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일본군

일제강점기 당시에 일본군에서 복무했던 한반도 출신자를 가리키는 표현. 그 특성상 대다수, 특히 장교는 거의 전원이 육군이고 해군은 드물다.

1 개요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일본 육해군을 조선에 진주시켰다. 청일전쟁러일전쟁을 겪으면서 그들은 조선을 지배하겠단 야욕을 드러냈고 1905년에 을사조약으로 외교권 박탈, 1907년엔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일으켰다. 그 후 1910년에 강제 병합을 했고 치안을 유지한단 핑계로 경찰 조직 대신에 육군 헌병을 조선 전역에 배치했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헌병보조원으로 일부의 조선인을 뽑았다. 대부분의 제국주의 국가가 그랬지만 식민지의 사람들은 아주 하급직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로선 조선인이 할 수 있던 몇 안 되는 공직이었기에 상당히 엘리트들이었다.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으로 이후 조선총독부는 헌병을 경찰로 대신하고 조선인들을 보다 많이 채용한다. 총독부 산하의 행정기관에도 조선인을 배치하였으나, 일본군에 조선인이 입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당시 조선인이 일본군에 있는 경우는 대한제국 군대해산 당시에 일본에게 협조적이었던 친일파 군인들이 일본 육군으로 들어온 경우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장교로 임관하는 경우 밖에 없었다. 사실상 당시 일본 육사에 들어갈 수 있는 조선인은 조선 왕족 출신이거나[1] 친일파들뿐이었다. 그나마 해군은 장교는 커녕 말단 수병조차 조선인을 받지 않고 있었다. 1930년대 이후론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군관학교에 들어가 만주군이나 관동군으로 복무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 당시 일본군은 일본 본토 출신들이거나 조선이나 대만에서 자란 일본인이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들어서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이고 미국과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일본군은 병력을 수급하기 위해 조선인을 일본군에 끌고 가거나 군속(군무원)으로 데려갔다. 이들은 내선일체를 외치며 조선인과 일본인과 대만인이 같은 민족이라고 주장했지만[2] 실제 군 복무에서는 분리하여 관리했으며 조선인들은 전장에서 심각한 차별대우를 받았다.[3] 그리고 일본은 독립운동을 하거나 사회주의자들의 친족은 제외하였다. 전후에 전범으로 유죄를 받은 조선인은 129명이었고 이들 중 14명은 사형되었다. 도쿄 재판에 오른 A급 전범은 당연하지만 없다. 차별 등으로 조선인이 고위직에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한국계 일본인인 외교관 도고 시게노리가 있긴 한데 이 사람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건너간 사람이 아니라 임진왜란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끌려온 도공의 후예이다. 일본군 고위급에 오른 조선인의 대다수는 대한제국군에서 편입한 친일파나 왕공족이었다. 홍사익만이 예외적인데 일본군에서 내선일체를 위해 조선 이름을 유지하는 그를 진급시킨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전시용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 이와는 별개로 한국인으로 일본에 귀화한 한국계 일본인 중에 자위대 직원이 있을 것이다. 2011년 일본 방위성 정보 본부에서 북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조선계 일본인 정보원이 한국에서 사찰하다가 추방된 적이 있다. 프랑스 기사

2 조선군인/조선인 일본병

약간 표현에서 기술적인 차이가 있는데 조선군인은 대한제국군에서 일본군으로 편입한 친일파나 1938년 지원병을 받기 전에 일본 정부의 특례로 일본군에 입대한 사람을 말한다. 아래는 1910년 9월 1일에 일본군으로 편입한 대한제국군 인원이다. 전원이 육군 장교이다. 총원이 25명이다.

