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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틀을 적용할 경우, 문서 최하단에Problem of evil
목차
신은 악을 없애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한 것이 아니다.그렇다면 그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능력도 있고 없애려 하기도 하는가? 그렇다면 악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능력도 없고 없애려 하지도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를 신이라 부르나?
ㅡ 에피쿠로스
As flies to wanton boys are we to th' gods. They kill us for their sport."파리들의 장난꾸러기 소년들에 대한 관계가, 우리의 신들에 대한 관계와 같다. 그들은 장난으로 우리를 죽인다."
ㅡ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 왕》 中
"...나는 더 이상 종교적인 주장들과 삶의 현실들을 조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세계의 상황을 볼 때 선하고 전능한 신이 존재하는지, 그 분이 이런 세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는지 더 이상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은 고통과 괴로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나는 선하고 친절하게 행동하기 원하는 통치자가 있고, 그가 이 세상을 책임진다는 사실을 순순히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신은 신이 사랑과 능력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머니를 위해 꽃 몇 송이를 손에 들고 집으로 걸어가던 어린 소녀가 음주 운전자의 차에 치여 즉사했고 신이 그것을 가로막지 않은 것에 대해 당신은 설명해야 한다..."
ㅡ 바트 어만(Bart D. Ehrman)[1]
1 개요
절대선인 신과 악이 공존하는 것에 대한 모순을 다룬 종교 철학, 신학 상의 문제.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으로 선한 신이 있는데 왜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악에 대한 일반론과는 다른 일종의 고유명사화가 되었다. 한편 신학에서는 이 주제를 다루는 분야를 신정론(theodicy)이라고 한다.
데이비드 흄이 정리했다고 알려진 요약은 다음과 같다.
1. 신은 전지하다.[2] |
2. 신은 지선하다.[3] |
3. 신은 전능하다.[4] |
4. 이 세상에는 악한 행위가 발생하고 존재한다.[5] |
5. 1, 2, 3, 4가 모두 성립할 수는 없기에 따라서 여기에는 모순이 발생하며, 이 중에 한 가지는 틀렸다는 결론이 나온다. |
1.신이 전지하지 않을 경우 | 신은 악을 없앨 의지와 능력이 있지만 신이 악이 있는 걸 몰라서 악이 생겼으며 신이 이를 알기만 하면 없애버릴 것이라는 것. |
2.신이 지선하지 않을 경우 | 신은 악을 없앨 능력이 있지만 신이 선하지 않거나 사악해서 악한 일이 발생해도 관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 |
3.신이 전능하지 않을 경우 | 신은 악을 없앨 의지도 있고 악의 존재도 알고 있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관여하지 못한다는 것. |
1, 2, 3이 다 맞는데 '사실 악은 없었다!!!'라는 설명도 있다. 이런 논의가 있는 건 맞지만 인기 있는 설명은 아니다. 대부분의 크리스트교에서는 악의 존재를 인정하며, 장 칼뱅을 비롯하여 일반적인 정의는 "신에 대한 불복종 내지는 거부, 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정도로 내려지는 상태이다.
무신론자들 입장에서 악의 문제는 히브리 민족의 신화가 종교화되는 과정에서 빚어진 설정오류로 본다. 세상이 시궁창이라 도덕과 율법이 필요했고, 율법에 신성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선한 절대자를 설정했는데 이 때문에 막상 선한 절대자가 만든 세상이 시궁창이라는 상호모순이 발생한 것. 게다가 이 종교적 율법과 도덕이라는 것도 지금 시대에 와서는 절대 도덕적이라고 하지 못할 조항들이 매우 많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논의의 방향에 따라 표현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특성상 신이 2명 이상인 다신교의 경우 사악한 일을 악신의 탓으로 돌리면 되기 때문에 악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6] 악의 문제란 일반적으로 인격신을 믿는 일신교(Monotheism)적인 종교에 해당하는 문제다. 따라서 유일신교인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에서도[7] 난제 중 하나로 꼽는데, 종교의 특성 상 교리내에서는 '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은 당연히 피하고 있다. 반대로 유일신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악의 문제를 들어 전능하고 선한 유일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쩌면 세상에 악한 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억지로 표현을 만들자면) "악신론"(dystheism/misotheism)이라고도 불리곤 한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책 '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는 이럴 경우에는 존재하는 유일한 신이 악한 존재' 라고 말한다면 전지전능한 존재와 이 세상의 악 사이에 어떠한 모순도 없을거라고 말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미친 종교는 현실에 없다(..)
1.1 무신론의 근거
사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위 문단에서 나온 1,2,3의 논의는 모두 무의미하다고 해버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오오 단번에 해결 오오실제로 이 악의 문제에 대해 '무신론의 암초'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이에 대해 악의 문제를 가지고 신의 부재에 대한 증거로 간주하는 것은 오류라는 식의 주장도 있다. 즉, 악의 문제는 일신교에서 주장하는 신이 가진 속성 중에 양립 불가능한 속성이 존재함을 주장할 뿐 신이 없다는 주장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 가령 한 점은 빨간 색인 동시에 파란 색일 수 없지만, 이걸 근거로 그 점이 없다는 걸 주장할 수는 없으며, 그냥 그 점은 빨간 색이거나 파란 색일 뿐이라는 것. 하지만 이것 역시 잘못된 생각이다. 실제로 그 점이 존재한다는 근거라고는 '빨간색이면서 동시에 파란 색인 점이 존재한다'는 주장 뿐이라고 한다면, 그 주장의 모순점을 밝힘으로서 간접적으로 그 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신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종교측의 주장들 뿐인 현실에서, 그 종교측의 주장 내에 존재하는 모순점들을 밝혀내는 것 역시 충분히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있고, 이는 곧 부재의 간접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치자. 누군가가 해당 사건을 창문으로 본 목격자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장에 창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는 것 만으로도 그러한 목격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간접적인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신'에 대한 절대적인 부재의 근거는 될 수 없다. 앞서의 예시를 통해 보자면, 분명 창문이 없다는 것은 '창문을 통해 본 목격자'의 부재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만, 다른 방식으로 목격한 목격자의 부재 근거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부재 근거로는 충분히 쓸만하다는 것이다.
2 지금까지 제시된 악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과 그 반박들
이에 대해 고대로부터 여러가지 답안들이 제시되어 왔으나 아직도 기존의 종교 교리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근래에 기독교계 내부에서는 대체로 자유의지 때문이라는 답변이 가장 보편적이지만 여전히 헛점이 많은 상황.
