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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토라노스케) 카토(虎狼─加騰).[1]
목차
1 소개
加藤清正 (かとう きよまさ). 1562년 7월 25일 ~ 1611년 8월 2일.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이며 다이묘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선봉으로, 한국의 입장에서도 유명한 일본의 인물이다. 보통 '가토 기요마사'라면 잘 모르는 사람도 '가등청정'이라 하면 알아들을 정도다.[2]
1.1 임진왜란 이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가토 기요마사의 갑옷
대장장이였던 가토 기요타다와 카지야 세이베에[3]의 딸 이토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요마사의 아명은 원래 야샤와카(夜叉若)였는데, 야샤와카가 어릴 적 아버지 기요타다가 일찍 죽고만다. 이토는 어린 야샤와카를 데리고 일족인 카지야 고로스케의 집에 몸을 의탁했는데,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인연이 닿게 된다. 히데요시와 기요마사의 혈연 관계는 2중으로 얽혀있는데, 본래 야샤와카의 어머니인 이토는 히데요시의 어머니인 오만도코로의 사촌[4]이었고 이토와 야샤와카가 의탁한 카지야 고로스케의 부인은 카지야 세이베에의 양녀였기에 야샤와카에게는 이모가 되는 셈이었는데 그녀와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후의 기타노만도코로)가 자매 사이였다.또래 중에서는 꽤나 명석한 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야샤와카가 밑바닥에서 시작했기에 가신이라고 할만한 사람이 없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에 포착되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야샤와카는 1575년 즈음에 겐푸쿠(성인식)을 마치기 전에 나가시노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그 다음해에 겐푸쿠를 마치고 그 유명한 가토 토라노스케 기요마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와 함께 170석의 영지를 하사받으며 평생의 첫 영지를 가지게 되었다.
시즈가타케의 전투에도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고 3000석을 받는다. 이 때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하여 큰 공을 세웠던 시동 출신의 무장 7인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라 부른다.[5] 평민출신이라 후다이[6] 가신이 없는 히데요시는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키워 자신의 후다이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버프를 받아 쑥쑥 석고가 증가했고, 규슈 정벌 이후에는 히젠국의 절반을 받아 17만석의 다이묘가 된다. 히젠국은 규슈의 지방으로,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 이후 일본 서부의 병력을 징집하기 위한 차원에서 자신의 직신인 가토와 고니시를 히젠의 영주로 삼은 것이다. 바로 대륙침략을 위해서 말이다.[7]
1.2 임진왜란 초기, 선봉을 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선봉이 되어 조선으로 쳐들어왔는데, 사실 한성에 가장 처음 입성한 것은 고니시 유키나가였다.[8]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는 문서를 교묘하게 꾸며서 누가 먼저 들어왔는가 하는 부분은 교묘히 빼놓고 자신의 사자를 잽싸게 보내서 공적을 위조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이시다 미츠나리가 가토 기요마사의 부정을 탄핵하자, 예전부터 우등생처럼 히데요시 옆에 붙어서 정무를 도맡아하는 미츠나리를 미워하긴 했으나 이후 사이가 아주 원수지간이 되었다.
