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의 역사

1 불교의 전래

한반도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서기 4년, 우리나라의 최초 불상으로 석가모니 금불상 53구를 신라 제 2대 남해 원년에 지금의 강원도 고성땅에 이윤하였다고 하나, 신라에 최초로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기록들은 상대적으로 건국/불교도입이 늦었던 신라 측에서 가공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1] 때문에 한국 불교 도래의 정설은 고구려를 통해 중국 불교의 전래에서 시작되었다는 북방 전래설이 정설로 되어 있다.[2]

2 삼국시대

2.1 고구려

고구려의 경우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의하면 372년(소수림왕 2년), 전진부견(符堅)이 사신승려 순도(順道)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보냄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양고승전(梁高僧傳)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동진(東晋)의 고승 도림(道林)이 고구려 승려에게 청담격의(淸談格義)불교의 대표자인 법심(法深)을 소개하는 서신을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372년 이전에 이미 문화교류의 방편으로 민간경로로 전파되었음을 알게 한다.

2.2 백제

백제의 경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384년 (침류왕 원년)에 동진에서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백제 불교가 시작되었다. 인도의 승려이거나 중앙 아시아 출신으로 생각되는 마라난타는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신통한 이적을 가진 사람으로서 백제왕은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예를 다하여 공경했다. 이는 왕실이 그의 신통력 주술에 의지하여 왕실의 안녕을 빌고자 하고 또한 재래신앙을 대신하여 전란에 동요하는 민중을 통제할 지배이념으로써 불교를 수용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반야 사상과 정토 신앙이 봉건 지배층에 의해 사용되어 그들의 착취를 은폐시키고, 민중의 저항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왜곡된 불교 신앙으로 적극 보급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392년(아신왕 원년)에는 왕이 불교 신앙을 대대적으로 권장하였다. 그는 '불법을 숭상해서 복을 구하라'는 소칙을 내렸고, 민중에게 불교의 신봉을 권유했다.

2.3 신라

신라의 불교 공인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150년 가량 늦은 법흥왕(528년)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불교가 들어온 것은 눌지왕 때로, 고구려 승려인 묵호자[3]가 모례[4]의 집에 머물면서 불도를 전파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당시의 불교는 기복 신앙의 형태였고 공인되지 못한다. 그러다가 향이 전래되고 묵호자가 왕녀의 병을 고친 것을 계기로 왕실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되었다.

신라에서 나타난 불교 수용 과정에서의 갈등은 두 가지로 파악된다. 첫째로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들 수 있다. 이차돈 등의 불교도의 불교 공인 요구와 왕권 신장 및 중앙 집권적인 지배 체제 확립을 위한 새로운 지배 이념을 필요로 하는 왕권의 요구가 상응한데 반해, 부족 합의제의 고수를 지향하는 전통 귀족 세력은 법흥왕과 이차돈의 불교 승인요구를 극력 거부하였던 것이 그 형태이다. 둘째로 종교적, 문화적 갈등을 들 수 있는데, 법흥왕의 불교 승인 요구에 대하여 귀족층과 전통 부족 세력을 대표하는 대신들이 승려들의 머리모양, 옷차림새 그리고 그들의 언변에 상당한 비난을 가한 것이었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신라에서 공인되었는데 그 과정상 결코 순조롭지는 못했다.

소지왕정월 대보름의 유래를 전하면서 거문고갑을 쏘니 그 안에서 간통하고 있던 분수승과 궁주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이를 불교 탄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이야기로 해석하기도 한다.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력을 배제해 나가는 과정에서 고구려 승려들을 처형했다는 것. 우연인지 소지왕 때 고구려에서 아도 화상과 그의 제자들이 건너오는데, 아도 화상은 '앓지도 않고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두 이야기를 결부시켜 보면 묘한 이야기.

