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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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흥시 행정구역 변천사 (현 시흥시 지역)
년도당시 행정구역
1896인천부 (仁川府)안산군 (安山郡)
1914부천군 소래면 (富川郡 蘇來面)시흥군 군자면 / 수암면
(始興郡 君子面 / 秀巖面)
1973시흥군 소래면 (始興郡 蘇來面)
1980시흥군 소래읍 (蘇來邑)
1989시흥시 (始興市)
시흥군 행정구역 변천사[1]
년도당시 행정구역
940 / 1308안산군 (安山郡)
1413금천현 (衿川縣)과천현 (果川縣)
1795시흥현 (始興縣)
1895인천부 시흥군 (仁川府 始興郡)인천부 과천군 (仁川府 果川郡)인천부 안산군 (仁川府 安山郡)
1896시흥군 (始興郡)과천군 (果川郡)안산군 (安山郡)
1914시흥군 (始興郡)
현재서울특별시 금천구(衿川區)[2]
서울특별시 영등포구(永登浦區)[3]
서울특별시 구로구(九老區)[4]
서울특별시 동작구(銅雀區) 서부[5]
서울특별시 관악구(冠岳區)[6]
경기도 광명시(光明市)
[7]
경기도 과천시(果川市)
경기도 안양시(安養市)[8]
경기도 군포시(軍浦市)[9]
경기도 의왕시(義王市)[10]
서울특별시 동작구(銅雀區) 동부[11]
서울특별시 관악구(冠岳區) 남현동
서울특별시 서초구(瑞草區)[12]
경기도 안산시(安山市)[13]
경기도 시흥시(始興市)[14]
경기도 군포시(軍浦市)[15]

위의 커다란 도표는 괜히 만들어놓은 게 아니다.

현재의 시흥시 지역은 원래 인천도호부(소래)와 안산군(정왕, 연성, 목감 등)의 땅으로, 원래의 시흥과는 단 한 치의 연관도 없다. 목감천 주변 시흥시-광명시 경계가 조정되었다면 좁쌀만한 오리지널 시흥땅을 차지했겠지만 그런 경계조정이 이루어진 적이 없어서 일제의 근대적 측량으로 설정된 행정구역 경계(옛 부천군 소래면 - 시흥군 서면)가 그대로 유지되어오고 있기 때문.[16] 그러나 설령 시흥시-광명시 간 경계조정이 이루어졌다 해도 단지 경계 직선화를 위한 미세조정에 그치는 터라 이러한 문제는 본질적으로는 여전했을 것이다.

시흥시 당국에서도 아예 대놓고 인천, 안산의 일부였다고 설명한다. # "시흥시에는 '시흥'이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인천과 안산의 일부였으므로 '인안시(仁安市)'로 개칭해야 한다 그 흔적으로 2000년 전국 시외전화 지역번호 개편 이전까지 현 시흥시 지역은 인천권이였던 소래 지역이 032, 안산권이었던 군자+수암 지역이 0345로 나뉘어 있었으며, 현재 천주교 교구 역시 소래 지역은 인천교구, 군자+수암 지역은 수원교구로 나뉘어 있다.

한국 역사상 행정구역 변화가 가장 스펙터클했던 곳. 그리고 아예 중소도시의 역사만으로 최초로 한 페이지가 나왔다. 그만큼 시흥의 역사가 많이 꼬였다는 것이다. 역사, 지리 관련 일부 서적에서는 조선시대의 금천/시흥을 '오늘날의 경기도 시흥시 일대'로 가리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이자 역사왜곡이다.[17][18] '오늘날의 영등포, 금천, 광명 일대'라 하는 것이 옳다.[19]

지금의 시흥시 지역을 이루는 소래/대야/신천 지구와 군자/정왕 지구에 대한 1914년(구 군자면, 수암면 지역)~1973년(구 소래읍 지역)까지의 역사에 대해서는 인천광역시/역사, 부천시/역사, 안산시/역사 문서를 참조할 것. 여담이라면 당나라 장군 소정방백제를 침공할 때 소래에서 상륙해서 '소정방이 왔다→소래'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다.

한국어 위키백과시흥군 문서를 참조하면 구한말 당시의 행정구역을 알 수 있다.

2 상세

2.1 1914년까지의 시흥

파일:Attachment/orgsih.jpg
1914년 이전까지의 시흥.

파일:Attachment/sih1.jpg
인천광역시 쪽을 좀 더 보완한 주변 지역(지금의 시흥시 지역을 중심으로).