개성을 함락시킬 때까지 고니시군과 함께 하였고, 그 이후 함경도로 진군하여 국경인, 국세필 등의 순왜들과 내통하여 왕자인 임해군, 순화군도 사로잡는다. 그리고 가토는 이 공로로 국경인과 국세필에게 벼슬을 내린다. 참고로 불국사를 불태운 범인은 바로 가토 기요마사였다. 또한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 쪽 기록으로 볼 때 경복궁을 불태운 것이 가토 휘하의 부대였을 가능성이 높다.[9]
더불어 조선인 약 2000명을 징집하여 두만강을 넘어 현 중국의 여진족 노토 부락(老土部落)[10]으로 군사를 보내 공격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교전은 없었고, 여진족이 기병을 보내 포위를 시도하자 재빨리 두만강을 넘어 철수했다. 이후 히데요시에게 보낸 서찰을 보면 당시 명나라로 향하는 길을 조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3 임진왜란 후기, 축성의 달인이 되다
정유재란 때는 패배하여 현재의 울산광역시 학성에서 왜성을 쌓고 버텼다. 울산성 전투에서는 조명연합군에게 포위되어 자군의 시체를 뜯어먹고 말피를 마시는 처참한 농성을 벌였는데, "나는 여기에서 할테니 귀공은 그곳에서 하시오."라는 서신을 보냈을 정도로 할복하기 직전까지 몰렸었으나, 결국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데 성공하여 간신히 귀환할 수 있었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축성술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일본 3대 성 중 하나로 꼽히는 견성 구마모토 성은 임진왜란에서 귀환한 뒤인 1601년부터 개축하기 시작하여 1607년에 완공했는데 울산에서 농성하다가 겪은 배고픔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는지, 출타시 도시락을 항상 싸가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으며 성내의 건물에 까는 다다미도 식용이 가능하도록 토란 줄기를 넣고 짜도록 했으며 성벽에는 조롱박을 기르도록 해 도배를 해버리고 성 안의 우물은 무려 120개나 팠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가토 가문이 구마모토 성의 다이묘 노릇을 한 건 본인과 아들까지 해서 2대 44년뿐이고 그 이후엔 에도 막부의 유력 다이묘 숙청 중 하나로 개역당해서 구마모토 성은 호소카와씨에게 넘어간다.
구마모토 성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는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에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이 일으킨 세이난 전쟁 중 벌어졌는데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반군이 성에 주둔한 정부군을 포위하고 대포 수십여기를 끌고와 천수각, 망루, 식량창고를 비롯한 내부 건물들을 죄다 불태워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함락에 실패하여 난공불락의 명성을 증명해주었다. 전투 이후 사이고는 "우리는 정부군에게 진 것이 아니라 세이쇼 공(기요마사(清正)의 한문을 음독한것이 세이쇼)에게 진 것이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1.4 임진왜란 이후, 오판을 하다
가토가 철군하여 일본에 돌아왔을 때 살아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죽은 후였다. 오대로가 비밀에 부치고 퇴각을 명령했던 것이다. 히데요시 사후 그나마 말리던 마에다 도시이에까지 사망하자 가토 기요마사는 이시다 미츠나리를 잡아 죽이려고 길길이 날뛰었는고, 미츠나리의 자택에 쳐들어갔으나 미츠나리가 이에야스의 저택으로 도주하면서 실패했다.
이후 끔찍히 싫어한 이시다 미츠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립을 보고 이에야스를 편을 들어 세키가하라 전투 때 동군의 편에 서게 된다. 이것을 '배신'이라고까지 하는 경우도 많은데, 결과적으로 자신을 키워준 히데요리 세력을 일소시키는 것과 도쿠가와의 세상을 여는 데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요마사의 전후 행보를 보면 평소 마음에 안 들어했던 데다가 히데요시가 남기고 간 어린 후계자를 끼고 권력을 전횡하는 '간신 미츠나리'를 제거하려고 이에야스 편을 든 것이지, 딱히 도요토미를 배신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도 이후 도요토미가의 존속을 위해 진력했다. 결과론으로 따져서 배신이라고 할 수 없는게, 이 때까지도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야심을 드러내고 정이대장군이 되고 에도 막부를 연 것은 3년 후의 일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51만석의 대다이묘가 된다. 기존의 17만석에 고니시의 24만석 및 기타 영지를 가증받은 것이다. 서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큐슈에서의 싸움이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이 승리하자, 이 소식은 큐슈로 전해지고 서군 편을 들던 다이묘들이 동군쪽으로 돌아서고 동군의 승리로 결착이 났다. 