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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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성씨

1.1 개요

安東 金氏. 대한민국 경상북도 안동시를 본관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성씨 집단. 주로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에서 찾아보기 쉬우며 김해, 경주와 함께 김씨 전체에서 상위 비율에 속한다.하지만 이건 구. 안동 김씨 한정이라는게 함정

조선붕당 세력이나 세도정치로 유명하다.

그러나 아무리 같은 본관이라도 크게 구(舊) 안동 김씨(혹은 선(先) 안동 김씨)와 신(新) 안동 김씨(혹은 후(後) 안동 김씨) 둘로 나뉘는데 이 둘은 서로 혈연적 관계가 전혀 없는 가문이다.[1] 인구는 2003년 기준으로 425,264명. 하지만 이건 구 안동 김씨의 인구이고, 흔히 세도정치의 기수라 알려져 있는 신 안동 김씨 인구는 역사적 위세에 비해 2003년 기준으로 인구가 겨우 47,702명 밖에 안된다(...). 즉, 안동 김씨 대부분이 구 안동 김씨이고, 세도 정권의 한 가문이었던 신 안동 김씨는 겨우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

1.2 구 안동 김씨

경순왕의 손자 김숙승을 시조로 하는 구 안동 김씨에서 대표적으로 유명한 인물은 몽골과의 전쟁과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서 맹활약한 고려의 명장 김방경. 이 사람은 구 안동 김씨의 중시조가 되는 인물이다.

이외에도 구 안동 김씨엔 진주 대첩김시민이 있고, 강홍립이 이끌고 출정했던 후금 정벌군의 전선 지휘관으로 훗날 명나라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는 김응하가 있다. 이후 김자점이 반정에 성공하고 권신이 되면서 대박 터졌지만...그 때문에 쪽박터졌다. 김자점이 효종 때 역적 집안이 되었기 때문.

이후 문관쪽으로는 쇠퇴하고, 대신 삼도 수군 통제사가 김응하의 동생 김응해 외에 10명이나 나왔다. 이건 뭐 덕수 이씨에 범접할 기세...[2] 참고로 백범 김구도 구 안동 김씨.

1.3 신 안동 김씨

고려의 호족 개국공신 김선평을 시조로 한다.(고창 전투에 큰 공을 세운 삼태사 중 일원.) 그 이후 별 인물이 없다가 인조 때 청서파로 김상헌, 김상용 형제가 나타나면서 관운을 타게 된다. 이후 15명의 정승, 6명의 대제학, 청백리 1명, 9명의 대장, 3명의 왕비(순조비 순원왕후, 헌종비 효현왕후, 철종비 철인왕후)가 나왔다.

新자가 붙었으나 舊 와 연도 차이는 그리 나지 않는다.

신 안동 김씨로 유명한 인물로 김상헌, 김상용, 김조순, 김삿갓, 김옥균, 김좌진, 김두한 등이 있다.

숙종 조에 척화파의 거두로 좌의정까지 올랐던 김상헌의 손자인 김수흥과 김수항이 영의정에 오르고, 후에 수항의 아들 김창집도 영의정이 되었다. 단, 이들은 모두 정쟁에 휘말려 유배지에서 사망 혹은 사사되었다(...). 이후 다시 복귀하게 되는 것은 순조 대의 세도정치. 철종대로 가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모두 신 안동 김씨였던 적도 있었다.(...) 김조순 이래 순(淳), 근(根), 병(炳)자 항렬로 내려오면서 "조선 팔도에 벼슬하지 않은 안동김씨가 없었다."란 말도 나왔다. 위에서 보듯 이 시기의 왕비는 죄다 안동 김씨다(...) 조대비는 원래 효명세자빈이었고...

참고로 김씨 성에 이름 끝에 "년"욕 아님자가 들어가 있으면 거의 99% 신 안동 김씨라 보면 된다. 아니 99.9%다 그 0.1%가 바로(...)...

1.3.1 장동 김씨와 세도정치

안동 김씨를 두고 "안동 김씨 = 조선을 망친 집단 = 안동은 경상도 = 조선을 망친 경상도"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현대 정치가들이 부추겨 생겨난 지역감정 가지고 술수를 부린 말장난이다. 영남은 남인과 북인 등의 범동인계가 득세한 지역이었으며 인조반정 때 북인이 몰락한 이후로는 남인이 주를 이루었다. 인조반정 이후 남인은 만년 야당이었으며 숙종 때의 환국으로 두번 권세를 잡으나 이후로는 아예 역당으로 찍혀서 서인에게 완전히 밀렸고 영조 초의 이인좌의 난 이후에 영남 지역은 반역향으로 찍혀 정계에서 소외되기에 이른다.[3]

현재 보수파의 대표격으로 취급되는 영남에서도 보수색이 강한 대구는 일제 때만 해도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좌익색이 강한 도시였다. 사실 이승만 시기에도 호남은 여당에 기울었고 영남은 야당에 유리했다. 이른바 여촌야도의 대표적 사례였는데, 좌우/영호남 대립이 격화된 건 정치인들이 지역 감정을 정치에 활용한 박정희 정권과 김대중 이후 얘기로 그 중에서도 71년 대선 이후이다. 71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급부상하기 전까지만 해도 호남은 공화당과 박정희의 표밭이나 다름없었다.

