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회

1 개요

1931년 경기도 광주시에서 태어났다. KD 운송그룹의 회장이다.

2 학력

초월초등학교
서울농림고등학교
신흥대학 (현재의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중퇴) [1]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
세명대학교 명예 경영학 박사

3 생애

1931년 일제강점기 경기도 광주군에서 평범한 농부의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여 어릴 적에는 동네를 누비고 다니는 골목대장이었다고 한다.
성격이 누구에게 지기 싫어하고 장난 좋아하는 굉장히 활발한 성격이었다.
그 이후 서울 농림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도중 한국전쟁의 발발로 입대하여 육군 소위로 참전했다. 제대 후 1956년 결혼해 현재의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4학년까지 재학하다가 갑자기 "돈을 버는데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지 않다"라는 생각에 자퇴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 후 미군부대에서 일하다가 1961년 당시 우리나라의 산업화서울의 인구가 증가하고 서울 시내의 버스가 그에 맞는 중요한 역할을 하자 1961년, 경기여객[2]에 임시직 말단 사원으로 입사하여 을지로 영업소에 배차로 배치되었다. [3]

3.1 경기여객 시절

당시 허명회는 자신의 일에 열정과 자부심을 가지며 조수에게 정비 등의 여러가지 일들을 배웠고, 결국 윗선의 눈에 띄어 1961년 6개월 만에 계장으로 진급되었다. 또 1962년 과장으로 진급하여 1962년에는 종로구 숭인동 영업소장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발령받은 뒤에도 배차 일부터 버스 청소와 정비 등의 버스 관리 등의 무엇이든지 나서서 배웠다. 그런데, 1962년 어느 날 당시 1960년대의 영동 지역으로 가는 도로는 전부 비포장도로여서 특히 서울화천군, 철원군 등의 오지로 가는 버스 노선은 항상 대형 사고가 많았고, 게다가 눈 앞의 이익만 생각해 버스 회사에서 제대로 된 정비도 하지 않고 운행을 시켜 자칫 사망사고까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허명회는 모두가 안 하려고 하는 사고 수습에도 직접 나섰고, 어느 날 강원도 화천군의 자 회사 직원의 사망으로 사후 협상을 위해 조문했다가 상주들에게 욕설과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허명회는 "당시 그렇게 맞고 나니까 오히려 사고 수습 협상이 잘 되었다"라고 회상했다. 몸을 아끼지 않는 일에 대한 열정으로 1965년 동대문구 신설동 영업소장으로 인사 이동되어 1967년 이사회의 눈 안에 들어 차주로 진급하였고, 점점 담당 버스가 1968년 2대, 1969년 5대, 1970년 5대가 추가 되어 차주 진급 3년 만에 자신이 담당하는 버스가 13대로 증가되었다. 1969년 영업 상무로 승진하였다. 임시직 말단 사원으로 입사한지 8년 만에 오로지 자신의 노력으로 상무로 초고속 진급한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1970년 삼양여객으로부터 13번 노선에 대해 "종로의정부를 잇는 시내버스 30대를 인수하지 않겠느냐"라고 뜻 밖의 인수를 제의받게 되어 당시 허명회는 일주일 간 13번 버스를 타보았다. 당시에는 등산 열풍이 불어서 항상 도봉산이나 수락산에 등산하는 등산객들이 많아서 황금 노선으로 불리웠는데 버스 회사의 정비 불량과 차량의 노후로 항상 미아리 고개만 올라가면 엔진이 파손되기 일쑤였고, 그만큼 고객들의 불만은 엄청났다.