고니시라는 라이벌의 소멸이 뭔가 가슴에 와 닿는게 있었는지 고니시 가의 가신들을 많이 흡수했다. 또한 고니시의 우토 성에서 탑 하나를 옮겨다가 자신의 구마모토 성 한켠에 세우고 "우토 탑(우토야구라)"이라고 명명했다고 하는데, 다만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토 탑은 구마모토 성 건립 당시부터 있었으며, 옛 고니시가 가신들이 이 구역에 모여서 그렇게 불린 것이라고 한다. 징비록에 재미있는 구절이 있다. 철군 과정에서 고니시를 가토가 지원했는데,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우리 장수를 버리고 가는 것은 국가의 수치"라는 이유에서 고니시를 지원했고, 이에 고니시가 "이후로는 공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고 했으나, 가토가 "공과 나는 길이 달라 친해질 수 없다" 고 대답하며 씁쓸해했다고 한다.새침데기
이에야스가 야심을 드러낸 후에는 토요토미 가에 충성을 지키고 히데요리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영지였던 구마모토 성에 밀실을 만들어서 만일의 경우가 생기면 히데요리를 이곳으로 모시려는 계획을 세웠고, 1611년 3월 28일 니조 성에서 이에야스와 히데요리가 회견할 때는 품에 단도를 숨기고 히데요리를 보호하고 무사히 회견을 마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이것으로 주군이었던 히데요시에 대한 은혜를 갚았다고 안심했다. 그리고 3개월 후인 1611년 6월 24일 병으로 사망했다. [11]
오사카 전투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천하를 움켜진 후에는, 끝까지 도요토미 가의 충신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후손은 몰락을 피할 수 없었다.
아들 다다히로(1601~1653)는 1632년 막부 주도 하의 2차 개역 작업에 휘말려 영지를 몰수당했다. 당장은 데와 마루오카 번 1만 석을 새로 부여받았으나 그것도 사실상 쇼나이 번의 간접지배를 받는 영지라 이름만 영주였으며, 21년 뒤 그가 사망하자 막부는 그 영지를 쇼나이 번에 정식 편입시켜 가토 가문의 개역을 완료하였다. 그래도 자손들은 더 이상 숙청당하지 않은 채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후 메이지 유신 때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아 현재도 일본에 생존해 있다.[12]
1.5 기타
가토 기요마사는 겸창을 즐겨 사용했는데, 한쪽 낫의 길이가 짧은 것이 호랑이에게 물려서 부러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의 겸창은 원래부터 편겸창으로, 한쪽 낫이 없다시피할 뿐, 부러진 흔적은 없다. 덩치가 매우 컸다고 하는데, 사실 왜소한 체구로, 사진에서 보듯이 키높이 뾰족투구를 썼다. 정도는 약하지만 결벽증이 있어서 화장실에는 굽이 매우 높은 게다를 구비해놓고 볼일을 보러 갈때마다 갈아 신었다고 한다. 지금도 쿠마모토 성에 가면 그 게다가 재현되어 있다.
입이 매우 커서 주먹이 들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후세의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가 곧잘 이 흉내를 내보였다고 한다. 또한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도 항상 쌀과 된장을 넣은 군량주머니, 은전 3백 문을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이를 본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왜 허리 무겁게 그러고 다님?"이라고 묻자 기요마사는 "내가 이렇게 모범을 보여야 부하들이 보고 배워 전투 대비를 철저히 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하며, 군량을 허리에 안 찬 부하를 면직시킨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관해서는 일본에서 설화가 전해진다. 가토가 함경도까지 진군했다가 정문부 등의 의병대[13]에 의해 후방이 차단당할 위기에 처하자 보급이 어려워졌다. 게다가 북방의 여진족[14]들의 위협도 있어서 퇴각하는데 보급이 되지 않아 계속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학을 뗀 가토가 그 뒤로는 요대에 항상 비상식량과 돈을 차고 다녔다는 것이다. 혹은 울산성전투에서 겪었던 일이 트라우마가 되서 이런 버릇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조선에서는 '난폭하고 무식하며 욕심이 많은 자'라는 인상이 매우 강하다. 같은 왜장이지만 그래도 평가가 후한 편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대비되어 대악당으로 여겨졌는데, 일본에서도 은연중에 호랑이같이 용맹무쌍한 장군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조총을 중시했고 "총알 앞에 갑옷이 무슨 소용이 있냐"며 군의 경장화를 추진한 선진적인 장군이었다.