법흥왕 때 (527년) 귀족들의 봉불(奉佛) 반대 주장에 대하여 이차돈(異次頓)은 자신의 목을 베어 분분한 의견을 결정토록 자청했고, 이차돈은 죽음에 임하여 "나는 불법을 위해 형을 받는다. 부처님이시여 만약 당신께 신(神)이 있다면 나의 죽음을 통하여 이적을 행하소서." 이 말을 끝으로 마미루처형되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흰 피[5][6]가 솟구쳤고 사방이 캄캄해지면서 땅이 진동하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등 이적이 나타나 중신 귀족이 더 이상 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이 있다. 삼국사기의 김부식은 이차돈의 죽음을 그대로 종교적인 이유로 묘사하고 있고 삼국유사의 일연은 정치적인 이유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불교를 받아들이려는 주체는 대왕(大王) 이었고 그를 결사적으로 막으려는 것은 군신(群臣) 들이었다. 즉 법흥왕이 그의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쇼로써 그 일을 벌였고 봉불을 반대하던 군신들에게 연대 책임을 물게 하여 그네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으로도 보인다. 또한 '흰 젖빛의 피' 는 신화적 기술 양식의 일종으로 당대 왕 측근들에 의해 조작된 풍문으로 간주 할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법흥왕은 불교 수용 정책을 강력히 관철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부족합의제를 지향하던 귀족층의 반대를 누르고 불교를 공인하고 중앙 집권적인 왕권 전제 통치를 강화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왕실에서는 지방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신장하기 위하여 부족 연맹체 사회의 지배 이념이었던 재래 신앙을 대신하여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수용 과정상의 갈등은 왕권의 지원과 불교도의 재래 신앙과의 융화를 위한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무마되고 극복되었고, 재래 신앙은 대체로 불교 신앙에 흡수 통합되었다.

신라 불교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로 수용 과정상 중국 불교가 직수입 되는게 아니라 고구려를 거치면서 한층 더 토착화되었고, 다른 나라에 비해 어느 정도 민중화되기 쉬웠다는 점이다. 둘째로 불교 수용 공인을 둘러 싸고 지배권력 내부에서 이해 관계를 달리 하여 갈등이 치열하였으나 대체로 민주적 합의에 의해 외래 종교가 받아들여졌다는데 있다.

비록 신라는 삼국 가운데서 가장 뒤늦게 불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고구려나 백제보다 훨씬 밀접하게 불교를 국가와 정치면에 직결시켜 국가 발전에 활용했다.

3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 불교는 대규모의 사찰, 불상, 탑, 종을 지어 호사한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 보이고 왕실 귀족의 안녕과 복을 기원해 주었다. 그 대가로 승려들은 엄청난 땅과 노비를 기부 받았는데, 그러한 행위가 너무 심해져 한 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게, 신라 불교가 봉건 지배계급과 밀착하여 사치와 타락의 길로 떨어진 것과 때를 같이하여, 신라 골품제의 모순으로 귀족 내부의 권력 다툼이 생기는 한편 지방의 호족 세력이 득세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지방 호족의 성장과 함께,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각자가 스스로 깨달을 것을 주장하는 지방의 새로운 불교 종파로 선종이 성장해 왔다. 이 당시 9세기의 신라는 골품제가 신분체재의 모순을 드러내 봉건 체제가 점차 흔들리고 있었고, 지방의 호족세력이 사회 모순을 극복할 주체로 떠오르면서 선종은 그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이 선종은 직설적이고 간명한 방법과 평등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 당시 귀족 불교인 교종이 난해하고, 관념적이고, 지배자의 복을 비는 일만 일삼던 때에 비하여, 상당히 지방민중에게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선종도 하나의 착취자였던 호족의 이념적 기반에 불과 했다. 호족들에 의해 농민들은 땅을 잃어 유랑하였고 마침내, 그 착취자들에 대항하여 맞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종도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산간에 은둔하며 참선에 전념하는 산중불교로 자리 잡는다.