2.1 그나마 여기가 가장 좋은 세상이다.
신의론(神義論)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theos(神)와 dike(義)이며 ‘신의 의로움’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세상에 존재하는 악으로 인해 생겨나는 신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려는 주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변신론에서 연구의 주요한 촛점은 “우주에 명백히 존재하고 있는 악의 실재에도 불구하고 신의 선(善)과 섭리를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이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악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 많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숙고해 왔다. 페르시아 종교와 같은 이원론에서는 세계란 선과 악이 서로 투쟁하는 전쟁터이고, 결국에는 선이 승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신교의 경우에는 신의 전능과 사랑이 현세의 악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오리게네스는 악의 존재를 피조물이 자유를 남용한 죄의 결과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계몽주의시대의 회의주의자 베일(P. Bayle, 1647-1706)은 매력적인 변증법을 사용하여 악이 실재한다는 사실과 신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 격론을 불러일으켰다. 라이프니츠(C.W. Leibniz)는 그의 저서 ≪변신론≫(Essais de Theodicee, 1710)에서 이에 답하여 현실의 세계는 가능한 한 최고선의 세계이고, 회화(繪畵)에서 그림자가 전체의 미와 조화를 산뜻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처럼, 가시적인 악은 보다 높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정되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 그의 극단적인 낙관론을 피력하였다. 이렇게 변신론이란 단어는 라이프니츠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근대에 들어오자 자연적인 악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악이 크게 부각되면서 변신론은 신학적인 중심논제의 위치에서 밀려났다. 즉 사회악이 신의 사랑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근대신학은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신의 사랑과 섭리가 관철될 수 있음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특히 1, 2차 세계대전은 인간성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뿌리째 뽑아 버렸기 때문에 인간생활에 존재하는 악의 실재와 신의 사랑에 대한 문제가 논쟁의 촛점이 되었다. 이제 변신론은 이 문제의 중대성에 밀려 더 이상 논급되지 않는다. 다만 신에 대한 형이상학의 한 부분적 학문인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속에서 언급되고 있다. -가톨릭 대사전, <변신론> 항목 中- |
'변신론' 혹은 '신의론'이라고 번역되는 주장이다. 독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폰 라이프니츠는, 여기가 그래도 있을 수 있는 세상 중에서는 가장 좋은 세상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현대신학에선 거의 폐기된 주장이다.
- 볼테르는 자신의 풍자소설 《캉디드(Candide)》에서 라이프니츠의 이런 주장이 설득력이 없음을 보였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온갖 불행을 겪지만 자신이 그래도 가장 행복하다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다. 애초에 신에 비하면 지성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인간조차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할 수 있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신이라는 존재가 그런 세계를 상정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현실에선 한낱 인간들조차 법을 만들고 치안을 확립하며, 도덕과 윤리를 교육하여 사회를 발전시키고 있다. 인간도 할 수 있는 일을 전지전능한 신이 못한다는 것인가? 인간 사회의 변화는 지금 이 세상이 완성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이 주장은 그 자체로 신의 전지전능함에 한계를 인정하고 있는 셈.
- 당시의 계몽주의 지식인들에게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이 가장 크게 반박받은 것은 이미 1755년 포르투갈 대지진이라는 반례가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해당 항목 참고. 아닌게아니라 이 사건 이후로 유럽인들은 세계관이 완전히 뒤흔들려서 "섭리하는 선한 신" 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엉망진창이 되었고 계몽주의가 큰 호응을 얻었다.
2.2 자유의지 때문이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인간이 그 자유의지를 사용했기에 악이 발생한다는 주장이다. 기독교 내에서는 악에 대한 해명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으나 다음과 같은 논점들을 가지고 있다.
- 자유의지의 존재유무
- 자유의지가 존재하는가부터 확실치 않다. 애초에 자유의지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자유의지가 존재하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천차만별로 갈라진다. 게다가 자유의지는 전지전능이라는 속성과 양립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신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인간은 자유롭지 않은 것이고, 인간이 스스로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면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자세한 건 아래의 비판을 참고하자.
이에 대해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했다고 반박하는 주장도 있다. 물론 이렇게 하면 무신론자들은 신이 자유의지를 줬는가 아닌가를 논하기 전에 종교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으니 신이 있다고 주장할 수 없고, 과학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으니 신이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가 없으므로 이러한 논박은 밑도 끝도 없이 질질 끌게 된다.
이외에도 누군가에게 허락받은 자유의지가 진정으로 자유의지인가 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원론적으로 치우치다 못해 논점에서 어긋난 주장이다. 당연하겠지만 본래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허락, 또는 해방으로 인해 얻은 반영구적인 자유라고 해서 그게 자유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 말그대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얻은' 것이라고 해서 그 권리의 의미가 모순되진 않는다. 엄마가 고등학생 때 컴퓨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했다가, 성인이 된 후에야 컴퓨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그것을 넘겨주어서 앞으로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 컴퓨터를 맘껏 자유롭게 사용할 수가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컴퓨터 사용의 '자유'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 기회의 문제
- 어째서 자신의 피조물을 사랑하사 그들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길 바라는 전지전능한 신은 악을 행할 가능성이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는가? 본래 야훼를 비롯한 아브라함 계열 종교의 입장으로는 창조주가 인간을 만들 때 자신을 닮도록 했고, 이들을 자신의 아들 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제대로된 부모라면 자식이 나쁜 길로 가는 것보다는 좋은 길로 가도록 하는게 당연한 것이다. 막말로 자식이 사채나 도박을 하겠다고 하면 어떤 부모가 안 말리겠는가? 즉 신은 자유의지라는 미명하에 자기 자식이 악이라는 나쁜 길로 가도록 방치하는 악한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많은 현명한 부모들은 자기 자식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한다. 자기 자식의 꿈이 자신의 생각과 달라도 인정해주는것이 현명한 부모이다.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의 의사를 존중하듯이 신 또한 피조물들의 의사를 존중한다구약:??? 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예로 기독교에 있어서 천국(= 하느님의 나라)은 창조주와 함께 하는 자리고 지옥은 창조주의 결여를 말하는데, 교리에 따르면 사후 그 자가 어떤 삶을 (그것이 히틀러처럼 악하던, 테레사 수녀처럼 선하던) 살아왔던 그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기에 이대로 자신과 함께하길 원하지만 함께하길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를 존중한다. 신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자가 당도하게 되는 자리가 바로 지옥, 즉 신이 결여된 장소인 것이다. 흔히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일부 한국 개신교에서 묘사하는 불구덩이가 아니라 따라서 구약과는 달리 신약 이후의 기독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방향성이라면 이와 같이 무조건적인 자비와 선이고, 이는 종파에 따라 다르지 않다. 한 때 동성혼에 대해서 찬반논란이 과열되고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동성애자들은 천벌 받을 죄인이라고 매도할 때 당대 교황이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비록 동성애자가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내 앞에서 진실로 하느님을 구한다면 내 어찌 이들을 품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고 한 것이 이와 일맥상통한다. 예수가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 지을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임당한 이래, 무조건적인 자비와 사랑은 현 기독교의 핵심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상당 수의 자유의지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논리를 반박하거나 회피하게 된다.