말년에는 글을 익혔는지 논어를 붉은 먹을 묻힌 붓으로 밑줄을 쳐가며 읽었다고 한다.[15] 하루는 기르는 원숭이가 자신의 논어에 붓으로 낙서를 하는 것을 보고는 "너도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은 거냐"라며 중얼거렸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한국 입장에서야 그냥 적국의 장수에 불과한 인물이지만, 오늘날 구마모토에서는 지역 스타.[16] 그럴 만도 한게 기요마사가 구마모토의 영주가 되기 전까지는 유력 다이묘가 나타나지 않고 잡다한 지역 유력자들이 분쟁을 일삼다보니 지역이 황폐화된 상태였지만 기요마사가 구마모토를 다스린 이후 치수나 개간에서 성과를 올려 생산량이 늘어났고 이것이 지역 발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울산광역시와 관계가 많은데, 그가 쌓고 주둔했던 울산왜성(학성)과 서생포왜성은 한반도의 왜성 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보존 상태가 나은 편이라 관광지로 일본인들이 많이 찾는다.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에서 포로들을 엄청나게 끌고 갔는데, 위에 나온 구마모토 성을 지은 조선인 포로들이 바로 그 사람들. 지금도 구마모토 현 구마모토 시에는 울산정(町)[17]이라고 하는 역이 있다.(우루산마치역) 60년대까지 행정구역이었고 현재는 역 이름으로만 남아 있는 상태.
의외의 사실로는 적국의 장수인 가토 기요마사를 현의 역사인물로 홍보하고 있는 구마모토 시와 가토가 몇 달을 굶주리며 한때는 죽음을 각오했을 정도로 고전하며 수성전을 펼친 전장인 울산광역시는 자매결연 관계다. 구마모토 현에 의하면 울산시에서는 처음에 이 제안이 왔을 때 당연히 침략자의 고장과 자매결연을 맺기 싫다며 거부했지만, 구마모토 현 측에서 위의 '우루산마치(울산정)'의 명칭이나 기타 일화, 사료 등을 인용해서 가토가 비록 침략자의 입장이기는 했지만 조선을 깔보거나 증오하지 않고, 오히려 어느 정도 조선의 문물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조선을 대하고 있었다며 열심히 설득하고 MBC의 김재철 사장이 중개를 서서 자매결연에 성공했다고 한다.[18] 실제로 우루산마치의 명칭 문제 이외에도 상술했듯이 철병 이후 갑자기 맹장이던 가토가 논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든가, 순화군/임해군을 묶어서 가토에게 바친 조선인 반역자 국경인을 도리어 '자기 주군에게 어찌 이렇게 모욕을 줄 수 있는가!'하고 꾸짖고 포승을 푼 뒤 두 왕자와 그 일행을 잘 대접했다든가 하는 일화에서 볼 때 가토가 조선에 악감정을 갖지 않았거나, 어느 정도 조선의 문물에 영향이나 감명을 받았을 개연성은 부정할 수 없다.불국사는 왜 불태웠는지 의문[19][20]
경상도 민요 중 하나인 '쾌지나 칭칭 나네'의 칭칭이 바로 '가등청정'의 '청정'이라는 설이 있다. '쾌지나 칭칭 나네'는 '쾌재라 청정이 나가네'라는 뜻이라고 한다.
