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라틴아메리카는 잉카와 아즈텍의 멸망 이후 초기에는 스페인, 포르투갈을 대표로 하는 유럽 해양세력의 지배를 받았고, 먼로 독트린 이후 미국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온갖 기형적인 형태의 정치 체제가 성립되어 있으며 이를 개혁하고자 많은 주목할 만한 민중 혁명이 있어왔다. 작게는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이지만, 크게는 세계적인 68운동을 포함, 세계사의 주류 역사다.하지만 한국에서는 찬밥이다
팍스 아메리카나인 21세기 현재, 만일 팍스 아메리카나가 무너진다면 그것은 중동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서 시작할 것이다는 평이 대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21세기 가장 주목해야 할 지역으로 떠올랐으니 중요도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용이 전반적으로 혁명가들에게 우호적으로 쓰여졌음을 감안할 것. 항목 제목부터가(...) 엔하위키 시절 써진 초창기 문서엔 원주민에 대한 라틴 아메리카 해방 운동가들의 모순적인 태도에 대한 내용조차도 생략되어 있었다.[1]
1 19세기 : 에스파냐 제국의 몰락
19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인구 피라미드. 크리오요(또는 크리올)는 백인이고 라틴아메리카에서 태어났지만 여전히 백인식 사고방식과 생활 습관을 갖고 있는 사람을 지칭한다. 지금도 그렇게 쓴다. 이른바 '혼혈'에 대해선 '메스티소'라 하지 '크리오요'라고 하진 않는다. 위의 도표에 나온 구도는 독립 이후에도 계속된다. 왜? 그러려고 한 독립이니까.
1.1 태동, 대스페인 크리오요 반란
호세 데 산 마르틴, 라틴아메리카의 영웅이며 아르헨티나 5페소 지폐의 얼굴 마담이다.하지만 볼리비아의 아이마라 역사학자 로베르토는 Un hacendado mas(대 지주 한 놈 더)일 뿐이라 가볍게 정리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라틴아메리카 땅따먹기의 승자가 되었지만, 식민지는 우리 좋으라고 있는 거야 라는 합리적(?)인 운영에, 추가로 1776년 미국의 독립과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발발로 우리도 독립해야 하는 거 아냐?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식민지 귀족들은 본국 정부에서 자기들이 식민지를 맘대로 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 그렇잖아도 매우 불만이었다. 이를테면 쓸데없이(?) 원주민 보호 조치 따위를 만들어 이것저것 걸리적거리게 한다던지.
거기다 순순히 복종할 듯한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노예 세력도 점차 일어나 크리오요의 특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투팍 아마루 반란에, 아이티 혁명에, 이달고 신부가 일으켰던 원주민 세력이 크리오요를 다 죽여 버리겠다는 식으로 쓸어 버리려 했던 것까지, 똥줄이 타는 상황이 지나갔다. 부르봉 왕가도 카를로스 3세 시대부터 시작된 개혁을 통해 식민지 출신 에스파냐인들의 세력을 확 줄여 고위공직자로 가는 길을 막기 시작하고 있었다. 페닌술라레스(에스파냐 출신 에스파냐인)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1800년 초반, 나폴레옹이 에스파냐에 침입하여 에스파냐 왕을 갈아치우자 식민지 에스파냐인들(크리오요)들은 왕이 없으면 민중(?)이 권력을 돌려받는 것이다면서 자치회를 결성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착각하지 말자. 여기서 민중이란 크리오요 귀족집단을 일컫는 것이지 원주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원주민은 애초에 안중에도 없었다. 아니 걸림돌로 여겼다. 시몬 볼리바르는 이런 말을 했다. 시몬 볼리바르가 아메리카가 식민지이던 시기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영국인이고 에스파냐가 영국이라 생각해 보라.
