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사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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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田淸子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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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달수?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의 2남 1녀 중 막내. 1969년 4월 18일생.

미혼 시절의 이름은 노리노미야 사야코(紀宮淸子), 신분은 내친왕(內親王)[1]이었다. 2005년 11월 15일 평민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와 결혼, 내친왕(황족)의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었다.

외모로 인하여 (특히 젊은 시절 미인이었던 어머니와 비교되어) 네티즌들 사이에는 종종 웃음거리 대상으로 취급받지만, 선량한 성품과 원만한 대인관계로 호평받는 인물이다. 외모지상주의로 인한 과소평가,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케이스.[2]

2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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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4월, 사야코 공주를 낳고 궁내청 병원에서 퇴원하는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 황태자비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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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미치코 황태자비가 찍은 후미히토 친왕과 사야코 공주. 그런데 훗날 후미히토의 큰딸이 보인다?

아들만 둘이던 아키히토 황태자의 첫 딸이라 많은 사랑을 받았다. 9살 위인 큰오빠 나루히토 친왕은 물론이고, 5살 위인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 역시 어린 여동생을 몹시 귀여워했다고. 일본 황족들이 다 그러하듯 가쿠슈인에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졸업했다. 다만 가쿠슈인 유치원에 입학하기 전의 1년 동안, 다른 민간 유치원에 다녔다. 언젠가는 시집가서 출가외인(出嫁外人)이 될, 게다가 평민이 될 딸이라는 생각에 그런 듯.

어릴 적엔 너무나 귀한 장손이라 도리어 난폭했던 큰오빠 나루히토 친왕이나 천성적으로 활달한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과는 달리,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황족이라도 어린 나이이며 또래의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로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조카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처럼 상당한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1977년부터 1987년까지는 매년 어머니 미치코 황태자비와 짧은 여행을 다녔다. 이는 당시 모진 시집살이로 고통을 받고 있었던 미치코 황태자비에게도, 학교에서의 괴롭힘으로 힘들었던 사야코 공주에게도 위로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자라면서는 점점 부모의 공무(公務)에 동행하는 모습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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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를 졸업하는 사야코 공주. 이후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를 거쳐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일어일문학과에 진학했다.

3 성년기

1989년 4월 18일, 만 20세로 성년이 되었다. 축하 행사도 예정되어 있었으나 그해에 할아버지 쇼와 덴노가 사망하여, 다음 해 3월로 연기되었다.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했다. 성적이 우수하여 주위에서는 대학원 진학도 권유했으나, 사야코 공주는 조류 연구소 근무를 택했다. 야마시나(山科) 조류 연구소에서 비상근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주 2회의 통근 시에는 스스로 만든 도시락을 가져가서 동료 연구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고.[3] 헤이본샤(平凡社)에서 출판된 《일본동물대백과》 중 '물총새' 항목은 사야코 공주의 작품이기도 하다.

일본 황족들 중에서 일을 하여 급여를 받은 인물은 사야코 공주가 최초였으며, 연구소에서 받은 급여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모아두었다고 한다. 사야코 공주는 돈을 잘 쓰지 않아서, 궁내청 측에서는 그녀에게 지급하는 금액을 줄였을 정도라 한다. 일 좀 해라, 황족 니트들이여

그 외에 안내견 육성과 자원봉사 등에도 흥미가 많다고 한다. 를 좋아하며, 만화책 및 애니메이션도 좋아한다고. 영어, 요리, 일본무용 등 특기도 많다고 한다. 일본무용의 경력은 20년이 넘어,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황족으로서 국내외의 공무 활동도 꾸준히 했다. 1997년에는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여 일본문화센터 개관식에 참여하기도 했다.[4]

4 가족들과의 좋은 관계

사야코 공주는 아버지 아키히토 덴노와 어머니 미치코 황후가 몸이 아플 때 열심히 그 곁을 지켰으며, 특히 시집살이로 모진 고통을 겪은 어머니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1993년 실어증에 걸려 쓰러졌던 미치코 황후를 내내 간병했기에, 미치코 황후가 이듬해에 회복되자마자 한 말이 "사야코."였다고. 미치코 황후는 하나뿐인 딸을 시집보내며 "사야코는 내가 울적해 있을 때 곁에 다가와서 위로해 주는 딸이었습니다. 나의 친정어머니[5]께서 그랬던 것처럼, 나도 시집가는 딸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못할 것 같습니다."라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작은올케 키코 비와는 같은 가쿠슈인 출신이어서, 키코 비가 황실로 시집오기 전부터 친하게 지냈다. 조카인 마코 공주카코 공주고모인 사야코 공주를 잘 따랐다고 한다.