원래 시흥이라고 불리던 지역은 현재 서울특별시 서남부(이른바 영등포 권역)과 경기도 광명시 일대로, 원래 '금천'[20]이라는 이름이었다가 정조 대에 '시흥'으로 개칭되었다. 이때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여의도, 양화동 제외), 구로구(안양천 이동지역), 금천구, 동작구 일부, 관악구(남현동 제외)과 광명시(옥길동 제외), 안양시 일부(석수동, 박달동)에 해당되는 곳이었으며[21] 이들 지역은 오늘날 서울 영등포 권역 생활권을 구성하고 있다.[22] 잉벌노→곡양→금주→금천→시흥→영등포? 고로 지금의 시흥시 일대는 전통적 의미의 시흥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얘기. 간단히 말하자면 "오리지널 시흥"은 서울 영등포 권역 + 경기 광명시 일대 + 경기 안양시 일부.[23] 시흥의 정통성을 가장 많이 지닌 지자체는 서울특별시 금천구이며, 경기도 , 중에서는 경기도 광명시이다.

이 문단에서는 1914년 이전의 원래 시흥군이었던 서울 영등포권 경기 광명시 일대를 중점으로 기술하겠지만, 시흥군 해체 이전까지 시흥군에 속했던 지역들(현 시흥시 지역 포함)의 개괄적인 역사도 언급하겠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과천시/역사, 화성시/역사, 안산시/역사, 인천광역시/역사, 부천시/역사 참조.

2.1.1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고구려 장수왕의 한강 유역 정복 이후 잉벌노(仍伐奴)현('늠내')[24]로 명명되었다. 늠내 혹은 잉벌노[25]는 '뻗어나가는 땅'이라는 의미로, 영등포 일대가 평야 지대인 것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늠내의 의미는 조선 후기에 등장한 '시흥'이라는 명칭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통일신라 경덕왕곡양(穀陽)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26]

한편 과천은 고구려 장수왕 때 율목군 또는 동사힐이었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율진군이 되었다. 안산은 장수왕 때 장항구현이었다가 경덕왕 때 장구군이 되었다. 인천은 장수왕 때 매소홀현이었다가 경덕왕 때 소성현이 되었다.

2.1.2 고려

곡양에서 금주(衿州)로 바뀌었다.

한편 과천은 율진에서 과주로, 안산은 장구군에서 안산으로 개칭되었다. 인천은 경원부로 승격되었다가 인주(仁州)로 이름이 바뀐다.

2.1.3 조선

개국 직후 행정구역 개편(1413년)으로 금천(衿川)으로 바뀌었다. 조선 개국 이후 양광도를 경기도로 개편하는 등의 전면적인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끝이 -주(州)로 끝나는 일부 지명을 州자에서 세 개의 점을 빼내어(...) 모조리 -천(川)으로 치환하여 금천(衿川)이 된 것.[27]

이것은 인천과 과천도 마찬가지인데, 인주(仁州)와 과주(果州)였다가 1413년에 각각 인천(仁川)과 과천(果川)이 된 것. 안산의 경우는 이미 고려시대에 '안산'이라는 이름이 정해졌기에 조선초기의 행정구역 개편과는 관련이 없었다.

조선 초기에는 금천현과 과천현(현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 서울 관악구 남현동/동작구 노량진, 사당동, 동작동/서초구 대부분)이 통합되어(1414년) 금과현이 만들어지거나(이때는 과천이 금천에 병합되는 형식) 금천현과 양천현(현 서울 강서구, 양천구)이 통합되어 금양현[28][29]이 만들어기도 하다가 1416년에 그냥 원래대로 '금천현'으로 환원되어 굳혀졌고 정조 때(1795년)에 명칭이 금천에서 시흥으로 바뀌었다. 시흥이라는 단어는 잉벌노(늠내)의 의미를 되살린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시흥으로 개칭과 비슷한 시기에 지금의 시흥동에 시흥행궁이 지어졌고, 정조가 지금의 시흥대로 따라 서울(한양)에서 수원까지 행차했다고 한다. 사실 원래는 과천군 쪽에 나있던 길을 시흥군 쪽으로 옮긴 데는 사도세자 처형에 관여한 인물의 묘가 과천에 있는데, 수원까지 행차가는 데 과천을 지나가는 걸 정조가 싫어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아쉽게도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있던 조선시대 시흥군 관아와 시흥향교 건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30] 더구나 관아터는 현재에도 정확한 위치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으며, 시흥5동 주민센터 건물 자리를 비롯하여 몇 군데 추정지만 파악될 뿐이다. 옛 시흥향교는 일제가 1940년대에 기존의 과천향교로 통합시키면서 철거되었다. 만약에 철거되지 않고 남아있었다면 양천향교와 함께 서울시내의 둘 뿐인 향교가 되었을 터. 하지만 양천향교도 헐린 건 똑같다.

2.1.3.1 구한말 당시 시흥군 산하 행정구역

파일:Attachment/시흥시/역사/originalsiheungmap-2.jpg

현재는 광명시와 석수동, 박달동만 제외한 전 지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있다.
이 지도에 그려진 경계는 현재의 법정동 경계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구한말 당시 경계와 사소한 부분에서 다를 수 있다.

