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평가

1 성격

장점도 소신과 고집, 단점도 소신과 고집

  • 아주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다. 고집이 강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서슴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출처
  • 자신의 목소리를 소신있게 내는건 좋지만, 반대 의견이 나오면 그것을 무시하거나 사퇴를 거론하는 부분은 양날의 검이다. 그런 모습이 강직하고 소신있는 모습으로 비춰지는 경우도 있으나, 때론 벼랑끝 전술을 쓰는 고집불통으로 비춰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경제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이라는 비판이 있다. 정치적 경험은 없다. 즉,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집단 내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반발을 어루만지며 무난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재주는 없다는 뜻이다. 그저 '전권'을 위임받아 독선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현실화 할 줄 아는 전형적인 고위 관료 스타일이다라는 비판이 있다. 출처
  • ‘소신’하면 김종인 의원도 만만치 않다. 그는 정치권에서도 정당을 초월한 소신있는 언행으로 유명하며 당을 초월한 의원들의 모임인 ‘조화로운 사회를 위한 모임’을 이끌고 있다. 출처
  • 새누리당에는 대선 때 김 위원장의 공(功)을 인정하면서도 "그와 함께 일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당시 김 위원장과 일했던 한 관계자는 "김 위원장은 자리를 맡으면 전권 행사를 요구하는 스타일이어서 기존 조직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사퇴 카드 등을 던져 불협화음을 일으켰다"고 했다. 출처
  • 광주를 찾은 김 위원장이 가장 먼저 한 일도 5ㆍ18 유족회 등 관련 단체를 만나 자신의 국보위 이력을 사과하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김 위원장의 행동에 기자들은 물론 의원들까지 모두 놀랐다. 평소 ‘독불장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신의 고집을 쉽게 꺾지 않는 성격의 그였기 때문이다. 출처
  • 고집불통이란 별명을 얻으면서도 정말로 고집스럽게 반재벌 입장을 유지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직선적인 성격에 원리원칙주의자로 6공 경제수석 시절에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친인척과 마찰을 빚기도 했고 정권말기 당시 노대통령이 추진하던 이동통신 사업에 대해서는 '국민의 의혹을 살 수 있으니 진행하면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출처
  • 정치인 김종인의 행보는 다소 어지러워 보였어도, 경제학자 김종인의 행보는 30여 년 동안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적어도 경제학적 일관성면에서만큼은 자신이 가진 철학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출처
  • 비례대표 4번 동안 법률안 발의가 0편이었다고 한다. 출처 의원 활동을 무려 4번이나 역임했는데, 소위 '경제민주화의 상징'이라면서 이에 대한 경제 법안 발의가 하나도 없는 것은 정말 의아한 일. 80년대 군사독재 시절 국회의원은 시절이 시절이라 국회의원이 명목상이었다 치더라도 하더도, 2004년 새천년민주당 시절 비례대표 당시에도 법안 발의가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에 새천년민주당에서 부대표 직함을 주며 우대하였는데, 본인의 요구 사항이 대표나 당론으로 통하지 않자, 부대표임에도 그 직도 내놓지 않고 당무도 거부하고 당사에 나오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출처 자세한 사항은 추가 바람.

2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

예전부터 수많은 진보적 정치, 경제 전문가들(예를 들어 한성대학교 김상조 교수)로부터 정무적 감각과 경제 정책의 전문성을 모두 갖춘 인물로 평가받아왔다. 호남 출신의 내공 있는 경제 분야 테크노크라트로,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아왔던 인물.

그러다가 갑자기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박근혜 대선 캠프에 합류해 박근혜정부 출범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실정으로 새누리당에 대한 민심이 나빴던 상황에서, 박근혜이명박과 달리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필 것이고, 재벌들의 전횡에도 철퇴를 내릴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주었던 것. 그리고 김병로 선생의 손자로서 호남 출신의 명문가[1]의 자제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박근혜 당시 후보가 호남에 대해 우호적일 것이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도 공헌했다. 그 결과 한화갑, 한광옥 등이 박근혜를 지지하게 만들었고, 호남에서 상당히 많은 박근혜 표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참하게 토사구팽 당했다. 포털 사이트들에 '김종인'을 검색하면 '토사구팽'이 연관검색어로 등장하고(...) 손석희 사장도 '토사구팽' 당했다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할 정도(...)[2] 이준석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에 의하면 박근혜정부정도전이 된 인물.