신라 봉건 사회의 모순이 극에 이르러 귀족들 사이의 내분과 민중 봉기가 극에 달한 9세기에는 미륵 신앙과 도참사상이 민중들에게 크게 호응을 받았다. 미륵 신앙은 백제 말, 고창 지방 검단에 의해 일어났고 민중적인 실천 불교로써 민중속에 파고들기 쉬웠다. 그리고 삼국 시대에는 비록 왕실과 귀족층의 주도하에 전개되었으나 민중의 고난을 동정하는 태도를 취하여 개인적인 구원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사회적인 구원, 민중 구제를 위한 집단적인 신앙이었다. 특히 진표의 미륵 신앙이 대표적이었는데, 그는 소외된 지방에서 - 신라의 중심지가 아니라 - 미륵 신앙운동을 일으켰다.

참조 웹페이지:[1]

4 고려 시대

고려 역시 숭불정책을 폈는데, 애초에 창업군주인 태조 왕건조차도 건국 당시 도선국사의 불교 및 도교가 혼합된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훗날 왕건은 유훈인 훈요 10조를 통해 연등회 및 팔관회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정도다. 왕건의 이러한 불교 진흥 정책은 당시 호족들 대부분이 불교도였고 백성들 역시 불교를 믿는 경우가 많았던 시대 배경상 국론을 통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동시에 왕실의 안녕을 빌어 국운의 가호를 입기 위해 불교를 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다시 말해 고려의 불교는 다분히 호국불교적이고 기복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4대 광종 대에 와서는 왕건 대부터 존재했던 승려 선발 시험인 승과제도를 체계화하고, 국사(2번 항목) 및 왕사 제도를 실시했다. 또한 각 절에 사원전이라는 이름으로 토지 소유를 허용하고, 승려에게는 각종 역에서 면제되는 혜택이 주어졌다. 이러한 각종 혜택은 훗날 불교 타락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이미 이 당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불교 관련 지출로 인해 각종 문제가 생기자, 6대 성종 시기에 와서는 최승로의 시무 28조에서 보이는 것처럼 연등회 및 팔관회를 자제하는 등 과도한 불교 관련 지출을 줄이고자 하는 모습이 있었지만, 얼마 안 가 8대 현종 시기에 연등회와 팔관회가 부활하면서 별반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고려가 무작정 숭불의 나라였던 것은 아니었다. 국가에서도 교단을 제어하려 노력하였는데 당장 훈요 10조에서도 도선의 이름을 빌어 사찰의 남설을 금지하는 대목이 있다. 국사와 왕사는 명목상으로는 왕의 스승이기는 했지만 결코 불교가 왕의 위에 있지는 않았다.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가 관장하는 계단(戒壇), 즉 관단에서 계를 받아야 했다. 국가가 승려의 수를 조절하는 장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불교가 절대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시무 28조에 나와 있는 것처럼 고려는 정치는 유교, 종교는 불교로 이분화 되어 있는 나라였다. 딱히 조선 시대 들어서 유불이 교체된 것은 아니라는 얘기.

고려 초기에는 선종이 흥했으며, 왕건 역시 선승에게 귀의할 정도였다. 하지만 귀족층에서는 교종이 인기를 누렸고, 특히 균여로 대표되는 화엄종이 왕실 및 귀족의 지원을 받아 성행하고 있었다. [7] 교종과 선종 두 종파를 통합하려 하는 움직임이 자연히 여러 승려들에 의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중 가장 먼저 이를 구체화하려 했던 인물이 '대각국사'란 호칭으로 불리는 의천(1055~1101)이었다.