"우리는 과거의 유산을 거의 지니고 있지 못하며, 그렇다고 원주민이 유럽인도 아니다. 이 땅의 합법적인 소유자와 에스파냐 침략자 사이 중간 쯤에 위치한 메스티소다. 태생으로는 아메리카인이며, 법적으로는 유럽인이다. 우리는 원주민과 소유권을 놓고 다퉈야 하는 반면, 침략자에 맞서 이 땅에서 우리의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 이중의 갈등 상태에 놓여 있다."
여하튼 그런 흐름에 힘입어 남쪽의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 산 마르틴이, 북쪽의 베네수엘라를 중심으로 시몬 볼리바르가 등장한다. 산 마르틴,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같은 이들이 만든 프리메이슨 조직 '로히아 라우타로'도 무시할 수 없다.
크리오요인 시몬 볼리바르는 1807년, 미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라틴아메리카 합중국[2]의 원대한 야망을 품고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1821년, 멕시코의 독립을 마지막으로 크리오요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페닌술라레스 세력을 축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에스파냐 왕이 법으로나마 지켜줘 온 원주민 땅 약탈을 시작한다. 토지에서 자유롭게 해 주겠다면서. 참으로 영국적이었다. 에스파냐 왕과 협약을 맺고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던, 에스파냐 지배권 밖의 원주민(이를 테면 마푸체 민족)들 역시 새로운 침략 세력에 시달리게 된다. 길고 긴 크리오요 식민주의 시대의 개막이었다. 그리고 원주민의 삶은 에스파냐 왕이 지배하던 시대보다 더 힘들어지게 된다. 멕시코 작가 리우스는 2010년에 낸 독립도 아니고 혁명도 아냐(Ni Independencia Ni Revolucion)이란 책에서 이러한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개탄했다. 원주민은 오늘날도 금발벽안들을 '정복자'로 보며 믿지 않는다고 한다.
스페인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인터뷰를 보라.
http://www.youtube.com/watch?v=GqljCdTmlo4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수박 겉햝기로만 아는 사람이나 그것을 '독립혁명'이었다고 칭찬할 것이다. 그것은 백인 귀족계급 내전이었을 뿐이다.
1.2 분열, 카우디요의 대두와 미국의 개입
산 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는 에콰도르의 과야킬에서 서로 회담을 갖지만, 합중국을 주장하는 볼리바르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산 마르틴의 의견 차이로 회담은 실패한다. 콜롬비아에서 볼리바르의 암살 시도가 있었던 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란 콜롬비아는 현재의 라틴아메리카 지도대로 사분오열되고 만다.
이후 영국빠이자 비교적 반 가톨릭 교회 중심의 자유주의 노선과 남미 군벌세력인 카우디요의 보수주의 세력은 서로 내전상태로 치닫게 된다. 자유주의 세력이 그란 콜롬비아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하면, 자유주의자들이 원주민 공동체를 해체시키는 정책을 펴는 것을 혐오한 원주민 세력과, 자유주의자들이 가톨릭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여 신교를 허용하려 하는 것을 혐오한 가톨릭 교회 세력을 등에 업은 카우디요가 쿠데타를 일으켜 전소시키는 과정이 끝없이 반복된다. 이를테면 중앙아메리카에선 모라산을 비롯한 자유주의 세력이 원주민의 공동체 토지를 '자유화'해서 자기들이 빼앗을 수 있게 하고 유럽 이주민을 끌어들여 나라를 '하얗게 하얗게'하려 했으나 거기 반발한 원주민들의 힘을 등에 업은 카우디요에 의해 실패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럽이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정신이 쏙 나가 있는 상황이라 바다 건너 라틴아메리카까지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런 사분오열이 용납이 됐지만............진짜 적은 따로 있었다.
19세기 초 신생독립국에 불과했던 미국은 미리 유럽의 간섭을 배제하고 라틴아메리카를 장차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둘 사전 포석으로 침 발라놓기 먼로 독트린을 발표한다. 유라시아 대륙에 미국은 관심없다. 그러니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도 관심 꺼라. 욕심내봐야 소용없는 것을 공개포기하고 먹고 싶은 것을 마치 원래 자기것이었던 것 마냥 뻔뻔하게 주장 아메리카 대륙에 러시아는 관심없다. 그러니 아시아에 미국도 관심 꺼라
빈 체제하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피해를 추스리고 시민혁명 확산을 방지하느라 집안단속에 급급하던 유럽인지라 라틴아메리카는 아웃 오브 안중. 그동안 미국은 힘을 키워 미래를 대비하는데...
