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복스

(베이비 복스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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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지이희진심은진간미연윤은혜
베이비복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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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심은진, 윤은혜, 김이지, 이희진, 간미연
이전멤버(탈퇴순)차유미, 정현전, 정시운, 이가이
활동기간1997년 7월 3일 ~ 2006년 2월
소속사DR뮤직 (1997년~2004년)[1]
팬덤베이비엔젤스[2]
B.I.파일:L0FJaAM.png[3]

1 개요

베이비복스 역대 뮤직비디오 다이제스트 영상.
활동 8년간의 대표곡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다.
Baby V.O.X
(Baby Voice of EXpression)

대한민국 최초의 5인조 걸그룹[4]
현재 K-POP 걸그룹의 구성[5]과 한류의 길을 닦은 원조 한류 1세대
시대를 앞서간 걸그룹

2016년 올해로 데뷔 19주년, 햇수로는 20주년을 맞았다. 1집이 실패해서 잘 안 알려졌지만, 사실 S.E.S, 핑클이나 디바보다 먼저 데뷔했던 여성그룹의 시초.

1997년 1집 앨범 EQUALIZEHER로 데뷔한 이들은 2004년까지 한국에서 총 8장의 음반을 발표했고 1~3집 시절 세번의 멤버 교체가 있었다. 리즈 시절의 구성원은 김이지, 이희진, 심은진, 간미연, 윤은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핑클'과 'S.E.S'를 이은 여성 그룹 부동의 NO.3였다. 또 중국과 태국 등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오히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인기를 누렸다고 알려진다.[6] '한류 1세대'로 회자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서 비롯.

2004년 7집 <Ride West> 활동 당시 터진 모종의 사건과 소속사와의 입장 차이 때문에 팀 활동을 중단했고 2004년 연말 심은진이 먼저 탈퇴한 다음, 이후 4인조로 근근히 해외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결국 나머지 멤버들도 차례대로 소속사를 이적하면서 잠정 해체된다. 다만 공식적인 해체 선언은 하진 않았고 2006년 2월 "각자의 길"을 선언했다.

여담으로, 멤버 전원이 모두 배우로 전업했다. 2005년 윤은혜, 2006년 심은진, 김이지, 2010년 이희진, 2014년 간미연.[7]

2 인기/평가

1세대 아이돌 중에서 1군 걸그룹으로 통하는 S.E.S.핑클보다 낮은 2군급 걸그룹으로 군림했지만, 히트곡의 숫자는 이들에게 밀리지 않았다. <야야야>, <Change>, <Get Up>, <Killer>, <Missing You>, <Why>, <배신>,<Game Over>, <인형>, <우연>, <Go>, <나 어떡해> 등(...) 현재로 치면 전성기 시절 카라티아라와 비슷한 위치였다. 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 초반 여학생들의 야영, 수학여행 장기자랑 시간에는 베이비복스의 노래도 매우 흥했다.[8]

앞서 서술했듯이 3인자 느낌이 강하긴 했어도 베이비복스는 같은 시기에 활동한 샤크라디바등과 비교해도 격차가 많았고 팬덤이나 대중성, 음반 판매량 역시 S.E.S., 핑클 바로 다음이었다. 사실상, 라이벌이 없는 걸그룹계의 3인자였다. 총 음반 판매량이 100만장을 넘는 몇 안되는 걸그룹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역대 걸그룹 총합 판매량 4위를 기록. 1위는 S.E.S., 2위는 소녀시대, 3위는 핑클. 베이비복스의 기획사 규모와 역량으로 볼때는 기적같은 성과를 거둔 셈이다.

1999년부터는 중국 시장에 진출했는데, 현지에서 크게 성공해 원조 한류 걸그룹으로 통칭된다. 중화권 인기를 발판으로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도 사랑받았었는데, 태국에 진출한 1호 가수 역시 베이비복스였다. 이외에 일본, 베트남, 대만, 홍콩 등에 진출해서 한류의 불모지였던 2000년대 초반에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 특히 2003년 외국인 가수로는 최초로 중국의 인민 라디오 방송인 '음악지성 중국유행가요배행방'에서 현지 가수들과 겨루어 중국어로 부른 신곡 'I'm Still Loving You'로 전체 차트 1위에 등극했고, 같은 해 몽골 대통령에게 초청받아 국빈 대접을 받으며 공연한 바 있다. 2010년대에 데뷔한 걸그룹 달샤벳이 밝힌 일화로, 동남아 지역이나 중국쪽에 공연을 하러 가면 오히려 "베이비복스를 아느냐?"라고 질문 받는다며 아직까지도 꽤 해외 팬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것을 알수있다. 베이비복스의 기획사에서 배출된 라니아나 베이비복스 리브(2기) 역시 아시아 지역에선 베이비복스의 활동재탕 덕택에 나름 수월하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또 베이비복스하면 빠질수 없는게 바로 안티 세력이었다. 인기도 물론 많았지만, 1999년 당시 10대들의 우상으로 불리던 H.O.T.문희준과 간미연의 열애설로 곤욕을 치루며 안티팬도 팬 수만큼이나 많게 되는 현상을 보였다. 당시 안티들이 했던 행동들은 아직까지도 길이길이 레전드로 남아있는데 대표적으로 99년 간미연 살해협박 사건이 있다. 당시 안티들의 기행 모음. 대한민국 연예계 역사상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이 정도로 욕을 먹었던 연예인도 사실상 간미연이 유일무이할 듯.[9]H.O.T.가 은퇴한 2000년대 초반부터는 직접적인 오프 공격 세력은 많이 잦아들었지만 이들을 향한 부정적인 시선은 여전했다. 단지 스캔들뿐만 아니라 소속사에서 과도하게 푸쉬했던 섹시 컨셉과 실력 논란으로 많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다만 이 두 점 모두 요즘 시점에서 보자면 크게 문제될 부분이 아니라는게 대세다. 립싱크를 자주하긴 했지만 라이브 무대에서는 ar없는 쌩라이브를 선보였고 2002년 우연 시절엔 안정적인 라이브를 선보여 여러 사이트에서 다시금 재조명 받기도 했다.

사실상 많은 여자 아이돌들이 핑클이나 S.E.S를 롤모델로 삼지만 두 그룹은 가창력 담당 각각 1명과 그 외 얼굴마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베이비복스의 경우 리드 싱어 2명(이희진, 간미연), 서브보컬 2명(심은진, 윤은혜), 랩 1명(김이지)으로 안정적으로 구성된 현 시대 걸그룹의 시초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10] 김이지의 경우 요즘 아이돌 저음랩의 시초였다. S.E.S핑클도 이벤트성으로 아주 잠깐 랩은 했었지만 요즘 아이돌 랩이랑은 확연히 구분된다. 중국이나 태국 등 해외에 진출해서 대박친 것도 현 아이돌의 해외 진출의 밑거름이 되었다.베이비복스가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서 가지는 의의. S.E.S.와 핑클이 국내에서의 폭발적인 인기로 걸그룹 시장을 확장시키고 풍요롭게 했다면 베이비복스는 걸그룹 시장의 새로운 길틈새 시장을 제시했다고 보는게 맞다. S.E.S.와 핑클의 활동 역사도 여성 그룹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대단한 것이었다.

베이비복스가 컨셉적으로 달랐던 것은 다른 걸그룹들에 비해 더 파워풀하고 시원시원한 안무를 했었다. 심지어 유일한 요정 이미지를 보여준 2집 타이틀곡 '야야야'에서도 춤만큼은 귀여운 노래에 비해 파워풀한 안무였다. 레이스달린 치마 입고 락킹과 팝핀을 선보였었다.(...). 이러한 안무 실력에 더해 평균 신장이 168cm이라는 당시로선 희귀한 조건이 맞아 떨어져 3집 'Get Up'을 통해 걸그룹으로는 최초로 섹시 컨셉을 도입하여 성과를 이뤘다. 당시에는 비디오형 가수라고 비난을 받았지만, 현재 K-POP 걸그룹 모습을 보면 베이비복스와 가장 많이 닮아있다는 것인데, 이 점이 베이비복스가 최근들어 재평가 받는 이유 중 하나. 아기자기한 율동 수준의 안무를 어필했던 당시 걸그룹과는 달리 곡마다 정확한 컨셉을 잡아서 활동했던 게 베이비복스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3 프로필

베이비복스
심은진
1981년 2월 6일
서브보컬, 댄스
이희진
1979년 5월 16일
메인보컬
김이지
1979년 1월 31일
리더, 랩, 보컬
윤은혜
1984년 10월 3일
서브보컬, 막내
간미연
1982년 2월 2일
리드보컬

4 역사

베이비복스 활동 역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베이비복스/활동 상세 문서를 참고할 것.
해당 문서는 자료가 상당히 방대하기 때문에 모바일에서 데이터로 접속할 시 주의 바람.

4.1 1996~1998 : 결성 과정, <EQUALIZEHER>, <BABY VOX II>

한국 최초의 5인조 여성그룹 탄생, 그러나 험난했던 초창기 활동

1990년대 초반 빛과 소금, 최백호, 김태욱 등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제작하던 등룡 기획(현 DR뮤직)의 윤등룡 대표는 1996년 당시 전세계적으로 걸파워 신드롬을 이끌어냈던 영국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에게 영감을 받아 국내에서도 노래도 잘 하고, 춤도 잘 추는 여성 그룹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90년대 중반에만 해도 국내 가요계에는 여자 그룹이 아예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국내 시장 특성상 괜찮은 여성 그룹만 만들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겠다 싶었던 윤등룡 대표는 '한국판 스파이스 걸스'에 걸맞는 라인업을 만들기 위해 캐스팅을 시작한다.

부산에서 무용을 전공하던 정시운과 소개를 통해 정현전을 캐스팅 한 후,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이희진을 영입시킨다. 당시 고등학교 재학중이던 이희진은 하교길에 눈에 띄는 외모로 개그맨 윤정수와 DR뮤직 매니저들에게 픽업됐다고 한다. 그리고 오디션을 통해 재미교포였던 차유미를 리드 보컬로 합류시켰고 가장 마지막으로는 어릴적부터 한국무용을 전공하며 대학 합격 후에 고3이었던 김이지가 소속사 사장에 의해 길거리 캐스팅된다. 김이지는 집안 반대로 합류를 치일피일 미루다가 데뷔 직전 극적으로 합류하면서 이 전에 4인조로 모든 녹음을 끝낸 상황이라 1집에서 김이지의 목소리는 찾아 볼 수 없다.[11] 이들은 베이비복스라는 이름으로 미국 현지에서 믹싱 작업을 마친 앨범을 들고 "한국판 스파이스 걸스"에 걸맞게 첫 앨범 컨셉 또한 그들과 닮아 있는 '여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잡아 세상에 등장한다.

베이비복스 1집 원년 멤버

"여성들의 대변인"을 자처했던 1집 첫 타이틀 곡 <남자에게 (민주주의)>

베이비복스는 1997년 7월 3일, 1집 앨범 EQUALIZEHER로 데뷔한다. 이들의 등장은 한국 최초의 5인조 여성 그룹으로서 첫 시작이었다. 처음에 선보였던 타이틀 곡은 <남자에게 (민주주의)>였지만 이 곡의 직설적인 가사가 심의에 걸려 방송금지 처분을 받자 불가피하게 타이틀 곡을 <머리하는 날>로 변경해 활동해야 했다. 이 두 곡이 그 당시 사회기준으로는 파격적인 게 대부분의 여자가수가 부르던 노랫말들과 달리 오히려 남자들의 문제를 아주 직설적으로 꼬집으며 여성들의 심정을 대변한 나름의 페미니스트적 요소가 가미된 노래였다. 학원폭력 문제를 꼬집던 H.O.T.젝스키스가 그랬듯 베이비복스도 사회비판적인 컨셉을 내세운 것이다. 때문에 데뷔초 이들이 <여성판 H.O.T.>라고 종종 소개됐었는데 멤버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문에 데뷔 초에도 협박편지를 받는 등 수난을 당했다고 한다. 또 그때만 해도 걸그룹 자체가 아예 드물었을 시절이고 소속사 힘도 약해서 각종 쇼프로의 오프닝이나 케이블 방송에서만 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KBS <가요톱텐>이나 SBS <TV 가요 20>등 공중파 메인 음악방송에는 일회성 출연으로 그치는 정도. 가끔 공중파 TV에 출연해도 무대에서 선보인 부담스러운 스타일링은 환영받지 못했다.


1997년 9월 KMTV 쇼 뮤직탱크 〈머리하는 날〉

그렇게 활동을 시작한 지 3개월 쯤 되었을 무렵, 리드보컬 차유미가 어느 날 통보도 없이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태를 맞이하여 활동에 큰 지장이 온다. 당시 이들은 스케쥴이 끝나면 하루에 8시간씩 안무 연습을 하는 강행군을 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차유미가 발목 부상을 당하면서 연예계 활동에 대한 부적응과 스트레스 때문에 결국 팀을 떠나게 된 것이다. 소속사는 차유미를 발목 부상으로 인한 하차라고 보도했고 한동안 활동을 접어야 했다. 1집 활동 당시 멤버들은 안무 연습 도중 실수를 하면 얼차려를 받고 곡 마다 안무가 2~3개 버전으로 있었을 정도로 하드 트레이닝을 받았으며 일주일에 식비가 만 원도 안되는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다. 말도 안 통하는 한국에서 힘든 연예계 생활을 단번에 적응해 나가는게 더 신기했을 터. 어쨌든 소속사는 차유미의 빈자리를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고등학교 1학년 재학중이던 간미연으로 대체한다. 11월 중순부터 <머리하는 날> 안무를 바꾸고 새롭게 활동을 재개하지만 역시나 별 반응은 없었다. [12]


1기 리드보컬 차유미의 2012년 EBS 인터뷰
당시의 탈퇴 정황을 설명하고 있다.