착하고 성격 좋기로 소문났다. 상냥하고 친절하며 의지되는 성품이라고. 어머니를 간병한 에피소드나, 학창 시절에 황족(특권계층)이라는 이유로 심한 이지메를 당했지만 꿋꿋이 이겨낸 것, 후미히토 친왕이 황족 모임에서 시녀를 희롱하다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꾸짖음을 듣자 오히려 화를 내어 큰 싸움으로 번질 뻔했을 때[6], 두 오빠를 말린 것이 사야코 공주였다는 이야기 등등. 사야코의 성품이나 일화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나 루머가 단 하나도 없는 것으로 미루어 허언은 아닌 듯.

5 요시키와의 만남과 약혼

남편이 된 구로다 요시키는 도쿄 도청에서 근무하고 있는 평민인데, 사야코 공주의 작은오빠인 후미히토 친왕과는 가쿠슈인 동창이며 절친한 친구이다.[7] 자연히 요시키와 사야코 공주는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을 것이다. 이후 2003년 후미히토 친왕이 주최한 테니스 시합에서 두 사람은 재회하여 사랑을 키우기 시작했다.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사야코 공주의 사정 때문에, 주로 궁성 내에서 데이트를 하거나 전화이메일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2004년 12월 30일 약혼을 발표했다. 본래 약혼 발표는 11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니가타 현의 지진과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高松宮喜久子) 비[8]의 사망으로 인해, 2차례나 미루어졌다.

6 사야코 공주의 결혼이 일본에 미친 영향

덴노의 딸이 시집가는 것은 무려 45년 만의 일[9]이어서, 일본열도는 오랜만의 경사에 들떴다. 한 경제연구소의 분석에 의하면, 사야코 공주의 결혼식이 결혼 관련업계에 미친 파급효과가 무려 1,160억 엔(약 1조원)에 이른다고.

참고로 요시키와 사야코 공주의 결혼은 양쪽 다 만혼에 해당한다. 요시키는 40세, 사야코 공주는 36세. 사야코 공주의 고모들이 모두 17~21세에 시집간 것과 비교해 보면, 시대의 변화도 있지만 대단히 늦은 셈. 그러나 사야코 공주는 평소부터 "내 결혼 시기는 내가 정하겠습니다."라며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결혼할 것임을 밝혔고, 많은 일본 여성들은 그녀의 태도에 깊이 공감했다고 한다. 이는 최근 일본 여성들의 만혼 풍조를 반영하고 있다고 AFP통신에서는 전했다.

7 결혼에 따른 사야코 공주의 변화

결혼과 함께 사야코 공주의 신상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먼저 황족의 신분을 잃고 남편을 따라 평민이 되었으며, 이름도 미혼 시절의 '노리노미야 사야코'에서 남편의 성씨를 따라 '구로다 사야코'로 바뀌었다. 운전면허도 취득했으며, 처음으로 은행 통장도 만들었다. 호적과 선거권도 가지게 되는 등, 일반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들이 주어졌다. 결혼을 앞두고서는 일반 가정에 가서 요리를 배우는 등 신부수업도 받았다. 품위 유지비로 1억 5,250만 엔(약 13억 2,000만 원)의 돈도 받았다.