멕시코 지배하의 텍사스내 미국 이주민의 분리독립 움직임과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에 따른 골드러시는 본격적인 서부 개척(을 빙자한 진군)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로써 정해진 첫 표적이 멕시코. 1836년 알라모 전투를 시작으로 멕시코를 공격하기 시작한 미국은 1846년 텍사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애리조나, 네바다, 유타, 콜로라도 멕시코땅을 멕시코로부터 할양받는다. 멕시코 영토의 절반에 가까운 엄청난 피해를 입은 멕시코는 이후 다시 미국에 대항하지 못했고, 현재도 미국의 충실한 앞마당 멀티 제 2호로서 기동하게 된다.[3]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으니(...).
1860년대 이후 남북전쟁의 전후처리와 북미 본토개척 과정에서 주춤했던 미국의 대외 팽창은 19세기를 마감하기 직전 본격적으로 재개된다. 상대는 그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식민지를 간당간당하게 유지하던 스페인.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미국은 쿠바와 푸에르토 리코를 득템 획득한다.[4] 이걸로 스페인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짐싸들고 퇴갤 20세기 팍스 아메리카나를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먼로 독트린은 아직도 사실상 유효하다 미국은 구대륙의 모든 전쟁에 파병했지만
2 20세기 초(1901~1940) : 팍스 아메리카나
미국은 라틴아메리카 지배력 강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해 1903년 콜롬비아에서 파나마 분리를 주도했고 1914년 운하가 완공하자 이권을 모두 독점한다.
라틴아메리카의 군벌인 카우디요와 지속적인 로비를 펼쳐 광물의 거의 대부분을 독점했고 베네수엘라의 석유를 독점했으며 맘에 안 드는 정치인을 갈아 엎고 암살을 주도하는 등 사실상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의 패자로서 등장한다.
1940년 파나마의 아느롤포 아리아스 대통령이 미국에 대항하여 파나마 운하의 사용권을 다른 강대국에 넘기겠다고 강짜를 놓자, 2차 세계대전에 세계에 정신이 없는 사이 해병대를 투입해 무력 쿠데타로 파나마의 정부를 갈아 엎었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어느 누구도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을 정도로 미국의 지배는 확고했다.
니카라과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 독재정권에 맞선 산디노라는 인물이 있었다. 1929년부터 니카라과 전역에서 투쟁을 벌였지만 친미 군부세력인 소모사가 산디노를 체포하여 처형하고 1936년부터 장기 독재 체제를 만들었다. 바야흐로 라틴 아메리카는 미국의 천하였다.
2.1 멕시코 혁명
판초 비야. 미국을 공격한 사람 중 승리한 전쟁을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시발점은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권력 분쟁이었지만, 미국과 서양 자본에 노출된 멕시코의 농지 개혁이 화두로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판초 비야를 중심으로 3차에 걸쳐 혁명이 벌어진다. 여러 모로 이하에 서술할 많은 혁명들의 어머니격인 혁명이었지만, 19세기 초 마르티와 볼리바르가 내세운 라틴아메리카 민족주의의 성격이 거의 없이 반 자본주의적 운동이었다는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 멕시코 혁명 참조.
3 20세기 중반(1941~1979) : 라틴민족주의의 대두
3.1 쿠바 혁명
1953년, 피델 카스트로는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여 혁명의 시작을 알린다.
마르티의 정치색을 이어받은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혁명. 사실상 라틴아메리카 민족주의 혁명의 시발점이 된 혁명으로, 이 혁명 이후 미국은 대라틴아메리카 외교정책을 크게 수정한다. 쿠바는 이 혁명 이후 라틴 아메리카의 반미 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라틴아메리카 민족주의의 대장격 국가로 우뚝 선다.