황무지같았던 여성 그룹 시장을 당당히 개척할 줄 알았지만 1집 앨범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활동이 끝나자마자 팀의 주축이었던 정시운과 리더 정현전이 탈퇴하면서 [13] 1997년 말 타 기획사에서 걸그룹을 준비하다가 팀이 데뷔도 하기 전에 해체된 후 백댄서를 준비하던 심은진이 영입된다. 심은진은 당시 오디션을 보러 연습실에 왔는데 춤 연습을 하다 부상당한 다리에 아무렇지 않게 스프레이를 뿌리며 격렬하게 춤을 췄고 이를 본 DR뮤직 대표는 그를 단박에 멤버로 확정시킨다. 걸크러쉬

심은진이 베이비복스의 새 멤버로 영입된 뒤 98년 3월에 2집 음반을 발표할 계획이었으나 조금의 문제점도 허락치 않는다는 의지때문에 재녹음을 강행해 앨범 발매일을 하반기로 연기한다. 멤버들은 이 시기부터 1집 흥행실패를 무마하기 위해 합숙 훈련에 들어간다. 당시 소속사가 재정난을 겪고 있던 터라 작은 옥탑방에서 합숙을 했는데 여름에는 에어컨도 없는 이 곳에서 아지랑이들과 싸우며 힘겹게 보내야 했다. 막내였던 간미연은 연습 중간 도망 쳤었지만 얼마 후에 다시 검거(...). 이들은 2집 음반 작업을 위해 개개인 별로 악기 연습을 병행하고 택견을 배우며 정신수양까지 한다. 연습을 이어가던 어느 날은 배가 너무 고팠지만 회사도 멤버들도 돈이 없으니 김이지의 비상금으로 라면 두 개를 사서 다섯 명이 나눠먹는 눈물겨운 일화도 있었다. (여자 god..?)

이렇게 2집 음반을 위해 갖은 고생을 하고 있던 와중 가요계에는 3인조 여성그룹 S.E.S.핑클이 등장하며 소녀스러운 청순함으로 가요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베이비복스가 개척하지 못했던 걸그룹의 시장이 열린다. 소속사는 이들을 본 뒤 걸그룹 시장은 청순함과 여성스러움이 먹힌다는 것을 판단하고 1집때의 여성을 대변하는 컨셉을 과감히 버리고 부담 없이 깜찍한 요정 컨셉으로 팀을 재정비한다.


2집 활동기간을 담은 미니 다큐

그렇게 1년간의 합숙 훈련을 청산하고 베이비복스는 드디어 9월이 되서야 2집 앨범을 발표하며 컴백한다. 2집 앨범 타이틀 곡 <야야야>[14]는 김형석 작곡의 대중적인 댄스 팝 장르로 새롭게 재정비 된 베이비복스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곡이었다. <야야야>는 발매 2~3주만에 각종 가요 차트 10위안에 들며 놀라운 속도로 상승세를 보였고 <SBS 인기가요>에서 최고 3위까지 랭크되며 인기몰이에 성공한다.[15] <야야야>가 성공하면서 S.E.S.와 핑클이 양분하던 걸그룹 시장에 새로운 혜성처럼 등장했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는다. 당시 베이비복스는 한일합작 걸그룹 써클과 비교되기도 했다. 멤버수도 같았고 그때만 해도 써클도 만만치 않은 인기를 누렸다.

베이비복스 2집 멤버

베이비복스의 첫 히트곡, <야야야>

이 후 주영훈 작곡[16]의 <Change>로 후속곡 활동을 했고 이 곡도 10위안에 드는 무난한 반응을 얻으며 10대 팬들 위주로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당시 누나부대의 극성 때문에 숙소도 두 차례 옮기는 등 부쩍 일어난 인기를 실감케 했다. 2집 활동 막바지엔 공식 팬클럽 '베이비 엔젤스'가 창단되며 인기에 가속을 밟는다.

2집의 히트는 데뷔순으로 따지자면 후발주자였던 S.E.S.와 핑클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그래도 베이비복스만의 차별화를 두기 위해 남자들도 소화하기 힘든 파워풀한 댄스 퍼포먼스를 선보여 주목을 받는다. 2집 앨범에는 멤버들이 직접 악기 세션을 연주해 녹음한 <Top Of The World>도 수록해 후속 앨범 컨셉을 예고하기도 했다.[17] 2집 앨범은 최종적으로 20만장의 음반 판매고를 올렸으며 그 해 SBS 가요대전에서 신인상[18]과 서울가요대상 인기가수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커리어를 쌓아나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1집 앨범 부진의 아픔을 씻어내던 99년 1월, 맏언니였던 이가이의 실제 나이가 탄로나면서 다시 한번 위기를 겪는다. 사실 이가이는 활동 당시에도 다른 멤버들과는 왠지 모르게 올드한 분위기를 풍기는 외모(...)와 안습한 춤 실력때문에 팬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았다. 활동 초반에는 색안경으로 얼굴을 위장해서 무대에 올랐으나 후속곡 <Change> 때부터 안경도 벗고 슬금슬금 얼굴을 공개하는데 그전부터 의문을 가진 한 팬이 이가이와 비슷한 생김새였던 80년대 원조 여성 트리오 세또래의 멤버 이희정의 프로필을 대조한 결과 생일과 학력, 생김새까지 일치해 단서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모 방송에서 본인보다 훨씬 어린 축구선수 이동국에게 '오빠'라 칭하며 애교부리는 모습에 격분한 나머지 PC 통신에 '나이를 속이면서 연예활동을 하는건 부도덕적인 행위'라는 장문의 글을 게시하면서 결국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PC 통신 위주로 논란이 확산되면서 신문 보도로 이어졌고 결국 소속사는 PC 통신 팬클럽에 사과문을 올리며 공식 입장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당시 그는 실제 출생년도인 1968년생에서 1978년생으로 즉, 10년이나 내린 프로필로 기재했으며 10살이나 줄인 가짜 나이로 활동했던 것을 시인했다. 소속사 측은 맏언니 역할을 할 리더[19]가 필요했고 또 병환이 있던 아버지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활동해야 했다고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다.[20] 어쨌든 팬들의 처사에 맡기겠다고 밝힌 소속사는 이가이를 후속 활동에서 하차시키고 베이비복스는 한동안 4인조로 활동을 이어갔다. 사실 2집 준비 당시 힘든 합숙훈련 속에 어린 멤버들이 가장 믿고 따르던 멤버가 이가이였다고 한 적이 있어서 올드 팬들은 그녀를 내심 그리워하기도 한다.

4.2 1999~2001 : <Come Come Come Baby>, <Why>, <Boyish Story>

베이비복스의 본격적인 성공 신화와 대륙 진출

DR뮤직은 이가이의 탈퇴 후 새 멤버를 뽑기 위해 1999년 4월 공개 오디션을 개최한다. 이 오디션에서 최종적으로 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잡지 모델로 활동중인 윤은혜가 선발되어 새 멤버로 합류하는데 당시 윤은혜는 오디션때 노래를 실수하고 부끄러운 나머지 벽을 만지며 주저 앉았고 이를 목격한 DR뮤직 대표가 윤은혜가 벽을 아주 뻥 찼다고 착각해 탈락수순이었던 윤은혜를 "쟤는 깡이 있다"고 생각하여 덜컥 캐스팅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소녀장사의 조짐이

유난히 1~2집에서 멤버 교체를 겪으며 불안정한 명맥을 유지해야 했던 베이비복스는 윤은혜의 영입을 끝으로 완전한 멤버 라인업을 구성한다. 베이비복스가 2집 <야야야>로 10대층의 상당한 인기를 누렸지만 이는 S.E.S.와 핑클을 철저히 벤치마킹한 결과였고 계속 아류 그룹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독자적인 길을 구축할 것인지 고심하던 중 "자신들만의 길"을 선언하며 대대적인 컨셉 보정에 들어간다. 베이비복스는 당시 평균 신장이 168cm로 다른 걸그룹들과는 달리 서구적인 늘씬한 몸매를 자랑했었는데 이 점을 이용해 걸그룹 최초의 섹시 컨셉을 시도하게 된다.[21] 새롭게 재정비된 베이비복스는 전작 <야야야>의 작곡가였던 김형석과 그의 수제자 박진영의 작업하에 탄생된 R&B 펑키 댄스곡 <Get Up>을 들고 가요계에 야심차게 컴백한다.

베이비복스 3집 멤버

3집 타이틀 곡 「Get Up」
'한국 가요계 역사상 가장 섹시한 뮤직비디오 중 하나'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1999년 7월, 베이비복스는 3집 앨범 Come Come Come Baby 타이틀 곡 <Get Up>으로 2집때 앙증맞은 소녀의 모습에서 섹시한 안무와 농염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첫방송이 나가고 공중파 방송국에서는 카메라를 째려보는 눈빛과 김이지의 노출에 대해 경고를 내린 에피소드도 있었다. 당시 미성년자가 있는 그룹이었기 때문에 일부 비판 여론도 있었지만 15만장 이상의 앨범 선주문을 받아 이전의 앨범보다 더 좋은 반응을 얻었고 활동을 거듭할수록 <Get Up>은 그 해 여름을 뜨겁게 달군 인기가요로 부상하며 8월 3일, 데뷔 2년만이자 3집 발표 한달만에 KBS 뮤직뱅크에서 MVP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는다. 훗날 멤버들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곡으로 이 <Get Up>을 꼽는다.


1999년 8월 3일 KBS 뮤직뱅크 MVP

당시 걸그룹들은 전부 다 요정같은 이미지로 어필했지만 베이비복스는 <Get Up>에서 파워풀한 댄스와 섹시한 의상들로 걸그룹 계의 새로운 블루오션을 개척한다. 엄밀히 말하면 베이비복스가 걸그룹 흐름에 미친 영향력이 바로 이 3집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정 컨셉에서 섹시 컨셉으로 갈아타는 노선은 2010년대 걸그룹들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 노선을 가장 먼저 성공시킨 게 바로 베이비복스였다.

<Get Up> 활동을 성공리에 마친 뒤 후속곡 <Killer>[22]로 활동을 이어가는데 <Killer>에서는 <Get Up>때보다 더 강한 이미지를 어필했고 타이틀 곡 못지 않은(혹은 그 이상의) 화제성을 몰고왔다. 당시에는 생소했던 보이쉬한 컨셉으로 등장한 심은진은 여성팬들의 환호를 얻으며 팀의 마스코트로 떠오른다. 90년대 중반 보이쉬 컨셉을 밀었던 채리나가 있긴 했지만 심은진은 섹시함과 보이쉬함을 동시에 소화하며 남성팬들에게까지 호응을 얻은 새로운 캐릭터였다. <Killer>는 베이비복스의 인기 상승에 큰 역할을 해냈고 당시 순위제를 운영하지 않았던 MBC를 제외한 모든 음악 방송에서 1위를 수상하며 연이은 성공을 거둔다. 한 앨범에서 1위곡이 2개 나온 걸그룹은 S.E.S. 핑클과 베이비복스 밖에 없었는데 이는 2세대 걸그룹이 등장하고 나서인 2000년대 후반까지 유효한 결과로, 당시의 성공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11월에는 발라드 곡 <Missing You>로 한달 간 짧게 활동했는데 가요차트 10위권에 안착하며 의외의 인기를 얻었다. 베이비복스 활동 기간 내 유일한 발라드 싱글.

3집 활동 시기에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은, <Killer> 활동 중반에 간미연과 H.O.T.문희준이 열애설로 인해 간미연이 살해 협박을 당하는 일이었다. 간미연에게 수능 잘 보라며 보낸듯한 팬레터로 위장해 눈을 도려낸 사진들과 혈서를 비롯, 녹슨 커터칼을 넣어 손을 다치게 했고 간미연이 실종되어 사체로 발견된다는 엽기적인 자작 기사까지 만들어 신변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방송 3사 메인 뉴스에도 보도될 만큼 사회적인 이슈로 퍼지며 중장년층에게도 이들의 존재가 각인될 정도의 큰 파장이었다. 스캔들의 여파로 한동안 베이비복스는 해당 그룹 팬들에게 수 차례 테러를 당한다. 그러나 오히려 H.O.T. 팬들은 살해협박 사건이 베이비복스측의 자작극이라는 터무니 없는 루머를 재생산해 간미연을 그야말로 관종 취급한다.[23] 이때부터 간미연은 수많은 안티들을 몰고 다니는 그야말로 보살로서의 삶을 시작하는데(...)

상술한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3집 시기는 베이비복스의 하이라이트 시기로, 이 앨범이 히트함에 따라 후속 앨범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베이비복스만의 컨셉을 정의시켜준 기념비적인 앨범이었다. 연말에는 처음으로 방송 3사에서 본상 수상의 영광을 얻었고 그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이름났던 MBC 10대 가수에도 선정되며 당당히 대형 가수 자리에 오른다.


1999년 12월 12일 SBS 인기가요 굿바이 스페셜
3집의 대표곡과 수록곡을 메쉬업 시켜 굿바이 무대 중 가장 호평을 받았다.

베이비복스는 3집 활동 종료 시점부터 조금씩 해외에 접근하기 시작하는데 한일합작 영화 <건드레스>의 주제가 <Patron>을 녹음하며 일본 시장에 문을 두드린다. 또 중국과 음반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하면서 현지에 앨범을 먼저 발표하고 12월부터 중국 TV에 본격적으로 출연하면서 현지 활동을 시작하는데 베이비복스가 처음 CCTV(중국중앙방송)에 소개될 당시 "중국 TV에서 이렇게 키가 크고 늘씬한 여자 그룹이 파워풀한 춤을 추며 노래하는 걸 처음 봤다"며 다들 굉장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멤버들은 이 시기 슬럼프가 왔었다고 알려지는데 부쩍 늘어난 관심에 안티 테러까지 정신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추측된다. 심은진은 당시 팬들에게도 고백할 정도의 극심한 슬럼프로 고생 했었으며 이희진도 당시 재계약 시점을 앞두고 있었는데 가장 주저했었다고.