2 대중 매체에서
2.1 신장의 야망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함께 도요토미가의 맹장이다. 마사노리, 다른 칠본창과 달리 지력이 60대 중반을 찍고 정치는 70대 정도 찍는다. 그래서 칠본창 중에서 총합이 제일높다. 구마모토 성을 축성한 인물이라서 축성이 추가된 시리즈에서는 축성이 제일 높게 측정된다. 시나리오에 따라 큐슈 구마모토에서 다이묘로 등장하지만 주변에 라이벌이지만 약한 고니시와 구로다, 다치바나 등이 있고 남쪽에 시마즈가 있어서 어려운 편이다.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는 90/92/64/71 A/B/D/B/D/S/B/S/B의 능력치으로 나온다. 축성이 S이라서 축성부분을 고증이 되었다. 전투력 측면을 보면 족경 전법은 창돌격까지 가지고 있고, 기본적으로 보유한 명마 아이템의 부가 전법 덕분에 기마 3단계인 돌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족경특화의 도요토미 가문에서(...) 다만 기병 특화 가문에 등용되면 쓸만한 무장하겠지만 기병적성이 B이라서 위력이 약간 미묘한 편. 능력치도 부장용이 아니라 단독용으로 쓸만하기 때문에.
삼국지 12에서는 노부나가의 부하로 등장한다. 전법은 전방어강화.
2.2 태합입지전
태합입지전 5 |
태합입지전에서도 전투쪽에 주로 특화된 와중에 건축 4레벨, 광산 2레벨로 내정쪽으로도 쓸모가 있다는게 후쿠시마 마사노리와의 차별점. 지모는 낮은 편이지만 마사노리처럼 바닥까지는 또 아니다. 대신 전투쪽 기능은 족경만 4레벨로 동일하고 마사노리에게 확실히 뒤진다.
2.3 전국무쌍 시리즈
2.4 바사라
자아! 어느 쪽이 강한지 승부 해보자고!
슈팅 게임 바사라2에서는 뭔가 동네 양아치스러운 외모로 등장. 다만 로봇은 꽤 간지난다.
중간보스들 중 1명이다. 이때까지 적장들을 다 잡아 족쳤다면 가토 기요마사 대신에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등장한다.
2.5 그 외
- 천하제일상 거상에서는 쌍검을 사용하는(겉으로만 쌍검일뿐이지, 실제로는 검[21]을 무장한다.) 장수로 등장한다. 폭뢰격이라는 기술을 사용하는데, 자기 주위로 광범위한 폭발을 일으켜 근처의 적에게 타격을 입히는 기술이다.
- 레벨 90부터 도라노스케로 전직할 수 있는데, 타격을 입을때마다 영혼을 충전하여 공격시 충전된 영혼으로 데미지를 주는 기술인 격노일갈과 그림자처럼 변하여 빠르게 이동하는 그림자 이동이라는 기술을 사용한다. 따로 조작을 안해도 공격시 자동으로 발동되지만 근접 공격이라 제대로 아이템을 갖추지 않으면 녹아내린다.[22] 게다가 인공지능이 영 좋지않아 어택땅을 했다가는 적을 제대로 때리지 않고 주위를 맴돌기만 하므로 반드시 타겟을 지정해줘야 한다. 안습. 적의 공격이 잘 명중되지 않을 경우 아군의 공격을 맞고도 격노일갈을 발동할 수 있다. 이를 흔히 "시동을 건다"라고 하는데 휴전부와 같이 활용하여 휴전부로 적을 멈춤 - 아군 공격으로 시동 - 격노일갈로 공격 - 다시 휴전부를 반복하는 방법도 있으나 손이 많이가고 귀찮다. 또다른 기술로는 그림자 이동은 긴 거리를 이동할 수 있고 이동한 거리에 따라 체력을 회복하지만 체력회복량이 꽤 적기 때문에 빠르게 적에게 다가가거나 급히 빠져나올때 활용하는 정도다. 격노일갈 데미지는 체력비례이고 그림자 이동은 딱히 능력치에 영향이 없으므로 생존을 위해서든 딜을 위해서든 스텟은 올체력.
- 여담으로 임진록 시리즈도 그렇고 거상도 그렇고 가토 기요마사의 얼굴이 귀신같이 생긴 터라 2000년대초 어린아이들은 가토 기요마사가 정말로 귀신같이 생긴줄 알았다고 한다. 사실은 그게 얼굴이 아니라 가면이다.
