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스카이

(원세개에서 넘어옴)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대총통
1대 쑨원2대 위안스카이
(1912.3 ~ 1913.10)
중화민국 건국
중화민국 역대 대총통
중화민국 건국1대 위안스카이
(1913.10 ~ 1915.12)
2대 리위안훙
중화제국의 역대 황제
중화제국 건국초대 홍헌제 위안스카이
(1915.12 ~ 1916.3)
제제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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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없음
시호없음
연호홍헌(洪憲)
원(袁)
세개(世凱)
생몰기간1859년 8월 20일 ~ 1916년 6월 6일
재위기간1915년 12월 ~ 1916년 3월 90일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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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무렵의 위안스카이.

1859년 8월 20일 ~ 1916년 6월 6일

袁世凱(원세개) / Yuán Shìkǎi

1 개요

1898년황제를 배신했고 1911년제국을 배신했고 1916년공화국을 배신한 중국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

- 레지널드 존스턴

청나라 말기의 최대 군벌이자 청을 멸망시킨 장본인. 중화민국 2대 총통. 중화제국 초대이자 마지막 황제. 인정하지 않고 반발하는 사람이 많아서 스스로 황제 즉위와 중화제국 선포를 취소해야 했다. 중국 역사상 최악의 한간(漢奸)이라고도 불린다. 그럼 선통제가 아니라 이 양반이 중국 역사상 최후의 군주? 그런데 뒤에 1917년의 정사복벽 사건도 있고 만주국도 있어 좀 애매하다[1]

2 이름에 관하여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원세개. ○○○이다. 중국어 발음으로는 위엔 시으카이에 가깝다. '위안스카이'라는 한글 표기는 1986년 1월 7일 문교부에서 고시 제85-11호로 공표한 국립국어원중국어 표기법에 따른 것이다. 실제 발음은 국제음성기호로 표기하면 [yɛn ʂɨ kʰaɪ̯][2]로 표기할 수 있는데, 이를 들리는 대로 표기하자면 위엔시으카이 정도로 표기할 수 있다. 다만, 나무위키에서는 국립국어원의 표기법을 존중하여 '위안스카이'로 표기한다.

사실 Yuán(위안)과 Shì(스)모두 현대 한국어에는 없는 음가인지라 한글로 정확한 발음을 표기하는 것은 어렵다. 굳이 소리를 내보고 싶다면 '위안' 같은 경우는 입술을 둥글게 한 상태에서 '이'를 발음한 후 '안(엔)'을 덧붙이면 되며, '스' 같은 경우는 중국어의 특징적 발음인 권설음 중 하나로써 무성 권설 마찰음인바 입 안에서 혀를 말고 혀 끝을 경구개에 대고 '스' 발음을 내주면 비슷하다.[3] 다만 한글로 중국어의 발음을 표기하고자 할 때는 국립국어원에서 지정한 중국어 한글 표기법에 따라 위안스카이로 표기한다. 애초에 표기법은 외국어를 그대로 전사하는 수단이 아니라 한국인의 언어 생활에 최적화된 표기법이므로 무리한 원음 재현은 의미가 없다.

간혹 그의 성을 위엔으로 표기하는 매체도 있으나, 위안이라는 표기가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데, 위안스카이의 성인 袁의 병음 표기인 Yuán의 모음은 두 모음인 ü와 a가 만나는 복모음으로, 굳이 따지면 위엔 쪽에 더 가깝게 들린다. 주음 부호로 보면 ㄩ(위)+ㄢ(안)으로 이뤄진 음절이 맞으나 별도의 음절로서 발음되는 게 아니라 합쳐져 한 음절로 발음될 때는 ü[y](위)의 전설성에 힘입어 an[an](안)의 a[a](아)가 a[ɛ](에)로 전설모음화되는 것. 현행 표기법에서는 음절 구조에 더 주목했는지 몰라도 곧이곧대로 위안으로 쓰게끔 하고 있다. ㄧ(이)+ㄢ(안)이 합쳐진 한 음절은 글자 그대로인 '얀'이 아니라 (전설음화된 현실음을 반영하여) '옌'으로 쓰게 하면서 ㄩ(위)+ㄢ(안)은 왜 음절 구조 그대로 표기하는지는 미상. 사실 중국 일부 방언권에서는 '위안'으로 읽기도 하는 모양.

