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S-107

(컬럼비아 호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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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월 16일, 28번째 발사 순간. 모든 일의 화근이자 마지막 발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던 이 순간을 마지막으로 컬럼비아는 지상으로 되돌아오지 못했다.

1 컬럼비아에 대한 소개

아폴로 계획을 이어 소련소유즈에 대항하기 위해 6년만에 재개된 유인 우주왕복선 실험의 주인공으로, 제작 계약은 1972년 7월 20일에 했고 제작 후 198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의 우주 진출 이래 20주년이 되는 날에 존 영로버트 크리펀[1]의 STS-1 미션으로 데뷔한 역사상 최초의 재활용 가능 우주선이다. 이름은 미국 건국 초기에 탐험선으로 활약했던 범선 컬럼비아[2]에서 따왔다.

제식번호는 OV-102, 추력은 3,000톤이나 되며 전체 중량은 2,000톤이다. 승무원이 타는 궤도선 컬럼비아, 그리고 외부 연료탱크와 고체 연료 로켓부스터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셋을 통틀어 '우주왕복선'이라고 칭한다...지만 왠지 사람들은 그냥 비행기 모양의 간지나는 궤도선만 우주왕복선으로 쳐준다(...) 전체길이는 56.1m. 궤도선은 전장 37.2m 전체 폭 23.8m로 제트여객기 DC-9와 거의 비슷하고, 최대 7명의 승무원이 탑승하며 표면에는 내열용 타일이 장착되어 있다. 초창기 STS-1~4의 궤도비행 테스트를 비롯한 총 28회의 우주 임무를 수행했으며, NASAESA의 합작 프로젝트인 스페이스랩 프로그램을 위한 EDO(Extended Duration Orbiter) 팔레트[3]가 설치되어 십수일 단위의 장기간 임무도 가능했다. 컬럼비아를 거쳐간 우주비행사의 수는 169명에 달한다. STS-1을 시작으로 22년간 26번의 임무를 무사히 마쳤으나 아래에서 소개할 마지막 임무였던 28번째 임무 STS-107을 수행하고 돌아오던중 공중분해되고 만다.

다른 셔틀들과의 다른 점이 있다면, 프로토타입에 가까운 특성상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ISS 미션에는 써먹을 수가 없었다. 엔데버에 태울 작정으로 만들어진 EDO 팔레트를 엔데버가 포기한 것도 결국은 그나마 가장 가벼운 엔데버를 ISS 전용으로 써먹으려던 것. 때문에 컬럼비아는 챌린저 이후 유일하게 ISS에 방문하지 못한 우주왕복선이다. 대신 그 반대급부로 셔틀 프로그램 역사상 장기 미션 목록 랭킹은 죄다 컬럼비아의 EDO 미션이 차지하고 있다. 참고로 STS-107은 4위이며, 3위의 엔데버 미션이 엔데버에 EDO를 태워 써먹은 딱 한번의 그 미션 STS-67. 원래는 컬럼비아 역시 EDO 팔레트를 뗀 다음 이런저런 정비를 통해 ISS에 보낼 예정이었으나...

1998년 4월에는 인간 신경계에 미치는 무중력상태의 영향에 관해 실험할 목적으로 발사되어 16일간 우주에 머무르면서 불면증, 불안정 등에 대한 실험을 하기도 했으며, 귀뚜라미, 물고기, , 달팽이 등 2,000여마리의 동물이 함께 탑승한뒤 실험 대상이 되면서 '우주 노아의 방주' 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또한 1999년에는 STS-93 미션에서 찬드라 엑스선 관측선을 발사하고 2002년 STS-109 미션에서는 허블 우주 망원경의 4차 보수를 진행하기도 했다.

1981년 STS-1 미션을 한달 앞두고 3월 19일경 점검을 진행하던 기술자 5명이 질소만 가득찬 셔틀에 들어가 점검하다 산소 부족으로 질식사한 흑역사도 있다.

2 STS-107의 승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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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데이비드 브라운, 릭 허즈번드, 로렐 클라크, 칼파나 차울라, 마이클 앤더슨, 윌리엄 맥쿨, 일란 라몬. 전원 2004년 2월 3일명예 훈장이 추서되었다.