3 더불어민주당의 구원자

그후 더불어민주당의 선거대책위원장 겸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전격 영입되었을 때에는 과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전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진보 진영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대표적인 진보 정치인인 노회찬 정의당 전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의 김종인 영입 소식에 대해 "오랜만에 더불어민주당이 예뻐 보인다. 한국의 보수가 김종인 박사 정도의 노선이라면 이 나라는 훨씬 좋은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고 긍정 평가를 내렸을 정도.#[3]

하지만 김종인 대표가 지난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이 했었던 '지역구 나눠먹기식 당 대 당 야권 연대'를 거부하는 바람에[4] 지역구 선거 경쟁력이 극도로 약한 정의당이 지역구 선거에서 노회찬, 심상정을 빼고 모두 패배하자 정의당 지지자들에게는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받게 됐다. 썰전에서도 유시민 작가가 김종인 대표를 언급할 땐 사적인 감정이 잔뜩 실려 있는 게 보인다 카더라

영입 이후 더불어민주당의 분열 흐름은 잠잠해졌고, 국민의당으로 탈당하던 흐름 역시 멈추었다.[5] 탈당의 흐름이 멈추자 전세는 역전되어 거꾸로 국민의당으로 탈당한 사람들이 고립되었다.[6][7]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의 대표가 된 뒤 한 두 달 만에 탁월한 식견과 정무 감각으로 당의 지지율을 끌어 올렸다. 본래 더민주의 고질병 중의 하나가 '불복의 문화'였다. 그 정도로 내부적 총질과 돌출 행동이 난무했었고 이로 인한 거부감이 높았는데[8] 김종인 대표 취임 이후 분란이나 책잡힐 행동을 할 여지가 있는 사람들은 전부 걸러지거나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김종인 중심으로 철저하게 단합하여 일사분란한 모습을 보였다. [9]

특히 필리버스터 중단으로 인해 나빠졌던 당 상황을 '야권 통합론' 제시로써 단숨에 역전시킨 것은 그 백미였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대로 진보 정당과의 연대를 거부함으로써[10] 새누리당더민주를 상대로 오랫동안 우려먹던 여러가지 공세의 여지를 싹 차단시키고, 중도표 획득에서 유리한 여지를 점한 것 또한 무시 못할 업적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김종인을 '기레기 조련사'라 불렀고,관련 글 참조 일부 지지자들에게서는 '갓종인'으로 추앙을 받았을 정도. 관련 글 참조

실제로 총선 승리도 승리지만 이후 진보 진영이 메갈리아 옹호 논란으로 비토를 받는 와중에도 더민주는 여기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으니 지지자들이 생길 수 밖에 없다.[11] 이후 리쌍 곱창집 사건에서도 당 공식 차원의 입장을 내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정의당클로저스 성우 교체 논란에 끼어들었다가 자멸하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정의당 앞으로도 줄 자리 없다.

사드 배치 문제에 대해서도 김종인 대표의 현실적인 정무 감각은 훗날 빛을 발했다는 평을 듣는다. 박근혜정부사드경북에 배치하겠다고 했을 때 당연히 반대 입장을 표명할 줄 알았던 더불어민주당은 '찬성하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반대하는 것도 아님. 신중하게 결정하자능'이라는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대응 방식을 내놓았다.

물론 진보 성향의 지지자들은 김 대표의 '전략적 모호성' 대응을 비판했고 지금도 비판하고 있지만, 김 대표는 이러한 신중론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더민주의 지지율이 잠깐 출렁이긴 했지만 뒤의 결과를 보면 '전략적 모호성' 대응은 현명한 부분이 있었다는 게 어느 정도 검증이 됐다.

우선 북한SLBM을 발사하고, 다섯 번 째 핵실험을 강행하는 등 연일 무력 도발을 일삼는 것에 대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사드 배치의 당위성을 점점 인정해가고 있는데, 더민주는 일찌감치 '신중하게 결정하자'는 입장을 내놓은 덕분에 보수 진영으로부터 안보 공세를 받을 건덕지가 없었다.