3집의 성공으로 해외 활동을 시작한 베이비복스는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기 위해 4집 앨범에 많은 공을 들인다. 우선 3집에서 지적받은 가창력을 보완하기 위해 코러스 계의 대모인 '이주연'에게 보컬 레슨을 받았고 3집의 히트곡을 작곡한 김형석의 지휘 아래 4집 음반을 녹음한다. 당시 김형석 휘하의 작업진들이 대거 참여했고 앨범 수록곡 대부분을 발라드로 싣는 자신감도 보였다. 음악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아무로 나미에의 안무가로 유명했던 사쿠마 히로유키가 99년 MTV에서 베이비복스의 활약상을 보고 직접 안무를 지도하고 싶다는 러브콜을 보내와 2박 3일간 직접 내한해서 신곡 안무를 지도했으며 무대 의상도 디자이너 이상봉이 참여해 제작됐다. 당시 LG에서 제작비를 투자 받아 뮤직비디오도 중국 계림시에서 올로케 촬영.

이렇게 앨범 준비에 신중한 공을 들인 4집 앨범은 베이비복스 역대 앨범 중 가장 명반으로 손꼽힌다. 갓형석 타이틀 곡은 라틴 느낌과 펑키 장르가 절묘하게 조합 된 <Why>로 결정되어 한국 무대에 앞서 중국에서 먼저 선보인다.

4집으로 컴백한 베이비복스 (2000)

4집 타이틀 곡 「Why」
베이비복스 역대 음반 중 최고 명반으로 손꼽힌다.

4집을 들고 나온 베이비복스는 보름만에 15장의 음반 판매고에 다가서며 상승세를 달린다. 그러나 활동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안돼서 3집 시절 등장한 안티 부대들의 공격이 지나치게 거세지는데 하루는 방송 스태프로 가장한 안티팬이 고춧가루, 식초, 모래 등 오물을 섞어 만든 물총으로 무대 뒤에서 대기하던 베이비복스에게 발사하는 테러 행각을 저지른다. 이때 물총이 윤은혜의 눈에 정통으로 분사되어 응급실로 실려갔고 그 날 방송에는 안대를 찬 윤은혜가 등장했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지만 그때 윤은혜가 눈을 비볐더라면 실명 위기까지 갔었을거라고.

그리고 당시 KBS에서 공영방송임을 내세워 금발 스타일을 제재했었는데 마침 이희진의 스타일이 금발(...)이라 KBS에서는 모자를 쓰고 나오는 수모를 겪는다. 또 <Why> 활동 3개월 동안 인기가요에서 4번 밖에 못나오는 안습 수준의 프로모션 때문에 <Why>는 초반 기세[24]보단 조금 약한 반응을 보였지만 비슷한 시기 이정현, 김현정, 백지영 등 쟁쟁한 여가수들이 장악하던 가요 차트에서 상위권에 등극하며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같은 해 수능 언어영역평가때 <Why>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기도 했다. 안티들은 경악을 했지만(...)

6월부터는 전 수영선수 故 조오련을 필두로 이훈, 소지섭 등과 함께 SBS에서 방영된 <뷰티풀 라이프>에서 진행하는 '대한해협에 횡단' 프로젝트에 합류한다. 사실 베이비복스 멤버들은 완전히 맥주병으로 수영도 전혀 못 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 비판을 받았고 안티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방송 중간 민낯으로 나오는 베이비복스를 악의적으로 캡쳐해 올려대며 이미지 손실도 당했다. 그러나 멤버들은 살인적인 스케쥴에도 포기하지 않고 오전에는 제주도에 가서 수영연습을, 오후에는 여의도에 와서 음악 방송을 하는 강행군을 한다. 당시 하루 수면 시간이 겨우 30분~1시간이었다.

2000' 대한해협팀
베이비복스, 조오련, 이훈, 소지섭, 유정현, 정유진 등 연예인 팀과 일반인 팀까지 총 18명의 인원이 대한해협을 건넜다.

8월 15일, 2달간의 연습끝에 첫 횡단에 시도했지만 안타깝게 실패로 끝났고 중국 공연까지 미루며 2차 횡단에 돌입한 8월 28일, 오후 1시 10분 거제도 장승포항 서이말 등대에서 출발해서 29일 오전 7시 22분 대마도 히타카투항에 발을 내딛는 성공을 거둔다. 직선거리는 54km, 도영거리는 74km로 당초 예상했던 24시간보다 6시간이 빠른 18시간 11분만에 대한해협를 건넌 것. 이 후 베이비복스 멤버들은 이때를 회상하며 강인한 정신력과 팀웍을 기를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었다고 회고한다.

대한해협 횡단 성공 전후 시점부터 베이비복스는 후속곡 <배신>을 들고 활동을 재개했다. 이때 불가피하게 남성 그룹들과 활동이 겹치는 바람에 안티들의 공격은 공개 방송 현장까지 이어져 MBC 음악캠프에 출연한 어느 날은 같은 날 출연한 남성 그룹 팬들 모두가 입을 맞춰 베이비복스를 향해 "꺼져라"를 외쳐대는 상황이 발생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사전에 맞춘 것처럼 열을 올려 '꺼져라'를 외쳤다고 한다. 그따 '꺼져라' 테러를 주도했던 모 그룹 팬들은 당시의 정확한 증언과 정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는 발뺌하고 있는 실정. 이 날 방송 이후부터 베이비복스가 무대에 등장하면 '꺼져라 테러'가 일약 유행처럼 번져서 '배신' 활동 무대를 보면 안티들의 야유 소리가 안 들리는 무대를 찾기 힘들 정도다. 꺼져라 테러 그 해 핑클, 보아도 비슷한 수준의 공격을 받은걸로 유명하다.

<배신>은 <SBS 인기가요>에서 최고 4위까지 오르는 무난한 인기를 얻고 10월에 4집 활동을 마감한다. 4집은 전체적인 퀄리티는 좋았지만 대중적이고 강렬했던 3집 시절때와는 달리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컨셉으로 순회해 <Get Up>, <Killer>때만큼 대중들에게 큰 각인되지는 못했어도 가요계의 르네상스로 불리는 2000년 가요계에서 두 곡 모두 상위권에 오르는 상당한 실적을 올렸다. 음반 판매량도 16만장 선으로 같은해 <잘 됐어>를 히트시킨 이나 <한>으로 데뷔하자 마자 1위에 오른 샤크라와 비슷한 수준으로 팔렸다.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갈수록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한다. 10월에는 <Why>의 뮤직비디오 촬영 장소인 계림시에서 뮤직비디오 공개 후 관광객이 급증했다며 베이비복스를 계림시 관광 홍보대사에 위촉시키고, 감사패를 수여했으며 11월에는 한국 걸그룹으로는 처음으로 베이징 콘서트를 하는 등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다. 중국에서 4집 음반은 약 15만장 정도가 팔려 모조품이 판치는 중국 가요계의 사실상 '밀리언 셀러'에 준하는 결과였다고 한다. 하반기 북경 공연에서는 출연료를 받지 못한 공연 사기를 당하는 아픔도 겪었지만 꾸준히 중국팬들과 만남을 가지며 현지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하반기에는 L.A.와 뉴욕 등지 공연과 일본에서도 프로모션을 가지면서 점점 해외 활동 범위를 넓힌다.


2001년 MBC 게릴라콘서트 베이비복스 편

4집 활동 종료 후 약 7개월간의 공백기동안 중국 활동과 앨범 준비 기간을 가진 뒤 2001년 5월, 5집 앨범 Boyish Story으로 컴백하면서 앨범 발매일에 맞춰 당시 인기가수들의 등용문이라고 불리는 MBC 일밤 게릴라콘서트에 출연한다. 도전 장소였던 포항 해맞이공원에서 9364명을 동원하며 목표치였던 5000명을 훌쩍 넘는 성공적인 결과를 안는다.[25]

5집 활동 당시의 베이비복스 (2001)

5집 타이틀 곡 「Game Over」

그러나 베이비복스는 이 시기부터 국내 활동보단 해외 활동에 지나치게 치중하며 국내에서는 하락세를 보였다. 5집 타이틀 곡 <Game Over>는 김형석이 작곡해 훌륭한 곡 퀄리티를 보였지만 정작 곡 콘셉트가 보이쉬함이라 가요팬들이 원하는 여자 가수의 이미지에 적합하지 않았고 평이한 반응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자팬이 대거 생성된 시기가 이 5집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썩 안좋은 결과만 불러온 것은 아니다.[26] <Game Over>가 최고 순위 4위까지 오르며 선방하긴 했지만 음반 판매량도 4집에서 소폭으로 하락했고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뒤이어 발표한 후속곡 <인형>이 그 전과는 달리 10대 여학생들 위주로 사랑을 받아[27] 오히려 타이틀 곡보다 더 많은 인기를 얻어 당시 샤크라와 함께 여학생들의 장기자랑(...)을 휩쓸며 어느 정도 인기를 회복하지만 국내에서 3~4집때 만큼 뚜렷한 성과를 내진 못했다.

5집 앨범은 윤은혜를 제외한 멤버 전원이 작곡에 참여할 만큼 참여도도, 완성도도 뛰어난 작품이었기에 앨범 부진이 더 아쉽게 다가온다. 5집 앨범이 부진했던 이유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게 바로 "타이틀 곡 선정 미스"라는 것인데 그전까지 섹시 컨셉으로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아온 그룹이니 만큼 타이틀 곡 <Game Over>에서는 보이쉬함을 강조하며 여성팬들에게는 어느정도 호응을 얻었지만 '보이쉬 컨셉'은 당시 가요계의 흐름이나 메인스트림 여자 가수들의 대개 모습들을 보면 너무 도전적인 모험이었다. 오히려 절제된 섹시함과 귀여움을 절묘하게 섞은 후속곡 <인형>에서의 반응이 폭발적이었을 정도. 다만 후속곡이 타이틀 곡만큼 프로모션을 가지기엔 무리가 있었고 당시 중국을 한달에 한두 번씩 오고 가던 상황이라 결국 체감 인기는 좋았지만 절반의 성공 정도로 끝나버렸다. 비슷한 사례로 2000년대 초반 '성인식'으로 당대 최고의 섹스심벌로 큰 인기를 얻었던 박지윤이 후속작으로 발표한 <난 남자야>에서 보이쉬 컨셉을 선보이자 부진한 반응을 얻었지만 이어 후속곡으로 내놓은 <난 사랑에 빠졌죠>에서 다시 여성스러운 컨셉으로 복귀해 타이틀 곡보다 많은 인기를 누린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후에도 보이쉬 컨셉으로 성공을 거둔 사례는 좀처럼 없었다.

국내에서 활동은 잠시 뒤로하고 2001년 9월부터 중국에서 추진한 순회 공연이 성공적인 결과를 낳으면서, 중국의 모 연예 잡지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한국 여자 연예인으로 김희선을 제치고 간미연이 뽑히는 등 중국 내 한류의 중심에 서게 된다. 또 김이지는 15억원 규모의 한중합작 영화 '적혈매괴'의 주인공으로 낙점되었다.[28] 그런데 5집 활동 종료 후 베이비복스 사이트에 "제2의 베이비복스"를 뽑는다는 공지가 올라와 한 차례 해체설이 돈다. 당시 소속사는 현재는 아나운서로 데뷔한 유경미를 주축으로 팀원 구성에 나섰지만 멤버 충원이 안 되어 무산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두고 소속사가 인기의 중심이었던 간미연과 심은진을 주축으로 멤버 물갈이를 히려 했다는 루머가 있는데 전혀 사실무근이다.[29] 소속사측은 공식 홈페이지에 소속사에서 새로운 여성그룹을 제작하는 홍보 멘트일 뿐 기존 베이비복스와는 전혀 관계가 없을거라는 입장을 밝혔었다.

4.3 2002~2003 : <Special Album>, <DEVOTION>

제2의 전성기[30]를 맞이한 베이비복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의 폭발적인 인기

2002년 베이비복스는 재도약을 위해 음악 색깔과 전체적인 스타일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다. 그동안 베이비복스의 음악을 진두지휘하며 인기 가수 자리에 오르기까지 큰 공헌을 했던 김형석과 결별하고 그와 절친했던 작곡가 김창환의 곡으로 가요계에 컴백한다. 해외 일정 등으로 신곡 취입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정규앨범 대신, 신곡 두 곡이 들어간 Special Album을 내놓으며 지난 5년간의 활동을 중간정리 한다.

5.5집 활동 당시의 베이비복스 (2002)

베이비복스에게 제 2의 전성기를 안겨다준 「우연」

스페셜 앨범의 타이틀 곡 <우연>은 1996년 발표된 콜라[31]의 노래 <우울한 우연>가 원곡이지만 당시에는 그닥 사랑받지 못했었다. 사실 콜라 이후에도 김창환이 프로듀싱한 일본 걸그룹 'Color'도 이 노래를 리메이크 했었지만 반응은 콜라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창환은 이 노래를 하우스 버전으로 재편곡해 선사했으며[32] 노래 도입부에 '발라 발라 꼬미꼬라 발라 발라 보니따(이후 생략)'라고 외계어 비슷한 가사를 새롭게 추가해 노래의 매력을 한층 높였다. 이 부분은 외계어가 아니라(...) 스페인어로 "예쁜 아가씨 나와 같이 춤을 춰요" 대략 이런 내용. 당시 10대들은 이 가사를 줄줄이 외우며 놀기도 했다. 다 외우면 천재 소리를 듣기도

앨범 발표 시기가 하필이면 월드컵을 앞두고 있던 시기여서 기성 가수들은 대부분 이 시기 컴백을 피했고 베이비복스도 애당초 1달 반 정도로 활동기간을 짧게 잡았었지만 오히려 <우연>은 신나는 노래와 월드컵 열풍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점차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다. <우연>은 발매되자마자 가요차트 상위권에 진입했고 <No.1>으로 큰 사랑을 받던 BoA, 임창정등과 함께 1위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그러던 중 앨범 발매전부터 무리한 일정으로 발목 상태가 안좋았던 윤은혜가 춤을 출 수 없는 상태까지 악화되면서 수록곡 'Go' 뮤직비디오 촬영을 취소하고 한동안 안정을 취한 뒤 무대에 복귀해 춤은 못춰도 무대에 오르는 의욕을 보인다. 그러면서 1달 반으로 예정된 활동 기간이 자연스레 연장된다.