중장(부장)2
소장(참장)2
대령(정령)1
중령(부령/2등군의장[4])4
소령(참령)4
대위(정위)8
중위(부위)1
소위(참위/삼등사[5])3

이들 외의 조선군인으로는 특례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홍사익이나 영친왕 등이 있다. 1883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 가운데 일본육사에 입학한 인원은 141명이었다. 이중 메이지와 다이쇼 시기의 인원은 85명이며 이중 상당수는 육군무관학교가 폐쇄할 때 편입한 33명이다.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가운데 일본육사 출신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서 편입한 자를 포함해 다섯이다. 조선인으로 일본해군병학교에 들어간 사람은 없고 일본 내지인 호적으로 들어가 입학한 경우는 일부 있다고 하나 정확한 출처는 없는 상태다. 대한민국 해군 참모총장 및 고급 장교 가운데 일본 해군 출신은 없으며, 초대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등 소수의 만주군 인맥이 있으나 대부분 해병대로 보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부족한 조종사 충원을 위해 해군 예과 연습생(단기에 해군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한 과정, 약칭 예과련.) 일부를 조선인에게도 개방했으나, 종전까지 임관한 사람은 없다. 예과련 출신 중 중앙정보부장이 되는 김재규가 유명한데, 그 역시 후보생으로만 있다 광복으로 임관 못하고 귀국했다.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에는 일부 입학자가 존재하는데 대한민국 공군 참모총장 중에도 두 명이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군속 신분인 헌병대에서 일하던 헌병보조원도 군인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들은 일병과 이병 사이의 대우를 받았다. 1910년 당시에 헌병경찰의 숫자는 2,019명이었는데 이중 조선인은 1,012명이었다. 이들은 헌병보조원이었고 헌병을 합친 전체 경찰의 숫자는 7,712명이며 이중 조선인의 숫자는 4,440명이었다. 1919년엔 헌병 대신 조선총독부경찰이 업무를 맡았다. 헌병보조원들은 경찰의 순사가 되었다.

조선인 일본병은 1938년부터 시작된 지원병, 1943년 시작된 학병, 1944년 시작된 징병제에 의해 일본군에 들어간 자를 말한다. 육군의 경우 1938년부터 특별지원병 제도를 시작했고 해군은 1943년부터 육전대(해병대)와 지상근무자를 중심으로 조선인을 받았다.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를 확인할 것.

3 알려진 사람들

3.1 조선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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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사익: 한국인 평민출신으로 유일하게 일본군 장군(중장)까지 오른 인물. 중일전쟁 시기 중국팔로군과 조선의용군과 교전(태항산 전투) 당시 일본군을 지휘했으며,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필리핀전선에서 연합군포로 수용소장 지냈다. 종전후 필리핀에서 전범으로 처형당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군대가 해산되자 일본의 육사로 유학갔다. 당시에는 대한제국의 명의로 유학을 간 것이었다. 한일합방 이후 같이 유학을 간 친구들은 독립운동 등에 투신하였으나 그는 그대로 남아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일본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자신을 영국군에서 복무하는 아일랜드인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친구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지만 시기상조라며 거절했으며 탈영한 조선인 일본군을 숨겨주는 등 묘한 행동을 많이 했다. 일본군 장군에 있었다는점과 중일전쟁시기 조선 독립군을 상대로 교전 지휘했다는점, 그리고 2차대전 전범이었다는 점에서 친일파로 분류된다. 최종계급 일본군 육군 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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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무: 1864-1926. 조동윤과 마찬가지로 대한제국군을 거쳐 일본군에 편입됐다. 정미칠적,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주도했으며, 이후 의병 토벌에 진압에 앞장서기까지 했음. 경술국치 후 귀족작위 받아 떵떵거렸다. 친일파로 최종 계급은 일본군 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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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응선: 1881-1932.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군 우츠노미야 타로에게 발탁되어 일본 육사로 유학했다. 그후 일본군으로 러일전쟁에 참전했다가 대한제국군으로 다시 파견되어 열심히 친일질 했다. 최종계급 일본군 소장.
  • 왕유식: 1870-1930. 이름과 달리 존나 무식했던 모양이다 위와 마찬가지로 친일파가 된 대한제국군의 군인. 원래는 대한제국군 대위로 박영효가 임명한 친일파 장교를 견제하려고 고종이 일본으로 유학보냈는데 친일파가 되어 돌아왔다.

