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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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3영걸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의 초상화.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초상.[1]
오다 가문의 문장. 모과문장으로 불린다.[2]

1 개요

이름織田(おだ)

信長(のぶなが)

[3]
한국명오다 노부나가
생몰년1534년 6월 23일 ~ 1582년 6월 21일
국적일본
출신지오와리(尾張) 쇼바타 성(勝幡城)
사망지야마시로(山城) 혼노지(本能寺)

제육천마왕(第六天魔王 だいろくてんまおう).[4][5]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大名). (정치인, 군인)

2006년일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조사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반대자를 몰살하는 일도 서슴치 않고 오랫동안 섬겨온 신하도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면 가차없이 내치는 잔혹한 일면이 있으면서도 시대를 앞서가는 혁신적인 전략과 정책으로 전국시대를 끝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로 꼽힌다.

오다 노부나가가 재평가된 것은 메이지 시대부터이며, 에도 시대에는 잔혹한 인물로 평가받고 인기도 없었다고 한다. 가부키에서는 오히려 아케치 미츠히데가 더 인기있는 주인공이었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

한 줄 분량으로 설명하자면 전국시대 종식의 기반을 닦은 사람으로 근세 이후의 일본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일본 전국시대를 논할 때 좋든 싫든 이 사람을 빼고 이 시대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6]

2 생애

2.1 초년기

1534년 5월 12일(양력 6월 23일). 오와리(尾張. 지금의 아이치 현 서부)의 다이묘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의 둘째아들로 태어나,[7] 2살 때 나고야 성(名古野城)[8]의 성주가 되었다. 아명은 킷보시(吉法師). 참고로 노부나가의 집안 오다 단죠노츄(弾正忠)로, 오와리 지방의 슈고인 시바(斯波) 가문의 신하로, 오와리의 하 4군의 슈고다이(守護代)인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또는 키요스 오다 가문)의 가신인 키요스 삼봉행의 한가문이었다. 노부나가가 탄생했을 즈음의 오다 가문은 오와리 슈고인 시바 가를 괴뢰로 만들고 정권을 잡은 하극상의 센고쿠 다이묘였으며, 정통성이 부족한 하극상 세력이 그러하듯이 내부 분열로 인해 아버지 노부히데가 속한 오다 단죠노츄 가,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 등 3가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양아치로 소문이 나는 한편, 담이 크고 신분차별 없이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납치된 마츠다이라 타케치요(松平竹千代, 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어린시절을 함께 보냈다.[9] 1548년에는 오다 노부히데와 사이토 도산(斎藤道三)간 정략결혼에 합의, 그의 딸 노히메(濃姫)와 혼례를 올린다. 노부히데 사후 도산은 노부나가를 처음 만나게 되는데 이때 그 그릇의 크기를 눈치챈다. 그는 사면초가인 노부나가의 오와리를 집어삼키기 보다 전적으로 그를 지원하기로 한다.

2.2 청년기

부친이 사망하자 평소 노부나가의 행실을 못마땅해 하던[10] 하야시 히데사다, 하야시 미치토모, 시바타 가츠이에(柴田勝家)는 급기야 총명하기로 소문난 노부나가의 친동생 노부유키[11]를 옹립하려 했다. 이에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 모리 요시나리 등을 끌어들여 대립한다.

1556년 4월 장인인 사이토 도산이 장남인 사이토 요시타츠(斎藤義龍)와의 싸움으로 사망한다. 사실 이 때, 노부나가는 도산에게 원군을 보냈으나 한 발 늦었다고 한다. 노부유키 파는 노부나가가 도산의 지지를 잃게 된 것을 호기로 여겨 같은 해 8월 24일 군사를 일으켜 노부나가와 전투를 벌이지만 패배. 스에모리성(末森城)에 틀어박혀 있었으나, 어머니 도타고젠(土田御前)[12]의 중재로 노부유키와 카츠이에 등을 사면한다.

1557년 오와리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오다 노부토모(織田信友)의 지지로 노부유키가 다시금 모반을 꾀하나 카츠이에의 밀고로 모반이 발각되어 노부유키는 살해당한다. 이후 오와리의 이름뿐인 지배자로 노부토모에게 이용당하고 있던 시바 요시무네(斯波義統)가 노부토모의 음모를 노부나가에게 밀고하였고, 분노한 노부토모가 시바 요시무네를 살해하자 노부나가가 주가 살해의 죄를 물어 다시 노부토모를 살해하여 오와리를 통일한다. 이로서 방계혈통이던 노부나가가 오다 가의 당주가 되었다.

가문의 주인이 된 후 스루가(駿河), 미카와(三河), 도토미(遠江)[13] 동해 3국의 태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교토로 상경을 위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오와리를 침공한다. 당시 노부나가는 삼천의 군대를 이끌고 전국시대 일본 3대 기습이라 일컬어지는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군을 기습하여 격파, 결국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벤다.

이후에 처남 사이토 타츠오키(斎藤竜興)의 사이토 가문을 격파, 미노(美濃)를 수중에 넣고, 당시 교토로 가는 통로인 오미(近江)의 중견영주였던 아자이 가타마사(浅井賢政)에게 여동생 오이치(お市)를 주고 상경을 개시, [14] 미요시 요시츠구에게 살해당한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아키오미 방면으로 도망쳐 오자 그를 옹립하였으며 그를 새로운 쇼군으로 만들기 위해 상락을 개시한다.

2.3 키나이 평정과 노부나가 포위망

당시 에이로쿠의 변으로 요시테루를 살해하고 키나이를 지배하던 미요시 가문은 미요시 산닌슈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반목과 전쟁으로 혼란한 상태였다. 이 전쟁에서 상당히 열세에 놓여있던 히사히데는 상락을 목표로 하는 노부나가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노부나가도 이에 응하여 본격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쿄토로 향하였다. 산닌슈 세력은 히사히데를 견제함과 동시에 롯카쿠 요시카타에게도 동맹을 요청하며 노부나가의 상락에 대비하였지만 노부나가의 군세 앞에 맥없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결국 롯카쿠 가문과 키나이 미요시 가문은 노부나가에게 빼앗기게 되었으며 노부나가는 일본의 중앙이자 수도나 다름없는 키나이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리고 본래 목표였던 요시아키의 쇼군 취임도 성공함에 따라 오다 가문은 옛 토카이의 슈고다이 시절 쯤은 우습게 보일 정도로 성장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한편 미요시 가문의 본거지인 아와로 쫓겨난 산닌슈는 본격적으로 오다 가문과 전쟁을 시작하였다. 1569년, 산닌슈는 요시아키가 거처하던 쿄토 로쿠죠 혼코쿠지(京都六条本圀寺)를 습격하였으나 호소카와 후지타카에게 격파당하였다. 1570년이 되자 산닌슈는 7월 21일에 다시 한 번 셋츠로 상륙, 옛날 부터 깊은 인연인 이시야마 혼간지와 협력하여 9월 12일에 총 공격을 가하였다.[15] 이번 공격은 꽤나 성과를 거두어 미요시 가문은 카나이의 영토를 어느 정도 회복하는 것에 성공하지만 얼마 안가 오다 측과 강화를 맺은 후 아와로 귀환하였다.

이후 노부나가는 사사건건 대립 했던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朝倉) 가문을 멸하기 위해서 에치젠에 출병하지만, 아사쿠라가 와의 동맹이었던 아자이 가가 신의를 저버리지 못하고 아자이 나가마사는 노부나가를 배신했다.(이 때의 가네가사키 후퇴전에서 오다가의 부장이었던 키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郎)[16]가 후위를 자임하고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여 오다 가에서 돋보이는 존재가 되었다.[17]

교토에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노부나가는 아자이 가와 아사쿠라가를 아네가와에서 깨뜨렸으나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적대하게 된다. 그로 인해 타케다(武田), 아사쿠라, 엔랴쿠지(延暦寺)[18], 이시야마 혼간지, 아자이, 미요시 요시츠구, 산닌슈 등으로 이루어진 노부나가 포위망이 결성되었고 노부나가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키나이의 미요시 일족은 혈전을 벌이며 오다 가문과 싸워나갔으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지병으로 인한 사망과 맞물려[19] 포위망은 급속히 붕괴하였으며 요시아키는 모리 테루모토에 의지해 츄고쿠로 달아났다. 키나이 방면의 주력이었던 산닌슈 일파는 그 세력이 전멸하였으며 요시츠구는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였으나 곧 쇼군 보호혐의로 자결하게 되었다. 키나이 미요시 가문 최후의 생존자인 카와치미요시 야스나가와 셋츠의 혼간지 켄뇨는 계속해서 노부나가에게 저항하였으나 야스나가가 1575년 4월 8일에 항복, 켄뇨는 10월에 강화를 맺게 되면서 키나이는 다시 한 번 노부나가의 손에 떨어졌다.

2.4 이시야마 합전과 통일전쟁의 시작

키나이를 평정한 다음 노부나가의 목표는 달아난 요시아키가 의탁한 테루모토였다. 이에 노부나가는 아와지아타기 노부야스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야스나가에게 회유를 명령했으며 혼간지가 준동하자 1576년 5월에 혼간지를 공격했다.

이어서 노부나가에게 압박을 가하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마저 급사해 노부나가를 막을 수단은 사라졌다.[20]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내쫓아 무로마치 시대의 막을 내리고 노부나가는 자신에 반대하는 영주들을 차례로 멸하여 천하포무(天下布武)의 기치 아래 맹위를 떨친다.

무로마치 시대에 유행했던 코우와카마이(幸若舞) 중 하나인 아츠모리(敦盛)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人間[21][22]五十年、下天の内をくらぶれば、夢幻の如くなり (인간 세상 오십년을 하천(下天)의 세월에 비한다면 한낱 덧없는 꿈과 같나니.)로 시작되는 구절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나머지 구절은 아츠모리 항목에 나와있다. 신장공기에서는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와리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부나가가 아츠모리의 저 구절을 부른 후, 호각을 불게 한후, 갑옷과 투구를 입고 선 채로 식사를 마치고 갑주를 입고서 출진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여기서 유래된 드라마 등 창작물에서 자주 쓰이는 유명한 대사가 "갑옷을 가져와라!(具足を待てい!)".

