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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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와 설명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마르코 복음서 9:42~48)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1]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음부)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카 복음서 16장)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역겨운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죽음[2]이다.” (요한 묵시록 21:8)

기독교의 사후세계 중 하나. 하느님(예수)에 의해 구원받지 못한 모든 영혼들이 가는 곳이다. 일단 죄를 지은 사람들과 비기독교인이 얄짤없이 모두 지옥에 가는지는 교리적으로 모든 교단에서 의견이 통합된 것은 아니고 교파간에 해석이 분분하다.[3][4] "구원"에 대한 표현이 성경에 상당히 형이상학적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교리적 분석이 분분한데, 예를 들어 "착한 이교도[5]"나 "(자아가 발달하기 이전의) 유아"들의 경우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분분한 의견이 있다. 이를 지옥의 가장자리인 림보에 거주한다고 하는 설이 있었고[6] 근현대에는(자기 탓 없이) 복음을 듣고 받아들일 기회가 없었다면 그 사람의 구원 여부는 인간이 판단할 수 없으며 하느님만이 아신다는 교리가 극단적인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론과 대립하는 등 논란과 무수한 사람들, 신학자들의 설왕설래가 많은 장소. 비기독교인들 및 일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결론이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지옥에 가게 되는 기준은 성경과 교회 전통에 따라 비교적 명확히 규정되어 있는 편이나 (마지막 순간에 회개했을지 아닐지 모르는)특정인이 지옥에 갔다고 단정하기는 인간 입장에서 단정지어 확신하기 힘들다는 의미.

2 예수천국 불신지옥

개신교의 캐치프레이즈(??)라고 할 수 있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성경에서 "모두가 죄를 범하였으니 다 죽을 수 밖에 없다."와 "믿지 않는 자는 단죄받을 것이다"라는 말, 그리고 "회개하고 구원을 받지 않은 자는 모두 죄인이다"를 이용해 유추해낸 것이다. 즉, 무척 간단하고 나름 성경적 근거가 있는 말이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나타내는 말은 쓰여있지 않으며, 교파간에 신학적으로도 논쟁이 많은 교리이다.

성경에 쓰여있는 것은 어떻게 하면 사람과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구원을 받는가에 관한 것이지 어떠어떠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가 아니기 때문에(물론 그렇다고 악인에 대한 단죄나 지옥 형벌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어찌어찌한 이유로 기독교를 접하지 못하고 죽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지옥에 가냐고 묻게 된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거의 "불완전한 인간인 우리는 정확히 모른다. 오직 전능하신 주님만이 알고 계신다"로 나오는 경우가 거의 대다수이다.[7]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의외로 이 문제는 신학자들과 신자들 사이에서 상당히 좀 골칫거리인데, 한 신학자는 "당신의 할머니는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지옥에 갈 것이라고 믿는다면,(또는 믿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당신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할머니의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심리적으로 할머니로부터 거리를 둘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한 고통 가운데 있다고 믿으면서도 당신은 일상을 그냥 살아갈 수 있겠는가? 지옥을 믿는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그가 사랑하는 비기독교인의 죽음에 맞닥뜨리고 있지만, 놀랍게도 이 문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아무도 이런 점에 관해서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일종의 침묵의 공모가 존재한다."고 언급한다. 이는 위에서도 말했지만 "모른다."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기 때문.

개신교와 달리 가톨릭에서는 이교도 문제에 대해 "자기의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의 탓 없이 하느님을 아직 명백히 인정하지는 못할지라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올바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섭리가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치 않으신다."고 교회헌장에서 밝히고 있다. 정확히는 대죄를 저질렀지만 용서받았거나, 소죄를 저지른 자들은 연옥(煉獄)에 가서 죄를 씻은 후, 천국에 간다고 한다.[8][9]

반면 개신교는 오직 '믿음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연옥의 존재를 부정한다.

정교회에서는 연옥의 존재는 부정하지만,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바친다. 천국에 들어간 영혼은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므로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필요가 없고, 지옥에 떨어진 영혼은 영원히 하느님과 단절된 것이므로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 즉 천주교와 같이 연옥의 개념을 구체화하여 체계적인 교리로 가르치지는 않더라도 그러한 중간 상태를 인정한다는 것으로, 애초에 중간 상태를 완전히 부정하는 개신교와는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3 보복의 장소?

