느껴진다. [10]

아직까지 프랑스어독일어, 2010년대 이후에는 스페인어를 배우는 사람은 많아도, 러시아어는 소수 사람들이 배우는 언어로 인식되고 있다. 일단 러시아어가 어렵다는 인식이 한국 내에 널리 퍼져 있으며, 문자도 다른 서구어와는 달리 키릴 문자를 쓰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접근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구 소련이 과거 적성국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배울 수 있는 환경도 미약했으며, 그에 따라 중장년층 이상의 경우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문 편이다. 그래도 최근 들어서는 여러 대학과 외국어 고등학교에 러시아 관련 학과들이 생기고 인터넷 강의나 독학으로 배우고 있는 등 과거에 비해 러시아어를 배우는 사람도 차츰 늘고 있다.

또한 야생동식물 전문가나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의 극동지방에 해당되는 연해주와 하바롭스크 지방에 대해 한반도에서 전멸된 동식물의 마지막 서식지로 생각한다. 호랑이나 표범, 반달곰이나 불곰등 남한에서 전멸된 맹수들이 아직 남아 있고 반달가슴곰의 경우 지리산에 방사되거나 방사된 개체들 중 태아난 새끼의 부모의 일부가 러시아 태생인 경우가 많다. 또한 2013년에 사육사를 물어죽인 호랑이 로스토프 역시 러시아에서 기증받은 개체이다. 이처럼 동식물 복원문제에 한국과 러시아가 협력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밀덕들 중에도 서방 무기체계와 다른 러시아군/소련군 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남성들은 러시아 여성들에 대한 묘한 환상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건 한국남성들 뿐만이 아니라 일본, 중국남성들도 마찬가지인데 동양인의 관점에서 볼 때 체형이 우락부락한 감이 있는 서유럽권 여성들에 비해 실제로 비교적 아담한 편이기 때문에 서양인에 대한 환상과 동양인의 취향을 모두 충족시키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반대로 아줌마가 되면 완전히 변한다는 인식도 상식처럼 존재하지만 한국에도 날씬한 아줌마와 풍만한 아줌마가 모두 존재하듯 편견일 뿐이다. 다만 러시아 요리가 추운 기후에 적응해 열량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소련이 존재했던 시절을 보내왔던 탓인지 아직도 한러 관계를 적대관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몇몇 있다. 그리고 장년층의 경우 과거의 습관이 그대로 남아 아직도 소련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잦다.

퓨 리서치 센터의 2015년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들의 46%가 러시아에 대해 호의적이라고 응답했고, 43%가 호의적이지 않다고 응답했으며, 한국은 러시아를 제외한 조사대상국 39개국 중 러시아에 대해 베트남(75%)·가나(56%)·중국(51%)에 이어 4번째로 러시아에 호의적인 의견이 많은 나라로 조사되었다.

매번 국제 대회나 올림픽 따위에서 규정을 정할 심판들이 존재할 때 러시아와 자주 맞붙게 되는데 그럴 때 마다 편파 판정이 일어나는지라 특히 그 소식을 접한 한국인들이 러시아에 대한 인식이 되새김 되거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경향이 발생한다. 저 위의 우호조사 중 43%의 정도의 불호도 역사관이나 매 대회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정 등 으로 인해 이끌려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사실 러시아인들도 이와 같은 편파 판정은 말이 안되며 일부 일부 소수파나 비정한 정부의 방책이라는 말이 있으나 자세한 사항은 추가 바람

5 러시아인들의 한국 인식

일반적인 러시아 국민들(유럽 러시아) 기준으로 러시아의 인접국들 중에서는 관심이 적은 편이다. [11] 유럽 러시아는 인접한 나라들이자 오랜 숙적으로 사실상 적대국인 스웨덴, 핀란드, 독일, 폴란드에 그리고 위성국가인 벨라루스우크라이나에 더 관심이 있다. 지리적으로도 당연한 일이다. 반대로 연해주 쪽은 비교적 한중일에 관심이 많으며 우경화 폭주를 하는 일본을 우려하고, 이 때문에 중국과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냉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남침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 국민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다르게 러시아어 문헌들에서 꽤나 상세하고 사실에 부합하도록 설명이 되어있다. 그리고 한국은 현재도 영토 분쟁을 겪고 있는 일본, 최대의 가상적국이자 역시 오랜 숙적으로 냉전까지 치른 미국과 달리 대한민국과는 소련 시절 이데올로기 대립을 빼곤 나쁘게 부딪친 기억이 없어 러시아와 가깝게 지낼만 한 나라다.

