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김성근의 저주
목차
1 개요
KBO 리그의 유명한 저주 중 하나이며 김성근을 감독직에서 자른 팀은 그 이후 암흑기에 빠지는 것을 일컫는 말인 김성근의 저주에 대한 반론이다. 사실 김성근의 저주 자체가 쌍방울을 제외하면 대부분 본인이 팀을 파국으로 몰아넣고, 장기적인 리빌딩에 절대적으로 부적합하게 팀 운용을 했기 때문에 나오는 증상이다. 카페인의 힘을 빌려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고 해서 그 다음날 잠을 자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다. 물론 예전에야 대부분의 KBO 리그 팀이 주먹구구식 운영을 했고, 프런트가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근시안적이었고, FA제도가 없거나 미흡했던 만큼, 가용한 선수를 단기간 혹사와 강훈으로 우려내는 김성근이 야구가 그나마 통할 수 있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야구에서 그것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고, 본인도 SK 시절부터는 FA선수를 왜 잡아주지 않냐며[1] 징징대더니 아예 한화에 와서는 2년 간 200억이 넘는 돈을 FA에 쏟아 '버리며' 스스로 저주를 갱신하고 있다. 물론 자서전이나 각종 강연, 인터뷰에서는 항상 선수 '육성'에 대한 필요성과 책임을 강조한다(...). 그의 언행불일치를 보면 저주가 생길 만도 한 것이다.
아래는 각 사례.
2 구단별 저주에 대한 변호들
2.1 OB 베어스-5꼴꼴(578)
88년 말 김성근 대 이광환의 구단 내 파워게임에서 김성근이 지고 이광환이 이기면서 일단락되었지만, 해임된 김성근은 보복으로 자기 휘하의 코치들을 데리고 태평양 돌핀스로 팀을 옮겼다.
감독이 된 이광환은 '자율 야구'를 주장하며 그의 야구관을 팀에 이식하려 했으나 제대로 된 개념이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자율야구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90년 시즌 중반 중도 사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후임인 이재우도 부진한 성적을 보여준 끝에 91시즌 도중 경질된다.
결과적으로 OB의 추락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야구관이 당시 사정과 맞지 않으면서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2.2 태평양 돌핀스-568
이쪽은 박영길이 91시즌 부임 이후 팀 컬러를 타격 강화 쪽에 맞추려다 실패한 케이스. 박영길은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감독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타자들에게 장타를 강조하는 메이저리그식 빅볼 야구를 추구하는 인물이다.[3] 그러나 짠물 돌핀스라는 소리를 듣던 태평양에는 박영길식 타격이론을 소화할만한 타자 자체가 많지 않았고, 전임 김성근 감독의 선수들에게 지도했던 번트와 작전위주의 스몰볼과 충돌하면서 성적 부진으로 이어진 것이다.[4] 사실 김성근의 스몰볼이던 박영길의 빅볼이던 태평양은 어차피 점수는 못내는 팀이었다. 단지 리그에서 손꼽히는 역대급 투수진으로 부족한 공격력까지 메꿔왔을뿐.
그러나 김성근이 짤리고 나서 혹사의 후유증으로 그 투수진조차 문제가 생긴것이다. 일단 박영길 감독은 첫해인 1991시즌을 맞이하면서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 양상문, 박은진 등으로 주력 선발진을 꾸렸다. 처음에는 부상 없이 한 시즌을 보내나 싶었지만 얼마안가서 김성근 시절의 혹사 여파가 나타나면서 1군 투수들이 하나둘 수술대에 올랐고 92~93시즌에는 투수진의 거의 대부분이 팀은 추스를 수 없는 수준까지 망가졌다. 특히 젊은 투수들의 피해가 심했다.
박정현은 김성근 재임 시절 단 2년만에 페넌트레이스 430이닝을 던졌고, 준플레이오프 시리즈 단 한 번에 18.2이닝을 던졌다. 89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이렇게 던지다가 결국 경기 도중 마운드에 주저앉아서 그대로 실려갔다. 2시즌동안 400이닝을 던진 그는, 이후 9년을 더 뛰었지만 겨우 600이닝을 더 던지고 은퇴해야 했다.
1987년 입단해 88년까지 20이닝을 소화한 데 그쳤던 최창호도 김성근 부임 시절 2시즌동안 420이닝을 던지는 엽기적인 혹사를 당했다. 그는 91년에는 숫제 233이닝을 던지며 이 부분 리그 1위까지 차지하지만, 이런 앞뒤없는 혹사는 결국 본인에게 독으로 돌아와서 92년 부상으로 나가 떨어졌다.