-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에서는 호랑이 수염의 저돌적인 무장으로 나온다. 무장파 다이묘가 안나오거나 비중이 적은 관계로 혼자서 이시다 미츠나리와 고니시 유키나가를 상대하며 깐죽대는 모습이 일상사이다. 늘상 포악하고 잔인무도한 모습으로 나오다가 임해군, 순화군을 사로잡았을때는 태도를 싹 바꿔 갑자기 공손한척 연기하는게 심히 압권이다.
- 효게모노에서는 일본의 유명 복서인 구시켄 요코[23]의 모습과 그 특유의 말투를 고스란히 사용하는 일종의 패러디성 캐릭터가 되어 있다.[24] 매일같이 복싱 연습을 하거나 온화해 보이면서도 도요토미 가문에게 헌신적인 충성을 바치는 모범적인 무사 캐릭터. 할복을 시도하기까지 하면서 이에야스를 설득해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 사이의 융합, 공존을 도모하려 하지만 불운하게도 의도치 않은 병력의 움직임 때문에 '할복 등 쇼를 벌여서 이에야스를 오사카로 꾀어내 기습해서 죽이려 했다'는 오해를 받아 격노한 이에야스에게 암살당하고 두 가문은 적대관계로 치닫게 된다.
- 위 항목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한 암살설을 채용한 것인지, 우에토 아야 주연의 영화 소녀검객 아즈미에서도 도쿠가와쪽 암살자인 아즈미 일행의 목표로서 가토 기요마사가 등장하기도 한다.[25] 카게무샤까지 써 가며 암살을 피하려 하지만, 결국 아즈미에 의해 살해당하는 역. 담당 배우는 다케나카 나오토.
- ↑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불임 증세에 시달렸는데 불임 치료에 호랑이 고기가 효과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기간동안 틈나는 대로 조선 땅의 호랑이를 사냥해서 일본에 보냈다. 이에 당대 조선 사람들이 그를 '호랑이 가토'라 불렀다. 통설로는 호랑이 고기가 불로장생의 명약이라는 말이 있어서 사냥해 바쳤다고 한다.
- ↑ 나이드신 분들은 일본 인명을 한국식 한자독음으로 읽는 경향이 있어서(풍신수길, 이등박문 등이 대표적), 이쪽이 더 익숙하다. '임진록' 같은 책에도 가등청정이라 한다.
- ↑ 카지야 세이베에는 '鍛冶屋清兵衛'라고 쓴다. 다친 기요타다를 거두어서 대장간 일을 가르치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켰는데 카지야(鍛冶)라는 성으로 보아 직업으로 인해 성이 정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 ↑ 혹은 먼 친척
- ↑ 이들은 모두 3000석을 받았는데,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공을 더 인정받아 5000석을 받았다. 흔히 칠본창이라는 명칭 때문에 시즈카타케에서의 히데요시 시동 출신 출격 무장을 7명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이 시기 큰 공을 인정받았던 시동 출신 데뷔 멤버들은 총 아홉 명이다. 그 중 둘은 창이 아닌 무기를 들어서라는 말도 있고 일단 전투 중에서 전사했으므로(..) 칠본창이라 불리우는 듯. 뭐 일단 이 7인 중에서 그나마 메이저급 반열까지 오른 것은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 뿐이니 아무래도 좋을지도.
- ↑ 대대로 해당 주군을 모셔온 집안
- ↑ NHK 2006년 대하드라마 공명의 갈림길에서는 아예 히데요시가 가토와 고니시의 사이가 안좋은 것을 알고 경쟁붙이기 위해 히젠 반국씩 나눠준 것으로 나온다.
- ↑ 전쟁 직후 동래성 함락 및 신립 격파 등 큰 전투는 모두 고니시가 했는데도 고니시가 먼저 한성에 들어왔다.
