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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영화 →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 한국의 전 프로야구단 → 쌍방울 레이더스
- 미국의 미식축구단 → 오클랜드 레이더스
Marine Raiders
목차
1 개요
미해병대의 역사에서 레이더스란 이름을 가졌던 부대는 두 개가 있다.
- ①: 태평양전쟁 기간인 1942~1944년 사이에 존속했던 미해병대의 경보병 부대.
- 'raid'가 기습, 습격이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raiders는 한국어로 직역하자면 습격자들 정도로 번역할 수 있고, 군대용어식으로 의역하면 기습부대, 강습부대 또는 습격부대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 ②: 위 ①번 부대의 이름을 본따서 2014년에 개칭된 미해병대 특수전사령부(MARSOC) 산하의 특수전 연대.
대체로 미해병대는 본인들 해병대 자체가 이미 상륙전이라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강인한 훈련을 받은 정예부대라는 이유로, 해병대 내에 따로 정예부대를 편성하는 것에 부정적인 경향이 있다. 해병대 자체가 정예부대이니 '정예부대 내의 정예부대'를 또 만드는 건 굳이 불필요하다는 것.
그러나 아무리 미 해병대원 개개인이 상륙전과 정글전 등의 훈련을 받은 정예병이라 하더라도 특수부대 문서가 묘사하는 것과 같은 성격의 특수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해병대 내에 특수부대 혹은 특수부대와 유사한 경보병부대들이 편성되어 왔다.
'해병대 레이더스'는 그러한 미 해병대 내의 특수부대/정예 경보병부대류의 부대 중 최초의 부대이다.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불과 3년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존속기간을 끝으로 해체됐지만 여러 전공을 남겼고, 해체된지 70년만인 2014년에 해병대 특수부대의 명칭으로 다시 부활하여 정신적인 명맥을 잇고 있다. [1]
재밌는 점은, 미해병대 레이더스가 만들어진 1942년에 이 'Raider'(습격자)라는 단어를 사용해 이름 지어진 여러 부대들이 해병대 뿐 아니라 육군과 해군에도 비슷한 시기에 각각 생겼다는 것이다. 즉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적의 해안지역을 기습타격하는 미 해군/육군 합동부대였던 "Scouts & Raiders"도 같은 해에 창설됐고, 한국에선 둘리틀 특공대라고 번역하는 특별 폭격부대인 "Doolittle Raiders"도 같은 해에 미 육군 항공대에 만들어졌다. 이후 육/해군의 Scouts & Raiders는 해군의 NCDU[2]와 함께 해군 UDT로 흡수통합되었고, 이 UDT를 바탕으로 해서 1962년에 창설한 부대가 바로 네이비 씰이다.
2 2차 세계대전 때 존재했던 미해병대의 경보병부대
2.1 시대적 배경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미 해병대는 군함에 승선하여 함내 치안유지, 여차하면 보트로 상륙 후 제한적인 지상전투, 평시 해외 기지 경계와 같은 고전적인 해병대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해병대도 여단 규모로 확장되어 유럽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육군과 특별히 다른 임무를 띠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해병대 수뇌부의 대전략 역시 주로 미국의 내해였던 카리브해 연안국가에 대한 무력개입, 그리고 여기에 개입하려는 가상적국 영국이라는 19세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1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일본이 승전국 지위를 이용하여 마리아나 제도(미국령 괌을 제외한 티니안, 사이판 등), 캐롤라인 제도(트룩, 팔라우, 펠렐리우, 울리시 등), 마셜 제도(마주로, 콰잘린 등) 등 중부태평양에서 폭넓은 세력권을 형성하며 새로운 가상적국으로 부상하자, 해병대의 대전략 역시 기존의 카리브해와 유럽을 넘어 뉴칼레도니아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태평양 전역을 시야에 두는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전간기인 1920년대는 관심있는 장교들의 개인적인 연구 차원에서, 그리고 점차로는 미해군 전체의 차원에서 일본과의 전쟁계획이 구체화되는 시기였는데, 일본과 개전 시 전쟁 초반에는 수세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전반적인 결론이었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미해군의 60%의 전력을 보장받은 일본을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함대가 양분된 미 해군이 저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며, 미일 양국의 본토에서의 거리를 보았을 때 미국의 서태평양 전초기지인 필리핀과 괌의 상실은 불가피하고, 여차하면 웨이크 섬이나 미드웨이 섬까지도 지켜내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 [3]
그러면 전시경제가 활성화되고, 물량과 인원이 충분히 증강되어 전면적인 공세작전에 나설 때까지 우리 해병대는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당연히 해병대 내에서 확산되었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남아도는 구형 구축함을 고속수송함으로 개조, 경무장한 정예병들을 여기에 싣고 일본이 점령한 도서지역에 뮤짤 소규모로 투입하여 기습과 사보타주, 나아가 현지인과 연계한 게릴라전을 펼쳐보자! 하는 계획이 구상되어, 일부 부대를 대상으로 테스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간기 해병대 수뇌부의 전반적인 전략은 소규모 병력의 기습적인 투입보다는 함포사격 및 제대로 된 항공, 포병세력의 지원을 받는 사단~군단급 부대의 대규모 상륙작전을 지향하고 있었고, 위의 테스트는 말 그대로 테스트에 머물게 될... 뻔 했다.