정명원도 김성근 시절 들어온 신인. 첫 해 139이닝을 소화하며 11승을 거두고 좋은 성적을 뽑아냈지만, 바로 부상으로 연결되었다(...). 이듬해 거하게 망가졌고, 이후 그의 커리어 대부분은 구원진에서 뛰며 작성하게 된다. 신인 때 혹사 이후 10년이 지난 98년이 되어서야 그는 전업 선발로서 재기할 수 있었다.
이것만 봐도 김성근의 저주는 김성근 본인이 스스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2.3 삼성 라이온즈-556
김성근을 잘라 일어난 저주가 아닌, 김성근 스스로가 불러 일으킨 대표적인 저주
우선 김성근의 삼성 시절은 이만수, 강기웅, 류중일 등 기존 선수들과의 대립이 있었다. 또한 신경식, 조범현 같은 자기 제자들을 대거 영입했는데 이게 성공적이지 못해서 팀 체질 개선에 실패하였으며 김성길, 류명선, 오봉옥 등의 투수 혹사 문제까지 있었다. 특히 김성길 혹사는 엽기적인 수준으로 36살 노장 투수를 14번의 선발 등판을 포함해서 중간계투 겸 중무리 겸 패전처리로 마구잡이 등판시켜서 57경기 188이닝을 던지게 했다. 그리고 김성길은 구위가 확연히 떨어져서 다음해에는 거의 배팅볼러로 전락해버렸다. 투수혹사가 일반적이던 당시에도 김성근 감독의 김성길 기용을 정면 비판하는 신문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즉 기존 선수와의 불화+선수영입 실패+투수혹사라는 3콤보가 합쳐져서 세대교체 실패와 팀케미스트리 악화를 불러왔으며, 최종적으로 팀을 556이라는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로 몰아넣었다.
김성래, 성준, 김상엽 등 주력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이 있었더라도 자기와 연관있는 선수들만을 기용하는 김성근의 운영 방식은 큰 비판을 받았으며, 해임 이후 삼성은 우용득 취임 직후 김성근 커넥션을 정리하게 된다.[5] 그 결과 93년 삼성은 부상 선수들의 부활과 양준혁, 박충식 등 신인 플레이어들의 활약으로 준우승을 차지했으나, 김성근 재임 기간동안 실패한 세대 교체 문제 등이 문제되어 94년~96년에 삼성은556의 침체기를 보내게 되었다.
이후 96년 백인천이 취임하면서 삼성은 대대적인 리빌딩을 단행하였고,[6][7] 그 과정에서 일부 선수와 트러블이 생겼으며 취임 해는 6위를 기록하긴 했으나 리빌딩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팀은 다시 강호로 올라설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김성근 시절의 삼성은 올드팬들에겐 556 암흑기보다도 더 야구보기 싫었던 시절로 기억되는데, 투수혹사는 혹사대로 시키고 본인 사단만 기용했으며 성적은 성적대로 못냈기 때문.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올드팬들에게는 김성근이 선동열 보다도 못한 놈취급을 받고 있다. 선 감독은 그나마 2회 우승이라는 결과물이라도 어찌어찌 있었으나, 김 감독 시절은 세대 교체 실패+팀케미스트리 악화+팬심 악화+영 좋지 않은 성적이라는 콤보로 인해서 평가가 매우 박하다. 자세한 것은 김성근/지도자 경력 참고.
요약하자면 위의 말처럼 이 부분은 김성근을 잘라 일어난 저주가 아닌, 김성근 스스로가 불러 일으킨 저주이다.
2.4 쌍방울 레이더스-해체
모기업이 경제위기로 무너져서 해체되었을 뿐, 김성근의 저주와는 별다른 관련은 없다.
다만 김성근이 쌍방울에서 성적을 내던 시기, 팀연봉이 리그 전체 1위였다는 사실(1997년)이 2016년 새롭게 발굴되며 '헝그리 정신'으로 기억되던 쌍방울 돌격대의 이미지 역시 많이 흐릿해진 상태.[8]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진 이후 모기업 쌍방울의 재정은 날로 악화되어 갔고, 박경완을 시작으로 김광림, 김현욱, 김기태, 김실, 조규제 등 주전 선수들이 대거 팔려가기 시작하며 전력이 약해지기 시작한다. 트레이드 상대로 넘어온 선수들은 김갑중, 공의식, 양용모, 이계성, 박정현, 김형남, 이근엽, 가내영인데 이 선수들중 박정현을 빼면 모두 소리없이 은퇴해 잊혀질 정도로 별 활약을 펼치지 못한 상대적으로 무명인 선수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팀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건 당연했고, 그나마 박정현은 한때 신인왕을 수상했던 적이 있었지만 트레이드 시점에서는 퇴물에 불과했다.