세도정치를 주도한 세력은 흔히 '장동 김씨'라 불리는, 한양을 근거로 한 안동 김씨의 한 분파였다.

이들 장동 김씨는 장동, 즉 장의동(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 일대)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들 장동 김씨는 경상도나 안동과는 아무 상관 없는 집단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비슷한 예로 정계 고위직에서 영남 남인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며, 지방의 양반들은 영호남 할 것 없이 은거하며 학문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지방 양반 중에는 기호(경기/충청) 지역의 노론 이외에 기호 지역의 소론, 남인 일부가 요직에 등용된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영남 유림들은 정조, 순조조에 끝없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주장하며 이름도 유명한 영남만인소를 여러차례 올리기도 했고 훗날 대원군이 세도 정치를 혁파하고 탕평적인 인사를 펼치자 이때 영남 유림들이 일부 등용되었으며 그들은 이후 대원군의 지지 세력이 되었다. 애초에 나라를 망친 집안의 본관을 따져 나라를 망친 xx도~ 운운하는 것이 뇌에 뭘 박고 하는 소린지 이해도 안가는 개소리다. 김춘추가 같은 민족 당나라에 팔았다는 개소리보다 심각하다.

여하간, 장동 김씨의 윗 가계가 안동에서 갈라져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세월이 많이 흐른 터라 큰 상관이 없었다. 장동 김씨는 비록 주류인 노론에 합류하지만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시파로 노선을 타면서 정조의 눈에 들게 된다. 안동 김씨의 정치적 출신은 시파이니 노론사관 서인사관이니 하면서 벽파조선을 망쳤다는 말 또한 별 의미가 없다. 더군다나 김조순은 정조가 총애했고 생전에도 그와 사돈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괜히 정조의 사돈이자 순조의 장인이 된게 아니다. 정조 본인도 김조순의 증조부인 김수항 등의 학문을 정순하다고 여겨 존경했을 정도였다. 정조 본인은 노론 자체를 싫어한 것도 아니며, 싫어했을 수도 없는 것이 오히려 노론의 영향을 받고 성장한 인물이다. 오히려 문체반정이니 하는 행보를 밟았고 심환지에게 나도 벽파다 라고 커밍아웃하기도 했다.

지금은 영 이미지가 좋지 않지만 위에서 봤듯이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청백리나 훌륭한 관리도 많다. 세도정치의 막을 연 김조순도 실록을 보면 관서지방을 다녀와 백성들의 어려움을 상소한 일도 나오고, 관대한 면도 있는 유능하고 곧은 관료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생전에 정조의 큰신임을 받는 정조의 친위세력이었고, 그의 딸이 순조의 비가 된 것도 정조의 유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안동 김씨를 이끌던 시기는 안동 김씨가 전횡을 표면적으론 하지 않아서 김조순은 당대에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김조순의 뒤를 이어 김조순의 아들인 하옥 김좌근과 그의 양자인 김병기, 또다른 장동 김씨인 김문근 등이 철권 통치를 하면서 세도정치는 모두다 아는 막장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과거에서 왕족을 제치고 그들의 친족이 합격하자 '조선이 이씨의 나라인가, 김씨의 나라인가'를 외친 경평군 이세보[4]가 털려서 귀양을 갔을 정도였다. 어찌나 이들의 위세가 높았는지 이원경을 추존하려던 역모의 주모자들도 왕은 갈아치워야 하지만 안동 김씨는 보전해야 한다는 소릴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헌종조 초와 철종조의 안동 김씨의 권력 독점은 조선이 기우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능력이 있건 없건 자기집안이면 무조건 요직에 앉힌 민씨 세도에 비하면 일족관리가 잘된 편이다. 능력이 없다고 판명되면 철저히 실권이 없는 한직으로 처박고 승진도 시켜주지 않았다. 비교적 능력위주로 집안을 관리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조차 장동 김씨, 특히 김병학김병국, 김병기를 중앙정계에서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 이 두 사람의 경우 오히려 흥선군과 친밀한 관계였다고 한다. 강화도 조약을 반대하거나 유보하자는 입장의 대신들이기도 했다. 고종 초의 정승과 재상들을 역임하며 대원군의 개혁 파트너 급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김병학은 고종 초의 대표적 영의정이었고 대원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했으며 그의 아우인 김병국은 이조판서, 호조판서를 역임했고 사창제 실시에 크게 기여했다.[5] 근데 영의정 끝내 못한 것이 한이 됐는지 대원군 하야를 거들었고 덕분에 고종 친정 이후에 이최응과 함께 정승을 했다. 김병기는 병조판서, 좌찬성을 역임했다. 대원군 하야 이후에는 불안해진 조정을 달래기 위해 김병덕, 김병교, 김병시, 김병지 등 안동 김씨들이 판서급의 요직에 대거 기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은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다. 엄밀히 말해선 큰 관심이 없던 것에 가깝지만. 천주교 탄압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정순왕후와 벽파 세력이었고 그 이후에 집권한 안동 김씨 입장에선 굳이 천주교 잡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안동 김씨 내부에서는 천주교 신자들도 간간히 나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김상헌의 봉사손인 김건순으로 이 사람은 병자호란치욕을 씻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정벌하려는 망상을 품고 있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여러 의미에서 시파(時派: 시류에 영합)다운 면모. 헌종 때의 천주교 박해인 기해박해를 주도한 세력은 풍양 조씨.[6] 그래서 기해박해는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박해라는 해석이 있다. 다만 기해박해 때는 순원왕후 김씨의 수렴청정기였고 김좌근이 대비의 자문을 맡고 있었던 데다가 바로 다음해에 기해박해를 주도한 정승이자 풍양 조씨와 겹사돈 관계였던 이지연이 탄핵, 유배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풍양 조씨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식으로까지 해석하기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가 그럭저럭 잘 지낸 걸 보면 애초에 두 가문이 싸우기나 한건지...[7]

