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매킨리

(매킨리에서 넘어옴)
역대 미국 대통령
24대25대26대
그로버 클리블랜드윌리엄 매킨리시어도어 루스벨트
공식 초상화
풀네임William McKinley
출신 정당공화당
생몰년1843년 1월 29일 ~ 1901년 9월 14일(58년 7개월 16일)
재임기간1897년 3월 4일 ~ 1901년 9월 14일(4년 10개월 10일)
서명
170cm


리즈시절


생긴게 장군인데 소령까지만 했다. 다만 약관의 나이에 사병에서 소령까지 올라갔다는 간지!

1 출세가도를 달리다

오하이오주 닐스 출신이다. 턱 끝이 갈라진 걸로 유명하다. 앨러게니 대학에 입학했으나 신병으로 중도에서 학업을 포기했고 우체국 직원과 공립학교 교사 등을 전전하다가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18세의 나이로 오하이오 의용군에 자원 입대했다. 남북전쟁의 분수령이 된 전투 중 하나인 앤티덤 전투에서 무공을 세워 소위가 되었으며 훗날 19대 대통령인 러더퍼드 헤이스 대령의 부관으로 종사하여 1865년 22세로 소령을 달았다. 의용군 사병이 일약 소령이 된 정말 대단한 군 경력인데 이런 경력은 훗날 그의 정치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뉴욕 올버니의 법과 대학원을 다녔는데 1867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오하이오주 캔턴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고 곧 미국 공화당에 입당, 1869년에는 지방 검사가 되었으며 7년 뒤에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하원의원에 이후 6번(12년)이나 당선되는 등 계속 출세가도를 달렸다.

벤저민 해리슨 시절인 1890년에는 이른바 매킨리 관세법을 입안했는데, 이 법은 수입 상품에 매기는 관세를 크게 올려 가격을 높여서 가격 경쟁에서 미국 상품을 유리하게 하는 것이 그 의도였다. 하지만 이 법안으로 수입 상품 가격이 폭등하자 다른 상품의 가격도 같이 뛰어올라서 미국경제는 불황에 빠지게 되었다. 경제법안 입안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인망이 있었는지 1891년에는 오하이오 주지사가 되어 두 차례 역임했다. 주지사 시절에는 당시 과격화되던 노동운동을 막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고 기업에 소비세를 부과했으며, 대신 수송 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한 법안을 제정하고 고용주들의 노동조합 반대활동을 막았다.

2 대통령 선거

화려한 경력과 명성으로 1896년 대선이 다가올 당시 그는 가장 강력한 공화당 대권주자로 떠올랐다. 당시 민주당에서는 윌리엄 J. 브라이언이 경쟁자로 나섰다. 매킨리는 당시 그로버 클리블랜드 정권의 자유무역 실패를 들면서 보호무역과 함께 화폐 단위의 가치가 일정한 금 가치와 결부되어 있는 금본위제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브라이언은 이 제도가 경제가 어려울 때 (금의 유출에 따라) 화폐값이 올라가 임금이나 가격이 떨어져서 오히려 부유층에게만 유리하게 된다는 점을 주장하며 필요할 때마다 자유롭게 새 돈을 찍어낼 수 있는 은화제도를 핵심 현안으로 삼았다. 이 제도는 돈의 양이 불어서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수 있지만 농민과 노동자의 빚 가치도 줄어들어서 오히려 빈민 노동자층에게 유리하고 부유층에게는 불리한 제도였다.

1896년 대선은 이런 경제정책이 주요 쟁점이 되었는데 브라이언은 연설을 통해 월가의 은행업자들을 경제 악화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고, 역사에 길이남을 연설이라 평가되는 '금십자가 연설' 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공화당은 브라이언을 기업을 파괴시킬 과격파라고 비난했다. 뭔가 기시감이 든다 그러나 이 때의 선거에서 매킨리와 공화당은 역대 선거에서 가장 많은 선거자금을 퍼부었고 이 당시 매킨리 캠프의 선거자금은 확실치 않지만 적게는 350만 달러에서 많게는 1600만 달러에까지 이른다고 한다. 브라이언 캠프의 선거자금은 50만 달러. 브라이언을 두려워한 기업층의 후원을 등에 업고 결국 선거에서 승리하여 미국의 2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예나 지금이나 쇼미더머니는 진리.