- ↑ 선조의 파천 이후 노비들이 노비 문서가 있는 장예원을 불태우면서 같이 불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실록 등에도 '풍문이 그러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 쪽 종군 승려들의 기록에는 고니시 휘하 부대가 한성에 왔을 때는 궁궐이 온전했으나, 가토 휘하 부대가 왔을 때는 얼마 안 되어 불탔다는 기록이 나오는 걸 보면 가토 휘하 부대가 방화했을 가능성이 높다.
- ↑ 청나라 건국자 누르하치가 있었던 부근이다.
- ↑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통신사의 기행문에는 대놓고 '이에야스가 독살했다'고 쓰여있기도 하다.
- ↑ 다만 대부분의 다이묘들은 일족 자체가 끊긴 경우는 드물고 영지를 몰수당한다고 해도 무사 신분을 유지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그냥 평민으로 떨어뜨리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 ↑ 정확히 정문부의 의병이라고 지칭하지는 않고 조선 의병이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여진족이라고도 한다.
- ↑ 이에 관해서는 조선 의병들이기에는 지나치게 사납다고 생각한 가토가 여진족이라고 우겼다는 말도 있다.
- ↑ 말년에 학문을 익히기 시작하고, 마침 임진왜란으로 조선에서 빼앗아온 서적이나 납치해온 학자 등을 통해 소양을 기르기 시작한 마에다 토시이에가 권유하여서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도요토미 정권의 중신이자 사적으로도 도요토미가와 친했던, 친한 삼촌같은 존재(즉, 맹장형의 무인에게 권유 및 설득이 가능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기에 설득력은 있는 편이지만 자료가 워낙 적어서 진의는 불명
- ↑ 다케다 신겐이 야마나시 지역 스타가 된 것이나, 다테 마사무네가 이와테 지역 스타가 된 것과 비슷한 예다.
- ↑ 한국으로 치면 울산동
- ↑ 해당 홈페이지에서는 김재철 사장의 공로에 대해서 특별히 감사한다며 이름을 크게 명기해 놓고 있다.
- ↑ 항목을 참조하자.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 ↑ 그런데 다르게 생각하면 기요마사가 조선의 왕자들을 잡아온 국경인을 꾸짖고 왕자들을 잘 대접했다는 사실을 갖고 꼭 기요마사가 조선의 문물에 감명을 받았을지 모른다는 식의 추론을 내기도 뭐한 것이, 기요마사 정도의 무장이면 오히려 자신이 잡은 조선의 왕자들을 내세워 앞으로의 전쟁에서 써먹을 데가 더 많을 거라는 지극히 당연하고 냉철한 판단에서 그랬을 가능성이 더 크다. 왕자들을 반환하는 조건으로 선조한테서 몸값 좀 받아낸다거나, 포로로 잡은 왕자들을 잘 대접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저항하는 조선인들을 회유한다거나 하는 점령지의 기존 지배 세력을 회유, 포섭해서 점령지 통치를 보다 수월하게 한다는 시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사례가 상당히 많다.
- ↑ 천하제일상 거상에는 도검류와 쌍검류라는 두 가지 다른 계통의 무기가 존재한다.
- ↑ 제대로 활용하려면 추가스텟을 주는 백의종군을 300까지 찍고 레벨 200이상에서 태황셋을 다 갖춘후 오행기의 생사결까지 있어야 그나마 할만하다.
- ↑ 하지만 쿠마모토 출신인 키요마사와 달리 구시켄 요코는 오키나와 출신이다.
- ↑ 임해군인지 순화군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가토가 사로잡은 조선의 왕자는 욘사마의 얼굴로 나와서 장동건의 CF의 유명한 대사를 하는 등 한류 패러디 캐릭터로 표현된다. 한류에 약한 일본인 아줌마 시녀를 꼬셔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가토에게 원투 펀치를 얻어맞는다(...)
- ↑ 원작 만화의 3권까지의 이야기를 영상화 한 것이 영화 1작쩨이므로 아마도 원작에서도 등장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