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 조약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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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3월 7일 월요일까지 우리의 제안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시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추신: 우리가 전쟁에 이겼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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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든 싫든 먹어야 할 걸?" 4대 열강제 평화조"". 가격은 한 상자에 수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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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대변인: (크고 아름다운 대포를 겨누며) 당장 그 뿔달린 모자를 벗지 못할까! 우리가 비무장화(...)가 아니라면 무엇을 위해 싸웠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 조약은 확실히 공개적이었다. 여러 서명국에서 비준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조약 내용을 일반에 낱낱이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조약 내용 자체는 결코 ‘공개적으로’ 수립되지 않았다. 역사상 그 어떤 협상도 그처럼 철저한 비밀에 싸인 신비의 과정이 아니었다. 윌슨, 로이드 조지, 클레망소가 밀실에서 마주앉아 있는 동안 완전무장한 미군은 각국의 전문가, 외교관, 심지어 대통령 외의 미국 대표단까지도 그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통 같은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 해럴드 니컬슨[1]

화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징벌적이었고, 독일의 회복을 막기에는 지나치게 관대했다.(Too punitive for conciliation, too lenient to keep Germany from recovering)

- 헨리 키신저

1 개요

유럽평화를 추구하다가 결국엔 전 세계를 광풍(狂風)에 휩쓸리게 만든 실패한 조약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승전국들이, 특히 프랑스가, 패전국 독일을 아주 고자재기 불능으로 만들기 위해 무자비하게 뜯어내려한 조약. 그 골자는 엄청난 양의 보상금과 독일의 무장해제(최소한도로 필요한 군사력만 보유 가능)를 골자로 하는 것으로, 1차대전 동안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은 영국프랑스 등이 주축이 되어 이뤄졌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체결되었다. 이로 인해 변화된 세계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한다.

2 발단

1918년 9월 독일 군부가 사실상 패전을 내각에 알리고 11월 11일 휴전이 성립 되었다. 연합국은 독일의 휴전요청을 사실상 항복으로 간주하고 독일군을 뒤쫓아 독일 국경을 돌파해서 라인강지역까지 추격하고 영국 해군은 휴전후 협상조건을 관철 시키기 위해서 독일 항구에 기뢰를 매설했다. 1919년 초부터 본격적인 협상인 줄 알았는데 훼이크고 사실상 항복후 요구조건을 명령하고 관철시킨 것. 독일에선 반발했지만 이미 반항할 여건이 안된다는 판단하에 수용한다.[2]
승리한 연합국들은 독일을 '씨가 마를때 까지' 억압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원래 베르사유 조약의 배상금은 전장이 되었던 벨기에프랑스의 주민들에 대한 피해 배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연합국 군대의 군사적 손실에 대해서도 배상할 것.'이라고 나서면서 300억 마르크가 2000억 마르크 대로 치솟게 되었다.물론 나중에 하여튼 치즈나 먹는 항복한 놈이라는 조롱을 받았지만.
한편 우드로 윌슨은 자신의 이상인 국제 연맹을 현실화할 가능성을 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엿보았고, 결국 조약의 첫 조항은 국제 연맹에 대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국제 연맹 항목에서 보듯 현실은 시궁창.

3 내용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은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에 있으며 황제와 군부핵심인사를 포함한 전범 800명을 인도할것[3]
  •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랑스에 양도할 것, 모든 식민지를 포기할 것.
  • 벨기에에 오이펜-말메디, 폴란드에 포젠, 서프로이센을 양도할 것, 덴마크 접경 슐레스비히 북부, 폴란드 접경 상슐레지엔은 즉시 주민 투표로. 프-독 접경지대 자를란트 지방은 탄광권을 15년동안 프랑스에 넘긴후 국민투표를 귀속을 결정할 것, 독일계 주민이 많은 단치히는 국제연맹 자유도시로 정할 것.[4]
  • 라인강 이서(以西) 지역 전부와 라인강 동쪽 60킬로 미터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하고 병력배치를 금지[5]
  • 20년 안에 1,320억 마르크를 기준으로' 배상할 것[6][7]
  • 육군의 규모를 10만 명으로 제한하며 징병은 금지한다.
  • 독일은 대포 5,000 문과 비행기 25,000대를 양도한다.(...)
  • 전차, 전투기(를 포함한 항공 전력 전부) 등 최신 무기의 보유를 일체 금지한다.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 해군의 병력은 1만 5천, 군함은 경순양함 6척, 구축함 12척, 노후 배수량 1만톤 이하의 전함 6척으로 제한한다. 잠수함도 금지
  • 사관학교 폐지 참모본부도 폐지[8]

다른 패전국 사이에서도 오스트리아 제국과 생 제르맹 조약, 헝가리 왕국과 트리아농 조약, 불가리아 왕국과 뇌이 조약, 오스만 투르크 제국 사이와는 세브르 조약이 줄지어 체결되었다. 모두 비슷하게 영토 할양 제국 해체 군비 제한 등의 내용이다.