그런데 과거 중국어 로마자 표기에 쓰였던 웨이드 자일스 표기법으로는 한어병음의 한 음절짜리 -ian(옌)이 -ien, 두 음절짜리 -i'an(이안)이 -i-an으로 표기되어 철자 자체가 달랐던 반면에, 한 음절인 yuan(위엔)과 두 음절인 yu'an(위안)은 철자 변경 없이 줄표 유무의 차이만 있는 yüan, yü-an으로 표기되었다. 한 음절만을 위한 yüen 등의 별도 표기가 없었던 것을 보면 한 음절인 ㄩ(위)+ㄢ(안)의 중국 현지음이 '위안'이 아니라 '위엔'이 된 건 의외로 최근의 일일지도 모른다.

한편 '위, 안'의 두 음절을 의도한 표기가 되려면 그 병음 표기가 Yuan이 아닌 Yu'an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장위엔이 아니고 장위안이다 한어병음에서는 음절 구분을 필요로 할 시 두 모음 사이에 어포스트로피(')를 넣는다. 위의 장위안의 병음 표기(Yu'an)나, 장안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중국의 고도(古都) 시안의 병음 표기가(Xi'an)가 그 예시. 즉 yuan은 위엔, yu'an은 위안, xian은 셴, xi'an은 시안에 가깝다.

원어 독음의 표기 문제를 떠나서, 한국식 독음인 원세개와 중국어 표기법 위안스카이 두 이름 사이의 문제도 있는데 이는 현행 표기법의 중국 인명 표기법이 둘로 나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혼란이다. 현행 표기법에는 1911년 일어난 신해혁명 이전에 사망한 인물은 한국식 독음으로, 그 이후의 인물은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하도록 하고 있다. 역사적 방식과 현대식 독법 사이 일종의 타협.[4] 과거에는 '원세개' 하면 알고 '위안스카이' 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현재는 교과서를 필두로 '위안스카이'라는 표기법이 자주 쓰이다 보니 세대에 따라 단어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고 오히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원세개' 하면 잘 모른다.[5][6] 모택동이나 장개석을 생각해보자. 과연 존재답게 이름으로도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3 백수가 중국의 지배자가 되다

허난성(河南省) 샹청(項城) 출신으로 위안바오중(袁保中)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원씨(袁氏)는 상청의 명문 가문이었다. 위안스카이의 아버지 위안바오중은 친동생인 위안바오칭(袁保慶)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위안스카이를 양자로 보냈다. 숙부였던 위안바오칭은 매우 기뻐하며 열심히 양자를 키웠는데 비싼 수업료를 치르며 제일 유명한 선생을 붙여줬지만 위안스카이는 도통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대신 말타기를 좋아하고 무예를 열심히 익히는 등 문(文)보다 무(武) 쪽으로 지나치게 열정을 보였다. 그래서 위안스카이는 진사 시험도 3번씩이나 떨어진 백수였는데 이것을 보면 위안스카이가 별 볼일 없는 것 같지만 진사 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진사가 되려면 먼저 각 성에서 뽑는 200등 안에 들어서 생원이 되어야 하며 이런 십몇개 성에서 보낸 수천명의 생원가운데서 50등안에 들어야 한다. 아마도 중국의 과거시험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붙기 어려운 관리임용시험이었을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노는 것을 좋아하고 오만했으나, 당시에는 벼슬을 하고 출세하기 위해 스스로를 엄히 단속하고 모든 일을 법대로 시행했다. 결국 양아버지 위안바오칭의 추천으로 이홍장(李鴻章)의 참모인 우장칭(吳長慶)의 휘하로 들어갔다. 커리어의 시작은 조선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데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조정은 우장칭에게 6개의 부대를 이끌고 출병할 것을 명령했고 위안스카이는 그의 휘하로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는 임오군란의 수괴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는데 위안스카이는 우장칭을 도와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텐진에 연금함으로써 활약을 펼쳤다.