1580년 6월, 노부나가와 동맹관계에 있던 쵸소카베 모토치카설탕을 진상품으로 보내왔다. 이에 노부나가는 모토치카의 동생인 코소카베 치카야스에게 "항복시킨 미요시 시키부노쇼(三好式部少輔) 일에 관해선 딱히 생각이 없으며 항복시킨 서로 이야기하며 일을 진행하는 것을 추천함. 상세한 것은 야스나가가 보낼 것임."이라는 서장을 보냈으며,[23] 야스나가는 "노부나가의 주인장처럼 그쪽(치카야스)이 조금 수고해 주시면 될 것임. 시키부노쇼는 젊은이니 많은 지도바람."이라는 서장을 보내는 것으로,[24] 모토치카의 아와 진출에 암묵적인 동의를 표했다.[25]

1582년, 시바타 카츠이에로 하여금 우에스기 씨를 밀어붙이게 하여 호쿠리쿠의 토야마성(富山城)·우오즈성(魚津城)을 치게 하고, 모리 나가요시에게 북시나노(北信濃)방면, 타키가와 카즈마스에게 코즈케(上野) 방면으로 진공하게 하여 우에스기씨 세력을 동서남북 사방에서 압박하도록 했다. 여기에 우에스기씨 내부에서 시바타 시게이에가 반란을 일으켜 우에스기씨는 안팎의 적을 막느라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진다.

2.5 시코쿠 정벌 계획

동으론 우에스기, 서론 모리를 밀어붙이며 영향력을 키워가던 노부나가에게 있어 상당히 아니꼬운 인물이 나타났다. 그 인물은 다름아닌 토사모토치카. 키나이 평정이후 모리 테루모토츄고쿠미요시 나가하루아와를 압박하기위해 모토치카와 동맹을 맺었지만 자신의 계획보다 모토치카의 북상이 늦어지게 되어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모토치카가 시코쿠 평정을 시작한 1575년에서 7년이 지난 시점이었으며 이요의 코노 가문과의 문제로 모리 가문에게 서장을 받은적도 있는지라 노부나가는 모토치카와의 오다-쵸소카베 동맹을 뒤엎고 오다-미요시 동맹을 결성하여 시코쿠를 침공할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노부나가는 선봉으로 미요시 야스나가를 1581년에 아와로 파견했다. 모토치카에게 직접적으로 동맹결렬을 선언하는 메세지였으며 이에 모토치카는 적잖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노부나가는 이에 그치지않고 야스나가의 양자인 자신의 삼남 오다 노부타카를 총대장으로 니와 나가히데, 하치야 요리타카와 조카 츠다 노부스미가 보좌하는 시코쿠 정벌군을 편성하여 상륙준비를 끝마첬다.

노부나가는 중세에서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는 동시코쿠와 키나이를 자신의 친족들로 구성하는 계획안을 가지고 있었다. 시코쿠의 아와와 사누키는 칸레이였던 호소카와 가문의 중요거점이었으며 특히 아와는 미요시 가문 시대에 걸쳐 목재와 쪽(藍)으로 폭발적인 경제력을 확보했기에 이런 경제성을 보고 군사를 파견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키나이 일대를 오다 일문들에게 맡기고 사누키를 노부타카에게, 아와를 야스나가에게 맡길 예정이었기에 야스나가의 복귀를 명분으로 동세토내해를 차지하는 실리를 챙기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모토치카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미 오다의 군세는 시코쿠에 당도한 상태인데다 이요, 사누키, 아와 중 어느 곳도 제대로 정복한 지역이 없는 모토치카가 키나이를 손에 넣은 오다 가문과 싸우는 것은 말그대로 자살행위였다. 결국 모토치카는 이 위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아와 최전선의 군사를 어느정도 뒤로 물리는 제스쳐를 취했으며 노부나가의 휘하에 들어갈 것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토치카는 이제 손쓸 방도가 남아있지않았다. 시코쿠에 상륙한 야스나가는 반쵸소카베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시코쿠 정벌군의 도해날은 가까워지기만 하였다. 모토치카는 이에 크게 좌절하였으며 최후의 방법으로 자신과 친척관계이자 쵸소카베 가문과의 외교사절을 맡고있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가로인 사이토 토시미츠에게 1582년 5월 21일, 강경한 노부나가의 태도를 규탄하는 내용과 자신을 위해 손을 써달라는 내용의 서장을 보내었다.

2.6 혼노지에서 죽다

우에스기씨 공격이 좋은 진척을 보이고 있던 그 무렵인 5월 15일, 코슈정벌 전승을 축하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노부나가가 머무는 아즈치성(安土城)을 방문했다. 절친한 맹우(실은 호구 1호) 이에야스를 대접하기 위해, 노부나가는 쿄토 예법에 밝은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이에야스 접대역을 맡겨 사흘에 걸쳐 이에야스를 대접하게 했다.

이 무렵 빗츄 타카마츠성을 공략중이던 하시바 히데요시가 아즈치성으로 사자를 보내 원군을 요청한다. 그러자 노부나가는 돌연 미츠히데의 접대담당역을 해제하고 히데요시의 원군을 이끌고 지원에 나서도록 명한다.

미츠히데는 명문 도키씨의 지류인 아케치씨의 후손이자 조정과의 관계도 좋은 교양인이었고 수도권이었던 킨키의 사령관으로, 히데요시보다 한참 높은 위치에 있었던 미츠히데에게 한참 아래뻘인 히데요시의 원군대장을 맡으라는 것은 모욕적인 일이었다는 식의 묘사가 픽션에서 흔하게 나온다. 하지만 요리키 파견은 절대 지위가 낮거나 해당 지역의 사령관에게 부하로 예속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는 낭설에 불과하다.

5월 29일(양력 6월 19일), 노부나가는 츄고쿠 지방 정벌을 위해 교토에 상락하여 혼노지(本能寺)라는 절에 본진을 차리고 머물러 있었다. 가신들을 선방에 배치한 노부나가였으나 정작 혼노지에는 근위 100여명 밖에 배치하지 않고 있었다. 어찌보면 일본 1인자로서 더이상 일신의 위협을 생각할 일이 없었다는 반증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노부나가의 적장자 노부타다의 군대도 함께 상경해서 주둔중이었다. 하지만 혼노지가 그로부터 2년 전인 1580년에 노부나가의 명으로 대대적인 공사를 거쳐 절인 동시에 하나의 성채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이 2007년 혼노지 유적조사에서 밝혀지면서, 이는 노부나가가 혼노지를 수도에서의 하나의 기지로 운용했으며, 본진을 여기에 차리면서 고작 100여명의 호위만 배치하고 아들 노부타다의 병력을 떨어뜨려서 배치시킨 것도 혼노지의 방어력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유력한 설로 대두되었다.

허나 그렇게 자신하고 있던 노부나가를 향해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주군 노부나가를 토벌하기로 결의하고 노부나가가 혼노지에 본진을 차리기 사흘 전인 5월 26일(양력 6월 16일)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때의 명분은 히데요시의 원군부대를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미츠히데가 모반한 이유는 현재까지도 미스테리인데, 노부나가의 모욕과 그동안 받았던 부당한 대우, 노부나가가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미츠히데와 연을 맺고 있던 쿄토의 승려세력을 탄압한 것으로 인한 원한[26] 등 여러가지 원인이 추측된다. 최근 밝혀진 사료에 따르면, 미츠히데는 모반을 일으키기 한달 전에 이미 노부나가 암살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는 정황이 있으며, 그 원인으로서 천황만이 정할 수 있는 매연도의 달력 제작에 노부나가가 무단으로 관여 했다는 사실이 제시되어 있다.

6월 1일(양력 6월 20일), 미츠히데는 영지 탄바(丹波)에서의 거점인 카메야마성(亀山城)에서 1만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출진, 수도 교토로 향했다. 히데요시가 경략중인 츄고쿠로 가는 게 아니라는 걸 안 가신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묻자, 미츠히데는 "이 정도 병사를 움직이는 거라면 떠나기 전에 혼노지에 머무르고 계시는 주군(노부나가)께 열병[27]을 받아야지 않겠나"라고 말했다고 한다.[28]

그리고 밤을 넘겨 다음날 새벽 무렵 쿄토 경계인 카츠라가와 앞에 다다르자, 1만과 3천으로 병사를 나누고는 3천명만 데리고 카츠라가와를 건너 쿄토로 입성했다. 최근의 연구결과로는 이때가 6월 2일(양력 6월 21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이 미츠히데의 출진에 대해 다른 기록도 있는데, 애초 미츠히데는 노부나가로부터 히데요시의 원병부대를 이끌고 가라는 명을 받은 뒤 카메야마성이 아닌 본거점 사카모토성(坂本城)에서 출진했으며, 이때 군사는 3000명이었다고도 한다. 카츠라가와 앞에서 3000명을 나눴다는 기록과 애초에 3000명을 이끌었다는 기록 모두 쿄토입성의 인수가 같은 것으로 보아, 아케치의 쿄토정벌 부대의 인원은 3000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6월 1일 당일, 노부나가는 교토에서 왕족들과 귀족들, 교토 인근의 유력인사들을 초대하고 다과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것은 죽음 앞의 여유였을까.

6월 1일(양력 6월 20일) 밤, 미츠히데의 접근 사실을 모르는 노부나가는 잠자리에 들었고, 그 시각 교토로 진격하면서 미츠히데는 한마디를 남겼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敵は本能寺にあり)[29][30]

이것이 바로 혼노지의 변의 개막이었다.