- 쿠바 혁명 참조.
3.2 칠레 혁명
칠레의 구리 광산. 미국의 광물 독점으로 칠레는 오랜 기간 동안 구리 국유화에 실패했다.
1970년, 칠레는 격변했다.
민중연합이란 선거 연합의 후보인 사회당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턱걸이로 당선되어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민중의 열망이 만들어 낸 승리라 하면 기분 좋겠지만 아옌데의 득표율은 사실 옛날보다 더 떨어진 상태였다. 중도파와 우파가 지난 대선처럼 힘을 합치지 않아 표가 3분 되면서 얻은 승리란 게 더 정확하다.
취약점은 금새 노출됐다. 민중연합이란 선거연합은 대통령을 배출해 냈지만 의회에선 다수세력이 아니었다.
1964년 칠레에는 부르주아 개혁파인 프레이 정권이 들어서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프레이 정권은 사회/경제적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그의 개혁은 실패했고, 치솟는 인플레와 파업 등으로 노동자들의 생활은 더욱 나빠졌다. 1968년, 칠레 노동조합연맹은 프레이의 파업금지령에 맞서 전국적인 파업을 단행하는 등 직접행동에 나섰다.
자신감을 얻은 노동자들은 투쟁을 더욱 확산시켰다. 1969년에는 파업 1,939건에 참가자 23만 725명, 1970년에는 파업 5,295건에 참가자 31만 6,280명으로 늘어났다.
그런 것관 별개로 상당 부분 운이 좋아 집권한 아옌데 정권의 정책은 자신을 지지해준 여러 세력들(노동자/중간계급/자본가 일부)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개혁을 합법적인 방법으로만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1971년 7월의 국유화조치(구리, 철, 질산염, 섬유산업 및 은행 등), 대대적인 사회개혁(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 66% 인상, 400만 어린이에 대한 우유 무료급식, 실업자구제 등), 그리고 칠레 농민의 절대적 염원이었던 토지개혁(3,300건의 대규모 토지몰수) 등 일련의 공세가 정부에 대한 대중적 지지의 증가와 대규모 동원에도 불구하고, 지도부는 양대 보수정당인 기민당과 국민당의 합의와 합헌주의에 기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정은 반동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1973년 3월 총선에서 민중연합이 44%의 득표로 다수의 위치를 점하게 된 상황에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 군부 정권의 무력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피격당했고, 미국은 곧바로 피노체트 정권을 지지했다. 아옌데의 사회주의적인 노선에 미국이 제제를 가한 것이다. 구리 국유화는 무효화되지 않았으나 토지개혁은 거의 다 무효로 돌아갔다.
3.3 니카라과 혁명
1979년, 화염병을 던지는 산디니스타 혁명 전사. 화염병이 펩시인 것이 여러 모로 시선을 끈다.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 니카라과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니카라과의 주요 강들은 중부 산악지대에서 시작되는데 서쪽으로는 태평양이나 마나구아호수, 니카라과 호수로 흘러들며 동부의 강들은 카리브해로 연결된다. 따라서 마나구아와 니카라과의 두 호수로 인해 카리브와 태평양을 연결하는 자연 지형은 니카라과를 지정학적 요충지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전략적 위치 때문에 영국과 미국은 팽창주의 전략에서 니카라과는 관심과 개입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은 해병대를 파병하여 1933년까지 주둔하면서 실질적으로 점령과 통치를 계속하였다. 친미 정권인 아돌포 디아스 정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으나, 아돌포 디아스 정권은 그리 뛰어난 정치력을 가진 정권이 아니었다.
민중들은 참지 못하고 봉기하였으며, 쿠바 혁명과 함께 성공한 유이한 무장혁명이다. 현재 진행형인 혁명으로, 현재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쪽 정치인인 다니엘 오르테가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3.4 68 혁명
1968년, 체 게바라와 호치민을 아이콘으로 필두에 내세운 채, 세계 전역에선 혁명의 기운이 치솟았다. 사람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냉전 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으며, 억압받기를 싫어했다.