그리고 99시즌 전 KBO에서는 쌍방울에게 구단 유지를 위해 최소 승률 3할을 맞추라는 조건을 내걸었지만 막장이 된 전력으로 이를 맞추는 건 어려운 일이었고 결국 7월 올스타전 기간에 김성근은 해고당한다. 결국 역대 최다패와 한 시즌 최소 관중의 굴욕을 맛본 쌍방울은 2000년 2월 해체의 운명을 맞이, 3월 SK 와이번스로 재창단하며 인천으로 연고를 정하면서 전주와 군산과는 영원한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
2.5 LG 트윈스-6668587667
2002년 한국시리즈 이후 벌어진 김성근의 해임은 프런트와 감독 간의 갈등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2001년 시즌 후 정식 감독으로 승격한 김성근을 지원해 준 최종준 단장이 물러나고[9] 유성민 단장이 부임, 2002년에 90년대 전성기를 이끈 단장 출신 어윤태가 사장으로 들어오며 본격적인 갈등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어윤태는 고려대학교 인맥을 이용하여 이광환을 차기 감독으로 내정하고 김성근을 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갔으며, 시즌 중 기회를 보아 김성근을 해임하려 했지만 성적이 좋아 실패, 결국 한국시리즈에서의 준우승을 명분으로 김성근을 해임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팬들 사이에서 반대 움직임이 있었지만 잠잠해졌으며 LG 프런트는 2003년~04년 팀의 핵심 선수였던 이상훈, 유지현, 김재현을 이적 혹은 은퇴를 시키면서 정리하게 되었고 이에 반발한 이광환을 2군으로 좌천시키며 이순철을 감독으로 옹립, 결과적으로 김성근 해임을 시작으로 6668587667의 장대한 비밀번호 서막을 열게 되었다.
2.6 SK 와이번스
김성근을 이겨낸 진정한 신흥 야구명가
김성근 감독이 SK에서 물러난 이후 SK는 2012년까지 2년 연속 준우승을 하며 연착륙에 성공한다. 하지만 특별한 전력보강 없이 선수단의 노쇠화가 계속되었고, 김성근이 저지른 혹사는 군데군데에서 아픈 비수가 되어 날라왔다. 당장 2009년 전천후로 투입되어 133이닝을 던지는 등 무지막지하게 굴려진 전병두는 이후 당겨쓰기 등으로 인해 어깨 부상이 더욱더 심해지며 1군에서 자취를 감췄고,[10] 채병용과 고효준은 30세가 될때까지 군문제도 해결 못하다가[11] 군 팀 입단 가능 나이가 넘어버리며 뒤늦게 공익으로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떠났으며, 이승호와 정대현도 노쇠화가 뚜렸했지만 어쨌든 떠나버렸다.
타선에서도 박재홍, 김재현 등이 은퇴수순을 밟았고, 미래를 위한 유망주를 키우지 않는 김성근의 극단적인 성향 속에서 권용관과 최동수 등 미래와 맞바꾼 노장선수가 트레이드로 오는가 하면 반쪽짜리 역할만 강요당하던 모창민과 이재원이 2010년 말 김성근을 따돌리고 구단과 상의해서 미래를 위해 군야구단에 입단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진 상태였다.
이처럼 외부 전력보강도 없고 유망주의 1군 정착도 더디고 선수단 평균연령만 높아지던 2013시즌에는 이만수 감독의 운영능력까지 한계에 부딪히며 6위를 마크, 이어 2014시즌에는 더욱 답이 없는 상황에 처하며 시즌 중반 8위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시즌 막판에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주며 LG와 치열한 4위경쟁을 했고, 오히려 전시즌보다 높은 5위를 기록했다. 게다가 리빌딩의 전조까지. 아무쪼록 김성근이 쏟아부은 저주를 잘 막아내는 SK의 모습이다. 다만 2015시즌 시작 전에는 삼성의 5연패를 저지할 가장 강력한 후보로 꼽혔으나 정작 결과가...
2.7 한화 이글스
이 팀은 감독의 존재 자체가 가장 강력한 저주로 작동하고 있는 모양새. 2015년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저주의 징후가 보이더니, 2016년으로 접어들면서는 아예 파국으로 접어들었다. 그간 5886899를 한화의 암흑기라고 지칭했지만, 2015년부터 더욱 강력한, 새로운 암흑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김성근/2015년, 김성근/2016년 및 한화 이글스/2015년, 한화 이글스/2016년 참조.