몇 시간 후인 6월 2일(양력 6월 21일) 이른새벽[31], 절 밖에서 들려오는 말 소리와 소음에 잠에서 깬 노부나가는 시동 모리 나리토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이 모리 나리토시가 바로 모리 란마루이다. 란마루나 다른 시동들은 "아랫것들이 싸움이 났겠거니"하고 생각했다고 하며, 노부나가 본인은 "츄죠[32]의 반란인가?" 하고 물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빙성이 현저히 낮은 미카와 모노가타리(三河物語)[33]가 출처이므로 믿기 어렵다. 그러나 척후병이 들어와 "혼노지 바깥은 이미 적들에게 포위당했고, 많은 군기가 보였습니다. 깃발의 문장은 도라지꽃입니다."라고 란마루에게 보고했다. 도라지꽃은 바로 아케치 미츠히데 가문의 문장(家紋)이었고, 이에 히데요시의 원군 대장으로 갔을 터였던 미츠히데의 군사가 모반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란마루를 비롯한 시동들이 노부나가에게 피신할 것을 아뢰었지만, 노부나가는 미츠히데의 평소 성격과 능력, 지휘실력을 알고 있었기에 탈출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혼노지 안으로 쳐들어오는 미츠히데의 군사와 맞서싸우다가 중과부적에 이르자 본당 문을 닫고 란마루를 시켜 불을 놓은 다음 최후를 맞았다[34]. 일설에는 그 불길 속에서 타죽었다는 말이 있고 한편으로는 불길 속에서 배를 갈라 자결했다는 말도 있다. 여하튼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노부나가가 혼노지 거처와 함께 불 속에 갇히자, 거처가 다 타기를 기다려 노부나가의 죽음을 확인한 미츠히데는 니조신고쇼(二条新御所)[35]로 피신해서 맞서 싸우던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무라이 사다카츠를 쳤다. 노부타다는 세번에 걸쳐 안으로 들어오는 아케치군을 물리쳤으나, 아케치군의 철포대가 자신의 측근들을 차례차례로 쓰러뜨리자 무라이 사다카츠 등과 함께 자살했다. 무라이 사다카츠는 혼노지의 변 직전 혼노지 바로 지척에 있는 자택에 있다가 변이 일어나자 노부타다에게 사실을 고하기 위해 처음 노부타다가 주둔해 있던 묘카쿠지(妙覚寺)로 달려갔었다. 노부타다가 이 소식을 듣고 혼노지로 노부나가 구출병을 보내려 했으나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고, 묘카쿠지에서의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사다카츠가 니죠고쇼로 옮겨서 항전할 것을 제안했었다고 한다. 이 당시의 기록은 예수회 선교사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도 상당히 자세하게 남아 있는데, 다름아닌 프로이스 본인이 말하자면 혼노지 옆집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 프로이스의 예배당이 바로 근처라서 미츠히데의 군세가 들이닥치는 광경을 제법 자세히 서술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노부나가의 복수전을 대의로 내세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뒷수습을 하였으며, 미츠히데를 야마자키 전투에서 격파하였고 명실공히 노부나가를 이은 최고권력자로서 자리매김한다. 패한 미츠히데는 도망가다 농민에게 살해당했다.

일본 역사 인물 중 가장 많이 까이기도 한 인물이었지만 일본의 제국주의 시대부터 재조명 받기 시작하여 전국 3영걸 중 톱으로 꼽기도 한다. 일설에 의하면 신겐, 겐신에게 패배한 적이 있어서 최강까진 아니지만 설령 신겐, 겐신이 일찍 죽지 않았더라도 노부나가의 전략과 군대 규모를 생각하면 병력규모가 노부나가가 동원할 수 있는 총병력의 반에도 못 미치던 둘의 멸망은 시간 문제였다는 설이 지배적이다.[36]

교과서 등 대부분의 일반 서적에서는 전국시대 후기의 흐름은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확장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교과서에서는 다네가시마 철포 전래 등 매우 중요한 사건을 빼놓고서는 거의 킨키 지방을 중심으로 한 노부나가-히데요시 연표수준이다. 전국시대의 끝은 노부나가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전국시대를 끝맺은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치세를 따로 빼어 아즈치-모모야마[37] 시대 혹은 쇼쿠호[38] 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센고쿠 시대의 끝을 1615년 오사카 성 함락으로 보지 않을 경우는 보통 1573년의 무로마치 막부 멸망부터 1603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쇼군 취임까지를 쇼쿠호 시대로 떼어서 취급한다.

3 후계자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지 한 달이 안 된 시점에서 후계자 지명을 위한 회의가 열리는데, 이것이 '키요스 회의'이다. 그의 장남이자 당초 후계자였던 오다 노부타다는 이미 노부나가와 함께 죽었던 터라 새로운 후계자를 급히 뽑아야 했다. 여기에서 그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츠는 미래의 권력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원을, 3남인 오다 노부타카는 그의 또 다른 충복인 시바타 카츠이에의 후원을 받았다. 그러던 도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바타 카츠이에의 편에 섰던 니와 나가히데와 협상을 벌여서 장남 노부타다의 어린 아들인 오다 히데노부(당시 3세)를 후보로 바꾸었고, 결국 오다 히데노부가 후계자로 채택된다.

이로써 후계자 히데노부의 후견인이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틀어쥐게 되었고, 오다 가문은 서서히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져갔다.

4 기타

노부나가의 후손들 중 일부는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에 편입되어서 자작 작위를 받는다.

노부나가의 17대손인 오다 노부나리는 스케이트 선수인데 음주운전에 적발되어 망신살을 샀다. 음주운전을 적발한 경관 이름도 하필이면 아케치라서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되고 있다고…….[39] 역사는 반복된다 헌데 노부나리가 노부나가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는 정확한 구체적 증거가 아닌 노부나리의 증조부가 자칭한 것이 시초라서 정말로 그가 노부나가의 후손인지는 미스테리.

노부나가를 다룬 창작물에서 항상 나타나는 노부나가의 말버릇 비슷한 표현이 있는데, 바로 '데아루카(であるか)'. '그러한가', '그러냐?' 라는 의미다. 원래 이 당시의 표현으로는 '소-데아루카(そうであるか)'가 맞는 표현이지만[40] 소-(そう)를 빼고 자기 마음대로 줄인 표현이다. 이 표현은 신장공기에서 노부나가가 사이토 도산과 처음으로 대면할 때 사이토 가의 가신이 노부나가에게 '저분이 도산 공이십니다'라고 소개하자 노부나가가 '그런가(であるか)'라고 말한 것이 원 출처.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기록이지만 이런 어법파괴(?)적인 표현도 가신들에게는 특이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전국무쌍이나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도 이 말버릇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신과 사후세계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반면[41] 가신들이 종교를 믿는 것을 말리지는 않았다. 고니시 유키나가도 이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를 믿게 된다. 아즈치 성의 디자인이나 본인의 서양 문물 취미를 들어 노부나가가 기독교를 이용해 불교 세력의 약화를 꾸몄거나 나아가서는 본인도 기독교를 믿지는 않더라도 강력히 지지하고 있었다는 학설도 있다. 전자는 일부러 아즈치에서 각 종파끼리 키배를 붙인 기록이 있을 정도인 노부나가이니 확실하지만 후자는 딱히 근거가 없다.

키는 당시의 일본인 기준으로는 장신[42]에 해당되는 170cm 정도 되었다고 한다. 사실 현재 기준으로도 그렇게까지 작은 키는 아니다. 당시부터 꽃미남으로 유명했다 전해지는데, 지금은 불타 없어졌지만 예수회 수도사가 그린 노부나가의 초상이 있는데, 서양식으로 소묘한 초상의 얼굴을 보면 노부나가는 굵직한 수염을 기른 중후한 미남이다. 그런데 정작 못생겨서 유명한 히데요시와 달리 이 미남자가 딱히 호색한이었다는 기록은 없으니 재미있는 부분이다.

가네가사키 퇴각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 아네가와 전투[43]로 매제인 아자이를 괴멸시킬 수 있었던 것은, 동생인 오이치가 콩주머니의 양 끝을 묶어 아자이가의 배신으로 앞뒤로 포위 당했음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빙과 20화의 대하 드라마가 바로 이 이야기를 방영한 것이었고, 이를 밖에서 잠긴 창고에 갇혀있다는 힌트로 써먹는다. 물론 후대의 창작으로 추정된다.

사망하기 전날 삼패바둑이 무승부가 되는 경기를 관전하였다. 이에 따라 삼패를 바둑계에서 불길하게 여기고 있다.[44]

오다 노부나가의 호위를 맡았던 야스케가 모잠비크 출신이라 추정된다. 일본에 노예로 팔려왔다가 노부나가를 섬기게 된 것.

5 오다 노부나가 잔혹설

오다 노부나가가 딱히 다른 다이묘들보다 잔혹한 인물이었다는 유의미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우선 노부나가가 시행한 각종 엄격한 벌들은 원래 당시 일본에서는 당연히 행해지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물론이고 온화하다는 이에야스조차 책형을 시행한 적이 있을 뿐더러 사람을 목만 땅 위로 내밀게 한 다음 톱으로 그것을 썰어버리게 한 적도 있다. 또한 적들을 가혹하게 몰살해버렸다는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 그런 적은 고작해야 두 번 남짓한 정도이고 대부분의 경우 그냥 투항을 받아주었다. 두번 남짓도 잔인한 거 아닌가?

또한 배신자에 대해서도 관대한 모습을 보였는데 동생인 노부유키도 한 번은 용서했고 심복인 가쓰이에도 한 번은 노부유키를 따라서 노부나가를 배신한 역신이었는데, 이를 용서해 중신으로 세운 케이스. 또한 노부유키는 모반을 이유로 살해했으나 노부유키의 아이는 거두어서 곱게 길렀는데 이는 역적의 가족을 멸문하는 동양의 상식에서는 상당히 관대한 일이다. 자신의 서형(정실이 낳지 않은 형)인 츠다 노부히로가 모반을 일으켰을 때도 용서한 적이 있다[45]. 사실 노부나가는 남을 배신하기보단, 자신이 남에게 배신을 당한 일이 더 많았다. 결국 부하의 배신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고, 끝까지 동맹관계를 유지해준건 도쿠가와 이에야스 뿐이었다. 또한 자신 쪽에서 먼저 동맹관계나 맹우 관계를 끊은 적은 없다. 즉 외교적으로 상당히 신뢰할 만한 군주였다는 얘기.

단 오다군이 아자이 가와의 협정을 깨고 포고없이 아사쿠라군을 공격한 부분은 좀 문제가 있다. 아사쿠라와 아자이의 사이 때문에 분명 말릴 것이 뻔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이겠지만, 그 때문에 믿을 만하던 우방 하나가 숙적으로 돌아서버렸다. 이 때문에, 이를 두고 2차 창작물 쪽에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 아자이는 쿄고쿠 가문에게 멸망의 위기에 몰렸다가 아사쿠라 가문의 적극적 개입으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몇 대에 걸쳐 아사쿠라 가문과 센고쿠 시대에서 찾아보기 힘들 만큼 돈독한 동맹관계를 유지했는데, 갓 동맹을 맺은 오다가 아자이와의 협정을 깨고 아사쿠라를 공격했다면 아자이가 어느 쪽을 들지는 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를 배반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중론.