<우연>이 방송 차트 1위에 오르기 직전, 한 인터뷰에서 멤버들이 꼭 정상에 올라 트로피를 윤은혜에게 주고 싶다고 했는데 몇주 뒤 2년만에 <인기가요>에서 1위에 오르면서 김이지가 울먹이며 "막내가 많이 아픈데도 열심히 해줘서 고맙고 이 트로피 막내한테 돌릴게요"라며 소감을 전했다. <우연>은 제 주인을 찾지 못하고 떠돌다가 마침내 베이비복스에게 돌아가면서 빛을 본 것이다. 이 노래로 2년만에 SBS 인기가요에서 2주간 1위를 수상했고[33] 당시 순위제를 운영하지 않았던 KBS 뮤직뱅크에서는 활동 기간 내내 리퀘스트 HOT 5에 올랐으며 당시 월드컵 중계로 인해 불가피하게 결방했던 MBC 음악캠프에서도 활동 종료 후인 7월달에 1위 후보에 오르는 인기를 과시했다.


콘서트 영상으로 재편집 된 「Go」의 뮤직 비디오

스페셜 앨범은 한국음반산업협회 기준으로 24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는데 이는 베이비복스 역대 음반 판매량 중 최고치였다. 후속곡 활동은 없었지만 수록곡 'Go'도 사랑을 받았다. 2002년 한해 동안 가장 많이 다운로드된 벨소리 차트에서 당시 걸그룹으로는 유일하게 10위권안에 랭크되는 대중적인 성과를 달성하기도 했고 관련 링크. 2002년 M.net '가요 베스트 24'에서 선정한 상반기 인기 가요 결산에서도 당시 같이 활동했던 핑클, S.E.S.보다도 높은 순위를 기록한다.관련 링크 그동안 항상 3인자에만 머물렀던 베이비복스가 이 시기만큼은 걸그룹 중 가장 큰 인기를 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여자가수 통틀어서도 높은 인기를 누렸다.

2년만에 정상에 오른 베이비복스는 개인 인지도도 다시금 상승하여 간미연은 한중합작 영화 <와와>[34]에 캐스팅 되었고 심은진은 각종 예능 버라이어티쇼에 출연하면서 많은 여성팬들을 확보했다. 이희진과 윤은혜 역시 시트콤이나 VJ를 통해 개인 활동을 이어갔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8월 15일, 김이지가 재학중이던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첫 국내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는데 총 2회 공연으로 8500여명을 동원하면서 관중동원력이 부족하다고 평가받는 걸그룹 콘서트임에도 불구하고 전석 매진을 기록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같은 해 베이비복스는 대만과 대한민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태국 시장에 진출하는데, 태국에서는 예상치 못한 좋은 반응를 얻는다. 한편 중국에서는 베이비복스 가요제[35]가 열려 무려 1만명이 넘는 지원자가 가요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몰려들었고 해외에서의 입지는 갈수록 커져갔다. 당시 중국에서 받는 회당 개런티가 6천만원 선. 중국에서 톱스타 반열에 오른 안재욱을 이어 한국가수로서는 2위였다. 관련 링크

태국에서 촬영한 6집 「DEVOTION」 화보집

6집 타이틀 곡 「나 어떡해」

해를 넘어와 2003년 베이비복스는 6집 앨범 DEVOTION을 아시아 7개국에 동시 발매하며 아시아 지역 선주문량만 40만장(35억원 규모)에 육박하는 한류 스타로서의 위엄을 떨쳤다.앨범 발표전 지구촌 나눔운동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음반 판매 수익금 일부를 사회의 한원하기로 했고 앨범에도 해당 내용의 마크가 적혀있기도 하다. #6집 앨범은 스페셜 앨범에서 함께 했던 김창환 휘하의 작곡진들이 참여했으며 전보다 대중성을 강화한 앨범이었다. 타이틀 곡 <나 어떡해>는 발표와 동시에 가요 차트 상위권에 진입했고 SBS 인기가요에서 뮤티즌송을 수상하며 인기를 누렸다. 음원 사이트 벅스에서도 상당기간 주간 1위를 차지하는 대중적인 성과를 기록.[36] <나 어떡해> 활동 당시 대형 방송 사고가 있었는데 5월 경 <SBS 인기가요> 무대에서 시작 부분에 회전무대 장치가 리허설 때보다 빨리 돌아가는 바람에 김이지를 제외한 멤버 전원이 다 넘어져버리는 웃지 못할 헤프닝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래 제목도 '나 어떡해'에다가 노래의 첫 소절이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어. 이대로 잊혀지면 좋겠어"였으니 더 웃긴 사건이 되었다. 결국 1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NG 퍼레이드 1, 2위를 다투는 레전드 영상으로 남아있다. 그래도 이들은 프로 정신으로 공연을 끝까지 무사히 마친다. 방송사고

<나 어떡해>는 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는데 2002년 태국 진출을 했을 당시 생각보다 좋은 반응을 내었고 2003년 초에는 태국의 대형 무대인 파타야 뮤직 페스티벌에서 공연도 했고 뮤직비디오도 태국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현지에서 신곡이 발표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을수 있었다. 또 이 앨범에는 처음으로 중국어로 부른 신곡 <I'm Still Loving You>를 수록해 중국 현지에 싱글로 발매했는데 이 곡이 중국의 인민 라디오 차트에 당당히 1위에 올라 외국인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전체 차트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가요 관계자들은 "보아의 오리콘 1위에 맞먹는 성과"라며 축하했다. 한국에서는 <나 어떡해> 활동 이후 박미경의 곡을 리메이크한 <바램>으로 후속곡 활동을 짧게 선보이고 특별한 굿바이 무대 없이 7월에 6집 활동을 정리했다. 원래는 팬투표로 정한 후속곡으로 <Loveless>와 <바램> 더블 체제로 활동한다고 밝혔으나 그런 일은 없었고(..) 비슷한 시기 국내 두번째 단독 콘서트도 취소되는 등 이래 저래 막판에 아쉬운 행보가 있었다. 그래도 콘서트가 취소된 대신 국내 외 팬들을 초청해 여름 캠프를 개최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2003년은 99년 중국 진출을 시작으로 아시아 각지에서 활발히 활동을 해오면서 해외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랑을 받았던 해였다. 1월에는 홍콩의 최대 음반사 'Bingo Music'과 계약을 체결하며 프로모션을 가졌고 홍콩의 톱스타 곽부성의 러브콜을 받아 함께 식사 자리를 가지고 듀엣곡까지 발표할 뻔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베이비복스/해외 활동 문서를 참고. 6집 앨범은 중국에서도 크게 히트해서 중국의 영어 시험지 지문으로까지 등장했었다.

파일:4NyRDBV.jpg

또 같은 해 몽골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콘서트를 열었는데 당시 콘서트는 성황을 이루었고 대통령으로부터 멤버별로 1000평씩의 땅과 공로상을 받았지만 이것은 국가사기였다. 베이비복스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국가땅을 준 것(...)[37]

이후 10월 6일 평양에서 열린 '평양 류경 정주영 체육관 개관식 남북 합동 축하공연' 무대에 올랐는데 이제는 북한까지 2003년 10월 5일 육로를 통해 입북해 평양에서 2박 3일 간 머문 후 7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베이비복스는 1999년 중국 진출을 시작으로 아시아 곳곳을 누볐지만 북한 방문은 처음이었고 국내에서는 핑클 이후로 여성그룹으로서 두번째 북한 방문이었다. 베이비복스는 이 날 신화, 설운도, 조영남, 최진희 등과 함께 남측 대표 가수로 참가하는데 국내 연예인들의 북한 공연은 수차례 있었지만 버스를 타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방북한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SBS 측은 공연에 참가할 연예인을 선정하는 데 꽤 신중을 기했다. 그룹 신화는 국내 최고의 카리스마와 세련 된 무대, 베이비복스는 신세대 여성 그룹의 대표주자라는 점이 후한 점수를 받았다. 특히 베이비복스는 중국 공연 일정을 연기하는 열성을 보이며 방북 연예인 대열에 전격 합류했다. 공연은 베이비복스 및 신화, 설운도 등 남측 가수들과 북한의 대표 가수 7개팀과 합동 공연을 벌이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 공연은 SBS와 북한의 조선중앙TV에서 동시에 생중계 되었다. 그런데...


2003년 10월 6일 SBS '통일 음악회'

베이비복스가 공연을 하는 내내 북한 관객들이 컬쳐쇼크받아 얼어붙은 모습이 그대로 방송에 송출되어 버린 것이다. 사실 공연을 앞두고 북한측의 제재를 받기도 했었다는데 당초 베이비복스측이 준비해간 의상은 배꼽티였고 공연 전 합동 리허설에서는 이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랐으나 리허설 후 북한 관계자의 요청으로 배꼽을 급하게 천으로 덧대어 수정한뒤 최대한 점잖게 무대에 섰다. 그래도 관객들 반응은 아주 냉담해서 아직도 베이비복스 굴욕 영상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2011년, 윤은혜가 한 버라이어티쇼에서 밝힌 바로는 당시 북한 여성들이 정색을 넘어 아주 질색팔색을 했었다고.

2003년 하반기 소속사는 언론 보도를 통해 그간의 비행 거리를 합산한 자료를 담은 '해외 공연 기네스'를 전격 공개했다. 자료에 따르면 베이비복스가 지난 2000년부터 2003년까지 공연을 위해 이동하면서 쌓은 항공 마일리지는 개인당 10만 5,346마일. 5명을 합했을 경우 무려 52만 6,730마일(약 84만2,760㎞)에 육박했고 이는 둘레가 4만 75㎞인 지구를 20바퀴 이상 돈 것으로, 당시 국내 가수 중 이같은 진기록을 갖고 있던 팀은 베이비복스가 유일했다.

4.4 2004~2006 : <Ride West>, 활동 중단

아시아를 넘어 미국으로의 진출 시도, 그리고 안타까운 결말
채널 [V] 타일랜드 어워즈에서의 베이비복스.

베이비복스는 2004년 초부터 태국의 음악 시상식 '채널 [V] 타일랜드 어워즈'에서 <나 어떡해>로 파퓰러 아시안 아티스트 부문 1위에 해당되는 '아시아 특별상'을 수상했다. 당시 쟁쟁한 아시아 스타들을 제치고 수상한 값진 트로피였다. 그리고 태국의 명문 골프장에는 '베이비복스 홀'이 생기기도 했는데 당시 주최자의 말로는 당시 대표였던 최씨는 "태국에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베이비복스가 우리 골프장에서 골프를 배우고 즐긴다면 한국과 태국의 골퍼들에게 큰 화제가 될 것"이라면서 베이비복스가 태국 상류층에 강한 인상을 남겨 새로운 형태의 '한류 모델'을 제시할 것으로 전망했다.

1997년 데뷔 이래 꾸준히 활동해 오면서 중국, 대만, 베트남, 태국, 홍콩, 일본에 진출해 맹활약을 하며 아시아의 스타로 부상한 베이비복스는, 6집 앨범을 내고 후속 음반에 대한 장르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2003년 11월, 웨스트 코스트 힙합 팀을 제작 및 홍보하고 있던 유니버설 벙갈로 뮤직측이 2003년에 조사를 해보니 아시아권 전 차트에 베이비복스라는 팀이 상위권에 순위가 올라있어 베이비복스 측에 당시 미국의 음악시장 또한 불황이었고, 미국의 음악 형태가 한 앨범의 여러 뮤지션들이 참여하여 음반 불황을 돌파해나가는 때였기 때문에 베이비복스도 그런 형태로 기획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제의를 보내왔다. 더불어 벙갈로 뮤직의 R&B, 힙합 아티스트들이 아시아 시장에 베이비복스와 함께 진출하고 베이비복스의 7집 앨범을 영어버전으로 바꾸어 미국 라디오 스테이션에 플레이하며 아시아 가수가 미국 시장에 도전하는 프로모션도 함께 제의 받은 것이다.

베이비복스는 고심끝에 제의를 승낙하고 99년 중국 진출 이후의 또 다른 도전에 나서게 된다. 2004년부터는 아시아 시장뿐만 아니라 미국 음악 시장 겨냥을 위해 7집 수록곡을 우리말과 영어로 동시에 녹음했으며, <Ride West>라는 앨범 타이틀이 말해주듯이 힙합의 본 고장인 미국을 겨낭하고 있는 앨범으로서 해외 뮤지션이 대거 참여하였다. 타이틀 곡 <Xcstasy>에는 웨스트 코스트 힙합의 전설이자 1997년 총기 난사 사건으로 요절한 투팍(2Pac)이 생전 녹음해뒀던 미공개 랩을 정식으로 샘플링[38]했고 헐리우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제니퍼 로페즈의 노래 <Play>를 새롭게 리메이크해 수록했다. 또 7집 앨범 발표에 앞서 대한항공과 전략적인 제휴를 맺었는데 이는 한류스타로서 베이비복스가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한항공측은 2004년 1월 7집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 대한항공 활주로과 김포공항 격납고등을 제공했고 베이비복스 측은 앨범과 언론 매체에 대한항공 마크를 노출시키는 형태의 마케팅이었다.