국민의당은 재빨리 사드 배치 반대를 당론으로 채택했지만 이후에 벌어진 안보 상황들 때문에 보수 진영 지지자들로부터 외면을 받았고, 그로 인해 스텝이 꼬여 이제 와서는 더불어민주당과 비슷한 신중론 쪽으로 당론을 바꾸려고 하는 걸로 알려졌다.#

진보 성향이 강한 지지자들이야 비겁하다고, 싸워야 한다고 비판을 한다지만, 더민주의 전략적 모호성 전술이 현실에서 적지 않은 효과를 본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추미애 대표도 당대표 경선 때에는 사드 배치 반대를 당론으로 채택할 것처럼 이야기하다가, 막상 당대표가 된 뒤에는 당론 채택을 계속 연기하면서 김종인 전 대표의 신중론 전략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4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 이후 논란

그러나 그 후 공천과 관련된 그의 행보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4.1 공천 칼바람에 대한 비판

김종인 대표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은 김종인의 공천이 친정(親政) 공천이라는 것이다. 더민주에서 지난 1년간 쌓아온 혁신 결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문재인 대표는 인적 요소가 개입되지 않고 각 분야 점수를 종합하여 컴퓨터로 당락 여부를 가리는 시스템 공천 하에서 컷오프가 이루어지는 제도를 만들고 물러났다. 그러나 김종인 대표는 이러한 시스템 공천 제도를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지극히 불투명한 기준,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친노 세력들을 솎아내버렸다.

실제로 김종인 대표가 직접 매체에 '친노 솎아내기'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종편에 출연하여 자당 공천 방향을 친노 세력 정리라고 소개하였다. 보수 언론 및 국민의당에서 특정인을 찍어서 누구누구 떨어뜨려라 요구하였고, 김종인 대표도 그에 호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의원들이 탈락하자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은 동요하였다.

썰전에서 정의당 소속 유시민 작가는 더불어민주당이 왕정으로 돌아갔다고 비난했다. 비교하기 그렇지만,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상황은 마치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혼란의 혼란을 거듭하는 프랑스와 비슷하다. 그리고 프랑스 공화국은 민주주의 대신 왕정 즉, 나폴레옹을 선택했다. 만약 총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면 김종인 대표의 위치는 아주 견고해질 것으로 보인다. 김종인 대표를 비토하는 사람들은 그가 총선에서 이기더라도 나폴레옹처럼 황제가 될지, 아니면 워싱턴 대통령처럼 민주주의를 지킬 지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총선 실제 결과는 지지자들의 예상을 완벽하게 빗나간 더민주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특히 다른 야당들과의 당 대 당 야권 연대 없이 승리한 뒤 더불어민주당은 전례 없는 태평성대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문재인 전 대표의 당 장악력이 몰라볼 정도로 막강해져 '제발 한 번만이라도 당이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고 싶다'던 지지자들에게 실제로 일사불란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4.2 중도 싸움을 위한 고육지책, 그리고 차도살인설

김 대표가 정청래 의원과 이해찬 의원을 자른 이유에 대해서는, 이를 이른바 '중원 공략'의 차원에서 그랬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태껏 민주당이 번번히 새누리당에 진 이유는 바로 이 중도 싸움에서 밀렸기 때문이며, 게다가 이번에는 국민의당으로 분당까지 되었기 때문에 호남 유권자를 잡는 게 매우 중요한 이상, 이러한 고육지책을 썼다는 것이다.

중도 무당파층과 호남 유권자층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는 기존 민주당에 덧씌어진 악질적인 두 가지 이미지를 해소시켜야 한다.

하나는 '대화와 타협 보다는 투쟁만을 고집하는 운동권 정당'이라는 이미지와 호남을 소외시킨 '친노 패권 정당'이란 이미지다.

여기서 정말 민주당운동권 정당이며 친노계가 패권을 쥐고 있는 정당이냐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까지 보수 세력과 호남 비노계의 지속적이고 악의적인 프로파간다가 중도 무당파층과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호남 유권자들에게 어느 정도 먹혔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은 번번히 중요 선거에서 새누리당에게 졌으며 국민의당은 한때 호남에서 민주당을 여론조사에서 압도했었다.

