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보나파르트

생몰년도 : 1784년 11월 15일 ~ 1860년 6월 24일

Jerome Bonaparte
제롬 보나파르트

이탈리아 출신의 프랑스의 군인이자 황족. 프랑스 제국의 초대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의 막내 동생이다. 특이한 이력 때문에 형인 나폴레옹 다음으로 나폴레옹 형제들 중에서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가 형제들 중에서 제일 장수하여 77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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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팔렌 왕국의 왕, 제롬 1세(Jerome I). 보나파르트 가문의 상징인 독수리가 옷에 새겨져 있다.

1 출생과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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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의 아버지 카를로 부오나파르테(Carlo Buonaparte), 어머니 마리아 레티치아 라몰리노(Maria Letizia Ramolino).

1784년 11월 15일, 당시 이탈리아의 영토였던 코르시카 섬(Corsica Island)의 주도(主都) 아작시오(Ajaccio)에서 코르시카 지방 법원의 관리로 일하던 카를로 부오나파르테와 코르시카 섬의 귀족 가문 출신의 마리아 레티치아 라몰리노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코르시카가 이탈리아의 영토였기 때문에 제롬의 가족들은 이탈리아 사람에다가 이탈리아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롬의 이름도 기존의 '제롬 보나파르트(Jerome Bonaparte)' 가 아니라 '지롤라모 부오나파르테(Girolamo Buonaparte)' 였다.

그의 집안인 부오나파르테 집안은 과거 중세 시대에는 코르시카 섬이 아닌 이탈리아의 토스카나(Toscana) 지방의 이름있는 귀족 가문이었으나, 15세기 경, 프란체스코 부오나파르테(Francesco Buonaparte)라는 인물이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당시 비옥한 땅이 넓게 펼쳐져 있던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으로 이주하면서 코르시카 섬에는 새로운 부오나파르테 가문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프란체스코의 후손들은 코르시카 섬에서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여러 방면에서 일에 종사했고, 주로 일했던 분야는 법률 분야였다. 그래서 부오나파르테 집안의 남성들은 대대로 코르시카의 법원에서 근무해왔으며, 프란체스코의 먼 후손인 카를로도 마찬가지로 법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카를로는 주세페(Giuseppe) 부오나파르테와 마리아 사베리나 파라비치니(Maria Saverina Paravicini)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이며, 아직 성인이 되기 전, 19세가 되던 해인 1764년 2월 7일에 코르시카 섬의 귀족 가문인 라몰리노 집안의 소녀15살... 마리아 레티치아와 결혼해 제롬이 태어난 1784년까지 총 7남 6녀정력 보소를 낳았다. 그러나 그 중 3남 2녀는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유년기에 죽었다. 그의 아들 중 특히 눈에 띄고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미남형이었던 제롬은 어린 시절부터 마을 사람들의 큰 인기를 얻으며 자랐다.

그러나 정작 형인 나폴레옹은 꽤나 점잖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튀고 적극적인 제롬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고, 그런 제롬을 아끼던 사람은 어머니와 바로 위의 누나들인 파올라[1](Paola, 뒤에 프랑스식 이름인 폴린(Pauline)으로 개명), 카롤리나[2] (Carolina, 뒤에 프랑스식 이름인 카롤린(Caroline)으로 개명)였다.

2 군인의 길

한편 제롬이 태어나고 1년도 안되어 아버지 카를로가 지병인 위장 질환이 악화되어 위암 때문에 사망했다. 가장의 죽음으로 8명의 자녀를 혼자 기르던 마리아 레티치아는 집안 살림이 어려워져 프랑스 본토로 이주한다.[3] 당시 프랑스의 한 가톨릭 대학의 학생이었던 제롬은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자, 등록금을 마련하기 힘들어 학교를 그만두고 군인을 선택했고, 형 나폴레옹은 이미 프랑스의 군사 학교에서 포술(砲術)을 공부하고 있었다.[4] 제롬은 견습 차로 해군 복무 중간에 미국에 건너갈 일이 생겼는데[5], 이 때 그의 첫 인연인 엘리자베스 패터슨(Elizabeth Patterson)[6]을 만나게 된다.

