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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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검술은 말 그대로 서양검술을 통칭하는 말이다. 편의상 '서양 검술'이라고 호칭하고 있지만 이는 편의적인 명칭일 뿐 구체적인 의미를 띠고 있지는 않다.

1 서양 검술의 정의

말 그대로 서양의 검술은 전부 서양 검술이다. 이는 고대 로마글라디우스부터 스포츠 펜싱까지 적용되므로 상당히 광범위한 부분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대체적으로 고대~모던 펜싱까지의 범위를 지칭한다. 특히 국내에서는 『서양 검술』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ARMA나 AEMMA 등의 중세-르네상스 검술 단체의 스크립트와 동영상이 들어왔기 때문에, 서양 검술이라고 하면 중세-르네상스 검술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고대에서부터 근현대 펜싱까지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것이 맞으며, 혼란을 피할 수 있다고 하겠다. 보다 세세한 부분은 중세-르네상스 같이 시대를 지칭하거나, 스몰소드, 레이피어 같은 무기의 이름, 혹은 볼로네스, 데스트레싸, 카포페로 등과 같이 유파명, 검술 이름, 마스터 이름 등을 지칭한다.

같은 이유로 미주유럽의 서양검술 단체들은 광범위한 범위에 속하는 WMA(Western Martial Arts)같은 호칭보다는 HEMA(Historical Europian Martial Arts)를 사용하고, 더욱 세분화시켜 RMA(Renaissance Martial Arts)나 그냥 『Historical Europian Swordmanship』이라고 하기도 한다. 각자의 개성을 나타내는 클럽명도 많다. 가령 ARMA 같은 경우는 『the Association for Renaissance Martial Arts』의 약자이다.

계보가 꾸준히 이어지는 일본의 고류 무술과는 달리 서양 검술들은 모두 그 계보가 한참 동안 단절되어 있던 것들이다. 즉 현대의 서양 검술 단체들은 모두 복원이다. 그러나 연구와 복원이 이제 막 태동기에 지나지 않고, 소스도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무술적 복원이 매우 어려운 국내와는 달리, 서양에서는 여러 마스터들이 써낸 검술서와 스크립트가 굉장히 많고,[1]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앨프리드 허턴, 에거턴 캐슬, 리처드 버튼과 같은 군인, 검객들에 의해 중세-르네상스 검술의 연구와 복원이 활발히 이루어져왔고, 학자들과 리인액터, 연구회 등의 상호간 교류를 통한 검증도 활발하다.

1990년대부터 활기를 띠고, 2000년대 들어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서양 검술 연구회나 단체들의 대대적인 참여로 이 속도는 점점 가속화되고 있으며 연구성과나 새롭게 발견된 고문서들, 조명받은 중세-르네상스 마스터들의 저작, 그리고 그에 기반한 출판물들의 갱신은 2000년대 초반과 지금의 연구 수준이 하늘과 땅 차이가 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기다 서양 검술계는 모든 소스를 오픈하고 있어서, 자신이나 단체의 연구성과를 포럼 등지에 올려 공개하거나, 책을 써서 공표하고, 그에 대한 비판과 찬동, 토론과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누가 어떤 마스터의 고문서 매뉴얼의 자세나 움직임에 대한 해석을 올리면, 그 즉시 떼로 몰려들어서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고, 직접 몸으로 해 보아서 증명을 하는 식이다.

누구라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고 소스나 연구성과가 오픈되어 있는 것이 기본적인 풍조라 누구라도 평균적인 수준의 커리큘럼을 만들거나 접할 수 있다는 점이 서양 검술의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어지간한 동네라면 서양 검술 단체가 하나씩쯤은 있고, 종목도 현존하는 검술서 중 가장 오래된 I.33문서에서부터 허턴의 세이버 검술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초월하고 다양하다. 물론 많은 만큼 사기꾼도 있으니[2][3] 옥석을 가릴 수 있는 안목을 기르기 위해서는 해외의 포럼, 가령 Myarmoury.com이나, SFI(소드포럼 인터내셔널) 등의 포럼들에서 다양한 시각을 섭렵해볼 필요가 있다.

2 고대~중세의 서양검술

그딴 거 없다.

물론 검술 자체가 없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De Re Militari》와 같은 병법서에서는 로마 제국 군인들의 검술 훈련법과 싸움법에 대해 간략하게 해설하고 있으며, 다키아 원정시 펄스와 롬파이아 같은 도검의 위력과 사용법 등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나와 있으므로 검술 자체는 분명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엄밀히 말해 검술 자체의 형태를 알 수 있는, 무술적 복원이 가능한 스크립트가 없다는 소리다.

이는 13세기까지의 서양 검술도 마찬가지이고, 7세기 이슬람 검법도 마찬가지이다. 서사시일리아드》의 영웅들도 분명히 자신들의 무술로 싸우는 묘사가 있지만 그 형태만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뿐이지 무술적 복원이 가능한 것은 없다. 이 점은 바이킹 무술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이 사용한 무기의 형태와 바이킹 영웅담인 《사가》(Saga)에 나오는 싸움 장면에서의 묘사를 통해 그 무술의 양상이나 형태만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을 뿐이지 그들의 무술을 명확하게 알려주며 무술로써 복원이 가능한 그들의 스크립트는 없는 것이다.

현대의 서양 검술 단체들에 의해 이러한 시대의 검술·창술 등에 대한 리컨스트럭트(재구축)는 활발하게 이루어지도 있으며, 특히 바이킹 검술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리컨스트럭트는 다른 무술서에서 비슷한 점을 떼어와 적용해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버클러아밍 소드 검술서인 I.33문서의 방패술을 적용해보거나, 르네상스 시대의 쉴드&레이피어 스크립트의 방패술을 적용해보는 식이다. 이것은 비슷하게 따와서 한번 해보는 것이며 결코 바이킹들이 남긴 방패술도 아니고 바이킹 시대에 그렇게 싸웠을 것이란 확신도 불가능하므로 해보는 사람이나 단체들은 물론 보는 사람들도 그것을 『바이킹 방패술 그 자체』 혹은 『의미있는 복원』이라고는 절대로 보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흥미성 가설로만 볼 뿐이다.