사실 노부나가가 특별히 기록으로 남을 만큼 잔인한 짓을 저지른 적은 거의 없고 당시 다이묘들 사이에서는 보통의 수준이다. 위에서 언급한 책형의 건만 해도 그렇다. 의리남으로 유명한 우에스기 켄신도 포로를 노예로서 팔아넘긴 적이 있고 히데요시 등은 본보기로 죄없는 백성과 포로, 심지어 어린아이를 포함한 200여 명을 잔인하게 몰살한 적이 있다. 그 시대는 원래 그런 시대였다. 임진왜란의 잔혹상도 사실은 일본 국내에서의 현재진행형을 조선 전장으로 가지고 간 것에 불과하였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엔랴쿠지 소각사건인데 하부 항목에서 자세히 서술한다.

기타 노부나가 잔혹설에 언급되는 일들인데, 보다시피 거의 다 후세의 창작.

  • 노부나가가 성을 비우고 성지의 하나인 비와 호의 치쿠부시마에 참배하러 간 일이 있었는데, 왕복 30리 길이어서 시녀들은 노부나가가 아마 당일은 목적지 근처의 나가하마 성[46]에 묵을 것이라고 믿고 너도나도 제 자리를 비우거나 아예 성을 나가 근처의 절인 쿠와미노데라에 참배하러 가기도 했다. 문젠 노부나가가 사람들이 그 기력에 혀를 내두를 만큼 빠르게 예정을 끝내고 바람같이 돌아와버렸다는 것. 돌아온 노부나가는 시녀들이 무단으로 자리를 비운 것에 격노해서 일부를 묶어 놓고, 쿠와미노데라에 사자를 보내서 거기 있는 시녀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장로는 시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대신 사죄했는데, 노부나가는 장로까지 같은 죄를 물어 처형했다고 한다(...)[47] 단 이 문단에서 '처형'이라는 단어는 세이바이(成敗)라고 쓰여 있는데, 이 단어는 처형하다는 뜻 이외에도 엄하게 벌하거나 응징하다는 뜻까지 포함하는 다소 중의적인 표현이어서 반드시 처형해버렸다고 단언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처벌의 수위는 여태까지 처형이었는지 엄중처벌이었는지 확실하지가 않다.[48]
  • 아자이, 아사쿠라 등을 정벌하고 나서 아자이 히사마사,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 3명의 해골에 금박을 입혀 바라보며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해골을 가지고 술잔을 만들었다는 부분은 창작이지만, 시체를 훼손하여 금박칠하고 구경거리 삼은 부분은 신장공기에 기술되어 있다. [49]
  • 불교에 대해 매우 잔혹했고, 각종 잇코종 봉기를 잔혹하게 탄압하고 치외법권의 성지로 취급되던 히에이 산을 포함한 여러 불교 사찰을 불사르는 등 불교가 사회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했다. 그 과정에서 승려와 주민 수천 명을 학살했다. 그러나 사실 당시 절들은 승병이라는 무력 집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특히 나가시마 잇코잇키의 경우 잇키를 일으킨 무리들이 식량이 떨어져 항복하자 이를 분명히 일차적으로 받아들였는데도 불구하고 처벌을 받을 게 두려운 나머지 배신하고 다시 잇키를 일으켜 노부나가의 동생을 살해하는 등, 센고쿠 시대 기준으로도 배은망덕한 행위를 했기 때문에 전부 죽음을 당해도 이것을 학살이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게다가 승병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당시 승병은 말이 승병이었지 사실상 종교를 앞세워 반란선동을 일삼는 깡패이자 광신도 집단에 가까웠고, 불교의 교리를 거의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분명히 적대적인 다이묘들에게는 좋은 선전거리였고 불심이 깊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용서받지 못할 악행으로 비쳤으며, 노부나가의 악인 이미지에 단단히 한몫 했다. 특히 다케다 신겐은 히에이산 방화 당시 살아남은 승려들을 불러다 보호하며 대놓고 비난하였다. [50] 현대적인 시선으로 보면 정치에 개입하는 타락한 무장 불교세력에 대한 응징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분명히 경천동지할 만한 일이었다. 당시 한 공경은 "최근의 일(엔랴쿠지 소각 사건)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일기에 썼으나, 에도 시대의 유학자는 "비록 방법이 잔인했다고는 하나 오래 끌어온 불교의 해악을 제거한 점은 천하를 위해 공을 세운 일이라 할 것이다"라고 쓰기도 했을 정도로 평가가 정반대로 엇갈리는 사건이다. 다만, 당대에 이에 대해 언급한 이들 중 직접 참상을 목격한 이는 없으며 또한 히에이잔 지역의 발굴조사에선 이를 증명할 만한 유골이나 화재 흔적 등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 이세 나가시마의 간쇼 사가 잇코 잇키를 일으켰을 때도 마찬가지로 처참하게 진압했다. 수만에 가까운 폭도들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체 사찰에 불을 질러서 몰살했을 정도고, 흔적도 없이 불타버린 간쇼 사는 노부나가의 아들인 오다 노부카츠 대나 가서야 겨우 복구되었을 정도로 처참히 파괴되었다. 소수설에서 실제 일어났는지 의심받을 때도 있는 히에이 산 소각사건과 달리, 이쪽은 관련 자료가 많아서 사실이 확실하다. 하지만 이쪽도 다른 설들처럼 노부나가가 특별히 잔인했다고 보기가 어려운 것이 간쇼 사와의 전투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처참한 것이었기 때문. 오다 일족 신분의 장수들이 마구 희생되었을 정도로 오다측의 희생도 컸으며, 뭣보다 상대는 영토나 부 따위가 아니라 광신적인 신앙으로 죽을 때까지 싸우는 종교집단이며 각지에서 반란을 선동하는 방법으로 싸웠기 때문에 평화롭게 해결하기가 힘든 것이 당연하다. 이 과정에서 잇키 세력이 항복했는데, 항복을 받아주는 척 하고 사격을 가해 대량학살했다는 설이 있다. 이쪽 역시 분명치는 않은데, 광신도 집단인 잇코 잇키의 특성상 항복해놓고 언제든 다시 봉기할 수 있는 불안요소이고, 항복 과정에서 오해나 잇코 신도에 의한 무력 저항이 있었다고도 한다. 또한 위와 같이 다이묘가 그 가족을 다수 잃을 정도의 처참한 전투를 강요당한 오다 측에게는 그럴 만한 명분도 있었다.
  • 오다 가문을 대대로 섬겨온 후다이 가신이라도 사정 봐주지 않고 무능한 부하를 가차없이 추방하거나 좌천시키는 등 부하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했다. 역시 합리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무정한 처사로 여겨져도 할말이 없다. 미츠히데 같은 가신의 경우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했다는 기록도 많이 보이는데, 루이스 프로이스는 노부나가가 미츠히데를 발길질로 찼다는 기록을 남겼을 정도. 사쿠마 노부모리 같은 가신은 후다이임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그의 잘못을 거론한 힐문장을 만들어 부하들에게 돌리며 망신을 준 후 내쫓기도 했고, 노부나가의 부하들은 봉건영주나 다이묘라기보다는 노부나가라는 절대군주를 섬기는 파견 군단장, 신하에 가까운 형태였다. 이렇게 생각 없이 가까운 부하를 학대하다가 죽음을 당한 부분은 장비와도 비슷하고, 느슨한 중세적 봉건체제에서 근대적인 중앙집권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남 노부야스가 행실이 나쁘고 잔혹하며 다케다와 내통한다는 혐의를 들어 할복시킨 일. 단 이에야스에게 불리한 일을 에도 막부에서 집요하게 역사 왜곡/윤색하였기 때문에, 노부나가에게 가문 내의 갈등으로 빚어진 일의 책임을 떠넘겼다는 설도 있다. 애초에 노부야스에 대해 신뢰할 만한 사료가 매우 부족하다. 가장 신뢰할 만한 설명은 어머니 세나히메가 이마가와 가문의 사람[51]이었기 때문에 아들인 노부야스도 가문 내 이마가와 파벌의 수장이었고, 이마가와와 손을 끊으려는 이에야스와 분쟁이 발생해서 이에야스가 숙청해 놓고 오다의 강요로 돌렸다는 설.
  • 아케치 미츠히데의 어머니가 하타노 하루미치의 가솔과 교환으로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적장의 가솔을 몰살해 버렸고, 결과적으로 미츠히데의 어머니를 끔찍하게 죽게 만들어 격노한 미츠히데가 모반을 꾸미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후일 에도 시대의 창작으로 밝혀졌다.
  • 주워 들은 정보가 많아 신뢰성이 떨어지지만 대신 노부나가에 대한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조선의 기록들을 보면, 노부나가를 전형적인 숙청과 혹형을 남발하는 의심 많은 군주로 묘사하고 있다. 대부분이 '의심이 많고 숙청을 남발하자 다이묘들이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마침내 부하의 반란에 죽었다.'라는 식. 노부나가에 대한 당시 일본인들의 인식을 알 수 있다.
  • 노부나가와도 안면이 있던 선교사 프로이스는 노부나가를 두고 '이상할 정도로 외경을 받고 있었다. 유럽의 절대군주처럼 행동했다. 자신의 명예에 대한 모욕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라고 언급했다.
  • 다케다 가문을 공격했을 때 비록 적이지만 무서울 정도로 인간사냥을 벌여 다케다 가문의 피붙이들을 철저히 죽였다. 그리고 롯카쿠 가문의 잔당을 숨겨주고 인도를 거부한 다케다 가문의 보다이지[52]인 에린 사를 철저히 포위하고 절 안의 남녀노소를 모두 몰아넣은 채 불을 질러서 학살했다. 국사 대접을 받던 고승 카이센 쇼키(快川紹喜)도 용서받지 못하고 함께 학살당했는데, 이때 쇼키는 불 속에서 그 유명한 "참선에 반드시 물을 쓰라는 법이 없고, 심두(心頭)를 멸각(滅却)하면 불도 자연히 시원하리라(安禅必ずしも山水を須いず、心頭を滅却すれば火も自ら涼し)"라는 게(偈)를 남기고 죽었다.
  • 일종의 방랑하는 탁발승인 고야히지리들을 마구잡이로 붙잡아 몰살했다. 이것도 사실 보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탁발승은 닌자 등 스파이가 사용하기 딱 좋은 수상한 신분이고(...) 노부나가는 포위망을 이룬 다이묘들과 불교세력들의 교묘한 외교공작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정체 모를 적대 종파의 순례자를 의심해서 죽여도 딱히 이상하지는 않다.