3.2 대원여객 출범

그리고 오르지 않는 시내버스 요금으로 어느 버스 회사던지 시내버스에 투자를 하지 않았고, 13번 버스를 인수할 생각이라는 허명회의 말에 "뭐하러 그걸 힘들게 하느냐"는 주변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13번 버스 30대를 인수하여 새롭게 <대원여객>이라는 이름으로 1971년 12월 24일 공식 출범하였다.
출범하자 마자 당시 노선의 최대 난제였던 미아리 고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차례로 노후 차량을 신차로 교체하였고, 자신이 직접 말단 사원 시절부터 배워 온 정비를 하면서 당시 심각했던 정비 납품 직원들의 비리를 막았다. 당시 버스 안내양들의 요금 빼돌리기로 버스 회사들이 버스 안내양들의 주머니 검사와 소지품 검사로 사회 문제가 되었는데, 허명회는 다른 방법을 택해 종사원들과의 대화와 교육을 자주 실시하고, 회사 내에 예배당을 개설해 목사님들을 초빙해 예배를 드림으로 종사원들이 양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독려했다.
또한 종사원들의 대우를 개선해 영업소 내에 무료 식당을 개설하고 회사 곳곳마다 돌아다니며 꼼꼼히 점검하고 확인했다. 거의 지금 말로 꿀직장이다

그 후 1972년 4월 드디어 35원이던 시내버스 요금이 40원으로 인상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돈이 물밀듯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기사에게서 요금통을 받다가 요금통이 허명회의 발등에 떨어져 발등이 부어올라 병원에 갔지만 그가 일하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 치료를 미루고 업무에만 집중하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통증이 심해져 병원을 찾았을때 의사는 칼로 환부를 도려내는 수술을 하고 5~6일 정도 병원에서 입원해야 한다고 했는데, 허명회는 날마다 처리할 업무도 촉박한데 자신이 다친 것 때문에 회사에 자리를 오래 비우면 안된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의사에게 "마취없이 수술을 하면 혹시라도 좀 더 빨리낫지 않겠느냐"는 풍문에 도는 말을 의사에게 했다. 의사는 근거없는 얘기라고 했지만 허명회는 빨리나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 의사에게 그냥 마취없이 바로 수술을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이것으로 허명회는 마취없이 수술을 받았으며 그가 세상에서 최고로 고통스러운 아픔을 겪는 순간이였다고 한다. 당시 허명회는 처음 칼이 수술부위에 닿을때는 멀쩡했지만 칼이 안쪽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특히 다친 부분에 칼이 깊이 파고들어 뒤집어내는 순간이 정말 말로 표현할수 없을만큼 아파 수술하는 내내 연신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1976년 조양관광 소속 버스 17대를 인수해 <대원관광>으로 새롭게 출범시키며 관광버스 사업을 시작하였고, 1978년에 대원여객 52대, 대원관광 47대로 총 99대의 차량을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서울에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과 1980년 서울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면서 점점 버스업이 약화되기 시작하였고,[4] 1978년 경기여객을 인수하게 된다. 당시 경기여객은 인력 부족과 차량 노후, 임금 체불 등으로 위기에 몰려 도산 위기에 몰려있었는데 허명회는 1978년 9월 12일 비상총회를 소집하고 현직 사장 및 모든 임원들의 사표 제출을 요구하였으나 임원들은 "니가 무슨 주제로 우리보고 사표를 제출하라고 하느냐" 라며 집단 구타를 당했다. [5] 결국 당시 사장 및 전임원들은 줄줄이 회사를 떠나고, 이듬해 10월 (주) 경기여객의 사장으로 취임한다.

3.3 경기여객 - 대원여객 사장

100대 이상의 대형 운수업체가 된 (주) 경기여객 - 대원여객의 사장이 되자 회사 내의 대대적으로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1. 인수 직후 단행한 구조 조정으로 복잡하고 수 많은 단계를 거쳐야했던 결제 과정을 담당 - 부장 - 사장 3단계로 대폭 축소
2. 업주와 승객에게 골칫덩어리였던 조수 폐지 [6]

그리고 사원 복지를 우선으로 여겼는데 당시 가장이 월급을 타오면 오는 길에 술 마시느라 월급을 탕진하는 일이 항상 있는 일처럼 되었는데 이런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허명회는 사원 부인들을 모아놓고 "이런 악습이 기사들의 안전 운행을 방해한다. 이제부터는 월급날이면 부인들이 직접 회사에 오셔서 월급을 받아가십시오"라고 말해 부인들의 대환영을 받았다.