데이비드 맥도웰 브라운(미션 스페셜리스트) - 1956년 4월 16일 버지니아주 출생. 미 해군 항공군의관으로 활동하다 해군 조종사가 된 역대 보기드문 커리어를 갖고 있다. 1996년 4월에 우주비행사로 선발되어 같은 해 8월에 존슨 우주 센터에서 훈련을 개시한뒤 2년간 훈련을 수료하고 미션 스페셜리스트에 선정되었다. 사망 당시 계급은 대령.

릭 더글라스 허즈번드(지휘관) - 1957년 7월 12일생, 텍사스 출신으로 4살 때부터 유리 가가린머큐리 세븐을 보며 우주비행사를 꿈꿨으며, 1994년 우주비행사로 선발된 뒤 1999년에 STS-96으로 첫 비행을 했던 미 공군 대령이자 기계공학 석사이다. 귀환하는대로 아내 에블린과 결혼 21주년을 축하할 예정이었다.

로렐 블레어 샐턴 클라크(미션 스페셜리스트) - 1961년 3월 10일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태어났고, 미 해군에서 네이비 씰, 잠수함, 항공을 넘나들며 해양의학을 연구하다 1996년 4월 우주비행사 후보로서 선발된 뒤 2년 후 존슨 우주 센터에서 훈련을 수료해 미션 스페셜리스트로 선정되었다. 사망 당시 대령. 해군 시절부터 함께 활동한 NASA의 항공의무관 조너선 클라크와 결혼하였고 8살 난 아들 이안[4]이 있었다.

칼파나 차울라(미션 스페셜리스트) - 1961년 7월 1일 인도에서 태어났으며[5] 1994년 12월에 우주비행사 후보로서 선발된 뒤 1995년 3월 존슨 우주 센터에서 훈련을 개시해 1년 후 미션 스페셜리스트로 선정된, 사상 최초의 인도계 미국인 우주비행사이다. 첫 비행은 STS-87의 로봇 팔 오퍼레이터였는데, 당시 로봇 팔 조작 중에 조금 기우뚱하는 바람에 동료들이 선외활동을 해야 했다고.

마이클 필립 앤더슨(페이로드 커맨더) - 1959년 12월 25일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1994년 12월에 우주비행사 후보로 선발되었다. 존슨 우주 센터에서 훈련을 개시해 1년 후 미션 스페셜리스트로 선정된 미 공군 중령이다. 첫 미션은 STS-89 미르-엔데버 도킹 미션이었다.

윌리엄 캐머런 맥쿨(파일럿) - 1961년 9월 23일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미 해군 중령이자 컴퓨터 과학 석사로, 미국해군사관학교 시절 마라톤 선수로도 활동했다. 1996년 우주비행사에 선발되었고 이 미션이 첫 비행이었다.

일란 라몬(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 - 1954년 6월 20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81년에 F-16의 파일럿으로 이라크원자로를 폭격하는 오페라 작전에 참가했던 이스라엘 공군의 베테랑 조종사였다. 1997년 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로 선정되어 첫 이스라엘인 우주비행사가 되었다. 원래 종교적인 면은 그냥 나이롱 신자(...)에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발사를 앞두고 홀로코스트를 기념하는 많은 랍비와 유대인들의 성원을 받아서 미션을 앞두고부터는 나름대로 독실한 생활을 했고, 많은 유대인들이 보낸 기념물을 우주에 가져갔다.

3 마지막 임무 수행

2003년 1월 16일 오전 7시 5분, 연료 급유한지 1시간이 지나고 주황색 외부연료통에 200만 리터의 액체수소와 산소를 채워넣었다. 사령관은 NASA의 전통에 따라 탑승준비팀의 책임자와 플레잉 카드로 게임을 했고, 책임자가 지기 전까지는 대원들은 이동 차량에 타지 못했다. 독특한 전통이다. 7시 30분 카드 게임에서 이긴 뒤 이동차량을 타고 우주왕복선으로 출발했고, 7시 53분에 사령관을 비롯한 모든 승무원들이 탑승했다.

