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설명하는 항목.
비잔틴과 로마는 왜 싸우는걸까
목차
1 현대 팔레스타인인의 기원
오늘날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은 어디서 왔는가? 가장 간단한 설명은 현대 팔레스타인인은 이슬람 정복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한 고대 유대인[1]의 후손이다.
지속적인 대규모 이주에도 불구하고 유대-팔레스타인 지방에 남은 유대인들은 천년이 넘는 기간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으며 점차 동화되었다. 특히 핏줄보다는 종교와 언어가 정체성을 규정하는 아랍인의 특성, 그리고 이교도에 대한 직간접적 꾸준한 개종 시도는 유대인들을 점차 아랍인으로 바꾸었다. 대표적인 방식으로 샤리아에 따라 남성 무슬림이 타종교 여성과 결혼하는 것은 막지 않지만, 여성 무슬림이 타종교 남성과 결혼하여 개종하는 상황은 금지된다. 모계세습이 없는 특성상 이슬람교도가 타종교인들을 흡수하여 자연적으로 계속 증가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일단 같은 아브라함계 종교다보니까 세금을 더 내면서 유대교를 믿는것보다 그냥 세금 안내고 이슬람교를 믿는게 편하다는 심리로 많은 수가 개종한 것도 있었다.
그 결과 점점 팔레스타인 본토의 유대인들은 아랍화되었고, 유대인으로써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이들은 극히 소수가 되었다.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히브리어는 사실상 유지되지 않고 대부분 아랍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 팔레스타인 인구조사에서 지역의 유대인의 수는 불과 2~3%였으며 이들도 언어는 아랍어를 사용했다. 반면 십자군 전쟁의 영향이 짙게 남은 지역인 만큼 주로 동방 카톨릭 교회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당시 강제 이주 당했던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에 속한 기독교인 인구는 오히려 거의 30~40% 가까울 만큼 컸다.[2][3]
즉, 20세기 초의 기준에서 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랍인과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차이밖에 없는 한 민족이나 다름없었다. 팔레스타인 토착 유대인들 내에서도 아랍어가 통용되었으며 히브리어는 오직 교회언어로써만 사용되었을 뿐이다. [4] 또한 토착 유대인과 아랍인들 내에선 오랜 역사를 함께 살아오면서 유전자를 나눴기에 외모도 차이를 찾아보기 힘든 중동인의 형상이었다.
또한 팔레스타인인들이 단지 아라비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의 다른 아랍인들과 동일한 민족이며 팔레스타인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시온주의 측의 주장도 있지만 19세기에는 베두인족을 제외하고는 팔레스타인 사람 아무도 스스로를 아랍인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당시 '아랍인'이란 농촌의 유목민을 뜻했다. '범(汎) 아랍 민족'이라는 개념은 20세기 아랍민족주의와 바트당 등의 강력한 세속주의의 바람에 의해 탄생하였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실제로 아랍인의 기준은 아랍어와 이슬람교지만 표준아랍어가 아닌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구어체 아랍어는 나라에 따라 사투리라고 부르기엔 언어가 너무 달라 아랍권 주민들간에 서로 통역이 필요할 정도다.
2 기원전 10세기 이전
유대인들이 도래하기 이전에도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거의 인류 최초의 문명의 한 갈래가 꽃피고 있었으며, 이미 역사 시기에 들어서기도 이전인 BC 5000년 이전에 예리코(성경의 표현으론 여리고) 지역에 성곽과 망루등 도시문화의 흔적이 출토되는 것이 이것을 반증한다.
초기 청동기시대(BC 3000년경~2000년경)에 셈족이 처음 나타났으며, 중기 청동기시대(BC 2000경~1550경)에 이르러 역사가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북동쪽에서 침투한 셈족 계통의 아모리족은 이 지역 인구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그밖에 이집트인과 힉소스족, 후르리족(구약성서에서는 호리족) 등이 이 지역에 들어왔다. 후기 청동기시대(BC 1550년경~1200년경)에는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족(구약성서에서는 헷 족속)이 도전해오기도 했지만 주로 이집트가 통치했다. 이런 팔레스타인에 상주하게 된 다양한 여러 민족들을 구약 성경에서는 가나안 족속들이라고 호칭한다.