다만, 이는 교리가 그렇다는 것이며 여전히 믿음의 문제일 뿐, 이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바라는 논리적인 답변은 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자기 자식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도 좋은 부모이지만,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좋은 부모이다. 그래서 위의 답변은 후자의 부모상을 더 지지하는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
- 자유의지?
- 모든 악이 자유의지로 인해서 나타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이코패스만 보더라도 순수하게 자유의지 때문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이런 답은 악을 개인의 의지 문제로 국한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만하다. 어떤 이들은 선천적인 결함을 지닌 존재가 모두 악인이 된다는 것은 아니며, 장애가 있거나 뇌해부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순수한 자유의지가 없냐고 주장한다. 단적으로 말해 왜 사이코패스와 장애인들의 자유의지가 우리와 같은 순수한 자유의지가 아니라고 멋대로 단정 짓는 것인가?이다. 그러나 이것은 얕은 생각인데, 사이코패스는 의학적 정의상 공감 능력 자체가 없는 이들이다. 이들도 자유의지는 있다. 오히려 자유의지가 있는데 공감능력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자유에 따를 때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겉으로 선량하게 행동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들 역시 악에 대한 처벌을 분명히 인지하기 때문이고, 자신의 천성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공감능력의 부재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자유의지에 따라 이들이 선택한 특성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자유는 있지만 그 자유로 택하게 되는 것은 자유롭게 택할 수 없고, 그것의 궁극적 원인이 신이라면 책임을 물 수도 있는 것이다.
- 여차 저차 하지만 무신론자들과 기독교인과의 기본적인 의식의 차이는 현실에서의 죽음과 고통이 '악'인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갈리게 된다. 무신론자들은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사후의 보상으로 현실에서의 고통이나 죽음을 상쇄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위해 현재 이런 고통을 치르는 이유에 의문을 던지며, 기독교인들은 사후의 영생과 구원을 믿고 현세의 고통이나 죽음을 신의 의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 다른 한편으로는 선과 악에 대한 판단기준이 문화적, 사회적, 시대적 배경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 것 때문에 개인의 자유의지와는 무관하게 악이 일어날 수 있다. 이 경우엔 선악에 과연 절대적 기준이 있는가 하는 점이 먼저 문제가 된다. 종교인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악의 판단기준이 아니라 신의 뜻을 선의 기준으로 삼는다고는 하는데, 문제는 신의 뜻이랍시고 나오는 종교 교리조차도 문화적, 사회적, 시대적 배경에 따라 바뀌어 왔다는 것이다. 허나, 이는 당연한 것이 신의 뜻이 변하면 안된다는 것 또한 무신론자들이 만들어낸 편견일 뿐이다. 전지전능하다는 것과 그 신탁이 불변해야한다는 것은 당연히 다른 얘기다. 성경부터가 이미 구약 당시의 교리와 예수가 모든 죄악을 짊어지고 죽은 이후의 교리는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을 말한다. 이미 예수의 죽음 이후로 '죄의 심판'은 종교계의 권한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타락한 당시의 가톨릭은 그 딴거 없었다그리고 지금은 모조리 개혁당했다.
- 자유의지가 있든 말든 악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아예 주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전지전능하다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이 서로 싸우지 않도록 안배하는것이 옳다. 식량이 부족해서 싸우지 않도록 모든이들에게 만나를 베풀고 땅이 부족하지않게 아름다운 목초지를 약속해야한다. 그러나 재화는 늘 부족하고 불공평하게 분배되며 이로인하여 싸움과 전쟁이 끊이질 않는다.
- 사실 자유의지가 없더라도 상황이 안 좋으면 악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이라면 자유의지를 주는 동시에 상황 도 더욱 좋게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앞으로 위험에 처할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막을 힘도 갖추었지만 상황을 통제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런 존재를 선하다고 하기는 문제가 있다.[8][9]
신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 어떤 자원도 부족하지 않고 풍족한 지구라고 해도 과연 다툼이 없을 것 같은가? 답은 그래도 있을 것이다. 당장 학생들이 밥 한 숟갈 더먹자고 교실에서 다투는 일이 얼마나 되는가.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싸움은 기본적인 자원이 부족해 싸우는게 아니라 풍부한 자원의 토대 위에서 싸우는 것이다. 즉 있는 사회라서 싸운다. (애초에 이 또한 무신론자들이 기회의 문제에서 내세운 주장에 따르면 과연 서로 싸우지 않도록 안배하는 자유의지가 진정한 자유의지인지 논해야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싸움과 전쟁이 끝나지 않는 건 인간의 욕심이 만든 그들의 자유의지지, 누구의 탓도 아니다. 더구나 시대가 발전하면서 그 전쟁과 다툼도 점점 잦아들고 있다. 세간에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지만, 인간은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총력전을 통한 강대국끼리의 전쟁보다는 평화가 더 최선이고 이롭다는 것을 알았고, 점점 많은 것들이 나아지고 있다.[10] 이건 신이 아닌 인간의 성과고 그 외의 비극적인 건 신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서 생겨난 책임이다? 인간이 서로 싸우는 것이 신의 책임이라면 인간이 21세기에 이르러 점점 평화의 시대로 나아가는 것 또한 신의 안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모든 전쟁이 욕심이라는 개인적 동기로 인해 발생하지는 않는다.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에 나오는 구절을 빌리자면, "결핍의 공포가 없음에도 욕심을 부리는 동물은 없다". 학생들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마찰과 자원전쟁을 동급으로 놓는 것은 문제다. 단순히 국가의 창고를 좀 더 채우기를 바라는 욕망에 엄청난 희생을 가져올 수도 있는 전쟁을 일으킬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구나 노력에 따라 균일하게 자원을 얻을 수 있다면 다른 이가 가진 영토나 재산에 눈독 들일 일은 없겠지만, 애석하게도 자원은 대개 특정 지점에 편중되어 있다. 국가 간 무역이 진행되면 이러한 차이로 격차가 생길 수 밖에 없고, 이것은 장기적으로 국가간의 다툼을 불러오게 된다. 역사상의 거의 대부분의 전쟁은 이러한 경제문제 해소나 요충지 확보를 위해서였다. 근대에 제국주의가 등장한 근본적인 원인도 단순히 유럽인들이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다른 지역의 자원이 유럽에는 없고, 이를 각국이 들여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경쟁이 발생하기 때문에, 여기서 뒤쳐지는 것을 장기적으로 큰 위협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혹은 지금은 안전해도 언젠가 자원이 부족하리라는 위기의식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국가를 경영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복잡하며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지도자들이 탐욕스럽지 않아도 전쟁만이 돌파구인 순간이 올 수 있다. 어떤 독재자나 전제군주가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전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를 돌아볼 때 그런 강력한 체제가 등장하는 배경 자체가 거의 분배 문제로 인한 혼란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다고 누구나 똑같이 악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나, 사실 인간 본성에 대해서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결국 누군가가 손에 피를 묻힐 것임은 거의 확실하다.