면적상으로는 민주당이 더 넓지만 실제는 북부 공화당이 차지한 주들의 인구와 선거인단이 더 압도적인 결과. 271:176. 1896년 이래 민주당은 남부에서 더욱 확고한 우위를 가지게 된 반면, 뉴딜 시대까지 지역정당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나마 브라이언이 간신히 확보한 서부는 곧 공화당의 텃밭으로 다시 돌아서게 된 것도 한 몫한다. 이것이 바로 "~~년 체제"의 시초인 "1896년 체제(1896년 시스템, System of 1896)"다.[1] 물론 예외적으로 우드로 윌슨의 8년이 있긴 했지만 이건 공화당 당내 분열의 이득을 본 것에 가깝다는 주장.

3 대통령으로서

대통령이 된 매킨리는 공약대로 높은 관세장벽으로 보호무역을 펼쳤고 금본위제를 정착시켜 나갔다. 하지만 매킨리 정권 시절 최대의 사건은 바로 1898년 쿠바를 둘러싸고 스페인과 벌인 이른바 미국-스페인 전쟁(미서전쟁)이다.

당시 쿠바에서는 혁명가들이 식민 통치를 벗어나기 위해 한창 봉기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클리블랜드 정권 시절부터 중립 정책을 펼쳤고, 갓 당선된 매킨리 역시 클리블랜드처럼 중립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대중 여론은 쿠바 혁명가들에 의한 지지가 강했으며 상원의 주전론자들도 쿠바 혁명가들을 지지했다. 물론 동상이몽

이러던 중 1898년 2월 15일 아바나 항에 정박한 미국 군함 메인 호가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수십 명의 미국 수병이 죽거나 다쳤는데 언론과 대중 여론은 이를 스페인군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스페인과의 개전 여론이 거세게 타올랐다. 매킨리는 스페인에 최후통첩을 보냈는데 스페인은 의외로 고분고분 미국의 요구 사항을 대부분 수용했다. 하지만 매킨리는 의회에 전쟁 선포 문서를 보냈으며 드리겠습니다! 필요없어! 곧 의회는 전쟁을 선포했다. 이 전쟁은 5개월 남짓 계속되었는데 보급선 위치도 가까운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미국에서는 이 전쟁을 '소풍같은 전쟁(War like a Picnic)'이라고 부를 정도.

이 전쟁의 승리로 미국은 쿠바를 장악했고 스페인으로부터 푸에르토 리코, , 필리핀을 할양받았다. [2] 필리핀인들은 독립정부를 세워 미국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매킨리는 이를 무력으로 제압했다. 메인 호의 폭발로 인해 미국의 식민지가 이렇게 늘어난 것. 또한 필리핀 뿐만 아니라 새로 얻은 식민지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 흔히 보일러실 폭발이 진짜 원인이라고 알고 있으나, 1998년 메인호 폭발 100주년 기념으로 이루어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조사에서는 선체가 안쪽으로 휜 것이 확인되었으며 여러 면에서 기뢰로 추정되는 외부충격에 의한 침몰로 추정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즉, 뭐라 속단할 수 없는 미스테리다.

미서전쟁에서 보듯이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펼쳤고 내부적으로는 주로 친기업적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시 만연하던 기업독점(트러스트)의 위험성을 느끼고 재선될 무렵에는 트러스트 반대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그가 암살됨으로써 실행되지 못하고 후임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셔먼 독점금지법을 내세워 대기업을 통제하게 된다.

1900년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재출마했고 부통령 호바트가 이미 사망했기에, 당시 한창 명성을 얻고 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부통령 후보로 삼아 대권을 노렸다. 민주당은 다시 브라이언을 후보로 내세워서 매킨리의 제국주의적 정책을 비난했다. 하지만 공화당은 "우리는 수천만에 달하는 식민지인들을 에스파냐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해방시켰다"그리고 미국 제국주의의 압제 하에 들어갔지고 선전했는데 이 선전이 먹혀서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다. 여기서도 역시 매킨리는 강력한 미국과 제국주의를 내세웠다.

