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역대 황제 | |||||
2대 혜종 건문제 주윤문 | ← | 3대 성조 영락제 주체 | → | 4대 인종 홍희제 주고치 |
(실제로도 포스 넘치는 군주였지만 초상화부터 그 남다른 포스가 잘 나타난다.) | |||
묘호 | 태종(太宗) → 성조(成祖)[1] | ||
시호 | 계천홍도고명조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 (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 | ||
연호 | 영락(永樂) | ||
성 | 주(朱) | ||
휘 | 체(棣) | ||
생몰기간 | 1360년 5월 2일 ~ 1424년 8월 12일 (65세) | ||
재위기간 | 1402년 7월 17일 ~ 1424년 8월 12일 (22년 26일) |
역대제왕묘 배향자 |
중국 한족 왕조 역사상 한무제, 당태종의 뒤를 잇는 정복 군주.
명나라 제3대 황제. 이름은 주체(朱棣). 태조 주원장의 4남.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명군이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잔혹한 숙청때문에 비판받는 인물이다. 게다가 환관들을 이용한 측근 정치를 과도하게 하였다는 비판이 있다.
1 연왕 주체
1370년 11세 때 연왕(燕王)에 봉해져 지금의 북경 일대의 제후가 되었으나 바로 이 때 북쪽으로 간 것은 아니었고, 진짜로 북경 지역으로 간 것은 1380년, 21세 때였다. 이 때 이후로 그 지역의 정치와 군사를 총괄했다. 당시로써는 명나라의 최북방 지역으로[2] 주원장의 북진으로 인해 북방으로 물러간 몽골족의 침입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를 막아냈다.[3] 그런 만큼 무골로 성장했고 성품도 대단히 호방하고 목표의식이 뚜렷했다. 이런 능력 때문에 주원장은 그를 내심 후계자로 염두에 두기도 했으나 장자 우선 원칙에 따라 장남 막내아님 주표를 황태자로 삼았고, 주표가 일찍 죽자 그 아들인 주윤문(훗날의 건문제)을 황태손으로 삼았다.
2 정난의 변
1398년 주원장이 죽고 주윤문이 건문제로 즉위했는데, 건문제와 그 측근들은 숙부 주체를 비롯한 다른 숙부들이 막강한 군권을 지니고 있는 것을 황제권을 유린할 수 있는 것으로 우려하여 다섯 번왕을 없애는 등 각지의 번왕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펼치자 주체는 조카와 그 측근들이 자신을 노리는 것을 알아채고 북경에서 거병, 건문제와 내전을 벌였다. 비록 주체의 전력은 건문제에 비해 훨씬 열세였으나 주체 본인의 기량과 건문제의 우유부단함이 결정적으로 작용해 승기를 잡은 정난군은 파죽지세로 수도 남경까지 몰아쳤고 건문제는 궁에 불을 지른 후 행방불명. 결국 남경은 함락되었고 주체는 황제에 등극했다. (정난의 변) 조카 조까
중국의 많은 황제들 중 영락제의 개성적인 점은 일신의 무용과 관련한 기록이 유난히 많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 기록들이 야사나 설화가 아니라 명나라 정사에 기록이 되어 있다. 정난의 변 때 스스로 난전에서 말을 갈아타고 화살이 떨어지면 직접 칼을 휘두르며 처절하게 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다름 아닌 연왕의 신분이었는데도 직접 진두에 서서 시석이 쏟아지는 중에도 앞장서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가히 중국 역사상 몇 안 되는 무인 황제 중 한 명. 특히 정난의 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때 영락제의 무인적 기질과 군사적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3 내정에서의 업적
영락제의 동상. 장릉 능은전에 있다. |
그림에서 볼 땐 잘 안 보였는데 여기서는 두툼한 뱃살이 보인다.