- 전지전능한 신과의 모순
- 특히 유일신을 기반으로 한 종교에선 신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신이 알아야 한다. 즉 신이 전지전능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이 창궐하는' 자유의지를 주었다면 신은 실제로는 전지전능하지 않든지, 아니면 전지전능하지만 해결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든지 한다는 자체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 쉽게 예를 들자면, 전지한 신이라면 뱀이 인간을 유혹하여 인간이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신은 뱀을 창조했고, 결국 인간에게 벌을 내린다. 즉, 인간이 죄를 짓도록 본인이 설계한 주제에, 정작 인간이 죄를 지으니 그에 대한 벌을 내리는 것이 된다.
- 선의의 피해자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하사하였고 어떤 미친놈이 자유의지를 십분 활용하여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자살하였다. 그리고 그 아파트에 살던 선량한 한 사람은 얼굴과 몸에 2도 화상을 입었고 겨우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 선량한 시민은 남은 평생동안 고통받으며 살아가겠지.
- 신이 전지전능하고 선하다면 어찌하여 이 선량한 시민을 구해주지 않는가? 그 선량한 시민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불타오를 아파트에 살고있었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화상을 입은 것이기 때문에 신에게 그 책임이 없다는것인가? 한낱 인간조차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하려 드는데 인간을 만든 전지전능한 신이 자신의 아들딸들이 고통받는데 그저 보고만 있다 이 소리를 하는건가?
- 악인은 심판받고 지옥불에 불타고 선인은 신의 나라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왜 지금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게다가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왜 지금 구해주지 않고 사후세계에 갈 때까지 기다리라 하는가?
2.2.1 신은 현세에 개입하지 않는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지금은 구약 시절 때마냥 죄악이 난무한다고 소돔과 고모라에 신이 손수 메테오를 후려치던 시절이 아닌 예수가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모두 짊어지고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악이 모두 면제된 신약 이후의 시대다. 구약과는 달리 인간의 죄로 인해 신과 인간 사이에 단절이 이어진 지금 같은 시대에서 더 이상 신은 구약 시대마냥 직접적으로 함께하지 않는다. 다만 영적으로 함께하며 피조물이 시련이나 위기에 빠졌다면 이를 이겨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올바른 길로 비춰줄 뿐이다. 누가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희귀병까지 얻어 고통스러워하며 어둠 속에서 주님을 간절히 구할 때 그가 그 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그 어둠 속에서 살아나올 수 있는 길을 보여줄 뿐이다.어째 경험담같냐 그것에 응하고 자신의 의지로 걸어갈지는 피조물의 선택이다. 물론 그것이 정말 길이 될 수 있느냐, 그리고 신이 자신을 믿게 하고자 시련을 주는 것이 인간의 관점에서 온당한가에 대하여는 여전히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문제에 답하고자 다음과 같은 우화를 제시하기도 한다. 지나친 폭우로 인해 홍수로 침수될지 모르는 마을에 한 청년이 있었다고 하자. 라디오에서 이를 경고하며 경찰들이 조기에 주민들을 피난시키려 하자 마을사람들이 피난하는데 청년은 피난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네, 도망치지 않고 뭐하는 건가?" 라고 물으니 청년은 기도하면서 "괜찮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지켜주실 거니까요." 라고 말했다. 이윽고 마을이 침수되기 시작하고 구조대의 구조선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도착했으나 다른 주민들과는 달리 여전히 청년은 주님이 지켜주실 거니까 괜찮다며 구조를 거부했다. 조금 있은 후, 이번엔 구조헬기가 아직 구조되지 못한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날아왔지만 마찬가지로 청년은 주님이 지켜주실 거라며 구조를 거부하고 가만히 기도했다. 그리고 결국 마을 전체가 침수되면서 청년은 익사했다. 사후, 청년은 하느님 앞에 서게 되자 굉장히 억울한 얼굴로 따지고 들었다. "주님! 전 주님이 절 지켜주실 거라고 믿고 마지막까지 기도했는데 어찌하여 절 지켜주시지 않으신 겁니까!" 그러자 하느님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데꾸했다. "얌마 그래서 내가 너한테 3번이나 구조대를 보냈잖아!"(...) 물론, 이 우화가 적절한지는 각자의 판단이다.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어떤 도움의 기회를 잡지 않고 신이 모든 상황을 해결해 주기를 바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초래하지 않은 악에 의한 피해를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느냐는 결국 개인의 판단일 뿐이다.