한때 미국의 주류 세력이었던 히피를 비롯하여 많은 인권운동이 이 시절에 있었으며, 전세계적인 규모로 펼쳐진 혁명이었다. 처음엔 소련이 배후에서 암약하여 해당 국가의 공산세력을 지원했으나, 보수화된 소련의 공산당 배후 조종은 곧 유명무실해지고 순수 민중 혁명으로 발전했다. 혁명의 중심은 라틴아메리카와 미국, 그리고 유럽이었다.
대한민국에선 이 시점부터 장발족이 생겨났고 미니스커트가 도입되었으며, 중국에선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이라는 흑역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일본에선 적군파의 반체제 무장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야말로 세계적인 혁명이었다.
- 참조 항목 : 68운동
4 20세기 말(1980~2000)
1980년대는 동구권이 몰락하고 공산주의 개념이 급격히 사그러들며, 이념의 대립이 사라진 시기였다. 미국의 핑퐁외교부터 소련의 개혁개방, 중국의 흑묘백묘론까지 모두 이념대립에서 벗어나려 노력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존의 반 카우디요, 반 미국 정서에서 현실을 인정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것은 미국발 신자유주의의 시험대로서 라틴아메리카가 올라왔다는 것이기도 했다.
4.1 신자유주의의 대두
시작은 칠레였다.
사회주의 아옌데 정권을 무너트린 친미 피노체트 정권은 바로 '죽음의 비행'이라 부르는 가공할 만한 인권탄압을 자행한다. 고문에 지친 시민들에게 몰핀을 주사하고 마대자루에 넣은 뒤 헬리콥터에 실어 태평양에 빠뜨리는 등의 막장행각을 자행하며 공포정치를 편다.
한국의 박정희와 전두환이 그러했듯 이들도 채찍과 함께 던질 당근으로 경제를 선택했고,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했다. 칠레 내부에서 국한될 이 신자유주의 정책은 1982년 외환위기 이후에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퍼지게 된다. 금리가 저렴할 때 외채를 빌려 쓰다가 금리가 치솟으면서 더 이상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외채를 갚지 못하게 된 것이다.(이것은 라틴아메리카의 경제가 얼마나 많은 외국자본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외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중남미 각국이 차관을 요청하자 미국과 국제금융기구(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미주개발은행 등)들은 신자유주의적 처방을 강요해서, 모든 나라에서 긴축재정, 공기업 민영화, 무역과 금융의 자유화가 강도 높게 추진되어 버린다.[5]
4.2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사파티스타는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장 언론 집단으로, 반정부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는 엄연한 테러단체이다. 1994년 발흥한 이 집단의 특이점은 지금까지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무장 봉기와는 여러 다른 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 친미 카우디요 정권(칠레의 피노체트 등)과 반미 쿠데타 or 민중봉기 정권(쿠바의 카스트로 등)으로 크게 둘로 나뉘어 있던 라틴아메리카 정치사에서 벗어나 있던 단체라는 것이다. 이들은 친미도 반미도 아닌 반세계화와 반신자유주의를 들고 나왔으며 라틴아메리카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낙후된 사람들을 위한 인도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아나키즘을 표방했다.
둘째로, 이들은 평화혁명과 민주주의 선거 방식에 큰 관심을 보였다.
페루의 아주 유명한 농민게릴라조직인 센데로 루미노소(Sendero Luminoso, 빛나는 길)라는 무장집단은 폭력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보복 폭력을 자행하면서 원주민 농민들로부터 고립되어 쇠퇴하고 만다. 마약 게릴라, 납치 게릴라라고 불리는 콜롬비아혁명군(FARC)은 지도부가 사실상 궤멸상태로 치달았다. 민중은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았으며 무장쿠데타를 더 이상 지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파티스타는 자신의 입장에 맞는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평화가두행진을 진행하고 인터넷과 PC통신을 통해 자신들의 사상을 퍼트려 나갔다.