또한 회사가 아무리 어려워도 월급과 상여금 만은 약속한 날짜에서 단 하루도 늦추지 않았고, 최대의 복지 시설로 직원들의 사기를 올려주었다.
그런데 그에 맞는 조건이 있었는데 식사 시간에 무조건 밥이나 반찬을 남기면 안되고 남겼다가는 큰일난다고 한다. 항상 식당에 허 회장이 지키고 서있다고 한다.

1984년 남일여객을 합병하여 대원운수를 출범하였다. 당시 경기여객남일여객은 노선이 겹치는 것도 많아 양사 간의 경쟁이 치열하여 같은 도로에서 서로 경주같이 버스를 몰고 달리다가 갑자기 버스를 세우고 화가 난 양 기사들 간의 주먹다짐이 많았고, 승객의 불편과 과다한 경쟁으로 이 이상 이익이 없을 것이라 판단한 허 회장은 남일여객을 인수하기로 결정하고 각 노선을 직접 타봤다고 한다. 그리고 경쟁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고장이 자주 나던 차량들의 원인을 파악해보니 타이어가 문제가 많아 한국타이어에서 1,000개의 타이어를 대량으로 구매했다. 그 결과 더 고장 횟수가 대폭 줄어들고 승차감도 안정이 되어 승객들에게 인기를 얻을 무렵 남일여객을 이용하던 사람들이 경기여객을 이용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1984년 1월 29일, 오후 6시부터 남일여객 사장과 경기여객의 허 사장이 직접 인수 협상에 들어갔고, 신라호텔에서 9시간의 마라톤 협상 끝에 결국 1월 30일 오전 3시에 남일여객의 제의로 3억에 인수하기로 결정하고 남일여객 166대 차량을 인수하였고, 인수한 차들과 기존에 있던 차량들을 합쳐 <대원여객>으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당시 소유 버스는 총 579대였다.

그로 인해 서울시 성동구 마장동 터미널과 충주, 점촌, 괴산, 상주 등의 중부 지역을 잇는 황금 노선이 경기여객의 손에 들어갔다.

1986년 배기가스에 노출되어 녹내장을 앓았는데 녹내장 수술 당시 열흘은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3일만에 근무하러 나갔다가 실명할 위기를 맞았던 적이 있어 현재까지도 선글라스같은 보안경을 쓰고 다닌다.

1996년 운행 기록과 차량 관리를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마을버스부터 공항버스에 이르기까지 전 차량에 운행 기록기를 설치하였다.

2000년에는 다큐멘터리 성공시대에 출연하여 자신의 성공 비결과 경영 철학, 생활 모습을 소개했다. 링크

3.4 인수 목록

인수연월사명차량대수
1982년 4월서울버스11대
1982년 6월서울버스21대
1984년 1월남일여객166대
1986년 10월영주여객4대
1988년 3월동신운수3대
1988년 3월신일여객18대
1989년 9월영남여객5대
1990년 1월삼안여객27대
1991년 2월온양교통24대
1994년 6월승원여객41대
1995년 12월삼성여객24대
1996년 1월금성교통79대
1997년 7월명진여객43대
1997년 8월경남여객6대
1997년 11월경남여객36대
1998년 3월경남여객31대
1998년 9월대신여객20대
1999년 1월삼성여객32대
1999년 5월명진운수36대
1999년 5월남양여객32대

본격 버스계의 진공청소기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선진네트웍스로부터 선진고속(→경기고속), 유성운수(→경기운수), 선진상운(→경기버스), 선진여객, 하남시내버스(→경기상운)를 인수했다.

거기에다 경기도 화성시수원시 등지를 다니는 화성여객은 원래 화성운수에 인수 제의를 했으나 가격을 너무 높게 부르고 협상도 안되서 차라리 회사를 하나 세우는게 낫겠다 싶어 화성여객을 설립했다고 한다.