  • 군내면(郡內面[31]) - 서울특별시 금천구(시흥동), 경기도 안양시(석수동, 박달동[32])
  • 서면(西面) - 경기도 광명시 동부(철산동, 하안동, 소하동, 일직동)
  • 남면(南面) - 경기도 광명시 서부(광명동, 노온사동, 가학동)[33]
  • 상북면(上北面) - 서울특별시 구로구(신도림동, 구로동), 영등포구(도림동, 대림동, 양평동, 문래동, 당산동)[34]
  • 하북면(下北面)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신길동, 영등포동), 동작구(신대방동, 대방동)
  • 동면(東面) - 서울특별시 동작구(상도동), 금천구(독산동, 가산동), 구로구(가리봉동), 관악구(신림동, 봉천동)

간단히 말하자면 북시흥은 지금의 영등포, 서시흥은 지금의 광명시, 동시흥은 관악구, 금천구 일대와 안양시 일부라고 보면 된다.

이 시기까지의 시흥군의 진산(鎭山)은 삼성산이었다.

안양시(석수동, 박달동 제외), 군포시(안산군 소관이던 대야동 일대는 미포함.), 과천시, 서울특별시 동작구(노량진, 흑석동, 동작동, 사당동), 서초구(염곡동, 내곡동 제외), 관악구(남현동)은 과천군 관할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의 시흥시 지역은 북부는 인천부, 남부는 안산군 관할이었다.

2.2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

파일:Attachment/sih2.jpg

시흥과 전혀 상관없던 지역에 시흥이라는 지명이 붙게 된 계기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 남서부 일대의 전통군현들이 통폐합되어 부천군과 시흥군이 신설되면서부터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시흥군[35], 과천군[36], 안산군[37]이 시흥군으로 통합되었다. 군청은 그보다 3년 전인 1911년 시흥리에서 영등포로 이전하였다.

부군면 통폐합 초안에 따르면 부평+양천부천?, 시흥+과천, 인천+안산으로 짜여져있었으나, 최종 시행안은 인천+부평(→부천), 김포+통진+양천(→김포), 시흥+과천+안산(→시흥)으로 되었다.

2.2.1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내용

  • 시흥군 서면 : 구 시흥군 서면 + 남면 + 군내면 박달리 (현 경기도 광명시,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
  • 시흥군 북면 : 구 시흥군 상북면 + 하북면 + 구 과천군 하북면 (현 서울 영등포구, 구로구 동부, 동작구 노량진, 흑석동)
  • 시흥군 동면 : 구 시흥군 군내면 (박달리 제외) + 동면 (현 서울 금천구, 관악구, 동작구 상도동,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 시흥군 신동면 : 구 과천군 상북면 + 동면 (현 서울 동작구 사당동, 관악구 남현동, 서초구)
  • 시흥군 과천면 : 구 과천군 군내면 (현 경기도 과천시)
  • 시흥군 서이면 : 구 과천군 상서면 + 하서면 (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동안구)
  • 시흥군 남면 : 구 과천군 남면 (현 경기도 군포시, 단, 대야미 지역 제외.)
  • 시흥군 군자면, 수암면 : 구 안산군 지역 (현 경기도 안산시, 시흥시 남부)

2.2.2 1914년 ~ 1973년 사이의 변천사

1917년 북면 영등포리, 당산리, 양평리를 영등포면으로 분리하였으며, 1931년 영등포읍으로 승격되었다.

1936년 영등포읍과 북면 노량진리, 흑석리, 번대방리 일부[38], 도림리 일부[39], 동면 상도리[40] 등이 경성부에 편입되었으며, 이때 경성부에 편입되지 않은 북면 잔여지역은 동면에 이관되었다. 1947년 시흥군청이 영등포에서 안양면[41]으로 이전되었으며, 1949년에는 동면 구로리, 도림리[42], 번대방리[43] 등이 또다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이와 함께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승격되었다. 영등포구의 역사에 대해서는 영등포구/역사 참조.

1963년 서울의 대대적인 확장에 따라 동면 신림리, 봉천리, 가리봉리, 독산리, 시흥리 및 신동면 전역[44]이 서울에 편입되었다. 김포군 양서면, 양동면 전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옛 양천군이 서울특별시에 병합되었다면, 옛 시흥군은 1914년 이전 시흥군의 상당부분 영역이 서울에 편입되면서 옛 시흥군은 서울특별시으로의 절반의 병합이 이루어진 셈이다. 왜 '절반의 병합'이나면, 이 시기에 지금의 광명시와 안양시 석수동, 박달동이 서울시에 편입되지 않았기 때문.[45]

같은 해에 동면(지금의 서울 금천구) 안양리[46]와 서면(지금의 광명시) 박달리를 안양읍에 편입하였다.[47] 안양천과 서울시 경계를 기준으로 동쪽으로 넘어간 지금의 박달동과 석수동을 지금의 광명시, 금천구 지역에서 안양으로 이관한 셈. 이와 함께 화성군 일왕면을 편입하고 의왕면으로 개칭하였다.[48]

1970년 서면 광명리와 철산리에 서면 산하 광명출장소가 설치되었다.