3 그 외
김성근의 옹호자들이 곧잘 하는소리가 김성근의 스몰볼은 팀 사정상 어쩔 수 없이 하는거고 강타자들을 많이 보유한 팀이었다면 10년 롯데 같은 타격야구를 했을지 모른다는 소리다. 물론 실제로 전력이 약한 팀을 맡았던 적도 많았지만 이건 앞뒤 안재고 이 팀은 골 많이 넣으니까 공격축구한다하는 것과 똑같은 소리다. 무리뉴 시절 첼시는 득점력도 리그에서 손꼽힐 만한 팀이었지만 아무도 무리뉴보고 공격축구한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공격야구, 수비야구를 가르는 건 단순히 득점력이나 타율이 아니라 감독의 팀 운영 방법론과 육성과정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김성근은 프런트에서 맘먹고 지원해준 삼성 시절조차 스몰볼을 버리지 않은 감독이다. 프로스포츠에 조금만 관심있는 사람이면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닌게 감독의 취향이란건 팀 옮긴다고 바뀌는게 아니다. 그 부분에서 좀 더 발전해갈 순 있어도 성향이 바뀌는 감독은 없다.- ↑ LG와 SK 감독 재임 시절에는 오히려 내부 FA였던 양준혁과 이진영을 잡지도 못하고 타팀에 내주는 등 김성근은 FA와 인연이 없었다. 이후 한화에서야 감독 생활 최초로 FA 선수를 받아보게 되었다.
- ↑ 그리고 약 3년이 지나고서 시대를 앞서간 야구관은 연고지 라이벌 팀에서 제대로 흥했다.
- ↑ 1987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에는 팀타율 3할을 달성한적도 있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투고타저였던 1980년대에 팀타율 3할이란건 어마어마한 기록이다. 1987년의 삼성은 KBO리그 역사상 공격력으로는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갈 팀으로 꼽히고 있다.
- ↑ 참고로 태평양은 역대 최악의 타선을 가지고 있던 팀 이었다. 이런상황에서 명타자 출신 감독이 왔으니 흥할수가 없었다.
- ↑ 조범현은 1992시즌 끝나고 방출되며, 신경식,김성길은 정영규를 상대로 쌍방울로 트레이드 됐다.
- ↑ 이 무렵, 백인천은 기존의 노쇠한 김성래,강기웅과 이종두,김성현,박선일을 정리하고, 젊은 선수들을 기용했다. 흔히 이만수도 이때 버려졌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지만, 백인천은 백업포수,지명타자,대타,대수비로 이만수에게 기회를 줬다.
- ↑ 이 무렵
포수 김영진1루 이승엽, 2루 정경배, 유격 김태균, 3루 김한수로 내야진은 몇년간 고정되며, 외야진도 양준혁과 신동주, 그리고 트레이드로 영입한 김종훈이 지키게 된다. 모두 백인천 재임기엔 20대의 젊은 선수들 이었다. - ↑ 사실 김성근이 가는 팀은 일시적으로 선수를 혹사시켜 성적을 쥐어짜내면서 페이롤이 올라간다. 그래서 SK 역시 2009~2011 연속 페이롤 1위를 차지했다. 다만 삼성을 폭망시킨 90년에는 KBO리그에서 공식적인 페이롤 집계를 하지 않았고, 비공식적으로 삼성이 항상 1위였던 것으로만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삼성은 1993년 집계시작 이후에도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페이롤 1위를 마크하였다. 그 특별한 상황이 가장 많이 연출된 것이 김성근이 이끄는 팀이었다는 게 또다른 뒷모습.
- ↑ 사실 최종준 전 단장은 이광은과의 학연이 있었다. 하지만 부진하자 김성근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이광은을 쳐냈다.
- ↑ 결국 5년간 1군에서 사라지며 재활만 해오다가 2016년 9월 은퇴를 선언했다.
- ↑ 김성근은 본인이 감독으로 있는 동안 선수들 군문제를 절대로 처리하지 않는다. 군대 가야 할 연령대가 넘어도 어지간해선 보내지 않으며, 수술이 필요한 선수도 최대한 다 재활로 묶어버린다. 전자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채병용과 고효준이고, 전병두가 2009년 이미 수술소견이 나왔으나 김성근이 지정한 병원에서 재활소견이 나온 뒤 2010년 5월 복귀한 것이 후자의 단적인 사례. 한화에서도 똑같이 그 짓을 하려고 하자 선수 본인이 감독과 야구 못하겠다고 은퇴를 선언하는가 하면, 다른 팀에서는 선수를 공짜로 주워가기도 하는 등 막장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화가 이미 선수단의 군문제로 오랫동안 시름을 겪은 팀이라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