3.2 일본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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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환 : 사관후보생으로 강제로 징집되어 장교로 교육을 받다가 탈락하고 병으로 끌려가 강제로 태평양 전선에서 싸웠다.
  • 장준하 : 자원입대하여[7] 중국에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944년 7월 탈영한다. 탈영 직후 국민당 유격대에 의탁했으나 그 유격대는 일본군도 아니고 중국 공산당 게릴라의 공격으로 와해되고, 어찌어찌 빠져나와 김준엽과 다른 조선인 탈영병들과 함께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한국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임시정부가 미국 OSS와 합작 기획한 국내 진공 작전 요원으로 김준엽, 노능서 등과 함께 편입되지만, 8월 15일 광복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일반인 자격으로 쓸쓸히 귀국하였다. 이 여정을 함께 했던 광복군 장병 분들이 90대의 춘추로 몇 분 살아계셔서 KBS 역사스페셜에서 증언을 하였다.
  • 김준엽 : 장준하와 마찬가지로 학도병에 반강제적으로 입대하여 중국에 있던 일본군 자대에 배치되었으나 곧 탈출하여 한국 광복군 기지로 향한다. 마찬가지로 중국군에게 나포되어 중국군 기지에서 장준하를 만났다. 광복 후 귀국까지의 행적은 장준하와 거의 동일하다.
  • 탁경현 : 조선인 카미카제 대원. 역사스페셜에서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를 조명한 영화가 일본에 나오자 그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주선으로 그의 고향에 추모비가 세워지자 분노한 주민들이 일본을 위해 죽은 것이 뭐가 자랑이냐고 추모비 건립을 반대하여 끝내 식이 치뤄지지 못했다.#
  • 박정희 : 교사를 하다가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일본사관학교를 나와 만주군 장교가 되었다.

3.3 일본 해군

  • 김재규 : 일본 해군 예과 연습생 출신으로, 해군 항공소위 임관을 준비하다 광복을 맞아 임관 못 하고 대한민국에선 육군 장교가 되었다.
  1. 당시에 일본은 왕공족으로 이들을 분류하였다. 황족보단 낮고 화족보단 높게. 간단히 줄여 이왕(李王)가라고 불렀다.
  2. 윤치호 등 친일파는 정말로 이것을 믿고 '드디어 내지인과 조선인이 평등하게 하나가 되는구나!'하고 기뻐하기도(...)믿으면 곤란하다
  3. 단, 일단 입대하고 나면 계급 우선주의에 입각해 조선인이라도 하급자 일본인은 그들을 함부로 못대했다. 괜히 조선인들이 오장 달 때까지만 참자며 버틴 게 아니며, 실제로 오장으로 진급하여 동네로 오면 자신을 괴롭히던 주재소장(오늘날의 파출소장 내지는 지구대장) 싸대기부터 때리고 봤다고 하는 게 아니다.
  4. 군의관 별도의 계급으로 중령에 상당한다. 3등군의장은 소령.
  5. 소위에 상당하는 계급으로 보이는데 아는 위키러의 추가바람.
  6. 왕, 공족은 대한제국 황실을 예우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고안한 일본황족과 일본화족, 조선귀족 사이의 특수한 지위로 '협력에 대한 대가'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친왕 이은 경우, 태어나자마자 아주 어린시절부터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경우였고...
  7. 고향친구 최기일은 말리는거 뿌리치고 자원 입대했다고 말했고 본인 자서전 돌배게에서도 부모님이 걱정 되었다고 이유를 들면서도 자원했음은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에 뒷배경이 있었는데, 그의 미망인 김희숙 여사가 정신대로 징발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자원입대하게 된 것이다. <출처 : 장준하, 묻지못한 진실, 돌베개, 고상만 저. p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