마찬가지로 바이킹 사가에 등장하는 검술의 묘사를 토대로 한 재현도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검술적인 합리성을 분명히 띠는 것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검술서가 아닌 《사가》, 즉 소설의 묘사이기 때문이다. 무리한 해석이나 억지가 그나마 통하는 국내와는 달리 의외로 철저하게 근거 따지고 입증 요구하며 기준에 엄격한 것이 서양 검술계이다.

현재 인정받는 가장 오래된 검술서는 독일어로 되어 있으며 현재 런던탑에 원본이 있는 I.33문서로써, 지름 30cm정도의 작은 방패인 버클러와 한손으로 사용하는 아밍 소드를 사용하는 문서이다. 현대의 거의 모든 소드&버클러 검술의 가장 중요한 소스다. 연대는 1280년.

3 중세 후기의 서양 검술

중세 시대의 서양 검술 매뉴얼들은 대부분 15세기 것이 많다. 또 롱소드 검술서의 비중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중세 후기의 서양검술의 형성은 갑옷의 발전과 그에 따른 방패의 소멸에 기인한다. 11세기부터 꾸준하게 진행된 갑옷의 플레이트화는 14세기 후반에 정점을 이루어 기사들은 방패를 쓰지 않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양손으로 사용하는 롱소드의 활용 비중이 매우 높아졌고, 빌, 할버드와 같은 폴암 무기들의 비율도 매우 높아져 15세기에는 백병전 기술이 매우 중요하게 발달한 황금기였다. 13세기에 처음 등장하여 양손으로 강하게 내리쳐 사슬갑옷을 절단하던 워소드는 플레이트 아머가 발전하면서 그 틈새를 찌르기 위해 형태가 변화하였고 오크셧 분류 15a같은 끝부분이 사실상 송곳이나 다름없는 롱소드 유형이 등장하였다.

15세기의 롱소드들은 이러한 추세에 발맞추어 손잡이가 약 24cm정도로 길어지고, 칼날은 보다 균형잡힌 밸런스를 가지게 되었으며 퍼멀은 잡고 쓰기 좋은 형상이 되었다. 이처럼 롱소드가 많이 쓰이면서 군용의 갑주 전투는 물론 민간의 호신, 재판결투용로도 각광받으며 롱소드 전성시대를 열게 된다.

이때의 검술은 평복 검술(blossfechten), 갑주 검술(harnischfechten), 마상검술(Rossfechten)로 구분되었으며, 당시의 검술은 단지 검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검술을 바탕으로 모든 무기를 다 다룰 수 있다고 강조하며 단검과 레슬링을 포함한 종합무술 체계였다. 가장 큰 맥은 독일계 검술, 그중에서도 14세기의 마스터 요하네스 리히테나워(Johannes Liechtenauer)가 독일과 동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무술을 배워 정립한 이른바 전투의 예술(Kunst des Fechten)이었다. 요하네스 리히테나워는 책을 남기지 않았으나 일종의 검결(Zedel)을 남겼으며 리히테나워 검술의 맥을 잇던 되브링엔의 사제 한스, 통칭 한코 되브링어(Hanko Dobringer)가 핵심검리를 해설한 책을 남기고, 검결의 해석을 피터 폰 단치히(Peter von Danzig)가 책으로 남겼다. 이들 이후로 지그문드 링겍, 한스 탈호퍼를 비롯한 리히테나워류 마스터들이 책을 내기 시작한다.

또 하나의 맥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활동한 피오레 디 리베리(fiore dei liberi)가 슈바벤 사람 요한을 비롯한 수많은 스승을 모시며 배워 창시한 것이다. 그가 내놓은 책 전투의 꽃(Flos Duellatorum)은 당시 독일계와는 다른 풍격과 풍부한 기술 수록은 물론, 평복검술과 갑주검술을 두루 다루고 있으며 역시 롱소드를 핵심으로 다루고 있다.

중세 후기의 검술 수요는 주로 재판 결투에 의존했다. 재판 결투는 결투로 갈등을 해결하던 게르만족 관습법이 천주교 신앙관과 결합한 것으로, 평시에는 라틴 법전에 의거한 재판을 했으나 개인 간의 평등한 계약관계를 기반으로 한 유럽 사회의 특성상 좀 강한 조정 명령 정도의 권한만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재판에 불복할 경우 재판 결투를 요청할 수 있었다. 이는 하느님께서 불의한 자에게 죽음이라는 심판을 내리신다는 신명재판적인 성격을 가지기도 했다. 이 재판 결투는 평민부터 국왕까지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계층이 재판 결투에 노출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피오레 디 리베리, 한스 탈호퍼 같은 성공한 마스터들은 이러한 재판 결투를 앞둔 평민이나 기사들에게 재판 결투에 특화된 무술을 가르치고 교습비를 받음으로써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많은 중세 후기의 서양 검술서들이 호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결투용 대형 방패, 몽둥이 같은 내용을 수록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재판 결투의 노하우를 갖춘 전문가임을 홍보하기 위한 것. 또한 15세기 검술서에 수록된 갑주 검술도 실제로는 기사 계급의 재판 결투에 특화된 내용들이었다. 갑주 상대로 아무런 쓸모가 없는 단창을 가진 중갑기사의 삽화, 혹은 검과 창을 다 쥐고 싸우는 것은 당시 갑주 재판결투의 규칙이 기사는 반드시 전신갑주를 입고 단창과 검, 폴액스 같은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특화된 기술을 수록한 것이다.