기독교가 한때 박해받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파된 종교라서 그런지, 기독교 계통의 지옥을 묘사한 그림은 거의 공통적으로 천국이 같이 묘사되고 있으며, 한결같이 천국에 있는 자들이 질서정연하게 지옥에서 괴로움에 신음하는 자들을 내려다 보고 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온 악한 부자와 거지 라자로#s-2가 각각 엄청나게 먼 거리인 지옥과 천국에 있었으면서도 서로를 볼 수 있었다는 묘사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고, 현세에서 악인들에게 시달리고 고통받던 신자들에게 위로감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글귀가 2세기경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쓴 지옥에 관한 글.

그 날의 광경이 얼마나 장엄할까! 난 어떤 장면에서 처음 웃음을 터트리고 박수를 치게 될까나?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지던 왕들은 그들이 올라가는 걸 지켜봤다는 그들 신들의 왕 유피테르와 함께 어두운 심연 속에 빠져 고통의 신음을 하고 있겠지. 주님의 이름을 박해한 통치자들이 용감한 기독교도들을 죽이려고 지른 불보다 훨씬 더 맹렬한 불꽃 속에서 녹아가고 있을 테지. 불구덩이에 함께 빠져 제자들 앞에서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는 현명하다던 철학자들, 세계는 하느님의 관심 밖에 있다는 그들의 주장을 추종한 자들, 애초에 영혼이란 없다고 믿거나 아님 자신들의 영혼은 본래 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확신했던 자들은 어떻게 될까?

유피테르의 아들 라다만튀스나 미노스의 심판대 앞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벌벌 떠는 시인들의 모습, 놀랍지 않은가? 자신들의 멜로 드라마 속에서 통곡하는 비극 배우들의 목소리는 어쨌든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불 속에서 펄쩍 뛰는 희극 배우들이야말로 볼만할 것이다! 전차를 몰던 유명한 전사는 그의 불바퀴 위에서 구워질 것이고, 운동 선수들은 경기장에서가 아니라 불속에서 바퀴처럼 굴러갈 것이며… 이것들 모두 서커스장이나 어떤 극장, 운동경기장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신나는 일들일 거야!

근데 사실 이런 생각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이라는게 성경의 가르침이다.(...) 기독교 신자의 기본 자세는 악인 누구누구가 지옥에 가서 고소하다 낄낄같은게 아닌, 악인의 회개를 항상 기도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생전에 뉘우쳐서 지옥에 가지 말기를 바래야 하기 때문. 물론 현실은 시궁창 애초에 로마제국 시대의 박해받는 기독교인 및 순교에 감동해서 개종했고, 방어적 호교론의 달인에다 나중에 몬타누스파 이단에 빠질 정도로 성격이 불같았던 테르툴리아누스의 성격을 감안해서(...) 이해해야 하겠다.

4 비판

유럽 쪽 본토의 기독교에선 이미 19세기부터[10] 반종교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옥 개념 자체에 대한 지극히 비판적인 시각이 팽배했다.

꼬마 아이가 붉게 달군 가마솥 안에 있다. 아이가 밖으로 나오려고 질러대는 비명소리를 들어 보고, 아이가 불 속에서 어떻게 발광하며 몸을 비비 꼬는지 바라보라. 아이는 솥뚜껑에 머리를 부딪치고 바닥에서 뜨거워 그 작은 발을 동동 구른다.

사실 하느님은 이 어린 아이에게 아주 자비로우셨던 거다. 하느님께선 이 세상에서 아이가 점점 더 사악해지고 결코 뉘우치지도 않을 거란 사실을 아셨고, 그대로 두었다가는 지옥에서 아이가 더욱 심한 형벌을 받을 게 뻔하기에 자비를 베풀어 미리 어릴 때 세상에서 아이를 불러 온 것이었다.