이 후 본대가 철수한 후에도 갑신정변 진압에서도 맹활약했으며 청일전쟁 직전까지 조선에 있으면서 사실상 조선주재 청국 공사 역할을 수행하여 리훙장의 명령을 따르며 조선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다 청일전쟁 패전 후 이홍장으로부터 넘겨받은 북양군을 틀어쥔 상황에서 1898년 광서제와 캉유웨이(강유위)가 주도하는 무술변법에 협조하는 듯 보이기도 했으나, 서태후의 측근인 영록대부에게 이를 밀고하면서 뒤통수를 날려 변법개혁을 박살내고 수구파에게 정권을 넘기는 데 공을 세워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첫번째 배신 이것이 그가 한간(漢奸) 소리를 듣게 되는 시발점이자 그의 커리어 가운데 가장 극적이면서 유명한 사건이다. 이 결과 광서제는 유폐당하였고 나중에 서태후가 죽기 전날에 갑자기 죽었는데 2008년 광서제의 머리카락을 조사한 결과 다량의 비소가 발견되면서 독살로 밝혀졌다.

이후 서태후의 총애를 얻게 되었고, 1899년~1901년 의화단 사건 기간에는 의화단을 강력하게 진압하고 '동남자보'에 가담하여 세력을 거의 잃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리훙장의 뒤를 이어 더욱 출세를 타게 된다.[7] 한동안 청의 외무부[8] 총리교섭통상대신이었으나, 청의 마지막 구심점이던 서태후가 죽은 뒤 황제 푸이의 섭정으로 오른 순친왕의 압력으로 낙향한다.[9]

하지만 다시 전화위복.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했을 당시 청조의 요청으로 정계에 다시 진출하니, 오늘날 국무총리급에 해당되는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10]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속으로는 청조를 타도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두번째 배신 일단 신해혁명군의 세력을 꺾는 선에서 상황을 멈춘다. 1912년 1월, 위안스카이는 공화파의 쑨원(손문)과 협상 테이블에 앉고 간단한 조건을 내건다. 자신이 청나라를 버릴 테니 "쑨원님이 가지고 있는 혁명 정부 대총통 자리를 내놓으라능"이라는 것.

쑨원은 공화국을 건설할 것과 수도를 난징으로 바꿀 것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요구했고 협상은 타결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 있는 심복 돤치루이(단기서)에게 황제 퇴위를 준비시켰고, 그의 군대가 자금성을 점령하자 같은 해 2월 12일 선통제를 퇴위시켰다. 이로서 청나라는 멸망하고, 위안스카이는 대총통 자리에 취임하며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4 독재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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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혁명과정에서도 쑨원이 내걸었던 민주적 조건들을 싸그리 무시하던 위안스카이는 총통이 되자마자 독재를 강화해나갔다. 이에 맞서 쑹자오런, 쑨원이 동맹회를 확대해 1912년에 국민당[11]을 결성했다. 결국 선거에서 국민당이 압승하자 위협을 느낀 위안스카이는 쑹자오런을 암살시키기도 했다.[12] 그리고는 '공민단'이라는 정치깡패 집단을 사주해 의회를 개박살내고, 1913년에는 국민당을 강제 해산시켜 버렸다. 여기에 열강 5개국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라는 막대한 차관을 들이는 등 실로 '매국 행위 + 독재자'가 되어간다.

이렇게 모든 정적들을 물리치자, 그는 모든 중국 권력가들의 영원한 꿈인 황제병(...)에 걸린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해서 초대 황제에 오르게 된다.[13] 세 번째 배신 그러나 여러 강대국들, 주위 인물, 혁명파 학생들과 관리들, 민중들이 모두 그에게 등을 돌린다.