이 문제에서 신을 옹호하는 이들은 '자식이 안타까운 사고를 당해 화상을 입었다고 해서 그게 그 자식을 세상에 나오게 한 부모 책임이라고 할텐가?', '특별여행경보가 발령된 지역인 예루살렘에 굳이 순례하겠답시고 불법적인 루트를 통해 생지옥으로 성지 순례를 갔다가 버스 폭탄 테러로 안타깝게 사망한 기독교인들이 있었는데, 이를 두고도 무작정 신이나 부모에게 책임지라고 원망할텐가?'라는 식으로 답한다. 허나 전능한 신은 한낱 인간인 부모와 다르며, 다시 말하지만 이 문제의 논점은 잘못을 저지른 자가 자기의 실수로 악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을 저지른 이의 행위 결과를 아무 상관없는 이가 받았다고 할 때 그 책임은 분명 저지른 자에게 있지만 그것의 결과를 '무고한' 이가 당하는 것이 부당함에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신이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떤 신의 뜻이 있다 해도 그것을 모르는 인간이 이에 항의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더군다나 인간의 죄로 인하여 신과 인간이 단절되었고, 이 단절로 인해 신이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황당한데,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예수가 인류 대신 죽어서 죄를 면제해주었다고 하며, 이 논리대로면 적어도 예수를 믿는 사람과 신 사이에는 단절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은 최소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실질적으로 개입하여 구원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인구의 상당수가 그리스도교 신자인 아이티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신은 대체 왜 침묵한 것인가?
이에 대해 기독교에서는 '신이 악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당장은 인류의 죄와 악에 대해 관여하지 않으며, 최후의 심판 때에 모든 악과 죄인이 그에 대한 벌을 받게 된다'라고 말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죄를 지은 순간마다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몰아서 한번에 처리하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역시 악의 문제에 답변은 될 수 없다. 나중에 심판하더라도 그 전까지 발생하는 수많은 피해와 고통을 무고한 누군가가 져야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즉, 악이니 죄니 하는 것들에 대한 처벌의 문제는 나중으로 넘기더라도 무고한 자들의 구원에 대한 문제는 당장 해결해야 하는 문제란 것이다. 이에 대해 사후세계에 보상이 있으니 현세의 고통은 그저 감내하라는 식의 주장은 매우 잔인하게 느껴진다. 보통 끔찍하고 고통스런 경험을 한 경우, 그 뒤에 아무리 좋은 환경에 처한다고 해서 그 경험에서 비롯된 상처와 아픔이 없어지던가? 기억을 삭제하지 않는 이상에야 불가능한 일이고, 설사 기억을 삭제한다 하더라도 구원과는 거리가 먼 처사일 것이다. 하물며 얼마든지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방관하다시피 하고선 말이다. 인간적으로 이러한 신을 선하다고 여기기는 어렵다 할 것이다.
물론 이는 성경으로 어느 정도 카운터 칠 수 있다.
히브리서를 보면 야훼는 아비가 회초리로 자식을 훈계하듯이 인간에게 일부러 꾸지람을 주기도 하고 고의적으로 괴롭히기도 한다...
다만... 이게 완전히 카운터가 되는 건 아닌게... 자식을 죽음으로 모는 부모는 없다... 하물며 전지전능한 야훼가 자식의 한계를 몰랐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2.3 악은 경고이다.
악은 신이 인간이 무엇인가를 잘못하고 있을 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다.
- 악은 경고가 아니라 결과이다.
-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경찰들은 살인범을 찾아 감옥에 집어넣고 피해자의 가족은 세상의 동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피해자의 가족의 슬픔이 사라지지 않으며 죽은자가 돌아오지 않는다. 신이 경고를 보냈는데 왜 인간이 피해를 받아야 하는가.
- 경고는 화를 피하기 위함이다.
- 경고는 정신을 환기시키는 행동이다. 어린아이가 불타는 집에 들어가려고 하면 아이를 끌어내서 그러지 말라고 교육해야지 몽둥이로 다리를 부러트릴 필요는 없다. 전지전능하며 선한 존재라면 덜 잔혹하고 더 명확한 경고를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 전지전능하고 선하신 신이 악을 보냈다?
-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악'이 아니던가? 그게 아니면, 신을 안 믿으니 악을 보냈다는 것인가? 결국 신이 악을 조장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만약 그런 신이 있다면 말 그대로 악신일 것이다.
2.4 신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
- 좀 이상한 주장이다. 신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기에 악하다고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현대 종교 교리 대부분을 부정하는 발언
- 캐런 암스트롱이 저서 《신을 위한 변론》에서 주장한 방법이다. 여기서 신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떠한 것이라고 표현함으로서 신을 악의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아자토스?
- 하지만 암스트롱은 자신의 동일한 저서에서 "신은 절대적인 선과 아름다움, 질서, 평화, 진실, 정의"의 상징이라고 언급하였다. 분명히 동일한 책에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암스트롱의 견해를 채택하는 순간 신은 악의 문제를 피해가는 동시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린다.
- 그리고 신이 절대선이 아니라면 인간이 신의 뜻을 윤리의 기준으로 여길 이유가 없다. 선하지 않은 신에게도 복종해야 한다면 인간은 진심으로 그를 믿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우리보다 강해서 굴종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5 악은 선의 결여이며,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중략)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 내재하는 ‘악’의 사실을 설명하기 어려웠었다. "왜 신은 만든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과 천사가 그 자유를 악 때문에 남용함을 막지 않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노는, 악이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선’한 것으로서 만들어진 의지가 자신의 놓여 있는 질서에 배반할 때에만 악이 존재한다는 것, 이 의지의 반역 즉 ‘죄’를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그 악에 대하여 당연한 벌을 받게 되며, 이리하여 악도 신의 섭리 안에 들어 있음을 밝혔다. 성서 가운데에는 신의 전능과 악의 존재에 관한 논리적인 해석이 제공되어 있지 않으므로, 근대에 와서 여러 각도에서의 신학적인 주장이 펼쳐졌다. (중략) 여기서 특히 가톨릭에서 해석하고 있는 ‘악’이라는 용어를, evil과 wrong의 경우 두 가지로 나누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evil : 당연히 있어야 할 선, 자연히 본질적으로 속해 있어야 될 선의 결여를 ‘악’(evil)이라 한다. 즉 자연히 갖추어져 있고, 어떤 존재에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을 이 경우의 ‘악’으로 본다. ② wrong : 바르지 않은 것, 틀린 것을 이 경우의 ‘악’(wrong)이라고 말한다. 인간행위에 적용하였을 때, 당연히 나아가야 할 길, 인간의 최종목적인 천국에 다다르는 길에서 벗어남을 지칭한다. ①②가 마찬가지로 ‘악’의 의미로 쓰이지만, 엄격히 말해서, ‘wrong’은 ‘진리’에 반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evil’은 ‘선’에 반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가톨릭 대사전, <악> 항목 中- |
악이 없는 선은 존재하지만, 선이 없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토마스 아퀴나스 - |
재미있는 주장이다. 현재 가톨릭의 주류를 이루는 설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는 신학자들. 대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러한 주장을 했으며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악은 선의 부재(nicht gut)로 보았다. "선은 옷이고, 악은 옷에 생긴 구멍이다."와 같은 비유를 통해 선과 악의 관계를 설명하려 하는 경우이다.