2004년 새해 첫 뉴스로 미국 진출 소식과 7집 컴백 소식을 전하며 그동안 주력해온 아시아 지역 뿐만 아니라 나아가 미국 연착륙을 겨냥한 파격적인 도전이면서, 데뷔 7년째이자 승부수를 던졌던 7집이 행운의 `럭키 세븐`이 될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베이비복스의 마지막 앨범 'Ride West' (2004)

7집 타이틀 곡 「Xcstasy」

2004년 4월, 베이비복스는 대망의 7집 앨범 'Ride West'로 컴백한다. 타이틀 곡 <Xcstasy>는 첫방송에 앞서 SBS 심의실 측이 제목에 대한 선정성을 문제 삼아 방송 불가 판정을 내렸고 부랴부랴 <환상>이라는 제목으로 재심을 받아 방송에 돌입했다. 발매 전부터 수많은 힙합 팬들에게 질타를 받았지만 국내 팬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크게 엇갈리며 첫방송 이후 대부분의 반응이 "도대체 후렴구가 어디야?"(...)였다. 그래도 <SBS 인기가요> TAKE 7에 진입하는 등 베이비복스 이름값은 했다. 대중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매니악한 인기를 누렸다.

<Xcstasy> 무대에서 랩을 해주던 프로듀서 'Floss P'가 본인의 음악 작업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야 되는 상황이어서 한달만에 활동을 접고[39] 6월부터는 서브 타이틀 곡 <Play Remix>로 활동을 이어간다. 그런데 활동을 시작한지 보름도 안됐을 무렵, 베이비복스의 앞날을 가로막은 사건이 터진다. 아래 항목 참고.

해당 사건으로 정신적인 타격을 입고 멤버들은 가수 활동에 염증을 느껴 활동을 잠정 중단했다. 대한항공의 지원으로 일본 시장에 정식 진출하여 활동한다는 계획도 있었지만 결국 얼마안가서 올 스탑. 그동안의 무차별적인 안티들의 공격도 모자라 선배가수 마저도 베이비복스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게 되어버렸으니 지쳐서 활동 중단하는게 놀라운 것도 아니다. 거기다 베이비복스는 활동 내내 정산도 제대로 받은적이 없었다. 자세한 것은 아래 소속사 비화 항목을 참고.


2004년 10월 10일 한중가요제
심은진을 포함한 5인으로서의 마지막 공식무대였다.

이후 베이비복스는 해외 무대를 위주로 활동했는데 10월 이후로는 심은진이 없는 4인조 체제로 무대에 올라 심은진 탈퇴설이 불거졌다. 결국 2004년 12월, 소속사 대표가 홈페이지를 통해 심은진의 탈퇴를 공식 발표했으며 중국인 멤버를 영입해 새롭게 시작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이는 전적으로 소속사측의 입장이었다. 당시 베이비복스의 중국 인기가 워낙 높았고 현지화 전략을 위해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인데, 팬들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비슷한 시기 SM 엔터테인먼트에서 동방신기천상지희 The Grace에 중국인 멤버를 영입한다는 입장을 밝혔을때 팬덤이 뒤집어졌던 것과 같은 사례.

베이비복스는 해체는 없을 것이며 기존의 4명에서 중국인 멤버를 선발하여 2005년 하반기에 8집을 발매한다고 했다. 그러나 2005년 7월에 윤은혜가 배우 활동을 위해 탈퇴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소속사 측은 나머지 멤버들의 솔로 활동과 그룹 활동을 병행한다고 밝혔다. 중국에서 한다던 공개 오디션도 모두 무산되어 누가봐도 해체 위기에 놓인 가운데 당시 소속사가 뿌린 보도 자료에서 윤은혜의 탈퇴가 마치 개인활동을 위해 팀을 배신하는것 처럼 보도해 심은진 탈퇴때부터 대두되던 불화설이 더 커지고 만다. 사실 베이비복스는 2004년에 모두 계약만료가 된 상태로 심은진을 제외한 네명은 재계약 서명을 하지 않고 DR뮤직에서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탈퇴한 두 명을 제외한 세명은 DR뮤직에 잔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데 과연 멤버들의 의지였는지는... 간미연은 '중국 베이비복스 가요제' 입상자인 중국인 가수 '관찌엔'과 듀엣 앨범을 낸다는 등[40], 트로트 가수로 전향한다는 등의 루머도 있었지만 결국 이듬해 멤버들 전원이 차례대로 회사를 옮기면서 2006년 2월 심은진의 생일 파티에서 해체가 아닌 각자의 길을 선언했고 다시 베이비복스로 뭉쳐 무대에 설 것을 팬들과 약속하며 8년간의 활동을 잠정 중단한다. 그리고 소속사는 1년 뒤 베이비복스 2기(베이비복스 리브)를 내놓으며 해산 후에도 팬들에게 빅엿을 선사한다.

활동 중단 당시 고작 20대 초중반이었던 멤버들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결말을 맺는다. 활동 기간 내내 수많은 안티들의 추문과 내부적인 소속사와의 문제 때문에 꾸준히 곪았던 게 결국 사실상 해체라는 비극으로 터져 버린 것이다. 베이비복스는 안타까운 결말을 맞았지만 여성그룹 역사에 재평가가 필요한 시대를 앞서간 걸그룹으로 남았다.

4.4.1 베이비복스가 활동을 중단하는 것에 대한 멤버들의 말

(김이지)

"우리 팀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나는 팀의 리더로서 기다릴 것이다. 우리 팀을 지키면서 다시 다섯 명이서 공연을 하고 싶다."
"많은 것을 잃었고... 많은 것이 새롭게 출발한다."

(이희진)

"저희가 말씀드릴 것은 'END가 아닌 AND'입니다."
"이 무대가 마지막 무대라면 아무 말도 못하고 울 것같다. 절대 베이비복스의 마지막 무대는 없다."
"나의 오랜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다. 나의 자리... 우리의 자리가 사라졌다."

(심은진)

"사람들이 베이비복스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고 있다. 우리는 신경쓰지 말자.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우리는 우리대로 간다. 우리는 언제든 다시 모일 수 있다."
"현 소속사에서 심은진 팬클럽을 만드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베이비복스 팬클럽이면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나는 우리 다섯 멤버 모두를 믿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우리는 다시 모일 것이고 베이비복스라는 이름으로 엔젤스 여러분 앞에 설 것입니다."

(간미연)

"소속사가 베이비복스 1기를 해체하고 2기 베이비복스 탄생을 준비 해 베이비복스란 이름으로 음반을 못 내게 되자 상처 입은 팬들의 글을 보며 눈물도 흘렸다.
또 혼자 걸어야 할 길에 대한 자신도 없었다. 지금도 홀로 노래할 때, 인터뷰 할 때 부담이 된다."
"베이비복스 멤버들과 만나면 늘 다시 무대에 서는 날에 대해 이야기 한다."

(윤은혜)

"다시는 가수로 활동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베이비복스 멤버들과 약속한 것은 꼭 지키고 싶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우리 멤버들과 베이비복스라는 이름으로 다섯 명이 같이 공연을 할 것이다."

베이비복스의 시작과 끝을 담은 마지막 뮤직비디오 《The First And Last[41]

4.5 활동 중단 이후

베이비복스의 활동 중단 이후에 관한 내용은 베이비복스/활동 중단 이후 문서를 참고.

4.6 해외 활동

베이비복스의 해외 활동에 관한 내용은 베이비복스/해외 활동 문서를 참고.

4.6.1 주요 활동 연혁

1999.08. 뉴욕 공연
1999.11. 중국 음반 라이센스 체결
1999. 한일합작 애니메이션 '건드레스' 홍보대사 위촉 및 주제가 'Patron' 녹음
1999.12. 중국 북경 TV의 `밀레니엄쇼'에서 데뷔 무대
2000.04. 중국 계림서 'Why' 뮤직비디오 촬영
2000.06. NRG, 클론등과 상해 공연
2000.08. 세계 맥주 페스티벌 한국대표 출전
2000.09. 미국 뉴욕, L.A. 등지 공연
2000.10.22~24 일본 프로모션차 방문, 도쿄 ON AIR WEST LIVE HALL 단독 미니 콘서트 (7백석 규모)
2000.10.28. 중국 계림시 관광사절 위촉 및 감사패 수여
2000.11. 한국 걸그룹 최초 중국 베이징 콘서트
2000.12.02. 일본 Korea Super Expo 2000 슈퍼 라이브
2001.01.01. 중국 상하이 TV 주최 '새천년 쇼'에 해외 아티스트 대표 출전
2001.06.02. MBC 일밤 게릴라 콘서트 포항 해맞이 공원에서 9,364명 (비공식 10,000명 이상) 동원
2001. 중국 연예 잡지의 '한국 여성 연예인 가운데 최고 인기 연예인 1위에 간미연
2001.06.04. 5집 앨범 아시아 4개국 동시 발매
2001.07~12 중국 7개 도시 투어
2001.09.23.~28. 중국 3개 도시 '한중수교 9주년 기념공연'
2001.09.27. 중국 베이징 '베이비복스 전산학교' 설립
2001.11. 김이지 한중합작 드라마 '적혈매괴' 캐스팅, 회당 개런티 350만원
2002.04.10. 중국 상하이에서, 라디오 방송국 협회가 뽑은 '최우수 한류가수상'
2002.05. 대만 프로모션
2002.05. 간미연 한중합작 영화 '와와' 캐스팅
2002.07. 중국 베이비복스 가요제 개최 1차전 4000여명 지원
2002.08.15.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서 국내 첫 단독콘서트
2002.08. 베트남 공연
2002.09. 태국 'GMM'과 음반 계약 정식 진출 대한민국 가수 최초
2002.11.17. 일본 NHK 아시아 드림 라이브 한국 대표 출전
2002.12. 일본 도쿄 TV '플라토닉 체인'에 'Go'가 타이업
2003.01.20. 홍콩 프로모션, 곽부성과 만남 및 중국 신곡 뮤직비디오 촬영
2003.02.09. L.A. 단독 미니 콘서트
2003.03.19~22. 태국 파타야 뮤직 페스티벌 한국 대표로 출전
2003.04. 일본 도쿄 시부야 라이브 홀 미니 콘서트
2003.04.03. 6집 앨범 전세계 7개국 동시 발매
2003.05.20. 'I'm Still Loving You'로 외국인 가수 최초 중국 인민 라디오 차트 1위
2003.05.23. 태국 '채널 V' 차트에서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마돈나 등을 제치고 4위 랭크
2003.07.26. 몽골 정부 초청 대규모 콘서트 및 감사패 수여
2003.10.06. 평양 남북 합동 축하공연 남한 대표 출전
2003.11.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아시아 가요제’ 출연
2003.11.30. 기네스 북 ‘국내 엔터테이너로 가장 먼 해외원정기록 부문에 도전
2004.03. 대한항공 주최 태국 방콕 팬미팅
2004.04.23. 태국의 명문 골프클럽인 방콕CC에 '베이비복스 홀' 등장
2004.05.28. 베이비복스 대한항공 홍보대사 임명
2004.07. 한국전쟁 태국 참전용사 프렌드 쉽 콘서트
2004.08. 일본 진출 공식 발표
2004.11.06. 제1회 중국-동맹 박람회의 폐막식 공연 한국 대표 출전
2004.12.18. 중국 베이징올림픽체육관 베이비복스-비 조인트 콘서트

5 팬덤

팬클럽 명칭은 베이비 엔젤스 (Baby Angels)이다. 1기는 1998년 창설되었으며 첫 창단식은 2000년 1월 5일 잠실 펜싱 경기장에서 열렸다. 기수는 2004년 6기까지. 걸그룹 자체가 팬덤 규모가 약한게 특성이었지만 당시 S.E.S.의 팬클럽 <친구>나 핑클의 <FINKY> 팬클럽을 이어 가장 규모 있는 걸그룹 팬덤이었다. 애초에 90년대 걸그룹 중 고유 풍선 색깔이 있는 그룹부터가 이 셋 뿐. 첫 창단식에서는 1000여명에 육박하는 팬들이 모였었고 가수들이 함께 모여서 공연하는 콘서트에서도 기본적으로 2~300명씩은 모여 베이비복스를 응원했었다. 5집에는 베이비 엔젤스를 위해 윤은혜가 작사한 《To. Angel》이라는 곡도 있다. 팬송은 특별히 없었으나 대부분 《Missing You》나 《내 사랑이기를》이 팬송 역할을 했다.

파일:KRB5Ato.jpg
베이비 엔젤스 응원 도구 펄핑크 풍선[42]

2000년 1월 5일 잠실 펜싱 경기장
<베이비 엔젤스 1-2기 창단식>

베이비 엔젤스와 베이비복스가 함께 꾸민 행사는 2000년 팬클럽 1-2기 창단식을 시작으로 2002년 3-4기 창단식, 2003년 8월 여름캠프, 2004년 1월 스키캠프 등이 있다. 멤버들의 생일이 1월~2월에 몰려있어 생일파티와 창단식 팬미팅을 한 번에 하는 경우가 있었다. 본격 비용 절감 베이비복스의 음반은 3~4월달에 나오는 경우가 많았어서 신곡 공개를 팬미팅 자리에서 하기도 했다.[43] 응원 도구는 풍선이며 프론트 색상은 펄핑크. 해당 색깔은 2004년 베이비복스가 활동을 중단한 뒤 2005년 데뷔한 천상지희 The Grace의 팬덤 샤플리가 2006년부터 2007년까지 사용했고 베이비복스의 2기인 베이비복스 리브도 풍선 색깔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사용했다. 하지만 원조 베이비복스 팬덤은 전혀 찬성하지 않은 부분. 심은진과 간미연이 솔로 음반 활동을 할때도 펄핑크 색상을 그대로 유지했다.

공식 팬카페는 다음에서 운영되던 <예쁜이 베이비복스를 아세요?>였는데 2006년경 운영자가 회원을 정리한답시고 그 해에 접속 안한 회원들을 모두 탈퇴시키고, 카페 가입에 나이 제한을 걸어두어 이에 불만을 표하는 회원들을 모조리 탈퇴시켰다. 결국 베이비복스의 대표 팬카페로 운영되오던 이곳은 수만명에 이르던 회원수가 한순간에 3천명으로 줄어들었고 카페 자체가 한마디로 망해버렸다(...) 결국 현재는 비공개 카페로 전환되어 과거 가입해둔 팬들만 카페에 접속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 후 임시 카페가 운영되었지만 원조 팬카페 규모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현재 베이비 엔젤스가 집결해 있는 곳은 2013년 개설된 팬사이트 Play With Baby V.O.XDC 베이비복스 마이너 갤러리 정도.