3 엘리자베스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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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패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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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를 입고 있는 엘리자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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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가 제롬과 결혼할 당시 입었던 웨딩 드레스

견습차 미국 메릴랜드의 볼티모어(Baltimore) 지역에 갔던 프랑스 해군 소속 제롬 보나파르트는 한 연회장에서 엘리자베스 패터슨이라는 처녀를 보고 반해 그녀의 아버지인 지역의 유지(有志) 윌리엄을 찾아가 결혼을 승낙받은 뒤, 그녀와 1803년 크리스마스 이브(12월 24일),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이 결혼은 일종의 세상에 대한 도전이었는데, 그것은 가톨릭 신자였던 제롬이 가톨릭에 반대를 하는 장로교(신교)도인 엘리자베스와 결혼을 함으로써 가톨릭 세계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였고, 그 당시 이미 프랑스의 권력을 휘어잡은 형 나폴레옹에게도 도전을 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제롬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자유분방한 성격의 제롬이 행여나 어떤 사고나 치지 않을까 어머니 레티치아와 동생을 들들 볶았으며 떠나기 전까지도 신신당부를 했다. 그런데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심한 총각 동생은 형에 대한 반발심으로, 엿이나 먹으라는 심산으로정말 그런지는 정확하지 않다. 제롬은 이미 죽었으니까. 대놓고 엘리자베스와 결혼해버렸으니,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과, 당시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 나폴레옹의 분노는 더 이상 설명이 必要韓紙??[7]

이윽고 엘리자베스가 임신을 하자, 제롬과 엘리자베스는 메릴랜드의 볼티모어를 떠나 유럽으로 이주했으며, 형 나폴레옹의 통치 영역이던 프랑스로 들어가기 위해 엘리자베스를 포르투갈에 놓아두고 프랑스로 가서 엘리자베스와 프랑스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형을 설득했다. 그러나 형은 제롬이 제멋대로 결혼을 한 것에 분노하며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롬을 계속 질책하며 당장 엘리자베스와 이혼하도록 명령했다. 분위기가 꽤나 험악했기에 제롬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나와서 다시 포르투갈로 향해 엘리자베스를 만났다. 엘리자베스는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몸이었으며, 이 때문에 그녀는 그녀의 아들이 프랑스 최고 권력자의 동생의 아들, 그러니까 조카로 본적지인 프랑스에서 정상적으로 태어날 수 있게 프랑스에서 아이를 출산하길 원했고, 제롬은 그녀의 뜻에 동의하며 그녀를 데리고 배를 타고 프랑스 국경에 거의 도달했다. 그러나 이를 이미 예상한 나폴레옹은 군대를 동원해 그들의 프랑스 영토 진입을 막았고, 제롬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되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제롬과 그녀는 고민을 했고, 계속 결혼생활을 고집하다가는 엘리자베스와 그의 갓 태어난 아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엘리자베스는 끝내 제롬과 이혼을 하고 만다. 태어난 아들 제롬 나폴레옹은 엘리자베스가 고향 볼티모어로 되돌아갈 때 데려갔다. 그로써 제롬은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4 베스트팔렌(Westphalia) 왕국의 왕이 되다

제롬은 이혼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와중에, 프랑스로 돌아오라는 나폴레옹의 호출을 받고 프랑스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이미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을 접견했으며, 나폴레옹은 그를 그의 괴뢰국(傀儡國)이었던 베스트팔렌 왕국[8]의 왕으로 만들었다. 제롬은 베스트팔렌 왕으로 부임할 때, 나폴레옹이 지명한 뷔르템베르그(Wurttemberg) 왕국의 왕 프레더릭 1세(Frederick I)의 딸 카탈리나(Catherina) 공주와 결혼했다. 이는 제롬이 원해서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형 나폴레옹이 당시 한 세력 하던 독일의 뷔르템베르그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기 위해 계획한 일종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거의 반 강제적으로 한 결혼인데도 불구하고 제롬의 성격이 워낙 적극적이고 자유로웠기 때문에 새 신부인 카탈리나와의 관계는 꽤 원만했다.