악은 사실 존재하지 않고 단지 선이 결핍된 상황을 뜻할 뿐이다. 즉, 악은 선의 결여(privatio boni)이다.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명사를 부여해서 그것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가령 어두운 방에 대해 '어둡다'라고 표현하는 경우를 보자. 이 때 어둠은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취급되지만 사실 어둠이란 대강 말해 빛의 유무에 따른 현상이며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악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악'이라고 호칭하기 때문에 악이 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악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선이 결핍되어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빛이 비치지 않는 곳은 어둡다. 이는 '어둠'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빛이 거기에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선과 악의 관계도 이와 같다.
또한 가톨릭의 이 설명은, 단순히 악의 문제에 대한 대답 뿐만 아니라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교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악은 '창조된 것'이 아닌, '선의 결핍', '창조된 것의 결핍',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설명되기에, 인간이 초월자로부터 나온 '선'을 따라야할 이유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주의할 점은, 악은 선의 '결핍적 부재'이지 '부정적 부재'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사람은 조류의 날개가 없는데, 날개가 없다고 해서 사람을 악하다고 할 순 없다.[11] 즉 악이란 '있어 마땅한 것'의 결핍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원리로,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모으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여기에 성금을 낸다면 '선'이다. 그렇다면 여기를 지나쳐버리는 사람은 악한 것일까? 이 사람을 악하다고 하는 것에는 많은 사람들이 머뭇거릴 것이다. 당연히 가톨릭에서는 이걸 악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있어 마땅한 것'에 해당하는지를 논의한 후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뿐이다. 예를들어, 지금 당장 1000원짜리 지폐한장 쥐어주지 않으면 하루를 못버틸 사람을 지나친다면 '있어 마땅한 것'의 결핍이고, 그런 의미에선 가톨릭적 관점에서 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지 않았다고 악인이라고 하지는 않는다.[12] 악은 선의 부정적 부재가 아닌, 결핍적 부재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13] 그렇기에 가톨릭적 관점에서는, 선과 악에 대하여 가치중립적인 행위가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있어 마땅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가톨릭 교회에서도 "분명하게 있기는 한데, 우리도 원론적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 의미에서는 그것이 뭔지 모른다"는 입장이다.[14] 그렇기에 어떠한 도덕적 신념에 대한 독선을 경계하고 있다.
나름 참신하고 좀 깨는 발상으로 해결을 시도하긴 했지만 이 주장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부분도 많다. 우선 첫번째 문제로 선과 악이 정확한 동량(同量)의 상대성을 가진다는 점을 오인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선하다면, 그 다른 것은 어떤 것보다 악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직관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우리는 어떤 행위는 다른 행위보다 보다 더 선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가령 목숨을 걸고 물에 빠진 아이를 구출하는 것은, 길을 가다가 쓰레기를 줍는 것보다 더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행위임은 일반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쓰레기를 줍는 행위가 아이를 구하는 행위보다 더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합당할까? 우리는 쓰레기를 줍는 행위가 어떠한 악덕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이 악의 부재라는 명제를 인정한다면, '덜 선하다'는 것은 '더 악하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되어야 한다. 선을 열에 비유한 위 글에 비유하자면, A가 B보다 뜨겁다는 것은 B가 A보다 차갑다는 말과 의심의 여지없이 같다. 그러나 A가 B보다 더 선한 행위라는 것이, B가 A보다 더 악한 행위임과 같은 뜻이라고 말하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둘째로 이 주장은 결국 '자유의지'와 거의 똑같은 비판을 받게 된다. 즉 신이 인간에게 허락해준 자유의지로, 인간이 '선이 결여된 언행'을 하여서 타락하게 되는데 왜 신이 이것을 바로잡아 주지 않느냐는 점이다. 세부적인 비판은 자유의지와 거의 겹친다.
즉 이 설은 "신은 왜 악을 만들었나?"라는 말에 대답은 할 수 있지만, 좀 더 근본적인 '신은 왜 타락하여 선으로부터 멀어지는 인간들을 바로잡아주지 않느냐'는 물음에는 답하기가 어렵다. 물론 교단 측에서는 "그래서 존재하는 게 신앙입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럼 "(그리스도교) 신앙을 접할 기회가 없는 사람은?", 그리고 더 나아가 "그렇다면 신과 관련을 맺지않는 윤리체계, 즉 세속윤리(secular ethics)는 불가능한가?"라는 의문과 반박에는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있다. 가톨릭의 경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언급된 "자기 탓 없이 아직 신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신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라는 말[15]로 일정 정도 설명을 꾀하나 그리스도교만해도 타종교인, 무신론자의 구원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종파들이 적지 않을 뿐더러, 선과 종교적 신성은 명백히 개별적이며 신을 매개하지 않더라도 선을 분별하고 실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리적으로 충실하다고 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주장은 '선은 악의 결여'라는 역설보다 더 나을 것이 못 된다. 즉, 이 세상을 만든 신은 악하기에 세상 역시 악한 것이 당연하고, 선은 단지 악의 결여에 따라 나온다고 주장하더라도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반박할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빛과 어둠, 옷과 옷의 구멍처럼 선과 악은 무엇이 주된 것인지 명확하게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은 선의 결여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왜 악은 선의 결여일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근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선은 악의 결여이든, 악은 선의 결여이든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더라도 이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성선설과 성악설과도 연관되는 문제이기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갈릴 수 밖에 없다.