이렇게 노부나가 잔혹설의 근거로 사용되는 일화들이 대부분 신빙성이 의심스럽거나 어느 정도 이유가 있는 행동, 혹은 당시 상식으로서는 특별히 문제가 없는 행동이 많은데다, 다음과 같은 파격적일 정도의 선행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 노부나가의 행렬이 지나가는 도중 거지를 봤는데, 궁금해진 노부나가가 신변을 알아보니 근처 마을에서 따돌림을 받는 장애인이었다. 불쌍하게 생각한 노부나가는 후한 비용을 주며 거지가 거처할 만한 집을 지어 줄 것, 그리고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거지를 보살피고 먹여살려 줄 것을 근처 마을의 촌장에게 부탁하고 떠났다.
  • 하루는 삿사 나리마사의 성인 히라 성 근방의 한 연못을 비오던 날에 홀로 지나가던 마타자에몬이라는 무사가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형상을 한 마물 구렁이를 보고 겁에 질려 도망쳐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본 것을 얘기하고 다녔다. 이 소문을 듣고 흥미가 동한 노부나가는 직접 마타자에몬을 불러서 경위를 조사한 뒤, 주변의 백성들과 부하들을 동원해 연못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새벽부터 물을 퍼내다가 물이 어느 정도 이하로 줄지 않자 아예 자신이 직접 입에 와키자시를 문 채 물속으로 들어가서 직접 구렁이를 찾아보고는 '구렁이 같은 건 없다!'라고 공언했을 뿐더러, 확실히 하기 위해 수영에 능한 부하 2명에게도 확인을 명했다. 미신을 믿지 않는 본인의 성격도 있겠지만 부하와 백성들의 불안을 적극적으로 해소하려고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53][54]
  • 히데요시 등 가신의 시시껄렁한 부부싸움 등에도 친서를 보내서 상담해 주는 상냥하고 자상한 면이 있었다. 여색을 밝히는 히데요시와 부인 네네가 다투게 되고, 히데요시가 바람을 피울 뿐 아니라 네네 흉을 보고 다닌다는 얘기를 네네가 노부나가에게 직소하는데, 노부나가는 네네에게 친절하게 "당신은 예전 봤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워졌구려. 그 대머리 쥐새끼가 당신 흉을 본다던데, 그야말로 언어도단이오. 놈은 죽었다 깨나도 그대 같은 좋은 아내를 얻지 못할 것이 분명하오. 하지만 그대도 무사의 아내답게 당당하게 처신하고 질투 따위는 하지 않도록 하시오. 이 편지는 원숭이에게도 보여주도록 하시오."라고 서찰을 보낸다.
  • 화려하고 웅장한 아즈치 성이 지어지자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서민, 백성들을 초대해 내부를 구경하는 투어를 시켜 주었다. 조영 목적 자체가 전략적 목적보다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아즈치 성인만큼 선전전의 성격도 있었겠지만, 중세 동양권의 상식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신기한 일화.[55]
  • 스모를 좋아하는가 하면 백성들과 자주 어울렸고, 능력만 좋으면 출신에 연연하지 않고 즉석에서 백성을 무사로 발탁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 성공례가 히데요시. 스모 대회를 자주 연 것에는 아무래도 체력이 강건한 인재를 발탁하려는 목적도 있었는지, 스모 대회에서 이긴 자에게 영지를 주어서 무사로 즉시 채용하기도 했다.
  • 스스로 선두에 서서 독전하거나 전투에 참가하는 등 부하들에게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이묘는 전투지휘 시 무조건 후방이나 중앙에 위치하며 무슨 수를 써서든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던 당시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것 때문에 부상당하기도 했다. 스스로 짐을 들어보면서 무게를 배분하거나, 접대할 손님에게 직접 밥상을 나르는 등 다이묘 신분으로 있을 수 없는 일까지도 가끔 했다고.
  • 사람들을 무시했다는 증언과 별개로, 공경이나 천황, 승려와 같은 상대들에게는 깍듯이 예의를 다했기 때문에 여러 당사자들이 칭찬하는 기록을 썼다. 노부나가가 고압적인 태도로 대한 것은 적이나 부하들뿐,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이나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존중하고 깍듯이 대하는 편이었다는 것.

6 인품

예수회 선교사로 "일본사"를 저술해 당시 다이묘들의 기록을 자세히 남긴 프로이스에 의하면

"중키로, 늘씬한 체구이며 수염 숱은 적고 목소리가 높다. 호전적이며 군사훈련에 힘쓰고, 명예심이 높아 사법 문제에 대해서는 엄격했고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몇몇 일에서는 인정과 자애로운 성품을 드러냈다. 잠자는 시간이 짧아서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편이었다. 탐욕스럽지 않고 자신의 결단을 숨기며, 노련한 전술가로 몹시 성급한 성격을 갖고 있으며 가끔씩은 격앙되곤 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거의 가신의 간언에 따르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대단히 경외받고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고 먹는 것도 절제하며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솔직하고,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 거만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일본의 모든 왕[56]들을 경멸하여 자신의 부하를 대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또한 사람들은 유럽의 절대군주를 대하듯이 그에게 복종했다. 그는 전황이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게 전개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대담하고 활달하며 인내심 있게 행동했다. 그는 명철한 이성과 판단력을 보유하였고, 신과 부처 등 일체의 예배, 신앙, 또한 모든 이교의 점술이나 미신적 관습을 철저히 경멸하였다. 형식상은 법화종의 신자인 것처럼 태도를 취했으나, 신분이 높아지고 나서는 오만하게도 모든 우상을 경멸하였고, 선종의 교리에 약간 영향을 받아서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고, 내세나 지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자신의 저택에서는 청결하게 행동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열심히 연마하였고, 대화를 나눌 때 질질 늘어지는 화법이나 귀찮은 미사여구를 몹시 싫어하였으며, 신분이 매우 낮은 부하와도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특별히 좋아한 것은 저명한 다기, 명마, 도검, 매사냥이었으며 특히 눈앞에서 신분이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사람들이 알몸으로 스모를 하는 것을 몹시 좋아했다. 그 어떤 사람도 무기를 갖고 그의 앞에 나서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다소 우울한 표정이었으며, 힘든 계획에 착수할 때는 대단히 대담무쌍하게 임했으며, 사람들은 그의 말에 어떤 일이든 반드시 복종했다."

라고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성격이 급하고 거만하다고는 하나 후대에 알려진 잔혹하다는 이미지와 달리, 그 근거는 대부분 창작되었거나 당시의 상식으로는 그닥 잔혹하다 욕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불교세력에 대한 탄압이 당시 사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불교도들을 자극해서 잔혹한 노부나가의 이미지가 유포되었고, 후일의 에도 시대 군담 등에서 적극적으로 그 설을 채용하여 노부나가의 캐릭터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부나가는 가족을 몹시 아낀 것으로 알려졌다. 반란을 획책한 노부유키를 제외하면[57] 동생들을 매우 아꼈고 주변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도 동생이나 친족들은 항상 안전한 후방에 배치시켰다. 그리고 친족을 결혼시킬 때는 정략결혼이더라도 되도록 결혼생활 면에서 배려를 아끼지 않는 편이었다. 오이치는 오다 가에게 매우 중요한 동맹 관계인 아자이 나가마사와 결혼시켰고, 나머지 한 경우도 상대방은 맹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남이었다. 나머지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귀족인 공가나 아니면 자신의 가신 중에서 꽤 괜찮은 자를 골라서 배필로 삼았다. 특히 딸들은 시집가서도 남편에게 사랑받으며 좋은 대접을 받은 인물이 많아서 인물을 잘 가려내어 딸들을 귀하게 대접할 공처가좋은 남편감을 사위로 골랐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재를 씀에 있어서는 신분을 차별하지 않았다. 자칭 아시가루의 아들이지만 실제로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는 히데요시, 또 닌자설이 있을 만큼 정체모를 타키가와 카즈마스, 더구나 외국인 노예 중에서 쓸모있는 자들을 골라서 해방시킨 다음 신분을 사무라이로 승격시킨 후 부하로 삼기까지 했다. 개중에는 흑인도 있었는데(야스케 항목 참조)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었을 때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붙잡혀 임관을 권고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측은하게 여긴 미츠히데는 그를 풀어주었는데 그 이후의 행방은 알 수가 없다. 단 부하의 간언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후다이[58] 까지도 무능을 이유로 가차없이 숙청하는 등 부하들에게 가혹한 면이 있었고 의심이 많았으며, 일부 기록에 의하면 부하를 마구 두들겨패는 등 가까이서 섬기는 신하를 인격적으로 모욕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런 탓에 전국시대의 다이묘 중에서도 상당히 부하의 반란이나 동맹군의 배반으로 고생을 자주 한 편[59] 이고 결국 반란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물론 이런 부하 가신들의 반발은 개인적인 모욕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부나가가 종래의 봉건영주와 가신 관계를 벗어나서 가신단을 절대군주와 신하/군단장의 관계로 재편하려 했기 때문에 초래된, 가신들이 보유한 봉건적 권한이 축소되는 것에 대한 정치적 반발이기도 하다.

이런가 하면 인간미를 보일 때는 한없이 자상한 모습을 보였다. 인질로 삼아놓은 구로다 요시타카의 아들(구로다 나가마사)을 요시타카가 반란군을 설득하러 갔다가 사라졌는데, 이것을 요시타카의 배반으로 생각하고 그 아들을 처형하라 명령했었다. 이후 요시타카가 배반한 게 아니라 갇혀 있었을 뿐이라는 게 드러났을 때는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고 미안해 어쩔 줄 몰라했고, 이후 실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몹시 기뻐했다고 하는 인간적인 면도 있었다. 또 히데요시의 정실인 네네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호색한인 히데요시의 책임일 수도 있다)로 히데요시가 네네를 홀대하자 히데요시를 몹시 꾸짖고는 네네에게 위로의 편지를 썼다. 신장공기의 텐쇼 3년의 기록을 보면 구걸하는 거지를 돌보라고 마을 사람에게 이르기도 했다.