10시 38분, 카운트 다운을 시작하고 1분 뒤 이륙했다. 고도 43km에서 부스터를 분리했고, 10시 47분, 컴퓨터가 주 엔진의 가동을 중단하면서 우주에 무사히 진입했다. 한편, NASA에서는 발사 순간 영상을 분석하던 도중, 발사 직후 외부 연료통의 절연 조각 하나가 떨어져 나간 뒤 컬럼비아의 날개를 강타한 것을 확인했다. 다만 예전에도 자주 있었던 현상인지라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1월 17일 컬럼비아가 시속 28,000km로 궤도에 진입하고 우주비행사들은 일정을 수행했다. 79가지 실험[6]을 마친 뒤, 2월 1일 승무원들은 다시 우주복을 입고 지구로 진입을 시도했다.



미션 알람 음악 중 윌리엄 맥쿨의 신청곡인 존 레논의 Imagine...

4 사고

2003년 2월 1일 오전 8시 10분, 존슨 우주기지에서 대기권 진입을 승인하고 8시 15분, 사령관이 재진입을 위한 위치로 이동했다. 받음각 40도를 이루고 대기권으로 진입했다. 8시 44분, 시속 28,000km로 하강했다. 마찰열로 날개 온도는 1,400도 가까이 오르고, 8시 54분에는 착륙이 순조로이 진행되는 듯 했으나, 8시 59분 왼쪽 바퀴 2개의 압력감지기를 시작으로 감지기들이 계속해서 고장나기 시작했다. 관제소에선 사령관과 교신을 하려했으나 갑자기 끊겼고 끝없이 시도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오전 9시, 지상에서 컬럼비아 호의 귀환을 구경하려던 사람들은 생에 둘도 없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컬럼비아 호가 지구로 진입하다가 공중분해돼버린 것이다. 관제소에서는 아직 이 상황을 몰랐고, 9시 3분 텍사스 동부 헴프힐의 동쪽 상공에서 굉음이 들렸다. 9시 12분이 되어서야 관제소에서도 우주왕복선이 사고를 당했단 사실을 알게 됐다.

왕복선은 84,000개의 이상의 잔해가 되어 텍사스와 루이지애나에 쏟아졌고, 오후 1시, NASA가 컬럼비아 호의 폭발을 공식으로 언급한 뒤, 우주센터에 조기가 게양되었다.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이 긴급 애도 성명을 냈을 정도로 나라는 큰 충격에 빠졌다.

더욱이 이 미션은 예전 STS-51-L와 달리 외국인 우주비행사가 둘이나 있었다. 인도 출신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7]인 칼파나 차울라와 이스라엘 온 국민들의 열성적인 성원을 받고 성공적으로 우주 임무를 수행했던 일란 라몬이다. 특히 이스라엘이 슬픔에 빠지자[8] 이스라엘과는 쌈박질이 일상이었던 팔레스타인, 이집트, 요르단 등 여러 이웃 나라들도 공식적으로 조의를 표했다. 다만 이라크에서만큼은 유독 사악한 침략자[9]가 천벌을 받았다!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쳐서 빈축을 샀다. 하지만 이는 이라크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당장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이라크 국내에서 일어날뻔한 일이었고 (다행이 핵연료가 장전되기 전이라서, 원자력 대 재앙으로 발전되지 않았다.), 당시 UN 안보리는 미국도 실드를 못쳐주고만장일치로 이스라엘에 대한 제재안을 통과시켰을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었다. 이 오시라크 원전은 재건되다 걸프전때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

한편, 폭발한 잔해가 대서양에 추락했고 유해도 대서양 해저에서 인양된 STS-51-L 챌린저 참사 때와 달리 이 미션은 북미 내륙지역 고고도 상공에서 폭발한 사고였기 때문에 승무원들의 유해가 내륙에서 발견되었다.[10] 물론 유해가 온전한 형태로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폭발도 폭발이거니와 탑재되었던 미생물들이 잔해와 유해에서 증식하면서 엄청난 훼손이 발생했다. 다만 승무원들의 유품 일부가 발견되고 이를 통해 일부나마 신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발견된 유품 중 일란 라몬 대령이 우주에서 썼던 일기는 도저히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기적에 가까운 확률로 일부 내용이 보존된 채[11] 발견되어 다시금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다만 이 과정에서 NASA가 인체에 유해할 수 있는 잔해들이 많으므로 전문 수색인력이 아닌 일반인들은 잔해 수집을 자제해달라 요청[12] 했지만 일부 민간인들이 쌩까고 잔해를 주워다가 eBay 같은 데에 매물로 올리기도 했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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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당시 아메리칸 항공 민항기가 일대를 지나면서 셔틀 파편에 의해 발생한 화재를 목격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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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수풀에서 발견된 미션 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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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란 라몬의 일기 조각

이외에도 검색해보면 여러 사진이 나오는데, 우주복 헬멧, 신발 조각 같은 일부 사진은 보기에 따라 상당히 섬뜩하기 때문에 주의를 요한다.