가령 '건강'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대체로 '건강'을 신체의 모든 기능이 문제 없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이런 점에서 건강하다는 것은 사실 매우 애매한 개념이다. 가령 A가 B보다 근육이 튼튼하고 지구력이 좋다면 A는 B보다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B를 건강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B가 어떤 질병이나 상해를 가지고 있을 때, 모든 사람은 (그 정도는 다를지라도) B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판단에 동의할 것이다. 이 때 '건강'이라는 상태는 사실 질병이나 상해의 부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우리는 건강하지 않은 상태를 질병이나 상해라고 정의하기보다는, 질병이나 상해가 없는 상태를 건강이라고 정의하며 그것이 의미상 보다 정확하고 모호성이 적다고 간주한다. 선과 악의 관계도 이와 같지는 않은가? 악이 선의 부재라고 하는 것과 선이 악의 부재라고 하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보다 합리적인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이 악의 문제는 애초에 '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이라는 교리와 '세상에 실재하는 악한 행위들'이 어떻게 모순이 없는지를 묻는 질문이므로, 모순 자체만 없게 설명만 가능하다면 비신자들이 부자연스럽게 느끼더라도 상관은 없기는 하나, 상식적인 선에서 비신자들이 자연스럽게 납득하기는 어렵다는 난점이 있다. 즉 말이 안되는건 아닌데, '선은 악의 결핍이라 하는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 아니 애초에 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이 없다고 하면 훨씬 간단한거 아님?'이라는 의문을 자아내게 한다는 것.
이 문제에 대하여 가톨릭의 자세한 교리를 보고 싶다면, 악의 문제/가톨릭 항목을 참조하자.
2.6 악이란 건 인간의 관점이고 신의 관점에서는 선이다.
기독교에서 최종적으로 말락 야훼를 부정하면서 내세운 주장. 자세한 건 해당 항목을 참고할 것.
- 신이 인간과 세상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신의 분신이다.
대다수의 인간은 전쟁보다 평화를, 다툼보다 공존을, 불행보다 행복을 바란다. 이러한 주장을 듣다보면 신의 분신인 인간이 선을 추구하고 신은 악을 추구하는 역전된 결과가 나온다. 무엇보다 정식 종교로 선택된 성경에서도 신의 이름을 걸고 서로 죽이고 미워하며 배척하라고 쓰여있지 않다.[16] 거기에다 이는 특히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자기모순인데, 분명 성경에서 인간의 선악 기준은 신이 내리신 거라더니 이제와서 신의 선악은 인간의 선악과 다르다고?
의외로 이 주장과 반박을 동시에 기반으로 하는 창작물이 있다. 따지고 보면 이 이론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종족간의 가치관 차이로 인한 갈등'이란 클리셰와도 맞물리기 때문. 이 경우 앞의 링크처럼 선악의 개념이 다른 초월적 존재 앞에서 무력한 인간[17]이란 꿈도 희망도 없는 전개로 가거나, 반대로 인간 입장에서 신을 악으로 간주하고 죽여버리는(!) 충격적인 전개가 펼쳐진다. 특히 후자의 경우 신 죽이기란 클리셰와 연결되며, 이 항목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YHVH가 인류의 적으로서 처단당하는 진 여신전생 2가 가장 직접적으로 이 문제를 찌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DC 종교 갤러리에 올라온 글. 단 이에 대해서도 교리상으로는 "오원춘이나 장자 살해에 대한 선악판단은 인간의 것이지, 신의 판단은 다를 수 있다" 고 반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신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선행을 강요하는가?" 하는 물음이 나올 수도 있다. 덧글 중에서 한 네티즌은 어째서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의 선악잣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세상을 만들었냐는 언급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인간은 결국 초월적인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 주장 또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전지전능한 신 개념과 상충한다는 점이다. 만약 신이 전지전능 하다면 어째서 인간에게 자신과는 다른 관점을 주었단 말인가? 신은 인간 또한 살인과 폭력 같은 행위들을 선으로 여기게끔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신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위의 항목과 유사하게 종교인들 스스로의 행위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종교인들은 그들 스스로도 이해 할 수 없는 신의 뜻을 교리 혹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확신하고 연구하며 실천하는 동시에, 그 기준을 타인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이 틀리거나, 진정한 신의 뜻이 전혀 다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18]
2.7 기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제시한 답이 애매모호하고 사람들을 납득시키지 못하자, 이를 답답하게 여긴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만든 여러가지 이론들도 있다.
대표적인 기타 이론은 혼돈-질서 대립 이론인데, 신은 창조에는 전지전능하지만 질서와 혼돈의 개입 영역에는 전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이것은 '신이 전지전능하다'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셈이기 때문에 정론으로 굳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혹은 이 모든 게 신의 섭리이고 따지고 보면 선도 악도 다 필요했다고 말도 있다. 이스카리옷 유다가 예수를 팔았기에 예수가 인류를 구원할수 있었다는 식으로, 결국 인간은 신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라는 주장. 하지만 이렇게 되면 불쌍한 유다 가롯은 하나님으로부터 배신자로 만들어졌고 배신자로써 지옥에 떨어지는 운명이 고정된 것이기에 당연히 명확한 해답이 되지 못한다. 밀턴의 실낙원 같은 경우, 이런 부류로 야훼를 해석해서 루시퍼의 타락도, 아담의 타락도 알았던 것으로 나오며, 대개 이런 주장의 경우 욥기를 같은 맥락으로 해석해 범위를 넓게 잡아놓는 편이다.[19]
3 결론
사실 '절대적인 선(善)'이 무엇인지 증명되지 않는 한 '신이 인간이 (아직) 이해하지 못하면서 신만이 알고 있는 절대적인 선에 따라 인간이 악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존재케 했다'고만 해두면 내부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다만 이런 논리는 '절대선신 = 인간의 관점에선 악신'이라는 결론[20]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절대선신의 존재[21]를 증명하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웬만하면 논의를 여기서 멈추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온갖 종류의 복잡다단한 설명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
이처럼, 이 문제는 초반에 확인한 바 있듯이 "전지란 무엇인가", "선과 악은 무엇인가", "전능이란 무엇인가" 같은 주제들이 먼저 명확히 정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개념들은 그리스도교 신학 외에도 윤리학 및 종교철학, 종교사회학 등의 분야에서 뜨겁게 불타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 주제에 대한 좀 더 심도있는 개관을 원한다면 《신과 인간 그리고 악의 종교철학적 이해》 등의 저서를 추천한다. 불행히도 개신교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룬 책 중에는 애저녁에 논파된 낡은 떡밥들을 고스란히 반복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도 가장 정교한 논의를 진행하는 책으로는 《고통과 씨름하다》 등이 있다.