그 시대는 하피루 또는 아피루라는 약탈자들의 침략이 두드러졌다.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인종들로 이루어진 이들을 본래의 히브리인들로 생각하고 있다. 후대의 이스라엘은 이 하피루 가운데 한 분파이거나 이들의 연합체라고 한다. 그러나 BC 13세기말에 가나안 남쪽지역에 대한 이집트의 지배는 약화되었고 히타이트족은 북쪽에서 침입한 적의 공격 때문에 멸망하고 말았다. BC 1250년경으로 여겨지는 후기 청동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로 바뀌는 무렵, 위의 하피루, 즉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의 고지대와 남쪽지방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다음 세기에 가나안은 크레타에서 온 듯한 블레셋(필리스티아)인들의 침입을 받았다. 필리스틴은 결국 가나안 남부 연안에 5개의 도시국가로 이루어진 연합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구약 성경 초반부에 줄기차게 등장한다.[5]. 탈출기와 판관기등 성경의 내용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지역에 자리잡은 후, 사울왕이 최초로 유대민족의 통합된 나라를 세우고 다윗왕이 필리시테인들을 제압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전까지 유대인들과 필리시테인들은 오랫동안 계속해서 싸웠다.
유명한 삼손이나 기드온의 일화도 필리시테 사람들과 싸운 이야기 들이다. 왕이 되기전 다윗이 돌팔매로 필리시테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죽인 일화는 유명하다. 다윗왕 자신도 한때는 필리시테 쪽에서 용병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삼손도 필리시테 여자와 결혼을 하기도 하는등 유대인들과 싸우기도 하고 교류도 하던 관계였던 듯. 성경에서 보면 곡물의 신 다곤을 믿었던걸로 보인다.
이들은 가나안 지역의 토착민이 아니라 기원전 1000년경 지중해 주변 지역을 휩쓸며, 힛타이트, 크레타 등을 포함한 당시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던 수많은 고대 문명들을 멸망시킨 수수께끼의 바다 민족의 일파가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다윗 왕의 지도 아래(BC 10세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필리스틴을 물리치고 가나안 원주민들을 정복할 수 있었다. 그뒤로 가나안은 실제 이스라엘 땅이 되었다.
3 기원전 10세기~기원
- 참고 문서: 이스라엘/역사
유대인들은 이 팔레스타인 땅에 고대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왕인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그럭저럭 잘 나갔다. 그러나 성경에 아주 잘 나와 있듯이 이스라엘 왕국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고 빌빌대며 살았다. 그러다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남유다는 신바빌로니아에게 망했다. 신바빌로니아는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남유다인들을 노예로 삼았다.
이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를 무찌르고 이 지역을 차지한다. 페르시아는 유다인들에게 자치를 베풀었고 그 덕에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구약에서 성전을 재건하는 내용이 바로 이 시기의 일. 그 이후 페르시아 치하에서 잘 살았으나 페르시아는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멸망한다. 이후 헬레니즘 계열의 셀레우코스 제국 치하에 들어섰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유다인들의 종교와 문화를 박해했으며 때문에 유다 마카베오를 중심으로 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유다인들은 헬레니즘 문화의 화려함에 동화되기도 하였다. 구약의 외경인 마카베오서는 이 시기의 이야기를 다룬 것.
4 로마 제국 ~ 이슬람 치하
기원 전 63년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타인을 정복, 이 지역은 로마 제국의 치하에 들어간다. 헤롯왕과 그 자손들은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여 이 지역을 대대로 통치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로마에 우호적인 헤롯의 태도를 마뜩치 않아했고, 로마 제국이 가혹한 세금을 매기다보니 분노하여 로마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추구했다. 이래서 66년에 유대-로마 전쟁을 벌이지만 국력에서 상대가 안되니 로마에게 거의 쳐발린다. 132년에는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만 이번에도 패배한다.
유다인들이 계속 기어오르자 2세기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빡쳐서 유다인들의 씨를 말려버리기로 하고, 마사다 요새 함락 후 유다인들을 대량학살하고 추방하여 말 그대로 밀어버린다. 지역 이름도 '유다(Iudaea)'에서 '시리아 팔레스타인(혹은 팔라에스티나, Palaestina)'으로 바꿨는데, 이는 유다인들의 오랜 적이자 이 지역에 살고 있던 필리시테인(Philistaei)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니 유다인들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짐작이 온다.
이후에는 로마 제국의 일부로서 통치받았고,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임에 따라 이 지역도 기독교를 믿게 된다. 352년 남아있던 유다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만 동로마에 의해 진압당한다.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 세력에게 패하고 이 지역은 정통 칼리파 세력의 지배를 받는다. 이 시대 이후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모든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의 공통 성지가 되었고 이 지역의 유대인은 아랍인으로 동화된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십자군 왕국을 건설한 이후 십자군 국가는 200년간 유지되었다. 그러나 1291년 맘루크 왕조에게 제9차 십자군이 패하면서 십자군 국가는 소멸하고 맘루크 왕조의 통치하에 놓여져있게 된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면서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팔레스타인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팔레스타인인들의 증오를 받았다. 오스만 제국이 허약해진 틈을 타 이집트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했는데 이집트 역시 오스만과 다를게 없었다. 나중에 이집트가 오스만한테 패하고 다시 오스만의 식민지가 되었을땐 더심한 착취를 당했다. 이에 분노한 팔레스타인인들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했다.