키쿠치 칸의 전국합전사에 수록된 아네가와 강 전투에선 포로로 잡힌 아자이 측의 대장 안요지 사부로자에몬[60]에게 오랜만이라고 얘기하며 자신을 섬길 것을 권했고, 거부당하자 그럼 수급이라도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수급중에 안요지의 동생이 있자 노부나가가 참 애처롭게 되었다며 안요지의 심사를 걱정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자신의 등용 권고를 거부하자 안요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전국합전사에서도 노부나가의 잔혹함을 생각하면 특이한 케이스라고 얘기하긴 하지만, 노부나가가 자비로운 모습을 보이는 건 과거에도 간간히 있었던 것.

또한 신빙성이 낮은 개인적 무용담이 전해지는 여타 다이묘들과 달리 노부나가는 스스로 전선에 서서 싸운 적도 많고,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일꾼에게 시킬 법한 일들에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인 사료가 많았던 것도 특징이다. 아사쿠라 가의 본거지인 이치죠다니 성을 공격할 때는 격전지에 나가서 분투했으며, 사이토 도산을 구원하기 위해 출격했던 나가라가와 전투에서는 가장 위험한 보직 중 하나이던 신가리[61]를 스스로 맡기까지 했다. 또한 혼간지와의 싸움에서 퇴각하던 중 강물에 막혀 부대가 퇴각하지 못하자 직접 강가를 정찰하여 수심이 얕은 곳을 찾아내 병사들을 도강시켜 퇴각한 적도 있고, 이외에 귀한 손님이 오면 다이묘인 노부나가가 스스로 상을 나른다든가 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고도 하며, 짐의 무게를 두고 짐꾼들이 말싸움을 벌이자 스스로 말에서 내려서 짐을 들어보고 무게를 측정했다고도 전한다. 허세를 부리면서도 안전한 곳에 빠져 있기 십상이던 당시 무장들과 달리 상당히 모범을 보이는 무장이었단 얘기. 그래서 오다에 원한을 가진 닌자에게 조총으로 저격당한 적도 있다.[62]

또 몹시 미남이라 젊은 시절에는 여자하고 착각될 정도였다는데 이걸 단순히 우스갯소리라고 볼 수 없는 것이 오다 가는 원래 미남을 많이 배출하는 집안이다. 노부나가의 사촌 중엔 걸어다니면 주변의 남자들까지 하악하악할 정도의 미남이었고 오다 가가 몰락한 다음에도 오다 가의 여자들은 다이묘들이 다들 서로 못데려가서 안달이었다. 오이치만 해도, 남아있는 인물화를 보면 당시 일본화 화풍을 참작해도 상당한 미인이라는 평.[63][64]

의외로 부하들에게는 냉혹하고 무시무시한 주인이었지만 가중의 가신의 부인들을 포함한 여성과 외부 인사들에게는 정중하고 예의바른 태도로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아내인 네네 등에게 남긴 편지를 보면 세세한 곳까지 신경쓰는 섬세함과 여성을 대하는 정중한 태도, 최고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도 아닌 부하의 아내에게까지 지극히 예의 바른 문장을 쓰는 점에 놀라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당신은 예전보다 더 아름다워졌소이다. 저 대머리 원숭이(히데요시)가 지금 당신에게 이런저런 불만을 늘어놓는 것 같지만, 이는 언어도단이오. 당신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 없다는 건 다들 알고 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기를 바라며, 남편이 바람 핀다고 질투하지 말고 무가의 여식답게 의연하기 바라오. 이 편지는 원숭이에게도 보여주시오.

한 마디로 이 냉혹하다 알려져 있는 남자가 부하의 가정 불화에 자상하게 상담하는 내용의 편지를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단 얘기.하지만 원숭이에게 편지를 보여주란걸 보면 역시 가신한텐 얄짤없단걸 볼 수 있다. 노부나가 잔혹설의 근거가 대부분 과장/창작된 것임을 감안하면... 그리고 동시에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해서 심심하면 여기저기 편지를 보내서 사소한 안부라도 묻고 답장을 안 하면 삐지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문맹[65]이었던 가신들에게는 주군의 편지에 일일히 답장하는 일도 상당히 고역이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너 왜 답멘 안 해주냐?"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 때문에 고시라카와 덴노같은 인물이 풍자 삼아서 카모 강의 강물과 승려들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시를 남겼을 만큼 교토의 지배층들은 늘 주변의 강력한 불교세력의 준동에 골치를 앓아 왔는데, 노부나가는 무신론자인데다 거기 더해서 종교가 어떤 형태로든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노부나가는 일본 역사에서 거의 처음으로 종교와 정면으로 맞짱을 떠서 종교의 세속정치 개입에 강력한 철퇴를 날린 인물이고, 이런 세속주의 방침의 정치적, 사회적인 의미는 상당히 크다. 노부나가의 이런 방침은 현대 일본사회의 종교 습합적, 비종교적인 성격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으며, 교과서에서도 빠지지 않고 배울 정도.

7 능력

오다 노부나가는 전형적인 센고쿠 다이묘다. 아버지 노부히데는 오다 가문을 통일했지만 방계였기 때문에 집안에 적을 많이 만들어둔 상태로 죽었고 가독 계승 당시 노부나가는 인망이 없었다. 그런 불리한 조건에서 오다라는 약소 세력을 전국통일 목전에까지 이끌어낸 대단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66] 이렇게 지방의 한 소규모 다이묘에서 천하인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보니 그 능력은 대단히 비범하게 평가된다.

노부나가의 성격이 급하고 잔혹하다고 알려져있지만, 실제 그의 전략 및 전술은 매우 신중한 편이었다. 자신에게 계속 시비를 거는 다케다 신겐에게 성급히 맞서싸우지 않고 끝까지 외교적 방책을 찾았을 정도. 물론 무적이라 불리던 다케다 신겐의 기병을 상대함에 있어선 피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다가 신겐이 죽은 뒤에 벌어진 나가시노 전투의 승리로 사실상 완전한 우위에 서게된다. 일반적인 다이묘라면 군세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다케다를 바로 조지러 갔을테지만 일단은 다시 때를 기다렸다. 그 후 동안 타케다는 경제적[67],외교적[68]인 실책으로 자멸에 가까운 지경에 이를 때가 되자 그제서야 타케다에 총공세를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나가시노 전투의 승리 후 7년 동안의 기다림 끝에 [69] 타케다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호죠가 아군이 되었으며 그리고 우에스기는 내분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그야말로 관동공략을 위한 최적의 상황으로 나타났다. 이런점을 봤을때 몇십수 앞을 내다보는 참을성은 가히 경이롭다.

다만 노부나가의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당대 최고라고 보기는 어렵다. 흔히 노부나가보다 타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켄신을 높게 보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나 노부나가 공기 및 갑양군감 같은 역사적 사료에도 노부나가가 직접 군을 이끌었다가 패퇴하는 경우가 기술되어있다(주로 타케다 군의 무장에게 패퇴). 허나 노부나가의 전술 능력이 비록 당대 최고는 아닐지는 몰라도, 충분히 비범한 건 사실이다. 최고 지휘관의 몸으로 직접 말을 타고 선두에 달려 적을 격퇴한 적도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오케하자마 전투이며, 아사쿠라 가문을 멸문시킬 때도 직접 선두에서 말을 몰았다.

노부나가의 진정한 장점은 전술보다는 전략, 야전보다는 정치력에 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외국과의 무역, 라쿠이치라쿠자(규제 없는 자유시장), 다른 다이묘들에겐 쓸모없다 여겨졌으나 총포를 독점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카이를 독점한것, 쇼군을 이용한 외교전 등 그의 다채로운 전략은 괄목할 만 하다. 이러한 전략이 비록 노부나가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지만(당장 노부나가의 장인인 사이토 도산도 이러한 전략을 구사했다), 하나의 세력을 이끄는 총 책임자로서의 능력은 확실히 뛰어났다. 오다 군이 꽤 큰 손실을 입고 패전한 적은 가끔 있지만[70], 항상 적보다 많은 병사를 이끌 수 있었다는 것은 전략적/정치적인 능력이 전술적인 실패를 언제나 메꿀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71]

노부나가가 가독을 상속받았을 당시의 상황은 아버지 노부히데의 실패와 본인의 행실로 인해 가문 내의 분열에 더해 외부의 적들이 오와리를 노리고 있는 등 최악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런 불리한 상황에 묻히는 감도 있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오다 가문의 입지나 지정학적인 위치 등은 상당히 유리한 편이었다. 오와리의 발전한 상업은 아버지 노부히데 대에 이루어진 성과를 물려받은 부분도 부정할 수 없고, 미노를 점령한 뒤 노부나가는 노비 평야로 알려진 미노와 오와리의 매우 비옥한 지방을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었으며, 오와리와 미노는 위치상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나이와 교토, 그리고 상업의 중심지인 사카이로 뻗어나가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이런 유리한 조건들이 노부나가의 능력을 깎아먹는 것은 아니지만 천하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재산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노부나가의 용인술은 매우 파격적인 편이다. 잔혹하고 용서가 없다는 이미지와는 달리,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배신자를 용서한 적도 많다. 다만 근무에 태만하고 별로 쓸모가 없는 인물이라 생각되면 아무리 중신이라고 해도 가차없이 내쳐버렸다. 굉장히 실리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부하들 입장에선 언제 내쳐질지 몰라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전국시대의 많은 다이묘 가문은 고평가되는 다이묘들조차도 대부분 겉은 급성장하면서 내실은 그에 걸맞는 체제를 미처 다지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덩치는 전국구급이지만 지방 다이묘의 가신단 수준의 약한 단결력을 가져서 뒤늦게 내분이나 가신단의 이탈, 반란 등의 사태로 인해 발목을 잡히는 사례가 많았는데, 노부나가처럼 가신을 수하의 독립된 영주로 취급하지 않고 단순히 노부나가라는 군주의 신하처럼 다루는 중앙집권적인 가신단을 구축한 사례는 거의 없었기에 매우 특이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루이스 프로이스는 노부나가의 행동이나 정책을 두고 유럽의 절대군주처럼 행동했다고 특기했고, 이것은 분명 다른 다이묘들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노부나가의 이러한 선구적인 용인술은 어쩔 수 없이 봉건영주들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아라키 무라시게, 마츠나가 히사히데 등의 반란처럼 많은 도전에 직면했음은 물론, 결국에 가서는 아케치 미츠히데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일본 역사를 다루는 Samurai Archive의 팟캐스트에선 이런 노부나가를 두고 매니저와 중간 관리자에겐 최악의 보스, 그 밑의 평사원이나 알바들에겐 더없이 좋은 보스 타입이라고 얘기했다물론 결국 사지로 보낸다는 점에선 결국 좋은 상관이 아니잖아? 라고 얘기하긴 했지만

또한 노부나가는 매우 근면한 편이었다. 그 자신이 워낙 건강한 체질(사냥과 말달리기를 통해 늘 체력을 단련했다)이어서 가능했겠지만, 가신들 중에서도 노부나가의 근면함에 따라올 수 있는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아케치 미츠히데 정도였다. 어느정도 근면했느냐 하면, 타 가문에 보내는 의례품들을 스스로 일일이 검사했을 정도. 노부나가의 지위를 생각하면 이는 근면한 정도가 아니라 깐깐한 수준이었다.

