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Raoul Charles Magrin-Vernerey (라울 샤를 마그랭 베르느레)
프랑스의 육군 군인. 한국전쟁 관련 서적에서는 그의 본명보다 가명인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로 자주 표기된다. 그의 이름인 라울(Raoul)은 영어의 랄프(Ralph, 영국에서는 레이프)에 해당하는 이름이다. 두 이름의 어원은 고대 노르드어 Raðulfr(라둘프르)에서 유래한 것으로 '늑대의 충고'라는 의미이다.
2 생애
2.1 출생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1892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 그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수많은 전투에 참전해 15차례 부상을 입고 15차례 표창[1]을 받으면서 대위로 진급했다. 1940년, 그는 젊은 나이에 중령으로 진급하고 나르비크 전투에서 제13외인부대(여단급)를 지휘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에 유일한 승리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항복하자 그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하여 이곳에 있던 자유 프랑스군에 가담했다. 이때 그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면서 이름을 '랄프 몽클라르'로 바꿨다. 그는 외인부대장으로 재직하면서 이탈리아 해군 대장을 포함해 1만 4천 명의 적군을 생포하고 마사우아항을 점령해 에리트레 전투를 종결짓기도 했다.
2.2 한국전쟁과 그의 대인배적 행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그런데 2차대전이 종전한 지 6년이 지난 1950년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었던 프랑스는 영국, 터키,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1950년 7월 22일 유엔군에 참여할 것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영국과 터키가 각각 1개 여단을 파견한 것과 달리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 따른 전후 복구 작업, NATO 가입, 인도차이나 전쟁 등 국내외 사정으로 인해 정상적인 군대를 파견하지 못하고, 단지 10여 명의 고위급 장교를 포함시킨 시찰단을 구성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프랑스 장교시찰단이 극동지역에 도착해도 일본을 벗어나지 않게 할 것임을 프랑스 정부에 통고했다. 왜냐하면 미국 정부는 전쟁 초기부터 좀 더 많은 유엔 회원국의 전투부대가 미국 측에 동참해 한국전쟁에 참가함으로써 이 전쟁이 단순히 '미국 대 소련' 간의 전쟁이 아니라 자유세계 대 공산세계 간의 전쟁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너무 적은 수의 부대를 파견하려는 나라의 참전 의사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때 프랑스에서는 많은 시민과 군인들이 실질적인 군대 파견을 요구했는데, 프랑스 육군참모총장인 블랑 장군과 제2차 세계대전 나르비크 전투의 전쟁 영웅으로서 당시 알제리 외인부대 감독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몽클라르 장군 등이 군대 파견을 주장하는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파견 결정권을 쥐고 있던 프랑스 국방차관 막스 르젠은 위의 몇 가지 사정 때문에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에 블랑 장군과 몽클라르 장군이 그를 설득하고 나섰다. 블랑 장군은 "기존 부대와 관계가 없는 특별부대를 창설하고, 현역 및 예비역에서 지원병을 받아 미군 보병대대 형태로 구성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르젠 차관은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부대를 단시일 내에 창설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면서 거절했다. 이에 블랑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이나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 중에서 엄격한 기준에 따라 선발한다면 가능하다"고 말했고, 몽클라르 장군도 이에 덧붙여 "만약 부대가 창설되면 제가 그 부대의 대장직을 맡겠습니다"라며 르젠 차관의 결심을 촉구했는데, 이 말에 르젠 차관은 몽클라르 장군에게 "내가 알기로는 미국의 대대는 육군 중령이 지휘관인데, 장군인 당신이 어떻게 대대장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몽클라르 장군은 "저는 육군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 왔습니다. 저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라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오오 장군님 오오 그 결과 르젠 차관도 마침내 이를 받아들이게 됐다.