본래 황실의 결혼식은 궁성에서 치러지는 것이 전통이었으나, 요시키와 사야코 공주의 결혼식은 데이코쿠(帝國) 호텔에서 치러졌다. 약 150명이 초대되어 간소한 티타임 형식으로 치러진 이 결혼식에는, 요시키의 상관인 천하의 개쌍놈 이시하라 신타로도 초대되었다. 처음으로 황실의 결혼식을 맡은 호텔 측에서는 긴장하여 만반의 경비와 보안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하객들의 사진을 일일이 입수하여 대조했다는 소문도 있으나, 호텔 측에서는 "손님에게 큰 실례"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한 하객의 말에 따르면 "결혼식장에 올 때 청첩장 봉투를 꼭 지참하라는 당부가 있었습니다. 봉투에 적힌 주소와 이름이 명단과 일치하지 않으면 입장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한다.[10]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 및 민영방송 5사는 대대적으로 결혼식을 중계하여 방송했다. 사야코 공주의 막내 고모인 시마즈 타카코[11]가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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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에서. 일본 황실의 전통에 따라, 사야코 공주는 신랑 요시키와 함께 나란히 걷지 못하고 3발자국 뒤에서 따라가야 했다.

참고로 사야코 공주의 웨딩드레스는, 어느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코스프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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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코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한 큰오빠 부부,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 황태자비. 마사코 황태자비는 시누이의 결혼식에 웨딩드레스와 비슷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와서 비판을 받았다.[12]

8 결혼 후의 생활

비상근으로 근무하던 조류 연구소를 그만두고, 한동안 전업 주부 생활을 했다. 궁성과 구로다 본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신축 아파트를 구입했으나, 이듬해 아파트가 완공될 때까지 임대아파트에 임시로 거처해야 했다. 신축 아파트는 도쿄의 주택치고는 드물게 숲과 맞닿아 있어 외부에서 훔쳐보기 어려우며, 안전과 사생활 보호가 철저한 집이라서 선택했다고.[13]

2008년 4월에는 친정 부모의 결혼기념일을 구로다 자택에서 축하했다. 또한 2009년 12월에는 남편 요시키와 함께 황실 일가의 모임에도 참석하는 등, 결혼 이후에도 친정과 친밀하게 교류하고 있다.[14]

2012년 4월 26일에는 이세신궁의 임시 제관(祭官)으로 취임했다. 1988년부터 제관을 맡아 온 넷째 고모 이케다 아츠코[15]가 고령으로 쇠약해졌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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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신궁의 제관으로 활동하는 사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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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코의 티아라. 미키모토 사에서 제작되었다. 일본 여성 황족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예장에 갖추는 티아라는 모두 국비로 지출되어, 여성 황족이 결혼으로 황적에서 이탈하면 국고에 반납된다. 하지만 사야코의 티아라는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의 사비용에서 지출해 비용을 치른 것으로, 사야코의 사유재산.

8.1 비판 (혹은 의혹)

다만, 2014년 들어서 남편 구로다 요시키와는 별거하면서 친정(황궁)에 살고, 세금을 몰래 타 쓴다는 이야기가 일본인들 사이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행사 때는 남편을 불러서 다정한 부부인 척하고, 결혼 후에 본인이 집안일을 하지 않고 남편이나 친어머니가 하녀처럼 일해준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일반인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으면서 언론에는 적응한 척 위장보도한다고 욕을 엄청 듣고 있으며, 요시키의 이름만 빌린 위장 결혼설도 떠도는 중이다.

사야코 공주는 결혼 전까지만 해도 못생긴 외모(…) 외에는 이미지가 굉장히 좋았는데, 결혼하고 시간이 흐른 후로는 이런 소문들로 인해 2ch와 황색 언론 중심으로 이미지가 추락하고 있다. '로얄 도부스 니트'[16], '세금 도둑', '부사야' 등의 별명들도 생겼다. 서녀 설까지 나오면서[17], 황족도 아닌 주제에 황족 행세한다고 또 까이고, 그동안 알려졌던 착하다는 이야기도 사실은 거짓말 아니냐는 이야기가 돈다.