6 사건사고

6.1 이하늘 베이비복스 성적 모독 파문


2007년 2월 24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어느 여자 스타의 일생"
당시 베이비복스를 폭언한 건 안티도 아닌, 기자도 아닌 가요계 선배였다.
사건 당시 베이비복스 평균 나이 고작 24세.

7집 타이틀곡인 '엑스터시'가 힙합계에선 신적으로 추앙받던 2pac의 죽기 전 감옥에서 힘든 심경을 담은 미공개 곡을 돈 주고 사서 샘플링해서 '엑스터시' 곡 중 한 멤버와 대화를 주고받는 식으로 이용했었다. 장르의 순수성을 추구하던 시절이고, 아이돌 초창기라 아직 미약하게나마 자본논리보다는 음악의 예술성이나 메시지를 존중하던 시절이었으며, 장르 문제와 함께 곡 자체의 수위도 있었고, 뭣보다 샘플링한 곡도 곡인데다가 힙합과는 관련도 없던 베이비복스가 갑자기 죽은 투팍과 대화를 한다는 고인드립으로 엄청 까였다. 이 정도면 요즘 아이돌이 힙합과 록에 접근하는 걸 싫어하기 이전에 요즘 나와도 욕 먹는 일이 될 수 있었다.

DJ DOC이하늘이 샘플링 문제를 두고 당시 자신이 출연하던 엠넷의 힙합 프로그램 '힙합 더 바이브'에서 '2PAC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 베이비복스는 빠따 좀 맞자.'[44]라 언급했고 이 발언이 스포츠 신문을 통해 기사화되어 당시 7집 타이틀곡 엑스터시의 작업 및 랩 피처링을 맡았던 플로스 피(Floss P)의 귀에 들어가면서 사태가 커지게 된다. 플로스 피는 'DJ DOC도 미국 랩을 따라하는데 남의 것을 아니라 할 자격이 없다'고 반박했고, 이하늘이 이에 대한 반박글을 쓰면서 문제의 '미아리복스', 'SEX 가수', '썅년' 등의 폭언을 쓰게 된다.

여기까지는 단순히 이하늘의 잘못이겠지만, 이하늘이 문제의 발언 후 잠수를 타고 있는 동안 기레기들이 합세하여 '미아리복스'라는 단어를 계속 되새김질하는가 하면, 몇몇 연예 언론들은 진작 7집 활동 초반에 마무리된 표절 해프닝[45]을 확대 해석하여 베이비복스에게 표절 가수라는 오명을 씌우기도 했다. 심지어 소속사인 DR 뮤직마저 이하늘과 싸우는데 모든 신경을 기울인 나머지, 저런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대처하지 않았고 저작권에 대한 문제는 심은진이 직접 해명해야 하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분명 자신들을 둘러싼 싸움인데 아무도 자신들을 배려해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멤버들의 멘탈은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이하늘은 일식집에서 공개 회견을 가져 베이비복스에게 사과를 했지만, '이건 나와 DR 뮤직의 싸움이다'라는 뜻을 분명히 했고 기자회견 이후 돌연 입장을 바꿔 베이비복스에게 사과할 뜻이 없다며 '미아리복스'라는 표현 사실 니들한테 잘 어울린다며 끝까지 인간쓰레기의 행보를 밟는다. 결국 DR뮤직측은 이하늘을 고소하여 승소했지만 베이비복스 멤버들 스스로가 원하지 않아 기사화되지 않았다. 만약 기사화됐다면 '미아리복스 파문, 이하늘 패소' 같은 타이틀을 뽑아서 미아리복스라는 단어로 또 되새김질을 했을 것이 뻔하니.

1세대 아이돌의 황혼기였던 이 시기 더블 타이틀곡이었던 엑스터시와 플레이의 부진에 이런 사태까지 겹쳐지자 베이비복스는 결국 7집 활동을 일찍 접어야 했고, 소속사와의 계약기간 만료 후 재계약 논의도 없이 그냥 각자 갈 길을 갔다. 솔직히 저런 상황에서 누가 재계약을 하겠는가. 대놓고 공식 해체는 아니었지만, 활동 내내 시달렸던 안티 공격부터 시작해 뜬금포 간미연이 문희준과 열애설이 나는 바람에 무개념한 문희준의 팬들로부터 살해협박 및 각종 테러를 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은 데다가[46] 2016년 기준으로는 그저 그렇겠지만 섹시 컨셉 푸쉬와 이하늘 사건, 소속사 문제 등을 겪으면서 멘탈이 거의 다 박살나버린 멤버들이 심은진의 탈퇴를 시작으로 뒤를 이어 계약 기간이 끝난 사람부터 나간 것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해체 후 윤은혜가 잘 나갔고 나머지 멤버들도 미약하게나마 연예 활동을 계속하니까 망정이지 베이비복스 자체만 놓고 보면 이하늘의 폭언 한마디가 다섯명 인생을 말아먹은 셈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이하늘은 미아리복스 발언은 지나쳤다고 사과했지만 ' 투팍의 노래를 상업적으로 이용해 그를 두 번 죽였다' 라는 발언은 사과할 의향이 없음을 밝혔다.[47] 사건 몇개월 후 발매된 본인들의 새앨범에 '베이비복스 디스곡'을 넣으려고 했다고 홍보하거나 본인들 콘서트에 '미복 데려와서 빨간 조명이라도 틀걸 그랬다'며 찌질한 행보를 계속 보였다.

확실히, 투팍도 상업가수이고 클래식 작곡가들도 샘플링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하늘 본인의 주장은 설득력이 거의 없다. 다만 투팍은 상업 대중음악에 속하지만 많은 힙합스타가 그러하듯 인생 자체가 빈민가 흑인의 막장스런 인생을 보내다 흑인의 현실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며 전설적 랩퍼로 자리매김하다 97년에 총 맞아 죽은 사람이다. 일단 2000년대 중반이면 사실상 동시대의 사람으로 소위 말하는 무덤가 흙이 아직 따뜻한 상황이다. 당연히 조심스러워져야 하는데, 만약 2016년인 지금으로 예를 들어 보자면 고인이 된 신해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돌이 신해철의 미발표곡을 샘플링해서 신해철과 대화하는 곡을 냈다고 하면 인터넷 반응은 안 봐도 뻔할 뻔자다. 다시 얘기하지만 심지어 투팍은 총 맞아 죽은 사람이다. 베이비복스측이 경솔했던 점은 다소 있다. 왜 투팍이었어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힙합에 대한 뭔가를 하고 싶었다면 그냥 닥터 드레나 스눕 독 같은 살아있는 사람 곡을 샘플링했어도 상관없었다. 물론 이 설명들이 절대 이하늘의 발언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미아리복스 발언은 아무리 힙합계의 전설인 투팍의 음원을 샘플링했어도 하면 안 될 쓰레기 같은 발언이었다. 앨범 제작은 소속사 사장이 추진한건데 왜 베이비복스가 욕받이 무녀가 되서 창녀소리까지 들었어야 했는지. 또한 당시 DR 뮤직의 대처와, 스포츠 신문으로 대표되는 막장 기레기들의 행각도 베이비복스의 해체에 큰 지분을 가져갔다고 볼 수 있다.

이하늘은 베이비복스 멤버들에게 가수로서의 명예훼손 이전에 여자로서 씻을 수 없는 모욕과 상처를 줬다. 그마저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 없으니 그냥 영원한 이하늘의 흑역사이자 죽을때까지 까여도 부족한 최악의 구설수가 되었다.

6.2 H.O.T. 극성팬 간미연 살해협박 사건

1999년 여름, 사회적 파문으로 일었던 간미연 살해협박 사건.

1999년 9월 11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자료

1999년,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H.O.T.문희준과 간미연 사이의 스캔들로 인해 다량의 협박편지가 배달된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며 아이돌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이들의 존재가 각인됐다. 1세대 사생팬이 일으킨 사건들 중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로 다량의 커터칼날 + 피로 쓰여진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문구 + 간미연의 눈을 모조리 파낸 사진 등. 그리고 당시 음악방송에서 H.O.T.의 팬으로 추정되는 여성 관객들이 노래 시작과 동시에 '꺼져라!'등 온갖 야유를 무대 내내 보내기도 했다. 자작극 사건이 사회적인 문제로 두각되자, 해당 팬들은 간미연 측이 꾸민 자작극이라며 헛소문을 퍼뜨려서 실제로 간미연이 자작극을 했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다. 2000년 당시 베이비복스의 안티팬이 "간미연 사건은 자작극이다!"라며 조직적으로 이들의 활동에 지장을 주자 베이비복스 측이 해당 학생을 고소할 뻔한 사건이 있었다. 물론, 베이비복스가 이들의 처벌을 원하지 않아 선처했다. 아직도 간미연 사건이 자작극이라는 터무니 없는 루머를 재생산하는 안티들도 있으니까 조심하자. 상식적으로 방송 3사 메인뉴스에 보도된 사건이 자작극이었다면 왜 어느 언론에서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을까? 그놈의 마감 뉴스 자료화면좀 가져와봐 '간미연 자작극 루머'는 무식함과 과도한 팬심이 불러온 희대의 촌극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SNS도 활발하고 연예인들이 악플 읽어본 이야기도 쉽게 하는 요즘과 달리, 당시는 아이돌의 경우 팬덤 외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고, 아이돌들은 인터넷으로 팬사이트만 확인한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다보니 안티들의 공격이 단순히 악플이나 루머 양산, 안티카페 개설 등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신체적 위협(폭행, 의상훼손)이나 협박(살해협박)처럼 오프라인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가 사라지는 끝물에 일어난 것이 안티팬이 모 그룹에 행해 대대적으로 보도됐던 음료수 본드 테러 사건이다. 아이돌에 대한 관심이 코어 팬덤 이외에 일반인들에게까지 번진 요즘은 팬덤들 사이에서만 도는 "그랬다더라" 수준의 소문 외에 아이돌이 실제로 직접적인 공격을 받은 경우는 공식적으로 없다.[48]

7 소속사 비화

사실 베이비복스 해체에 대해서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알려진바와 같이 이하늘의 폭언을 통한 멤버들의 스트레스도 한 몫한건 맞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불공정한 소속사의 횡포가 매우 컸다. 사실상 해체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일단 베이비복스의 소속사였던 'DR뮤직'은 직원 열명 남짓한 규모에 '베이비복스' 한 팀으로 연명하던 중소 기획사였다. 베이비복스가 활동하는 동안 휘성이 몸담았던 'A4', 'SNAZZY', 'PLT' 등을 줄줄이 데뷔시켰지만 모두 망했어요가 되었고 베이비복스는 졸지에 회사를 먹여살리는 존재가 되야 했다. 참고로 2000년대 초반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애즈원도 2004년에 이 회사로 이적했지만 이적해서 발표한 앨범은 홍보도, 뮤직비디오도 없이 이전 앨범과 비교하면 초라한 성적을 내었고 이 후 DR뮤직에 소속된 기간동안 앨범도 못내면서 중화권, 동남아 순회만 했다.

물론 회사의 주수입원으로 활동하는 건 중소 기획사 특성상 어쩔수 없다 치지만 문제는 회사의 기둥이었던 멤버들에게 행해졌던 가혹한 '정신 현황'이었다. 짧게 말해 회사의 소녀가장 노릇은 다하면서 정작 멤버들은 활동 기간 동안 제대로 된 수익을 받지 못했다는 것. 막내 윤은혜는 2011년 TV 방송을 통해 "활동 기간 내내 수익이 0원이었다"라고 밝혔고, 2016년 한 인터뷰에서 심은진은 '수입도 수입이지만 아직까지 받지 못한 미수금까지 있음을 밝혔다. 심은진 직접 밝힌 베이비복스 탈퇴 진짜 이유 베이비복스 공식 음반 판매량만 해도 100만장이 넘어가고 당시 기사를 통해 밝혀진 중국, 태국 등지에서의 수입에 더해 국내 광고 개런티까지 합하면 수십억에 달했다. 이러한 막대한 수입에 대해 정산을 제대로 받은적이 없다는 건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다. 90년대 기획사 사장들이 어쨌다더라~ 식의 카더라 정보가 아니라 멤버들이 직접 밝힌 fact라는 것도 소속사와의 금전적인 문제가 얼마나 컸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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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문제 뿐만 아니라 활동 당시 베이비복스는 갓 스물이 된 어린 나이였지만 밤업소 행사를 다니는 것은 물론, 중국 활동 당시에도 나이트 행사 뛰는장면이 찍혀 일부 사이트에 조롱조로 올라오기도 했었다. 4집 활동 당시에는 중국 공연과 대한해협 횡단을 위한 제주도에서의 수영 연습, 각종 방송 촬영, 안무 연습까지 하루 수면 시간이 30분 남짓되는 혹사를 당했다. 당대 인기 가수들이 대개 베이비복스와 비슷한 살인적인 스케쥴을 보냈다고 반론할 수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정산도 제대로 안하면서 이런 가혹한 스케쥴을 제시한 것은 아무리 봐도 소속사의 문제다. 2004년에는 신장 개업한 미용실 사인회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소속사에 대한 문제가 수면위로 떠올랐고 활동 후반기에는(한창 미아리복스 파문이 일었을 당시) 3류 홈쇼핑 광고까지 떠맡아 하면서 이미지 관리는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는 소속사의 방침에 모두 혀를 내둘렀을 정도. 초창기 메인보컬이었던 이희진은 제대로 된 보컬 트레이닝도 받지못해 활동 내내 무대불안증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결국 이후 메인보컬로 교체된 간미연도 독학으로 보컬을 공부했다고 한다. 참고로 윤은혜는 베이비복스 활동 내내 원형탈모에 시달렸었다. 이는 간미연도 마찬가지.