5 밸푸어 선언과 이스라엘의 건국
역사가 볼네에 따르면 오스만이 지배했던 1785년 당시 팔레스타인의 인구는 20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프린스턴 대학 교수 버나드 루이스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했던 초기에는 대략 30만명의 인구가 존재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즉, 팔레스타인은 젖과 꿀이 흐르는 빈 땅이 아니라 이미 사람들로 바글거리던 땅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있을 분쟁의 씨앗이 된다.
18세기 말엽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의 악감정이 심해지면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고향인 이 지역으로 돌아오려는 민족주의적 움직임을 보였는데 이것이 바로 시오니즘이다. 시온주의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심지어 이런 까닭에 전란의 시기 제3국으로 망명하려는 이들을 막는 모습까지 있었다(...)
1차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영국은 매우 큰 실수(?) 혹은 의도적(?) 사기를 저지른다. 먼저 중동 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을 와해시키기 위해서 아랍계의 후세인 부족에 접근해서는 영국군과 협력하는 조건으로 통일된 아랍민족의 독립국가 건설을 보장하였다. 이집트 주재 맥마흔 고등판무관이 주도한 소위 후세인-맥마흔 협정. [6]
동시에 당시 국제금융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을 필두로 하는 유대계 금융권에 접근해서 전쟁자금 지원을 대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민족의 독립을 약속한다. 당시 영국외무장관의 이름을 딴 밸푸어 선언이다.
통일된 아랍독립국가와 유대민족국가 건설이란 동시에 지킬수 없는 서로 상충된 약속을 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훼이크였으니...
영국은 양 민족의 독립을 '충분한 조건이 갖춰진 다음'으로 미룬 뒤 프랑스, 러시아와 비밀협상을 통해서 오스만 제국 영토를 분할점령하는 내용의 "사이크스-피코 조약"을 체결한다. 영국은 최종적으로는 하나의 땅을 가지고 3중 매매를 한 셈이다.그것도 남의 땅을 가지고
실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자 위 조약에 따라서 대 시리아 지역(오스만령 아랍;현재의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라크, 요르단, 레바논을 합친 지역)을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메소포타미아 위임통치령(이라크), 시리아-레바논 등으로 갈라먹으면서 아랍계와 유대계에 대한 독립약속은 말그대로 씹어먹었다.[7]
영국은 위임통치 중인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 유대인의 이주규모를 제한하는 정책을 펼치며 양쪽을 분리독립시키는 방안이나 협력국가 수립안[8] 등을 여러가지로 모색해보았지만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민 알 후세이니[9]를 위시한 팔레스타인 지역 아랍 민족주의의 저항 운동이 강해지면서 3중 매매를 원만하게 매듭지을 해결책들은 모두 물건너가게 되었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사기를 친것인지, 전쟁중에 다급하다 보니 이쪽저쪽에 일단 해주겠다고 공약을 한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영국의 3중매매로 20세기를 지나 21세기까지 중동은 세계의 화약고가 돼버렸다. 좋아! 아랍인, 유대인 모두 힘을 합쳐서 영국을 조져!
6 중동 전쟁과 현재까지의 분쟁 역사
- 자세한 내용은 중동전쟁, 가자 전쟁, 2012년 11월 가자지구 폭격 참조.
- 참고: [1]
- ☞:(Vox)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침투지.그야말로 현실은 시궁창이다.
알박기와 부동산 재테크는 이스라엘에게서 배우세요
가자지구는 이집트로만 영토가 통해있고 장벽으로 갈라져있는 반면, 서안지구는 그런게 없어서 알박기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파일:RclDTkr.jpg
그에 따라 좁아지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실제 범위
19세기 이후로 유럽 전역을 휩쓴 반유대주의, 특히 동유럽에서의 포그롬[10]은 동유럽계 유대인 이주자 수를 폭발적으로 늘린다. 게다가 시오니즘에 영향을 받은 중동에 퍼져살던 많은 유대인들 또한 꾸역꾸역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에 이주를 거듭한다. 1900년대 전체 인구의 6%밖에 되지 않던 유대인은 1947년 분할안이 채택될 당시에는 인구의 1/3을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당시 이주한 유대인들은 땅을 매입한 후 소작을 아랍인들이 아닌 오로지 유대인들에게만 주었는데, 이것은 팔레스타인의 경제 구조인 소작농을 뿌리부터 뒤엎는 것으로 졸지에 수많은 아랍 소작농들이 일거리를 빼앗기고 거리로 내몰렸다. 이런 유대인들의 행동은 아랍인들의 이주한 동유럽계 유대인들에 대한 시선이 '이방인'에서 '침략자'로 바뀌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팔레스타인 분할안이 강제통과되는 1947년까지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지속적인 마찰을 일으키고, 시위가 발생하여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아수라장을 겪는다.