2.3 분리와 해체, 현재

1973년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되어 분리되면서, 시흥군의 영역은 동서로 분단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49] 이와 함께 현재 시흥시 북부이자 시흥시의 사실상 중심지인[50] 부천군 소래면을 편입해왔다. 하필 부천군 소래면이 시흥군에 편입된 이유는, 1973년에 부천군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되면서 처치 곤란해진 소래면과 계양면+오정면을 각각 시흥군과 김포군에 이관한 것이기 때문.

1974년 서면 북부인 서면 광명출장소가 시흥군 직할 광명출장소로 승격되었다. 1977년 시흥군청을 안양시 안양동 674번지(현 삼원프라자호텔 자리)에서 안양동 477번지(현 만안평생교육센터 자리[51])로 이전하였다.[52][53] 1979년 서면 남부가 소하읍으로, 남면이 군포읍으로 승격되었다.

시흥군 직할 광명출장소와 소하읍은 1981년에 광명시로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참고로 광명지역은 당시 시흥군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54] 시흥군의 마지막 '오리지널 시흥' 지역인 광명시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시흥의 역사적 정통성을 고려했다면 '광명시' 대신 '시흥시'란 이름으로 승격시키고, 남은 시흥군은 개칭하는 게 좋았을 것이다. 문제의 서면(소하읍)은 서울시로 편입될 뻔했으나, 서울 집중 문제 때문에 나가리되면서 결국 광명시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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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광명시 분리 이후 시흥군 행정지도(1982년).[55] 묘하게 파키스탄동파키스탄을 연상시킨다

1980년에는 소래면과 의왕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에는 소래읍 옥길리가 광명시와 부천시에 분할 편입되었으며 화성군 반월면 초평리, 월암리가 의왕읍에 편입되었다.

1986년에는 서부의 반월출장소[56]가 안산시로, 동부의 과천면이 과천시로 승격되었다. 이로서 최종적으로는 3읍(소래, 군포, 의왕)과 2면(군자, 수암)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파일:Attachment/sih3.jpg
1986년의 시흥군.

결국 1989년 군포읍은 군포시로, 의왕읍은 의왕시로 승격되고 소래읍, 군자면, 수암면이 시흥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영국 런던 근교의 舊 미들섹스 주의 폐지처럼 시흥군 해체때 아예 시흥이라는 이름을 없애고 지금의 시흥시를 소래시로 명명했으면 더 좋았을듯 그리고 1995년 서울특별시 구로구 분구로 지금의 금천구는 '시흥구'라는 이름을 달았겠지

시흥시 해체 직전에는 군포읍과 의왕읍 주민들은 군포읍과 의왕읍을 통합하여 시흥시로 승격하자고 주장하였고 안양시 편입에 완강히 반대하였다. 또한 인천시는 소래읍의 인천 편입을 내무부에 요청했지만, 소래읍 주민들은 인천 편입이 아닌, 소래시 승격을 원했다고 한다.기사 또한 부천시에서도 역사성과 생활권을 들어 소래읍의 부천 편입을 요구하기도 했다.기사

1995년에는 안산 생활권이었던 안산동(수암동, 장상동, 장하동)[57]과 화정동 일부[58]가 안산시에 편입된 이래[59], 현재의 행정구역을 유지해 오고 있다. 1995년 내무부 주도의 인천 추가 확장 차원에서 시흥시도 인천 편입 대상으로 거론되었으나(참고 기사) 시청과 시의회의 거센 반발로 인천 편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를 지도로 보고 싶다면 #이 블로그 참조.

이렇게 거의 1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다보니 원래의 시흥군 중심지인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과 현재의 시흥시는 전혀 관계없는 곳이 되어버렸고,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생긴 시흥역은 현 시흥시와 완전히 동떨어진 지역에 위치하게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시흥시를 찾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안겨주다가 결국 금천구청역으로 개명했다.