- 조지프 퍼니스 著, 지옥의 풍경(The Sight of Hell)

이 글을 읽어보면 당연히 저 글은 기독교를 까는 글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상기한 책인 지옥의 풍경은 아이들에게 선물해 주는 내용으로, 비꼬는 게 아니라 저 위의 주장이 당당히 옳다고 여기는 내용이다.

당연히 종교의 비합리성을 깨달은 대중에게 이런 생각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어느 정도 기독교 쇠퇴에 영향을 주었다. 신도의 결속력을 다지던 지옥 개념이 이성의 시대에는 오히려 발목을 잡은 셈. 결국 이는 기독교에서 지옥에 대해 좀 더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5 성경에서 등장하는 지옥

사실 구약성경만 보면 저승 비슷한 것은 있으나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적 지옥에 딱 들어맞는 서술은 없다. 구약 시대 초기 유대교의 개념은 '을 믿고 가르침을 잘 따르면 자손이 창대하고 대대로 번창하며, 신을 버리면 자손은 고자가 되고, 아니라고는 못하겠군 그 세대는 여려가지 악재나 병고로 고통받으며, 설사 자손이 이어져도 대대로 잉여인간만 들끓는다'는 전형적인 기복신앙이었다. 스올 등 사후에 대한 관념도 영이 머무는 그저 비참하고 어두운 장소로만 여겼고 초기엔 구약성경에서도 묘사가 상당히 불확실했다. 하지만 이후 기원전 6세기 경부터 유대교 교리에서도 영생(구원받은 사람의 영원한 삶)의 개념이 발전되기 시작했고, 스올에서도 죄인들이 사후에 고통받으며 머무는 곳의인들이 사후에 편안하게 머무는 곳으로 갈려진다고 보는 성경 해석이 늘어났다.[11] 이후 유대교의 사후세계 교리는 기독교 시대로 접어들면서 가톨릭의 고성소 교리[12]로 발전한다.

그러다 신약 시대에 와서 비로소 지옥의 성서적 개념이 명확해지기 시작한다. 복음서의 설명에서 주로 지옥이 언급되는데, 루카 복음서 16장 19~31절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s-2에 대한 내용에서 지옥 불구경이 나온다. 이 구절에서는 선량한 거지인 라자로가 천국에 가서, 사악한 어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을 아브라함과 함께 보는 장면이 있다. 부자 왈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제게 자비를 베울어 라자로의 손가락 끝에 을 찍어 제게 보내 주십시오" 아브라함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거부한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마르코 복음서 9장에도 불도 영원히 꺼지지 않고 구더기들도 사라지지 않는 불지옥이 언급되며, 또한 악인이나 이교도들이 죽은 후에 음부(지옥)[13]에 떨어져 이를 갈며 후회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에서 수차례 언급된다.

예수도 복음서에서 천국보다 지옥에 대한 경고와 이야기를 더 많이 언급했다고 한다. 참고로 예수가 지옥을 설명하는데 설명한 힌놈 계곡 게헨나는 당시의 일종의 쓰레기 소각장이었는데, 1년 365일 동물들의 시체와 쓰레기들을 계속해서 소각해야 해서 불길이 꺼지지 않았으며, 과거에는 아이를 희생하는 우상 숭배행위가 벌어지는 등 대단히 불결한 곳이었다. 복음서에서는 여기에 비유해서 지옥의 끔찍함을 설명했으며, 이후 초대 교회 시기와 교부 시대를 거쳐 점차 지옥의 개념이 신학적으로 확립되어 갔다.

6 현대의 지옥 교리

15. 예수께서는 끝까지 믿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가게 되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고 있는(마태오 복음서 5,22. 마르코 복음서 9장 43~48) 지옥(게헨나)에 대해 자주 말씀하신다. 그 곳에서는 영혼과 육신이 함께 멸망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천사들을 파견할 것이고 그들은 (중략) 범법을 일삼는 자들을 그의 나라에서 끌어모아 그들을 불가마에 던질 것입니다.(마태오 복음서 13, 41~42)하고 엄숙히 예고하시며,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영원한 불 속으로 가라"(마태 25,41)하고 단죄하실 것이다.