셋째로 이들은 정권을 노리지 않았다. 애초에 이들은 무장 봉기조차 제대로 하질 않았다. 1994년 1월 1일 봉기한 것도 이목끌기식 쇼일 뿐, 바로 정글과 산악지대로 후퇴한 후 눈에 띄는 게릴라 활동이라곤 하지도 않았다. 멕시코시티로 진군하겠다고 으름장을 논 1999년의 멕시코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 소규모 원주민 자결주의를 원하며 2007년에 드디어 무장을 포기하고 민간단체로 회귀한다.
민주주의에 실망하여 우익 정권이 큰 지지율을 보이고 있었던 남아메리카에 사파티스타와 같은 무장집단은 상당한 충격이었고, 곧이어 21세기 선거혁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념과 군국주의의 20세기는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5 21세기 : 라틴아메리카 진보 돌풍
21세기 들어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당선된 정권의 90%이상은 전부 좌파 집단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첫째는, 신자유주의의 인기가 시들했기 때문이다. 절대빈곤은 심화되고 빈부격차는 답이 없을 정도로 벌어져 있었으며 국내의 자본은 모조리 유럽과 미국으로 빠져나갔다.
각종 국유시설을 모조리 민영화하다보니 물값이 기름값보다 비싼 상황이 되었으며, 칠레와 베네수엘라는 생필품 등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받지 못해 1989년부터 2000년까지 헬게이트가 열렸다.
라틴아메리카는 이번엔 총보다 선거 용지로 자신들의 의지를 피력하였으며, 21세기 라틴아메리카는 크게 두 가지 형태의 진보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5.1 브라질, 룰라
5.2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6 비판
그렇다면, 라틴 아메리카는 진정으로 반미 좌파 정권이 해방했는가? 그 답은 아니오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일부 반미 좌파 정권의 독재적 행위는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다.[6] 당장 쿠바를 봐도 피델 카스트로의 반미 정권은 그 세를 유지한다.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낙원이라면, 당장 라울 카스트로는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야 한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쿠바 내에서 아직까지 유지한다. 체 게바라는 포코 전술을 생 처음인 볼리비아에서 적용했다가 죽음을 맞았다. 피델 카스트로는 국가 운영을 한다는 것이 굴락, 인민재판으로 시작했다. 중남미 좌파들은 부정하고 싶지만, '해방된' 쿠바라는 것이 이런 곳이라는게 우파들의 주장이다.스탈린이 죽이면 그루지아 백정이고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죽이면 민중을 위한 거니깐 문제 없냐?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에 대한 비판도 비슷한데, 아옌데 정권은 현실적인 능력 부족으로 그들 스스로 몰락을 자초했다는 것. - 사이버신 계획을 뺀 모든 것이 이상적과 낙관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실은 미국의 구리 보유자본 감소로 인한 구리 가격 폭락 등으로 몰락했다. 이 상황에서 아옌데 정권은 무리한 사회복지, 실업자 구제, 국유화를 시도했다. 결과는 국유화는 구리 가격 폭락과 더불어 구리 광산이 관리 불가능하게 했다. 국유화 당시에는 낙하산이라고 부를 정도의 이념만 맞는 사람만을 임명하는 코드 인사가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피노체트의 막장성은 쿠데타, 군사독재, 인권유린 등에서 찾지, 적어도 경제에 관해서는 아옌데가 피노체트보다 상태가 더 심각했다.