평복검술도 재판 결투에 크게 의존했다. 평민들은 결투용 대형 방패, 몽둥이를 들거나 혹은 남녀간의 결투일 경우 남자는 구덩이에 들어가고 몽둥이를 들며, 여자는 밖에서 천에 돌을 집어넣고 휘둘러서 싸우는 규칙을 가진 곳도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롱소드, 소드&버클러, 메서를 이용해 결투를 벌이기도 했다. 아무리 중세 시대라도 어느 정도의 규칙이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평민들이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이는 경우는 바로 재판 결투에 한정되었고 그래서 재판 결투가 벌어지면 1달 정도의 유예기간을 주기 때문에 이때 마스터를 초빙하여 속성으로 급하게 검술을 배우기도 했다. 독일의 재판 결투 전문 마스터인 한스 탈호퍼는 이렇게 재판 결투를 앞둔 사람이 어떻게 훈련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이드를 제시하기도 했다. 여자나 국왕같은 자들은 스스로 재판 결투에 나서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을 위한 결투 대리인들이 돈을 받고 고용되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을 챔피언(Champion)이라고 불렀다. 기반을 가지지 못한 검객들이 챔피언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당시 독일과 동유럽 지역은 도시와 그 인근을 제외하면 치안이 상당히 불안했기 때문에 호신을 위해서 검술을 배우기도 했다. 이런 검술은 주로 롱소드, 메서, 소드&버클러 검술이었다. 셋 다 휴대가 간편하고 특히 메서는 독일인이라면 상당히 대중적으로 소유한 작업용 대형 도검이었다. 이 세가지는 모두 리히테나워 전투의 예술에 포함된 종목이었으나 메서는 출처 불명의 타 검술이 유입된 것이며 그 증거로 자세나 공격을 지칭하는 명칭이 다르다. 소드&버클러는 1280년 출판된 수도자 루테게루스의 I.33문서의 검리를 그대로 이어오고 있으나 용어는 리히테나워류의 것으로 대체되어 있다. 하지만 검을 사용하는 원리는 똑같았기 때문에 같은 유파 내에서 충돌 없이 이어져 온 것.

런들 대거를 사용하는 단검술도 중요하게 수록되어 있다. 거리를 두고 짧게 긋고 찌르는 현대 단검술과는 달리 단검을 단단히 쥐고 내려찍거나 찍어올리는 형태의 크고 과감한 동작을 기본으로 하며, 이렇게 찔러오는 단검을 든 팔을 막아내면서 관절기를 시도하고 단검을 빼앗아 제압하는 것을 핵심 원리로 소개하고 있다. 매우 근접하고 팔을 봉쇄하면서 들어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레슬링으로 이어지는 것이 특징. 그러나 누워서 하는 기술은 거의 없었다. 도시 내부에서는 장검류를 소지하지 못하게 하는 곳이 있었으나 단검류는 허용되었기 때문에 단검술이 매우 중요했다.

격투기도 수록하고 있으며 단검술에서 단검을 뺀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주먹을 망치처럼 크게 휘둘러서 내려치고, 이것을 흘려내거나 잡아채면서 레슬링으로 이어나가는 것이 특징. 현대 격투기와 같이 몸의 중심 급소부위를 타격하는 개념 자체가 없으며 스트레이트도 존재하지 않는다. 주로 관절기로 이행하거나 고환을 터트리고, 눈을 찌르거나 물어뜯는 사악한 기술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살인 격투기와 더불어 룰 하에서 안전하게 진행되는 민속 레슬링에 관한 매뉴얼도 남아 있는데 현대의 레슬링이나 스탠딩 유술기와 비슷한 점이 많다.

3.1 영상 예제


롱소드 검술의 반격기를 다룬다.


독일검술 마스터인 지그문트 링에크(Sigmund Ringeck)와 페터 폰 단치히(Peter von Danzig)의 검술서에 의거한 재현. 하나의 싸움을 묘사하는 시나리오 같은 검결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한문장씩 추가해 나감으로써 공격을 어떻게 반격하고 싸워서 승리하는가를 보여준다.


갑주검술의 예제.

역시 독일검술 마스터인 요하네스 레퀴히너(Johannes Lecküchner)의 매뉴얼과, 검술가 겸 비리공무원[4]인 파울루스 헥토르 메어(Paulus Hector Mair)의 소장 문서중 하나인 《코덱스 발렌슈타인》의 기술을 근거로 재현한 메서 검술.


ARMA의 소드&버클러 시합.

4 르네상스 시대의 서양 검술

16세기는 서양의 전쟁과 문화가 급격한 변화를 겪은 시기였으며, 검술도 이에 따라 크게 변화되었다.

15세기의 전쟁 양상은 기사와 맨앳암즈의 격돌, 그리고 폴액스, 할버드와 같은 폴암과 롱소드, 워해머메이스같은 백병전 무기의 황금기로 대표할 수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스위스 용병대의 파이크 전법에 의해 기사의 위력의 근본인 랜스차징이 상당부분 저지될 수 있다는 것이 여러 전투에 의해 입증되었고, 16세기에 들어 스페인의 명장 곤살로 데 코르도바에 의해 테르시오 진법이 완성되면서 15세기식의 백병전 경향은 크게 사라지게 된다.