중화제국의 국기

아메리카 연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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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즉위식. 여담으로 면류관의 평천판은 둥글고 정작 면류가 없으며(...) 곤복도 무슨 괴상망측한 정체불명의 형태로 복장과 예법이 개판이다. 오랜 기간 청나라로 인해 한족 문화가 절멸당한 걸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에 고증 문의하지

황제 등극 과정에서 엽기적인 에피소드가 존재하는데 이른바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신문 사건이다.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는 것에 대해 걱정한 부류가 둘 있었다. 하나는 황제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 일반 사람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황제가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라고 생각하는 측근들과 가족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차기 황제를 노리고 있었던 큰아들 위안커딩(袁克定)이 있었다.[14] 위안커딩은 당시 위안스카이가 시세 파악을 위해서 자주 보았던 순천시보[15]를 위조하여 마치 여론이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를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후, 매일 위안스카이에게 갖다 주었다. 이리하여 위안스카이 한 명만을 위해서 위조된 '위안커딩 특제 순천시보'가 위안스카이에게 계속 전해지게 되었는데, 한참 후에 위안스카이가 밖에서 사온 음식물을 싸고 있던 순천시보와 자신이 쭉 봐 왔던 조작 순천시보의 차이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면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게 된다.[16] 이 때부터 위안커딩이 위안스카이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는 의견이 많은데, 위안커딩은 위안스카이의 믿음이 덜해지자 심지어 동생들을 죽이려는 사변까지 계획했었다. 물론 지금이야 그저 황당한 조작 사건으로 비웃음이나 받고 있지만, 당시의 위안스카이는 나름대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무엇보다도 '단 한 명을 위해서 신문을 찍는다'라는 발상의 전환(!)이 정말 대단(대범?)했던 사건이다. 살라자르가 리얼 트루먼 쇼라면 이쪽은 세미 트루먼 쇼. 이것도 있다

4.1 21개조 조약

이에 더해서, 그는 황제에 오르기 직전에 일본21개조 요구에 서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산둥성 칭다오를 조차권을 일본이 그대로 가져가고,[17]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게 넘기며, 남만주(뤼순, 다롄항)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한다는 내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재정, 군사, 경찰, 군수에 일본인 고문을 두고, 외국에 땅을 할양하는데에 일본과 무조건 협의해야 한다는 이 조약은 사실상 매국 조약이나 다름없는 병크였다. 이에 학생들과 시민들은 베르사유 조약 반대운동인 5.4 운동(1919년)에 나서고, 결국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은 군사정부도 탄압 끝에 조약을 들어주지 않겠다며 항복한다.

다만, 이 21개조 요구 수용으로 위안스카이를 비난하기는 어렵다는 말도 있다. 일본이 비밀리에 요구한 21개조 요구가 민중들에게 전해진 건 위안스카이가 고의로 흘렸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실제로 이 조약으로 말미암은 고민이 그를 죽음(1916년)에 이르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다른 유럽 강대국들과 부지런히 접촉하면서 중국을 연합국에 끼게 하고 또 일본의 조건을 완화하려고 시간을 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유럽 강대국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이라 개입할 여유가 없었고, 협상에 도움이 될 학생들의 봉기를 무력 진압하려 든 것은 문제였다.

5 제명에 못 죽다

한편,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몰아내기 위해 위안스카이 토벌을 외치며 1912년 6월에 제2혁명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7월에 일본으로 망명갔다. 그리고 쑨원은 일본에서 1914년에 '중화혁명당'을 조직[18]하여 해외에서 '반(反)위안스카이 독재'운동에 헌신한다.

1916년, 전국 각지에서 제3혁명이 일어나자 위안스카이는 격렬한 반대 때문에 자진해서 황제에서 물러났고, 떡고물이라도 건지기 위해 중화민국 총통자리로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이미 민심은 그를 떠난 후라 그냥 물러나게 된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실망 속에서 분노와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6월에 급사하면서 제3혁명은 흐지부지 끝나게 된다. 원이 3개밖에 없어서 그런거다. 5개였으면 천수를 모두 누렸을 것이다.