한편 제롬은 어릴 적부터 낭비벽이 심했고 사치스러웠는데, 그의 그러한 성격이 그가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는 다른 왕의 직위에 다다르자 극대화되었다. 그는 왕궁 내부를 값비싼 금은보화와 고급 가구, 식기류 등으로 장식했으며, 진기한 동식물을 왕궁에서 기르고[9] 한 술 더 떠서 왕국 수도(首都) 거리에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지었으며, 특히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아 도시를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들 정도였다. 나폴레옹은 제롬의 이런 행동을 매우 못마땅했으며 여러 번 사람을 보내 낭비벽을 줄이라고 독촉했지만, 그의 낭비벽은 그가 늙어 죽을 때 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동생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나폴레옹도 동생이 화려하게 꾸며 놓은 도시를 보고는 그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감탄한 나머지 그는 동생이 만들어 놓은 건물을 모델로 해서 의회 등의 국가의 주요 시설들을 건설했으며, 또한 제롬도 나폴레옹이 있던 프랑스 본토의 도시를 본떠서 더욱 현대적이고 깔끔한 도시를 만들었다. 이 제롬의 노력으로 인해 베스트팔렌은 그 당시 아름다운 곳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후대 여러 건축가들도 이곳의 여러 아름다운 건물들을 모델로 유럽 및 세계 여러 나라에 건축물을 만들었다.

그런데 제롬은 지나치게 재정을 낭비한 탓인지 프랑스 본토에도 재정 지원을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결정적으로 나폴레옹의 심기를 건드려서, 나폴레옹은 제롬이 아무리 요청을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5 제국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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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탄 제롬

1812년, 여전히 낭비벽에 빠져 있던 제롬은 형의 명령에 따라 정신을 차리고 동쪽의 민스크(Minsk), 러시아로 군대를 진격시켜서 몇 군데의 요충지를 획득하여 영토를 넓히고 이를 형에게 보고하자, 나폴레옹은 매우 만족해 하고 프랑스 제국의 위엄은 주변국을 진동시켰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은 영원히 그 명성이 지속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년 후인 1813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이후, 제국은 동쪽의 프러시아(Prussia)와 러시아에 의해 위협당하고 제국의 영토는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제롬의 영토인 베스트팔렌의 동쪽에 직접 프러시아와 러시아가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제롬의 군대는 계속 패하기만 하다가 결국, 10월 26일, 수도 카셀(Kassel)이 함락되면서 베스트팔렌의 왕, 제롬과 그의 아내 카탈리나는 서둘러 수도를 빠져나가 나폴레옹의 황궁이 있던 파리(Paris)로 도피했다. 그로써 베스트팔렌 왕국은 멸망하고 그 지역은 프로이센의 차지가 되었다.

결국 프랑스 본토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폴레옹은 프랑스 남부 지중해의 앨바(Alba) 섬에 유배를 당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이른바 '백일천하'[10] 로 인해 다시 정권에 복귀한 나폴레옹은, 동시에 잠수를 타고 있던 제롬을 다시 등용해 프랑스 육군제롬은 해군 아닌가?? 2군단 6사단에 배치시켰는데, 나폴레옹의 결정적인 몰락의 계기로 작용한 워털루 전투에서 제롬은 전투 초기에 상대의 원수(元帥) 웰링턴 공작(Wellington)과 프로이센 군대의 연합군에 우위를 점하고 승리를 여러 번 거두었으나, 나폴레옹의 군대가 러시아 원정의 실패로 힘이 많이 약해진 상태라 나폴레옹의 군대는 결국 이 전투에서 패했다. 나폴레옹은 다시는 탈출을 하지 못하게 이번에는 대서양의 외딴 섬인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섬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거기서 사망했다.

그런데 제롬은...

6 그 후 말년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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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제롬, 그는 나폴레옹의 형제자매 중에 유일하게 실제 사진이 남아있는 인물이다.

용케 전쟁통에서 탈출해서 이탈리아로 피신했다.형은 나몰라라?? 그는 이미 나폴레옹이 유배당하기 전에 카탈리나와 이혼했으며, 그녀에게서 난 자녀를 데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한 귀족의 미망인과 세 번째 결혼을 했다.