테르시오 전법 하에서는 과거와 같은 도검 백병전이 일어나기 힘들었는데 보병이 견고한 방진을 형성하고 창으로 서로 찔러대는 것이 주된 백병전 양상이었으며, 이 빽빽히 들어선 창 앞에서 과거처럼 롱소드를 마음껏 휘두르기는 불가능했다. 파이크 방진 내부에서도 할버드, 츠바이핸더를 비롯한 폴 암을 소지한 병사들이 지휘관이나 군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이들이 전투에 참여하는 경우는 사실상 패배하여 진형이 와해되기 전까지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중반까지는 야전축성된 진지에 대한 돌격이라든가, 파이크 방진이 서로 교전에 들어갈 때 방패와 검을 든 로델레로쯔바이핸더를 든 도펠졸트너들이 측면을 치며 지원을 하는 등 격렬한 백병전이 간간히 일어났지만, 16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숫제 파이크 방진끼리 직접 창으로 교전하기보다는 서로 총질을 해대는 양상으로 변하면서 백병전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 보편화되었다.

민간검술계에서도 악재가 이어졌다. 15세기 말에 재판 결투는 라틴 법의 영향으로 폐지되었으며, 이에 따라 재판 결투 수요를 이용해 살아가던 마스터들이 생계를 잃어버리게 된다. 또 가속화되는 도시의 인구 밀도에 의해 길이 너무 좁아 롱소드를 휘두르기 힘든 거리 구조가 되어버렸다.

이에 따라 중세 후기 검술의 핵심이었던 롱소드 검술과 갑주 전투술은 실용성을 완벽하게 잃어버렸고 쇠퇴하게 된다. 이탈리아의 피오레 디 리베리의 검술 전통은 제자인 필리포 바디까지만 이어지고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한편 독일계에서는 리히테나워 전투의 예술을 보존하기는 하였으나, 15세기까지의 커리큘럼에서 변화를 겪어 용어나 분류체계가 변화했고 개별 마스터들이 전수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길드를 형성하여 승급과 검증체계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여러 길드 중 가장 유명한 곳이 막스브루더와 페더피히터였다. 검술은 시대에 맞춰 안전과 타협하거나 스포츠화되는 변화를 겪었다.

롱소드는 훈련 도구인 피더슈비어트로 연습하며 안전을 위해 찌르기를 완전히 금지했으며 때때로 상대를 배려하여 칼날 옆면으로 치는 경우가 생겼다. 전쟁터는 물론 호신용으로도 쓰이기 힘들었고 사이드 소드나 레이피어에 밀려서 도장 검술화가 촉진되다가 17세기 초반에 소멸한다. 메서검술은 편리한 휴대성으로 여전히 전쟁에서 휴대무기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훈련은 나무와 가죽으로 만든 두삭(Dussack)을 이용한 안전한 스포츠 형태로 변형되었으며 16세기 문서에는 진검 메서는 안나오고 죄다 이 두삭만 나온다. 안전하고 크게 다치지 않으면서도 전력으로 승부를 가릴 수 있다는 점 때문에 18세기 초반까지 중부 유럽에서 인기 높은 스포츠로써 명맥을 유지했다. 16세기에는 주스팅 대결을 비롯한 토너먼트 잔치가 이벤트로써 자주 벌어졌는데 이때 롱소드나 두삭을 이용한 대결도 함께 벌어졌다. 검술 연습시에는 보호구를 착용하지 않고 힘을 조절하여 치는 것이 기본이었으나 이 토너먼트에서는 전용 마스크와 방어구를 착용하고 승부를 겨루었으며 손 타격 금지, 찌르기 금지, 칼날 이외의 타격 금지, 칼날을 세워서 때리지 말고 눕혀서 옆면으로만 때릴 것을 규정하여 실전적인 검술과는 지나치게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16세기의 리히테나워류 마스터들은 토너먼트를 검술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18세기 초까지 독일계 검술학교를 묘사한 판화에서는 대다수가 스몰소드를 훈련하는 가운데 두삭을 휘두르는 학생들도 많지만 롱소드를 든 학생들은 한두명 정도면 묘사된다. 하지만 이들도 검을 눕혀서 쥐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며 옆면으로만 때리는 스포츠 방식으로만 활용했음을 의미한다. 왜곡된 형태로 18세기 초까지는 이어졌으나 그 이후로는 어떠한 매체에서도 묘사되지 않는다.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검술을 대체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이탈리아 볼로냐 시의 수학자 바르톨로메오 다르디가 창시한 다르디 학파였다. 볼로냐 검술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16세기에 들어 기존의 아밍 소드의 손방어를 강화한 사이드 소드(Spada di lato)와 버클러를 사용하는 것을 핵심으로 사이드소드&대거, 사이드소드&단독, 파르티잔을 비롯한 폴암류, 단검술, 투핸드 소드, 레슬링을 모두 다루는 종합 무술이었다.

사이드 소드는 건틀렛과 같은 방어구 없이도 손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었고 휴대가 간편하였기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에 전쟁/호신/결투용 무기의 자리를 꿰차게 된다. 또 버클러는 많은 장점이 있음에도 크기가 작아 휴대성이 매우 뛰어나서 민간 호신용은 물론 전쟁터에서도 장교나 사령관이 휴대하기도 했다. 그래서 다르디 학파의 검술은 16세기 내내 전 유럽에서 큰 인기를 구가하는 검술이 되며, 독일계 리히테나워류 마스터들 조차도 이 사이드소드 검술을 가르칠 정도였다.