이로써 몽클라르 중장은 장군인 채로 대대장이 되어[2] 유엔군 프랑스 대대의 초대 지휘관[3]을 역임하게 되었다. 비록 대대급 부대의 지휘를 위해 몽클라르는 자신의 계급을 중령으로 자처했지만 유엔군의 다른 지휘관들은 여전히 그를 중장으로 대우해주었다. 몽클라르는 당시 미8군사령관이던 매튜 B. 리지웨이 중장과 나이도 군 경력도 비슷했다. 그래도 그는 자신보다 군 경력도 짧고 나이도 어린 미군 지휘관들이 명령을 내려도 이에 개의치 않고 포탄이 난무하는 최일선에서 부대를 진두지휘했다. 그는 한국전쟁에서도 과거 2차대전 때 썼던 가명인 '몽클라르'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가 지휘하는 프랑스 대대는 한국에 도착한 후 미 육군 제2사단 23연대 휘하로 들어갔다. 1951년 2월 13일에서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에서 벌어졌던 지평리 전투에 참전한 프랑스 대대는 중국 인민지원군 제39군을 상대로 총검 돌격까지 해가면서[4] 혈투를 벌인 끝에 1950년 10월 중국 인민지원군 부대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래 처음으로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지평리 전투가 승리로 끝나자 몽클라르는 대대를 향해 "그대들은 이제 영광의 포로가 된 것이오!"라고 외쳤다고 한다.
2.3 말년
1964년 그가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했을 때,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은 현 프랑스 군사박물관인 앵발리드에서 직접 장례식을 주관하는 등 장군의 위국헌신에 대한 국가적 예우를 표했다.
3 평가
몽클라르 장군은 위에서 서술한 그의 행적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모로 비범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이분은 1950년대를 살아가던 당시 유럽인들은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던 동아시아의 듣보잡 약소국이었던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현역 중장이었지만 중령을 자처하면서까지 전쟁에 참전한 진정한 대인배이시다! 그는 이미 2차대전의 영웅으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기 때문에 본국에 그냥 남아 있었다면 좀 더 편안히 살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한국의 자유와 군인의 명예를 위해 기꺼이 참전했던 것이다.
사실 위에서 보듯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대대 전원이 프랑스 본국에서 실시된 지원병 모집을 통해 창설된 것이니 부대원 전원에게도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참고로 프랑스 대대는 한국전쟁이 휴전하자마자 바로 당시 베트남에서 벌어지던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5]하였고, 이 전쟁의 결정적 전투라고 할 수 있는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전하여 부대원 대부분이 전사하였기 때문에 생존자가 얼마 남지 않았다.
4 일화
6.25 전쟁 도중이던 1951년 1월 10일에 있었던 전투에서 프랑스 대대는 단 1개 소대, 25명의 총검 돌격으로 북한군 1개 대대를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대대가 입은 피해는 부상자 단 2명에 불과했다. 당시 소대장은 그 공으로 미군으로부터 엄청난 찬사를 받고 은성훈장까지 수여받았으며, 미군은 이에 큰 감명을 받아 미8군사령부는 리지웨이 장군 명의로 다음과 같은 명령서까지 내릴 정도였다.
총검은 아마 연합군의 최후의 비밀무기는 아닐지라도 귀관들이 무시할 수 없는 전략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총검이 단지 통조림 깡통을 따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6]을 모든 장병들은 유의해 주길 바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베르느레 중령중장의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뭐라고? 우리 병사들이 한 총검 돌격은 보병전술의 기초 중의 기초잖아? 그런데 저 양키놈들은 그걸 가지고 왜 난리인 거지?!"
- ↑ 그런데 자료마다 그의 부상 경험 및 훈장 수여 횟수를 15번에서 18번까지 각기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 ↑ 일반적인 계급 강등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대대장에 격을 맞추기 위해 만든 임시 중령 계급장을 달았다.
- ↑ 재임기간: 1950년 11월 29일 ~ 1951년 11월 30일.
- ↑ 중국 인민지원군 부대가 유엔군 진내에까지 쳐들어오자, 프랑스 대대는 모두 철모를 벗어던지고 머리에 빨간 수건을 동여맨 채 총검과 개머리판을 휘두르면서 중공군을 격퇴했다.
- ↑ 왜냐하면 당시 프랑스에서 가용가능한 장비와 부대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도차이나 전선에서 프랑스군은 장비가 없어서 구 일본군과 독일군의 장비까지 끌어다 썼어야 했다.http://blog.naver.com/sundin13/140011315491
- ↑ 미군은 이때까지만 해도 총검 돌격을 제1차 세계대전 때나 하던 구식 전술이라고 등한시했다. 물론 기관총의 등장과 기관단총의 보급(현대에는 돌격소총)으로 총검 돌격이 구식 전술로 전락할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지만, 양호한 급양상태에 높은 사기와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은 군대가 그렇지 못한 병사들에게 발휘하는 총검 돌격은 적군에게 엄청난 심리적 압박과 공포감을 줄 수 있다. 다만 미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과 싸우면서 총검 돌격의 한계를 경험했으니, 당시 전쟁의 전훈을 충실히 좇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