5 사고 조사

3시간 만에 NASA 부국장은 퇴역한 해군 대장 해롤드 게먼에게 수사 지휘를 부탁했고, 백악관의 승인을 받아내 12명의 조사관을 뽑았다.[14]

바퀴칸에서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높게 일어난걸 확인했는데, 이는 표면에 틈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이게 진짜인지 알기 위해서는 블랙박스를 회수해야 했는데 문제는 컬럼비아 호의 블랙박스는 추락과 화재에 견디도록 만들어지지 않았고, 60km 상공에서 떨어진지라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 찾기가 힘들었고, 찾는다 하더라도 멀쩡할 가능성이 적었다. 결국 잔해 회수 작전을 시작해 미국 전역에서 25,000명을 뽑은 뒤 텍사스루이지애나를 수색했으나 6주가 지나도록 성과는 없었다. 6주간 발견한 잔해들의 무게와 크기 등을 계산해 예상 낙하지점[15]을 알아낸 뒤 그곳에 수색대를 파견했고, 인디언 출신 소방관 천시 버드테일이 기록장치를 찾아냈다. 다행히 멀쩡한 상태였다.

기록장치 분석결과 온도가 상승하기 시작한 곳은 바퀴칸이 아니라 왼쪽 날개의 앞쪽이었다. 구멍은 재진입 전부터 있었고, 비행 초기단계에서 온도 상승의 초기 징후가 보인 것으로 드러났다. 다시 말해, 대기권 진입 전에 문제가 발생했단 것이었다. 발사 후 82초에 타일이 떨어져나가 날개에 부딪힌 것을 떠올린 조사관들은 2개월에 걸쳐서 영상을 좀 더 선명하고 자세하게 복원한 뒤 분석했다. 떨어진 타일의 무게는 약 770g으로 크기는 작은 서류 가방 정도였으나 시속 800km로 충돌해 충격량이 엄청났다.

이후 버드 스트라이크 실험 장비를 개조해 서류가방 크기의 절연체를 RCC복합체에 발사하는 실험을 계획했으나 문제는 절연판 하나의 가격이 6억 이상이나 되다보니, NASA에서 실험용으로 주기를 꺼려했다. 다시 더 깊이 조사한 끝에 고장난 온도기의 순서를 파악해 어디부터 고장난 지 알아내고 고장난 절연판들만 골라서 얻어낸 뒤 실험을 시작했다. 절연체를 발사하는 순간, 8번 절연판에 구멍이 생겼다. 이로써 사고의 원인이 밝혀졌다.

6 사고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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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륙 당시 충격으로 절연체가 떨어져나가 왼쪽 날개의 8번 절연판을 강타하면서 구멍이 생겼다. 당시에는 이렇게 떨어져 나가는게 흔한 일이라 그리 신경쓰지 않았으나, 생각보다 문제는 심각한 상태였다. 지구 대기권으로 재진입할 때 충돌로 생긴 25cm의 구멍으로 1,400도의 열기가 들어오면서 왼쪽 날개에 구멍을 뚫어 공기에 저항이 발생했고, 공기와의 마찰이 계속해서 생기면서 온도는 4,400도까지 올라갔다. 온도 감지기는 온도를 버티다 못해 다 타버려서 작동을 멈추고 겉면이 떨어져 나가 내부 구조물이 녹아내리고 모든 장비가 고장나버리며 기체가 불안정해져 공중에서 분해된것이다.

7 사고 이후

현재의 오비터 디자인으로는, 컬럼비아의 승무원이 재돌입에서 생존할 가능성은 없었다.[16]
—컬럼비아 사고 조사위원회 보고서(Columbia Accident Investigation Board Report)

사고 원인은 드러났고, 17년 전처럼 NASA의 안전불감증이 다시금 도마 위에 올랐다. 하지만 방열판 문제는 셔틀 발사의 원리 자체에 기인했기에 뿌리를 온전히 뽑을 수 없이 점검 절차와 그에 따른 비용만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결국 우주왕복선 프로그램 전체의 폐지로 이어졌다.