황제로서의 업적은 명나라를 제국으로 성장시킨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수도를 남경에서 자신의 세력 기반이었던 북경으로 옮겼다. 본래 남경은 건문제의 세력 기반이었는데 북방에서 들어온 영락제로서는 찜찜했고, 아직 북방에서 몽골족의 침입이 계속되던 상황이다 보니 중간쯤에 위치한 곳으로 수도를 옮긴 것. 그리고 원나라가 버리고 간 도성 위에 아예 새로운 궁성을 축조했는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자금성이다. 이후 북경은 지금까지도 중국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또한 문화 사업에도 힘을 쏟아 <영락대전>을 대표로 하는 많은 학술 서적을 편찬했으며, 이를 통해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황제 독재권을 강화하기 위해 번왕 제도를 폐지하고 전국에 어사를 파견해 지방까지도 효과적으로 황제의 권한이 미치도록 했다. 경제 발전에도 힘을 쏟아 효과적인 농사를 위해 수리시설도 보완했으며 대운하를 개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4 대외적 업적
이런 내정적인 면도 뛰어났지만, 외정적인 업적은 정말 화려하다. 연왕 시절부터 전장을 누빈 무인이었던만큼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펼쳐 1410년 고비 사막을 넘어 친정한 이후 재위기간 동안 무려 5차례나 몽골에 친히 원정하여 승리를 거두어 몽골족이 명을 넘보지 못하게 했으며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베트남에도 원정군을 파견하기도 했으며 명나라 해안에 자주 쳐들어오던 왜구를 엄중히 단속하기 위해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와 협력하기도 했다. 특히 건문제 시절 일본 국왕에 봉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와 감합무역을 실시했으며, 요시미츠가 죽자 그에게 '공헌'이라는 시호를 내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많은 외정 중에서도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바로 정화의 원정이다.[4] 1405년에 첫 함대가 파견된 이후 1433년 선덕제 치세까지 무려 6회나 대함대를 파견하면서 동남아시아, 인도양, 심지어 동아프리카의 케냐 해안까지 명의 함대가 진출, 나라의 위세를 크게 떨치고 많은 나라의 조공을 받았다.[5] 이렇듯 내정과 외정 양면으로 명나라를 대제국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그의 치세는 영락성세(永樂盛世)라 불리며 후임 군주들인 홍희제와 선덕제의 인선지치(仁宣之治)와 더불어 나라의 전성기로 불린다.
이런 일세의 호걸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1424년 5번째 몽골 원정에 직접 나섰다가 병을 얻었고 결국 진중에서 죽음을 맞았다. 향년 65세. 영락제가 죽자 국정의 혼란을 우려한 신하들은 마치 황제가 살아 있는 것처럼 식사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홍희제가 워낙 순한 나머지 영락제의 죽음이 홍희제의 동생들에게 알려지면[6] 국정에 혼란이 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5 비판
대체적으로는 명의 훌륭한 황제 중 한명으로서 좋은 평을 받지만, 비판점도 많이 존재한다.
숙청은 당시 기준으로 봐도 지나치게 잔혹했다. 게다가 그 대부분이 아버지 주원장과 달리 안해도 되는 숙청을 한 것이라 더욱 문제다.[7] 특히 방효유 일족에 대한 처형은 (이게 사실이었다는 전제하에서)[8] 악명이 높은데 물론 방효유 본인이 대놓고 연적찬위[9] 등의 글을 쓰는 등 대놓고 도전한 이상 죽이는 것까지야 전제군주제인 명에서는 그럴수 있다고 쳐도, 일가족, 친척, 친구, 마지막에는 거주하던 마을 전체 주민들을 끌어와 방효유 앞에서 차례대로 죽인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물론 중국에서는 황제에게 거역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을 연좌하는 일이 흔했지만 진짜 반역이 아니면 당사자만 처벌하는 게 보통이고 가족은 기껏해야 추방만 했으며, 반역을 했다고 쳐도 영락제 수준으로 마구잡이로 잡아죽이는 경우만큼은 거의 없었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잔혹했을 지가 답이 나온다. 물론 이런 짓을 통해 저항세력을 억누르고 통치를 안정적으로 하긴 했지만 그건 영락제가 능력이 있으니까 가능했던 거고 그 밑으로 즉위하는 황제들도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 치명적이었다.[10] 어쨌건 이후 명나라는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 잘 나오지 않게 되었고, 그 대가는 명나라와 주씨 황족들이 치러야 했다.