2.4 현 시흥시 지역의 자잘한 역사

  • 연성동에 강희맹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관곡지가 있으며, 이 곳에서 연꽃을 길렀다고 한다. 그래서 옛 안산군의 별호(別號)가 '연성군(蓮城郡)'이었으며, '연성동'이란 행정동명 역시 여기에서 따온 것. 안산의 옛 이름인 '연성'을 시흥시가 쓰고 있다...만 해당 지역이 안산군 지역이었던 건 맞으니...
  • 보통천(미산동, 포동) 주위로 뻥뚫린 간척평야가 있는데, 이를 '호조벌'이라고 한다. 1720년(숙종 26년)에 호조(재무부 격) 산하의 진휼청이 간척공사를 시작해 경종 원년에 완료되었다. 해당 사료에는 깨알 같이 인천안산이라는 두 고을의 경계 지역에[60] 둑을 쌓아 간벌했다는 내용이 나온다.[61] 보통천이라는 하천은 간척 이전에는 갯골이었고, 옛 인천과 옛 안산의 자연경계이기도 했다.

2.5 만약 시흥시가 여러 기초자치단체로 쪼개지지 않았다면?

  • 인구가 100만명을 넘어 광역시로 승격되었을지도 모른다. 2015년 3월 인구를 기준으로 시흥군에 속했던 도시들[62][63]의 인구를 합치면 약 250만 정도 나오며, 시흥군에 속했던 적은 없지만, 인천광역시와 서울특별시, 시흥광역시 사이에 끼어 있는 부천시까지 포함하면 약 340만 정도 된다.

2.5.1 반론

그러나 이와 같은 가정은 1992년 고양군의 고양시 승격 시까지 줄곧 인구가 불어난 읍 위주로 하나 하나 자잘하게 시 승격이 이루어졌던 당시 정책[67]을 미루어볼 때, 당시 시점에서도 현실성이 없었을 것이다. 당국이 한때 고려했거나 지역 차원의 요구사항이었던 영등포의 독자 승격이라든지 부평권의 경성부 추가편입 시나리오[68]와 다르게 시흥군이 통째로 시흥시로 승격되는 시나리오는 당대 현실성이 아예 없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도권의 팽창으로 옛 시흥군 지역이 급속하게 도시화가 되어 지방행정서비스 차원에서 시흥군 지역이 통째로 '시흥직할시' 혹은 대규모 도농통합시 '경기도 시흥시'로 승격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산하 읍, 면들을 하나 하나 시로 승격시키는 것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시 승격 이전의 광명시의 경우만 하더라도 서울시의 도시계획으로 도시화된 광명리와 철산리를 관리하기 위해 시흥군 차원에서 광명출장소를 설치했지만 행정서비스가 미흡하여 서울 편입 요구가 빗발칠 정도였다.

결정적인 문제는 '고양 600년'이란 문구로 대변되는 고양과 달리 시흥군은 시흥(영등포, 구로, 금천, 관악, 광명)+과천(동작, 서초, 안양, 과천, 군포)+안산(안산, 시흥 남부)이 별 연고의식 없이 억지로 합쳐진 형태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구 시흥군은 한가운데에 관악산-삼성산 줄기, 도덕산-구름산-수리산 줄기, 봉재산-운흥산-광덕산 줄기 등 수많은 산들이 틀어박혀 생활권이 아주 제멋대로였다. 1963년 서울 대확장 때 관악산 이북만 서울로 들어가고, 조선 초기에 금천과 과천을 합쳤더니 민원이 빗발쳐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다시 분리시킨 것이 괜히 벌어진 일이 아니다. 성남-분당처럼 딱히 장애물도 없고 역사적으로도 수백 년간 광주군이라는 동일한 고을에 속했던 지역에서도 분리하네 마네 소리가 들끓는 판인데, 시흥이 분리되지 않은 채 거대 도시를 형성했다면 오히려 그때야말로 곳곳에서 분리 요구가 빗발쳤을 것이다. 차라리 영등포가 경성부 편입 대신에 영등포부로 독자 승격하여 영등포를 비롯한 옛 시흥군 상당부분(지금의 금천구, 관악구, 광명시, 안양시 지역이 영등포시에 편입)이 영등포직할시 → 영등포광역시로 발전하는 시나리오가 더 현실성 있었을 것이다.

2.5.2 대안

서울 편입 지역 및 광명 지역(이상 영등포권)을 제외한 나머지 시흥군 지역이 크게 안양권(안양, 과천, 군포, 의왕), 안산권(안산 및 시흥 군자, 수암), 인천·부천권(소래)의 3개 도시권 및 생활권으로 정리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시흥군 전체를 하나의 시로 승격시키는 것도, 반대로 소래, 군포, 의왕 등을 자잘하게 각자 시로 승격시키는 것도 아닌, 안양, 안산, 인천·부천의 3대 도시권을 따라 분할 편입시켜 정리하는 것이 최적이었을 것이다.