다만 노부나가는 자기 자신이 워낙 근면하다보니 부하가 조금 태만하다 싶으면 곧장 벌을 내렸다. 더욱이 짬밥되는 노신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기에(대표적인 예가 사쿠마 노부모리),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근면한 자들은 오히려 출세할 기회가 많아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노부나가의 근면함을 따라올 자는 드물었다)의 사람들은 노부나가를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다. 현대의 한 연구에서 오히려 현대인보다 노동시간이 길지 않았다고 할 정도이던 당시에 이런 일중독자가 다이묘였으니 이 점도 반감을 살 하나의 요소였는지 모른다.

종합해서, 뛰어난 전략 능력과 결코 태만을 용서치 않는 근면함 등이 노부나가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노부나가의 이러한 장점이 기업 경영자의 마인드에 적합하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21세기의 기업 경영을 전국시대 전쟁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일본에도 "노부나가의 경영 비결!" 같은 책들은 굉장히 흔하고, 마케팅의 일환이긴 하지만 삼성전자 사장이 임원들에게 대망을 읽으라고 권했다고 할 정도로 혁신이 중요한 현대에 이 혁신적이었던 남자의 조직 경영법은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일본의 비효율적인 거대 조직이나 복지부동의 관료조직을 비판할 때 오래된 전통이라도 비효율적이라면 가차없이 개혁하던 노부나가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조직 몸집 줄이기가 중요한 불황이라서 후다이도 서슴지 않고 정리해고를 했던 남자의 경영법이 주목받는지도 모른다. 을은 쳐내버리고 가라!

이외에 노부나가가 마치 잘 안 쓰이던 조총에 눈독을 들인 첫 다이묘라도 되는 양 언급되고 특히 그 유명한 3단철포 설이 널리 퍼져 있는데, 노부나가 이전부터 이미 조총은 전장의 주력 무기 중 하나였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엄청난 경제력과 지역적 유리함, 쇼군을 이용한 정치적 술수로 사카이 지방을 지배하여 화약을 독점하는 것을 바탕으로 수천정에 이르는 철포부대를 운용했기에 여타 다이묘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 압도적 화력을 구사할 수 있었다.

전국 중기 이후에 조총으로 인한 사상률은 40퍼센트 정도였으며, 그 외에 활이나 투석에 의한 사상률도 높은 편이었다. [1] 참고로 도검류에 의한 사상자는 3퍼센트 정도) 특히 다케다 가문은 조직적으로 투석대를 따로 두어 운용한 것으로 보인다. 3단 철포설이 나오는 것은 오제 호안이 쓴 '신장기'에 철포를 교대로 쏘게 했다는 문장이 한 줄 나온 이후에 널리 받아들여졌는데 신장기는 에도 초기에 나온 군기물(일종의 군담소설)이다. 이를 메이지 시대에 '일본전사'를 편찬할 때 그대로 수록하였으며, 이후 영화, 소설 등을 통해 통설처럼 굳어진 것이다.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오타 규이치가 쓴 '신장공기'[72]에는 3단 철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웃나라였던 중국, 조선의 기록을 보아도 연속사격술은 통상적인 전법으로서 활용되었던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오다 노부나가 시기부터 사용된 전법이었는지는 보다 자세한 검증이 필요할 것이다.

8 트리비아

  • 도검 수집 매니아였다. 헤시키리 하세베,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같은 검들이 오다 노부나가가 소장했던 도검. 특히 전설적인 도검 제작자 미츠타다가 제작한 도검을 무려 31자루나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73]
  • 그의 일생을 다룬 사료 중 가장 신뢰성 있는 것으로 꼽히는 책은 오타 규이치가 쓴 신장공기이다. 노부나가 잔혹설의 근거와 노부나가 잔혹설에 반박할 근거가 모두 들어있는 신기한 책(...)이기도 하다.