역사적으로도 냉전 동안 적성국이었고, 한국 전쟁 때는 비공식적으로 소련군도 참전했기 때문에 적국 사이였긴 하지만, 현재는 그때 북한 편에 서서 참전한 중국이나 러시아나 지금은 그것에 관한 갈등은 많지 않다. 이젠 한국이나 중국이나 러시아나 한국전쟁 때 적대적이었던 관계에 대해선 대체로 전부 다 북한(김일성)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강하고 .[12] 그러나 러시아 외교의 대전제가 서방세계 견제이기 때문에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에 대해서도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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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인 인접성 때문에 유럽 국가들 중에서 한국학과 한국어학 관련 연구가 그나마 많이 이루어진 곳이 러시아다. 러시아의 한국학 연구의 기원은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일본과 중국, 미국을 제외하면 전세계에서 학술적으로 한국 관련 연구가 제일 많이 이루어진 곳이 러시아다.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한국학 연구 자료가 많은 독일보다 몇 배가 더 많다. 특히나 한국과 인접한 극동지역의 경우 한국어 과목 강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연해주 등 극동 지역의 경우 한국과 교류가 많다. 특히나 블라디보스토크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큰 도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열거된 가공 식품 이외에도 한국 음식 찾는게 어렵지 않을 정도. 이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한국으로 여행도 많이 오는 편인데 연해주에서 오는 관광객들을 위한 강원도 스키 여행[13]이라던가 의료관광이 성행하고 있다.

도타 2 유저들에겐 웬수가 따로 없다

6 기타

일제강점기 이전 러시아를 통해 한국에 전파된 정교회는 현재 한국에 몇몇 성당을 유지하고 있다. 주로 동해안(강원도)에서 러시아인이 많은 지역에 있으며, 서울 아현동에는 본당인 성 니콜라스 대성당이 있다.

파일:Attachment/한러관계/a0114420 49a66e935f9b7.jpg

러시아 제국 공사관은 현재 경향신문사 근처에 건물 한동이 남아있다. 아관파천의 현장. # 사적 253호이기도 하다.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시절에 소련 영사관으로 바뀌었고 1945년 독립 직후에도 영사관으로서 기능을 수행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소련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면서 폐쇄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서 3층 전망대만 남아 있다. 현대의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구 공사관에서 조금 떨어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위치해 있다. (새주소: 중구 서소문로 11길 43)
  1. 그래서 1982년에 한미 수교 100주년 행사를 했다.
  2. 한국과 중국도 1992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수교 시기부터 계산한다.
  3. 쉽게 말해서 코쟁이
  4. 이 역시 어느정도는 천주교 신자인 신료들의 부추김이 있었을 것이라는 심증이 있다.
  5. 러시아가 이권, 채굴권, 벌목권을 많이 가져가긴 했지만 절영도 조차 등에서 딱히 의미있는 성과를 가지진 못했다.
  6. 종착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였는데 거리가 가까운 시베리아 방면이 아닌 반대편 태평양을 건너가 미국유럽을 거쳐서 갔다. 왜냐면 당시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공된 시점이 아니었기도 하고 서구열강 탐방 겸사겸사.
  7. 이후 대한국민회의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흡수되었다.
  8.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
  9. 다만 이는 운동권들의 영향이 컸다. 미국에 반감을 가진 NLPD 계열에서 소련 국기를 흔들기도 한 것. 해외에선 '한국인들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에게 침공을 받긴 했지만, 그 앙금을 다 해소했구나!' 라고 해석하기도 했지만.. 다만 올림픽 때 공산권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이 좋아졌던 건 사실이다. 응원에 적극적인 건 운동권이긴 했지만.
  10. 물론 영토로만 따진다면야 블라디보스토크 쪽은 동해로 금방이지만 러시아의 실질적인 대도시들은 우랄 산맥 너머 유럽 쪽에 많이 분포되어 있으니, 어찌 보면 마냥 틀렸다고 보기도 어렵다.
  11. 주로 유럽 쪽 러시아 기준이고 한국과 가까운 연해주쪽은 한국에 대한 관심이 유럽 쪽보다는 많은 편이다.
  12. 북한이 러시아에게서 돈 빌리고 안 갚은 게 이유일 가능성이 있다. 북한/경제, 북한의 국채 항목 참고.
  13. 추운 지역에서 훨씬 남쪽의 강원도까지 스키를 타러 온다는 것이 의아하게 여겨질 수 있는데 러시아 극동 지역에도 스키장은 있지만 시설이 낙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