가장 이상적이고 합리적으로 시흥군을 정리할 수 있었을 때는 안산과 과천이 시로 승격되어 분리된 1986년인데, 이 때 아예 시흥군도 같이 폐지해서 안산시의 전신인 반월출장소에 편입되지 않았던 군자·수암면 잔여지역은 완전히 안산시로 넘기고, 소래읍은 인천이나 부천으로 넘기며[69], 군포·의왕읍은 안양시로 넘겨서 시흥군을 재고처분(...)하면 되기 때문이다.[70]

그러나 굳이 시흥군을 1989년까지 3년이나 더 존속시켜, 결국 역사적인 이름과 실제 지역이 안 맞고 독자적인 도시권도 없는 시흥시의 탄생, 군포와 의왕의 독자적 시승격으로 인한 안양권의 행정구역 파편화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3 참고 문헌

  • 한국 행정구역체계의 문제점과 개편의 방향 (임석희, 1994)링크
옛 시흥군 지역의 문제점(광명/과천의 서울 생활권 문제, 안양권 행정구역 파편화 문제 등)을 학술지 중간에 지적하였다.
  • 경기도의 근현대지도 (경기도, 2005)
부록에서 편저자가 시흥군이 역사적으로 매우 꼬여있음을 지적하는 내용이 나온다.