18.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시지 않는다. 자유 의사로 하느님께 반항하고(대죄를 짓고) 끝까지 그것을 고집함으로써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 미사 전례와 신자들의 일상 기도를 통해 교회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2베드 3,9) 바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빈다. - 가톨릭 교회 교리서 중.

지옥에서 어떤 고통을 당하는가?

저주받은 이들은 지옥에서 말로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고통을 겪는다. 첫째로, 그들은 결코 하느님을 볼 수 없고 영원히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 둘째로 그들은 불의 고통을 당하고, 영원히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움을 당하며, 악마들의 무리 속에서 살아간다. - 독일 가톨릭교회 교리서 중.

그들은 하느님과 멀어진 상태에서 악마들과 함께 영원한 고통과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빛은 그들에게 불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벌하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원하여 받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을 불경하게 하여 행복한 낙원에서 하느님과 사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 정교회 교리서 중.
사악한 자들의 영혼은 지옥에 던져진다. 거기서 그들은 고통과 어두움 가운데서 대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눅 16 :23~24, 행 1 : 25, 유다서 1 :6-7, 벧전 3: 19). - 장로교 헌법 요리(교리)문답 32장 '사람의 사후 상태와 부활에 관하여' 중.

과거에는 지옥을 악마들이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을 온갖 이상한 방식으로 고문하고 엄청나게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받는 곳으로 보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유럽의 오래된 성당의 벽화들을 보면 이런 관점의 성화들과 벽화들이 수두룩하다. 당시 나름 생각할 수 있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을 죄다 콜라보레이션해서 넣었기 때문에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의 지옥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현재 가톨릭의 교리문답서에 의하면, 지옥의 실제적 존재와 엄청난 고통을 인정하지만 지옥의 고통에 관해서는 "하느님과의 영원한 결별" + 지옥에서의 형언하기 힘든 실제적 고통이 지옥 형벌의 핵심으로, 지옥 '묘사'의 세부적인 사항에 관해서는 "구체적이라기보다는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옥이란 간단히 말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따라서 신의 보호가 완전히 사라짐으로 인해 형언하기 힘든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절망적인 영원함 속에 방치되는 상태(이자 영적 공간)"이다. 하느님이란 완전하고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존재이며, 지옥이란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그러한 무한한 사랑과 자비가 미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하느님이 자비롭고 인간을 사랑해도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최후의 최후까지 하느님이 싫어서 거부하고 도망간 자들이기 때문. 그러니까, 하느님이 불신자들을 불구덩이에 집어던지는 일은 절대로 없다. 불신자들이 하느님이 싫어서 사후에 도달한 곳이 불구덩이로 묘사되는 고통과 절망만이 가득한 곳일 뿐.

이는 태초에 인간의 선택에 대한 존중 즉 자유의지를 인정하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신은 사랑하기에 인간을 자기멋대로 취급할수있는 인형으로 다룰수가 없고 그리하여 인간 스스로의 선택으로 사후가 나눠지는것이다. 이렇게 신이 인간을 너무나 사랑해서 인간의 몸으로 내려와 모욕과 죽음을 겪으면서까지 죄에서 벗어나 살길을 내놓았는데 일말의 관심도 시도마저 거부한다면 어쩔수가 없는 것.

때문에 2007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오늘날 신자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은 죄를 용서받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지옥불에 떨어질 것을 잊고 산다"라고 발언했을 때, 바티칸 보도국에서 곧바로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교황이 사람들의 이해가 빠르도록 교구 사제처럼 말한 것이며,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아니다"라는 보도자료를 발표했던 것이다. 또한, 특정한 인간이 천국연옥, 지옥 중 어디로 가게 될지는 하느님의 영역이기에 인간은 함부로 판단할 수 없으며(때문에 가톨릭 교회에서는 천국으로 가는 가장 확실하다고 판단된 길을 지켜야 할 교리로 제시해주는 것) 인간은 그저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 가톨릭의 변화는 지옥의 형벌이나 고통에 관해서 해석이 변화된 것일 뿐, 어디까지나 지옥의 실제와 지옥에서의 고통이(성경에 묘사된 것이 상징적이든 실제적이든 간에)감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는 것, 그리고 대죄를 지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기본 교리는 가톨릭에서도 단 한번도 부인한 적이 없다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또 파티마의 성모 발현이나 파우스티나 성녀의 예수님 자비의 환시등 현대 가톨릭 교회애서 인준된 성모 발현 및 기적 사례에서도 마귀들과 악인들, 불의 고통이 가득한 불지옥의 환시가 상세히 보여지고 가톨릭 교회의 믿을 만하다는 인정을 받은 적이 있으며, 아직도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가톨릭 신자들 중엔 기존의 지옥 가치관을 고수하는 신자들도 상당히 많다. 위의 베네딕토 16세의 지옥불 언급도 교리에 어긋나거나 잘못된 말은 아니라는 것.