결국 1948년 영국군의 철수와 더불어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에 의거하여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했고 그 직후 제1차 중동전쟁이 일어나며 유혈사태로 치닫는다. 1949년 정전협정에 따라 예루살렘은 반으로 나뉘었고, 동예루살렘과 서안 지구는 요르단에, 가자 지구는 이집트에 귀속되었다.
이스라엘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후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점령하였다가 2005년에 가자 지구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하지만 서안 지구에 대해서는 유대인 정착촌을 넓히고 2008년 12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1차 가자 전쟁), 2012년 11월 가자지구 폭격 등 공격을 꾸준히 감행하였다.
사실 여러번 평화가 성립될 뻔도 했다. 1987년 12월 최대의 난민 캠프인 자발리아에서 인티파다(대중 봉기)가 발생하였으며, 1993년 8월 결국 제11차 중동 평화 협상(오슬로 협정)에서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포함한 점령지역의 자치안에 서명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협정이 늦어진 것은 오랫동안 故 야세르 아라파트가 난민으로 남길 원했기 때문이긴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팔레스타인에서 자의타의로 쫓겨난 이들이 돌아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셔였다. 결국, 난민의 지위는 보장되지 않았다. #[11]
이후로는 더 시궁창이다. 아리엘 샤론(01~06 총리)는 양반일 정도의 강경한 시오니즘 정파들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전쟁영웅 라빈(92~95 총리)도 아라파트와 손을 잡고 오슬로 협정을 채결했다는 이유로(1994년 노벨평화상 수상) 이스라엘 극우파에게 암살당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짧은 평화 이후 1996년 총선에서 강경파인 네타냐후가 집권했다.
그 후에도 간간히 온건파인 노동당이 집권하기는 했지만 살아남은 온건파의 대부격인 시몬 페레스 현직 대통령(2007년 7월 취임)의 "온건함"이라는건 터키와 친분을 유지하고 이란 공격에 반대하는 정도다. 가자지구 폭격과 팔레스타인 차별에 반대하는 온건파란 상상할 수 없다(...) 물론 페레스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노동당 당수에서 샤론의 카디마당으로 갈아탄 것도 있지만, 정작 카디마당은 2005년 말 여당이었던 리쿠드 당이 가자지구 철수에도 반대해서 샤론이나 올메르트 등이 분당한 상대적 온건파라는 것이 충공깽.
그런데 그 강경한 리쿠드 당이 다시 노동당 잔당(에후드 바라크 전 총리-99~01)과 손을 잡고 연정을 개시했다가, 도로 2012년에는 총선승리를 위해 다시한번 가자지구를 폭격하며 극우파와 손을 잡았다. 샤론 역시 2000년 동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를 "평화"를 내세우며 방문했지만 오히려 팔레스타인 '알박기'에 대한 지지로 해석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습을 하다가 총선에서 부진하며(11석 감소) 제1당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좌우 의석이 똑같은지라 더 이상 강경해지기는 힘들 듯. 특히 50세의 언론인 출신 야이르 라피드가 이끄는 중도 좌파 성향 ‘예쉬 아티드(이스라엘의 미래)’당이 전체 120석 중 19석을 얻어 2당이 되었다. 2012년 4월 창당 된 이 신생 정당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존하는 ‘2개 국가 체제’를 옹호하고 정통파 유대교의 병역 특례, 팔레스타인 차별에 반대하는 개념 정당이다.
6.1 제1차 인티파다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 들의 저항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인티파다(intifada)이다. 봉기, 반란, 각성을 의미하는 아랍어 인티파다는, 1987년 12월을 기점으로 한다.