의천은 '교관겸수'의 교리를 바탕으로 개성 흥왕사에서 교단 통합 운동을 시작하면서 천태종을 도입하였고, 이후 국청사를 세우면서 선종의 통합도 이루려 하였다. 천태종의 개창은 교종에게는 별 영향이 없었지만 선종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는데 이는 천태종으로 개종한 승려들 전원이 선종 승려였다는 데서 알 수 있다. 특히 의천은 송, 요, 신라 등의 경전 주석서를 모아 4000여 권에 달하는 '교장'[8]을 펴냈는데, 이러한 경전의 편찬은 교종 위주의 천태종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사례로도 꼽힌다. 실제로 의천은 선종을 상당히 싫어하여 교장에 선종 계열 경전은 넣지 않았고 요나라에서 선종의 경전을 불태웠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천태종은 교단을 사상적으로 통합한 것이 아니라 인적으로 통합한 것에 불과하였다. 의천 사후 천태종이 분열하면서 교단 통합은 이어지지 못했고, 훗날 지눌(1158~1210)의 등장 이전까지 고려 불교는 다시 교종과 선종의 양립 구도를 이루게 된다.

무신정변 이후 문벌 귀족의 후원을 받던 교종은 몰락하고 무신 정권의 후원을 받는 선종이 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종 중심으로 불교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지눌이다.

지눌은 명종 18년이 되던 1188년에 공산(현재의 팔공산)의 거조사에 머물면서 세속화되어 가던 불교를 혁신하기 위해 정혜 결사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였다. 이어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3년 동안의 참선 끝에 은둔생활을 탈피, 적극적 보살행의 현실 참여를 목표로 삼았다.

1200년 송광산 길상사(현재의 송광사)로 옮겨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 깨달음 이후 남아있는 무명을 수행으로 사그라뜨리자는 돈오점수와 이론 학습과 참선을 함께 해야 한다는 정혜쌍수를 주장하고 "선으로써 체를 삼고 교로써 용을 삼아야 한다."고 말해 선, 교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그의 사상에는 "교는 부처의 말씀이요, 선은 부처의 마음이라."라는 믿음이 깔려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해서 몇몇 학자들은 다분히 선종 중심의 교리가 드러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지눌은 종래의 9산 선문을 조계종에 통합하는 등 교종을 중심으로 교선일치를 시도한 의천의 천태종과 함께 고려 불교의 양대산맥의 내면적 통일을 기한 큰 업적을 이룩했다. 특히 의천의 천태종이 실패로 끝난 데 반해 지눌의 법통은 현재 대한민국 조계종이 주류로 자리잡을 정도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지눌의 뒤는 '유불 일치설'로 유명한 지눌의 제자 혜심이 이었다. 혜심은 노자와 공자 두 성인이 각각 가섭보살, 유동보살이라는 내용의 한 불교 경전[9]을 인용하면서, 유교도교, 불교나 결국 본질 면에서는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혜심이 주장한 유불일치설은 오히려 고려 말 성리학을 수용하는 데 중요한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유불일치설 외에 주목할 만한 움직임으로는 참회 수행을 통해 업을 제한다는 것을 목표로 한 요세의 백련결사 등이 있다.

원 간섭기에는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불교 의식이 유행하면서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거기다 관단 제도가 무너지고 절로 도망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승려의 수는 무한정 늘어났고 승려의 증가는 인적 자산의 감소로 이어졌다. 이러한 불교의 타락과 부패상에 대해 끊임없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던 중 공민왕 대에 승려 보우가 흐트러진 불교 교단을 재정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9산으로 나뉘어 있던 선종 종파를 조계종 한 종파로 다시 통합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도 조계종에서는 지눌을 중천조로 삼고 보우를 중흥조로 삼아 중요하게 여긴다.

고려시대 가장 유명한 불교 관련 문화재로는 고려 23대 고종 당시 제작된 팔만대장경이 있다. 팔만대장경을 만들게 된 동기는 현종 때 만든 초조대장경이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자 '초조대장경을 조판하니 거란군이 물러갔듯이 이번에도 그 불력을 믿어보자'며 다시 대장경을 조판하게 된 것인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팔만대장경은 2007년 6월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되었다.

고려 시대의 불상은 전 시기인 통일신라 시대와는 달리 정교함이 떨어지고 대신 크기가 확대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종래에는 이것을 지방색이 강하게 드러나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크기의 불상은 국가의 지원 없이는 만들기 어렵다고 보아 고려인들의 불상을 보는 안목이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즉 고려인들은 우아하고 섬세한 통일신라 시대의 불상보다는 크고 아름다운 불상이 더 성스럽다고 여겼을 수 있다는 것이다.