NASA2003년 8월 26일 사고 보고서를 발표했고, 대책으로 남은 우주왕복선들의 절연체를 약한 부분을 싹 제거하고, 왕복선이 궤도에 오를 시 화물칸에 새로 탑재된 카메라+레이저 스캐너가 장치된 막대기를 로봇팔로[17] 잡아서 조종실에서 보이지 않는 기체 하면을 샅샅이 사진찍어서 기체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도록 했고, 지구로 다시 떨어지는 연료 탱크 또한 안 보일 때까지 승무원이 직접 관측하도록 했다.[18] 덧붙여서, ISS에서 귀환 시에도 ISS 승무원이 관측하는 앞에서 360도 제자리선회를 하면서 기체에 이상이 없는지 살펴보고 나서야 귀환하도록 절차를 개선했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예방'일 뿐 원인이 된 충돌의 '방지'는 불가능했다. 당장 컬럼비아 폭발 이후 재개된 첫 미션인 STS-114 디스커버리 미션에서부터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여 긴급 EVA로 수리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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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S-1에서의 컬럼비아 - 수직미익 좌우의 벗겨진 부분에 주목. 컬럼비아가 처음 제작되던 70년대부터 제기된 문제였으나 2010년대가 되어도 해결되지 못했다.


STS-114에서 미션 스페셜리스트 앤디 토마스가 촬영한 사진 - 2년 전에 난리가 났는데 또 떨어져나갔다.

한편 이 사고 이후로 만약 컬럼비아처럼 지구 귀환이 불가능한 손상이 재발했을 경우 승무원만이라도 귀환시킬 수 있도록 구조 계획이 만들어졌다. 이른바 STS-3xx 미션. 약간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컬럼비아도 같은 식으로 구조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어려웠을 듯. (당시 보잉 엔지니어의 글) 따라서 이후의 우주왕복선 미션에서는 다른 우주왕복선 1기가 비상시 구조용으로 원래 미션을 수행한 왕복선이 귀환할 때까지 40일 내 발사가 가능하도록 완비시키는 규정도 생겼다. 이 규정 덕분에 NASA 발사팀은 이후 미션 1회마다 우주왕복선을 한 대 더 준비시키느라 엄청난 예산과 인력의 압박을 받았고,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의 조기 종료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었다. 또한, ISS 공사에 집중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위성 수리와 회수 미션을 전부 백지화하여 ISS의 대피가 불가능한 미션은 없이 했다. 뭐, 미소중력 실험 같은 것들은 ISS가 확장되면서 충분히 ISS가 감당해낼 수 있긴 했지만... 다만 예외가 하나 있긴 했는데 바로 STS-125 미션. 바로 허블 우주 망원경의 마지막 서비스 미션[19]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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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23일, 아틀란티스 오비터가 STS-125 미션 발사 준비 태세에 들어가 있는 모습. 멀리 뒤쪽 다른 발사대에 구조용으로 엔데버도 발사대기 상태로 세팅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거 한다고 아레스까지 치워버리고 두 대를 세워놨으니 흠좀무.

여담이지만 마지막 우주왕복선 비행은 원래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오비터인 엔데버의 STS-134가 될 예정이었으나, STS-133, 134 미션 준비 중 구조용 왕복선으로 지정된 아틀란티스가 발사대기 상태로 준비되어 있던 점에 착안해 STS-135 미션을 급히 수립하고 NASA높으신 분들에게 눈물의 호소를 하여 예산을 더 받아내 마지막으로 한번 더 우주에 나가게 되었다. STS-135 미션에서는 구조용 우주왕복선이 당연히 없으므로 비상 시에는 ISS로 피난하기 위해 승무원도 평소보다 적은 4명만 탑승했다. 왕복선이 망가졌을 경우 1년간 소유즈 승무원을 한 명씩 줄여가면서(즉, NASA의 정식 ISS 승무원 TO를 제외해가며) 분기마다 한 명씩 귀환시키려 했다고...