4 관련 문서

  1. 시흥군에서 갈라져 나온 자치구, 의 계승 구도는 각 구청, 시청 소재지를 기준으로 하였다.
  2. 시흥군 동면이었던 안양시 석수동 포함
  3. 한성부(1914년 이후 고양군) 관할이었던 여의도 및 양천군(1914년 이후 김포군) 관할이었던 양화동 제외.
  4. 부평도호부(부평군, 1914년 이후 부천군) 관할이었던 안양천 이서지역 제외.
  5. 대방동, 신대방동, 상도동
  6. 봉천동, 신림동
  7. 시흥군 서면이었던 안양시 박달동 포함. 인천도호부(1914년 이후 부천군) 관할이었고, 1983년에 광명시에 편입된 옥길동 제외.
  8. 만안구 석수동, 박달동은 원래 금천현(시흥현) 지역이었다. 그런데 지금 만안구 청사로 쓰이는 구 시청사도 조선시대에는 과천현 소재지였다는게 함정.
  9. 구한말까지는 안산군(1906년 이전에는 광주군) 관할이었던 대야동 제외. 대야동 지역은 1914년 수원군(1949년 이후 화성군)에 편입된 후, 1995년 군포시로 편입되었다.
  10. 1963년 화성군 일왕면이 의왕면으로 개칭되어(과거에도 수원군 의왕면이었으나, 1936년 일형면과 통합되어 일왕면으로 개칭되었던 것이다.) 시흥군에 편입되었다.
  11. 노량진동, 흑석동, 동작동, 사당동
  12. 양재동, 강남구 도곡동 일부 포함, 광주군 관할이었던 내곡동, 염곡동, 신원동 제외.
  13. 상록구 일부 남부 지역은 1906년 안산군으로 편입된 광주군 성곡면이었다.
  14. 현 시흥시 북부에 해당되는 옛 소래읍 지역은 1973년 부천군에서 편입되었다.
  15. 1995년 대야동 지역이 화성군에서 군포시로 편입되었다.
  16. 다만 지금의 광명시 북부인 철산리, 광명리, 하안리가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더라면 시흥군 서면 잔여지역 중 노온사리와 가학리가 소래읍으로 편입되었을 수도 있었다.
  17. 실제로 시흥에서 이를 갖고 기념사업을 벌였는데, 시의원 등이 역사를 왜곡한다며 들고 일어난 사건도 있었다.
  18. 이 문서에서도 후술하겠지만 지금의 시흥시는 조선시대에는 인천과 안산에 속했다.
  19. 반면에 역사책에서 조선시대의 과천과 안산을 오늘날의 과천시, 안산시로 일컫는데, 옛 과천군과 옛 안산군의 관아가 각각 지금의 과천시와 안산시에 있었기 때문에 시흥과는 다르게 이 둘은 옳다.
  20. 이 이름은 1995년 서울특별시 금천구로 부활했다.
  21.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비롯한 일부 백과사전에서는 안양시, 군포시 일대까지 포괄하고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안양시의 대부분과 군포시 일대는 과천군 관할이었기에 엄연히 잘못된 기술이다.
  22. 조금 자세히 설명하면, 조선 시대의 시흥군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을 중심으로 서울특별시 금천구 및 영등포구(여의도, 양화동 제외) · 관악구(남현동 제외) · 동작구 일부(대방동, 신대방동, 상도동) · 구로구 동부(얀양천 이동지역)와 경기도 광명시(옥길동 제외) 및 안양시 일부(석수동, 박달동) 일대에 해당되었다.
  23. 참고로 구한말까지의 시흥군의 행정구역 중 남면은 지금의 광명시 서부이고, 서면은 광명시 동부(+안양 박달동), 동면(현내면)은 서울 금천구(+안양 석수동)였다. 물론 안양시 나머지 전역, 군포시 일대는 과천군 관할이었다.
  24. 조선 시대에 한성부 관할이었던 현재의 여의도까지도 포함한다. (출처: 영등포의 역사와 지명이야기, 민긍기)
  25. 잉벌노는 늠내의 음차로 추정된다. 내 + ㅂ(ㅁ, ㅇ) + 내
  26. 이 역시 훈독하면 낟 + 내로 낫내, 늠내가 된다.
  27. 고려 건국 이후에 고려 건국에 기여한 호족들의 출신지가 되는 고을들을 죄다 주(州)로 승격했다. 인천, 금천, 과천에 향, 부곡, 소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도 연관 있다. 그런데 조선 초기 행정구역 개편때에는 '주'라는 이름에 맞지 않는 중소 규모 고을들의 이름을 천(川)이나 산(山)으로 치환하여 강등한 것이다.
  28. 강희맹의 '금양잡록'이 이때 저술되었다.
  29. 그런데 정작 강희맹이 농사지었던 동네는 경기도 안산군 초산면 하중리, 즉 지금의 시흥시 하중동(연성동)이다. 관곡지가 대표적인 동네이며, 거기에 심어진 연꽃밭에서 훗날 연성동이라는 명칭이 유래된 것이다. 강희맹이 이곳을 금천(금양)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당시 하중동은 안산군 관할.
  30. 특히 군현 관아의 경우 다른 대다수 군현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일제가 기존의 군현 관아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초등학교를 짓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 수도권의 경우 인천, 부평 정도가 도호부청사 일부만 현재 남아있는 상태이다. 그나마 도호부 청사의 상당부분이 초등학교 건립 목적으로 철거되어 남은 것이 이 정도다. 한성부조차 관아 건물은 현존하지 않고 다만 터만 전해질 뿐이다.(...)
  31. 행정단위가 군(郡)이기 이전 현(縣)이었을 때는 현내면(縣內面)이라 했다.
  32. 박달동은 1914년에 시흥군 서면으로 이관되었는데,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박달동은 서면 관할이었다. 구한말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면에서 군내면으로 이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33. 옥길동은 당시 인천부 관할이었다.
  34. 양화동은 양천군, 여의도는 한성부 관할이었다.
  35. 앞서 언급한 '오리지널 시흥'
  36. 지금의 서울시 동작구(사당동, 노량진, 동작동, 흑석동), 관악구 남현동, 서초구 대부분과 경기 안양시 상당부분, 군포시, 과천시 일대
  37. 지금의 시흥시 군자-정왕, 연성-목감지구 및 상록구 남부(1914년 개편으로 상록구 남부는 수원군 반월면이 되었다)를 제외한 안산시 일대
  38. 현재의 서울 동작구 대방동
  39. 현재의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
  40. 현재의 서울 동작구 상도동
  41. 1941년 서이면에서 개칭
  42. 현재의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 및 영등포구 대림동