1,320억 마르크는 전쟁으로 재정이 피폐해진 독일로써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으로, 영국 재무성을 대표하여 참가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비롯한 협상에 참여했던 경제학자들이 산출한 독일의 지불가능액 20억 달러(= 약 100억 마르크)의 1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이렇게 무리한 금액을 요구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독일의 재기불능을 위한 것이 가장 컸지만 전쟁으로 인한 부채상환과도 관련이 있다. 전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진 부채, 특히 미국으로부터 진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독일을 쥐어짜려 한 것이다. 한마디로 독일을 영원히 구제금융 국가, 부채국가로 만들겠다는 속셈인데, 이렇게 지나치게 가혹한 조약을 강요한 것은 복수심에 불탄 군부가 아니라 냉철해야 할 정치인들이었다. 케인즈는 어차피 독일에 못받고 영국 프랑스는 독일에 받아봤자 미국에 도로 전쟁때 얻은 빚을 상환해야 하기 때문에 증오와 정치적 혼란만을 일으킬 바에 아예 배상금을 탕감하자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화가 나서 혼자 귀국해버리고 그 길로 재무부에 사표를 제출하고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소책자를 써서 베르사유 조약과 연합국 정치인들을 깠다.[9]

군대의 경우에는 확실하게 통제해야 하므로 세세한 항목까지 설정했다. 그래서 독일은 허락된 10만의 군대를 부사관장교 위주로 해서 정예화하고, 전차나 전투기등의 금지된 무기는 소련과 밀약하에 소련 영토에서 공동개발하거나 농업용 트랙터 등으로 위장시켜 개발을 진행하였으며, 대공포 등 일부 병기는 조약의 맹점을 이용하여 1차대전 종전 직전인 1918년에 개발했다고 주장해서 생산 및 개량을 허가받기도 했다.

하지만 연합국의 제한은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두었다. 2차대전개전 당시 독일군은 현역병력은 많으나 예비병력의 경우 그 숫자도 적고 기초훈련도 안돼서 노역자 이외에는 써먹을 수 없는데, 이는 군대의 장기간 소규모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군수 공업도 상당기간 묶여 있어서 화포나 전차의 수준도 연합국에 비해 낮았다. 해군의 경우에도 공산정권이 들어선 소련와 과도한 배상 및 군비 제한을 요구하는 프랑스에 질린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드레드노트급 전함 8척 보유 정도로 제한할 것을 생각했다. 허나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으로 화가 난 영국 총리는 해군 군비를 대폭 축소시켜 버린 탓에 대형함의 건조가 10년간 끊어져서 이후 해군을 재건할 때 설계한 군함마다 대부분 1차대전시의 물건에 약간의 개수를 한 형태일 정도로 막대한 지장을 불러왔고, 결국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건조가 빠르고 비대칭 전력잠수함 위주로 해군을 건립할 수 밖에 없었다.

4 각국의 반응

파일:Attachment/베르사유 조약/b0041991 48af02a0d1a74.jpg
만평 # : 우는 아이를 독일로 보고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비판이라는 해석과, 제목인 peace and future cannon fodder(평화와 미래의 대포 먹잇감)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장래 새로운 전쟁을 불러일으킬 어정쩡한 베르사유 조약을 비판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4.1 너무 가혹하다?

당시 영국 대표단의 일원이자 재무성의 일원이었던 케인스가 '(연합국 지도자들의)역겨운 언행을 참을 수 없다' 면서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직후 펴낸 소책자 '평화의 경제적 귀결'에서 케인스는 전쟁배상금 개념 자체를 비난했다. 나중에는 "이제 남은 것은 전쟁 뿐"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그는 옳았다.