이 두 가지 이미지를 불식시키거나 최소한 희석시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에 따르는 상징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싸움만 하는 운동권 정당 이미지와 친노 정당 이미지 각각을 대표하는 인물로 정청래 의원과 이해찬 의원을 선정해 잘라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운동권 정당과 친노 정당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대안 야당으로서 박근혜정부의 경제 실정에 집중한다면 중도 유권자들과 방황하는 호남 유권자들을 잡을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다만, 친노 & 비노 이런 구분이 어떤 실체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유념해 두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친노라고 불리는 의원 20~40명과 나머지는 적게는 3~4명, 또는 10여명의 인맥으로 이뤄진 그룹 몇 개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계파 정치'라는 것인데, 김종인 대표는 더불어민주당에 영입된 직후에는 "친노 패권은 모르겠는데, 분명한 것은 비노계가 훨씬 더 많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뒤에는 친노, 친문 주류와 갈등,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2, 3차 컷오프를 진행하면서 문재인 전 대표가 강력한 당권을 휘두른 적이 없었으니 친노 패권주의라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셋째 아들인 김홍걸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객원교수는 "친노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확실한 것은 친문 의원은 1명 밖에 없더라" 하는 말을 했었다.

친노 세력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호남의 보수층에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후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 되면서 현재 종편을 비롯한 조중동 등 보수 언론에서 기정 사실처럼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지만, 조중동 뿐만 아니라 다른 언론에서도 친노라는 용어는 널리 사용되고 있다. 친노가 없으면 친박은 뭐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친노 혹은 친문계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당사자들 이야기이지, 언론과 대체적인 평가는 더불어민주당의 주류는 친노 혹은 친문이 다수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친노가 일시적으로 후퇴하였으나 이명박 정부의 거듭된 실정으로 전임자였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이 되살아났으며 그 바람을 타고 2012년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가 취임하면서 친노, 친문이 주류를 형성했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정청래 의원, 이해찬 전 총리 등은 탈락했는데 친노무현 & 친문재인 성향의 초, 재선 의원들은 많이 살아남은 것을 두고 "상징성이 있는 중진들은 뽑아내고 경쟁력을 갖춘 초, 재선 현역 의원들에겐 기회를 주는 전략이 아니겠느냐"는 분석도 있다.

5선의 문희상 의원, 3선의 유인태 의원, 노영민 의원 등 ‘현역 하위 20% 컷오프’에서 1차로 물갈이된 인사들과 4차 컷오프에서 이해찬 전 총리와 함께 공천에서 탈락한 5선의 이미경 의원은 대체로 문재인 전 대표와 가까운 주류 쪽 중진들, 즉 올드보이들이다.

반면 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도 가까웠고 문재인 전 대표와도 가까웠던 김태년, 홍영표, 박남춘, 전해철, 백원우 등 초선, 재선 의원들에겐 단수 공천을 주었다. 기사

그러한 연유로 컷오프 파동은 일반적인 주장과는 다르게 꼼꼼히 살펴보면 그저 모두 존재감이 큰 거물들이라 그냥 일이 커 보이는 것일 뿐인 착시 현상이라는 말도 있다.

이러한 지적을 하는 사람들은 "김종인 대표가 친노를 공천 학살했다."는 주장은 과장이라고 본다.

친노 & 범친노 인사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공천에서 배제된 건 사실이지만, 지난 18대 총선19대 총선친박근혜계친이명박계가 서로 주고 받았던 대량 공천 학살까진 아니었고, 문재인 전 대표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거나 측근이었던 초재선 의원들과 그가 앞장서서 영입한 신진 인사들은 거의 모두가 컷오프의 칼바람을 무사히 피해 국회의원 후보가 되었으며, 오히려 그 중 몇몇은 전략공천이라는 특혜를 받아 선거에 나섰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쉽게 말해서, 더불어민주당의 컷오프 파동은 친노라는 그룹의 시각에서 보면 일방적인 탄압이지만, 막상 문재인 전 대표의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본인의 지분을 크게 늘려준 고마운 소동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각에 조금 문제가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문재인 전 대표가 영입한 인사는 모두 정치 경험이 거의 없는 신인에 불과한데, 비례대표를 준 것도 아니고 대부분 지역구에 출마, 그것도 대부분 험지로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입 인사들 대부분 자신의 지역구는 스스로 결정했고, 지역구가 결정된 영입 인사들 중엔 경선을 통과해서 출마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개 전략공천 아니면 단수 공천으로 출마했다. 단수 공천이야 한 지역구에 더불어민주당 소속 예비 후보자가 그 영입 인사 한 명 뿐인 경우도 있어서 그렇다고 칠 수 있다지만, 전략공천은 특혜다.