거기다 활동 내내 실력보단 비쥬얼로 어필하는 섹시 가수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섹시미를 철회시킨다던' 5집 앨범 'Game Over'가 부진한 반응을 얻자 소속사는 수록곡 '가까이'로 정하고[49] 다시 노골적인 섹스 어필을 표방하려 했으며(가사 내용 "널 위해 준비했어 오늘 내 모든걸 가져가, 조금 더 가까이 가까이…") 베이비복스 단독 콘서트에서는 물랑루즈 퍼포먼스를 한답시고 선정적인 란제리 의상을 입고 나와 춤을 춰야했다.(미성년자 윤은혜를 제외했지만 간미연은 당시 겨우 21살이었다.) 당시 기자들에 의해 적나라하게 찍혔던 이희진의 노출 사진은 신문 1면에 보도되어 아직까지 구글링에 잡히는 상황이다. 베이비복스 멤버들은 당시 자신의 모습들을 '로봇'에 비유했고 본인들의 의사는 단 한번도 수용된적이 없다고 말한다.

정산 문제 만으로도 기획사로서의 기본이 갖춰지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지만 멤버들 사이에도 균열을 일으키게 한 건 이들의 재계약 시기였다. 심은진은 2016년 인터뷰를 통해 당시를 회상하며 아주 직접적으로 "사장님도 괴롭히고 매니저들도 힘들었다"라고 말했으며 2010년 강심장에 출연해 밝힌 바로는 심은진이 계약을 포기했을 당시 소속사 사장과 직원들이 "심은진이 리더를 하고싶어서 언니 둘(이희진, 김이지)의 하차를 요구했다"며 이간질해 멤버들의 사이를 갈라놓았다.[50] 당시 탈퇴보도 자료에서 심은진이 배반하는것 처럼 보도한것은 덤. 심은진 탈퇴 이후 윤은혜는 2005년 봄 계약종료 직전까지도 베이비복스 태국 스케쥴을 뛰었었다. 당시 윤은혜는 X맨 등에서 소녀 장사 이미지로 주가가 올라가던 상황이었는데 계약 종료끝까지 일해준 윤은혜가 재계약을 포기하자 부친까지 끌어들여 '윤은혜와 부친이 독단적으로 매니지먼트를 하고 싶어하는 입장'이라며 대놓고 쌩깐것처럼 보도했다.

이 모든 일을 겪는 동안 베이비복스 멤버들은 겨우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다.

7~8년을 이런 양심없는 양아치짓을 했지만 소속사 대표 윤등룡 사장은 2007년 2월 '그것이 알고싶다'에 출연해 베이비복스의 해체가 이하늘 때문이라며 항변했고, 물론 이하늘이 해체에 일조한것이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한들 방송 내내 시종일관 본인이 아빠인냥 행세하기에 이른다. 근데 더 소름끼치는건 그마저도 '베이비복스'를 울궈먹은 '베이비복스 리브' 홍보차 나온것이었다. 그전에도 윤은혜가 '궁' 등으로 스타덤에 오르자 스페셜 방송에 나와 자신이 윤은혜를 캐스팅했던 당시를 뿌듯해하며 인터뷰까지 했었다. 계약종료 당시 심은진은 회사의 압력에 못이겨 뛰쳐 나갔고 그런 심은진을 끝까지 언론 플레이를 통해 '배신자'로 만들려 했지만 그 시기 소속사 사장은 홈페이지에 베이비복스 멤버 다섯명이 모두 딸 같은 존재라며 말같지도 않은 실언을 했다. 멀쩡한 사람들 인생을 본인 돈벌이에 써먹은 것도 모자라 자신의 사무실과의 계약 관계가 끝났음에도 지속적으로 이들을 이용하는 건 도무지 봐줄수 없는 부분이다.

윤등룡 대표는 '베이비복스'라는 이름을 상표권 등록 신청했지만 다행히도 거절당했다. 그러나 베이비복스 2기로 꾸준히 우려먹었으며 3기까지 제작하려고 했으니 베이비복스를 해체후에도 가만두지 않고 있다. 베이비복스 2기를 처음 데뷔시킬 당시만 해도 팀명뒤에 '리브'자를 붙이고 활동했으나 1집이 망하자 2집에서 '리브'를 떼고 컴백하는 바람에 현재 음원 사이트에서 원조 베이비복스 노래를 들으려면 '베이비복스 1기'라고 검색해서 들어야하는 상황이다. 거기다 베이비복스 리브는 원조 베이비복스 노래를 하도 많이 리메이크 해서 방송국에서 가끔 베이비복스 BGM을 틀어줄때 마다 리브 노래가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또한 베이비복스가 가진 해외에서의 입지를 가지고 국내 여러 가수들을 데려다가 중국 진출에 나섰으나 역량 따윈 없는 콩가루 기획사 답게 모두 말아먹었고, 심지어는 이효리까지 꼬드켜 중국 진출 시킨다고 언플질 했으나 이효리 측은 단호하게 거절한 일화도 있다. 베이비복스가 이런 거지같은 기획사에서 그 정도로 성공한것은 어쩌면 기적같은 일이 아니었을지.

8 트리비아

  • 원래 팀명은 '베이비복스'가 아니라 '복스'였다. 그래서 1집 초창기 때는 '베이비복스'가 아닌 'V.O.X'로 소개된적이 종종 있었다. 1집 프로모션용 LP를 봐도 티명이 'V.O.X'로 기재되어 있다. 당시 인터뷰를 보면 '베이비'는 1집에서만 쓰는 서브 타이틀이라고 소개했고 '귀엽다, 상큼하다'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었다. 2집 이후에 '베이비'를 떼고 새로운 서브 타이틀을 붙이고 'ㅇㅇ복스'로 컴백할 예정이라는 카더라도 있었다. 하지만 팀명에 대한 계획은 자연스럽게 사라진 듯. 워낙 1, 2집 시절에 사건사고가 많아 팀명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듯
  • 당시 동료지간이었던 디바와 사이가 실제로 안 좋았다(...) 데뷔 초에는 그럭저럭 별 문제없이 동료로 지냈던 것으로 보이는데 99년 디바의 채리나가 탈퇴하고 나서 몇 번 충돌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2002년 KMTV 시상식에서 두 그룹간의 합동 무대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디바의 지니가 베이비복스와 방송을 하고 싶지 않다며 호텔로 잠적하는 일이 벌어져 기사로도 보도됐었다. 당시 디바는 케이블 방송에서 베이비복스에게 '두 번 다시 인사를 안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라는 식의 경고까지 했었다. 이들은 2011년에 되서야 강심장에서 만났는데 알고 보니 모 방송 녹화 중 간미연이 디바를 보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가 인사를 대충 하는 걸로 오해한 디바가 이들에게 한 소리를 했었는데 그 이후로 두 그룹간의 사이가 안 좋아졌던 것이라고. 이 방송에서 디바의 멤버 비키는 "왜 선배가 리허설하는데 졸아?"라고 말했는데 알고 보니 베이비복스가 디바보다 2개월 먼저 데뷔한 선배였다는 것이 알려져 모두 멘붕. 사실 두 그룹 모두 멤버 교체가 많았던 그룹이라 족보가 꼬이는 상황이기도 하고, 데뷔 1-2개월 차이에 선후배를 따지는 것도 애매한 상황이긴 하다. 어쨌든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준다고... 이들은 쿨하게 화해했다(?)
  • 베이비복스는 동생 멤버들이 언니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한다. 데뷔 당시 소속사 사장이 여성 그룹끼리는 충돌이 많을 거라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멤버들에게 직접 지시한 사항인데 이것 때문에 '군대식이다', '언니들이 동생들의 군기를 잡는다'라는 소문이 많았다. 하지만, 오히려 멤버들은 존칭을 쓰기 때문에 다툴 일이 없다고 밝혔다. 사실 하도 사람들이 군대식이니 어쩌니 말이 많아서 말을 놓을까도 시도해봤는데 너무 오랫동안 존칭을 사용해왔기 때문에 어색해져서 포기했다고 한다. 1집 때부터 함께 해온 김이지와 이희진은 초창기 때부터 무명 시절부터 고생도 같이 해오고 남다른 사이라 방송에서는 서로 존칭을 사용하지만 사석에서는 말을 튼 것으로 보인다.
  • 멤버 전원이 예능감이 그닥이다(...) 물론 이희진이 희자 캐릭터로 팬들 사이에서 반응이 좋았으나 정작 본인은 방송 울렁증이 있어서 예능은 주로 심은진, 간미연이 출연했다. 하지만 딱히 재미는(...). 후에 윤은혜가 x맨을 계기로 예능과 연기 두마리의 토끼를 잡았다만 그건 해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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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Discography

발매일앨범활동곡판매량가요차트최고순위
1997.7.00EQUALIZEHER머리하는 날, 남자에게50,000장(추정치)47위[51]
1998.9.15BABY VOX II야야야, Change206,221장3위[52]
1999.7.21Come Come Come BabyGet Up, Killer, Missing You218,946장1위[53]
2000.5.15WhyWhy, 배신155,864장1위[54]
2001.6.4Boyish StoryGame Over, 인형91,014장4위[55]
2002.4.24Special Album우연, Go[56]240,349장1위[57]
2003.4.3DEVOTION나 어떡해, 바램84,612장1위[58]
2004.4.16Ride WestXcstasy, Play Remix32,863장TAKE 7[59]

9.1 기타 앨범

  • 해외에서 발매한 라이센스 형식의 음반은 추가하지 않았음.
발매일형태앨범명비고
1999.1.29한정판앨범Net CD[60]
2000.3.22VCDShow Me Lovable Girls[61]
2000.10.1VCD2000 Collection[62]
2001.1.17DVD2000 Collection[63]
2002CD부산 아시안 게임 주제가[64]
2002.12.14헌정앨범전영록 30주년 헌정 앨범 <전설>[65]
2003.3.12EPGo - 1st Mini Album in Japan[66]
2002.9.16VCDBaby V.O.X Concert in Seoul[67]
2007.4.15베스트BEST ALBUM[68]

10 수상 경력

  • 1998년 SBS 가요대전 여자 신인상
  • 1998년 SBS 하이원 서울가요대상 인기 가수상
  • 1999년 SBS 서울가요대상 본상
  • 1999년 SBS 가요대전 10대 가수상
  • 1999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 30세 미만의 국민이 뽑은 10대 가수상
  • 1999년 KMTV 가요대전 본상
  • 1999년 KBS 가요대상 본상
  • 2000년 SBS 가요대전 프로듀서상
  • 2000년 SBS 서울가요대상 인기상
  • 2000년 KBS 가요대상 본상
  • 2000년 제7회 대한민국 연예예술대상 신세대중창가요부문 수상
  • 2000년 itv 한국최고인기연예대상 10대가수부문 본상
  • 2001년 KBS 가요대상 본상
  • 2001년 (주) 모델라인 주최 가수부문 '베스트 드레서' 수상
  • 2001년 제1회 애견문화인의 상
  • 2001년 itv 가요대상 청소년 부문 인기상
  • 2002년 SBS 가요대전 본상
  • 2002년 KBS 가요대상 본상
  • 2002년 MBC 골든디스크 인기 가수상
  • 2002년 SBS 서울가요대상 한류 공로상
  • 2002년 KMTV 코리안 뮤직 어워드 공로상
  • 2003년 SBS 가요대전 본상
  • 2003년 KBS 가요대상 본상
  • 2003년 SBS 서울가요대상 본상
  • 2003년 KMTV 코리안 뮤직 어워드 올해의 가수상
  • 2004년 태국 채널 V 어워드 '아시아 특별상'
  • 2004년 SBS 서울가요대상 한류공로상

10.1 가요프로그램 1위

Get Up
1999년 8월 3일 KBS 뮤직뱅크 MVP
1999년 8월 29일 SBS 인기가요 1위

Killer
1999년 10월 5일 KBS 뮤직뱅크 MVP
1999년 10월 31일 SBS 인기가요 1위

Why
2000년 6월 20일 KBS 뮤직뱅크 1위

우연
2002년 6월 9일 SBS 인기가요 1위
2002년 6월 16일 SBS 인기가요 1위 (2주 연속)

나 어떡해
2003년 6월 1일 SBS 인기가요 뮤티즌송

11 광고 모델 경력

  • 1999년 앞서가는 패션신도시 '르네시떼'
  • 1999년 햄버거 '하디스'
  • 2000년 롯데 아이스크림 '와'
  • 2000년 거짓말 탐지기 '트러스터'
  • 2000년 LG Logix
  • 2000년 인터넷 쇼핑몰 (한국 쇼핑 관광대사)
  • 2002년 유닉스 이온 헤어드라이기 (1년, 2억)
  • 2002년 그리에이트 셀렉티브 염모제 전속 모델
  • 2002년 엘지 텔레콤 (윤은혜 & 은지원) (2억)
  • 2002년 점프밀라노 (6개월 단발 1억)
  • 2002년 적십자 헌혈 홍보
  • 2002년 전국 동시 지방선거 광고
  • 2002년 에드원 청바지 (6개월 단발 1억)
  • 2003년 Plus Minus (심은진 단독)
  • 2003년 산도물산 A.S.A.P (계약금 2억)
  • 2003년 파이온텍 (3년, 2억 5천만원)
  • 2004년 디카 따우니 (Ddouni) 지면
  • 2004년 FOX ZONE
  • 2004년 안산 스타맥스 타워

11.1 해외 CF

  • 2000년 중국 기업 北京背背佳科技發展有限公司
  • 2000년 중국 스포츠웨어 업체 뻬뻬지아 CF
  • 2000년 중국 국영기업체 CF
  • 2002년 간미연 과일나라 중국 지면 모델 (1년, 2억 5천만원)
  • 2003년 중국 핸드폰 INNO 90 CF
  • 2003년 김이지 중국 SAMSUNG V4 Camera CF (3억 5천만원)

이외 추가바람.