또한 영락제의 지나친 대외 활동으로 인하여 국가의 재정이 악화되었고 이는 후대 황제들의 부담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주요한 주장이다. 위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그는 한평생 몽골 원정에 매진했고 정화의 대항해 또한 그의 시대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대외 활동은 일견 화려해 보일지 모르지만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게 된다. 즉, 영락제 시대의 발전된 명의 모습은 빛좋은 개살구였다는 것. 이러한 모순의 심화가 정강의 변과 함께 한족 왕조의 2대 치욕이라고 일컬어지는 토목의 변이 일어나는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황제 독재권의 강화를 위하여 환관들에게 지나치게 큰 권한을 주어 후대의 환관들의 전횡의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 또한 크다.[11] 조정의 권한을 축소되고 환관 조직이 비대화되며 환관의 권한이 커지기 시작한 시기가 영락제의 재위 시기이다. 실제로 명왕조는 환관들의 전횡이 가장 심했던 왕조 중 하나였다.[12]
주원장은 환관들이 권력을 가지거나 요직을 맡지 못하게 환관들이 글을 알지 못하게 만들었고 환관이 된 사람중에 글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가차없이 내치거나 죽였다. 이는 잔혹하지만 그래도 필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건문제 때까지는 환관들 업무를 황제를 보좌하는 것이 아닌 황제를 따라다니면서 잡다한 심부름꾼 정도였으나 건문제 추출과 정적제거에 환관들을 크게 활용한 영락제는 정적감시와 사대부와 군부, 관리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환관들 중심으로 소련의 KGB 비슷한 동창이라는 비밀경찰제도를 활용하였다.[13] 이는 환관들이 명왕조 멸망 때까지 권력을 전횡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주었고, 결국에 황제마저도 환관들의 눈치를 봐야 할 정도로 그 폐해는 심해졌다.
후일 명의 멸망을 부른 무능한 황제들의 막장 행태로 대표되는 국가 막장 테크의 조짐은 이미 영락제 때 시작됐던 것이다. 한마디로 명나라판 세조라고 할 수 있다.
6 조선과의 관계
그의 치세는 조선의 태종(1400~1418) 시대와 거의 겹치며 세종(1418~1450)의 재위 초반과 겹친다. 영락제는 개인적으로는 조선 여인을 좋아했는지 총 8명의 공녀[14]가 그의 후궁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사실 영락제는 주원장의 정처 소생이 아니라 조선의 여인 소생이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영락제가 태어날 1360년은 아버지 주원장은 황제도 아닌 강남의 유력 군벌 중 하나였을 뿐이고 또한 영락제에게 황위를 찬탈당한 건문제를 추종한 세력들이 지어낸 루머일 수도 있다. 그 외에 실록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음식과 술도 입맛에 맞았던지 그 재능이 있는 궁인도 보내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명으로 건너간 공녀들은 각각 첩지를 받아 후궁이 되었다. 그 중 한 명인 권씨가 현인비로 봉해졌고, 한영성의 딸이자 한확의 누나인 한씨는 여비로 봉해서 총애를 받았다. 이 중 현인비 권씨는 상당히 이례적인 대우를 받았는데 당시 영락제의 황후 서씨가 죽은 뒤였는지라 후궁의 관할을 조선에서 온지 얼마 안되는 권씨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안되어 병사했는데 후에 그 죽음을 둘러싸고 어여의 난이 일어나 엄청난 수가 죽게 된다. 한편 같이 갔던 황하신의 딸 황씨가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대국을 우습게 본 거냐고 노발대발하는 영락제를 한씨가 여염의 일을 국왕이 어떻게 알았겠냐고 말렸는데 그 말에 감동한 영락제가 황씨에 대한 처벌을 그녀에게 맡기자 한씨는 황씨에게 뺨을 때렸다고 한다. 후에 영락제 묘에 순장당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일부 한국인들 사이에선 감정이 좋지 않기도 하지만, 사실 조선 태종이 겉으로라도 명에 대해 저자세로 나온 대가로 조선에 엄청난 무역특혜를 제공했다. 황제국은 조공을 바치는 국가들에게 조공의 물량보다 더 많은 회사(回賜)를 내리는데, 태종은 이를 이용해 파격적인 실익을 얻어낸 것이다. 태종 : 내가 저자세로 나왔던 것은 조공 특혜를 얻기 위함이었다! 당시 명은 조선과 베트남 그리고 태국은 3년에 1회, 일본과는 10년에 1회, 류큐 왕국과는 2년에 1회 조공무역을 하였다. 그런데 명은 태종이 친명노선을 천명하자 파격적으로 1년에 3회 조공무역을 허용하였다. 그 후에 명나라는 수시로 조공무역을 줄이자며 조선에 요청했지만, 조선은 강하게 거부하였다.[15] 태종이 명에 호의적인 정권이었기도 했지만, 태종이나 영락제나 모두 머리가 비상한 명군들이었고 무엇이 양국 간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알았기 때문에 조명관계는 정도전이 버티고 있고 매우 꼬장꼬장했던 태조 이성계 시기에 비해 매우 우호적으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태종과는 연왕 시절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있었고 태종이 정도전을 조지면서 조명관계가 개선되었기 때문에 개인적 친분과 정치적 이해를 같이 한다는 점도 꽤나 작용했을 것이다. 양국간의 이런 관계는 명의 멸망까지 계속되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만동묘까지 지어 기릴 정도로 아주 좋았다.