8 기타

알링턴 국립묘지에 이 우주인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설립되었고, 6월 발사를 앞둔 화성 탐사 로버 스피릿에 추모패가 달렸다. 로버가 착지한 장소는 컬럼비아 메모리얼 스테이션(Columbia Memorial Station)으로 이름지어졌고, 탐사한 화성의 지형 중 7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있는 언덕에 이들의 이름이 각각 붙여졌으며, 소행성이 이들의 이름을 따와서 명명되기도 했다. 휴스턴의 야구팀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시즌 개막을 앞두고 전해진 비보에 개막전에서 NASA 관계자들을 대거 초청하여 추모 행사를 열어줬다. 우주비행사들이 성조기를 들고 나왔고, ISS 체류자들이 추모 메시지를 보내왔으며 순직자들의 유가족들이 시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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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앤더슨의 아내가 딸 케이시에게 107번 유니폼을 입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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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 애스트로스의 2003년 유니폼 패치. 사진의 선수는 호세 비즈카이노와 옥타비오 도텔.

한편 2003년 2월 2일, 휴스턴 로케츠는 당초 예정되어있던 음력 설날 마케팅[20]을 강행했다가 넌씨눈 소리를 들었다.

아폴로 1호와 STS-51-L 챌린저 폭발사고도 1월 말에 있었던지라 이후 NASA에서는 저주받은 시기 1월 말~2월 초 기간을 추모 기간으로 정하고 고인들을 기리고 있다.

인디 포스트록 밴드 The Evpatoria Report의 곡 Taijin Kyofusho의 초반 부분에 이 사고 당시의 통신 음성기록 일부가 들어가 있다. 가사 없이 매우 우울한 음악으로, 지상 관계자들이 계속 호출해도 응답없는 컬럼비아 호에게서 느꼈을 절망감과 슬픔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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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레드불 스트라토스 팀의 펠릭스 바움가르트너가 39km 상공에서 맨몸으로 낙하하여 음속을 돌파하고 무사히 착지하자, STS-107 승무원들의 비상 탈출이 가능했다면(사실은 이것조차 불투명했고 결국 이뤄지지 못했지만...) 생존할 수 있었을 지를 두고 많은 우주덕들 사이에서 탄식이 나오기도 했다. 바움가르트너가 뛰어내린 고도가 실제로 폭발이 일어난 성층권급 고도와 얼추 비슷하기도 하고(물론 컬럼비아의 폭발 고도가 더 높긴 하다) F-15, F-100의 추락 사례 중 초음속 비행 중에 탈출에 성공한 사례도 있어서 그럴 듯도 하다. 하지만 일반 항공기의 사출보다 훨씬 고난이도인 우주왕복선 낙하 시스템의 특성상 탈출 자체가 힘들거니와 탈출해도 당시 기술력에 의한 여압복으로는 생존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는게 중론.[21] 이 레드불 스트라토스 팀의 의료팀장인 우주왕복선 프로그램 항공의무관 출신 조너선 클라크는 이 사고로 희생된 로렐 클라크의 남편[22]으로, 사고 이후 우주에서 인간의 생존과 안전을 위한 연구에 매진했다. 컨스텔레이션 계획이 백지화되고 NASA에서 나와 진행한 연구가 바로 레드불 스트라토스라고.[23]

2016년 3월 발사된 시그너스 화물선 CRS-OA-6에 STS-107 사령관 릭 허즈번드의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이 시그너스는 재돌입을 견디지 못하고 타버리도록 만들어진 물건이라 고인드립 논란이 있다(...)