동료 승전국인 미국에서도 이건 너무하다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 영국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독일에게 불필요한 굴욕을 주어 그들이 복수할 마음을 품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독일이 경제파산을 선언하자 불법적으로 독일 루르공업지대에 자국군을 진주시키고 강제적으로 배상금을 착취하였다. 그로 인해 베르사유조약에 대한 독일인들의 증오와 분노는 더욱 커졌다.

4.2 너무 봐줬다?

프랑스의 경우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장군은 조약 내용이 너무 관대하다면서 "세상에 이런 평화가 어디 있는가. 이것은 단지 20년간의 휴전 협정일 뿐이다."라고 분노를 터트렸다. 포슈가 미래를 내다본 훌륭한 전략적 안목의 실례다.[10] 포슈는 프랑스가 알자스-로렌을 돌려받았으나 실상 1차대전 이전의 빈약한 상태와 달라진게 없다는 점을 통찰했고, 독일의 라인란트를 프랑스가 점유하지 않는 이상 프랑스와 독일이 1:1로 싸울 수 없다는 점과 라인란트 대신 연합군에서 내세운 영국과 미국과의 동맹이 허상에 불구하다는 점을 깨달은 것과 더불어 베르사유 조약의 독일군에 대한 제약이 허접한 수준임도 통찰해낸 결론을 내렸다. 즉, 20년전부터 나치 독일의 재무장과 프랑스 침공의 결과를 어느 정도 들여다봤다는 소리... 한동안 국내에서는 포슈의 '20년 휴전' 발언을 "연합국 내부에서조차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게 너무 가혹했다는 비판이 많았다"는 사례로 인용되었는데, 실제 포슈의 의도를 완전히 잘못 해석한 셈.
덤으로 호랑이가 별명이었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는 그 본인이 베르사유 강화회의의 의장으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약 내용이 '관대하게 망가지는 것을 손놓고 보고만 있었다'(...)는 이유로 실각하는 등 독일의 전쟁수행력을 결딴내는 데에 실패했다는 사실에 낙담하고 있었다.

사실 독일의 전쟁수행능력을 절단내려면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투르크가 당한 것처럼 나라를 몇 개로 나눠버리는 게 가장 좋긴 한데[11]...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민족자결주의 때문에 비교적 단일민족이었던 독일을 나눌 명분이 없었다고 카더라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이른바 '라인강 이서(以西) 공화국' 등의 건국을 추진하였으나, 정부수반에 대한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테러 등으로 실패한다. 바이에른뮌헨에서 공산봉기가 있었지만...애초에 프랑스의 주장은 프랑스 인구는 4천만이 안되고 독일은 6500만이나 되니 천만은 떼서 독립시켜놓고 완충지대 역할을 하자는 것.

그러나 독일은 분단되지 않았고 비록 패전하고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 할양이라는 굴욕을 맞이하였으나 여전히 광대한 영토와 인구 그리고 비스마르크때 양성한 과학,기술,인재들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언제든지 부흥할수 있는 여력이 있었고 실제로 식민지 착취와 강매로 이루어지는 경제구조를 가져 자국의 국력향상에 한계가 있는 연합국에 비해 독일은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내수와 기술발전 위주의 경제체계를 유지하면서 20년뒤 다시 한번 전쟁 할수 있는 국력을 갖게 된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지나칠 정도로 가혹한 연합국 조건은 외세에 대한 강한 반발심과 증오를 가져와 독일국민들이 히틀러를 지지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5 사후 수습 - 배상금 경감

어떻게든 결국 미국이 나서서 대규모 재건 계획을 시행하면서 독일을 달랬고 후에 캘빈 쿨리지 정권에 이르러서는 '도스 안(Dawes Plan)'이라는 것을 내놓아 독일의 배상금을 경감시켜주기도 하였다. 연합국이 자비를 배푼 것.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1921년 4월 27일 런던에서 배상금을 66억 파운드(= 320억 달러 = 1320억 마르크)[12]으로 확정하고, 1924년 도스 안과 1930년 '영 안(Young Plan)'을 통해 조정되었다.[13]

그 내용은 독일의 경제상황을 고려하여 8억 마르크의 차관을 빌려주고 순차적으로 첫해 10억 마르크에서 시작해 매해 20억~25억 마르크(= 4.73억 달러) 전후한 금액을 59년간 갚도록 책정했다.(이렇게 하면 1210억 마르크가 된다.) 독일은 실제적으로는 매해 10억 마르크대를 납부했다. 그리고 이를 제안한 찰스 도스(Charles Dawes)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이 즈음 독일이 국제연맹에 복귀한다. 이렇게 베르사유 체제는 점점 안정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6 조약의 파기