5 조선 시대

조선 시대의 불교에 대해 흔히 '숭유억불'로 생각하며 불교가 쇠퇴하기만 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심지어 '조선 시대 쇠퇴해서 사라진 불교가 무슨 전통 종교냐. 조선 후기에 들어와 민중들에게 퍼진 우리 기독교야말로 진짜 전통 종교다' 같은 반응도 나오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식민지 시대에 타카하시 토오루가 타율성과 정체성론에 입각해 저술한 『이조불교』에서 만들어진 편견이 확대되고 재생산된 것에 불과하다. 사실 조선시대 불교 연구는 박사학위 논문이 10여편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미진하며, 그나마도 2000년대 들어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형국이다. 최근에는 '조선도 숭불 국가였다'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여기까지는 오버라고 해도 조선 시대를 단순히 일방적인 폐불의 시대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조선 전기 불교 정책은 '규모의 축소'로 요약할 수 있다. 이미 고려 말부터 불교의 타락상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으나, 그에 대한 정책이 수립되어 시행된 것은 조선 시대 들어와서였다. 태조 대에는 도첩제를 실시하여 출가하기 위하여는 양반은 100필, 평민은 150필, 천민은 200필을 내게 하였다. 태종 대와 세종 대에는 사전(寺田)을 몰수하고 사노(寺奴)를 속공시키는 등 불교계가 지나치게 점유하고 있던 부를 축소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11개 종단을 7개로, 세종 때는 다시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였다. 종래 수천 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국가 공인 사찰(면세 특권이 있었다)도 태종 대에 242개, 세종 대에는 36개로 줄였다.[10] 세조 대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간행하였고 도첩 발급을 20필로 줄였다. 그러나 동시에 자격 미달인 승려를 가려내도록 도첩 발급 자격을 엄격하게 하였다.

성종은 보통 억불의 군주로 여겨지며, 실제로 사림파가 많이 진출한 성종 대에는 불교를 억압한 정책이 많다. 그러나 그것도 도첩 발급 일시 중지 등 인적 자원의 유출 방지에 머물렀다. 승과 폐지 등에 대해서는 '조종지유훈'을 내세워 유지하도록 하였으며 '경국대전'에도 도승법과 양종, 승과 규정이 법제화시켰다. 연산군 대에 승과가 폐지되는 등 불교는 큰 타격을 받지만 이걸 딱히 숭유억불의 발로라고 보기가 힘든 게 연산군은 유교도 불교도 사이좋게 밟은 왕이라.(...)

중종 대에 사림파가 집권하고 도첩제가 폐지되면서 이후로는 특별한 억불 정책이 시행되지 않는다. 아마도 더이상 불교가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명종 대의 문정왕후가 양종을 복구시키고 도첩제와 승과가 재개되기는 하였으나 문정왕후 사후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때 승과에서 합격한 인물들(대표적인 예가 사명당)이 임진왜란에서 승병으로 활약하면서 불교의 위상은 재평가된다.