한 지역에 예비 후보자가 여러 명인데도 당 지도부가 한 후보을 골라 경선 없이 그냥 후보로 확정하는 게 전략공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재인 키즈'들 중에서 수도권에 출사표를 던진 후보들은 전원 전략공천을 받아 출마했는데 대개 당선되어 돌아와 20대 국회의원이 됐다.

특히 국가 재정 전문가인 김정우 세종대 교수의 경우는 호기롭게도 험지 중의 험지이자 본인의 고향이기도 한 강원도 철원군에 출마하려고 했다가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김 교수의 지역구를 철원군보다 여건이 더 좋은 경기도 군포시로 바꿨고, 김 교수는 비록 근소한 차이이긴 했지만 당선에 성공했다.

호남으로 간 영입 인사들은 전패했으나, 더불어민주당호남 참패는 예상했던 사람이 별로 없었던 돌발 변수였다.

영남으로 간 영입 인사들의 경우, 오창석 전 팩트TV 아나운서는 패기있게도 '부산 정신'이란 슬로건 아래 조경태 의원이 내리 3선을 했던 부산 사하구을 출마를 자청했다.

정찬모 울산광역시의회 전 교육위원장도 아예 입당을 더불어민주당 울산광역시당에서 하면서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도전하겠다는 용감함을 보여주었다.

유영민 포스코 ICT 전 사장도 부산광역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새누리당 강세 지역인 해운대구 출마를 스스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유 전 사장은 거물 하태경 의원을 상대로 41%의 득표율을 기록해 충분히 후일을 기대해도 좋은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경상남도 양산시에 출마한 서형수한겨레신문 사장이 떨어질 가능성이 무척 높다던 예상을 깨고 당선된 특별한 사례다.

그리고 비례대표에 출사표를 던진 문 전 대표의 영입 인사들도 처음에는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의 월권으로 인하여 낙선권인 C그룹으로 몰렸다가[12] 문재인 前 대표와 김종인 대표가 김 대표의 자택에서 만남을 가지고, 더불어민주당 중앙위원회에서 재선거를 거친 결과 다시 당선권으로 거의 다 올라와 대부분 국회의원 배지를 받게 됐다.

특히 당선권 명단에 김 대표의 추천 인사들과 문 전 대표의 영입 인사들이 섞이게 되었기 때문에 김 대표와 문 前 대표 모두 자신의 영입 인사들을 국회로 진출시켜 윈윈하였다.

그래서 나온 게 문재인 전 대표의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설이다.

'친노 패권주의 프레임'으로 인해 제대로 된 권한 행사를 못했었던 문재인 전 대표가 바깥에서 온 이방인이자 강골인 김종인 박사를 데려와 절대 권력을 가진 '차르'로 만든 뒤 '비문(非文) 친노' 인사들을 싹쓸이한 다음[13] 그들의 빈자리에 자신이 직접 영입한 외부 인재들을 심어 '친노 패권주의'라는 족쇄를 확실히 깨부수고, 자신의 당 장악력도 최대화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음모론 이상의 의미는 없다. 허나 20대 총선 이후 문재인 전 대표의 당 장악력은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튼튼해졌다.