일본인들은 그냥 씹을 거리가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성격 좋고 평판이 좋았던 사야코가 세금 도둑이라는 소문이 충격인 것인지, 이제는 하다하다 어머니 미치코 황후의 잘못된 교육이 문제가 아니냐는 논란도 있다. 사야코가 어린 시절 왕따를 당할 때 다닌 미치코 황후와 함께 다녔던 여행에서 고급 숙소만 골라 머물렀던 것까지 다시 트집을 잡혔다.
  1. 덴노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한다. 단 현행 황실전범이 제정된 1947년 이전에는 4대손까지를 내친왕, 5대손부터를 여왕이라 했다. 남자는 친왕/왕.
  2. 사실 작은오빠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과 더불어, 미치코 황후의 친자식이 아니라 아키히토 덴노가 다른 여성과 내통하여 낳은 혼외자식이라는 카더라 통신이 일본 내에 암암리에 퍼져 있는 듯.
  3. 후미히토 친왕의 장녀 마코 공주도, 고모 사야코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박물관에서 비상근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4. 원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황태자 부부를 초청하고 싶었으나, 일본 궁내청에서는 사야코 공주를 대신 보냈다. 황태자 부부, 특히 마사코 황태자비는 아들 출산에 전념해야 한다는 이유로.
  5. 쇼다 후미코(正田富美子). 후미코의 친정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옛 화족(백작) 가문이다.
  6. 이때 새댁이었던 키코 비는, 남편의 포악한 행동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7. 말이 평민이지, 가쿠슈인을 다니며 왕자와 친구로 지냈을 정도이면 구로다 가문 역시 상당한 집안이다.
  8. 아키히토 덴노의 숙모. 다이쇼 덴노의 3남인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의 아내.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손녀이며, 외가는 방계 황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이다. 키쿠코 비는 자녀를 낳지 못하여, 대신 조카손녀 사야코 공주를 친손녀처럼 귀여워하며 애정을 쏟았다.
  9. 1960년, 쇼와 덴노의 5녀 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가 시집갈 때.
  10. 다만 원래 일본에서는 결혼식에 참석할 때 청첩장은 필수적으로 지참해야 한다.
  11. 쇼와 덴노의 5녀. 자매들 중에서 유일하게 행복하고 무난한 삶을 살아간 인물로, 화려하고 활달하며 떠들썩한 성품이라고 한다.
  12.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의상 선정 탓에, 이 해프닝을 마사코 황태자비가 당한 시집살이 일환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일본 황실에서는 서양식 의복을 입기로 한 자리에 마사코 황태자비에게만 기모노를 입고 오라든지 해서 마사코 황태자비 혼자 잘못된 드레스 코드에 맞추고 웃음거리가 되게 하는 일들을 상당히 자주 했다. 이러한 심술궂은 시집살이는, 마사코 황태자비시어머니미치코 황후도 젊은 시절 당했던 일이었다. 미치코 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참조.
  13. 북향이라 미치코 황후가 반대했다는 소문도 있다.
  14. 사실 말이 좋아서 친밀한 교류지, 황실 일가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여지없이 달려와주는 해결사나 다름없다. 일례로 아키시노노미야 일가가 히사히토 친왕 하나만 남겨놓고 모두 집안을 비웠을 때 마사코 황태자비아이코 공주와 같이 놀게 하면서 돌보려고 히사히토 친왕을 데리러 왔더니만, 아키시노노미야 쪽 시종들이 안 된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통에 사야코가 달려와서 중재해야 했다. (...) 이미 오래 전부터 두 오빠의 사이가 험악해질 때마다 이걸 말리는 건 사야코 공주의 역할이었으니,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15. 쇼와 덴노의 4녀. 바로 위의 언니인 다카츠카사 카즈코가 제관직에서 퇴임한 후, 카즈코의 뒤를 이어 이세신궁의 제관이 되었다.
  16. '도부스'는 '아주 못생긴 여자'를 일컫는 말, '니트'는 '취업 의욕이 없는 자발적 실업자'를 일컫는 말.
  17. 진지한 설은 아니고, 젊은 시절 미모로 이름났던 미치코 황후와 사야코의 외모가 너무 달라서 도는 가십이다(…).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 역시 일본 황족치고는 키가 지나치게 크다고(178cm) 서자설이 돌았다. 미치코 황후의 키가 꽤 큰 편이라는 건 넘어가자 시집올 당시 쇼다 미치코의 키는 161cm였는데, 당시 일본 여성치고는 굉장히 큰 키였다. 그리고 친정 부모와 형제들은 그보다 더 컸다.