1987년 12월 9일, 이스라엘군의 전차 운반 크레인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태우고 가던 자동차를 덮쳐서 4명이 사망하고 7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장례식에 팔레스타인인들이 군집하면서 이 모임이 반 이스라엘 투쟁으로 확산되었으며, 지역적으로도 가자지구에서 서안 지구로 확대되었다. 특히 이 투쟁을 더 확대시킨 것은 같은 달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소녀 살해 사건이었다. 뭐냐면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소녀 인티사르 알아타르가 학교 마당에서 근처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 시몬 이프라가 쏜 총에 살해된 것이다. 인티사르는 시몬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그저 놀고만 있었는데도 시몬은 재미로 쏘아죽였던 것이다. 시몬은 체포되었지만 기가 막힌것은 이스라엘 법원이 그를 무죄로 석방한것이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사법의 불공정성을 제대로 보여주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 인티파다가 쉽게 불이 붙고, 확대되었던 것에는 이 운동의 주축 연령대에 이유가 있다. 이 시기 가자지구와 서안 지구의 1/3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15세 전후의 청소년 층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를 점령한 이후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이후 줄곧 이스라엘의 탄압에 시달려 왔던 이들이었다.
때문에 인티파다는 이스라엘 전차를 향해서 돌을 던진이는 청소년과 어린이들로 형상화 된다.
이 아이들의 투쟁은 점령지 전체를 자극하여 가자지구와 서안 지구 전체를 이 투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 투쟁의 과정 속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통합사령부를 부활시켰고, 이스라엘 제품 불매운동과 자급자족 캠페인을 진행시켰다. 이 과정에서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을 없애기 위해서 자체적으로 물가를 단속하였다. 이건 물산장려운동의 개량버젼 정도 되겠다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1일동안의 통행금지 명령을 내린 다음에 비무장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향해 군대를 투입해서 모조리 학살했다. 이스라엘 군이 비무장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공격하는 장면이 그대로 전세계에 노출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전세계적인 비난여론을 불러왔다.
물론 인티파다에 대한 현실적인 개선은 별로 없었다. 이 사건은 아랍세계의 독재자들을 긴장시키는 의외의 부작용이 나타나서 팔레스타인 난민이 많던 요르단 등에서는 오히려 서안 지구 문제에 대해서 손을 때기 시작하였고, 이스라엘 여론은 오히려 반팔레스타인으로 돌아서 당시 이스라엘의 선거를 이츠하크 샤미르가 이끌던 우익 리쿠드 당의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정부는 시위대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으로 이어졌다. 기껏해야 돌과 화염병이 주무기였던 시위대를 향해 경찰은 물론 군대까지 투입하였고, 전차에 돌을 던지던 소년 시위대의 팔을 말그대로 부러뜨렸다. 이렇게 팔이 부러진 시위대만 수백명이었다.
1987년 시작된 인티파다는 오슬로 협정이 있었던 1993년까지 이어졌고,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강경진압을 계속했다. 이 기간동안 팔레스타인 인 수만명이 부상당하고, 천여명이 죽었는데 이중 17세 미만이 273명이었다. 이때문에 이스라엘은 국제 사회에서 막장 국가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6.2 오슬로 협정
팔레스타인 문제가 본격적으로 꼬인 것이 바로 오슬로 협정이었다.
사실 오슬로 협정의 경우는 처음부터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우선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인티파다를 끝낼 기회였고, 문제는 경제야를 외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도 이스라엘 문제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가장 골때린 것은 아라파트의 PLO. 팔레스타인의 임시 정부를 자처하던 PLO는 검은 9월단 사건으로 1970년 요르단에서 추방되었고,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면서부터 다시 튀니지로 추방당했다. 1988년 독립국가를 선언하면서 나름대로 유화적 모습[12]을 보이기도 했으나 1990년 걸프전에서 이라크를 지지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 국제적 지원이 끊어진 상황이었다. 이에 생존을 위해 나선 것이 이 오슬로 협정이었다.
6.2.1 빛
서안지구의 도시 제리코에서 우선적으로 팔레스타인 인들에 의한 자치가 시작되었다. 1994년 7월 아라파트 PLO 의장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수립을 선언했으며,
결정적으로 1994년 12월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과, 이스라엘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 PLO의장 아라파트는 공동으로 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한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여기까지 였다.
6.2.2 어둠
오슬로 협정의 본질은 점령상황이 지속되도록 팔레스타인이 공식적으로 동의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에드워드 사이드
결론부터 말하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모두가 납득하지 못했다.
특히 팔레스타인 입장에서 보면 이 협정은 사기나 마찬가지였다.
- 서안지구는 3지역으로 분리된다. 전체의 3%인 A지구는 자치기구가 경찰권과 행정권을 모두 지닌다. B지구(25%)는 자치기구가 행정권을 지니고 이스라엘이 경찰권을 지닌다. 나머지 C지구(72%)는 이스라엘이 경찰권과 행정권을 모두 지닌다.