그리고 태종은 우리 국토만큼은 지킨다는 방침을 세웠고, 재위기간 내내 이 방침을 고수했다. 특히 명이 조선의 동북지역까지 살고 있던 여진족을 직할로 통치하겠다는 소식을 듣자 태종은 즉시 관련 역사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토대로 명의 주장을 반박했으며 심지어는 마지막에 "폐하 아버지께서도 이건 인정한 거니까 태클 걸지 마셈."이라는 말까지 덧붙여 결국 동북지역 여진족을 계속 조선이 관리하라는 말을 받아냈다. 그리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북방 국경의 방비에도 힘을 기울였다. 많을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그저 저자세로만 나가지는 않은 것이다. 이 상황은 영락제 치세를 살았던 세종대왕대에도 더욱 강력한 대여진 정책과 함께 그대로 유지된다.
7 인물됨과 일화
혈족과의 권력 다툼과 그 끝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번영시킨 명군의 반열에 올랐다는 점에서는 조선의 태종과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이다. 특히 동시대에 살았던 조선 태종과는 직접 만난 적도 있었다고. 태종이 왕자 시절 명에 사신으로 갔을 때 연왕으로 있던 영락제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조선에 돌아와서 태종은 "연왕은 왕에만 머무를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태종이 간파한대로 황제가 되었는데 태종도 정변으로 즉위했고 영락제 본인도 정변으로 즉위해서 그랬는지, 태종을 완전한 조선 국왕으로 인정해 준 것도 영락제였다.[16]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 둘은 참 궁합이 잘 맞았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는 태종이 직접 영락제에게 보낼 말을 골랐는데 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평범해보이는 말을 골라서 바치라고 하니 영문을 모른채 영락제 앞에 보냈더니 영락제가 매우 기뻐하면서 조선왕이 최고의 명마를 바쳤다고 기뻐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카를 폐위한 부분은 세조와도 비슷해 보인다. 환관들의 도움으로 황제가 됐다는 이유로 환관들의 세력을 키워 나라의 국운을 약화시킨 것도 세조가 계유정난의 공신들을 토사구팽하지 않고 우대해 나라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한 것과 비슷하다. 참고로 영락제의 차남인 주고후도 비만이었던 형 주고치에 비해 부황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훗날 조카 선덕제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되려다 발각되어 본인과 그 가족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몰살된다. 어쩌면 부전자전.
베이징에서 약 44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역대 명나라 황제들의 무덤인 명십삼릉(밍스싼링: 明十三陵)이라고 부르는데, 그 중 영락제의 능인 장릉이 가장 규모가 크며 유명하다. 장릉보다 더 큰 능을 만드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장릉의 전각인 능은전(裬恩殿)은 자금성의 태화전에 맞먹는 규모이며, 태화전과 함께 중국 최대의 목조건축이다.
기린(2번 항목)이 동양권에 알려지게 된 시기 또한 영락제 때. 그 기린 덕분에 정치적인 안정을 가져오는 효과도 있었다.[17]
십족을 멸한다는 말을 만든 장본인으로 정난의 변 과정에서 방효유의 십족을 멸족시킨 적이 있다. 원래 구족[18]이라는 개념은 있어도 십족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그런데 건문제의 측근으로서 연왕(즉 영락제)를 제거하려 한 방효유를 회유하여 즉위 조서를 쓰라고 했을 때 방효유가 이를 거부하며 오히려 연적찬위(燕賊纂位: 연나라의 역적이 제위를 찬탈하다)라고 쓰자 화가 난 영락제가 "너의 죄가 구족에 미치더라도 계속 고집을 부리겠는가?"라고 했고, 이에 방효유가 "구족이 아닌 십족을 멸족시킨다고 해도 내 뜻을 꺾을 수는 없다!"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전무후무한 십족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이는 구족에 친구와 문하생을 포함시킨 것. 방효유의 '십족'으로서 총 847명이 처형되었다고 하며, 이들은 모두 방효유의 눈앞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또한 서쪽을 정복한 티무르가 명과의 결전을 준비한 것이 1404년의 일로 영락제는 1402년에 찬탈하고 황제로 즉위했으니 막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한 영락제와 정복의 막바지에 이른 티무르의 군세가 격돌할 위험이었으나 티무르는 1405년 병사, 당대 최강을 다투는 양 제국의 대결전은 성사되지 않았다.