9 대중문화 속의 오다 노부나가

  1. 초상화 원본은 분실되고 사진만 남아있다. 그림과 사진 모두 메이지 시대 이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2. 주로 자손번창을 기원하는 문장으로 유명하다. 문장의 형태적 근원에 대해서는 모과 꽃이나 참외의 단면 등 여러 설이 있다.
  3. 90년대까지 대한민국에서는 그대로 읽어 '직전신장'으로 불렸다.
  4. 엔랴쿠 사를 불태워 버린 일에서 별명인 '제육천마왕'이 비롯되었다. 다케다 신겐이 '천태종 좌주 사문 신겐'이라고 서명한 서찰을 보내 그를 꾸짖자 비꼬는 어투로 "제육천마왕 오다 노부나가"라고 서명했는데, 불심이 깊은 상대가 '이 악마 같은 놈!'하고 부들거리자 '나 악마인데 어쩔 거냐 ㅋ'정도로 짓궂게 되받아친 것.
  5. 이 별명 때문에 노부나가가 이세계로 가서 진짜 마왕이 된다는 소설도 몇 편인가 나왔다. 귀무자 시리즈에선 아예 마족의 힘을 받아 최종 보스로 여러 번 나오기도.
  6. 후술된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사람이 없었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인물은 역사상으로 존재하지 않았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7. 큰아들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오다 노부히로라는 배다른 큰형이 있다
  8. 현재의 나고야성(名古屋城)과 한자는 다르지만 같은 곳.
  9. 타케치요는 이마가와가로 인질 보내질 것을, 납치 당해 오다가로 보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인 미카와의 마츠다이라 히로타다는 오다를 따를 것을 완강히 거부. 고아가 된 타케치요 이후 히로타다는 가신에게 살해되고, 그 틈을 타 미카와로 손을 뻗은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미카와 안쇼 성(安祥城)을 점령하여 오다 노부히데의 아들, 노부히로를 포로로 잡은 후 타케치요와 인질교환을 이루어, 이마가와의 영지로 가게된다. 팔려가는 타케치요
  10. 노부나가는 평소 가부키모노(화려한 옷차림과 의협적인 거친 행동을 보이는 당시 무가 젊은이들의 유행. 마에다 케이지를 떠올리면 된다.)로 가신들의 눈을 찌푸리게 했는데, 아버지 장례식에 가부키모노 차림으로 들어와서 한 웅큼의 향을 '휙' 내던지고 퇴장한 사건에서 절정을 이뤘다. (다만 이 사건에 대해선 노부나가가 가신들을 떠보기 위한 고의적인 사건이라고 하는 시각과 오와리 통일을 위해 중요한 시기 급사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라는 설 등이 있다).
  11. 흔히 이 노부나가의 동생 이름은 '오다 노부유키(織田信行)'라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이 이름을 '자기 손으로' 쓴 적은 없다고 한다. 본인이 쓴 문서에는 노부카츠(信勝), 타츠나리(達成), 노부나리(信成) 등의 이름을 썼다고 한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예전작에서는 노부유키라는 이름을 쓰다가 최근작에서 노부카츠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노부유키라는 이름을 안 쓸 때에는 노부카츠란 이름이 제일 많이 쓰인다.
  12. 일반적인 음독이라면 '츠치다'로 읽어야 하기에 프로 번역가들조차도 자칫 역사조사를 게을리하면 헷갈리는 경우가 많은데, '도타' 라고 읽어야 하는 성씨다.
  13. 스루가, 도토미는 지금의 시즈오카 현, 미카와는 아이치 현 동부
  14. 이 때 가타마사는 노부나가를 존경해 이름을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로 바꾼다.
  15. 후일 노부나가를 죽어라 괴롭힐 이시야마 합전의 개막이었다.
  16. 도요토미 히데요시
  17. 일본어로 신가리(殿;しんがり)라고 하는 이 임무는 퇴각중에 군의 후위를 맡아 적의 추격을 막는 것으로, 당연히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임무였다. 다만 사료에 따라 아케치 미츠히데와 같이 맡았다거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또한 후위를 맡았다는 서술이 있다.
  18. 이 엔랴쿠지를 정벌하기 위해 사찰에 불을 붙였다는 이유로 타케타 신겐에게 제육천마왕 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19. 총포에 맞아서 죽었다는 설이 있으나 신용하기 힘들고, 다만 폐결핵이나 위암 등의 설이 있다.
  20. 이러한 신겐과 겐신의 급사 때문에 전국시대 행운아.라고도 불린다.
  21. じんかん이라고 읽는다. 여기서 人間은 사람이라는 뜻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 세상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중국어에는 人間이라는 단어가 없다. 근대 일본에서야 人間을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기 시작했고, 이러한 표현이 한국어에도 영향을 미쳤다.
  22. 대하 드라마에서 노부나가가 아츠모리를 부르는 장면이 나올 땐 전부 닌겐으로 읽었다.
  23. 「6月 12日付 香宗我部親泰宛 織田信長書状」
  24. 「6月 14日付 香宗我部親泰 三好康長書状」
  25. 諏訪勝則의 견해-「織豊時代と三好康長」
  26.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했는지는 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보통 미츠히데는 천태종 신자라고 여겨지는데, 천태종의 총본산인 히에이잔은 이미 한참 전에 미츠히데 본인까지 합세한 군세로 파괴했었기 때문에 이제와 새삼 그것을 원한삼았다고 보기는 좀 어려울 수 있다.
  27. 閱兵 :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자신의 부대를 검사받음. 또는 전쟁 출진 전 사령관 앞에 군대를 사열시킨다는 의미. 閱(열)은 검사하다, 검열하다, 군대를 사열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다.
  28. 이 말은 에도시대의 역사가 라이 산요(頼山陽)의 일본외사(日本外史)에서 처음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실은 이 말은 실제로 언급되지 않았으며, 미츠히데의 진짜 의도를 파악한 가신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29. 다만 이 문장은 후대에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0. 현재는 한국어의 '등잔 밑이 어둡다'와 같은 의미의 속담으로도 쓰이고 있다
  31. 새벽 4시경으로 추정된다.
  32. 中將. 첫째아들인 노부타다를 말한다. 즉 처음에는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나 의심했다는 얘기다.
  33. 도쿠가와 가신 오쿠보 가문의 가훈으로 내려온 책이다. 당연히 사서로 보긴 어렵고, 그냥 신빙성 낮은 사료 중 하나다.
  34. 미츠히데의 모반 소식을 들은 노부나가는 "어쩔 수 없군(是非に及ばず)"이라 말했다고 한다. 혼노지의 변과 관련된 명대사 중 하나로 지금도 일본의 다른 창작물에서는 등장인물이 노부나가의 이 표현을 쓰는 경우가 간혹 보인다. 그런데 노부나가가 아사쿠라 가를 공격하다가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배신을 당해 철수한 가네가사키 퇴각 때에도 이 말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35. 현재 교토 지하철 카라스마오이케역 근처에 있던 노부나가의 저택. 오기마치 천황의 아들 사네히토 친왕이 이주하면서 고쇼가 되었다. 지금의 니조성과는 다른 곳이다.
  36. 신겐이 교토로 진격을 개시했을 때 노부나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것은 주력이 아자이, 아사쿠라 등에게 묶여 있어서 등뒤가 텅 비어있었기 때문일 뿐, 당시 이미 노부나가의 세력은 신겐의 2배 이상이었으므로 "신겐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노부나가를 짓밟을 뻔했다"는 일반의 인식은 사실보다 과장된 감이 있다. 실제로 아자이와 아사쿠라를 정리해 배후의 위협이 없어지고 명장 신겐이 죽자 그 대군이라던 신겐의 군대는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에게 손쉽게 격파당한다.
  37. 각각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거성 이름. 인색한 이에야스와 달리 두 다이묘가 모두 예술의 후원자였기 때문에 주로 문화/예술사를 설명할 때 이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38. 오다와 도요토미의 앞글자를 떼어 음독한 것.
  39. 참고로 경관의 이름이 진짜 아케치인지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루머에 불과하다.
  40. 오늘날의 일본어 표현으로는 '소-카(そうか)'
  41. 어느 정도인가 하면 예수회 선교사인 프로이스 면전에서 무신론을 당당하게 설파할 정도였다. 이러니 프로이스가 노부나가를 열심히 비판하는게 당연하지…….
  42. 당시 일본 남성의 평균키는 155cm 정도였다. 현대로 치환해 보면 체감상 185cm 정도 되는 셈이다.
  43. 1570년 6월 28일 아네가와姉川에서 오다 노부나가군이 양동작전으로 아자이淺井, 아사쿠라朝倉 연합군을 괴멸시킨 전투
  44. 만화 히카루의 바둑의 번외편에 이 야사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45. 그러나 나중에 한 번 배신했다가 귀순한 가신들 중에서 무능하다고 찍힌 사람들을 서슴 없이 추방했다. 하야시 히데사다나 사쿠마 노부모리, 이소노 카즈마사 등.
  46.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당시 거성이다.
  47. 신장공기 14권 텐쇼 9년 4월 10일조 기사.
  48. 특히 노부나가는 자신과 신분차이가 크게 나는 아랫사람이나 절의 주지와 같은 존경받는 신분의 인물들에게는 꽤나 깍듯이 예를 갖추고 자비롭게 대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쉽게 결론내리기 어려운 문제다.
  49. 시바 료타로의 <나라 훔친 이야기>에서는 광인에 가까운 노부나가의 캐릭터를 강조하기 위해 아예 충의로운 남자라서 한때 섬겼던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약간의 안쓰러운 감정이 남아 있는 아케치 미츠히데를 두들겨 패 가며 요시카게의 해골 술잔으로 술을 먹이는 장면이 나온다.
  50.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사실 혼간지 겐뇨의 아내는 신겐의 처 산죠노카타의 동생이었다. 배신을 일삼는 마키아벨리스트였던 신겐이 갑자기 정의를 운운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셈.
  51. 그냥 가문의 일원도 아니고 무려 이마가와 요시모토 본인의 조카였다! 그래서 간혹 픽션에서 등장하는 요시모토의 이에야스 학대는 전혀 근거가 없는 창작에 불과하다. 요시모토는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진 마츠다이라 가문을 자세력 내로 포섭하려 했을 뿐 특별히 가혹하게 대한 적이 없으므로, 두 가문이 갈라서는 건 사실 이에야스 측의 배신에 가깝다.
  52. 특정한 무사 집안의 위패를 대대로 모시는 절을 뜻한다. 다이묘 가문일 경우 대량의 시주나 밀접한 관계는 덤.
  53. 게다가 이 사건 때문에 노부나가는 우연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원래 히라 성의 삿사 나리마사의 가신들이 모반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조만간 노부나가가 직접 히라 성을 시찰하러 올 예정이었다. 이 시찰 소식을 들은 히라 성의 무사 중 하나가 노부나가는 모반의 소문을 믿고 자기들에게 할복을 명하러 오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서 노부나가를 암살할 음모를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 그런데 하필이면 노부나가가 갑작스럽게 스케줄을 바꿔 마물퇴치(...)를 하고 그 길로 히라 성에 들르지 않은 채 키요스 성으로 돌아가버려서 암살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
  54. 신장공기 1권 '뱀을 물리친 일' 조.
  55. 유럽에서는 베르사유 궁전 등을 일반인이 견학 가능했던 등 비슷한 문화가 있었다.
  56. 프로이스는 다이묘, 봉건영주를 '왕'으로 칭했다.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 같은 경우는 '여왕'으로 칭하고 있다.
  57. 사실 이 노부유키도 첫 번째 반란을 꾸몄을 때는 용서해 줬다. 이는 당시 상식으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관대한 처사였는데, 문제는 이 노부유키가 정신을 못 차리고 또 반란을 꾸민 것. 이 때만큼은 용서받지 못하고 끔살당했다. 문제는 이 관대한 처사가 후일의 픽션에서는 오히려 노부나가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자주 인용된다는 점인데, 당시의 상식으로는 모반자를 용서한 것은 거의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58. 대대로 그 가문을 섬겨온 집안.
  59. 시바타 카츠이에, 노부유키(친동생), 아라키 무라시게, 마츠나가 히사히데, 아사이 나가마사,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 등등...
  60. 오다 가문과 아자이 가문의 동맹 성립을 도왔었다
  61. 殿. 후군이라고도 번역된다. 아군이 후퇴할 때 뒤에 남아 적의 발을 묶는 보직으로, 패전의 경우는 자살행위나 다름없을 만큼 위험하다. 패배하여 얼마 남지 않은 병력을 두 부대로 쪼개서 본대가 도망칠 수 있도록 적을 막는 것이다.
  62. 실패한 닌자는 철저히 추적당해 처참하게 처형당했다.
  63. 미모 때문만은 아니다. 마왕의 이미지 때문에 간과하기 쉬우나 노부나가의 대에 전국시대의 사실상 패자가 된 가문이며, 노부나가 사후의 패자인 히데요시도 무시할 수 없었던 오다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하는 쪽이 이상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요도기미를 후처로 들인 것도 당연히 정치적 정통성을 얻으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밖에 없다.
  64.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시집간 오다 가의 여성들이 남편과 금슬이 좋았다는 것과는 별개인 만큼 미모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오다 가가 패자가 되기 이전에 아자이 나가마사나 다케다 카츠요리가 오다 가의 여성을 아내로 맞아는데 금슬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65. 그래서 그 당시 지식인 계층이라 할 수 있는 승려나 조정의 귀족들을 고용해 곁에 두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마에다 케이지가 많은 다이묘에게서 등용 제의를 받은 것도 그러한 당대 지식인층과 교류가 많았던 것이 한 원인이다.
  66. 많은 센고쿠 다이묘가 오다 정도의 약소 세력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지만, 오다 정도로 조직체계를 유지하며 발전한 예는 없다. 우에스기는 카게카츠 대에 이르러서야 자리를 잡았고, 다케다는 급속한 발전에 내실이 따라오지 못해 단결이 약했던 가신단이 신겐 사후 와해되었고 결국 멸망했다.
  67. 오다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성의 증축과 요새의 개보수를 했지만 경제적으로 취약했기 때문에 무리한 징세를 행했고 이때문에 토호나 영민들로부터 민심을 잃었다.
  68. 우에스기 가문에 후계자 문제로 내란이 발생했을때 앞에서 언급한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금을 받고 가케가츠를 도왔다. 이 때문에 호죠 가문 출신으로 우에스기 켄신의 양자가 되서 가케가츠와 싸웠던 가케토라가 죽게 되고 동맹관계였던 호죠는 적이 되어버린다.
  69. 사실 배후에서 오다의 책략이 여러번 개입했다고 한다.
  70. 일례로 그닥 유명하진 않지만, 오다 군과 우에스기 군이 격돌한 나나오 성 전투는 전국시대 최다 사상자를 낸 참패로 끝났다. 오다 측의 지휘관은 시바타 카츠이에.
  71. 이래서인지 소설 '대망'등의 오다 가는 당시의 국제 정세에서 소련군에 비유되는 경우가 있었다.
  72. 이 신장공기는 노부나가의 일생을 서술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료이다. 노부나가의 삶은 대개 여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많이 묘사되는 편. 책 제목의 '신장'은 본래 이름인 '노부나가'가 아니라, 윗사람에 대한 공경을 담아 공(公)을 붙여 쓴 것이기 때문에 '신초'라고 음독한다.
  73.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에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쓰던 칼인 요시모토 사몬지(다케다 신겐이 자신의 누이동생을 이마가와 집안에 시집보낼 때 예물로 준 것이라고)을 얻었는데 칼이 너무 길다며 가신 료스케에게 4치 5푼 정도 끊어내고 갈아서 다시 가져오라고 했다. 주군이 이마가와 요시모토보다 체력이 후달리는 건가 하고 놀라는 가신에게 "둔도(鈍刀)를 명도(銘刀)로 바꾼다는 말이다. 4치 5푼을 아끼다가 (무거워서 제대로 못 휘두르고) 칼에 못 이겨 패하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 대답했다고.(출처: 윤석철 《경영학의 진리체계》) 이 일화는 노부나가의 실용적인 일면을 보여주는 예화로써 신문 칼럼 등에서 자주 인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