1916년 위안스카이의 장례식

위안스카이 사후에는 베이징 국민당 정부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부하들이 위안스카이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베이양군벌(北洋軍閥, 북양군벌)이 되어 서로 치고받고 싸우게 된다. 어쩐지 종씨인 원소원술이 오버랩되는 인물.

6 이후

위안스카이는 총 1명의 정실 부인과 9명의 첩실을 두었고 그 사이에서 요절한 자식들을 포함하여 무려 17남 15녀를 낳았다. 정실 우씨(于氏)를 비롯해 첩들인 심씨(沈氏), 양씨(楊氏), 섭씨(葉氏), 장씨(張氏), 곽씨(郭氏)[19], 유씨(劉氏)[20]는 중국인이었지만 첩 김씨(金氏),[21] 이씨(李氏), 오씨(吳氏),[22] 이씨(李氏),[23] 민씨(閔氏)는 조선인이었다. 이들 조선인 첩들이 낳은 자녀가 7남 8녀인데 위안스카이의 자녀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

위안스카이는 17명의 아들 중 김씨가 낳은 둘째 아들 위안커원(袁克文)과 이씨[24]가 낳은 다섯째 아들 위안커취안(袁克權)을 가장 총애했는데 특히 위안커원은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 후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실 우씨가 낳은 큰아들 위안커딩(袁克定)은 독일영국유학을 다녀온 자신이 대통을 이어야 한다고 여겼지만 위의 사건과 특히 1913년 승마를 하다 떨어져 한쪽 다리를 저는 바람에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했다.

1914년 위안스카이의 둘째아들 위안커원(袁克文) 등이 중국과 미국의 골동품상과 결탁하여 당태종의 무덤인 소릉(昭陵)에 있는 육준(六駿)의 석각을 훔쳤다. 소릉에는 당태종이 전쟁에 썼던 여섯마리의 준마(駿馬)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각각의 이름은 특륵표(特勒驃), 삽로자(颯露紫), 청추(靑騅), 권모과(拳毛瓜), 십벌적(什伐赤), 백제오(白蹄烏)이다. 위안커원 일당은 삽로자와 권모과 두 석각을 훔쳐갔으며 4년 후인 1918년 다시 잠입하여 나머지 네 석각도 훔쳐가려 했으나, 중간에 현지 주민들에 의해 발각되어 반출을 막을 수 있었다. 그 때 화를 면한 네 석각은 현재 시안비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미 해외로 반출된 두 석각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박물관에 있기 때문에 이 두 석각은 시안비림박물관에 레플리카로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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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석각은 미국으로 반출된 삽로자로 잘 보면 군데군데 금이 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너무 무거워서 훔쳐가기 편하게 여러 조각으로 잘라냈기 때문이다. 출처 반면 시안에 있는 삽로자와 권모과의 레플리카는 당연히 잘라 낸 흔적이 없다.

위안커원은 원래 샹치(將棋) 와 마작(麻雀) 유단자로써 명성을 날렸었다. 그는 한 때 후계자 일순위였지만 머지않아 아버지 위안스카이가 황제 자리에서 밀려나고 병사한 후에는 다시 장기와 마작으로 일생을 지냈다가 1931년 톈진에서 향년 42세로 사망했다. 위안커원의 셋째아들 위안자류(袁家骝)는 물리학자로써 미국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석좌교수를 지냈고 대만에서 국립 타이완 대학교 대우교수를 지내다가 2003년 향년 91세의 나이로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위안스카이는 자녀만 32명이었고 손자만 79명이었단만큼 자손들도 매우 많은데 가끔 중국이나 미국 등지에서 활동 중인 후손들의 행적이 보도되기도 한다.

한국 사극에서는 주로 흥선 대원군에게 뺨 맞는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다.