8 현대 매체에서의 영락제
코에이의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4에서 명나라 세력에 포진. 전투치가 무려 96이며 다른 능력치도 준수한 동아시아 문화권 전무장중 최강의 먼치킨이다. 더욱이 기병 적성치도 S에다가 혈연무장이라는 메리트가 있어서 병사를 더 많이 이끌 수 있으니 가히 야전에서는 적수가 없다. 명을 컴퓨터에게 맡겨놓으면 시간이 지난 후 정난의 변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이걸 보고 나면 이름이 본명인 '주체'에서 '영락제'로 개명된다.
여담으로 허영만 화백의 꼴에서는 황제가 되기전에는 풍채가 별로 였는데 크고 아름다운 수염을 기른 후 부터는 관상이 바뀌어 저 초상화처럼 상당히 후덕하고 호방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무협지에 가장 많이 배경으로 쓰이는 시간대가 바로 영락제 때이며 영락제 자신도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곤 한다. 보통 무공이 강하고 매우 호전적이며 유능한 군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인지 한백무림서에서는 영락제가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한백무림서에서 무림의 균형은 사패, 팔황, 구파와 황실이 지키는데 이 황실의 수장이 바로 영락제. 한백 무림서의 핵심인물인 진천의 장인이기도 하고 무당마검에선 친정을 하여 챠이와 맞대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Europa Universalis 시리즈에서는 4.4.5라는 괴락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참고로 평균이 5.5.5(...) 만렙은 9.9.9(...) 거기다 영악(...)이라는 괴락한 이름으로 번역되어 있다. 단 Europa Universalis 4 에서의 영락제는 능력치 5 6 6으로, 최고 능력치가 6 6 6임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보통 도합 능력치가 14를 넘어야 최고급 군주라고 불러주는데, 명나라에서는 14를 넘는 군주가 영락제와 6 4 6인 홍무제뿐이다.
어새신 크리드의 페이스북 판인 Assassin's Creed: Discover Your Legacy 에서는 성전기사단의 일원으로 등장. 방효유와 리 통의 부모를 비롯한 암살단 용의자들을 잡아다 모조리 처형[19]하지만 결국은 1424년 리 통에게 암살당한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황제의 자리에 아직 오르지 않았을 때에, 명에 사신으로 온 조선 왕자 이방원을 만나는 역할로 나온다. 문종원 씨가 연기했다. 뮤지컬 배우 출신 다운 쩌렁쩌렁한 발성과 남성적 포스가 넘치는 외모로 탁발하기 그지없는 영락제 상을 연출해 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몽골어, 만주어, 티무르어?[20] , 타타르어, 고려어가 구사가능한 것으로 나온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대사를 한국어로 한다.
- ↑ 원래 묘호는 태종(太宗)이었으나, 가정제 들어 묘호가 성조(成祖)로 개정되었다.
- ↑ 명이 처음 건국했을 때 명의 수도는 남경이었다.
- ↑ 명나라 개국공신으로 무공 제일이라던 서달과 상우춘도 가끔 패하기까지 한 몽골군 상대로 공격과 방어 모두 전승(全勝)을 거두었다. 그래서 주원장은 "북방에 연왕이 있으니 내가 편안하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 ↑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항해로 많은 재정이 소모되었다.
- ↑ 물론 이 정화의 항해를 왜 행했는지는 많은 가설이 거론된다. 심지어는 행방불명된 건문제를 수색하기 위한 항해였다는 설도 있다.
- ↑ 특히 한왕 주고후는 가장 영락제를 닮은 아들로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뒤는... 선덕제 항목 참고.
- ↑ 당장 주원장 때 숙청된 공신들에 대한 평가는 어쨌건 불가피했다는 주장이 우세하지만 영락제 때 숙청된 관료들에 대해서는 동정론이 압도적이었다.
- ↑ 정난의 변항목 중 결말 부분 참조.