이처럼 악의 문제는 수많은 철학자들과 윤리학자, 신학자들이 진지하게 논의한 주제이며, 여러 창작자들이 작품을 창작할 때 소재로 삼기도 했다. 심지어 종교에 관심있는 일반인들도 가끔씩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한다. 일부 학자들은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 및 신무신론 운동의 출현 등으로 인해, 과거에는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 정도만 관심을 가졌던 이 주제가[22] 이제는 흔한 일반인이나 심지어는 청소년들까지도 관심을 갖게 되는 확산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4 관련 문서
- ↑ 실제로 그는 개신교 근본주의 풍토에서 수학했으나 이후 악의 문제로 인하여 신앙을 버리게 되었다. 신앙을 버린 이후에도 그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말하면 "신이시여, 만일 당신이 계시다면 지상의 이 모든 비참한 사태에 대해 어디 변명이라도 좀 해 보십시오!" 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즉, 현대적 의미의 신무신론과 같은 입장인지는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 물론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신무신론자가 된 경우도 있으니 단정하긴 힘들 것이다.
- ↑ "신이 전지하다" 는 말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일단 신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안다고 치면 된다.
- ↑ 이 역시 논란이 많다. 여기에서는 신은 모든 악한 행동을 허용하지 않는 성향을 지닌다는 정도로 하고 넘어가자.
- ↑ 이 말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여기에서는 가능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정도로 하고 넘어가자.
- ↑ 악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일단 "무고한 고통"으로 정의한다.
- ↑ 다만 이 경우 선신이 악신을 없애지 못하므로 선신의 전능함에 있어 문제가 있다.
- ↑ 이 떡밥은 대부분의 유일신교들이 해당하는 문제이지만, 이 문서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그리스도교를 위주로 작성되었다.
- ↑ 그렇다. 위의 에피쿠로스의 말과 거의 동일하다.
- ↑ 실제로 창세기에는 이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나와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아무런 조건 없이 무한히 소산을 내놓던 땅은 이제 인류가 스스로 경작해야 했으며 경작을 방해하는 잡초나 엉겅퀴들이 생겨났다. 즉 성경에 따르자면 원래 이 세상은 100% 완전하게 창조되었으나 죄가 들어오면서 야훼의 저주를 받아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단 뜻이다.
- ↑ [1]
- ↑ 가톨릭에서는 창조된 것은 본래 선하게 창조되었다고 믿는다. 즉 존재자(ens)는 선과 동일시 된다. 물론 모든 존재자가 영원히 선하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 ↑ 다만 이 부분은 생각해둘 여지가 있다. 지금 당장 세계 곳곳에서는 푼돈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아니, 국내에서도 먹는 것조차 해결하기 힘든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국민들 하나하나가 자선단체에 약간씩만 기부해도 수많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기술의 발달로 기부하는 것도 점점 쉬워지고 있다. 전화 한통 혹은 스마트폰으로 몇번 누르면 해결된다. 즉 현대 사회에서는 평범한 시민이라도, 죽어가는 타인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무수히 많이 있다. 이 상황에서 한 개인이 이들을 지나치는 것을 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윤리신학적으로 많은 견해가 있지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대강 이러하다. 우선, 상기한 문제들은 현대사회의 '사회적 악'이며 '개인의 사랑의 결핍' 역시도 (무겁냐 가볍냐와는 별개로) 분명하게 악이다. 그러나 상기한 사례들에서 한 개인이, 타인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인식하고 완전한 자유의지로 그 기회를 거부했다면 소죄로 취급된다. 애초에 '인식'과 '자유의지'를 둘다 갖추었는데 무관심으로 타인을 죽게 내버려두었으면, 가톨릭 교회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집단에서 크게 비판받는다. 마지막으로 소죄의 경우는, 어차피 가톨릭적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선악과 사건 이전의 아담과 하와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류는 원죄로 인한 결함 때문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죄인들을 용서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활동한 것으로 해석한다.
- ↑ 안습한건, 많은 신자들이 선을 악의 부정적 부재로 오인한다는 것이다(...)
- ↑ 사실 이건 굳이 가톨릭 교회 뿐만이 아니라, 도덕적 절대주의자들 중 많은 이들이 지닌 견해다. 이를테면 조선시대에는 자르지 않고 기른 머리카락이 '있어 마땅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만약 이러한 관습이 오늘날의 한국사회에도 남아있었다면, 단발은 '있어 마땅한 것'의 결핍, 즉 악으로 취급될 것이다. 즉 '절대적 옳음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느냐', '악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들과는 별개로 신학자이든 철학자이든간에 '사람은 옳음이 무엇인지 (원론적 의미가 아닌, 구체적 사례에서)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 ↑ 교회헌장, 교회와 비그리스도인 中
- ↑ 인간의 손을 들어 불가능한 기적을 행하사 다른 인간과 민족을 죽이거나 배척하는 경우가 있긴하지만...
- ↑ 크툴루 신화에는 인간에게 관심 자체가 없는 건 그나마 다행이고, 아예 선악이고 뭐고 없이 전 인류를 취미로 가지고 노는 극악무도한 케이스도 존재한다. 이 악의 문제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의외로 야훼가 이런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 ↑ 기독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정설을 주장하는데, 어차피 태초부터 인간은 은총으로 택함받아 천국으로 들어갈 무리와 지옥으로 갈 무리로 나뉜다는 것이다. 소위 전도행위란 이미 예정된 사람을 부르는 행위일뿐, 비신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어차피 비신자들은 애초에 신이 선택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신의 뜻을 영원히 알 수 없다것이 교리이다. 성경에 그렇게 쓰여있다. 그러나 기독교 밖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설명하고자 만들어낸 변명에 불과하고, 일종의 Ad Hoc같은 주장이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러한 신의 뜻 자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럴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애초에 악의 문제 자체가 악의 존재에 대한 논리적 의문에 의하여 제기된 것인데 신이 원래 그렇게 정해놓아 인간은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논리 자체를 막아놓는 것이므로 반박이나 답변이 될 수 없다.
- ↑ 어째서 넓게 잡는다는 부분이 서술되었느냐 하면, 결국 욥기에서도 명확한 해답은 내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 ↑ 당연히 이 경우를 달가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무신론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 ↑ 아무리 절대선신이라도 인간의 관점에서 악하다면 있어서 좋을 일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주의 다른 모든 생물들을 지키기 위해 인간을 멸종시키는 신을 생각해보자. 아무리 숭고한 이유가 있다고 해도 우리 인간이 그런 신의 존재를 반길 수 있겠는가?
- ↑ 인류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악의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한 시점에 대해서는, 1755년 포르투갈 대지진을 기점으로 한다고도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