한편, 나폴레옹이 물러난 프랑스 본토에서는 루이 18세의 동생인 샤를 10세(Charles X)와 오를레앙(Orleans) 왕가의 루이 필리프 1세(Louis Philippe I)의 왕정이 이어지다가 1848년, 나폴레옹과 제롬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Louis Napoleon, 나폴레옹 3세)[11]이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대통령)가 되면서, 이탈리아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제롬도 프랑스로 돌아와 그의 형이 묻힌 곳인 르 앵발리드(Les Invalides)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한때 루이 나폴레옹의 후계자로 지명될 만큼 권력도 꽤 셌다. 1850년에는 명예 해군 제독으로 임명되었으며, 프랑스 상원 의장이 되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조카 루이 나폴레옹의 조력자로 활동했다.

1860년 6월 24일, 말년까지 천수를 누린 제롬은 프랑스 빌제니(Villegenis)에서 눈을 감았다. 이때 그의 나이 77세였다.

7 제롬의 후손들


제롬과 그의 부인 카탈리나,
월트 디즈니애니메이션인 '겨울왕국(Frozen)' 에 나오는 한스(Hans) 왕자의 원래 모델이 바로 이 사진의 제복을 입은 제롬이라고 한다.[12]

제롬은 비록 프랑스 제국의 황제로 군림한 나폴레옹 만큼의 인지도는 갖고 있지는 않지만, 현재 프랑스에 있는 보나파르트가(家)의 사람들은 정작 나폴레옹의 후손이 아니라 거의 다 제롬의 후손들이다. 보나파르트 종가(宗家)는 모두 제롬의 후손이며, 제롬과 제롬의 남자 형제 중 아들을 남기지 않은 큰형 조제프 보나파르트(Joseph)와 유일한 아들 나폴레옹 2세(Napoleon II)을 남겼지만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후손이 끊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비록 후손은 남겼으나 얼마 없는 뤼시앵(Lucien) 보나파르트, 아들인 루이 나폴레옹의 아들 나폴레옹 유진(Eugene, 나폴레옹 4세)에서 대가 끊기고 나머지 아들들도 유년기에 사망한 루이 보나파르트를 제외하면 나머지 직계 후손들은 모두 제롬의 후손들이다. 제롬의 아들들 중 둘째 부인 카탈리나에게서 태어난 제롬의 막내 아들인 나폴레옹 조제프 샤를 폴 보나파르트(1822-1891, Napoleon Joseph Charles Paul Bonaparte)를 필두로 그의 장남인 빅토르 보나파르트(Victor Bonaparte, 1862-1926 나폴레옹 5세), 또 그의 장남인 루이 나폴레옹[13](1914-1997, 나폴레옹 6세), 그의 장남인 샤를 나폴레옹(1950-, 나폴레옹 7세), 마지막으로 그의 장남인 장 크리스토프 나폴레옹(Jean-Christophe Napoleon, 1986-, 나폴레옹 8세)로 이어진다. 현재 보나파르트 종가의 당주는(확정되지 않음) 통칭 나폴레옹 7세인 샤를 나폴레옹이며, 그의 장남 장 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이 차대 당주이다.

현 당주 샤를 나폴레옹은 프랑스 소르본 대학교 경제학 박사엘리트이며, 과거 은행에서 근무하거나 컨설턴트, 부동산 등을 운영했고, 최근에는 칼럼이나 을 쓰면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또 차대 당주 장 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은 경제학, 수학 등을 전공해 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고 과거 뉴욕런던에서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 같은 은행에 근무하면서 애널리스트로 활동한 경험이 있고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에 능통하다고 한다. 한편 장 크리스토프의 할아버지인 루이 나폴레옹은 1997년 사망하면서 유언으로 그의 장남인 샤를이 아닌 장손 장 크리스토프를 차대 당주로 삼으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샤를은 아버지의 이 같은 유언에 못마땅해 아들을 제치고 자신이 현 당주라고 주장하고 있다.