3.5 지금의 KD 운송그룹

2000년 다큐멘터리 방영 당시 (주) 대원관광 등 6개 회사 총 2,000대라고 소개했는데, 16년이 지난 지금 2016년에는 무려 5,087대의 버스가 운행하고 있으며, 계열사는 총 15개이다. 시내버스부터 시작해 광역버스, 공항버스, 시외버스, 고속버스와 KD 투어 ( (주) 대원관광)의 관광버스까지 운영하고 있다.

또한 기사들의 보험률이 100%에 달하고, KD투어나 공항버스 같은 곳은 105~155%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회사 자체로 100% 직영 체제를 구축하였는데,

  • 유니폼 제작 (KD 어페럴)
  • 차량 정비소 (KD 정비공장)
  • 유류 보급 (KD 에너지텍)
  • 김치, 콩나물 공장 (KD 푸드피아) - 전국 53개 직영 식당에 공급한다.

이 외에도 타이어, 차량 부품 등을 직접 구입하며 관리 및 감독하고 있다.

직영 체제를 고집하는 이유는 원가가 절감되고 여러 방면에서 효율적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3.6 계열사 (2016년 현재)

3.7 교육

창립 당시 동업자였던 전 국회의원 故 권영우 씨가 교육 재단을 담당했다.대원교육재단, 민송학원, 세명학원 크게 3개의 교육 재단이 있다.
세명대학교, 대원대학교, 세명고등학교, 성희여자고등학교, 세명컴퓨터고등학교 총 5개의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3.8 현재

2016년 8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일 한결같이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4 여담

자신의 경영 철학으로 사원을 채용하는데 조건이 있다고 한다.

1. 36세 이하는 채용하지 않는다.
2. 총각과 홀아비는 안된다.
3. 월세 사는 사람은 쓰지 않는다.
4. 용모가 험상궂은 사람도 곤란하다.

그리고 현재까지 50년 넘게 근무하면서 단 13일 밖에 쉬지 않았다고 한다. 1977년 부친상 당시 5일, 1979년 조모상 3일, 1986년 백내장 수술 3일로 총 13일이다. 거기에다 1986년 백내장 수술 당시 의사가 10일은 쉬어야 한다는 권고도 무시하고 3일 만에 출근했다가 실명할 위기에 놓여 지금도 보안경을 쓰고 다닌다.

비행기 한 번 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제주도에 가본 적도 없으며, 해외여행도 가본 적도 없다고 한다. 호화 유흥업소 출입은 물론 골프도 치지 않는다고 한다.

여행이라곤 아내와 공주 마곡사에 다녀온 것이 전부라고 한다.

그러나 2016년 지금은 기준이 엄청 완화되었고 요새는 인력난으로 인해서 조건부로 미혼자를 채용하기는 한다.(미혼자 채용 여부는 영업소에 문의를 해볼것)

5 수상

  • 1981년 국민포장
  • 1982년 대통령 표창
  • 1987년 새마을 훈장 근면장
  • 2001년 철탑산업 훈장
  • 2005년 대통령 표창
  • 2005년 금탑산업 훈장
  • 2006년 노사문화대상 대통령장
  • 2009년 대통령 표창
  • 2011년 국무총리 표창
  • 2013년 6.25전쟁 정전 60주년 기념 호국영웅장

6 관련 자료

  1. 훗날 경희대학교에서 명예 정치외교학 학사 학위를 수여했다
  2. 지금의 경기고속으로 구리시의 시내버스 업체와는 별개이다.
  3. 당시 배차라는 것은 터미널에서 주차 정리와 발차 버스를 외치고 다니던 직책으로, 회사 직원은 물론이고 버스 기사와 조수에게 까지 무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4. 일본에 갔다온 지인들을 통해 일본에는 지하철이 속속 개통하면서 버스업계가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하였다고 들었다.
  5. 허명회는 대원여객에서 경기여객 버스 60대까지 인수해 지분이 55%였다.
  6. 당시 버스에는 조수가 있었는데 주로 하는 일이 승객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고 욕설도 서슴치 않는 사람이어서 허명회는 정비사로 채용된 최소 인원 몇명만 빼고 모든 조수를 퇴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