그리고 중남미 내의 사회적-정치적 구조를 외면한 체로, 무조건 미국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멕시코를 한번 보자. 멕시코는 NAFTA 이전까지 각종 농민단체의 암살, 정치적 불안전성으로 암살이나 납치가 횡횡했다. 그러나 무역조약이 체결되자 멕시코는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미국의 매판자본이 했더라도, 어차피 외국 자본은 국가 경제의 필수요소다. 그것을 부정하고 무조건 미국등 서방은 나쁘다는 식의 인식은 단순히 자국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고립만 심화 할 뿐이다. [7]
무엇보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정권은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8] 자칭 '미제에 맞써는 차베스'는 현재 개헌을 동반한 독재, 전제정치로 변해 가고 있다. 그는 자기 권력을 위해 베네수엘라의 제 2의 국민돌격대를 만들었으며, 의회를 친 차베스파로 대체한다.[9] 베네수엘라의 누군가가 비판하면 전부 다 미제의 꼭두각시로 일관한다. 그는 권력욕만 넘치는 독재자이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실제로 차베스 정권이 집권하는 동안 경제성장률은 연 2 %였다.[10]선심성 복지와 포퓰리즘의 결과다.[11]
2015년 들어 유가하락이 본격화되면서 석유자원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남미 국가들은 어려운 환경에 직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룰라의 정치적 후계자인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은 2016년 2월, 지지율 5%를 기록하였다. 차베스의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여당은 2015년 총선거에서 의석의 2/3를 야당에게 내주는 대패를 당했다.
라틴 아메리카 좌파 정권의 경제정책 비판에 대해서는 포퓰리즘의 거짓 약속- 라틴아메리카, -희망에서 좌절의 대륙으로- 라는 제목의 책을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저자 세바스티안 에드워드는 칠레에서 태어나 칠레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렇다. 전형적인 Chicago Boys에 해당된다!! 거기다 에드워드 가문은 19세기부터 칠레 은행가와 언론가를 주물러 온 칠레 최상류 계급의 대표다.- ↑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에 대해 온갖 정치적, 경제적 간섭과 압력을 하고 악랄한 독재자들을 지원한 미국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하지만, 원주민 탄압 문제에 관련 되어서는 미국도 악랄했지만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 ↑ 이 당시 아르헨티나의 정식 명칭은 남아메리카 합중국이었다. 헷갈리면 골룸.
- ↑ 1호는 자타가 인정하는 파나마다.
- ↑ 이 전쟁에서 아시아/태평양에서는 필리핀과 괌 득템.
- ↑ 이런 점은 한국의 1997년 외환위기 / IMF 구제금융과 큰 차이가 없었다.
- ↑ 다만, 2000년대 중후반 이후 쿠바를 제외한 반미 좌파 정권은 엄연히 민주적인 선거로 집권한 민주주의 정권이며, 일부 독재 정권만 보고 중남미 좌파는 다 이렇다는 식으로 편견을 갖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 사실 그 유명한 베네수엘라도 차베스가 대놓고 소환투표를 당할정도로 선거관리면에서 아예 떵떵거릴수 있을 정도라고 할수 있다.
대신 이쪽은 친차베스파와 반 차베스파간의 물리적인 폭력이 판을 치지만물론 샤를 드 골처럼 지나치게 선거를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정도는 가능하지만 - ↑ 물론 외국 자본도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하게 받아들여야 의미가 있는거지 정경유착 등으로 인해 쓸개까지 다 빼주는 식의 외국 자본 도입은 하등 도움이 안된다. 그 좋다는 외국 자본 받아들인 쌍용자동차가 뭔 꼴이 났는가.
- ↑ 근데 여기서의 고립은 외교적인 고립이 아니라 자본적인 고립에 가깝다. 사실 국제적인 고립이라고 그러기엔 남미지역에 좌파가 다수정부를 구성한지라 굳이 고립정책을 펼 필요도 없다.
- ↑ 헌데 이건 1999년 제헌의회 소집건이라면 모를까 2005년도 총선때의 야권 보이콧은 그냥 야당의 자충수에 가깝다.
- ↑ 하지만 2002-2003년도의 쿠데타 미수사건과 자본파업으로 까먹은 몫이 엄청나다보니 그 만큼의 경제성장률을 까먹어서 실질적으로 그보다 높다.
- ↑ 하지만 우고 차베스 이전에도 석유 의존도가 엄청난 수준이었으며 빈부격차가 엄청났으며 1960년대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을정도로 경제가 막장인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