16세기 중반 이후부터 레이피어가 태동하기 시작한다. 사이드소드는 베기와 찌르기를 모두 할 수 있는 도검으로 초기에는 손방어가 완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거리를 두고 손만 노리며, 몸의 오른쪽만 앞에 두고 싸우는 경향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점점 손을 보호하는 가드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또 거리를 두고 싸울 거면 칼을 길게 만들어서 먼저 찌르는 것이 낫다는 인식이 확대되면서 이미 16세기 중반에는 칼날 길이만 95cm에 달하는 사이드소드가 일반화되었다. 이런 긴 사이드소드는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칼 끝부분이 매우 얇고 폭이 좁을 수밖에 없어서 이미 베기 능력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될 형편이었다. 이렇게 길어지고 찌르기만 하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레이피어였으며 사이드소드와 레이피어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찌르기에 특화되면서 칼날 길이만 1m를 넘는 수준까지 길어지게 된다.[5] 레이피어는 근본적으로 르네상스 검술 체계로 운용하지만 그 형태에서 차이가 있었는데, 사이드소드 하나만 쓰는 검술은 베는 검술이고 칼날에 다칠 수 있으므로 왼손을 뒷짐을 져서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레이피어 검술은 베기성능이 매우 떨어지는 특성상 왼손을 앞에 내밀고 적극적으로 칼을 치우는 기법이 기본이 되었다. 레이피어 검술은 '살인자 검객' 카포페로, 니콜라도 기간티, 카밀로 아그리파 같은 마스터들이 유명하며 특히 카포 페로는 실전에서 수십명의 적들을 죽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의 레이피어 마스터 살바토르 파브리스(Salvator Fabris)의 매뉴얼에 의거한 레이피어 검술 재현.

5 17세기 변화의 시대

16세기까지는 민간용 도검으로 사이드소드와 레이피어가 혼합되어 사용되었으나 17세기 들어서는 레이피어가 대세가 되고, 극단적으로 길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압도적으로 긴 것은 전체길이 1.5m정도의 길이를 가지기도 했다. 이에 따라 영국에서는 지나치게 긴 레이피어를 금지하는 규정이 발표되기도 하였으며 법을 피하기 위해 칼날이 신축식으로 수납되는 길이 조절형 레이피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때 큰 인기를 얻어온 기존의 이탈리아식 레이피어 검술과 대비되는 스페인의 예로니모 산체스 데 카란자(Jerónimo Sánchez de Carranza)가 창시한 데스트레사(La Verdadera Destreza:진정한 예술)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식은 공격적인 경향을 유지하고, 자세를 크게 낮춰서 가슴과 배를 가리며, 검을 붙인 채로 크게 전진하여 상대의 찌르기를 피하거나 밀어내면서 찔러버리는 원패턴 공격을 가장 중시했다. 다르디 학파에서 유래하였으나 베기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찌르기를 중심으로 하는 4가지 자세만을 정해놓았다. 이런 체계가 매우 실전적이라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전 유럽에서 굉장한 유행을 탔고 도장이 성행했다. 단 이탈리아식의 지나친 흥행에 대한 안티테제 또한 발생했는데 영국의 검술가 조지 실버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조지 실버는 외국인에 대한 근본적인 혐오감을 드러내며 레이피어라는 무기 자체가 저지력이 부족하여 상대를 한번에 제압할 수 없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매우 증오했고, 그 반발로 전통적인 사이드소드&버클러 검술과 장봉술을 내세웠다.

스페인의 데스트레사는 단순히 검술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상류층의 학문이었던 수학, 기하학을 이용하여 검술은 과학이라는 명제를 증명하려고 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기술적으로는 이탈리아식 검술의 안티테제에 해당되며, 이탈리아식의 낮고 강한 공격이 들어오면 측면으로 움직이며 피함과 동시에 상대를 이탈리아식의 무릎을 크게 굽히는 과도한 전진이 아닌, 인체의 균형비율을 유지하는 차원의 자연스러운 걸음과 함께 찔러서 승리한다는 기본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또 이것을 유클리드 기하학이나 수학으로 증명하려고 했으며 복잡한 수학 공식을 내세우는 것이 특징이었다. 검리를 증명하고 혼자서도 수련할 수 있게 보법과 검의 사거리를 A-Z까지의 지점을 설정하고 나열한 원형의 마법진 비슷한 도표를 고안하기도 했다. 당대에도 실전적인 검술로 평가받았으나 지나치게 검술 외적인 부분, 수학이나 기하학을 끌어다 붙이는 것이 비아냥거리가 되기도 했다. 당시 풍자화 중에는 시선과 검, 거미줄은 물론 방귀조차도 기하학적인 선과 각으로 뀐다는 식으로 조롱한 것이 남아있기도 하다.

한편 사이드소드는 전쟁터에서 계속해서 사용되었으나 기존의 도검이 날폭이 좁은 편이었던 것과는 달리, 칼날이 점점 넓어지며 점차 베기용으로써의 특징을 보이기 시작했다. 또 크로스가드를 기반으로 보호용 링을 추가해가던 기존의 디자인과 달리 16세기 후반부터 스키아보나 양식과 같은 아예 처음부터 철제 바구니 형식으로 손을 보호하는 새로운 가드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 탓에 사이드소드와는 제법 달라진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양식을 이른바 브로드소드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검리적으로는 과거의 이탈리아 다르디 학파에서 유래된 사이드소드 검술에서 달라지지 않았으나 버클러나 단검을 쓰지 않고 브로드소드만 단독으로 쓰는 경향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검을 이용해 공격하고 방어하는 것이 중심이 되었으며 근본적으로 버클러와의 연계를 핵심으로 만들어진 다르디 학파의 방식과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16세기부터 맹아가 있었던 원거리 도검전투 경향이 점점 심해지면서 다르디 학파에서는 쓰지 않던, 검을 오른쪽 위에서 비스듬하게 칼끝을 내리는 방어 위주의 자세, 행잉 가드가 대세가 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원거리 도검전투에서는 칼끝으로 베거나 찔러서 끝내고 유술기가 사용되는 상황은 잘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점점 유술기나 레슬링 기술이 사라지고 순수하게 검을 사용하는 검술로써의 정체성이 확립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한편 17세기 중반부터 레이피어를 차고 다니는 경향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중앙집권이 확립되던 당시 유럽의 정치체제 변화에 의해 치안이 조금씩 나아졌으며 극단적인 변화를 거듭해 1.5m에 달하는 레이피어가 너무 심하게 불편하였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레이피어를 아주 짧게 만들고 손잡이고 크게 간소화시킨 장식검(épée de cour)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스몰소드라고 부르는 도검의 등장이었다.