KSP 버전 STS-107 컬럼비아 헌정 스페이스햅 미션 영상.
  1. 이 분은 딸 역시 휴스턴의 우주인 훈련센터에서 근무했고, STS-107 사고 당시 울먹이는 딸에게서 비보를 전해들었다.
  2. 1972년 보스톤을 떠나 컬럼비아 강을 탐험했다. 또한 아폴로 11호 사령선의 이름이기도 하다.
  3. 셔틀 화물칸 뒤에 액체수소 액체산소 등등 장기간 우주 체류에 쓰일 온갖 장비들을 바리바리 쑤셔넣은(?) 장비. 이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미술 시간에 쓰는 그 팔레트처럼 필요하다 싶은걸 넣을 수 있는 만큼 마구마구 쑤셔넣은 봇짐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엔 엔데버에 설치되었지만 엔데버에서는 한 번만 쓰이고 이후에는 컬럼비아에 탑재되었다. 이 장비 역시 STS-107을 마지막으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4. NASA에 우주인 지원서를 냈었을 때 이미 뱃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5. 다만 어릴 적에 상급 학교로의 월반/조기진학을 위해 생년월일을 몇 달 앞당겼다. 아드리안 벨트레? 그래서 공식 서류상으로는 1962년 3월 17일생.
  6. 무중력이 인체세포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실험이 포함되었다. 이나 골다공증 치료에 쓰일 예정이었다. 이런 실험 때문에 승무원들 중에 의사가 둘이나 포함되었다. 또한, 생물학 실험에 쓸 미생물들도 많이 들어 있었다.
  7. 인도인 역대 최초는 라케시 샤르마로, 소련의 살류트 프로그램에서 활동했다. 차울라의 경우는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미국 국적을 땄기 때문에 그냥 미국인이긴 하다.
  8.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일란 라몬 대령의 아버지가 아들의 귀환을 다루는 특집 생방송에 출연하고 있었다. 생방송 중에 이런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온 것이다.
  9. 일란 라몬은 선술했듯이 오시라크 원전 공습에 참여했던 F-16 조종사 8인 중에서 최연소였다.
  10. 즉, 동부 케네디 우주센터가 아닌 서부 에드워즈 공군기지에 착륙할 예정이었다면 모든 잔해와 유해는 동태평양에 떨어졌을 것이고 수습도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11. 볼펜과 연필로 쓰여진 이 글을 복원하고 해독하기 위해 이스라엘 최고의 법의학 전문가들이 동원되었다.
  12. 항공기 사고가 다 그렇듯이 위험물질이 어디로 떨어졌는지 모르기 때문. 이 때는 그걸로 모자라 생물학 실험에 쓰인 미생물들까지 흩어졌고 증식했다.
  13. 잔해들이 시가지나 교외 전원주택 같은 곳에도 마구마구 떨어졌다. 괜히 나서지 말아달라는 권고 외에는 이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
  14. 챌린저 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한 샐리 라이드가 다시 초빙되었고, 최초의 여성 공군청장을 지낸 실라 위드놀 MIT 교수, 1996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더글러스 오셔로프도 초빙되었다. 참고로 이 분의 지도교수는 챌린저 진상규명에 공헌했던 리처드 파인만. 하지만 대부분은 미군 쪽 인사들이었다.
  15. 굉음이 들렸던 헴프힐 부근
  16. It is important to note at the outset that Columbia broke up during a phase of flight that, given the current design of the Orbiter, offered no possibility of crew survival.
  17. 캐나다에서 만든 CANADARM
  18. 원칙적으로 '비디오'를 찍고, 사람이 부족한 경우 최소한 사진만이라도 찍도록 했다.
  19. 앞으론 수리 못 할테니 어떻게든 오래오래 써먹으려고 최대한 오래 버틸만한 부품으로 갈아치웠고, 나중에 재돌입에 쓰일 설비도 부착했다. 이 팀 중에는 컬럼비아의 마지막 귀환이었던 STS-109 허블 4차 서비스 미션 팀원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20. 2월 1일이 2003년 설날 당일이었다. 왜 이런 마케팅을 했냐면 야오밍이 주가를 한창 올리던 시절이기 때문. 새해 초부터 홍보를 열심히 하면서 이 참사가 터질 리는 상상도 못했을 테지만...
  21. 바움가르트너가 맨몸 낙하를 성공시킨 옷을 보면 사실상 최신형 우주복 수준이다. 그것도 2000~10년대의 연구와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것. 80~90년대의 옷인데다 구명보트 겸용으로 불어나야 하는 군더더기(?)가 많이 붙은 셔틀 여압복은 이런 기록에 도전하기엔 애로사항이 많다.
  22. 해군 시절부터 알고 지내며 결혼까지 했다가 NASA로 옮긴 뒤 아내도 우주인으로 선발되었다.
  23. 아들 이안은 10년이 지난 뒤 대학에서 어머니처럼 해양생물학을 공부하고 있다. 클수록 엄마의 얼굴이 역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