- 임시 협정에는 팔레스타인의 자결권과 관련된 표현이 단 한마디도 없다. 또 한 문제의 핵심인 예루살렘, 난민, 자치촌, 점령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 협정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안보라는 이유로 모든 지역의 팔레스타인인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자치 경찰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스라엘 인을 수감할 수 없다.
그리고 결과는 더욱 심각했다.
- 이 협정을 사기라고 판단한 하마스는 분노하여 PLO를 탈퇴해서 독자적 행동을 시작했으며 더욱 과격화 되었다.
- 하마스 세력이 배제된 상황에서 선거로 정부를 장악한 PLO는 파타를 중심으로 하는 아라파트 세력이 완전히 중심이 되었다.
- 이렇게 형성된 자치정부는 멋지게 부패했고,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세력을 오히려 억누르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의 행패는 어찌하디조 못하고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원성을 사게된다.
- 이후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 수십개의 검사소를 설치하고 두 지역간의 소통을 봉쇄하였고, 동시에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 대한 정착촌 숫자를 협정 이전의 2배 이상으로 늘렸다. 물론 이는 위에서 언급된대로 협정 위반이기 때문에 UN에서도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만족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애초에 협정 자체를 반대한 것은 이스라엘 내부 극우파들도 하마스와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협정을 무시한 정착촌을 늘려나간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1995년 11월 4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이 협정을 반대한 유대인 극우단체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7 제2차 인티파다
제1차 인티파다가 보다 평화로운 형태였다면, 제 2차 인티파다는 완전한 대립의 형태가 되었다.
이 인티파다는 2000년 샤론 총리의 예루살렘 알 아크사 사원 방문사건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알 아크사 민중항쟁'이라고도 불린다. 샤론은 예루살람을 방문한 상황에서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에 완전히 병합해야 한다'라고 연설을 하였고, 그 다음날 알 아크사 사원에는 1000여명의 군과 경찰 병력이 배치되었다. 이에 분노한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돌을 던지자, 이스라엘 측은 즉각적인 사격으로 진압하여 팔레스타인 인 13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시위는 들불처럼 번졌다. 시위는 변함없이 이스라엘 전차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청소년의 모습으로 전개 되었고, 자연스럽게 희생자도 청년층과 미성년자층에서 대규모로 발생했다.
하지만 이번 항쟁의 이미지는 전차에 돌을 던지는 청소년의 그것이 아니다.
2000년 9월 30일 예루살렘의 중고차 시장에 들렀던 자말 알두라와 아들 라미는, 당시 있었던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피해서 이동하던 도중에 이스라엘 군대를 만났다. 자밀 알두라는 아이가 있다고 외쳤으나, 이스라엘 군은 씹고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 사건을 자밀 알두라는 간신히 살았지만 아들 라미 알두라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때 사격한 군인과 피해자의 거리는 불과 13미터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프랑스 2TV 방송을 통해서 전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이 사건으로 팔레스타인과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로 뒤덮였고, 라미는 반 이스라엘의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자살 폭탄 공격으로 이어졌다. 공식적으로 자살폭탄공격은 오슬로 협정이 이뤄진 이후인 1994년부터 시작되었으나, 2000년 이후의 특이점은 이 자살폭탄공격에 여성들까지 포함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테러와는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이들까지 자폭테러에 동참하고 있다.
- 2003년 27세의 여변호사 하와디. 오빠와 사촌, 약혼자가 모두 이스라엘 군의 공격으로 사망하였던 하와디는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가자 지구에서 서안 지구로 가려고 하였으나 이스라엘군에 거부당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결국 2003년 10월 폭탄을 몸에 두르고 하이파에 있던 식당에 뛰어들어서 자폭하고 이스라엘인 23명을 죽였다.
- 2006년 11월에는 60대 할머니가 몸에 폭탄을 두르고 이스라엘 군에 폭탄테러를 가했다. 기존 거주지에서 쫓겨나서 평생을 살다가 가자지구 공습에서 마지막 남은 손자마저 잃은 것이 이 테러의 배경으로 지목되었다.
이러한 자폭테러를 다룬 영화로는 이스라엘 출신 팔레스타인인 하니 아부 아사드 감독의 'Paradise Now'[13]가 있다.