스몰소드는 근본적으로 전투를 위한 실전검이 아니며 화려한 의장으로 의복의 악세사리 역할을 하는 장식검이나, 여전히 당시에도 싸움은 쉽게 벌어졌고 강도에 의한 범죄에서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레이피어나 장검이 더 좋지만 스몰소드는 항상 차고 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검술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검술은 17세기 후반에 정형화된다. 이때의 검술이 바로 현대 펜싱의 에뻬/플뢰레 종목의 직접적인 조상에 해당된다. 이때의 마스터로는 1692년 검술서를 출판한 슐드 리앙쿠르(Sieur de Liancour)가 유명하다.

5.1 검술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

17세기는 단순히 도검의 구조가 아닌 근본적인 검리의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에 해당한다. 중세시대와 같이 레슬링을 중심으로 삼는 근접전 검리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 르네상스 시대까지도 여전히 유효했던 공격 중심의 검리조차도 크게 희미해졌다. 또한 공격적 태세에서 나오는 근접전 검리는 다르디 학파 시절만 하더라도 원거리 검리와 함께 두가지 핵심 축이었지만, 근접전 검리는 보조적인 용도로 물러나고 원거리 검리가 핵심이 되었다. 이에 따라 다채로운 측면이동 보법과 발끝을 중심축으로 삼는 보법도 사라졌으며 전진후퇴 위주의 일직선 보법, 발 뒤꿈치를 중심축으로 삼으며 90도의 발 각도를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보법이 등장했고, 또 르네상스 시대에는 기본적으로 선호하지 않음은 물론 격렬하게 반대되었던 방어(Parry)위주의 검리가 대세를 차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슐드 리앙쿠르를 비롯한 17세기 후반의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이것을 기존에는 스몰소드라는 무기에 의해 등장한 새로운 개념으로 해설하였으나, 원거리 전투와 방어 후 반격(Parry&Reposte)이라는 개념은 이미 16세기 초, 다르디 학파에서부터 존재하던 개념이었기 때문에 이른바 "근대 검리"라는 것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근대검리의 맹아는 이미 16세기 초에서부터 존재해왔으며 이는 알프레드 휴턴이나 애거든 캐슬을 비롯하여 19세기 후반의 이른바 "중세검술 복원자"들조차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사실이기도 했다. 이것은 르네상스를 암흑 중세로부터의 탈출로 보는 당대의 시각과 부합하여 무식하고 힘만 쓰는 중세검술에서 과학적 근대검술로 발전하는 르네상스기의 혁명 중 하나로 인지되었다. 그만큼 16세기 다르디 학파의 원거리 전투술과 19세기 근대 검술에서의 방식은 전투방식과 자세에 이르기까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유전적 동일성을 지니고 있으며, 서양 검술은 16세기 이탈리아 이래로 세부적인 변화와 소실을 제외하면 큰 맥은 단 한번의 단절도 없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다.

또한 근접전 검리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으며 너무 가볍고 빨라서 방어 후 반격법이 아니면 제대로 이길 수 없다고 여겨진 스몰소드조차도 스탠딩 관절기, 손잡이로 때리기, 검을 등뒤로 돌려서 짧게 찌르기[6]를 비롯한 다양한 근접전 검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는 브로드소드 검술도 마찬가지여서 간단한 팔잡기나 검을 맞댄 상태로 싸우는 기술이 비록 크게 단순화되었지만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이는 브로드소드 검술 항목의 올드 스타일(Old style)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리와 보법 자체가 원거리전에 특화된 형태로 변화한 것은 결과적으로 16세기부터 그 맹아를 보이고 17세기 내내 선호된 원거리 전투 경향이 확고한 것으로 자리잡았음을 뜻한다. 즉 과거 르네상스 시대에는 근거리와 원거리 모두 중요한 축이며 둘다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고 여겼다면 17세기에는 원거리 전투가 더욱 안전한 것이고 근접전은 단지 어쩌다 생길 수 있는 의외적인 상황이라는 것이며, 단지 그런 사고상황에 대응한 보조적 매뉴얼로써만의 가치만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거리 전투 경향은 18세기를 지나 19세기에 전쟁에서 도검전투의 비중이 현저하게 낮아지면서 아예 근접전 상황 자체를 삭제해버리면서 유일무이한 것으로 인지되며 이것은 현대 펜싱의 규칙으로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6 18세기 이후

18세기 내내 검술의 경향은 이전 시대와 같은 특출난 변화는 없었으나, 점차적으로 스몰소드의 패용률이 떨어져가고, 18세기 후반이 되면 과거 스몰소드로 이루어졌던 결투문화도 권총을 사용하는 형태로 바뀐다. 결투용 권총도 따로 판매를 했는데, 이러한 권총 결투는 사생결단을 내는 결투에 쓰였고, 분쟁이 발생하여 체면을 차리고 가오를 살리는 결투에서는 결투용으로 따로 만든 듀얼링 소드를 사용했다. 점차 도검 결투도 상대를 죽여야 끝나는 것에서 서로 피만 보면 피를 보인 쪽이 패배하게 되는 First Blood규칙으로 바뀌게 되면서, 상대를 공격하고 사살하는 데 목적이 있던 스몰소드 검술은 의미가 사라지고, 현실의 First Blood규칙에서 유리해지기 위해 검술은 몸 전체를 노리고, 쭉 뻗은 팔을 먼저 공격하는데 중점을 두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항하여 스몰소드의 조그마한 쉘가드는 커다란 컵가드로 바뀌게 된다. 바로 현대 스포츠 펜싱의 에뻬 종목의 직계 조상이다.