기독교의 지옥고통에 대한 종교학대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기독교에서 지옥의 형벌을 가장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가톨릭에서는 지옥의 고통을 정신적인 고통인 '상실의 형벌'(이를 '실고'라고 일컫는다)과 물질적인 고통인 '감각의 형벌'(이를 '각고'라고 한다)이라는 두 고통으로 정의해 왔다. 지옥에 있는 저주받은 죄인들은 하느님을 바라보며 함께 있는 행복과 그 안에서 편안함을 발견하는 영혼의 능력도 상실하게 되며, 그와 동시에 모든 초자연적인 혜택(은총)도 받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 극도의 공허가 지옥에 떨어진 자들에게 엄습하며, 공허감은 헤아릴 수 없는 고민을 불러 일으킨다고 한다. 즉 쉽게말해 지옥에 떨어진 영혼은 끝없는 스스로의 양심의 가책, 그리고 정신적인 고통속에 몸부림치게 된다고 한다.

또한 감각적인 형벌(각고)에 대해서는, 불에 의한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 신학자들과 성경의 주요 논지인데, 최근엔 많은 사람들이 이 불의 고통이 일종의 영혼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영적인 불', 또는 상징적인 것이라고 보는 추세이긴 하다. 또한 동일한 형벌을 당하며 고통받는 자들과, 또 악마들과 살게 됨으로서 고통이 더욱 처절하게 되는 등의 형벌이 가해진다고 본다.

또한, 요즘 인터넷 등에 자주 돌아다니는 지옥을 본다는(사적인 지옥간증 등) 체험은 성경적, 교회적으로 검증되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당연히 그릇된 것이다.

개신교도 마찬가지라 지옥이라는 곳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탄이나 악마가 사람들을 불로 괴롭히는 곳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이것도 개신교 특성상 교파에 따라서 의견이 통일되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에 묘사된 것이 실제적인 지옥 풍경이라고 인정하는 교파도 대단히 많다. 이에 관해서도 사탄이 지옥에서 같이 벌을 받는데 악마들이 죄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주장도 있는 반면, 악마들이 최후의 심판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징벌에 처해질 때까지는 지옥에서도 죄인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고 보는 신자들도 있어서 갑론을박이 좀 있다. 그놈의 성경 자유해석이 키배의 만악의 근원.

지옥을 포함한 종말론 전체에 대해서는 성공회 신학자 톰 라이트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가 훌륭한 서적이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읽어 보는 것도 좋다. 종파에 관계없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으며 파격적인 주장보다는 전통적인 논증을 통해 새로운 지옥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단순히 설정놀음이 아니라 현실과 정치경제적 문제에서도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논하고 있다. [1]

  • C.S.루이스의 '고통의 문제' 역시 100년 가까이 된 책이지만 숙독해 볼 만하다. [2]
  • 보수 복음주의적 개신교 입장에서의 천국 및 지옥관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면 에드워드 도넬리의 《성경이 말하는 천국과 지옥》이나 크리스토퍼 모간,로버트 피터슨이 쓴 <지옥론>을 참고하는 것도 좋다.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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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로댕이 만든 '지옥의 문'. 윗부분의 턱을 손으로 받치고 앉아있는 모습의 조각이 바로 로댕의 대표작인 '생각하는 사람'이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지옥의 입구에 있는 문에 이러한 글귀가 적혀 있다고 쓰고 있다.