장남 : 제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Jerome Napoleon Bonaparte) 1805 - 1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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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베스 패터슨에게서 난 아이이며, 어머니 엘리자베스와 죽을 때까지 미국에서 살았다. 그 후로 그의 자손들은 계속 미국에 정착하고 살았으며 그의 차남 찰스 조셉 보나파르트(Charles Joseph Bonaparte)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아래서 해군 장관 등을 지낸 미국의 주요 인사로, 미국의 대표적인 정보 기관 FBI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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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조셉 보나파르트

차남 : 제롬 나폴레옹 샤를 보나파르트(Jerome Napoleon Charles Bonaparte) 1814 - 1847
→ 카탈리나에게서 난 아이이며, 아버지의 작위를 습작(習爵)했다.

장녀 : 마틸드 보나파르트(Mathilde Bonaparte) 1820 -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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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탈리나에게서 난 아이이며, 제롬의 외동딸이다. 당시 나이 85세로 장수했다.

삼남 : 나폴레옹 조제프 보나파르트(Napoleon Joseph Bonaparte) 1822 - 1891

→ 카탈리나에게서 난 아이이며, 그의 후손이 번창하여 지금의 보나파르트 종가를 이루고 있다.

장남 : 빅토르 보나파르트(Victor Bonaparte) 1862 -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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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루이 나폴레옹(Louis Napoleon) 1914 -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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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샤를 나폴레옹(Charles Napoleon) 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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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Jean-Christophe Napoleon) 1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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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FK-29-A1809.jpg 1780-1825, 나폴레옹의 여동생이자 제롬의 누나. 당시 굉장한 미인이었으며, 얼굴 뿐만 아니라 몸매도 좋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그리스 신화의 미의 여신 비너스(Venus)(...)에 비교되기도 하였다. 한번은 폴린이 비너스와 싱크로율이 잘 맞도록(...) 그녀가 옆으로 누워있는 모습을 벌거벗은 몸에 천 하나만 감은 모양으로 석상을 하나 조각했는데(...), 지금도 이 석상이 남아있다. 후에 나폴레옹의 휘하 장군인 샤를 빅토르 엠마누엘 르클레르(Charles Victoire Emmanuel Leclerc)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는 나폴레옹의 정치적 계략으로, 후에 폴린은 나폴레옹의 뜻을 받들어 그와 이혼하고 과스탈라(Guastalla) 공(公) 카밀로 보르게제(Camillo Borghese)와 결혼한다. 언니 엘리자(Elisa Bonaparte)와 동생 카롤린과 달리, 성격에 욕심이 없고 순했는데 순해도 너무 순해서 머리가 조금 모자랐다고 한다. 오빠 나폴레옹에게는 절대 반대도 반항도 하지 않고황제니까 나폴레옹 그 자신도 폴린을 손수 두 번이나, 그것도 당시 상당한 미남들이었던 르클레르와 보르게제에게 짝지워주는 등 매사 챙기고 아꼈기 때문에 그 당시 나폴레옹의 반대파들에게는 폴린이 오빠인 나폴레옹과 근친상간을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게 하기도 했다.남매가 아니라 부부 아니냐?