- ↑ 그냥 군주라는 것을 부정한 수준이 아니라 연나라 적이 제위를 찬탈했다고 쓴 것이다. 대놓고 역쿠데타를 선동한 셈인데 이정도면 영락제가 아니라 상대가 사람 좋은 군주였다고 해도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
- ↑ 조선의 세도정치도 마찬가지다. 사실 독재체제 자체는 숙종 때부터 싹수가 보였는데 이 숙종과 영조, 정조는 그래도 정치적 역량이 탁월했기에 그냥 자기 마음대로 이끌어갈 수 있었지만 그 후손들은 그렇지 못했다.
- ↑ 이는 '정난의 변'으로 조카를 몰아내고 즉위한 영락제에 대한 사대부들의 비판과 저항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많은 사대부들이 영락제에 협력하기를 거부했고, 방효유와 같이 끝까지 영락제를 비판하다가 십족이 처형된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사대부들에 대한 불신으로 인하여 사대부들이 장악한 조정을 통해 나라를 통치하는 대신 자신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환관들을 통해 나라를 통치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 명나라의 멸망에 일조한 유근, 왕진, 위충현 등은 모두 환관 출신이다. 환관의 권한이 얼마나 컸는지, 그리고 그 부작용이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알 수 있다. 이들은 자국에서만 욕심을 채우는 걸로는 부족했는지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계에 고등학생이 가서 깽판치듯이 조선으로 가서 은 내놓으라며 깽판을 쳤고, 조선인들은 명의 환관이라면 이를 갈았다.
- ↑ 사실 동창은 홍무제 때 부터 있었다. 주원장은 사람을 잘 못믿고 유방 이상의 숙청을 감행했었는데 그 도구로 유용히 쓰였다. 일화가 있는데 어느 관리가 지인들을 불러 연회를 주최 한 후 다음날 홍무제를 만났는데 홍무제는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 관리는 누구를 불러 언제부터 언제까지 무슨 음식을 먹었다 등 아주 디테일 하게 말했고 홍무제는 거기에 자네는 참 정직하구만! 라고 만족하면서 그 관리 앞에 뭔가를 내밀었다. 어제 연회가 그대로 그려져 있던 그림이었다.
- ↑ 현인비, 여미인, 강혜장숙여비, 임순비, 이소의, 최미인, 정비, 송비, 황비. 이 중 현인비는 독살당했다고 한다. 영락제는 현인비를 꽤나 총애했는지, 중국인 출신인 여장비가 독살하고 그 죄를 조선인 여강비에게 뒤집어씌웠다는 것을 알게 되자 노발대발해서 관련자 2800여명이 죽었다고 한다(어여의 난). 여기에 얽힌 조선인 후궁 황씨와 이씨는 참형, 임씨와 정씨는 국문을 못 견뎌 결국 자살했다.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최미인과 한씨 뿐이었고, 이 둘은 순장당했다.
- ↑ 조공에 관한 오해에 대해서는, 조공에 대한 답례로 황제국이 회사(回賜)를 내리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오해다. 이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받은 선물보다 더 큰 선물을 내리는 것이, 상국으로서 체면을 차리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공을 하면 할수록 명나라의 무역적자는 늘어나고, 반대로 조선의 무역흑자는 늘어났던 것이다.
- ↑ 태조 이성계와 주원장이 살아 있을 때는 조선과 명의 관계가 좋지는 않았다. 정도전이 주도한 진법 훈련이나 조선을 경계했던 주원장의 움직임이 맞물린 탓. 이 탓에 주원장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승인하고 국교는 통해야 했기 때문에 태조 이성계를 책봉은 했지만, 외교적으로 굴복을 유도하기 위해 임명장과 공식인장에 해당하는 고명이나 책인은 지급하지 않았다.
- ↑ 이유는 이 기린과 황제가 나라를 잘 다스려야 나온다는 기린과 음이 같기 떄문인데 그래서 처음에 정화가 기린을 데려왔다고 하자 영락제가 "그럴 리 없다"고 했다는 얘기도 있다.
- ↑ 친족의 4대와 외족의 3대, 그리고 처족의 2대
- ↑ 정황상 위의 "정난의 변"으로 추정. 참고로 여기서 방효유는 명나라 암살단의 그랜드 마스터라는 설정으로 나온다.
- ↑ 티무르 제국의 언어를 뜻하는듯 하다. 그냥 페르시아어라고 했으면 됐을 일인데 그냥 국가명으로 끼워맞춘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