그러나 이후 벌어진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경제의 파탄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혼란의 와중에 내부로부터의 중상을 신봉하게 된 독일 국민의 불만을 등에 업고 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가 부상하게 되었으며, 보수파들의 오판에 따른 적절한 연정(+ 나치당의 힘을 총동원한 각지에서의 강경한 시위와 선거 유세)을 통해 기어이 집권에 성공했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베르샤유 조약은 무효이며 독일은 보상금을 낼 필요가 없으며 재무장을 하겠다는 주장으로 독일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 그리고 1935년 독일 재군비 선언과 함께 공식으로 파기하고 영국이 이를 공인함으로서 완전히 사문화되었다. 영국의 외교적 삽질로 기록되는 영국-독일 해군조약[14]과 폴란드를 주적으로 가정한 육군 기동훈련에도 영국 대사와 무관들이 참관하면서 동맹국인 프랑스를 경악시키면서 협조 노선에 틀어졌다. 몇 달 전에 프랑스가 일방적으로 영국과 상의 없이 징병제 군 복무기간을 늘렸고, 그 핑계로 독일이 징병제를 재개한 탓도 있다.

한편, 히틀러의 의견에 영국과 프랑스는 베르샤유 조약이 독일을 크게 자극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배상금을 깎아주는 "당근" 유화책으로 다스리려 했지만[15][16] 이미 늦었다. 독일은 폭주를 시작하고 있었고 이 때는 이런 유화책을 실시할 시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관대해야 할 때는 가혹하고, 강경해야 할 때는 물러 터진, 장장 20년에 걸친 외교실패로 마침내 1939년에 다시 전쟁이 발발한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다.[17]

프랑스가 점령되면서 베르사유 조약의 원본은 독일군이 접수했다. 그후 행방은 묘연... 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프랑스에게 항복문서를 작성했던 열차도 이때 독일로 끌려가서 전쟁 말미에 박살나버렸다. 나치가 박물관에 승전기념으로 전시되어 있던 그 열차를 그대로 항복조약을 서명한 그 장소로 끌고 가 똑같이 프랑스의 항복 조약을 받아냈다는건 유명한 이야기고.

결국 어떻게 보면 2차 대전 발발을 위한 조건은 1차대전의 종결과 함께 형성되기 시작되었던 것이다.

7 남은 잔재들

하지만 독일은 2차대전에서 또 다시 패배했다. 승리를 한 연합국은 향후 세계질서를 감안해서 베르사유 조약처럼 아주 가혹한 규정은 두지 않으나 독일을 재기불능에 빠트릴 종전조약을 맺기로 하고, 이 조약에 베르사유 조약에서 규정된 사항 중 일부를 약간 적용했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된 관계로 금전문제를 뺀 나머지 조항에 대해서는 서로 서독과 동독을 대규모 침공에 대한 방패막이 겸 우군으로 육성하기 위해 사실상 폐기하였으며, 단지 배상금 항목만 상징적으로 남게 된다.

문제가 된 배상금의 경우, 2010년 10월 3일 독일 정부는 1차 대전의 전쟁 배상금을 모두 상환 완료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상환수단은 유로였다고...참조기사 92년 만이었다.

사실 배상이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는 50년대에 "일부는 통일 이후에 부담한다"라고 수정했기 때문이라고.[18]

여담으로, 암모니아 제법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프리츠 하버는 국가의 부채를 해소하기 위해 바다에서 을 뽑는 아이디어를 실행해봤으나 1928년까지 뻘짓만 하다가 채산성이 전혀 안 나와서 돈만 날리고 그만두었다는 안습한 일화가 있다.