그 후 국가의 시책은 적극적인 억불보다는 방임을 택했고 승려라는 인적자원에 주목해 요역에 편입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백곡 처능이 폐불의 부당함을 논하는 '간폐석교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승려가 감히 억불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고도 무사했을 뿐 아니라 당시 조선조정이 봉은사와 봉선사를 해체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려는 억불정책이 실제로 축소되어 봉은사와 봉선사가 건재했다는 점에서 일대 분위기 전환을 보여준다. 참고로 이 간폐석교소는 무려 8,000자나 되는 긴 상소문으로, 조선시대 상소문 중 가장 길며 그 내용도 불교계에 대한 조선 정부의 잘못과 불교탄압의 이론적 타당성의 부족, 과거 삼국시대 국가들과 고려가 불교를 보호했다는 이야기, 중국의 유학자들이 불교를 신앙한 사실과 역대 왕/왕후들이 왕실의 개인사찰인 원당을 지은 것까지 언급하여 성리학 중심 왕조 국가체제 하에서는 상당히 예민한 내용까지 담고 있다. 심지어 경주의 불국사는 2016년 1월 사찰 재건에 유림이 지원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말년의 세종세조, 그리고 문정왕후의 숭불을 개인적인 불심의 발로로 보기 쉬운데, 조선은 개인의 호오로 정책이 바뀔 만큼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비록 위정자들은 억불을 견지했지만 조선의 백성들은 천 년 동안 불교를 믿어왔으며 이러한 경향이 바뀐 것은 대략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성리학이 확산되고 고려의 유습이 사라지는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이후 임란을 거치면서 왕실에서 짓던 내불당은 실록에서 사라지지만, 여러 왕족들[11]의 개인 사찰인 원당(願堂)의 철폐 문제는 조선 후기에도 실록에 몇 차례 등장하며, 정조 초기 원찰건립이 금지된 이후에도 왕의 무덤을 관리할 원찰이나 조포사들은 여전히 잘만 지어졌다. 당장 수원의 용주사만 해도 정조가 자신이 집권 초 내린 원당 철페령을 비껴가서 지은 절이기도 하다.[12]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국가에서 불교를 보호하지 않고 방임하였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불교 행사는 조선 중기에는 완전히 사라졌고, 국가는 더이상 절의 주요 시주자가 아니었다.[13] 국가의 보호가 없다보니 유학자들은 정기적으로 절에 레이드를 가곤 하였고, 조선 후기 들어서는 양반들에 의한 사적 수탈이 강화되었다.[14] 다만 이 시기에도 국가의 보호를 받는 특수 사찰들은 건드리지 못했는데, 이유는 이런 사찰들은 근처의 왕릉을 관리하거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관리하는 중책을 맡은 사찰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실록보관을 맡은 사찰들의 경우, 나라에서 유사시 주지가 실록 보호를 위해 지역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밀부를 받기도 했을 정도였다.

현재까지 조선 시대의 승려는 천인으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소위 '팔천론'의 근거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경국대전에서는 승과에 합격한 승려에게 문무 관료와 같은 대접을 해주고 있다. 또한 호적에 편재된 승려 중에는 양반 출신의 승려도 자주 보인다. 양반이 자기 발로 천인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요역 면제를 근거로 승려를 천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럼 고려 시대도 승려를 천인으로 보았다는 얘기 밖에 되지 않는다. 오히려 승려에 대한 요역 부과를 승려에 대한 일말의 존경까지 사라진 증거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승려의 한양 도성 출입 금지도 약간 의문시 되고 있는데, 문헌에는 승니(僧尼)의 도성 출입만 금하고 있어 비구니만 도성 출입이 금지되고 비구는 괜찮았던 것 아닌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 불전은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우선 불상의 광배가 사라지고 대신 후불탱화를 그려넣어 좁은 공간에 더 많은 도상을 넣게 되었다. 그리고 좌대 대신 공양물을 올려놓을 수 있는 불단이 생겼으며, 많은 전각을 지을 재력이 없다보니 대웅전이 여러 기능을 겸하게 되었다. 또한 신도들이 불전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기존의 마루 바닥에서 온돌 바닥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조선 이전에 지어진 불전들은 바닥이 마루다.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봉정사 극락전은 온돌이 깔려있지만 그것은 후에 깔은 것으로 온돌을 뜯어내면 마루가 보인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현재의 절의 형태가 완성되었다. 조선 시대의 불상은 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것이 많지 않은데, 조선 시대의 불상은 주로 공부하는 선비의 형상을 한 것이 많다. 이때에는 불상을 조각하는 조각승들이 몇 개의 유파로 나뉘어 불상만 봐도 어떤 유파에서 만들었을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개별화가 되었다.