  1. 다만 한족 군주로는 마지막이 맞다. 위안스카이가 황위에서 물러나 중국이 다시 공화국이 되어 현재까지도 계속 공화정으로 이어지면서 더 이상 한족 군주는 나오지 않게 되었다.
  2. 또는 [yɛn ʂʅ kʰaɪ̯\]로도 표기할 수 있는데 중설 비원순 고모음을 나타냈던 발음 기호인 [ʅ\]는 현재 국제음성기호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기호이지만 중국학을 전공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현재도 사용되기도 한다.
  3. 중국어에서 권설음(sh-) 뒤의 -i는 '설측후음'이라 하여 따로 음가를 가지지 않으며 굳이 한글로 표기하자면 '으' 정도에 가깝다.
  4. 다만 우리 한국식 독음이 관용적으로 굳어진 인명의 경우(주로 연예인)는 독음 표기를 허용한다.
  5. 예를 들어 2000년대 초반 제작된 명성황후(드라마)에서는 원세개라고 나오지만 정작 당시 학생들은 원세개가 위안스카이인 줄 모르는 이들도 많았다.
  6. 역사 교과서에서는 높은 확률로 (강유위/캉유웨이 또는) 위안스카이의 이름이 중국어 표기법으로 소개되는 최초의 중국어 인명이다.
  7. 의화단 사건 당시 열강에 싸웠던 장수들 대부분이 중앙정부에 있언 인물들이었고, 중앙정부에 있던 인사들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때문에 이를 계기로 위안스카이가 권력에 한층더 다가간건 당연한일.
  8.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총리아문이 폐지되고 그 대체 기구로 외무부 신설.
  9. 순친왕은 그를 애초부터 못마땅했었고 심지어 죽이려는 계획까지 했었다.
  10. 청조가 이런 태도를 보인 까닭은 북양군벌 때문이었다. 당시 북양군은 신군(신건육군=신식육군)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는데, 그들을 지휘하는 단기서가 위안스카이의 직속 부하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북양군을 이끌어 진압시킬려면 그 실권자인 위안스카이가 필요했다.
  11. 오늘날 중국 국민당의 전신. 위안스카이가 이 국민당을 강제 해산시켰지만 1919년 쑨원이 다시 만든다.
  12. 쑹자오런은 당시 31살의 젊은 나이로 국무총리에 임명되기 일보직전이었다. 당시 그가 이끌던 국민당의 인기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위안스카이에게 있어서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13. 당시 어용지식인들, 언론들 총동원해가면서 '제정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논리를 엄청나게 선전했다.(...)
  14. 반면 둘째 아들 위안커원은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감우'라는 시를 지어 아버지가 황제 자리를 탐내는 것에 대해 경고를 내비쳤다.
  15. 일본 외무성이 중국에서 발행했던 신문으로 일본의 입장을 함께 보여주는 신문이었다.
  16. 위안커딩의 누이동생의 회고에 따르면 일이 밝혀진 뒤 오빠(위안커딩)가 아버지한테 허리띠로 맞았다고 한다.
  17. 당시 독일은 이곳에 독일인들이 마실 맥주를 만들 공장 시설을 지어놨었는데. 이로 인해 일본이 그 시설과 기술을 이어받아 일본의 맥주가 발달됐고, 전후에 그대로 남아 지금도 중국 칭다오 피쥬는 유명하다.
  18. 이 중화혁명당이 바로 오늘날의 중국 국민당의 시조다.
  19. 기녀(妓女) 출신이었다.
  20. 양씨(楊氏)의 계집종 출신이었다.
  21. 안동 김씨라고 하며 위안스카이가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왔다가 첩으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22. 이씨와 오씨는 김씨의 몸종 출신으로 위안스카이가 김씨를 맞아들인 후 첩으로 삼았다고 한다.
  23. 김씨의 몸종 이씨와는 별개의 인물이다.
  24. 김씨의 몸종 출신 이씨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