4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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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당하는 매킨리. 레온 촐고츠가 오른손에 리볼버를 수건으로 싼 채 그를 저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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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범 레온 촐고츠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1901년 9월 6일. 매킨리는 버팔로에서 개최된 범미국산업박람회의 공개 리셉션에 참가하고 있었다. 기차에서 내린 후 매킨리는 현장에 나온 시민들과 주요 요인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고 있었는데, 그 인파 속에서 아나키스트인 레온 촐고츠(Leon Czolgosz)가 있었다. 매킨리가 그에게 손을 내밀자 촐고츠는 손수건으로 감싼 오른손에서 리볼버를 꺼내 가슴을 향해 두 발을 발사했다. 매킨리는 그 자리에 쓰러졌고 촐고츠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구급차로 병원에 이송되었고 다소 회복 증세도 보였지만 결국 8일 후인 9월 14일에 사망했다. 숨이 끊어지기 전에 한 말은 "이제 나는 틀렸소. 목사를 불러 기도를 할 시간인 듯 합니다"였다고 한다.[3]

암살자인 레온 촐고츠는 재판을 받고 1901년 10월 29일 뉴욕 어번의 감옥에서 전기의자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그의 암살로 대통령직은 부통령인 루스벨트가 승계했으며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은 루스벨트에 의해서 펼쳐지게 된다.

대통령으로써의 그를 총평하자면 19세기의 막을 내리고 20세기의 미국을 연 변혁기의 대통령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내세워 훗날 초강대국 미국의 기반을 다진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대놓고 기업친화적 경제정책과 노동 탄압, 독립을 꿈꾸던 식민지들에 다시 압제를 선사했다는 양면도 공존한다.

5 개인적인 인물됨

대단히 독실한 개신교 신자. 하지만 반대로 예수쟁이라고 할만큼 문제가 많았다. 죽음의 원인이 되었지만 스스럼없이 국민들과 악수를 하는 것을 좋아해서 당시 '매킨리 악수(Mckinley Grip)'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 연설과 글솜씨도 뛰어난 편이었으며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유지하여 인기를 얻었으며 특히 애처가여서 간질을 앓고 있던 영부인 아이다 매킨리를 잘 보살피는 모습도 많은 찬사를 받았다. 항상 공식행사나 외출을 할 때에도 손수 영부인을 챙겼다고. 영부인과는 1871년 결혼했는데, 1873년 아이다의 어머니가 죽었고, 그 직후 매킨리 부부의 둘째 딸까지 어린 시절 때 숨졌으며, 딸 케시도 4살 되던 해 병사하여 연달아 가족을 잃은 충격으로 제대로 정신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원래 백악관 행사 준비와 접전은 영부인이 하게 되었지만, 건강상에 문제가 있던 영부인 때문에 대통령이 손수 행사 준비를 진두 지휘해야만 했으며, 공식 석상에서 부인이 간질로 발작을 하면 손수건을 부인의 얼굴 위에 덮어주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계속했다고 한다.

암살될 때 부인은 상태가 나빠서 호텔에 있고 매킨리 혼자 행사장에 갔는데, 총에 맞은 후에도 "부인과 함께 오지 않은게 다행이었다. 코르텔유(비서), 내가 총에 맞은 걸 아이다가 충격을 받지 않게 해 주게"고 했을 정도였으며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도 '내가 죽으면 부인은 누가 보살피나'하며 부인 걱정에 여념이 없었다.

5.1 긍정적인 성격

솔직하고 사교적인 성품으로 각료와 의원들은 물론 국민과도 직접 대화하는 것을 즐겼으며 글을 쓰는 것보다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선호했다고 한다.

비록 제국주의 정치가였지만 대통령이 되기 전의 남북전쟁 직후 부정부패로 얼룩진 미국 정치판 속에서 비리에 연루된 적이 없고 청렴했으며 개인적인 도덕성은 정말 흠잡을 만한 곳이 없는 인물.

5.2 부정적인 면

그러나 반대로 종교적으로 꼴통이라서 필리핀 침공을 하나님이 명령하셨다는 개드립을 했기에 욕을 펑펑 먹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웃기게도 이 당시 필리핀은 이미 320년에 이르는 스페인 지배 속에 인구 대다수가 가톨릭이었다. 그나마 이 작자도 가톨릭인을 학살하면 유럽에서 반발이 거세질 것을 알아서인지 가톨릭 지역은 그렇게 무력으로 응하지 않았다.(다만 여기도 일부 지역에서 저항한 곳은 가차없이 학살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와 대조적으로 필리핀 침공 당시 이슬람이 대다수인 민다나오 섬에서 미군이 저지른 학살(20만에서 60만 정도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그것도 상당수가 노약자 및 아이들로 마을을 통째로 불바다로 만들거나 함포 사격으로 어촌 마을을 몰살시키까지 했다...)로 지금도 이 지역에서 매킨리에 대하여 말한다면 아돌프 히틀러급으로 증오를 많이 받는다. 물론 매킨리는 이런 학살에 대하여 하나님 타령하며 당연시했고 죄책감같은 거 가진 적도 없었다..