  2. Caroline-Bonaparte-Queen-of-Naples-kings-and-queens-15360288-503-600.jpg 1782-1839.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의 여동생이자 제롬의 누나로, 폴린만큼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미인이었으며, 출신은 보잘것없었지만 당시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 휘하에 들어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나폴리의 왕 조아생 뮈라(Joachim Murat)의 부인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남편 뮈라의 강력한 조력자였으며, 뮈라가 나폴리의 왕이 되는데 큰 공헌을 한 여자다. 이처럼 카롤린의 특유의 고집과 욕망은 언니인 엘리자의 그것과 종종 비교되기도 한다. 아마 이 보나파르트 자매들의 성격은 어머니 마리아 레티치아가 아이들을 키우느라 어려운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악착같고 꼼꼼한 성격을 지녀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모전여전 그러나 뮈라가 무리하게 병력을 움직여 크게 패하고 도주하다 잡혀 총살을 당하는 병크를 터뜨리고 나서 카롤린은 남편을 잃고 마찬가지로 카롤린도 새로 나폴리의 주인이 된 프란체스코 맥도날드(Francesco Macdonald)와 재혼하고 여기 저기를 떠돌아다니다가 1839년에 플로렌스(Florence)에서 죽었다.
  3. 사실 카를로는 죽기 전에 자신이 모시던 상관이었던 코르시카 섬의 관리이자 혁명가였던 파스쿠알레 파올리(Pasquale Paoli, 1725-1807)가 코르시카 섬이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넘어갈 때, 루이 16세에 의해 루이 16세의 코르시카 섬 법률 고문 대표에 임명되고 그가 국적을 프랑스로 바꾸자, 그도 프랑스로 국적을 바꿨다. 그래서 그의 가족도 프랑스의 국민이 되었기 때문에 레티치아가 그의 자녀들을 데리고 어렵지 않게 프랑스 본토로 이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나폴레옹은 육군이었고, 제롬은 해군이었다.
  5. 당시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갓 독립을 쟁취하던 시절로, 당연히 영국과는 적대 관계였고, 영국은 또한 프랑스와도 적대 관계여서, 자연히 당시 신생 국가였던 미국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게 되었으며, 양국의 군인들도 두 나라를 서로 오가면서 많은 교류를 하고 군사 정보를 공유했다. 제롬도 이 때문에 미국에 건너간 것이다.그 덕분에 종교하고 형제애도 버리고 미국녀와 결혼했지...
  6. 1785-1879, 원래 아일랜드(Ireland)의 장로교도였던 윌리엄 패터슨(William Patterson)의 딸로, 윌리엄은 미국 독립 선언 당시에 미국 메릴랜드(Maryland)에 정착해 철도 회사를 세우고 그 지역의 거부(巨富)가 된 사람이다.
  7. 사실 제롬은 결혼할 때 처음에는 교황에게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허락받으려 했으나, 교황은 당연히 신교도와의 결혼은 용납할 수 없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제롬은 불만을 느껴 자신의 신분(프랑스 최고 권력자의 동생)을 이용해 교황을 무시하고 자기 스스로 결혼을 허락했다.
  8. 현재 독일의 서쪽 지역 중앙에 해당하며, 중심지가 도르트문트이다. 12세기 말부터 이 지역은 공작령(公爵領)이 되었으며, 본래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이 지역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이전 획득해 이 지역의 지도자를 찾던 중 당시 별 직책이 없던 막내 동생인 제롬을 데려다가 왕으로 앉혔으며, 1813년 나폴레옹이 몰락할 때까지 그의 손아귀에 있다가 1813년 이후로는 프로이센의 영토가 되었다. 여기서 바로 베스트팔렌 조약(Treaty of Westphalia)이 체결되었다.
  9. 전 부인 엘리자베스도 동식물을 기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10.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Louis XVIII)가 왕이 되면서 프랑스는 비교적 자유로웠던 시대에서 왕이 지배하는 옛날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하여 나폴레옹 아래에서 이전 왕정 시대에 비해 많은 자유를 누렸던 대다수 국민들은 불만이 극에 달했고 루이 18세는 그들은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래서 프랑스는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졌으며, 이때 루이 18세 치하의 프랑스를 고깝게 여기던 영국은 비밀리에 앨바 섬에 연금되어 있던 나폴레옹을 탈출시켜 루이 18세를 몰아내고 다시 프랑스의 권력을 잡게 한다.
  11. 1809-1873, 나폴레옹의 동생이자 제롬의 형인 루이 보나파르트(Louis Bonaparte, 1778-1846)의 아들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항목 참조.
  12. 또 제롬의 형제 자매들은 원래 모두 13명이었다. 그런데 겨울왕국을 보면 한스 왕자가 13번째 왕자로 나온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한스 왕자의 본명은 한스 웨스터가르드(Hans Westergaard)인데, 여기서 제롬의 왕국 이름이 베스트팔렌(Westphalia)인 것을 보면, 앞의 'West' 라는 글자가 똑같다(;;).
  13. 제롬의 형 나폴레옹이 워낙 유명한 역사적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아예 성을 보나파르트에서 나폴레옹으로 바꿔버렸다← 헛소리다 누가 작성해놨는지는 모르겠으나 유럽사람들은 보통 서명할 때 뒤에 성까지 다 쓰는것이 아닌 미들네임 까지만 쓰게됨으로 빚어진 오해이다. 알아서 지우길 바란다. 현재 나폴레옹의 후손들은 여전히 보나파르트라는 성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