2.2 기습부대 창설
그러나 이렇게 사장될 뻔한 '정예 경보병' 개념은, 해병대의 의사와 상관없이 실현될 기회를 잡게 된다.
2차세계대전 개전 이후,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덴마크 등이 독일의 손에 넘어가게 되자 영국 육군은 코만도라는 이름의 특수부대를 만들어서 대서양 연안의 독일 점령지에 해상으로 침투시켜 쏠쏠한 재미를 보았고, 당시 됭케르크 철수 이후 뜻대로 풀리는 일이 별로 없던 처칠이 FDR에게 이 전과를 그렇게 자랑했다고 한다(...) 이에 솔깃해진 루즈벨트는 미군에도 코만도와 유사한 부대를 만들 것을 주문하게 된다. 그래서 미 육군에 레인저 대대가 만들어졌고, 이어서 미 해병대에도 기습부대가 만들어지게 된다.
해군과 해병대 수뇌부는 처음엔 이 주문이 별로 탐탁치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해병대는 해병대가 이미 특별한 부대인데 무슨 별도의 정예부대가 따로 필요하냐는 반응이었고, 해군 역시 유럽과 달리 별다른 배후지가 없는 태평양의 섬에서 소규모 병력의 히트앤드런이 거둘 수 있는 성과는 제한될 수 밖에 없으며 결국 전장의 양상은 정규전 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결정지을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사실 논리적 정합성으로 보나 향후 역사의 전개로 보나 이 쪽이 더 맞는 의견이기는 했는데, 대통령이 까라는데 까야지 다른 수가 있을리가...
전쟁을 앞두고 해병대의 입장에서 매우 귀찮을 수 밖에 없는 이런 사태가 발생하는 데에는, 에반스 F. 칼슨(1896-1947)이라는 예비역 해병 장교의 역할도 매우 컸다. 후에 제2기습대대의 창설 대대장을 맡게 되는 이 칼슨이라는 양반은 1차 세계대전에 육군으로 참전하여 전상장을 받은 바도 있는 베테랑이었는데, 글쓰기를 좋아하는데다 말솜씨도 능숙한, 예나 지금이나 해병대 기준으로 참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무튼 전간기에 해병대로 재입대, 육군 경력을 인정받아 중위 계급을 부여받은 이 장교에게는 두 가지 유별난 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1933년에 대통령 별장 경호차 파견된 해병 분견대에 근무하다가 FDR 일가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는 점이고, 나머지 하나는 중국에서 독특한 이력을 쌓았다는 점이었다.