나를 지나는 사람은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는 사람은 영원한 비탄으로,
나를 지나는 사람은 망자에 이른다.
정의는 지고하신 주를 움직이시어,
신의 권능과 최고의 지성과
원초의 사랑으로 나를 만들었다.
나보다 앞서는 피조물이란
영원한 것 뿐이며 나 영원히 서 있으리.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14]

"Per me si va ne la citta dolente,
per me si va ne l'etterno dolore,
per me si va tra la perduta gente.
Giustizia mosse il mio alto fattore;
fecemi la divina podestate,
la somma sapienza e 'l primo amore.
Dinanzi a me non fuor cose create
se non etterne, e io etterno duro.
Lasciate ogni speranza, voi ch'entrate."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현대의 기독교 신자들은 천국보다 지옥을 훨씬 잘 안다. 천국에 뭐가 있는지를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뭇거리지만, 지옥에 대해서 물어보면 술술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 비해서 지옥에 대한 성경의 서술이 상대적으로 더 많고, 논의 또한 훨씬 더 구체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으며, 천국에 뭐가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오늘날까지도 상당히 추상적인 선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근대와 현대의 기독교가 천국에 대한 약속보다는 지옥에 대한 공포를 불어넣는 방식으로 포교를 했다는 증거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오늘날의 기독교 신자들 역시 기독교가 정확히 무엇을 약속하는지는 알지 못하고 단지 지옥이 무서워서 교회로 피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현대의 기독교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 중 하나다.

사실 그렇게 이상한 현상은 아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람들은 좀 더 자극적이고 두려운 기억을 머리에 더 잘 각인하게 된다. 애초에 예수가 가르치던 사상들이 지옥에 중점을 맞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시선이 쏠려버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요한 계시록의 경우도 세계의 멸망보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서 쓰여졌다는 것을 한 번만 읽어봐도 알 수 있게 되지만 (물론 내용이 난해해서 정확한 뜻은 모를테지만) 정작 요한 계시록이 지금 어떤 책으로 유명한 지를 생각해보자. 이런 기적이나 멸망에 집착하는 모습은 모든 종교에서 볼 수 있는 당연한 것이며 이것이 굳이 기독교의 특징이라고 보기엔 거시기한 편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도 그의 말이 틀려서가 아닌 자신들의 생각과는 다른 너무나도 평범한 모습과 기득권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여서였다는 것도 생각해보자. 결국 사람은 기본적으로 말의 속뜻이나 의미보다는 겉에 보이는 신비함과 두려움에 좀 더 집착한다는 것으로 이런 문제는 종교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퍼져있는 선입견이라 반성이 필요하다.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언을 인용해서 '하느님은 창조론에 의심을 가지는 놈들을 위한 지옥을 세계창조 이전에 만드셨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저서인 고백록에 이 발언을 써 놓긴 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진지하게 이를 주장한 것은 절대 아니고 '이런 식으로 농담으로 대답하지 말고, 창조론에 대해 제대로 대답해야 한다'라는 표현이다.