8 환율

이 문서는 환율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는데, 당시 일반적으로 순금 1kg은 2790 골트마르크 = 136.588 파운드 스털링 = 664.7 미국 달러 [19]로 1달러는 4.197 마르크, 1파운드는 20.426 마르크이자 4.867 달러가 된다. # 인용

9 관련 문서

  1.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베르사유 조약 협상 과정에 참여했었고, 이후 현대 외교 이론의 고전이 된 '외교론'을 저술하였다.
  2. 독일에서도 불복종 하려 했지만 힌덴부르크와 그뢰너 장군이 에베르트 대통령에게 '동부 국경은 방어하고 폴란드는 쫓아낼 수 있지만 서부전선에서 압도적인 열세' 라고하며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
  3. 카이저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했는데 네덜란드에서 인도를 거부했다. 나머지 인사들도 흐지부지... 독일인들이 가장 열받은 조항 중의 하나다. 2차 대전처럼 빼도박도 못하게 자기네들만 시작한 전쟁도 아닌데도.. 진 놈이 죄라는 투였으니..
  4. 단치히 주민 80%는 독일계라 차마 폴란드에 넘기지 못하고 국제연맹 자유도시라는 명목으로 폴란드와 독일에서 고등 판무관을 파견하는걸로 했지만 그래도 철도와 우편은 폴란드 쪽에 맡겼고 또 원래 폴란드 분할 전엔 폴란드 영토였어서 사실상 폴란드 식민지 취급이 되었다.
  5. 독일 경제의 핵심 공업지대인 라인강 동쪽 지류 루르지방이 포함된다.
  6. 전시에 각국의 화폐가치가 평가 절하되었다. 패전국 독일의 화폐가치 저하는 안봐도 비디오였고 (승전국은 1914년기준 30~50% 절하 패전국은 70%까지 가치가 떨어졌다.) 애초에 1919년 당시 금 기준으로 못박아놨다.
  7. 현물 배상도 가능해서 주로 석탄으로 배상했다. 철도용 침목, 전신주, 가축으로도 배상.
  8. 참모본부는 한스 폰 젝트 장군이 다른 행정부서로 쪼개서 위장전입 시키는 방법으로 존속했다.
  9. 실제로도 어차피 독일의 배상금은 미국의 투자로 가능했다. 1929년 경제위기로 미국발 단기 자금이 빠져나가자 바이마르 공화국이 나가리되고 나치가 득세한다. 한마디로 작두탄 듯.
  10. 제2차 세계 대전은 그로부터 정확히 20년 하고 64일 뒤에 발발했다.
  11. 투르크 제국에서 터키인은 45% 아랍인이 35% 아르메니아계 기독교인이 17% 나머지 유대인등 기타로 인구구성이 다양했기 때문에 분할 한것이다.
  12. 이 금액은 1921년 초의 전쟁배상(10억 마르크 + 수출액의 1/4인 3억 마르크 = 13억 마르크)으로 빚어진 인플레이션에 의해 달러 - 마르크화 환율이 급등하던 시절의 것이다. 환율은 전쟁 전 1달러당 4마르크 대, 전쟁 중 9마르크이던게 전후 47마르크를 거쳐 1921년 연말에는 1달러당 330 마르크로 올라버렸고, 기어이 1922년 말에는 초인플레이션으로 달러당 8천 마르크가 되었다. 그래서 골트마르크로 환산하면 2690억 마르크가 되고, 대략 10만톤의 순금과 맞먹게 된다.
  13. 총액으론 도스 안 보다 13% 탕감되고 59년 할부로 바뀌었다. 하지만 독일에선 "59년동안 빚갚으면서 노예질 하라고?"라는 반응으로 안 그래도 인기없던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나노단위로 까였다. 히틀러도 이걸 두고두고 이용해먹었다.
  14. 1935년 영국과 독일의 해군 비율을 100:35 로 승인한걸 외교적 승리로 정신 승리 했지만 개전 전까지 35는 커녕 20도 못 채웠다. 히틀러의 뻥에 놀아난 것.
  15. 미국 상원에서 통과되진 않았지만 로잔 회의에서는 200억 마르크(48억 달러)까지 깎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여기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를 선언한다.
  16. 특히 영국 미국에선 경제파탄으로 독일이 공산화될 것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공산화는 면하긴 했는데...
  17. 프랑스는 자신들의 한 행동에 독일의 보복이 두려워 희대의 사기적인 방어선을 구축하지만, 결과는 망했어요...
  18. 정확히 말하면 이미 낼건 다 채권으로 냈고, 일부 채권의 만료 시점을 통일 이후로 잡은 거다.
  19. 정확히는 1파운드는 순금 113 그레인 (1그레인은 0.06479g이다), 1달러는 순도 90% 금으로 25.8 그레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