중국에서 총 세 차례나 근무하여 중국어와 중국문화에 익숙했던 칼슨은 1937년의 세 번째 중국 근무 때 매우 독특한 경험을 하는데, 다름아닌 중국 공산당과 접촉하여, 대장정 이후 공산당의 본거지였던 연안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베스트셀러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였던 에드거 스노우를 통해 줄을 댄 칼슨은, 연안에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 지도부를 접견하는 한편으로 홍군의 전술(기동전, 게릴라 전술)과 조직론(계급 없는 평등한 군대, 군대 내 자유로운 토론과 의사소통)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4]
중국 근무를 마친 칼슨은 1939년 해병대를 전역하여 문필가(!)로 활동하다가 태평양에 전운이 깊이 드리워진 1941년, 다시 소령 계급으로 해병대에 복귀했다. 칼슨 소령은 해병대판 '코만도' 부대의 창설을 중국에서 목격한 홍군의 전술과 조직론을 해병대에 도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칼슨은 대통령 일가와의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 대통령의 정보 보좌관이자 이후 OSS의 초대 수장이 되는 예비역 육군대령 윌리엄 도노번과 함께 기습부대(Raiders) 창설을 건의했다. 이게 받아들여져서 대통령의 명령이 내려졌고 해병대는 1942년 2월, 기존 해병대 내 지원자를 중심으로 제1기습대대와 제2기습대대를 창설하였다. 중령으로 진급한 칼슨은 제2기습대대의 창설 대대장으로, 현역으로 편입된 밀덕 아들 루스벨트는 부대대장으로 취임한다. 덕업일치
2.3 화려한 전공을 세우다
이 기습부대는 대통령의 빽으로 만들어진 만큼, 각종 지원과 보급 면에서 해병대 내에서 최우선 순위 대접을 받았다. 마치 요즘의 특수부대들마냥 요청만 하면 각종 신무기가 보급되었고, 해병대 내 타 부대 정예 인원 차출에도 우선권을 가졌다. 심지어 칼슨 중령은 2기습대대 내에서 기존에 없던 새로운 편제(기존 9인 편제 대신 10인 편제의 새로운 분대 구성, 2개 해병소대로 구성된 중대 6개로 대대 재편 등)를 테스트하기도 했다. 진주만 기습이후 엄청난 속도로 규모를 확장하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쁜 해병대의 입장에서 보면, 단일화된 프로세스로 공장처럼 부대를 찍어내야 하는 상황에서 한땀 한땀 공들여 수공업 명품을 만들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인 셈.
해병대의 심정이 어쨌건간에 숙련된 정예병 위주로 강훈련을 통해 공들여 키워낸 이 경보병대대는 확실히 쓸모가 있긴 있었다. 가벼운 편성으로 잠수함을 통해서도 손쉽게 적지 한가운데 투입할 수 있는 이들 기습부대는 사령부에게 매우 간편하고 쓰기 편한 옵션이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2대대의 일부 중대들을 미드웨이 섬 방어에 투입하는 한편으로, 일본령 길버트 제도의 마킨 환초에 잠수함을 통해 2대대를 기습 투입, 소규모의 주둔 일본군을 전멸시키고 성공리에 회수하기도 하였다. 이 때 2기습대대의 마킨 기습은 영웅적인 전공으로 언론에 대대적으로 홍보되었고, 1943년에는 전시 홍보영화로 영화화도 되었다.
그러나 실상 전체 전황에 미친 영향이 미미한데다가, 막상 기습 과정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키고도 칼슨 중령의 오판으로 일본군에 항복할 뻔 하는 등, 들여다보면 좀 허술한 구석이 많다. 아무래도 아직 초창기이다 보니... 그래도 다들 영웅과 승리에 목말라하던 개전 초라 흡사 둘리틀 특공대의 도쿄 공습과 비슷하게 많은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일본군이 미드웨이 공략에 나서는데 일정부분 기여하면서 전황에 긍정적인 영향을 약간이라도 미친 둘리틀 특공대에 반해, 2기습대대의 마킨 기습은 전술적으로는 성공적이었을지 몰라도 일본군이 외곽 기지의 취약점을 깨닫고 방어를 본격적으로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일본군이 마샬 제도, 길버트 제도의 방어를 강화하여 이후 타라와 전투에서 상륙부대가 큰 피해를 입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것. 마킨 기습의 상세한 내용은 대사의 태평양전쟁 블로그의 관련항목 1편, 2편 참조.
아이러니한 일은 기습부대 최대의 전공이 이러한 기습작전이 아닌 방어전에서 세워졌다는 점이다. 과달카날 전역 초기, 메릿 에드슨 중령이 이끄는 1기습대대는 툴라기 섬 점령에 투입되었다가 이후 과달카날 섬으로 재배치되었는데, 과달카날 전역 지상전 최대의 격전이자 승부처였던 42년 9월 13일 피의 능선 전투에서 가와구치 기요타케 소장이 이끄는 일본군 주공을 패퇴시키면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5] 그리고 마킨 환초 기습 이후 이런저런 소규모 작전에 동원되었던 칼슨 중령의 2기습대대 역시 과달카날 전역에서 무려 29일간(1942. 11. 6 ~ 1942. 12. 4)의 연속된 적지 강행정찰을 수행, 정찰기간 동안 500명 이상의 일본군을 사살하면서 전사자 16명, 교환비 30:1이 넘는 놀라운 전과를 세워 워싱턴의 높으신 분들을 기쁘게 했다.