오죽하면 미국 유명 작가 마크 트웨인"매킨리 저 작자는 남북전쟁 이래 미국에 내린 최악의 재앙. 그는 정치계의 톰 소여이며 무게 잡을 기회가 50%면 캐나다까지 가고, 그 기회가 100%면 지옥까지도 갈 작자이다."라는 증오어린 평가를 내렸는데 처음에 마크 트웨인은 스페인에게 필리핀을 독립시키려고 하는 것으로 여기고 전쟁을 지지했었다. 그러나 나중에 미군이 저지른 짓이나 매킨리의 하나님 드립으로 정당화하는 것을 보니 어이가 없었을 테고 분노할 만 했다. 마크 트웨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종교 광신에 대하여 무척 혐오하던 사람이었으니 더더욱 매킨리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게다가 다른 식민지 지역 저항도 가차없이 탄압하고 학살하던 터에 제국주의자 였을 뿐이었다. 가상매체 인물로 장 보댕과 비슷하다. 물론 잔인도에서는 상대가 안되지만 그것뿐. 청렴하고 개인적인 도덕성은 깨끗하지만 종교적으로 꼴통이라 다른 나라 쳐들어가 학살을 벌이고 그걸 문제삼지 않았다는 점을 보면 붕어빵이다.

한국에서도 목사가 쓴 기독교 죄악사라는 책자에서 십자군전쟁과 같이 기독교(가톨릭,개신교 모두)를 똥칠한 쓰레기 인물이라고 분노어리게 비난한 바 있다.

그리고 별로 모진 성격이 아니었는지 기대한 목표과제를 하급자들이 달성하지 못했을 때는 이를 사실로 인정하지 않아서 약한 대통령, 우유부단한 인물이라는 평가도 받기도 했을 정도다. 매킨리 정권 시절 해군장관과 부통령을 지낸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매킨리를 가리켜 "초콜릿 케이크처럼 흐물거리는 인물. 중심이 되는 지지대가 되지 못하는 작자."라고 신랄하게 까기도 했다. 화끈했던 후임자 루스벨트와는 정반대의 인물.

6 그밖에

'오하이오의 아이돌우상(the Idol of Ohio)'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 별명이 붙은 이유는 오하이오 출신에 오하이오에서 기반을 닦았고, 오하이오주의 상징 꽃인 붉은 카네이션을 양복 재킷 가슴주머니에 끼고 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술한 이 붉은 카네이션은 매킨리 본인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행운의 상징이었는데, 어느 날 매킨리는 그 붉은 카네이션을 떼어 어린 소녀에게 선물했다. 이 일은 다름아닌 1901년 9월 6일, 범미국산업박람회장에서 있었던 일이었고, 그날 그곳에서 매킨리는 촐고츠에게 두 발의 총탄을 맞아 결국 사망한다. 이 사연은 비정상회담에서 타일러 라쉬가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기 행운의 상징은 남에게 주지 말라'는 코멘트를 깨알같이 덧붙였다 그리고 2015년 9월 1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루었다.

알래스카매킨리 산(해발 6,194m)은 바로 매킨리 대통령의 이름을 따 붙여졌다. 단, 데날리 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매킨리 대통령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는 총 7곳이 있다고 한다. 하와이,뉴욕,워싱턴,루이지애나에 각각 1곳씩 있고, 오하이오에 세곳이 있다. [4]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의 세계관에서는 재커리 헤일 컴스탁이 공중도시 컬럼비아를 건설할 수 있도록 후원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의화단 사건 이후 컴스탁은 컬럼비아의 미 연방 탈퇴를 선언한다.
  1. 엘머 E. 샤츠슈나이더(E.E. Schattschneide)r가 1960년에 최초로 주장했다. 이 시기를 "제4정당체제"라고 하기도 하는데, 남북전쟁 이후 구축된 제3정당체제 이후의 체제며, 진보당이나 사회당의 세력이 (의석은 매우 작았지만) 굳건했기 때문. 링크
  2. 이때 메킨리는 백악관 복도에서 필리핀을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다시 식민화시키라곤 안하셨단다
  3. 이 장면은 역대 대통령 암살범들을 주인공으로 다룬 뮤지컬 어쌔신에서 The Ballad of Czolgosz라는 넘버로 나온다.
  4. 글리(미드)에 나오는 고등학교도 이 이름을 따서 만든 가상의 고등학교이다. 실제 촬영지는 전혀 다른이름의 LA소재 학교들이고, 오라토리엄은 전혀 다른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