이후 샤론은 폭탄테러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서안지구에 분리장벽을 설치했다.[14] 하지만 이를 비웃는 것처럼 2002년 3월 파크 호텔 자폭테러로 이스라엘인 29명이 사망했다. 이에 분노한 샤론이 내놓은 것은 방패작전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공격이었다. 장갑차와 불도저를 중심으로 한 이 방패작전으로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모든 도시가 박살났고 적어도 500여명이 사망했다.
2003년 9월에는 군대를 동원해 라말라를 공격하여 점령한후 반드시 아라파트를 축출하거나 처단하겠다는 제 발등 찍는 소리 선언을 했다. 하지만 이는 UN을 포함한 모든 단체에서 멍청한 짓이라고 비판했다. 위에 언급된 것처럼 아라파트를 수반으로 하는 PLO야말로 가장 가장 온건한 세력이기 때문에 이들을 몰아내면 다음 주도세력은 보나마나 강경파인 하마스나 헤즈볼라가 될 것이었다. 이때문에 분노한 팔레스타인인들의 폭동과 시위가 일어났고 하마스도 게릴라전으로 나와서 문제가 더 악화되었다. 오죽하면 이스라엘의 민간 단체가 아라파트의 사무실에서 '아라파트를 이스라엘 군이 살해하면 이는 이스라엘에 재앙이 될 것이기 때문에, 만일 이스라엘 군이 온다면 자기들이 몸으로 막겠다'고 선언을 할 정도였다. 결국 아라파트 축출 및 처단 계획은 여론도 안좋고 구실도 없다보니 아라파트를 라말라 공관에 감금하는것으로 무산되었는데, 이것만 봐도 이스라엘 정부가 얼마나 생각없이 움직였는지 알 수 있다. 2번의 인티파다 진압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은 멈추지않아 틈만나면 계속 일어나서 이스라엘 땅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곳이 되었다. 이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8 분쟁
"문짝을 부수고 쳐들어오는 사람이 어떻게 느껴질까요? 사랑스러울까요?"-유대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미국의 코믹저널리스트 조 사코의 질문에 한 팔레스타인 사람이 답하길.
# 팔레스타인 분리운동 일지. 1993년 오슬로 협정 ~ 2011년까지의 일지다.
협약도 많고 평화 선언도 많이 하는 나라지만 결국 끝엔 전쟁이 난다. 이스라엘이 사라지지 않는 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비관적 전망도 있다.
이스라엘은 정착촌을 계속 만들어서 유대교 국가로써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데 UN에서는 "니들 정착촌 좀 그만 쳐만들지?"라면서 반대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의 자치구내에 이스라엘인들이 정착촌을 건설하는 건 당연히 국제법 위반이기 때문. 알기 쉽게 말하면 일본 사람들이 한국땅에 들어와 멋대로 자기들끼리 집짓고, 군인들 데려와 '여기 이제부터 내 땅'거리는 상황이다. 게다가 정착민들은 "여긴 옛날부터 우리 땅인데 왜 나가? 절대 못나가"라며 배째라는 식으로 나오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은 민주주의를 채택하지만 극우 정치인들이 표를 얻어서 집권할 목적으로 정착민들을 감싸고 도니 더 문제가 된다. 거기에 이스라엘 징병제는 총을 자기편으로 돌릴지도 모르는 이스라엘 국적 무슬림, 기독교인은 피해간다. 그렇기에 사회갈등은 물론 군사력의 약화도 문제된다. 게다가 이스라엘도 갈수록 내부에서 각종 문제가 터져나와 미래가 암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만일 이스라엘이 사라진다고 해도 이스라엘이 뿌려놓은 분쟁의 불씨가 쉽게 사라질지는 미지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최소 몇 십 년간은 답이 없을 터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사라진다고 곧 문제가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특히 골수 이슬람주의를 추구하는 하마스와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파타 + 기독교간의[15] 갈등과 대립은 내전까지 발생할정도로 깊다. 그러다보니 전문가들은 설령 팔레스타인 국가가 탄생한다해도 남수단처럼 내전이 터질것으로 보기도 한다.[16]
그에 반해 영국과 사이가 나쁜 프랑스는 영국보다 명분적으로 사정이 낫다. "저 무지몽매한 섬나라 놈들이 저런 사태를 불러왔으니 섬나라 놈들보다 우월한 내가 나서서 평화를 중재하지!"라면서 뭐 터졌다 싶으면 특사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보내거나 파리 현지로 사람을 불러들여 평화협상을 중재한다.[17] 그러나 프랑스조차도 뭐 나쁜 건 아니지만 의도가 불순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프랑스 역시 영국과 마찬가지로 현재 중동 분쟁과 관련해 자유롭지 못할 뿐 더러 영국과 사이크스-피코 조약에 서명하여 레바논, 시리아 등 중동 지역에 식민지들을 차지하기까지 했다.[18]
그러나 의도가 불순하다고 해도 현재 서방세계에서 미국과 프랑스 빼고 평화를 중재할 만한 위치에 있는 나라가 별로 없기도 하다. 프랑스가 다시 팔레스타인 땅을 먹을 것도 아니니...- ↑ 그들과 같이 살던 비(非)유대계 주민들도 있었다
- ↑ 참고로 20세기 초부터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 중 대다수가 칠레 등 해외로 이민을 가는 비중이 높았고,(물론 무슬림들도 이민을 안 갔다는건 아니지만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에 이스라엘 정부의 악랄한 탄압으로 이민이 가속화 되어서 현재는 기독교인들의 수가 3%에 못미치는 수준이다.