해군과 해병대 수뇌부로서는 여전히 교리상 존재의의가 불분명한 기습부대의 존재 자체가 마뜩찮았지만, 어쨌건 아직 본격적인 미군의 쇼미더머니가 시전되기 전 일본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던 시기에 기습부대가 큰 활약을 보인 것은 사실이고 대통령이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에 따라 제3, 제4기습대대가 잇달아 창설되어, 1943년 3월에는 이 4개 기습대대를 묶어 제1기습연대로 확대 재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기습부대의 산파이자 해병대에 홍군식 전술을 도입하고자 애썼던 에반스 칼슨 중령은 과달카날 전역 이후 기습부대를 떠나게 된다. 전통적인 해병대 장교단의 관점에서 칼슨의 주장은 지나치게 급진적이면서도 이단적이었고, 막상 마킨 기습이나 과달카날 정찰에서 보여준 칼슨 중령의 지휘가 좀 부족한 면도 있고 해서... 이후 칼슨 중령은 다시 전투부대 지휘관으로 복귀하지 못하였고, 그가 공들여 육성한 2기습대대 역시 전통적인 일반 보병편제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래도 칼슨 중령은 해병대에 겅호, 그리고 본인이 도입한 분대 편제(분대장+3인1조의 화력팀 3개조로 구성된 10인 분대)를 유산으로 남겼다.
미군이 호주와 뉴칼레도니아가 지척인 뉴기니와 남부솔로몬 제도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내느라 그야말로 사생결단을 벌이던 1942년~1943년 중반까지, 기습부대는 애초의 의구심을 불식시키는 빛나는 전공을 세우며 존재가치를 뽐냈지만, 1943년을 기점으로 태평양 전쟁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바뀌고 있었다.
2.4 짧은 역사의 끝
1943년, 제1기습연대는 다시 두 개의 단위부대로 나뉘어(제2,3기습대대가 제2기습연대로 임시편성) 중부 솔로몬제도 진공에 투입된다. 제1기습연대는 뉴조지아섬 작전에, 제2기습연대는 부갠빌 섬 상륙작전에 투입되어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하였으나, 태평양 전쟁에서 기습부대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일단 솔로몬제도와 뉴기니에서 일본군의 예봉을 꺾은 미군은 1943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반격작전을 준비해나갔고, 일본군 역시 예상되는 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전방 기지들의 요새화에 매진했다.
이제 해병대는 기습부대와 같은 소수의 경무장 정예 보병보다는 제대로 된 지원화력을 갖춘 정규전 편성의 일반 해병부대가 훨씬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6]
결국 애초부터 기습부대의 존재를 썩 달가워하지 않던 태평양해역군과 해병대 수뇌부는, 더 이상 태평양 전역에서 투입할만한 목표를 찾기 힘들어진 기습부대를 일반 해병대대로 전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물론 기습부대 뿐만 아니라, 낙하산부대(속칭 Paramarines)를 비롯하여 정규 해병연대의 편성 바깥에 있던 많은 독립대대들이 1944년 초를 전후로 일반 보병 해병연대로 전환되었다. 결국 1944년 2월, 제1기습연대는 해체되어 제4해병연대[7]예하로 흡수되었고, 제1,4,3기습대대가 각각 제4해병연대 1,2,3대대로, 제2기습대대는 연대 화기중대로 재편되면서, 해병기습부대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어쨌거나 제4해병연대도 베테랑 기습부대원을 기간으로 구성된 만큼 이후 투입되었던 괌 탈환전(제1임시해병여단 예하연대로 참가), 오키나와 전투(해병 제6사단 예하연대로 참가)에서도 맹활약하였고, 전반적인 군축이 이루어진 21세기 현재까지도 현역 해병연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8] 해병대의 레전설 격인 해병 1사단 예하연대(1, 5, 7연대)와 함께, 국군으로 치면 메이커 사단과 같은 위상(...)
이 때문에 현재까지 기습부대의 역사를 실질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부대를 굳이 꼽아야 한다면 아래의 해병 특수전연대보다는 오히려 이 제4해병연대를 꼽는 경우가 많다. 제4해병연대는 1944년 기습부대 해체 직후 기습부대원들이 4연대로 옮겨온 반면, 현재 레이더스라는 부대명을 쓰는 해병 특수전연대는 먼 훗날에 상징적으로 그냥 레이더스라는 이름만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상세한 기습부대의 역사가 궁금한 밀덕들은 미해병대 공식출간물을 참조.