  43. 현재의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으로, 서울에 대방동과 신대방동이 따로 있는 이유는 번대방리가 분할되어 시간차를 거쳐 서울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44. 현재의 서울 서초구 대부분과 동작구 사당동, 관악구 남현동 지역으로 1914년 개편 이전에는 과천군 지역이었다. 시흥군에 통폐합되면서 '신'동면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 현재 서초구 잠원동에 위치한 신동초등학교는 과거 시흥군 신동면이던 시절부터 있었던 상당히 오래된 학교이며, 서초구로 바뀐 1990년에 개교한 신동중학교도 이 이름을 따른 것이다.
  45. 옛 과천군의 상황도 비슷하긴 하지만, 적어도 시흥군의 경우와 다르게 과천군의 관아소재지가 서울시에 편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하지만 지금의 과천시 지역이 한때 장기적인 서울 편입 예정지였고, 추후 서울시 추가 확장시에 광명시와 함께 서울시에 추가 편입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 중 하나라는 게 문제.
  46. 현재의 안양시 석수동. 기존 안양읍 안양리와 이름이 같아 신안양리로 개칭되었다가, 안양시 승격과 함께 석수동으로 개칭되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현 시흥동과 석수동의 경계문제가... 연현이라는 고개 북쪽마저도 안양시 석수동에 속하게 되었다.
  47. 안양시와 광명시의 경계문제는 여기서 불씨가 되었다.
  48. 원래 화성군 의왕면이었으나, 1936년 일형면과 통합되어 일왕면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다가 1963년 옛 일형면 영역이 수원시로 편입되면서 옛 의왕면 영역만 남게 되어 다시 명칭을 회복한 것.
  49. 이 때문에 시흥군청은 여전히 안양시 내에 위치하게 된다. 동부나 서부로 이전해 버리면 서로 반대편에서 불편해 할 테니...
  50. 현재의 시흥시의 사실상 모태는 이 소래읍이라 할 수 있다. 1989년 시 승격 당시에 인구가 가장 많았던 지역이었기 때문. 2014년 현재에는 소래권보다 정왕권이 인구, 경제력 측면에서 우세한 상황.
  51. 이후 만안구청으로 잠깐 쓰였다가, 만안구청이 현 위치(구 안양시청)로 이전하면서 만안여성회관으로 쓰였다.
  52. 이전 버전에서는 '1980년 소래읍으로 이전했다'고 했으나, 사실이 아니다. 우선 시흥시 사이버역사관 자료에서는 '1973년 군청소재지였던 안양이 시로 승격되면서 군청이 타향살이하는 신세가 된다'고만 했을 뿐, 이후 소래로 이전했다는 말이 없다. 또한 1989년도까지 발간되었던 시흥군 통계연보(연간)에도 매년 군청소재지를 안양으로 적고 있다. 또한 1989년 시 승격 당시 시청사(현 대야동 시흥시보건소 자리)는 원래 소래읍사무소 청사였다. 군청이 소래에 있었다면, 읍사무소가 아닌 군청을 시청으로 썼을 것이다. 1988년 12월 30일 MBC 뉴스에 나온 시흥군청 당시 군청 사진 또한 군청이 1988년까지 계속 안양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사들이 있다. 1984년 7월 2일 행정구역과 청사소재지의 불일치로 인해 공납금 수납에 문제가 있음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 1988년 2월 11일 관할 행정구역(시흥군) 세수 확보를 위해 군청소재지 행정구역(안양시)을 벗어나 관할 행정구역(시흥군)까지 가서 담배를 사서 피는 시흥군청 공무원들을 다룬 경향신문 기사 1988년 8월 8일 시흥군의 행정구역 문제를 다룬 경향신문 기사 1988년 11월 28일 군포읍의 시승격 준비를 다룬 매일경제 기사 '1980년 소래읍 시흥군청 이전'을 포털에서 검색하면 꽤 많은 글을 찾을 수 있는데, 잘못 퍼진 정보로 추정된다.
  53. 이 때문에 시흥시가 시흥군을 온전히 계승했다고 말하기에는 애매해졌다.
  54. 당시 소하읍(법적으로는 광명출장소 지역까지 포함)은 시 승격 직전 인구가 15만으로 과대읍이었다. 이렇게 된 데는 광명출장소의 서울편입 여부가 결정나지 않아 갈팡질팡하다가 읍 인구가 그렇게 늘어난 것(...).
  55. 다만 소래면의 읍 승격이 반영되지 않은 오류가 있다.
  56. 군자면, 수암면과 화성군 반월면의 각 일부로 구성되었다.
  57. 즉, 1995년까지 안산동은 안산시가 아닌 시흥시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산동은 조선시대 안산군 관아가 있던 곳이다.
  58. 화정동이 시흥시와 안산시에 모두 존재하는 이유이다.
  59. 군자권(거모동, 정왕동 등) 역시 지속적으로 안산시 편입론이 있었으나, 결국 편입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거모동의 경우는 아예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흥시-안산시 행정구역 경계선이 지나며, 안산시 선부동, 원곡동, 신길동 시가지와 매우 가깝다.
  60. 포동과 매화동은 인천도호부, 연성동, 장현동은 안산군이었다.
  61. 지역 야사에는 조선 정조 때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에 행차하는데 따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쌓았다고 알려져있으나 역사적으로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62. 서울특별시로 편입된 구 시흥군 지역은 제외하고 현재까지 경기도에 남아 있는 시흥시, 광명시, 안산시, 안양시, 과천시, 군포시, 의왕시의 인구를 합하여
  63. 다만 이들 지역 중에서 광명시 북부(철산, 광명, 하안) 및 과천시 일대는 서울특별시에 추가 편입될 여지도 있었을 것이다.
  64. 실제로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경성부와 인천부, 그리고 경기도 일부 지역을 통째로 통합하는 계획을 짠 적이 있었다.
  65. 이전 버전에서는 도쿄도 특별구라고 표현했는데, 도쿄 특별구 지역 면적(619km²) 자체는 서울특별시 면적(606km²)과 큰 차이가 없다.
  66. 경인통합(서울+인천자치구+부천+광명) 후 서울 면적은 1131km².
  67. 물론 지나친 행정구역 파편화를 야기했다는 지적은 가능하다.
  68. 영등포가 독자 승격되지 못하고 경성부에 강제 편입된 것은 부평권의 경성부 추가 편입을 염두에 둔 대경성계획 탓.
  69. 당시 인천직할시와 부천시는 서로 소래읍의 인천/부천 편입을 요구했다.
  70. 여담이지만 이 당시에 목감동 일대의 안양시 편입을 요구한 전력도 있었다. 이 지역 학생들이 안양으로 많이 통학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