스포츠 펜싱의 에뻬는 전신이 타격점이고 어느쪽이 먼저 공격하면 그에 방어하고 다시 반격하는 『프라즈 드 아르므』가 없으며, 서로 같이 찔러도 인정이 되는데, 이것이 다 과거의 결투용 에뻬 검술의 규칙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이 시대에는 총검술도 당당한 검술로 인정받았으며 에뻬(결투용)/플뢰레(스몰소드 훈련도구)/사브르(세이버)/바요넷(총검)을 포함한 4대검법에 속하기도 했다. 이 시대의 총검은 꼬챙이에 가까웠고 착검시 170cm에 가까울 만큼 길었으므로 창술에 더 가까웠으나, 유럽에서 교습하던 근대 총검술은 스몰소드 검술을 변형하여 정립하였다. 그래서 검술의 일부로 취급하였다. 포병이나 라이플병은 백병전에 노출될 여지가 많았으므로 도검 형태의 총검인 소드 바요넷(Sword bayonet)을 지급하였으며, 이 경우 검술을 따로 가르치기도 했다.

세이버&브로드소드 검술은 18세기까지는 존 테일러(John Taylor)와 같은 마스터들이 다이나믹한 검술을 보전하기도 하였으나 18세기 후반부터는 눈에 띄게 단순화된다. 이러한 변화의 이유는 전쟁에서 검술의 비중이 과거에 비하면 크게 낮아졌으며 당시의 도검 전투란 대부분 기병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세이버 마상전투였고, 보병에서는 하사관은 장창인 스펀툰, 보병들은 총과 총검이 있었으므로 굳이 검을 빼서 싸워야 할 계층이란 장교들 뿐이어서 실질적으로 도검끼리의 전투는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패트리어트> 같은 할리우드 영화들에 의해 마치 당시의 전투가 총 한두 발 쏘고 총검돌격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상당한 총격전을 주고 받고 나서야 비로소 총검 돌격을 실시했고, 대부분은 포격전과 총격전 와중에 대부분 승부가 나는 경우가 많았다. 총격전을 버티지 못하고 약해지는 것을 포착하거나 무언가 교착을 타개할 한 수가 필요할 때 총검 돌격, 혹은 총격전 와중에 적 부대가 와해되어 패주하기 시작하면 그 때 엽기병(獵機兵)이나 경기병이 출동하여 추격하면서 칼로 베어 죽이는데 이러한 기병전투가 당시 도검이 전면에서 활약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무대였다.

따라서 군용 보병검술이 변화해야 할 요소가 없던 시대였다. 그러나 이 시대의 커리큘럼은 대규모의 군대를 가르쳐야 하였으므로 공방의 원칙과 자세, 스텝을 간략하면서도 요점을 잡아 알기 쉽게 가르쳤으며, 복잡한 것은 제외시켰다. 펜싱 마스터들의 감수 아래 검리를 나타낸 그림을 붙이게 해서 항상 보고 참고할 수 있도록 하던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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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안젤로의 영국해군 커틀러스술 훈련도.[7]

척탄병 같은 정예 보병이나 해군 수병들은 행어/커틀러스 같은 짧은 칼을 지급받았으나 이 검술도 세이버 검술을 그대로 가르쳤다.

7 현대의 서양 검술

7.1 복원의 시작

18세기에 검술의 풍조의 격변과 함께 한때 크게 성행했던 롱소드와 소드&버클러, 레이피어 검술은 아무도 배우려는 사람도 없고 보존해야할 이유도 느끼지 못해서 결국 모두 소멸했다. 다행히도 과거 마스터의 저작물들은 귀족들의 수장고나 박물관, 도서관 등에 남아있었지만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19세기에는 기사도 문학이라든가 과거에 대한 환상, 동경, 억측과 호사가들의 허풍이 합쳐져 이미 그 당시에도 옛 서양 검술에 대한 잘못된 시각은 많았던 것 같다. 이때 옛 서양 검술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앨프리드 허턴(Alfred Hutton)과 작가 애거턴 캐슬(Egerton Castle)이었다. 당장 허턴의 저서 《Old swordPlay》에서 자신의 연구 목적은 환상과 거짓으로 가득한 옛 검술에 대한 편견을 타파하는 것이라 적고 있으니 그가 연구를 시작한 데에는 순수한 검객으로써의 열망과 열정도 있었겠지만 옛 검술을 둘러싼 수많은 추측과 환상에 대한 불만도 한몫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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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 허턴(Alfred Hutton) 영국 용기병대 장교. 최종계급은 대위. 1839~1910.

그는 저서 swordplay》를 통해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는데,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고전검술연구는 당대의 매뉴얼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여러 매뉴얼들의 내용들을 취사선택한 이후, 당시의 검술적 경향, 즉 일직선 보법이나 더블타임 공방 등의 요소와 합체시켜 자기식으로 변형시켜 내놓은 것이기 때문에 복원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자기식 재구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독일계 매뉴얼을 참고하지 못하고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매뉴얼을 주로 소스로 삼아 자료 자체가 부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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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ecture on Fencing (7th March,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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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ercise with Two-Handed Sword
(14th April, 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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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 English Sword and Buckler Display
(28th March, 1891)

비록 잘못된 방법론과 자료의 부족으로 그의 고전검술 복원은 연구성과가 많이 싾인 현대에서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하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던 고전서양검술을 연구하고 끌어내어 대중들에게 올바른 모습을 알리려고 노력했으며, 무엇보다 현대 서양검술 연구의 시초이자 대선배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또 그가 남긴 세이버 검술 서적인 Cold steel은 19세기 후반의 근대 세이버 검술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료로써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으며 그 내용대로 검술을 배우는 사람들도 매우 많다. Cold steel 번역본