3 현재 미해병대 특수전사령부의 레이더스
2016년에 만든 새 부대휘장
테러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2006년 미해병대가 창설한 해병대 특수작전사령부(MARSOC) 산하의 연대급 작전부대를 현재는 '레이더 연대'(Raider Regiment) 혹은 약칭으로 '레이더스'(Raiders)라고 부른다. 창설 요원들은 해병대의 포스리컨과 사단 수색대대에서 주로 모집했다.
2006년 처음 창설시에는 명칭이 해병대 특수작전연대(Marines Special Operations Regiment)였지만, 2014년에 2차대전 때 존재했던 위 항목 경보병부대의 이름인 '레이더스'란 명칭을 따와서 레이더 연대(Marine Raider Regiment)로 부대명을 바꾸었다.
이쪽은 육군 그린베레와 유사한 성격의 완전한 특수부대인데 반해, 본격적인 특수부대라기 보다는 정글전, 기습상륙전에 특화된 정예 경보병부대였던 원조 레이더스를 생각하면 같은 이름을 붙인다는게 미스매치... 인 듯도 싶지만, 이러한 두 부대의 성격엔 차이가 있더라도, 오래전 잊혀졌던 옛 전통의 이름을 다시 살린다는 상징적인 취지에서 부대의 성격과 무관하게 그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9]
그래서 1944년도에 없어진 해병 '레이더스'라는 부대명이, 레이더스가 해체된지 70년만에 다시 부활하게 된다.
현재의 레이더스, 즉 해병대 특수작전사령부(MARSOC) 산하의 레이더 연대는 창설시부터 미 육군 특전부대(그린베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육군 그린베레와 해병 레이더스 이 두 부대가 여러모로 유사하다. 실제로 그린베레를 많이 벤치마킹했고, MARSOC 창설요원들이 포트브랙의 미육군 특전부대로 파견가서 Q-Course 등의 각종 그린베레 교육을 위탁교육 받았다. 외관적으로도 비슷해서 사진을 보면 두 부대의 구별이 어려운 경우도 많을 정도.
- ↑ 이하 문서 작성시에는 두 부대의 구별을 위해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존재했던 레이더스 부대는 '기습부대'. '기습대대', '기습연대'로, 현대의 레이더스 부대는 뜻 풀이 없이 그대로 '레이더스'로 표기한다.
- ↑ Naval Combat Demolition Units
- ↑ 반대로 같은 이유에서 일본의 공세도 하와이까지 미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 역시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전황 예상은 퍽 잘 짜여진 것으로, 실제 2차세계대전의 전개와 비교해봐도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단 하나 진주만 공습만 빼고. 그만큼 전간기의 십여년 사이에 항공력의 발달이 초월적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 이런 경력이 있다보니 매카시즘이 창궐하던 시기에 고초를 겪었을만도 한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칼슨은 사이판 전투에서 입은 부상 후유증으로 종전 직후인 1947년 세상을 떠났다. 한편, 칼슨은 해병대에 겅호 구호를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 일개 대대가 하룻밤의 전투로 대대장 에드슨 중령을 포함 2명이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으니 이 전투의 중요성과 그 격렬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 예나 지금이나 해병대는 미군 내에서 인력, 장비 보충의 우선순위에서 좀 뒤처져 있다. 게다가 당시 미국이 대서양과 태평양의 양 전선에 모두 뛰어든 상황이다보니 인력 수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결국 종전 때까지 해병대의 전투병력은 6개 사단이 최대치였고, 그나마도 5, 6사단은 기습대대, 낙하산대대, 방어대대 등 각종 독립대대들을 말 그대로 갈아넣어 간신히 만들어냈다.
- ↑ 본래 China Marines로 널리 알려진 연대로, 상하이에 주둔 하다가 중일전쟁 발발 이후 필리핀으로 이동, 이후 필리핀 함락 당시 소멸한 연대의 단대호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중국에서 철수하던 중에 베이징 원인 화석을 분실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 ↑ 물론 대전기와 같은 연대 편제로 운용되지는 않고, 연대의 예하 대대가 각 해병원정단에 배속되어 작전에 참가하는 식으로 운용 중.
- ↑ 이렇게 현재는 없지만 과거에 존재했던 집단의 이름을 다시 되살려 쓰는 방식은, 그 집단의 정통성을 바로 우리가 계승한다는 정신적/상징적인 명예심 고취와 역사적 전통성을 먼 옛날까지 확장시키려는 목적으로 널리 쓰이는 방법이다. 미 육군의 레인저 부대도 그런 방식으로 이름 붙여졌고, 왕건이 건국한 고려도 고구려의 당시 이름인 고려를 우리가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그대로 국가명으로 채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