12 노래방 수록 목록

항목 참고.
  1. 심은진을 제외한 4명은 이미 2004년 10월에 계약이 종료된 상태였지만 2005년까지 DR뮤직 측에서 매니지먼트를 했다.
  2. 1998년 창설되었다. 기수는 6기까지.
  3. 이 로고는 2002년에 열린 공모전에서 뽑힌 작품이다.
  4. 지금에야 5인조 이상 걸그룹이 대다수라지만 97년 당시 걸그룹 자체가 얼마 없던 가요계에는 파격적인 멤버 구성이었다.
  5. 리드 보컬 둘, 서브 보컬 둘에 래퍼가 하나인 구성은 요즘 걸그룹 구성의 원조로 볼 수 있고 1999년 중국 진출을 시작으로 태국과 동아시아 등지에서 크게 활약했는데 이는 현재 걸그룹들이 해외 시장에 진출해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6. 한국에서도 매 앨범마다 상위권에 오르며 꾸준한 인기를 누렸다.
  7. 이 중 간미연은 가수 활동과 병행하고 있지만 가수로서 최근작도 벌써 3년 전이고 최근 드라마 두 편에 카메오로 출연하며 배우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다.
  8. 사실, 베이비복스 곡들이 안무도 잘 구성되어있고 춤 대형도 가장 보기 좋다는 5인조 그룹이라서 유독 여학생들 장기자랑 시간에 인기가 많았었다. 심지어, 간미연이 안티로 고생했던 시기에도 장기자랑 때는 서로 간미연 파트를 하겠다고 싸움판을 벌이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고 한다. 욕할 땐 언제고?
  9. 물론, 조금 거슬러 올라가보면 바람아 멈추어다오를 불렀던 이지연(1970)이 있긴 하다.
  10. 베이비복스의 리즈 시절인 3~5집 앨범 프로듀서를 김형석이 맡았으며 이 때문에 김형석과 친분이 있는 김조한과 힙합그룹 엑스틴 등이 앨범 작업에 참여했다. 이 때문에 보컬은 물론 랩 퀄리티도 좋았다.
  11.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된 '비밀'에서의 한 소절이 전부.
  12. 이 때 <머리하는 날>을 이어 <비밀>이라는 노래로 아주 짤막하게 활동했었는데 후에 나오는 핑클이나 S.E.S.같은 부류의 비슷한 상큼한 노래였다. 그러나 활동을 시작하고 바로 며칠 뒤, S.E.S.가 등장하면서 조용히 접었다(...)
  13. 이들이 이희진을 폭행했다는 루머로 탈퇴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14. 훗날 어반자카파가 어쿠스틱 R&B로 어레인지하기도 했다. 이 리메이크판은 삼시세끼(...)에서도 BGM으로 쓰였다.
  15. 특히 <야야야>는 그 당시 군대에서는 독보적인 인기였다. 노래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군인들이 그리워할 여성미가 돋보이는 노래이다 보니 그 당시 압도적인 군통령이 되었던 시절이었다. 이 노래와 스타일이 겹치는 파파야가 바깥 세상과는 달리 군대에서 비정상적인 높은 인기를 끌었던 이유도 같은 이유이다.
  16. 여담으로 2집 작업 당시 주영훈이 애초에 베이비복스에게 주려던 곡은 엄정화의 <Poison>이었다고.
  17. 그러나 2집 후에 이가이가 탈퇴하고 팀이 재정비 되면서 이때 계획하던 밴드 노선은 사장됐다.
  18. 서울가요대상에서는 이들이 2집까지 발매했다는 이유로 사실상 신인 가수와 다름없었던 베이비복스를 인기 가수상으로 넘겼고 당시 듣도보도 못한 여성 솔로 가수 '유리(소녀시대, 의 유리도 아니고 R&B 가수 유리도 아니다)'가 신인상을 수상하며 큰 논란이 되었다. 당시 유리와 함께 신인상 수상을 했던 가수가 무려 90년대 레전드급 스타 '조성모', '김현정'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 유리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가 '네가 뭔데(...)' 정말 너가 뭔데였다.
  19. 한가지 모순되는 점은 2집 당시에는 김이지가 리더였다.
  20. 참고로 이가이는 과거 베이비복스 소속사 사장 윤등룡이 매니저로 나서 1990년대 초반 다른 예명으로 솔로 음반을 발표한 적이 있다.
  21. 물론 그동안의 여성그룹 중에서 최초로 섹시 컨셉을 차용한 건 아니다. 다만 이전에 섹시 컨셉을 표방했던 여성 그룹 '수'나 '희자매' 등은 20대들로 구성된 "숙녀 그룹"이었지 10대 멤버들이 주를 이루는 "걸그룹"과는 엄연히 다르게 봐야 하는 부분이다.
  22. 가수 김현성의 곡을 리메이크했다.
  23. 당시 H.O.T. 팬덤 규모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아직도 간미연이 자작극했다고 아는 사람이 은근히 많다.
  24. 4집은 첫달 판매량이 3집보다 높았다. 또 발매 첫주 신나라 레코드 차트 3위까지 올랐었다. 나름 팬덤층이 단단해졌다는 걸 보여주는 예.
  25. 장소의 특성상, 집계되지 않은 관객수까지 포함하면 12,000명 정도로 집계된다고 방송에 나왔다.
  26. 이후 베이비엔젤스 팬덤의 남녀 성비는 거의 정확히 5:5 정도.
  27. 사실 그 이전에도 여학생들은 베이비복스를 신랄하게 까대면서 장기자랑에선 항상 베이비복스 춤을 췄었다. 특히 메인이었던 간미연 파트를 쟁취하기 위해 쌈박질을 벌이는 것도 쉽게 볼 수 있던 광경.
  28. 이 영화는 촬영 한다 안한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사스 때문에 2003년 쯤 아예 무산되었다.
  29. 어쨌든 '제2의 베이비복스 프로젝트'는 2007년에 되서야 '베이비복스 리브'로 실현된다(...)
  30. 걸그룹이 전성기가 1막, 2막으로 나뉜 첫 사례. (기복이 있었다는 얘기로도 표현이 되지만...)
  31. 강원래의 아내 김송이 소속되어있던 3인조 혼성그룹이었다
  32. 당시 김창환은 본인 회사가 아닌 가수에게 곡을 주지 않고 있었는데 베이비복스측이 예전 노래라도 달라고 부탁해서 '우연'을 리믹스해서 줬다고 밝혔다. 이 노래가 히트하자 다음 앨범에는 프로듀싱을 맡았다.
  33. 사실 1위후보 두번째 주에, 음반 판매량이 베이비복스보다 3분의 1 수준이었던 컨츄리 꼬꼬에게 밀려 1위 수상에 논란이 있었다. 그 다음주부터 2주간 1위를 수상했고 3주째에 드디어 왕중왕에 도전한다고 팬들이 흥분되있던 상태였는데 갑자기 막방을 선언하면서 안습(...)
  34. 해당 영화는 제작자가 간미연과 이종수, 정보석 같은 인기 연예인을 섭외해 이들을 앞세워 수십억대의 투자금을 모은 뒤 잠적하는 황당한 대형 사기극이었다. 이 때문에 베이비복스 측과 출연자들은 큰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35. 이 가요제에서 뽑힌 인재가 SM 엔터테인먼트 소속가수 장리인이었다. 장리인은 가요제에서 입상한 뒤 DR뮤직과 계약을 맺고 트레이닝을 받았지만, 그의 부모가 계약을 일시적으로 풀어줄 것을 요구했고 그 틈을 타서 자신의 신분을 위장한 뒤 SM 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한 다음 2007년 데뷔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소속사 DR뮤직은 SM 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었다. 원조둘기?
  36. 허나 일부 팬들은 베이비복스의 개성이 사라졌다며 별로 안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37. 2006년 간미연이 '경제야 놀자'에 출연해 땅 문서를 감정받자 알게된 충격적인 결과였다.
  38. 유니버설 레코드 산하의 현지 힙합 뮤지션의 음원을 정식으로 샘플링하는 건 한국 가요계에서 처음있는 일이었다. 당시 무단으로 표절하거나 카피하던 일이 비일비재했던 시절이라 당연히 이하늘도 베이비복스 역시 비슷한 루트로 가져온것이라고 믿었던 듯.
  39. 원래는 2주였는데 겨우 늘린게 고작 1달.
  40. 이 관찌엔이라는 가수는 2003년부터 DR에서 키워내던 가수였다. 그의 첫 데뷔작으로 간미연과 듀엣곡을 녹음해 중국 콘서트에서도 선보이고 홍보도 했었지만 데뷔가 치일피일 미뤄지더니 어느순간 데뷔도 못해보고 잊혀졌다. 그때 이 둘이 녹음했던 노래가 플라이 투 더 스카이와 거미가 부른 '사랑해요 우리'다.
  41. 7집 수록곡.
  42. 비슷한 색상인 NRG 팬덤과의 구분을 위해 5.5집 부터는 공식 로고가 담긴 풍선을 사용.
  43. <우연>의 첫 무대 역시 팬미팅 현장에서 선보였다.
  44. 빠따 좀 맞자는 표현은 해당 프로그램에서 이하늘이 즐겨 사용하던 표현이었다. 반대로 뭔가 칭찬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는 '국밥 한 그릇 드시고'라는 표현을 썼다.
  45. 2PAC의 어머니가 주체가 된 아마루 레코드에서 우리의 허락 없이 곡을 갖다썼다며 법적 대응을 운운했지만, 2PAC의 곡들은 저작권이 여기 저기 갈라져 있는 상태였고 엑스터시는 정당하게 저작권을 행사하여 만든 곡이었다.
  46. 당시에는 문희준도 무뇌충이라고 비아냥거림을 당하던 시기였으니 이 머저리같은 빠순이들이 확실한 자충수를 뒀고 문희준 역시 간미연 못지 않게 테러를 당했다.기레기들의 이간질로 인해 간미연과 문희준은 의도치 않은 패자뿐인 싸움을 하고 말았다.
  47. 일단 이하늘 본인은 DJ DOC의 'Run To You' 를 무단 샘플링을 하였으며, 비난을 피하기 위해 방송에서 대놓고 거짓말까지 하였던 전적이 있다.
  48. 요즘 같으면 당연히 감방에 보낼 일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세계적으로 테러와 관련해서 매우 민감한 시대다.
  49. 팬클럽의 공개 성명으로 후속곡은 <인형>이 되었다.
  50. 심은진은 그래도 더 잘될 수 있는 이들을 괜히 선동하고 싶지 않아서, 탈퇴 고민 당시에 동생들에게만 의견을 잠시 내비췄을 뿐. 멤버들에게도 탈퇴를 결정한 당일날 얘기했는데 이 점을 이용해서 소속사는 이간질을 한것이다.
  51. 1997년 11월 마지막주 SBS TV가요20
  52. 1998년 11월 첫째주 SBS 인기가요
  53. 뮤직뱅크(8월 첫주, 10월 첫주), 인기가요 1위(8월 마지막주, 10월 마지막주) 수상)
  54. 6월 첫주 뮤직뱅크 1위
  55. 2001년 6월 셋째주 뮤직뱅크
  56. 정식 활동곡은 아니다. 그리고 간미연이 솔로 1집에 솔로 버전으로 다시 수록했다.
  57. 2002년 6월 2~3주 SBS 인기가요 1위
  58. 2003년 6월 첫주 SBS 인기가요 뮤티즌송
  59. 2004년 5월 둘째주 SBS 인기가요
  60. 2집 'BABY VOXⅡ' 발매 당시 보너스 영상으로 수록되려던 게 무산되고 그 영상들을 따로 추려서 발매한 보너스 형식의 앨범이다. 1집, 2집 수록곡도 반반씩 수록.
  61. 2~3집 뮤직비디오와 CF 촬영현장, 활동 영상등을 담은 VCD.
  62. 4집 활동 위주로 제작된 VCD. 스킨스쿠버 하는 모습도 들어가있다. Show Me Lovable Girls와 비슷한 형태의 영상집.
  63. 동명의 VCD를 DVD로 발매.
  64. 부산 아시안 게임 주제가로 녹음한 박근태 작곡의 'We Are'이 수록된 프로모션 앨범. 이 음원은 정식 발매된적 없지만 프로모션 앨범으로만 배포되었다. 정식 발매 음반도 아니고 프로모션반이 있다는 존재만 알려졌다.
  65. 4번 트랙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를 커버.
  66. 일본 만화 '플라토닉 체인'에 타이업 됐던 2002년 스페셜 앨범 수록곡 'Go'를 일본어로 번안하여 발매한 일본 미니앨범. 일본에서 정식으로 발매한 유일한 앨범이다. avex 레이블에서 발매되었다고 하는데 확인불가
  67. 8월 15일에 있었던 단독 콘서트를 영상화해서 발매. 2CD.
  68. 태국, 일본 등지에서만 발매된 베스트 앨범. 원래 한국에서도 발매될 예정으로 예약 주문까지 다 받아놓은 상태에서 발매가 취소되며 한국 팬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겼다. 2012년에는 이 베스트 앨범을 다시 내달라는 팬들의 서명 운동도 있었다. 이 베스트앨범은 CD+DVD+포토북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CD 수록곡은 히트곡 순이 아니고 소속사측에서 정한 엉뚱한 트랙리스트라 딱히 베스트라는 느낌은 안든다. 그러나 2004년에 녹음된 미발표 곡 'FIRE'(심은진&플로스피 듀엣곡)가 수록되어 있고 DVD에는 뮤직비디오 전곡이 고화질로 수록되어 있어 팬이라면 만족할만한 구성. 포토북도 미공개 사진이 다수 수록되어있다고. 다만 해외에서만 나온거기도 하고 물량도 없어 국내에도 소장한 팬이 몇 없다. 자세한 사양은 http://bbvforever.pe.kr/xe/discography/1029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