6 일제강점기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개항지를 중심으로 들어오던 일본 조동종, 정토종, 정토진종 등의 일본 불교종파들이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더욱 널리 퍼지기 시작했으며, 반면에 한국의 기존 종파들은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만해 한용운처럼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승려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일본 불교와 결탁해 친일 행적을 보인 승려들도 다수 나타났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일본식 대처승 문화가 들어와, 해방 후 비구 대처 분쟁의 씨앗이 잉태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당시에는 대처승은 시대변화에 따른 신문물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지는 시각도 있었다. 독립운동가이기도 한 만해 한용운도 저술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대처승 제도를 찬성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한편으로는 조선시대부터 편찬되기 시작하던 불교 의례집이 완전하게 정비된 시기이기도 하며, 현대 한국 불교에서 불교의례시 가장 기본으로 삼는 <석문의범>이 이때 출간되었다. 그 이전 조선조에 백파긍선이 <작법귀감>을 편찬하긴 했으나, 그 이후에도 내용의 차이를 보이는 의례집들이 나오는 등 의례내용이 완전히 통일되지 않았으나 <석문의범>출간 이후로 한국 불교의레는 석문의범을 중심으로 통일되었다.

7 대한민국

  1. 사실 이 기록들을 그대로 믿을 경우, 석가 이전 전불시대의 불국토가 바로 한국이다.흠좀무.
  2. 이외에는 가야의 김수로왕의 아내이자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가야로 오면서 불교를 가져왔다는 남방 전래설이 있으며, 현재도 당시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이 남아있다.(실제로 이 석탑의 재질은 한반도에서 나오지 않는 돌로 되어있다. 근데 생긴 거는 석탑이라 하기 좀 많이 안습하다.) 그러나 허황옥의 실질적인 출신지에 대해 이견이 많은데다, 이 학설을 학계에서 강하게 주장하던 무함마드 깐수(정수일) 교수가 남파간첩이라는 게 들통나면서...
  3. 墨胡子라는 이름 때문에 서역승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피부색이 검은 서역인'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4. 이름을 우리말로 해석해 털레, 즉 털보가 아니었겠냐는 해석이 있다. 또한 '털레'에서 '절'이라는 이름이 파생되었다고도 본다.
  5. 밝은 달빛 아래 유혈(흘러나오는 피)이 흰 피처럼 보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6. 이 흰 피가 정액이라는 드립 주장도 있다. 도교에는 '신선은 몸 속에 정액이 가득해서 신통한 능력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파벌이 있다. 사실 이차돈은 문자 그대로 백혈병이었다 카더라(물론 농담이다. 백혈병은 백혈구에 이상이 있는 병이지 피가 하얗게 되는 병은 아니다.)
  7. 사족으로 고려 시대에 지어진 향가 작품 '보현십원가' 11수도 균여가 지은 것이다.
  8. 흔히 '속장경'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본 학자가 붙인 이름으로 당대에는 교장이라고 하였다. 초조대장경은 경전을 모은 것이고 교장은 경전의 주석서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대장경의 속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하여 학계에서도 교장이라는 표현을 권장한다.
  9. 현재 연구상으로는 위경일 가능성이 높다.
  10. 종전에는 이 사찰 수를 공인 사찰이 아니라 사원 자체의 수를 이만큼 줄인 것으로 생각했으나 상식적으로 이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파괴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이 없다. 거기다 성종실록에 전국 사찰이 만 개 정도 있었다고 하는데 무슨 절이 카페베네도 아니고 백 년만에 300배로 늘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11. 실록에는 궁가(宮家)라고 나온다.
  12. 용주사는 지을 때 새로 짓는 것을 금했다 보니 '과거 여기 절이 있었다 카더라'면서 재건의 탈을 쓰고 지어진 절이다.
  13. 다만 왕실은 여전히 불교의 주요 고객이었다.
  14. 다만 이러한 사적 수탈이 단순한 수탈이 아니라 관의 수탈로부터 양반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여겨지는 사례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