1.4 출신 인물

구 안동계와 신 안동계가 섞여 있다. 신 안동계는 ★ 표시

2 카툰연재 갤러리만화가(?)

2008년부터 카연갤에 서식해 온 카연갤의 터줏대감 중 한 명이다. 동년 5월 11일에 처음 올린 똑같은 내용의 만화를 매번 다른 제목으로 올려서 카연갤 뉴비들을 낚고 있다. 무려 6년 간! 대통령 임기를 넘는다 갤로그에서 아무 글이나 눌러 보자. 제목도 제각각이라 정말 낚이기 딱 좋다.[10][11] 아주 가끔 다른 만화를 올리기도 하는데 그 올린다는 게 따위다(...).

카연갤 올드비들은 이 인간을 봇 취급하든가 아니면 숭배한다. 그래서 찾아보면 팬픽도 여럿 보이는데 그 중 하나는 힛갤에 갔다.

2013년 카연갤 첫 만화를 도둑질했다.

원래 망갤인 카연갤에서나 조금 알려진 정도였지만 최근 들어 그 악명이 퍼졌는지 카연갤에 찌질이들이 대거 유입되어 너도나도 안동김씨 만화를 올려대면서 카연갤러들을 미치게 만들고 있다(...)이게 다 작성자가 이 항목 만들어서 안김 존재를 알려서다

그러던 안동김씨가 2014년 3월 16일 이후 전혀 출몰하지 않고 있다!진짜 성불한 건가

안동김씨의 마지막 글에는 안동김씨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댓글이 달리고 있다...
  1. 똑같은 예로 남양 홍씨 당홍계(唐洪系)와 남양 홍씨 토홍계(土洪系)가 있다.
  2.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들은 조선 후기 무반 최고 명문가였다. 덕수 이씨 가문은 통제사를 13명이나 배출했다.
  3. 정조때 노론 견제용으로 남인이 잠깐 등용되긴 하지만, 등용된 남인의 주류는 채제공, 정약용, 이가환 등 기호 지역 출신이었고 그때도 고위직에서 영남 남인을 찾기는 마찬가지로 어려웠다.
  4. 경원군 이하전이란 주장도 있다.
  5. 사창제는 흥선대원군때 나온 호포제등의 개혁과는 달리 이전엔 나온적도 없는 즉 김병국 개인의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사창제 자체도 성공적이라 고종 11년 호조판서가 고종에게 "그래도 사창제가 환곡중에서 가장 낫습니다." 라고 할정도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6. 그치만 주도 세력은 풍양 조씨이나 하라고 시킨건 순원왕후였다. 본격적인 탄압이 있던것도 순원왕후가 "요즘 왜 서학을 안때려잡냐? 얼른 때려잡아라" 라고 해서 벌어진 일이다. 사실 안동 김씨가 천주교에 큰 관심이 없었어도 일단 때려잡을수밖엔 없었을것이다. 그들 자신도 유자고 유자중에 신주 불태우고 제사 안지내는 행위를 옹호할 사람도 그걸 주장할 명분이 있는 사람도 없다. 아무리 안동 김씨가 강하나 천주교를 때려잡지 않는다는것은 지방 유림들에게 "저 인간들 안되겠어" 라며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몰아낼 가능성이 높았다.
  7. 철종 즉위후 헌종의 정책을 몽땅 다 뒤집고 이에 동조한 이들을 처벌했는데 이들중 풍양 조씨는 조병현 한명뿐이다.
  8. 28세 '동(東)'자 항렬. 그러니까 김을동과 같은 항렬이다.
  9. 김구라의 아들로 29세 '현(顯)'자 항렬이다.
  10. 작명 센스만큼은 기가 막히다는 평. 여기의 한 댓글에서 이르기를, "네 놈이 여태까지 싸지른 제목 중 단 한 개라도 제대로 그려 봤으면 넌 바로 게이버(네이버) 웹툰에서 전용비행기 태워서 모셔갔을 거다"라고도(…).
  11. 2016년 6월 현재, 상당수가 삭제된 글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