- ↑ 여담이지만 현재 칠레 내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영향력이 상당히 강하다고 하고 팔레스타노라는 프로축구팀도 있을정도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미국과 칠레간의 체급차이 때문에(...)
- ↑ 현대 히브리어는 이스라엘 건국후 과거의 언어를 연구하여 이스라엘내 언어학자가 현대적으로 첨삭가공하여 만들어낸 인공어이며, 새로 건국된 국가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고자 유대인내에서 이디쉬어, 라디노어, 아랍어 등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교회언어로 사문화된 고대 히브리어를 되살려 다시 보급시켰다.
- ↑ 유대인들이 오기 이전이나 유대인들이 이 지역을 차지하지 않고 있던 시기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역사는 없다. 누구도 연구하지 않았고, 누구도 제대로 된 연구 성과를 내놓지 못했다. 고고학적 발굴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연구는 유대인과 벗어나는 순간 백지가 된다. 이에 대한 결론이 영국 셰필드 대학 키스 휘틀럼 교수의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침묵당한 팔레스타인 역사이다. 이를 대략적으로 요약하면 현대 이스라엘 역사 연구는 성경에 기반을 둔 성경연구가들 중심으로 중세부터 이뤄져왔고, 이들은 전체 팔레스타인 지역사에 비하면 한줌도 되지 않는 고대 이스라엘과 유대왕국을 지나치게 강조해왔기 때문에 나머지 팔레스타인 지역사가 이들의 덤이 되어버렸으며 현대에도 이 이미지 구축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라는 것이다. 그외의 시기의 연구는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투르크 제국 등의 일부사로 취급될 뿐이기도 하고.
- ↑ 파이잘 왕가는 결과적으로 아라비아-대시리아의 지배자가 되지 못하고 이라크 국왕으로 만족해야 했다. 사실 이 쪽에 직접 엮여있는 곳은 파이잘 왕가라기 보다는 요르단 국왕가에 가깝다.
- ↑ 러시아는 이란 북부지역을 점령했다. 남부는 영국이 점령
- ↑ 파이잘 왕가 등이 이 안건에 관심을 나타내었다. 유대계의 자본과 아랍계의 노동력을 합친다는 등의 형태로
- ↑ 팔레스타인의 독립운동가이지만 협력한 대상이 대상이라 비판의 여지가 있고, 이런 점에서 인도의 찬드라 보세와 비슷한 면이 있다. 문서 참고.
- ↑ 동유럽에서 발생한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약탈과 학살
- ↑ 난민 문제가 해결 되지 않는 이유는 (해외 유대인의 귀화는 얼마든지 찬성하는) 이스라엘은 물론 이스라엘을 수백 번 찜쪄먹을 규모의 아랍권조차도 이들 난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의사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크다. 아라파트가 벤츠를 타든 말든... (아라파트가 지지세력인 난민을 기반으로 활동을 했고, 일부 자금을 횡령했다는 정황은 상당하나 이스라엘의 막장짓이 그렇다고 정당화 되는건 아니다.)
- ↑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테러에 대한 반대를 선언하는 등
- ↑ 한국내 방영명은 천국을 향하여
- ↑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에게 이스라엘 장관이 암살된것도 있다.
- ↑ 기독교는 세속주의 추구하는 파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 ↑ 무장단체들도 이슬람주의를 추구하는 파벌들과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파벌들로 양분되어 있다.
- ↑ 사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팔레스타인 등 중동 지역 영토들을 둘러 싼 영국과의 식민지 다툼에서 밀려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지 못했다.
- ↑ 실제로 레바논이나 시리아 등 과거 프랑스령이었던 중동 국가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 유혈 사태와 종교, 종파 분쟁 역시 제국주의 시절 이들 나라들을 식민 통치한 프랑스의 책임이 없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