7.2 현대의 복원

허턴과 바롱 드 코숑을 비롯한 19세기 후반의 인물들이 대부분 사망하면서 중세 검술 복원 시도는 좌절되었지만, 반대로 6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동양무술에 대한 신비감이 전통 서양무술 복원의 열쇠가 되었다. 우리에게는 저런 게 없는가 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에는 학술적 차원의 연구가 매우 부족하여 사료와 연구가 없어 중세-르네상스 검술은 여전히 상상의 영역에 머물렀고, 그 대신 교범이 잘 남아있는 근대검술은 1970년대부터 복원이 시작되어 매우 일찍 완료되었다.

중세-르네상스 검술 부문에서도 학계의 지속적인 관심을 바탕으로 다양한 검술 문서들이 발견되어 1980년대에는 체계적으로 롱소드 검술을 해설했던 요아힘 메이어의 교범, 롱소드뿐만 아니라 온갖 농기구 무술까지 다량 수집했던 파울루스 헥터 마이어의 교범 등이 발굴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며, 마스터들의 계통과 계보까지 작성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허턴 시대와는 발굴된 매뉴얼의 양과 질 자체가 이미 큰 차이가 벌어져 있었으며, 이것이 그전까지 미지의 영역이었던 중세-르네상스 검술 복원의 배경이 된다.

여기에 검술 문서들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시드니 앵글로 박사(Professor Sydney Anglo)가 관련 논문들과 서적들을 출간하면서 대중적으로 중세-르네상스의 검술문화 전반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며 이것이 현대 중세-르네상스 검술 복원의 뿌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드니 앵글로 박사의 책을 본 사람들이 검술사료를 직접 찾아서 번역하여 공유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중요한 데이터베이스가 된다.

이러한 사료적 데이터베이스의 확충에 의해 중세-르네상스 검술 단체가 90년대부터 태동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부터 폭발적으로 중세검술 연구 단체가 증가했다. 연구 수준도 상당히 발전했다. 사료들의 텍스트와 이미지를 올려놓고 해석까지 제공하는 중세-르네상스 검술 사료 위키인 위키테나워도 발족하여 활동하고 있는 정도.

8 관련 항목

  • 관련 단체
  1. 14~17세기로만 한정해도 140여권에 달한다.
  2. 이쪽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휴 나이트(Hugh knight)와 토블러이다. 휴 나이트의 경우 체형은 둘째 치더라도, 프리 플레이 시스템을 부정하며, 모든 베기는 중단에서 멈춰야만 한다고 주장하여 중세-르네상스 마스터들의 가르침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중세-르네상스 마스터들의 저작을 바탕으로 세워진 서양검술계의 연구성과에서 마스터들의 저작을 부정하는 것은 가장 크게 비난받는 내용이다. 서양검술 연구의 선두로 평가받는 ARMA의 존 클레멘츠조차도, 그의 저서 르네상스 소드맨쉽에서, 카포페로를 비롯한 르네상스 마스터들의 내용과 검리를 무시하고 자기류에 가까운 해설을 했다는 점 때문에 큰 비난을 받은 바 있을 정도다. 휴 나이트는 그런 점도 있지만, 연구 동호회 형식을 띠는 서양 검술계에서 돈을 받고 교습하는 체계를 취하는 점도 있고(이 점이 그의 교육 내용과 맞물려 큰 비난거리가 된다) 서양 검술계에서 자처하는 것을 자제하는 마스터의 호칭을 스스로 자처하는 것도 비난 거리가 된다. 실력도 검증되지 않았는데 마스터를 자처하는 것이 비난을 받자, 마스터가 꼭 실전에서 승률이 높아야만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해서, '마스터'의 역사적인 개념까지 왜곡한다는 비난도 받았다. 그의 추종자들이 여러 포럼에서 휴나이트의 논리를 신봉하며 분란을 일으키곤 한다.
  3. 토블러는 여러 연구회에서 짧은 기간 수련한 것 정도로 단체를 열고 영상물을 내어 파는 것으로 비난을 받는 편이다. 즉 그 자신의 실력도 그렇지만, 남의 연구 성과를 빨리 베껴서는 자신의 것인양 선전하는 점도 비난을 받는 점이다. 거기에 그의 추종자들이 다른 단체가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어 놓으면 토블러의 가르침을 진리로 떠받들고 일단 태클부터 거는 것 때문에 ARMA를 비롯해서 많은 단체가 이러한 행태에 학을 떼어 연구성과를 비공개하려는 경향도 있고, 존 클레멘츠의 성격이 더 까칠해진 원인이기도 하다. 주로 SwordForum International에서 많이 볼 수 있다.
  4. 그는 시 재정을 횡령하여 당시로써는 초호화판인 풀컬러 검술서를 편찬했으며, 이 작업에 평생을 쏟아부었다. 결국 그는 횡령혐의로 사형당하게 되지만, 그의 저작은 서양검술계의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5. 단, 당시에는 레이피어는 사이드소드와 우리가 아는 레이피어를 전부 포괄해서 쓰인 보통명사에 가까웠다.
  6. 이는 현대 스포츠 펜싱에서도 자주 쓰이는 기술이기도 하다.
  7. 칼자루는 방어할 때의 위치, 원 안의 선들은 벨 때의 궤도이며, 둥근 원은 물리네(Moulinet)를 나타낸다. 물리네란 한손칼은 강하게 베었을 때 멈추기가 쉽지 않으므로 벤 그 방향대로 그대로 가서 원을 그리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