총선이 끝난 뒤 문재인 전 대표와 김종인 의원의 관계는 애매모호하다. 서로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히 누가 말했는지를 확인할 수가 없어 편리한, '관계자에 따르면' 이라는 표현을 쓴 인터넷 기사에서는 거친 표현이 나온 적이 있긴 한데, 둘 다 서로에게 공개적으로 직격탄을 쏜 적이 없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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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병로김성수, 김상협 등으로 대표되는 울산 김씨 가문은 명실 공히 호남 최고의 명문가로 불린다.왜 호남 최고의 명문가가 울산 김씨인지는 묻지 말자
  2. 당장 이 문서에도 토사구팽 드립이 이 문장 포함 10번이나 있다. 정작 경제민주화는 이 문장을 포함해도 6번. 뒤에 책 제목까지 합쳐서 7번이라 치자
  3. 그밖에도 노회찬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최근의 정치 상황에서 경제민주화의 아이콘 같은 분이다. 박근혜 후보가 김종인 위원장을 영입했던 일도 국민들이 경제민주화를 원했기 때문에 잠시 빌려 쓴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문제는 김종인 위원장이 박근혜 후보를 도와준 게 문제가 아니라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잠깐 활용만 했지 지속적으로 실현하지 못한 게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정의당은 과거부터 "박근혜 얼굴 마담하시기엔 그 이름 너무 아깝다."#라거나 "박근혜는 재벌과 손잡을 거라면 김종인을 내려놓으라"#고 발언하는 등 김종인을 은근히 탐내는 모습을 보였었다.
  4. 한국 사회에서 진보 세력은 기반이 취약한데다가 (논란은 둘째치고)통합진보당 해산 등으로 인해 이미지가 좋아질 기미가 안보이는 걸 감안하면, 진보를 내세우는 건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전과 같은 패배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당 내부의 친노 세력도 컷오프 시킨 마당에 정의당에게 줄 자리는 없었던 셈.
  5. 원래 국민의당 탈당파는 순번을 정해두고 차례차례 탈당하여 더민주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안철수의 국민의당은 더민주 탈당 인사를 받아들여 궁극적으로 제 1야당을 국민의당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총선 중에는 더민주 주요 인사에 저격 공천을 하여 낙선시키고, 더민주가 망하면 그 책임은 문재인 대표가 져야 하므로, 차기 야권의 대선 주자는 안철수가 된다는 계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총선은 폭망하게 되고 야권은 쪼그라들지만 대선에서 국민은 정권 교체를 위해서는 야당 1군데 표를 몰아주게 되므로, 자연히 제1야당 대표인 자신이 대권 주자로 떠오르게 된다는 논리이다. 진중권 교수는 이를 야권 종말론이라 명명했다.
  6. 진중권 교수는 지난 10여년 간 민주당에서 혼란을 계속 일으켰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국민의당으로 옮아갔다면서, 신기하게 고름만 쪽 빠진 결과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김종인 대표 영입 이후 국민의당은 기세가 급격히 꺾였지만, 호남에서 압승하고 정당 득표율에서도 더민주를 미세하게 앞서면서 기반을 마련했다.
  7. 허나 국민의당은 전라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사실상 전멸하는 바람에 중도를 지향하는 제3당 노선을 고수하기가 좀 어려워졌다. 전라도의 반 새누리당 정서는 여전하기 때문에 새누리당과 보조를 맞추자니 전라도의 눈치가 보여 불안하기 때문이다. 반면 더민주는 텃밭에서는 망했지만 그 이외의 지역에선 크게 이기면서 전라도당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벗어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8. 이는 2012년 대선만 봐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2012년이 시작할무렵만 해도 한나라당의 분위기는 선거 패배를 확신하는 등 몹시 침울했다. (국회선진화법을 제시한 것이 이 무렵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마치 이긴 게 확정된 것 마냥 파벌 싸움 등의 추태를 보였고 그 결과 선거에서 당연하게 망했다.
  9. 물론 그 기반은 문재인 지도부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사실상 모든 전권을 김종인 대표에게 위임한 이후, 민주당 역사를 통틀어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표가 되었다는 데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10. 진보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 무턱대고 진보 세력과 연합하는 건 당장의 지적 만족감은 줄 지 몰라도 선거에서는 질 가능성을 높여줄 뿐이다.
  11. 가령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논평을 하지 않겠다는 새누리당과 비슷하게 더민주는 공식적으로 묻지마 살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일축해버리고, 이후 상황에 일절 개입하지 않은 점이 있다.
  12.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김종인 대표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부 비대위원들의 월권으로 인한 일이었다고 한다.
  13. 이 가설이 맞다고 믿는 사람들은 정청래 전 최고위원이 문재인 전 대표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행보를 보여준 건 맞지만, '공갈 발언' 때문에 문 전 대표를 크나큰 곤경에 빠뜨린 주범이기도 하기 때문에 여기서 '찍혔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정청래 전 의원은 문 전 대표가 자길 구명하려고 노력했었다는 후문을 밝힌 적이 있다. 그리고 최고위원 서열 1위였던 주승용 의원이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한 뒤, 비노 세력이 문 대표에게 사임 요구를 못했던 이유도 서열 2위였던 정청래 전 의원이 대표직 권한 대행을 이어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14. 문재인 전 대표가 호남 선거 결과 때문에 정계를 은퇴해야 한다는 요구가 잠깐 나왔을 때 김종인 대표는 "(문재인 전 대표가) 집에 갈 일은 없다"라고 선을 그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