8 같이보기

천국/기독교
낙원/기독교
요한 묵시록
게헨나
연옥
예수천국 불신지옥
extra Ecclesiam nulla salus

  1. Abraham's bosom. 전통적인 유대교의 천국관이자 기독교에서는 낙원/기독교(천국)를 상징하는 말로서 사용된 문구이다.
  2. 왜 '두 번째' 죽음이냐 하면, 죄인이 이승에서 한번 죽고 최후의 심판날에 부활한 뒤 다시 불지옥의 영원한 멸망 형벌로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영원한 지옥 형벌을 둘째 죽음으로 묘사한 것.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두 번째 죽음의 형벌을 면한다(=천국의 구성원이 된다)는 구절이 요한 묵시록에 적혀 있다.
  3. 성경 복음서에 보면 예수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하였으나, 이것이 교회에 다니는 모든 기독교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저 앞의 구절이 "나(예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하고 있기 때문. 마찬가지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고 무조건 지옥에 간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교회에 다니지않고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도 상당히 많고, 또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으나 마음으로 알게모르게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된 삶을 살지도 모르기 때문. 또 평생 죄인으로 살았던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죽기 전에 혹시 회개했을지 본인과 기독교의 하느님을 제외하면 다른 이들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4. 이 점 때문에 예를 들어 현대 가톨릭에서는 이전에는 자살자는 무조건 지옥에 가는 죄인이라며 장례미사도 안해주던 관습을 벗고 자살자에 대한 미사나 기도를 해주는 편이다.
  5. 대부분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죽어 세례를 받지 못한 선한 사람들, 또는 충무공 이순신마냥 살아 생전 선량하게 살았으면서 기독교가 뭔지조차 모르고 죽은 사람들.
  6. 가톨릭에서는, 이중 구약시대 의인들이 거하는 고성소(=스올) 림보는 전승을 통해 교리로 인정했고, 유아 림보는 교부들과 신학자들끼리도 갑론을박이 많았던 가설이라 믿든 안믿든 상관없는 상태였다가, 최근 폐기되었다.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유아는 천국으로 간다는 것. 개신교는 교단이 다양한 만큼 교단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7. 성경을 '구원에 도달하는 가이드북'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 가이드북을 본 사람은 이미 기독교와 믿음에 대해 알고있다고 전제할 수 있고, 이때의 선택지는 믿느냐와 믿지 않느냐로 갈린다. 어디까지나 가이드북은 가이드북을 읽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쓸데없는 사족은 서술하지 않는것이 책을 읽는 입장에서 편하기 때문
  8. 여기서 핵심은 '자기의 탓 없이'라는 어구인데 이로 미루어 볼 때 가톨릭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구원의 길을 인정하는 것(종교다원주의)이 절대 아님을 잘 알 수가 있다. 이건 많이들 오해하는 건데 단순히 타종교인이나 무신론자가 착하게만 산다고 구원이 열려있다는 주장이 아니다. 만약에 저렇다면 개신교 쪽에서 그렇게도 까대는 행위구원론이 된다. 기본적으로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에 대해 알지 못하는 비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은총에 따라 양심을 갖고 올바르게 살아간다면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의해 구원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추측일 뿐이다. 일단 가톨릭의 기본적인 입장은 '구원은 하느님이 주관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은총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것을 완벽하게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확실히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의 입장에 따르면 본인과 타인의 구원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믿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선교에 동참하고, 세상에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펼 수 있게 노력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과 이미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등이 있다.
  9. 소죄라고 해도, 통념상 어지간히 선하게 살지 않았다면 주일미사에 거의 빠진 적이 없는 신자라도 천국에 직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누군가 선종했을 경우, 연옥에 갔을 것이라는 전제를 기본으로 깔고 연도를 한다. 한편, 지옥에 갔다고 해도 그 영혼을 위해 바치는 기도의 양이 매우 많다면, 연옥으로 끌어올려질 수 있다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주류 신학에서 인정받거나 교리로 선포된 내용이 아니므로 주의할 것.
  10. 원래는 교부철학자인 오리게네스 때부터 만인 구원론으로 지옥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11. 물론 다 그런건 아니라서, 사두가이 파처럼 여전히 토라만 인정하고 사후세계를 부정하는 종파들도 있었다. 이후 소멸했지만.
  12. 유아 림보가 아닌 구약 시대의 의인들이 머물렀다 천국으로 올라간 곳, 가톨릭 신학에서는 유대교의 사후세계=스올=고성소로 본다.
  13. 한자가 陰部라, 여성의 생식기관을 일컫는 단어와 한자 철자가 똑같다. 복음서에서 묘사되는 음부는 스올과 동일시되며, 예수가 악인들이 가는 유대교의 저승 개념 = 지옥으로 사람들에게 설명한 것이라 본다.
  14. 원문이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어인데다, 국내에는 일본어 중역이 가장 널리 퍼져있다. 또한 이 글귀는 로뎅의 지옥의 문에도 쓰여 있는 유명한 글귀이다. 그리고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건 문이 1인칭을 사용해가면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번역과정에서 아차 실수하면 말이 꼬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